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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내겐 엄마 같았던 할머니.

어린 나를 집에 두고 학교에 나갔던 엄마를 대신하여
엄마 역할을 대신했던 할머니께서 세상을 떠나셨다.

이젠 배우 이동욱으로 유명한 동욱이가
어릴 적 우리집에 놀러왔을 때 
옆에 앉혀놓고 잘생겼다며 이것저것 물어보시던
그리고 나선 얼굴에 빛이 났다며 소녀처럼 좋아했던 내 할머니.

그래도 동욱이가 나왔던 여인의 향기는 보고 돌아가셨구나. 
텔레비전 한가득 동욱이 얼굴이 나오는 걸 무척 신기하게 생각했었는데.
 
빈소는 서울 도봉산 성당
발인은 12월 5일(월) 오전 8시 30분입니다.

할머니의 명복을 기도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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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올 초 시크릿가든의 열풍으로 전국적으로 현빈앓이가 시작됐을 때, 스쳐지나가는 말로 그랬던 적이 있다. “현빈은 실제로 보면 잘생겼을까? 실물이 궁금하긴 하다.”

사실 기자로 일하는 동안 웬만한 연예인은 다 봤다고 생각했는데 현빈과 만난 적은,적어도 내가 기억하기론 없었다. 그랬더니 내 친구 꼭 찍어서 말해주길. “너 **신문사에서 있을 적에 신문사 옥상에서 현빈봤다고 했잖아. ^^ 그걸 까먹니.”

아, 그랬구나. 잊고 있었다. 2005년에서 2006년으로 바꿨던 겨울이었다. 선배 기자가 인터뷰가 있는데 날도 춥고 바람도 심해 옆에서 보조로 따라 붙으라고 나를 데리고 옥상에 올라가셨지. 당시 나는 햇볕이 강하게 쏟아졌고 눈이 부셔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로 인터뷰 할 주인공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반갑게 인사하고 말았다.

“어머, 동욱아!!!”

나는 왜 그때 현빈씨를 이동욱으로 착각했던 것일까. 지금 생각해도 의문이다. 햇볕이 직각으로 똑 떨어지는 바람에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기 때문일까. 그래도 그렇지. 그런 말도 안되는 실수를. 그렇지만 현빈씨는 까도남답게 쓱 보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사실 그게 더 민망하긴 했다.

대학시절 먼발치에서 동욱이를 본적이 있긴 했다. 회전목마라는 드라마를 찍고 있을 당시 우리학교에 이동욱이 지금 와서 촬영 중이라는 이야기를 친구에게 들었다. 아, 그래? 라며 쿨하게 반응하고 가방을 싸고 신문사실로 가던 중에 정말로 촬영 중인 동욱이를 보게 됐다. 카메라와 스탭들 뒤로 빼곡히 서서 구경 중인 학우들을 보며, 무엇보다 그 중심에 있던 동욱이를 보며 친구가 아닌 이젠 정말 연예인구나, 하는 생각에 발길을 이내 돌렸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드디어 군대에 간 녀석. 짧게 자른 머리를 하고선 팬들에게 입소 전 마지막 인사를 하는데, 스포츠머리를 하고 다니던 중학교 시절 당시의 모습이 생각이 나 아쉬움보다는 반가운 웃음이 먼저 나왔던 그때도 생각이 난다.

그로부터 2년 뒤 군대에서 박정현 누나 팬이 되었다는 멘트와 함께 동욱이가 돌아왔다. 제대 후 바로 드라마로 얼굴을 비추기 시작했는데, '여인의 향기'라는 주말 드라마였다. 그러나 난 본방사수를 하지 못했다. 주말 저녁에는 K리그 경기가 열리는 날이니 볼 수가 없었고 첫방을 놓치니 이후 회차부터는 흐름을 이해하지 못할 듯 해 안보게 되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했던 건, 처음부터 보지 못한 드라마였음에도 주인공의 처지에 절로 몰입이 된다는 사실이었다. 제가 이 회사 사표 썼거든요, 라는 말과 함께 눈물을 뚝뚝 흘리다 부장에게 개자식이라 외치며 사표를 던지는 연재의 모습을 보며 나도 함께 눈물이 그렁그렁. 그리고 이내 뚝뚝뚝.

그 나이의 여자들은 늘 그랬다. 하고 싶은 것보다 하지 못하는 것들이 더 많았고 한 달 번 돈을 쪼개서 적금과 생활비와 문화비로 나눠야만 했고 다음 달에는 소비를 줄이겠다고 지키지 못할 다짐을 했고. 애인이 없으면 뭔가 심각한 문제가 있는 여자가 아닌지 오해를 받아야했고 그렇게 혼자 늙어가는 딸이 걱정돼 결혼정보회사의 도움을 받자며 심각하게 이야기하고.

연재의 나이를 향해 가고 있던 나로서는 장면 하나 하나, 대사 하나 하나가 가슴에 와 닿더라. 그렇게 해서 나는 여인의 향기의 열혈 애청자가 되었다. 무엇보다 그 드라마가 갖고 있는 미장센이 좋았다. 첫사랑 동욱이가 나오는 드라마라서가 아니라.

한데 그 드라마를 보며 나는 다시 한 번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저 주인공의 이름은 강지욱인데, 자꾸만 내가 알고 있던 이동욱이 튀어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캐릭터의 몰입도가 대단했기 때문에? 아니면 어쩌다보니 실제의 자신과 비슷한 캐릭터를 연기하게 되서?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내 오랜 친구와 만난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가장 좋았던 장면은 오키나와에서 연재와 지욱이 이까스미 야끼소바를 나눠먹는 장면이다. 오징어먹물이 입과 치아를 덮었을 때 서로의 모습이 재밌어 두 남녀가 깔깔대고 웃는데, 그때 동욱이가 보여주던 웃음은 연기가 아니었다. 그래, 친구들과 즐거울 때 저런 표정으로 웃곤 했지. 그래서 기억은 참 신기한 존재인 거다. 오랫동안 보지 못했음에도 찰나의 순간, 내가 기억하던 장면이 겹칠 때면 이렇게 각인된 기억이 봉인해제되니까.



그러면서 나는 나만의 버킷리스트를 만들기 시작했다. 덮어두었던 토플책을 찾았고 기타강습을 준비했고 줄넘기를 다시 시작했고. 그리고 내 친구 동욱이를 꼭 한번 만나보기도 추가됐다. 준수와 데이트하기 미션에 성공한 뒤 버스에서 그 문장에 줄을 긋던 연재의 모습을 보고 나서부터였다.

하지만 생각보다 빠르게 나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가 이루어졌다. 그것은 놀랍게도 동욱이와 다시 만나고싶다는 목록이었다. 더욱 신기한 것은 나 역시 연재처럼 방송국의 도움을 받아 동욱이와 해후하게 됐다는 거다. 놀라운 것들로 가득차있기에 Wonder-Ful이라던데,  정말로 그랬다.

만남 전날 나는 자정을 훌쩍 넘길 때까지 졸업앨범을 시작으로 함께 찍은 사진, 일기장, 카드 등을 찾아 챙겼다. 그런데 정작 내가 선물로 줄 건 아무 것도 없더라. 갑자기 이뤄진 급만남이었기에 정말로 준비된 선물이 없었다. 그래서 새벽 1시에 컴퓨터에 앉아 옛날이야기를 시작으로 최근의 드라마를 보며 느낀 생각들을 편지로 쓰기 시작했다. 그 새벽에 손글씨는 무리였던터라. 그리고 나서 내가 잠자리에 든 시간은 새벽 3시 반이었고 2시간 반만 자고선 약속장소인 방송국에 가야만 했다. 어찌나 피곤하던지. 드라마 종방 때까지 내내 이렇게 생활할텐데 어떻게 버텨내는 것일까. 그래서 요즘들어 자꾸만 퀭한 얼굴로 나오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들기도 했다.

VJ분과 먼저 만나 동욱이의 어린시절 이야기를 해줬는데, 이미 블로그에 썼던 내용들과는 별반 차이 없던 이야기들을 해드렸다. 그래도 이번에 동욱이와 관련된 물건들을 찾으면서 다시 찾은 기억들이 몇개 있다. 내 친구가 러브레터를 보내면 그래도 답장은 해주던 참 예의바른 아이였단 거. 비록 연습장을 북 찢어서 준 답장이었지만 그 자체만으로 고마운 거니까. 가정시간에 만든 샌드위치를 가져다줬더니 정말 맛있게 먹었다면서 그동안에 보여줬던 반응 중에서 가장 뜨겁고 고마웠던 반응이었다는 거. 동욱이네 반 포청천에서 장난으로 러브레터를 보냈을 때는 사람 마음 가지고 그렇게 장난하는 거 아니라면서 어른스럽게 또 따끔하게 훈계했던 거.



PD님이 내게 묻기도 했다. 실제의 이동욱은 어떤 사람이냐고. 못 본지 꽤 됐지만 기억 속 동욱이라는 먼저 말 걸기는 다소 어렵지만 일단 친해지면 끝까지 가는, 가슴 뜨겁고 끈끈한 사람이었다. 키가 작고 약한 친구를 괴롭히는 까불이들이 있으면 가만히 지켜보다  그만하라는 한마디로 제압하는 정의의 사도이기도 했으며 성별에 상관없이 약한 자들을 먼저 생각하고 보호해주던 사람이기도 했다. 가족을 참으로 아꼈으며 리더십이 뛰어났다. 또 카리스마 속에서도 적당한 위트가 발휘돼 나이가 들면 들수록 여자보다는 남자들에게 더 인기가 많은 그런 사람이었다.

동욱이는 너무나 좋은 사람이라서 카메라 앞에서 좋은 이야기를 많이 해줬는데 정작 방송에서는 그 부분이 똑 떨어져나갔다. 아무래도 중학교 때 이미 가슴근육이 완성되었다는 이야기나 어린시절부터 여자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는 거나, 중학교 때 우리집에 다 같이 모여 수다 떨다 야설로 넘어갔다는 거나. 뭐 그런 이야기들은 어린시절을 함께 보낸 사람이 아니면 정말 알지 못하는 것들이었기에 살릴 수밖에 없을 거라고 본다.

우리가 만난 곳은 동욱이의 인터뷰가 진행되던 일산의 어느 커피숍이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PD님의 안내에 따라 뒤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러다 편지셔틀이야기가 나오고 동욱이는 이내 잘 모릅니다, 라며 눈을 감기 시작했고 결국엔 그걸 증명해줄 친구가 쨘하고 등장하게 되었다. 바로 나였다.

처음엔 날 못 알아보는 동욱이. 그럴 줄 알았다. ㅎㅎ 그래, 나 참 통통해지고 이젠 너보다 더 나이 들어 보여. 나도 알아. ㅠㅠ

그러더니 잊고 싶은 별명을 던지기 시작한다. 솔직히 나 못지 않게 기억력이 좋거나 아니면 그만큼 내 캐릭터가 강했다는 거겠지. 뭐 어쨌건 후자라도 상관없었다. 이젠 뭐 개성의 시대 아닌가. 강렬하게 기억되는 사람이 오래가고 오래남는 세상이니까. ^^

그래도 고마운 건 VJ에게 내 소개를 참 좋게 해줬다는 사실이다. “아, 얘, 진짜 공부 잘했어요. 대게 똑똑했던 친구에요.” 내가 공부하느라 지치고 힘들 때 가장 힘이 되어주었던 게 지금처럼 늘 1등만 하라던 동욱이의 카드였는데. 마침 칭찬을 해주길래 그 카드를 보여줬는데 동욱이는 아직까지 간직한게 신기하다며 웃었다.

함께 하는 인터뷰는 짧았고 PD님은 지금 거의 생방송 식으로 촬영 중인지라 빨리 빠져야한다고 했다. 그래서 서둘러 나도 가려는데 커피 한잔은 마셔야하지 않냐면서 시원한 아메리카노를 한잔 시켜주었다.



졸업앨범을 분실하여 이번 기회에 보고 싶다 하였기에 앨범을 건네줬고 앨범을 보던 그 짧은 시간이나마 동욱이와 오랜만에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나랑 친했던 쌈 잘하던 수연이와 어눌하게 말하며 빨간글씨편지로 고백하던 봉영이, 지금은 낚시프로로 활동하는 한승이, MCM 행사장에 갔다가 우연히 만났다는 아영이, 면회신청에도 대답이 없어 잠시 삐졌던 군의관 대관이와 미국에 있는 성준이와 하늬 등 그간 서로가 알고 있던 친구들의 근황을 전해줬고. 그래도 다들 열심히 잘 사는 것 같다고 하자 우리 애들이 원래 다 똑똑하고 노력하는 애들 아니었냐고 어른스럽게 이야기하더라. 우리 나이면 이제 정말 자기 직업, 자기 인생 책임지고 살아야한다는 명언도 남겨주고. ^^

참 수련회 가서 노래 불렀던 건 제목까지 기억하던데 춤 췄던 건 기억을 못해서 내가 어떤 춤을 췄는지도 실감나게 설명해줬다. ^^ 그리고 학교로 돌아와서 점심시간 때마다 여자애들이 고음불가와 그 롱다리춤을 흉내냈다고 하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참 많은 일들이 뒤에서 이뤄진 거 같다며 정말 신나게 웃어댔다. 10일을 밤새서 집에도 못들어가고 힘들다고 하던데 내가 그래도 그거 하나 큰 웃음은 주고 가서 다행인 듯 싶다.



사실 초등학교 동창 남자아이들은 정기적으로 동욱이를 만났다는 걸 알고 있다. 잊을만하면 항상 동욱이가 먼저 연락을 해 약속을 잡았고 드라마를 마치고 10일 뒤에 군대에 갔지만 그 짧은 기간 중에도 시간을 빼 우리 친구들을 만났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렇게 참 다정다감하게 친구들을 챙기고 우정을 생각했던 속 깊은 아이, 동욱이.

여자아이들에게는 먼저 말은 걸지 않았지만 나와 승은이가 다가가면 그래도 초등학교적 친구라고 대답도 잘해주던 고마웠던 내 친구. 어색 돋던 중학교 1학년 첫 달, 중학교 생활이 적응 안돼 우리 넷이 학교 뒤편에 모여 이야기 나누다 늦은 오후 다돼서야 집에 갔던 것도 나는 잊지 못한다. 그만큼 내게는 특별한 친구였다.

훌륭한 부모님 밑에서 바르게 배우고 자란 덕에 워낙에 배려심 깊은 아이였지만 오랜만에 만난 동욱이는 예전보다 더 상대를 배려해주는 멋진 어른으로 자라있었다. 졸리고 바쁜데도 불구하고 짬을 내서 친구의 이야기를 들어주려고 했던게 나는 그저 고맙기만 했다.

아쉽게도 금세 촬영에 임해야해서 급하게 헤어졌지만 정신없이 가면서도 동욱이는 매니저 동생분에게 택시정류장까지 날 에스코트하라고 부탁하는 친절을 잊지 않았다. 게다 동욱이만큼 잘생겼던 매니저 분은 어쩜 그렇게 예의가 바르시던지! 좋은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걸 알게 돼 참 기분좋게 집까지 돌아갈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헤어질 때 동욱이가 내게 해줬던 말은 각자의 분야에서 이렇게 자리잡고 있는 거 보면 우리 다 잘 큰 거 같구나, 그리고 파이팅, 이었다. 하지만 정말로 멋지게 자리잡은 사람은 동욱이었고 동욱이와의 만남은 내게 감동과 자극을 동시에 준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러니 앞으로 당당히 내 친구라고 말할 수 있도록, 지금 내가 있는 이곳에서 최고가 되기 위해 더 많이 땀흘리고 뛰어다녀야겠다. 



참, 그날 동욱이에게 너를 보며 축구기자 말고 연예기자를 할 걸 그랬다는 생각을 몇번 한적이 있다고 말해주었다. 그랬더니 또 명언을 날려주셨다." 연예기자는 힘들어. 축구기자도 물론 힘들겠지만 너가 더 좋아하는 건 축구 아니야? 힘들어도 자신이 더 좋아하는 일을 해야만 하는 거야."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잊을 수 없었던 것은 여전히 어린시절, 그러니까 첫사랑 소년으로 만났던 옛날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었다. 초심을 잃지 않은 스타가 많이 드물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아는 나니까.  어찌하여 성품과 됨됨이로 꾸준히 칭찬받는지 깨달을 수 있었고, 덕분에 앞으로 더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을 것이라는 기분 좋은 예감도 함께 든 그런 시간이었다.

가식없이 솔직한, 연기를 향한 진정성으로 가득찬, 그리고 이런 사람을 좋아해서 다행이고 이렇게나 많이 좋아하고 있다고 자랑할만한 배우. 이동욱. 그렇기에 그를 사랑하는 팬들은 요즘 아주 많이 행복할 거다. 그래서 부럽기도 하다. ^^

동욱아, 내가 말했지. 안성기씨처럼 시대와 세대를 초월해 모두에게 인정받고 사랑받는 배우가 되길 바란다고. 정상에서 우리 꼭 다시 만나자! 힘내라, 멋쟁이 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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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처음 강릉에 왔을 때, 강릉 사람들은 제게 이렇게 말했죠. 요상한 날씨 때문에 갸우뚱 거릴 날이 많을 거라고요. 1월과 2월은 여느 지역 부럽지 않게 따뜻하지만, 그래서 벌써 봄이 성큼 다가왔다고 생각하지만, 3월과 4월에는 뺨을 에는 바람 때문에 겨울보다 더 괴롭다고 생각하는 곳. 그곳이 바로 강릉이라고 하였습니다.

역시나 3월의 바람은 12월 가장 추운 어느 날의 바람보다 저를 더 괴롭혔고 대관령 주위는 낮과 밤을 막론하고 늘 갑자기 눈이 쏟아지더군요. 때문에 늘 엉금엉금 조심운전을 해야하고요.


하지만, 그때마다 조수석에 앉아있던 저는 아름다운 설경에 감탄하며 연신 카메라 버튼을 누르기 바빴습니다. 4월에 내리는 눈과 그 눈이 빚어낸 절경. 꿈에서만 볼 수 있는 듯한 아름다운 풍경들을 공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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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김수환 추기경님을 떠나보내는 장례미사가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치러졌습니다. 성당 앞마당은 물론이요 성당 옆 카톨릭회관 앞마당까지 가득 매운 카톨릭신자들은 모두가 하나의 마음으로 추기경님의 선종을 애도하며 그 분의 마지막 가시는 길을 지켜봤죠.

차분한 마음으로 추기경님이 성당을 떠나시는 모습까지 지켜본 뒤 성당 앞 언덕길을 내려오는데 참으로 씁쓸한 순간과 만나게 됐습니다. 군중들이 떠나는 모습을 찍고 있던 한 방송사 아나운서가 카메라 기자에게 이렇게 말하더군요.


“펑펑 우는 사람이 없네?”

어쩜 그렇게 그 순간을 바라보던 시각이 극명하게 갈렸을까요. 꺽꺽 우는 사람을 찾아 찍으며 더 좋은 그림을 만들 순 없을까? 그래서 화제뉴스로 포장할 순 없을까? 라는 시각으로 바라보는 그 아나운서를 바라보며 한동안 할 말을 잃었습니다. 대단한 직업정신이라고 칭찬이라도 해줘야하나요.

이번 추기경님의 장례 기간 동안 많은 사람들이 명동 성당을 찾아 조문을 드렸습니다. 수많은 신자들은 30분 간격으로 진행되는 미사에 참석했고 연도를 바쳤죠. 저와 플라이뭉치맨 역시 조문을 위해 여러 번 이곳을 찾았습니다. 그 가운데 만난 사람들 중 존경하는 추기경님을 더 이상 이 땅에서 만날 수 없다는 생각에 눈물을 훔치는 이들이 여럿 있었기는 하였으나 여느 상가집에서처럼 펑펑 우는 사람을 보기는 어려웠습니다.

물론 평생 이 땅의 평화를 위해 없는 이들과 약한 이들과 가난한 자들을 위해 애쓰신 추기경님을 떠나보냈다는 사실은 분명 슬픈 일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안식과 평화를 얻으셨기에, 또 마지막까지 우리에게 사랑과 화해, 용서를 온몸으로 설파하고 가셨기에 우리는 슬픔 보단 희망을 읽습니다. 또한 천주교의 관점에서는 죽음이란 끝이 아닌 시작이요, 아버지의 나라에서 영원을 얻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선종’이란 표현을 쓰며 차분하고 경건한, 그리고 신성한 마음으로 추기경님의 떠남을 맞이하지 않았던 가요. 그런데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방송사라는 곳에서 단순히 이슈화를 위해, 시청자들의 시각적 집중을 위해 펑펑 우는 사람들의 모습을 화면으로 잡으려는 생각만 하다니요. 그런 사람들을 찾기 위해 카메라를 연방 바삐 돌리는, 그리고 나선 우는 사람이 없다 말하는 모습. 솔직히 보기 싫었습니다. 숙연함으로 젖어있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담는 것만으로도 충분할텐데 말이죠. 참으로 실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번 장례기간 동안 ‘명동의 기적’이란 표현을 써가며 ‘엄청나게 길게 늘어선 줄’을 부각시킨 언론의 선정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한 것 같아 마음은 꽤나 편치 않았습니다. 부디 복되신 추기경님의 선종을 더럽히지 마시길 바랍니다. 앞으로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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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김수환 추기경님의 5일 장이 끝나고 장례미사 있던 날. 역시나 많은 이들이 명동성당 앞에 운집했습니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진 못했지만 성당 밖에서 스크린으로 생중계 되는 장례미사 모습을 보며 약 2시간에 가까운 시간동안 장례미사를 드리며 서있었습니다.

추기경님이 이제 흙으로 돌아가는 날 새벽부턴 눈이 내렸죠. 세상의 모든 것을 하얗게 덮은 눈처럼 우리 마음에 평화와 사랑을 내려주신, 증오와 미움은 그렇게 곱게 덮어주신 추기경님은 이제 흙으로 돌아갔지만 우리는 그분을 영원히 기억할 것입니다. 글/헬레나 사진/플라잉뭉치맨


성당 안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은 밖에서 서서 장례미사를 드렸습니다.

1만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옥상 위에서 신자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기자들.

신자들의 모습.

야외에서 생중계로 이렇게 볼 수 있었죠.

정진석 추기경님의 모습입니다.

역시나 취재열기는 뜨거웠습니다.

이 말씀이 왜 그리 마음을 아프게 하던지요.

이곳에도 기자들이...

명동성당 근처에는 모두 신자들이 자리잡은 채 장례미사를 드렸습니다.

경건하고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사제들의 모습.

이곳에서 기자들이...

영성체 중인 신자들.

그리스도의 몸, 아멘.

이제 추기경님이 나오십니다.

경찰차의 호의 아래 나오실 준비를 했습니다.

모두들 두 손을 잡은 채 고인이 되신 추기경님을 기다렸죠.

관 속에 잠드신 추기경님이 계신, 바로 그 운구차량의 모습입니다.

마지막 가시는 길, 그렇게 손을 내저으며 모두들 슬퍼했습니다.

전 이 사진만 봐도 눈물이 나네요...

추기경님 사진을 보며 쉽게 발걸음을 떼지 못하는 사람들.

그렇게 생전 모습을 마음과 기억속에 담은 채 돌아왔습니다.


고맙습니다. 말씀대로 사랑하며 살게요. 혜화동 할아버지. 훗날 하늘에서 꼭 다시 만나길 기도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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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김수환 추기경님의 얼굴을 뵐 수 있는 마지막 밤이었던 어제(18일) 저녁. 6시 종이 울리지마자 미리 준비한 두툼한 잠바를 챙기고 회사를 나왔다.

어제 오후 명동성당을 찾았던 엄마는 2시간 동안 기다린 끝에 추기경님을 뵙고 집으로 돌아왔다고 하셨다. 말이 2시간이지 실제로는 꽤 긴 시간이라 추위를 심하게 느낄 거라며 단단히 채비하라는 조언을 해주셨다. 엄마의 말씀을 떠올리며 장롱 속에 모셔뒀던 오리털 파카를 꺼내 입고 갔다.


명동역에 내린 시간은 오후 7시. 9번 출구 밖으로 긴 줄이 보이길래 '설마 이줄이 전부 명동성당을 가기 위한 줄일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설마했는데 이럴수가. 명동성당을 향한 줄이 맞았다. 그 길의 끝을 찾기 위해 5분 가량 걸은 뒤 겨우 끄트머리를 찾을 수 있었다. 추기경님을 뵙기 위한 긴 기다림은 그렇게 하여 시작했다.


지인 없이 홀로 추도 행렬에 동참했던 난 느릿느릿 행진이 진행되는 가운데 이런 저런 상념에 잠겼었다. 추기경님을 처음 뵜을 때 감히 "추기경님, 너무 좋아합니다. 싸인해주세요~"라던 21살 어린 내가 생각났다. 그것도 노랗게 탈색한 머리를 하고선 싸인과 사진촬영을 부탁드려 '쟨 뭘까?'라는 어른들의 시선을 받았었지. 그 뒤 6개월 뒤 추기경님을 다시 뵙게 되었을 땐 삭발한 머리를 기른 지 얼마 안돼 남자같은 스포츠 머리를 하고선 나타나 '쟨 누구길래 추기경님을 귀찮게 하는 걸까?'라는 시선을 다시 한번 받기도 했고.

옆에 계시던 신부님은 추기경님이 피곤해하시니 인사만 하고 가라 하셨지만 당시 추기경님은 허허 웃으시며 괜찮다며 내게 당신의 묵주와 열쇠고리를 선물로 주셨다. 추기경님 방 서랍에는 나무로 만든 묵주와 추기경님의 사진이 담긴 열쇠고리, 그리고 손 안에 쏙 들어가는 사진들이 수십개가 있었는데 추기경님을 뵈러 온 사람들에게 주기 위한 선물로 보였다. 그때도 난 혼자 사는 늙은 고모가 생각나 감히, 묵주를 하나 더 주실 수 있냐는 부탁까지 했었고. 집에 돌아와선 그 묵주가 너무 소중해 뜯지도 않은 채 서랍 속에 고이 모셔두었다.  지금까지 말이다. 이제는 고인이 되신 추기경님을 뵈러 가는 길, 묻혀 두었던 기억들은 그렇게 수면 위로 하나 둘씩 떠올랐다. 기다리는 시간이 즐거웠던 까닭이다.

2시간 쯤 지나자 슬슬 한기가 느껴졌다. 두툼한 잠바를 입었음에도 내 몸은 춥다고 외치고 있었고, 특히나 구두를 신은 발은 얼얼해 감각을 느낄 수 없었다. 3시간이 가까워졌을 땐 칼로 베는 듯한 통증마저 느껴졌다. 그러나 이 행렬에서 이탈할 수는 없었고 옆에서 묵주기도를 외는 아주머니들의 낮은 음성을 들으며 한 걸음 한 걸음씩 명동성당을 향해 갔다.

올라가는 길목마다 자원봉사자들이 고생이 많다며 따뜻한 차를 건네주었고 내 뒤에 계신 아주머니들, 실제론 많이 연로하셔 할머니에 가까운, 그 분들을 향해선 "조금만 참으면 추기경님을 뵐 수 있었습니다"라는 말씀과 함께 추운 손을 잡아주며 초콜렛을 주기까지 했다. 순간,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세요"라던 추기경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추기경님 안에서 우리는 그렇게 사랑을 실천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 추기경님께 고마움을 느끼던 순간이었다.

수 시간 기다리다 보면 화장실 생각도 날 터. 특히나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에게는 더 어려웠을 시간이다. 고맙게도 명동성당 가는 길가에 있는 음식점과 카페들은 '화장실 마음껏 쓰세요' '화장실 사용 가능합니다'라는 문구를 입구에 붙여 사람들에게 화장실을 내주는 성의를 보여줬다.

그리고 기다린지 3시간 30분이 되었을 때 마침내 명동성당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자원봉사자들과 신부님들은 아직도 뒤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많으니 조의는 목례로 간단히 부탁드린다는 이야기를 반복해서 외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우리보다 더 오래 바깥에 있었을 그분들의 얇은 겉옷이 눈에 띄더라. "신부님. 고생 많으십니다"라고 인삿말을 건네자 신부님은 깍지 낀 손을 한 채 맑은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신부님이 나눠준 검은 리본을 왼쪽 가슴에 부착한 채, 잠바를 벗고 옷을 가다듬은 뒤 드디어 명동성당 내부로 들어갔다. 3시간 45분만에 들어선 순간이었다. 들어서자 제단 앞에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잠들어 계신 추기경님이 보였다. 기억보다 더 작고, 또 흰머리도 더 많던 추기경님은 사람들의 연도를 들으며 그렇게 긴 잠 속에 빠진 듯한 모습으로 누워계셨다. 눈물이 날 줄 알았는데, 이 짧은 3초를 영원히 기억하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잊고 싶지 않아 나가는 문까지 가면서도 내내 뒤를 돌아 추기경님의 마지막 모습을 망막에 담았다. 잊지 말아야지. 기억과 마음과 심장에 아로새긴 채 살아야지.

4시간에 가까운 기다림. 그리고 3초간의 만남. 추위와 싸우며 보낸 긴 시간이었지만 아쉬움보단 아련함이 더 많았던 시간이었다. 성당에서 나와 2000원을 주고선 양초를 샀다. 내 앞에 서 있던 모르는 이가 자신의 촛불로 내 양초에 불을 지펴주는데 사랑은 이렇게 시작은 작은 손길이지만 넘어가고 넘어가는 과정에서 넓고 큰 힘을 발휘하며 전파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래서 성모마리아상 앞에 불 붙은 양초를 고이 놓은 뒤 추기경님께 감사기도를 드렸다.

추기경님의 선종 이후 내 삶과 내 주위 사람들을 더 아끼며 사랑하며 살겠다는 다짐을 하게 돼 감사드린다며. 추기경님의 마지막 말씀대로 아낌없이 더 사랑하며 살겠다고 말씀드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간, 집에 도착하자 쇼파 위에서 선잠을 주무시던 팔순이 넘은 할머니가 인기척에 눈을 뜨는 모습이 보였다. 오랜만에 할머니 옆에 앉아 주름진 살로 뒤덮인 마른 손을 잡아 봤다. 추기경님의 말씀처럼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의미는, 그리고 사랑하세요 라는 말의 속뜻은 이렇게 삶 속에서 조금씩, 실천하는 가운데 깨닫는 것이겠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오랜만에 깊이 잠들 수 있던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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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오후 2시쯤 명동성당 근처에 도착했을 때, 길게 늘어선 조문행렬을 보며 깜짝 놀랐습니다. 모두들 추기경님의 마지막 모습을 조금이라도 뵙기 위해 어렵고 먼 걸음을 마다 않고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너무 많이 사랑받았다던 추기경님 마지막 말씀이 떠오르더군요. 하늘에서 맑게 웃을 추기경님이 떠올랐습니다. 그날 따라 명동성당을 감싸던 하늘은 왜 그리도 파랗던지요. 구름 한점 없는 청명한 하늘이 꼭 추기경님의 마음 같아 혼자서 고개를 끄덕거렸습니다.


추기경님은 떠나셨지만 우리에게 전파한 사랑의 말씀은, 가르침은 오래도록 우리 곁에 남아 잔잔히, 그리고 쉼없이 계속 될 거라 믿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의 선종에 마음 아파하던, 그러나 한편으론 영원한 안식에 축복의 기도를 올리던, 오늘 만난 사람들을 기억합니다. 그날의 모습을 이곳에다 올립니다. 글/헬레나 사진/플라이뭉치맨

조문객들이 많아지자 입구 아래서부터 안내팻말이 있었습니다.

영하 10도 가까이 내려갔지만 추위는 문제되지 않았죠.

노인분들도 많았답니다.

하늘은 파랬죠.

김수환 추기경님 생전 사진을 담는 시민들.

추기경님의 생전 모습이 담긴 사진입니다.

모두들 한번씩 올려다보곤 했죠.

이날 따라 명동성당을 감싸던 하늘은 청명했습니다.

선종... 마음이 뭉클해졌습니다.

추기경님은 항상 말씀하셨죠.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라고요.

시간이 길어질 수록 줄은 점점 길어졌습니다.

입구를 메운 사람들.

취재열기도 뜨거웠습니다.

각계 종계단체 인사들이 애도를 표하고 갔습니다.

성모마리아상 앞에서 기도 드리는 교인들.

추기경님의 평화를 빌며 밝힌 촛불들.

강기갑 의원도 조문행렬에 끼었습니다.

취재진들의 질문에도 답했죠.

우리가 기억하는 모습은 화면 속 이 모습이죠.

줄서 기다리는 와중에도 기도 드리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았죠.

명동성당 올라가는 고개가 조문행렬로 가득찼습니다.

박근혜 의원도 왔습니다.

매우 혼잡하니 조문은 간단히 목례로 부탁드린다는 종이를 들고 계셨던 자원봉사자분.

문희상 의원은 울먹이면서 말씀을 잇더군요.

내란음모사건 관련자로 합수부에 끌려와 조사를 받던 한 감방 안에서 화장실 물로 영세를 받았는데, 그 신부가 바로 김 추기경님이었다고 하네요.

울먹이던 순간.

추기경님이 늘 말씀하셨던 어머니.

오세훈 서울시장도 조문행렬에 함께 했습니다.

밤이 조금씩 찾아왔지만 조문행렬은 도통 끝날 줄 몰랐습니다.



그렇게 밤은 또 지나갔고 우리는 또다시 슬픔 속에서 하루를 보냈습니다. 추위 속에도, 그 추운 바람을 맞으며 수 시간을 기다렸다 수초만 인사 드리고 나올 수 밖에 없었지만 모두들 그 찰나를 영원으로 기억하며 추기경님 가시는 길을 지켜봤습니다. 안식을 얻은 추기경님을 바라보며, 우리 마음에도 평화가 내리길 기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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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7년 전, 이제 막 대학신문 수습기자 딱지를 뗐을 때, 무슨 복을 그리 받았는지 김수환 추기경님 인터뷰를 맡게 되었다. 1993년 9월 동네성당에서 세례를 받으면서 헬레나라는 성당본명을 얻게 되었을 때, 그때부터 알게 됐던 김수환 추기경님은 내게 참 멀고도 큰 사람이었다. 세례를 받은지 꼬박 10년 만에 김수환 추기경님을 뵈었을 때, 그 순간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추기경님이 앉아 계셨던 쇼파 뒤로 햇볕이 쏟아졌는데, 11월 초였기에 날씨는 추웠지만 방안의 공기만은 참으로 따뜻하였다. 그곳의 빛은 초겨울이 아닌 이른 봄의 햇볕처럼 그렇게 따스히도 추기경님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그날 추기경님은 내게 당신의 사진이 담긴 열쇠고리와 나무로 만든 묵주를 주시며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라며, 사람과 세상을 사랑하라며, 빛과 소금 같은 존재가 되길 바란다는 덕담을 건네 주셨다. 그때 나를 보던 그 표정은 너무나 평화로웠고 또 인자로워서 마치 내 할아버지를 보는 것 같아 "추기경님과 사진을 찍어도 될까요?"라는 부탁을 드렸더랬지. 그때 옆에 서 계시던 보좌 신부님은 긴 인터뷰 때문에 피곤하시니 이제 그만 가라고 하셨지만 추기경님은 허허 웃으시며 "한 장 정도는 괜찮다"며 어린 헬레나 옆에서 활짝 웃으셨지.

추기경님의 선종 소식을 들으며 7년 전 그 가을날이 생각나 먹먹해진 가슴을 부여잡으며 잠시 그날을 떠올려본다. 그리고 7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도 우리의 고개를 끄덕이게 만다는, 당시 추기경님이 들려줬던 이야기를, 추기경님이 읊었던 말씀 그대로 적어 올려본다.

△사회가 혼란스러울 때, 고견을 들을 수 있을 정도의 원로는 안타깝게도 많지 않다고 합니다. 한국 사회에 진정한 원로가 없는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보시나요?
- 우선 나이 든 사람들 중 학식 있고 모범적인 사람이 별로 없어서 원로가 없다는 말이 나온 것 같아요. 그렇지만 젊은 사람들이 연예인 같은 유명인에게만 매력을 느껴서 늙은이가 사회에서 밀려나간 것일 수도 있어요. 또, 장유질서가 뿌리 깊던 예전과 달리 누구나 평등하다는 생각이 광범위하게 퍼진 요즘 사람들이 원로를 찾지 않아서 원로가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해요.

△현 정부 출범 즈음, 정국 운영에 대한 조언을 주시기도 하셨는데요, 국민의 정부 5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 글쎄요. 그 분이 정권에서 물러난 후 좀 더 시간을 갖고 지켜봐야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지만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된 것만으로도 지금까지 지역, 가난 등의 이유로 소외됐던 사람들의 상처가 어느 정도 치유했다고 생각돼요. 그러나 취임 전 IMF 위기에 적절히 대처해 인기가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후 편향된 인사정책이라든가 권력남용, 아들의 비리사건 등은 이전 대통령의 전처를 밟는 것 같아 아쉬움이 남네요.

△그렇다면 좀 더 외연을 넓혀, 우리 사회의 리더가 갖춰야 할 덕목은 무엇이며 대선후보가 갖춰야 할 자질은 무엇인가요?
- 총리 인증과정에서 드러나듯 가장 중요한 것은 청렴결백이고, 또 그 사람 말을 믿을 수 있는 정직성이에요. 그리고 지역·계층·세대·노사 간의 갈등과 같은 문제들을 국민의 의견을 수렴해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리더가 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같은 맥락으로 그런 사람이라면 남북문제도 통일로 이끌 수 있다고 생각되네요.

△북한 핵문제는 초미의 관심사입니다. 이를 근거로 대북 지원에 대한 의견이 분분한데, 우리나라의 대북 정책은 어떤 입장을 견지해야 할까요?
- 대북정책은 근본적으로 화해와 협력을 바탕으로 이끌어야 해요. 인간적으로 솔직하게 얘기할 수 있는 파트너 관계도 유지해야 하구요. 물론 우리가 일방적으로 주거나 북쪽에 매달리는 것은 곤란하죠. 최근 북한의 핵 보유문제가 불거졌는데, 북한이 핵폭탄을 얼마나 갖고 있는지 모르지만 그것으로 우리를 협박해서는 안되며, 이는 북한을 위해서도 현명하지 못한 행동이에요.

△지난 9·11 테러를 일부 전문가들은 문화 충돌로 보기도 했습니다. 종교 또한 문명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데요, 문명 대립으로까지 치닫고 있는 세계 평화를 어떻게 풀어가야 할까요?
- 종교가 다르다고 해서 적대적인 관계가 생기는 것은 아니에요. 9·11사태 역시 이슬람교와 크리스트교가 서로 달라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일부 이슬람교도가 정치적 이유로 조성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테러를 감행했는데, 그들이 이슬람교도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종교와 연관짓는 것일 뿐이에요. 물론 문제가 있다면 폭력이 아닌 사랑과 용서로 해결해야겠죠. 폭력은 다시 폭력을 낳으며, 악순환이 계속되니까요.

△ 과학은 점차 발달해, ‘신의 영역’을 향하고 있다고 평가되기도 합니다.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우리들이 과학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 과학은 자연의 신비를 벗겨내고, 과학자를 통해 하느님이 사람을 만든 신비로움에 조금은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광대한 자연과 하늘의 별, 이런 것들은 볼 때마다 놀랍잖아요. 또, 원자 역시 연구자들이 연구와 분석을 거듭해도 끝이 없는 것을 보면 정말 신비스러워요. 우리의 몸 역시 원자로 구성되었다는 점에서 땅을 이루고 있는 것과 근본적으로 같다고 볼 수 있어요. 이 점에서 우리 몸도 한없는 신비 속에 있다고 할 수 있어요. 따라서 신비로움을 밝혀내는 과학의 발전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과학은 그 자체의 발전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고 소중함을 간직할 수 있을 때 의미가 있는 거예요. 요즘 인간 배아복제다 해서 인간 존중이나 생명존중에 바탕을 둔 윤리관 없이 단지 편리함 추구하기 위한 연구를 하기도 하는데, 이런 연구는 자칫하면 인류에 재앙을 불러올 수도 있어요. 무엇보다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과학이 돼야겠어요.


7년 전, 내 카메라에 담았던 추기경님의 생전 모습. 이날 사제관은 아름다운 빛으로 반짝였었다. 그 빛이 주던 온화함을 앞으로도 잊지 못하리라. 헤어지기 전 내 손을 잡아주셨던,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지던 추기경님의 손 끝, 그 마디 마디까지도.

제게 해주셨던 말씀대로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더라도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해 노력하며 살겠나이다. 하늘에서 편히 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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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수상소식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할아버지가 생각났습니다. 저를 아주 많이 예뻐해주셨던, 지금은 하늘에 계신 제 할아버지가요. 할아버지 당신께선 제가 글 쓰는 사람이 되길 바랐고, 무엇보다 세상을 움직이는 글을 쓰길 원했고, 그래서 늘 기자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제게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할아버지께서 제 수상소식을 들었다면 무척 좋아하셨을텐데,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기도 뿐이라는 생각에, 그날 밤 새벽까지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지난 8월27일 할아버지를 하늘에 떠나보낸 이후 저를 위로해줬던 건 다름 아닌 블로그였습니다. 블로그에 글을 쓰며 마음을 달랬고, 그렇게 하루를 정리하며 다시금 제 삶을 다잡을 수 있었죠. 돌이켜보면 2001년 처음 다음에 블로그를 만든 이후, 블로그란 존재는 제 인생에 있어 꽤 많은 부분을 차지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 가운데 알게 된 블로거뉴스는 일상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이야기들과 작은 사건들도 뉴스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줬습니다. 제가 전송한 뉴스를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고 교류하는 시간은 무척이나 신났고 또 즐거웠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못했던 무명선수의 이야기가 제 블로그를 통해 전해지고, 그렇게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는 사실 역시 제게는 무척이나 뿌듯했던 순간이자 경험이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스포츠전문 블로그를 지향했지만, 실천하는 지식인이 되고 싶은 마음에, 올해 초 취재했던 일본인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이야기도, 결국엔 블로거뉴스가 있었기에 전해질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만으로도 감사한데 이렇게 큰 상까지 주셔서 더욱 감사드립니다.

지금 이 순간이 제 인생에 있어 또 다른 시작인 것 같습니다. 블로거기자상 수상 덕에 앞으로 더 잘해야겠다는 책임의식이 생겼고, 또 더 잘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죠.

지난 날 할아버지께서 하셨던 말씀대로, 언젠가는 모두의 마음을 움직이는 따뜻한 글을 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마도, 그 공간은 지금처럼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블로거뉴스가 되겠죠. 무엇보다 블로거뉴스에서만 맡을 수 있는 잔잔한 사람 향기를 잊을 순 없을테니까요. 그리고 앞으로도 이곳 블로거뉴스가 강자 보다는 약자의 시선에서, 있는 자들보다는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을 생각하는, 그렇게 변함없이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그런 곳이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는 말씀 드리며 끝인사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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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벌써 15년도 더 된 일이지만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녀석을 처음 만났던 그날 말이다. 전학 온 지 1년 밖에 되지 않은 터라 아는 친구들보다는 모르는 친구들이 더 많았던 그때, 새 학기 첫날, 쭈뼛거리며 배정받은 4학년 2반 교실 문을 열었다. 그런데, 이럴 수가. 교실에 왕자님이 있었다!

오똑한 콧날, 하얀 피부, 170cm가 넘던(세상에, 초등학교 4학년 키가 그래도 되는 거야?) 녀석. 첫날이라고 담임선생님은 각자 앞에 나와 짧게 자기소개 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그때 알게 됐다. 녀석의 이름을. 동욱이었다. 이동욱.

그렇게 짝이 되길 빌었건만 연이 없었던지 ‘짝꿍’에 당첨되는 행운은 없었다. 불행 중 다행인지 나와 꽤 가까운 자리에 앉았는데, 내 짝의 뒤, 그러니까 내 대각선에 동욱이가 앉게 됐다. 고개만 돌리면 왕자님이 있었다. *^^*

자리가 가깝다 보니 자연스럽게 친해졌고 생일에도 나는 동욱이를 초대했다. 그때, 친구들을 데리고 집에 도착하자 할머니와 고모와 엄마는 동욱이 옆에 앉아 이름이 뭐니, 어디 사니, 종교가 뭐니 -.-;까지 물어보셨다. 대화의 귀결은 “어쩜 이렇게 인물이 훤할꼬!”였다. 부모님이 성당에 다닌다고 하자 “우리 헬레나도 성당 다닌단다!”하며 좋아했던 할머니와 고모와 엄마의 모습을 나는 여전히 잊지 못한다.

글 좀 쓴다며 유달리 성숙한 척했던 나는 --; 영화 <록키4>와 <죽어야 사는 여자>를 억지로 보게 한 다음 남녀 할 것 없이 모두 고무줄 놀이에 참여시켰다. 한데 착한 동욱이는 군말 않고 아파트 주차장에서 같이 고무줄 놀이를 하며 나의 생일을 축하해주었다.



6학년 때 나는 다시 동욱이랑 같은 반이 되었다. 그해 봄 학교에서는 사진촬영대회가 열렸다. 원혁이라는 친구가 미끄럼틀 위에 올라가 전경을 담고 있던 동욱이의 모습을 비스듬하게 찍은 다음 ‘위험한 촬영’이라는 제목으로 제출했는데, 센스 있던 제목 때문이었는지 금상을 받게 되었다. 과하게 말하자면 동욱이는 그때부터 모델적 재능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중학교 때도 나는 동욱이를 볼 수 있었다. 같은 학교에 입학했기 때문이다. 입학과 동시에 이동욱의 존재는 연일 상종가였다. 그 키에, 그 얼굴을 가진 중학생이 어디 흔했던가. 농구도 잘했고 성격도 좋아 남자아이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그때 우리 반 친구 하나가 동욱이를 좋아하게 되었다. 등하교길에 오고 가며 자연스레 동욱이와 인사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게 된 친구는 러브레터를 전해줄 수 있냐고 부탁했다. 딱히 내키지는 않았으나 친구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기에 몇 번 편지를 전해주었다. 그리고 착한 동욱이는 친절히도! 답장을 보내주었다. 그렇게 편지를 주고받는 모습을 보게 된 다른 반 여자아이들은 급기야 나를 동욱이의 여자친구로 착각하고 말았다.

쉬는 시간에 우리반으로 찾아와 “쟤야?”라며 나를 흘겨보는 애가 있었는가 하면 “저렇게 생긴 애가 여자친구라고?”라며 대놓고 머라 하는 아해도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기가 막혀 “그래서? 어쩌라고?”라며 반문했다. 그런데 한 번 대단한 사건이 터졌는데 우리 학년 1진 중의 1진인 여자애가 나를 찾아온 것이다. 화장실로 데리고 가 “동욱이 그만 만나라고! 인사도 하지마! 알았어?”라며 협박하는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그래도 당시 날라리들은 지금과 달랐다. 그냥 협박만 하고 끝나는 수준이었으니까.



그해 여름에도 동욱이는 내 생일선물을 챙겨줬는데, 그룹 모자이크의 테이프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얼굴만큼 뭔가 선물하는 씀씀이나 생각도 성숙했던 동욱이였던 것 같다. 동욱이는 노래보단 랩하는 걸 좋아했는데, 그해 가을 수련회에선 단지 반장이라는 이유만으로 전교생들 앞에서 “꿈, 사랑, 그리고 착각”을 부르며 어색하게 다리떨기 춤까지 추는 ‘쇼’를 보여줬었다. 여자애들은 귀엽다며 완전 쓰러졌었지.

그때도 난 우리반 여자애들의 성화에 못 이겨 동욱이의 사진을 대표로 찍었어야했는데, 서울로 올라가던 중 버스가 잠시 휴게소에 섰을 때 독사진을 수십장 찍어댔었다. 동욱이는 “이제 그만 찍어. 나 버스 올라탄다”라고 말하면서도 끝까지 얼굴이 카메라 쪽으로 향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역시, 그때부터 연예인으로서의 자질과 끼가 보였다. 동욱이는.

중학교 2학년 겨울, 크리스마스 카드를 동욱이에게 줬었다. 그리고 옆 반에 있던 또 다른 친구 대관이한테 줬는데, 대관이 말하길 “카드가 바꿨어.” 깜짝 놀라 동욱이네 반으로 달려가 교실 문을 열고 카드를 돌려달라고 했는데, 이런. 체육시간을 앞두고 남자아이들이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우리의 동욱이는 교복 와이셔츠를 막 벗고 있던 찰나였다. 그런데 가슴에 근육이 잡혀있는 것이 아닌가! 그때나 지금이나 엉뚱소녀였던 나는 궁금한 마음에 “가슴에 그건 무엇이냐!”고 물었다. 동욱이의 대답은 이랬다. “응, 나 요즘 헬스 중이야.”

고등학교 입학 전 겨울방학을 맞아 모처럼 초등학교 친구들이 뭉쳤다. 그때는 동창회보다는 반창회가 대세했다. 6학년 때 같은 반 친구들끼리 만나기로 했는데, 동욱이도 나왔다. KFC에서 치킨버거를 먹으며 이승환의 ‘가족’을 들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노래방에 갔다. 날쌘 나는 바로 동욱이 옆자리에 착석했다. 하하. 그리고 나서 그대로 헤어지기가 아쉬워 끝까지 남아있던 6명의 친구들을 우리집에 초대했다.



그런데 우리집에 가던 도중, 엘리베이터가 멈추는 사건이 발생했다. 처음엔 하하 웃고 떠들었지만 도와주는 이는 없고 시간은 흘러가고 이것저것 버튼만 누르다 점점 엘리베이터가 한층 한층 아래로 내려가며 걱정을 야기시켰다. 이러다 지하로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도와달라고 고함치기 시작했다. 그 소리를 들은 엄마가 경비실에 연락했고 엘리베이터 관리해주는 분이 와 엘리베이터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엄마는 귤과 과자와 음료수를 준비해놓고 있었는데, 역시나 동욱이한테 다가가 “어쩜 여전히 그렇게 잘생겼니!”라는 덕담을 건네주셨다. 동욱이가 기억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날 우리 6명은 밖에서 어른들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은 잊어버린 채 완전 수위 높은 야한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

내가 동욱이를 마지막으로 만난 건 수능을 마치고 가뿐한 마음으로 만화방에 가던 길에서였다. 고등학교는 서로 다른 학교를 가는 바람에 흘어졌지만 MTM에 다니며 연기를 배운다는 소식은 들고 있었다. 그리고 고3 때 베스트극장을 통해 텔레비전에 데뷔했는데, 반항기 넘치던 고교생인 것만 어렴풋이 기억난다. 방에서 기타를 치며 온몸을 흔들던 그 장면만은 여전히 선연하다.

그때 나는 “드라마 잘봤어!”라고 반갑게 인사했고 동욱이는 “야, 너 피부가 왜 이렇게 안 좋아졌어!”라고 인사했다. 그게 동욱이와의 마지막 만남이었고 그 이후로 나는 <학교> <마이걸> 등의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서만 만날 수 있었다.



이 새벽에 문득 동욱이가 생각나는 까닭은 어린시절 돈이 없어 집까지 걸어 다녔다는 이야기를 방송을 통해 들었기 때문이다. 당시 우리가 다니는 학교는 사립이었고 집이 먼 아이들을 위해 지역별로 나눠 스쿨버스가 다니고 있었다. 쌍문동인 학교에서 도봉동인 우리집까지는 거리가 꽤 됐기에 스쿨버스를 타고 다녔는데 우리집보다 더 멀리 살던 동욱이는 늘 여동생과 함께 시내버스를 타고 다녔다. 당시 스쿨버스는 아이들을 내려주며 가느라 시간이 많이 걸렸는데, 그냥 빨리 집에 가고 싶어서 그런가 보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늘 밝게 웃어 어린 나이에 그런 고민과 그늘을 안고 살줄은 몰랐다. 그래서 그렇게 여동생 손을 꼭 잡고 집에 갔었나 보다. 그런 이유도 모르고 나와 친구들은 괜히 동욱이한테 다가가 “여동생이랑 너무 금술이 좋은 거 아냐?”라고 놀려댔었고. 그때는 워낙 어릴 때라, 또 좋아하는 마음을 유치하게 표현할 때라 그런 식으로 놀렸는데, 늘 착한 동욱이도 그때만큼은 심하게 화를 내며 뒤도 안 돌아본 채 집에 가곤 했다.

그때 그 모습이 어제 일처럼 생각나고, 친구의 이야기에 좀 더 귀 기울지지 못했다는 사실이 못내 아쉽다. 그리고 미안하다.

지난 날, 대학생이던 그 시절, 언젠가 기자가 된다면 어린시절 첫사랑이었던 동욱이와 해후할 수 있을 거라고, 아니면 조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물론 지금, 나는 그때 당시의 꿈을 이루었으나 문제는 내가 축구기자라는 사실이다. ^^ 하여 이제는 서로 너무나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기에, 직접 얘기할 방법이 없기에 이렇게 블로그에나마 끄적여본다.

주변 사람들을 아빠처럼 헤아리고 챙겨줬던 너의 마음 씀씀이라면 모두에게 사랑받는 배우가 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지금도 멋지지만, 앞으로도 더 멋진 배우가 되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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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할아버지가 보고 싶어서 이 새벽에 또 눈물을 흘린다.
내 옆에 계실 때 더 많이 찾아뵙고, 이야기도 많이 나누고, 용돈도 쥐어드릴걸.
고모 말대로, 왜 난 한번도 본 적 없는 동남아시아 어린이 돕는데만 혈안이 되었던 것일까.
나의 사랑과 관심과 손길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내 할아버지였는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벌써 한달의 시간이 흘렀고, 나는 매일 꿈에서라도 보고 싶다고 말하지만 아직 할아버지는 내 꿈에 단 한번도 나오지 않으셨다.
그래서 마음이 아프고,
그래서 이렇게 눈물이 흐른다.
할아버지가 보고싶다.
이제는 다시 만나지 못할 내 할아버지가 보고 싶다.
아주 많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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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월급쟁이 기자에게 외고를 써서 받는 원고비는 이른바 '꽁돈'이다. 작년 봄 원고비로 받은 몇십만원으로 디지털 카메라를 샀었지.

새로산 카메라는 제법 마음에 들었고 그 중에서도 동영상 기능이 제일 마음에 들어찼다. 제법 신기하기도 해 취재갈 때마다 찍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 인터뷰를 마치면 선수들에게 나에 대한 코멘트를 아주 뻔뻔스럽게 부탁하곤 했는데, ^^;

그 동영상을 오랜만에 본 김에 이렇게 포스팅 한다. 불과 1년 만에 우린 참 많은 발전을 이뤄낸 듯해 참으로 감회가 새롭다.


김두현 씨는 어느새 프리미어리거가 됐고 이청용 씨는 태극마크를 달고 A매치 데뷔전까지 치렀다. 기성용 씨는 한때 퍼거슨이 찜한 영보이로 이름을 날리지 않았던가. 우리 모두 무럭무럭 성장해서 지금보다 더 멋진 사람이 되길 바란다. 그리하여 모두에게 귀감이 되는 그런 사람으로 거듭나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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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pressblog.co.kr/module.php?mn=notice&idx=123

여기로 들어가시면 투표하기가 있습니다.
거기를 꼬옥 누르면 후보들이 있는데요,
제가 쓴 글은 '군대 간 동생이 주고 간 통장 하나' 입니다.

글 읽고 좋으시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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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마감 중에 도피하는 차원에서 찍어두었던 사진들을 이제야 정리해서 올립니다. ^^ 정대세 선수 배경화면이 중간에 토레스로 바뀌었지요. ㅋ 지금도 배경화면은 여전히 토레스랍니다. 딱히 토레스를 좋아라하는 건 아니고요 아이콘이 왼쪽에 있는 관계로 인물을 오른쪽에 몰아놓고 찍은 사진을 찾아봤는데 딱 이 사진만 그렇더라고요. 이유는 이렇게 단순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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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4년 전 한 국회의원 당선자가 제가 다니던 대학교로 찾아와 “낮은 자리에서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국회의원이 되겠다”고 인사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매번 총선이 끝나면 반복되는 당선자들의 ‘앵무새’ 같은 발언이죠. 이번에도 어김없이 똑같은 풍경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서민들의 애환을 듣겠다고, 진정 서민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정치인이 되겠다고 말합니다.



그 시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은 또다시 노쇠한 몸을 이끌고 거리에 나왔습니다. 할머니들의 목소리를 들어주는 이들은 적었지만 그래도 할머니들은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할머니들에게 명예와 인권을!”이라고요.

국회의원 당선자들께 묻습니다. 할머니들의 목소리가 들리시나요? 당신들은 이 할머니들을 위해 어떤 고민을 하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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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집으로 가던 길, 전화 한통이 왔습니다. 손전화를 들어 확인해 보니 친구였습니다. 요즘 너무 많이 힘들어, 라는 친구의 말과 함께 통화가 시작됐죠.

제 친구는 운동선수입니다. 개인종목이 아닌 단체종목에서 뛰고 있습니다. 단체종목은 팀스포츠이다보니 혼자만 열심히 한다고 다 되는 법은 아니지요. 조직력이 극대화 될 수 있도록 팀에 녹아 내려야합니다. 즉 조화를 이뤄야 한다는 말이죠. 하지만 이것도 ‘기회’가 주어져야지만 가능한 일입니다.


문제는 ‘기회’에 있습니다. 그 ‘기회’라는 것은 결코 쉽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도자와 궁합이 얼마나 잘 맞느냐, 지도 철학에 맞춰 얼마만큼 유기적으로 움직일 수 있느냐 등등에 따라 선수들의 명암은 극에서 극으로 갈립니다.

올 초 친구가 있는 팀에는 새 감독님이 오셨습니다. 그리고 친구는 그날 이후로 팀에서 뛸 기회를 잃고 말았습니다. 새로 부임한 지도자와 스타일이 맞지 않았던 것이죠. 친구는 다시 열심히 해보자, 라고 다짐하며 머리도 잘랐다고 하였습니다.

아깝지 않냐고 묻자 단박에 아니, 라는 대답이 들려옵니다. 그녀는 가끔 운동이 없는 날이면 고무줄로 꽁꽁 묶던 머리를 한번씩 풀곤 했습니다. 그것이 운동선수인 친구가 할 수 있던 유일한 사치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친구는 이십대 중반이 됐건만 아직 제대로 화장하는 법조차 모릅니다.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는게 더 맞는 표현일 것 같습니다.

그렇게 그녀의 모든 정신은 늘 운동에만 쏠려있습니다. 그때마다 전 “넌 정말 못 말리는 운동쟁이야. 가끔은 한눈 팔아도 돼.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숨쉬며 살 수 있겠어”라고 말했고요.

그런데 그런 그녀가 너무 힘들어 모든 걸 다 그만두고 싶다고, 내려놓고 싶다고 제게 말합니다. 고민 끝에 저는 힘내, 라는 형식적인 말 대신 “집으로 가는 길인데 벚꽃이 너무 예쁘네. 너에게도 보여주고 싶구나”라는 말로 제 마음을 전했습니다. 제가 만난 아름다운 풍경을 함께 보고 싶은, 또 언제고라도 보여주고 싶은 진심 때문에 말이지요.



벚꽃이 나리는 4월입니다. 그 꽃을, 내 오랜 벗과 함께 보고 싶습니다. 집으로 가는 길, 그렇게 매일 밤 저를 반겨주는 벚꽃을 친구에게 보여주고 싶습니다. 그 평온한 일상을 함께 공유하며 운동과 현실, 이 모든 것들에 지쳐버린 친구의 마음을 말없이 위로해주고 싶습니다.

벚꽃이 ‘벗’꽃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친구와 통화하던 순간을 찍어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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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기사 쓰느라 우울한 나를 위해 누군가 장미꽃 바구니와 케이크를 보내줬네요. 제 탄생화 장미와 제가 제일로 좋아하는 바나나 초코쉬폰 케이크를 보내준 그분의 센스에 박수를. ^^ 그렇지만 누군지 몰라요. 흑흑. ㅠㅠ 힘내라는 메시지만 있을 뿐 아무리 찾아봐도 이름은 없습니다.

그래도 고맙습니다. 너무 너무 기분이 좋아졌어요. 만날 꽃만 받으면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참 좋습니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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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잡지를 만든다는 건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요한다. 일요일 밤 11시에 모든 기사를 털었지만 아직까지 작업이 끝나지 않았다. 10일 내내 모든 사람들이 가이드북 작업에 달려들었는데 아무래도 그 때문에 과부하가 걸린 듯하다. 더구나 이번 마감에도 디자이너는 홀로 모든 걸 다 맡아서 해야 했다. 벌써 2달 째 혼자서 모든 디자인을 책임진거다. 게다가 이번엔 가이드북까지 맡아서 해야 했으니 체력이 바닥날 법도 하다.


기자들 역시 가이드북 작업에 매달리느라 기사 마감이 다들 늦었다. 그로 인해 디자인 작업도 늦게 끝났고. 그래도 일요일에서 월요일로 넘어가던 새벽 1시 반 기사 수정도 끝났고 해서 모든게 끝난 줄로만 알았다. 하여 룰루랄라 노래 부르며 드디어 마감이 끝났다고 포스팅까지 했건만... 아아, 마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다들 고생하는데 혼자만 잘 수 없어 힘들게 버텼다. 자면 안돼, 자면 안돼, 라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며. 그런데 이번 달 마감을 치르며 느낀 소감을 A4 용지 2장 가득 채운 다음부터 는 정신이 점점 아득한 나라로 도망가더라. 몰려드는 잠을 찾기 위해 음악도 들어보고 팔짱도 껴보고 체조도 해봤지만 결국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처음엔 턱을 괸 채 졸다 나중엔 너무 피곤한 나머지 엎드린 채 잠이 들고 말았다. 그 와중에 선배들은 애써 졸린 잠을 참으며 열심히 교정작업 중이었고.

아침 7시 쯤 눈이 번쩍 뜨였는데 얼마나 피곤했는지 침까지 흘리면서 잤더라. ㅠㅠ 그 이후에도 꾸벅 졸다 다시 번쩍 정신이 들었다가를 반복했다. 9시 쯤 조금 넘었을 때 차장님께서 아무래도 사우나 가서 한숨 자고 오후에 다시 오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남자들은 사우나에 갔고 집이 멀었던 난 디자이너 집까지 따라갔다. 사진기자는 함께 밤을 샌 게 아니라 잠에 취해 제 정신이 아닌 우리를 차로 데려다줬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조수석에 앉아 디자이너 집까지 가는 동안 창문 너머로 3월 햇볕이 따사로이 내리쬐며 나를 감싸는데, 뭐랄까. 순간 참 편안했고 또 평온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 그러니까 내 남자친구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3월의 아침햇살과 따뜻했던 분위기, 그리고 나를 감싸던 편안함이 좋았다. 그리고 내 옆에 그가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그대로 누워버렸다. 1시 반부터 전화가 왔는데 진동으로 했던 탓에 받지 못했다. 5번 쯤 울렸을 때 겨우 진동 울림을 느끼고 일어났다. 옆방으로 건너가 디자이너 깨우고 간단히 양치만 한 뒤 돌아갔다.

택시에 내리는 순간 아, 이제 정말로 봄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봄이라. 3월이면 기억나는 장면이 참 많다. 3월 초면 늘 담임 선생님은 누굴까. 짝은 어떤 아이일까. 반장선거는 또 어떻게 넘어가지. 그런 생각을 했더랬다. 그러다 덜컥 반장이라도 되는 날이면 3월 말까지 매주 주말은 '환경미화'를 위해 저당잡혀야했고. 그런데 생각해보니 6년 동안 환경미화와 관련해서 상을 받은 적이 한번도 없었네. 경비 아저씨 구박 받으면서, 나오기 싫다는 친구들 달래면서 용돈으로 떡볶이까지 사주며 주말 내내 준비했는데.

중학교 1학년 어느 봄날, 교복입고 터덜터덜 집으로 가다 유니온베이에서 팔던 티셔츠가 너무 예뻐 샀던 것도 생각나고, (그 옷을 난 10년 동안 입었다. 그말은 곧 중학교 1학년 때 성장판이 닫혔다는 걸 의미한다. ㅠㅠ) 내 방 바닥에 그대로 누운 채 창 밖 너머 하늘을 바라보며 봄을 느꼈던 중학교 2학년 어느 날도 생각나고, 또 4월이면 엄마가 늘 챙겨주던 딸기도 생각나고.

그렇지만 대학시절 추억 중 3월과 관련된 것들을 떠올려볼라치면 역시 술 밖에 없는 듯하다. 아직도 귓가에는 막갈리 찬가가 웅웅댄다. 학생회관은 여전히 사발식 때문에 웃고 울고 괴로워하고 떠드는 새내기들과 선배들로 가득하겠지. 아, 학교도 보고 싶구나. 3월 봄바람을 느끼며 친구들과 걸었던 중앙도서관 앞, 요기를 해결해주던 사대 앞 깡통, 나뭇잎 사이로 비치던 햇볕이 예뻤던 다람쥐길, 학생들로 늘 북적대던 민주광장, 3년 간 학보 만든다고 들락날락했던 홍보관까지.

옆에 앉은 서 선배는 지난 새벽에 이어 오늘 저녁에도 음악을 들으며 교정작업 중이시다. 일일DJ라며 노래신청도 받았는데 내가 부탁한 이소은의 서방님은 단박에 거절하셨다. 임 선배는 얘 또 첫사랑 생각나서 이런다고 놀린다. 얼마 전 지하철 역까지 가면서 내가 했던 이야기가 생각나서 그런가보다. 그 다음부터는 헬레나 첫사랑 이야기 들었냐면서 놀리시고.

참, 이 글을 쓰는 도중 집에 가신 차장님이 다시 와서 베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을 주고 가셨다. 아이스크림을 먹던 선배는 지하철 끊기 전에 가라고 하시네. ^^ 그리고 내일은 회식이 있으니 약속 잡지 말라는 말과 함께. 그리하여 내일 대전-전북 경기는 못가게 되는구나.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흥얼흥얼 노래를 따라 부르는 선배의 허밍이 좋고
이제 곧 책이 나온다는 사실이 좋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좋다.

그러나 입술은 부르텄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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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1
환율이 계속 오르고 있군요. 기러기 아빠들의 한숨소리가 여기까지 들립니다. 이러다 흉흉한 소식이라도 들리면 어떡하지요. 걱정이네요. 도대체 영어가 뭐길래요. 우리나라에 닥친 영어광풍 때문에 고생하는 이 땅의 아버지 어머니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참 남의 일 같지 않군요.


#2
화이트데이였습니다. 마감과 겹쳐 하루종일 틀어박혀 글만 써야했지만 나름 좋은 일 많았답니다. 분홍색 상자에 담긴 키티 사탕을 준 후배가 있었는가 하면 제가 좋아하는 초콜렛과 사탕이 종류별로 들어있는 아주 큰 유리병도 받았습니다. 제가 무지 무지 좋아하는 바닐라라떼와 빼빼로 2개는 덤이었죠. 아, 그리고 자작곡도 받았답니다. 모두 다 고맙습니다아. ^-^

#3
2007-08챔피언스리그 샬케04와 바르셀로나의 8강전 프리뷰 쓰는데 눈물 쏟아지는 줄 알았습니다. 분데스리가 경기는 우리나라에서 중계도 안 해주거니와 그쪽 나라 경기는 제 관심 밖이었기에 조사하면서 좌절도 많았고 다 포기하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도 들었습니다. 그나저나 L.메시와 Y.투레가 부상이군요. 속된 말로 “그간 L.메시가 다 해먹었다”고 볼 수 있는 바르샤지만 그래도 S.에투, 호나우딩요, T.앙리, 보얀, J.도 산토스 등 가용할 수 있는 선수들이 많습니다. 문제는 Y. 투레의 빈자리를 과연 누가 메울 수 있느냐겠죠. 우리 L.메시 또 다시 햄스트링 부상 때문에 잔디 위에 누운 채로 울려고 하는데, 마음이 아팠습니다. ㅠㅠ 불가능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하던 메시가 말이죠.

#4
지름신이 자꾸 강림하려고 합니다. 경기장 갈 때 들고 다니는 노트북이 너무 무거워 후지쯔에서 나온 5인치 짜리 노트북을 사고 싶어요. 캠코더도 업그레이드 하고 싶고요. D100은 이제 너무 낡은지라 기변을 하고 싶은데 요즘 자꾸만 D40X가 끌립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이 모든 것들을 유보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지요. 아아, 슬프군요.

#5
식목일에 친한 동생들을 만나러 경남을 가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네이트온 대화명도 바꿨지요. 식목일아, 빨리와~ ^-^라고요. 겸사겸사 만날 사람들이 참 많은데요, 그날 상민이가 맛있는 걸 사준다고 하네요. 불과 몇 달 전에 강남역에서 제게 밥 얻어먹던 우리 상민이가 K-리그 데뷔전도 치르고 신문에도 나오고 국가대표로도 뽑혔습니다. 참 신기합니다. 부디 지금의 이 관심에 흔들리지 않는, 뚝심있는 선수로 거듭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제가 무지 아끼는 동생이니까요.

#6
영화가 너무 너무 너무 너무 보고 싶습니다. 그런데 영화 보러 갈 시간이 없습니다. 왜 K-리그는 주말에 할까요? 저도 주말에 친구들 만나서 영화보고 수다떨고 제대로 좀 놀아봤으면 좋겠습니다.

#7
그렇지만 K-리그가 개막했다는 사실은 저를 기쁘고 행복하게 만드는 것 중 하나입니다. 경기장에 들어서면 잔디 냄새가 느껴지는데, 그것처럼 저를 가슴 설레게 하는 것이 또 있을까요. 작년 개막전 날은 비가 추적추적 내렸는데 다행히 올 시즌 개막전 당일은 하늘이 참 맑았습니다. 그러나 빅버드 4층은 여전히 미친듯이 바람이... ㅠ.ㅠ 그래도 좋습니다. 리그가 개막했잖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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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마감 중일 때, 초폐인의 모습을 달리는 헬레나의 모습입니다.
한번은 마감임박 당시 저랑 친한 만화가님께서 급작스럽게 방문하는 바람에
추리한 몰골로 추리닝을 입은 채 컴퓨터 앞에 있던
 정말 정말 정말 정말 감추고 싶었던 모습을 들켜버리고 말았죠. ^^;
그 분께서는 선물이라며 화이트 보드 위에다 쓱쓱 뭔가 그린 뒤 가셨답니다.
후에 보니 제 캐리커쳐였습니다. 하하 ^^

그렇지만 취재현장에서는 대략 이런 모습이랍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경기 후 염기훈 선수와 짧게 인터뷰할 때 모습입니다.
녹음용 MP3 플레이어를 자주 잃어버리는 탓에 요렇게 목에 걸고 녹음하죠.
이때만해도 염 선수는 무명이었죠.
교통사고 후 첫 복귀전이 대전과의 경기였는데
 저는 이 선수가 신인왕을 탈 거라고 시즌 초부터 짐작했었답니다.
그래서 이것 저것 물어봤는데 그러다보니 다른 기자분들도 오셔서 듣더군요. ^^

사용자 삽입 이미지
여긴 도쿄국립운동장이에요. 월드컵 전에는 한일전이 주로 요기서 열렸죠.
월드컵전용구장에만 익숙하다보니 참 열악하게 느껴지더군요.
일본인 기자분이 찍어준 사진이에요.
요 사진이 포포투에도 실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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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긴 대전월드컵경기장. 광주전이었을 거예요.
대전이 대승 거뒀던, 2006시즌 마지막 홈경기가 열리던 날이기도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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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원정경기에서 역전 결승골로 대전에 승리를 안겨줬던 헙슨 선수를 기억하시나요?
그 선수의 하나 뿐인 외동딸입니다. 처음엔 저 보면 도망가던 꼬마가 \
마지막 홈경기가 열렸던 날에는 제게 쪼르르 달려와 안겼어요.
정이 많이 들었는데 재계약에 실패하는 바람에 결국 헤어질 수밖에 없었죠. ㅠㅠ
뒤에 보이는 꼬마는 데닐손 선수 막내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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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나눔의 집에서 생활하시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필기 할머니께서 3월5일 아침 7시 45분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지난 1월 지돌이 할머니를 떠나 보낸지 채 100일도 안됐는데 이렇게 또 한 분의 할머니를 가슴에 묻은 채 보내는군요. 너무나 마음이 아프네요.

1925년 6월18일 경남 진양군 지수면 승내리에서 태어난 문필기 할머니는 1943년 가을 18살의 나이에 동네 아저씨의 말만 믿고 따라 나섰다가


중국 만주 위안소에서 2년이라는 세월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이제부터는 할머니가 하신 말씀 그대로를 나눔의집 홈페이지를 참고하여 여러분께 알려드립니다. 다소 충격적인 내용도 있습니다. 그래도 끝까지 읽어주세요.

“마을에서 일본인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50대의 아저씨가 공부도 하고 돈도 벌 수 있는 곳에 보내 주겠다고 하여 집에서 입던 옷 그대로 따라 나섰다가 트럭을 타고 부산까지 갔고 거기서 조선인 여자 4명과 함께 열차로 서울, 평양, 신의주를 거쳐서 만주의 ‘위안소’로 끌려가서 ‘위안부’(성노예) 생활을 하게 되었다.”

“우리들은 모두 만주에 있는 군위안소에 배치되었다. 그곳의 겨울은 매우 길고 아주 추웠다. 여름은 짧았고 우리나라의 가을 날씨 같았다. 위안소에는 30 명가량의 위안부들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조선인 위안부들이었다. 대개 18~19세가량 되었다. 위안소에서 가까운 부대소속 군인들이 교대로 파견 나와 보초를 섰다. 위안소에서 우리를 감독하고 돈표를 모아서 계산하는 일을 하는 조선인 남자 두 명이 있었다. 그들 중 한 사람은 우리들을 괴롭히지는 않았으나 키가 작은 또 다른 군속은 우리를 회초리로 때리고 지독하게 굴었다. 특히 위안부들이 일본인 군인들과 싸우거나 군인을 상대하지 않으려 하면 심하게 때렸다.”

“위안소는 일본식 집이었는데 위안소 주변에는 부대가 있었다. 위안소 건물 주위를 둘러싼 담도 있었다. 1층에는 우리를 감독하던 조선인 남자 두 명의 숙소와 식당이 있었다. 2층에는 위안부들의 방이 있었는데 다다미 한 장 반 정도의 크기였다. 위안부 한 사람이 한 개의 방을 사용했다. 처음에 위안소에 도착하자 성병이 있는지 처녀인지 등을 검사했다. 그 후 군의는 나에게 몇 달 동안 간호부일을 시켰다. 그래서 부상병의 상처를 소독하고 붕대로 감는 일을 배워서 했다. 그리고 병원의 빨래도 했다. 낮에는 병원 일을 하고 밤에는 군의가 나에게 자러 왔다. 나는 그 군의에게 처음으로 정조를 빼앗겼다. 여자에게 정조가 중요하다고 듣고 자랐고 내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으므로 내 몸을 버렸다는 생각에 많이 울었다. 간호부 일을 하는 동안은 군의 외에 다른 군인들은 상대하지 않았으나, 몇 달 후에는 간호부일을 그만두게 하고 위안부짓을 시켰다. 그러나 위안부짓을 하면서도 부상자들이 많을 때는 가끔씩 병원에 가서 간호부일을 해야 했다.”

“위안부들은 모두 똑같은 원피스를 입었다. 아침과 저녁으로 하루 두 끼의 식사만 주었다. 밥은 우리가 교대로 했다. 위안소에 있을 때 월경을 시작했다. 군인들이 많은 토요일, 일요일에는 월경 중에도 군인을 상대해야 했다. 그때는 참 괴로웠다. 평일 날 아침에 일어나면 함께 모여 조회를 하고 가끔 군인들이 나와서 방공연습을 시키기도 했다. 조회는 일주일에 서너 번 정도 했는데 위안소 마당에 모여 일본에 충성하자는 황국신민의 서사를 외우고 일본 군가도 불렀다. 그러나 일요일에는 장교들이 자고 가므로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이 대중없었다. 평일에는 군인들이 싸움터에 나가느라 낮에는 거의 오지 않고 저녁부터 왔다. 가끔 외출 나온 군인들이 낮에 왔다. 그래서 평일은 열 명 내외의 군인이 다녀갔다. 토요일과 일요일은 아침 여덟 시부터 군인들이 왔다. 토요일과 일요일은 점심밥도 주므로 하루 세 끼를 먹을 수 있었다. 밥 먹는 시간 외에는 계속 군인을 받아야 했다. 저녁 일곱 시 이후에는 장교들이 왔다. 장교들은 초저녁부터 와서 긴 밤을 자고 다음날 새벽이나 아침에 갔다. 군인들은 모두 일본인이었다. 조선인이 들어오면 붙잡고 실컷 울기라도 하겠는데 3년 동안 조선인 군인은 한 번도 못 보았다.”

“군인들은 위안소에 왔다갈 때 손바닥 반만 한 크기의 누런 색 돈표를 내고 갔다. 장교는 사병보다 더 많은 액수의 돈표를 냈다. 어떤 군인은 돈표를 안 내려는 이도 있었다. 돈표를 받으면 우리가 갖지 않고 우리를 관리하던 조선인 남자에게 갖다 주었다. 그러면 그 개수를 세어서 위안부 각자가 하루 몇 명의 군인을 받았나를 막대 그래프로 크게 그려 벽에 붙여놓았다. 나는 다른 위안부들보다 군인을 적게 받는 편이어서 자주 혼났다. 군인이 적은 평일은 열 명 내외를 상대했고, 토, 일요일은 40~50명을 상대해야 했다. 우리는 돈표를 갖다 주기만 했지 돈은 한 푼도 받지 못했다.”

군인들은 문 밖에 줄을 서 있다가 차례로 들어왔는데 서로 먼저 들어오려고 자기들끼리 싸우곤 했다. 그들은 각반을 벗고 기다렸다. 앞 사람이 위안소 안에 오래 있으면 빨리 나오라고 문을 두드리고 법석을 떨었다. 군인들은 위안소에 한번 들어오면 사병은 삼십 분, 장교는 한 시간 있을 수 있도록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대개는 5분 내외면 끝내고 나갔다. 군인 한 사람을 상대하고 나면 1층에 있는 목욕탕에 내려가서 소독약을 넣은 물로 밑을 씻고 와서 다시 군인을 받았다. 소독약이 목욕탕에 있었다. 군인들 중에는 여자를 오래 못 봐서 그런지 들어오자마자 사정해 버리는 이도 많았다. 나를 괴롭히거나 못되게 구는 군인에게는 죽을힘을 다해 반항했다. 그래서 군인과 싸우고 있으면 밖에 줄서서 기다리던 군인들은 시간 끌지 말고 빨리 나오라고 욕했다. 또 군인과 싸우면 많이 맞기도 했다.”

위안부 생활을 하면서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다. 어떤 군인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받아 주지 않는다고 술을 먹고 와서 칼을 뽑아 들고 행패를 부렸다. 또 어떤 군인은 술 먹고 위안소에 들어와 칼을 다다미에 꽂아놓고 성행위를 하는 사람이 많아 방바닥에 칼자국이 많이 있었다. 이것은 자기 하고픈 대로 실컷하게 해달라는 위협이었다. 그러다 안 되면 칼을 가지고 덤벼드는데 이럴 때는 빨리 피하거나 혹은 누가 찾는다고 거짓말을 시켜 내보내곤 했다. 그곳에 간 지 1년쯤 되었을 때 어떤 군인이 너무 괴롭히길래 나도 화가 나서 발로 찼더니 그는 내 옷을 다 찢고 발가벗겨 때리고 칼을 들이댔다. 그리고는 밖에 나가서 시뻘겋게 달구어진 인두 모양의 불쑤시개를 가지고 들어와 내 겨드랑이를 지졌다. 그 상처로 석 달 동안 고생했다. 특히 긴밤 자는 장교들은 여러 번 접촉을 요구하며 아주 귀찮게 굴어 밤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또 긴밤 자는 장교 중에는 술이 잔뜩 취해 들어와서는 밤새도록 다 토하고 잘 되지도 않으면서 접촉을 하려 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면 나는 비위가 상해 참을 수가 없었다.”

가족들이 미칠 듯이 그리워 매일 울고 남의 슬픈 소리를 조금만 들어도 울곤 했다. 나는 집 생각, 엄마 생각으로 마음에 병이 나서 몸져눕기도 했었다. 살고 싶지도 않았다. 우리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병원에 가서 성병검사를 받기 위해 소변 검사, 피 검사 등을 받았다. 위안소에 있을 때 나는 임질에 걸린 적이 있었다. 그래서 606호 주사도 맞고 약도 발라 나았다. 성병이 걸렸을 때는 군인을 상대하지 않고 쉬었기 때문에 그래도 지내기가 좀 나았다. 그 외에 다른 병을 앓은 적은 없었다.”

“내가 위안소에 간 지 3년째 되는 스무 살에 종전이 되었다. 갑자기 군인들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위안소에 오질 않아 편안하게 잘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련 군인들이 위안소에 들어와 총을 들이댔다. 그들은 우리의 옷을 벗기려 했다. 일본 군인들이 도망가고 나니까 이제 소련 군인들이 우리를 겁탈하려는 것이었다. 그때 우리를 관리하던 이북 출신의 조선인 남자가 큰일 났으니 쓰던 물건 모두 팽개치고 어서 도망가자고 했다. 그래서 그와 그의 부인, 기요코 그리고 나 이렇게 네 명이 함께 얼굴에 시커멓게 칠을 하고 위안소 건물 뒤로 돌아 나와 도망쳤다. 나머지 위안부들은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 각자 뿔뿔이 흩어졌다.”

“중국에서 뚜껑도 없는 화차를 타고 압록강까지 온 다음 걸어서 흥남에 도착. 그 후 밤낮을 걸어서 평양, 개성을 거쳐 서울에 도착하였고 그 곳에서 주먹밥과 고향 가는 기차표를 얻어 집에 돌아왔다. 고향에 와보니 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진주에서 여관을 운영하던 사촌 이모집으로 가서 일을 거들다가 목포, 광주, 전주등지의 술집에도 있었고 마산에서 대폿집을 하던 중, 36세 때 철도의 선로꾼을 만나 살림을 차렸으나 남편이 병들어 죽었고…”

그 뒤 할머니는 1992년 6월 피해자 신고를 하며 세상과 일본을 향해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하셨죠.

“동네 문방구에 가서 위안부에 관해 써 붙여 놓은 것을 보았고, 또 TV에서 위안부 출신 할머니들의 증언을 들었다. 그래서 나도 신고해서 억울함을 면할까 싶어 1992년 6월에 신고했다. 처음에는 신고하는 것을 매우 망설였으나 지금까지 내 가슴속에만 넣고 있던 것을 다 털어놓고 나니 가슴이 후련하다.”

2000년에는 국제인권변호인단이 수여한 인권상을 수상하셨고 2003년 10월9일 나눔의 집에 입소하여 지금까지 생활하셨습니다. 작년 3월 지병 악파로 병원 입원하기 전까지는 매주 수요일마다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리는 정기시위에 참석하셨고 작년 5월에는 미국하원 결의안 조속통과를 위한 영상편지를 발송하기도 하셨습니다.

이제는 만날 수 없는 할머니의 사진을 보며 박복했던 우리 할머니들의 삶을 생각하며 저는 또 눈물을 흘립니다. 할머니는 오늘 아침 한 줌 재가 되어 우리 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벌써 두 달 만에 두 명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를 보내야만 했습니다. 그 때문에 자꾸만 두려운 마음도 듭니다.


여기까지 읽으면서 일본인들이 저지른 만행에 분노가 느껴지신다면 매주 수요일 낮12시 일본대사관 앞에서 진행되는 정기 수요시위에 함께 해주세요. 이명박 대통령이 일본정부를 상대로 사과를 요구할 수 있도록 압력을 가해주세요. 해외 웹사이트를 통해 더 많은 세계인들이 알 수 있도록, 그리하여 분노할 수 있도록 이 사실을 널리 알려주세요. 나눔의 집에서 어렵게 생활하는 할머니들을 위해 정기후원회원이 돼 주세요.

세상을 바꾸는 힘은 이렇게 쌓이고 쌓여 나오는 것이라 믿습니다. 그러니 꼭 도와주세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문필기 할머니의 명복을 빕니다.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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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은 조선일보 대전지부 전재홍 기자께서 찍은 뒤 나눔의 집에 기증을 하셨다고 합니다. 전재홍 기자께 직접적인 허락을 받고 올리지는 못했으나 할머니의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자 포스팅 하는 과정에서 올렸기에, 혹시라도 이 글을 발견하신다면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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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나눔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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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오늘 아침 기온은 영하 10.1도. 추운 날씨 때문에 아침부터 걱정스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오늘은 일본군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수요시위가 열리는 날이었거든요. 게다가 800차를 맞는 날이기도 했고요.


시위에 참가하는 할머니들께서 고생하시겠구나,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습니다. 그래도 다행히 시위가 시작되자 날씨가 많이 풀렸습니다. 기상청 발표에 따르면 영하 5.1도더군요. 오늘은 많은 사람들이 수요시위에 참가했습니다. 800회를 맞이한다는 소식 때문이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요시위가 800회를 맞이하는 동안 바뀐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16년 동안 매주 수요일마다 일본대사관 앞에 모여 목소리를 높이지만 일본 정부는 여전히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 설 연휴기간 중에는 나눔의 집에서 생활하시던 지돌이 할머니께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할머니는 쓸쓸히, 그리고 조용히 우리 곁을 떠나셨죠. 그래서 더 마음이 무겁고 아팠습니다.


요즘 화두는 아무래도 숭례문인 듯합니다. 그래서인지 숭례문 앞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은 연길 끊이지 않고 있네요. 수요시위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도 저는 그곳을 찾은 많은 사람들을 봤습니다. 조화를 놓고 가는 사람들도 있더군요. 저는 사람들이 놓고 간 국화를 보며 많은 생각을 해봤습니다. 저 수많은 꽃들 중 지돌이 할머니의 넋을 위로하는 꽃은 왜 없을까, 라고요.



일본대사관 앞에서 만난 할머니들은 정기수요시위가 800회로 끝났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슬프게도 또 속상하게도 정기수요시위는 당분간은 계속 되겠죠. 일본정부는 여전히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은폐시키며 공식사과하지 않고 있으니까요.


어느새 일본군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수요시위는 800회를 맞이하지만 바뀐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더더욱 여러분들의 관심이 필요합니다. 할머니들의 아픔은 우리의 아픔이기도 하니까요. 할머니들의 목소리가 묻혀버리지 않도록, 그들만의 공허한 외침이 되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가슴 아픈 과거사가 더 이상 재현되지 않도록 말이죠.


800회를 맞은 정기수요시위에 참석하지 못한 분들을 위한 동영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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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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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저희 집은 차례를 지내지 않습니다. 친척들도 대부분 외국에 있기 때문에 명절은 늘 집에서 뒹굴대며 쉬는 날이지요. 그렇지만 올해 설 연휴도 그렇게 보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오래 전부터 계획을 세웠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계시는 나눔의 집에서 봉사활동을 하기로 말이죠.


2월 7일 설날 아침에 나눔의 집에 가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전날 저녁 가는 방법을 확인하기 위해 나눔의 집 홈페이지에 들어가 봤지요. 그리고 그곳에서 예상치 못한 소식을 접해야만했습니다. 지돌이 할머니의 별세 소식이었습니다.



결국 나눔의 집 봉사활동을 잠시 뒤로 미룬 채 저는 경기도 양평에 위치한 용문효병원에 가기로 했습니다. 발인은 2월 8일 아침 9시. 양평까지 가기 위해선 새벽 6시에 집에서 출발해야만 했지요. 그런데 문제는 그날이 아버지 생신이라는데 있었습니다. 아버지 생신은 음력 1월 2일, 설 다음날입니다. 연휴 때면 온 가족이 집에 있기 때문에 저희는 항상 아침에 함께 미역국을 먹으며 조촐한 잔치를 엽니다.


하지만 저는 그곳에 가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가족들에게 양해를 구한 뒤 양평으로 향했습니다. 추운 새벽 바람과 싸우며 도착한 그곳에서 저는 사진 속으로나마 지돌이 할머니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정말로 마음이 아팠던 것은 너무나 적은 사람들만이 할머니의 마지막을 지켰다는 사실입니다. 어쩌면 그것이 작금의 현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물이 났습니다. 이 글을 쓰는 저 역시 할머니들의 아픔을 모른 채 그저 하루하루 살아가기에만 바쁘죠. 할머니들의 피 맺힌 절규와 아픔, 잊고 싶은 상처가 얼마나 깊고 처절한지 전혀 모른 채 말입니다.


장례식장에 있던 사람들이 한명 씩 나와 자신이 기억하는 지돌이 할머니에 대해 이야기하다 눈물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도 눈물이 났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다시 영상편집을 하면서 또 한 번 울었습니다.


(영상이 조금 깁니다. 그렇지만 꼭 끝까지 봐주세요.)




1923년 6월 5일 경북 경주군 안강면에서 태어난 지돌이 할머니는 18살에 결혼해 남편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남편이 징병으로 끌려갔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중국 방직공장에서 일할 사람을 찾는다는 말에 속아 그만 1945년 3월 13일 흑룡강성 동령현 석문자 위안소에 끌려가고 말았습니다. 할머니가 겨우 23살이 됐을 때의 일입니다.


그러나 해방 후에도 한국으로 돌아올 방법을 찾지 못해 중국인과 결혼, 슬하에 1남1녀를 두었습니다. 그러던 중 1997년 나눔의 집 도움으로 생존이 확인됐고 2000년 6월 1일 귀국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공동체 나눔의 집에서 생활하게 됐습니다. 


그 후 2000년 11월 24일 국적회복이 허가됐고 이듬해 2월 8일 대한민국 국적을 회복했습니다. 나눔의 집에서 생활하시면서 수요일이면 일본대사관 앞으로 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알렸던 할머니는 최근 초기 치매 증세를 보이다가 결국 지병으로 2월 6일 오후 5시 24분 양평 용문효병원에서 끝내 운명하시고 말았습니다.


2월 8일 오후 1시 강원 인제 하늘공원에서 화장된 할머니의 유해는 나눔의 집 법당에 안치됐습니다. 그리고 지돌이 할머니의 별세로 이제 나눔의 집에 계신 할머니는 8명뿐입니다. 미 의회에서 위안부 결의안이 통과됐지만 일본은 아직 공식 사과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일본 정부는 이렇게 시간만 끌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다 피해자 할머니들이 모두 돌아가시면 일본군 위안부는 없었다고 발뺌하겠죠.



그것은 있어서도, 또 있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일본 정부의 사과를 받아내기 위해서라도 오래 오래 살 겁니다!”라고 외치셨던 할머니들도 언젠가는 모두 눈을 감으실 것입니다. 그 할머니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기 전에 우리 모두 힘을 모아 일본의 공식 사과를 받아냅시다. 여러분의 작은 관심들이 쌓이고 모이면 세상은 분명 바뀔 수 있을 것입니다. 

(사진을 보실 분은 이곳을 클릭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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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초등학교 4학년 때로 기억합니다. 예쁘게 포장된 선물 하나가 눈에 띄었습니다. 엄마 책상 위에 놓여 있었죠. 그리고 호기심을 참지 못한 전 엄마 허락 없이 그 자리에서 포장을 뜯고 말았답니다. 다들 이해하시죠? 그 나이 때는 종종 그런 법이잖아요.

"에이, 뭐야. 책이잖아. 무슨 포장을 이렇게 예쁘게 한 거야. 쳇." 그런데 중간 부분에 뭔가가 끼워져 있는 게 눈에 띄었습니다.

그 무엇인가는 다름 아닌 하얀 봉투였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수표 한 장이 있었습니다.


"엄마, 서점 아저씨가 실수했나봐. 모르고 책 안에다 돈 넣었어! 이 책 어디서 산거야?"

부엌에서 마늘을 빻고 있던 엄마는 깜짝 놀라며 도로 넣으라고 하셨죠. 다행히도 엄마 허락 없이 왜 포장을 뜯었냐는 야단은 맞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봉투 덕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로부터 14년 뒤 제 동생이 임용고사에 통과하여 '선생님'으로 불리게 된 그날, 엄마는 30여년 전 먼저 선생님이 된 '인생의 선배'로서 해줄 이야기가 있다 하셨습니다.

"누구나 처음 교단에 서게 되면 좋은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소망을 품게 되지. 그렇지만 매 순간 난관과 유혹에 시달리다보면 '좋은 선생님이 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스스로 품게 되곤 한단다. 그 순간을 슬기롭게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야. 아이들의 맑은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볼 수 있는, 그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는 것이지."

그러면서 자연스레 촌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셨습니다. 한번 받기는 어렵지만 두번 째 받기는 쉬운 법이므로 잠깐의 망설임이 있을지라도 거절할 줄 아는 용기와 지혜를 발휘하라고 말이죠. 엄마는 30년 가까운 교직생활 동안 우연히 받게 된 촌지 한 장도 넘어가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 엄마의 조언이었으니 더 깊이 새겨들 수 밖에 없었죠.

그렇지만 옆에 앉아 엄마와 동생과의 대화를 들으며 '촌지 이야기'는 제겐 먼 나라 이야기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정계나 재계 쪽에서 일하는 사람도 아니었고 교직에 있는 사람 또한 아니었으니까요. 프리랜서 글쟁이에게 촌지라뇨.



얼마 전부터 정기적으로 쓰게 된 기사가 있습니다. 바로 사업으로 자수성가한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성공 노하우를 알려주는 인터뷰 기사입니다. 오늘도 저는 그 기사를 쓰기 위해 한 분을 만나게 됐죠. 제가 만난 그분은 '기술혁신으로 세상을 선도하자'는 이념으로 회사 창설 20년 만에 우량기업으로 키워낸 대단하신 분이었습니다. 약 1시간 가량 그분의 이야기를 들으며 인터뷰어와 인터뷰이와의 만남을 넘어선, 개인적으로 많이 배울 수 있었던 뿌듯한 시간이었습니다.

인터뷰를 마친 뒤 인사를 드리고 나오려는데 그분이 제게 묻어군요. "식사하셨습니까?" 그리고 그 질문과 동시에 흰 봉투를 제 코트 왼쪽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깜짝 놀라 오른손으로 봉투를 꺼내려고 하자 다른 한손으로 제 손을 누르며 "제가 바빠서 식사 대접은 못하겠고 대신 이걸로 집에 가시면서 맛난 저녁 하십시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순간, 언젠가 엄마가 해줬던 그 이야기가 떠오르더군요.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기 위해선 단호하게 거절할 줄 아는 용기와 지혜가 필요하다는 그 말씀 말입니다.

그 봉투를 다시 그 분 손에 쥐어드리자 "아니 정성을 이렇게까지 거부하시나? **신문 기자, ##방송 기자 만났을 때도 안 이랬는데. 어려서 뭘 몰라서 그러는데 선배들한테 얘기 못 들었어? 이럴 때는 그냥 '고맙습니다'하고 받는 게 예의야"라며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말씀하시더군요.

어떻게 이 상황을 모면할지 몰라 일순 당황스러웠습니다.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한 일을 이렇게 예상치 못한 순간에 겪게 됐으니까요. 그래서 엄마는 지혜도 필요하다고 하셨나 봅니다.

"식사를 못 사주시는 게 마음에 남으신다면 다음에 시간 되실 때 알려주세요. 그때 맛난 식사 사주시는 걸로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돌려드리겠습니다. 설 잘 보내세요. 안녕히 계십시오."

그렇게 말씀 드린 뒤 건물을 나서는데 만감이 교차하더군요. 여러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가장 크게 들었던 생각은 '응, 잘했어. 헬레나.' 그것이었습니다.

제겐 꿈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두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 수 있는 그런 좋은 글을 쓰고 싶다는 오랜 꿈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진실된 글을 써야겠죠. 그리고 진실된 글을 쓰기 위해선 늘 진실된 삶을 살고자 노력해야겠죠. 그것은 곧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이라 외치며 고뇌하던 어린 날의 우상 윤동주 시인의 자세와도 같습니다.

제가 만약 '수백만 원 든 것도 아닐 텐데.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니까 고맙게 받자'라며 봉투를 받았다면 제 꿈은 영원히 꿈나라 속에서만 존재했겠죠. 스스로를 속이는 사람은 결코 좋은 글을 쓸 수 없을 테니까요. 그래서 혼자 흐뭇해하며 그렇게 찬바람 속에서도 연신 웃으며 집으로 돌아왔답니다.



언젠가 제게도 아이가 생긴다면, 그 아이가 첫 직장을 얻게 됐을 때 저도 오늘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겠죠. 그 옛날 제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더 기분 좋은 웃음을 지을 수 있었던 하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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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새벽부터 제가 살고 있는 서울에는 눈이 정말 정신없이 내렸습니다. 바람까지 심하게 불어 실로 오랜만에 또 제대로 눈보라를 보게 됐죠. 그런데 저는 그 눈보라를 뚫고 그곳에 갔답니다. 어디냐고요?


바로 ‘헌혈의 집’입니다.


지난 밤 전국적으로 혈액이 부족해 일부 병원에서는 수술이 중단된다는 뉴스를 봤거든요. 수혈용인 적혈구 농축액은 2.1일분 밖에 남지 않았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A형과 O형 혈액형이 0.6일치 밖에 남지 않았다는 심각한 소식을 들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마침 제 혈액형이 O형이더군요. 집에 앉아 뉴스를 보며 “큰일났군”이라 말하며 혀를 끌끌 차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바로 헌혈의 집으로 달려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잠이 들었지요.


물론 고민은 있었습니다. ‘날씨도 춥고 바람도 세고… 꼭 오늘가야만 하나?’라는 생각에 한참동안 망설였죠. 하지만 ‘피가 모자라’ 수술을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뉴스를 다시 한 번 떠올리며 집을 나섰습니다.


올해 제가 세운 여러 가지 목표 중 하나가 바로 ‘실천하는 지식인 되기’입니다. 비록 아직 지식인이 되기엔 멀었으나 일단 차근차근 실천부터 하자는 생각에 퍼뜩 헌혈의 집까지 한걸음에 뛰어갔죠.




이렇게 하여 헌혈을 하게 됐습니다. 태어나서 2번째로 하는 헌혈이었지요. 2002년 5월 4일에 했던 헌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으니 정말 오랜만에 한 거네요. 넷째 손가락에서 채혈을 한 뒤 혈액형 검사와 철분 검사를 했는데 다행히 O형 정상 판정을 받았습니다.


여성들의 경우 철분 수치가 낮아서 헌혈을 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네요. 저는 13이 나왔는데 그 정도면 아주 건강한 최고 수치라고 합니다. 사실 몸이 건강하지 못했던 시절이 있었던지라 그간 영양소를 고려하며 식사를 하곤 했는데 역시 보람이 있더군요. 


그리고 수술용 혈액이 부족한 현실을 감안해 320cc 전혈을 하기로 했습니다. 피를 뽑는 동안 궁금한 게 많았던 저는 계속 간호사 언니를 괴롭혔지요. 그래도 싫은 기색 없이 열심히 대답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


이렇게 하여 저의 헌혈의 집 원정기는 끝이 났습니다. 제 몸을 빠져나온 피는 무척이나 따뜻했답니다. 부디 그 피가 힘든 사람들을 위해 좋은 곳에서 잘 쓰여지길 바랍니다. 그리고 헌혈의 집을 나서며 “2달 후에 또 올게요!”라고 약속했는데요, 앞으로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건강하게 생활하려고 합니다.


참, 헌혈과 관련된 루머가 정말 많더군요. 일단 피를 뽑는 주사 바늘은 1회용입니다. 재활용은 절대 하지 않으니 세균 감염이나 에이즈와 관련된 걱정은 부디 내려 놓으세요. 그리고 제 주위 친구들 중에는 주사 공포 때문에 못하겠다고 하는데요, 솔직히 주사 맞는 것보단 훨씬~ 안 아프답니다.


잊지 말아요. 살짝 따끔한 찰나를 참을 수 있다면 당신은 생사의 갈림길에 놓인 환자에게 있어 귀중한 생명의 은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 헌혈을 통해 사랑을 실천해보아요! ^^

추신) 이 모습을 영상으로 담아준 플라잉 뭉치님께 감사 인사 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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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2008년 1월 2일 낮 12시 일본대사관 앞. 제 794차 일본군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수요집회가 열렸습니다. 2008년 새해 첫 정기수요시위기도 했지요.


날씨가 조금 풀렸지만 체감온도는 여전히 영하였습니다. 그 와중에도 일본군위안부 희생자 할머니들은 어김없이 일본대사관 앞을 찾았지요. 그리고 할머니들을 지지하는 시민들도 함께 했습니다.


추운 날씨 때문인지, 아니면 이제는 할머니들의 낮은 목소리가 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는
까닭인지 생각보다 시위에 참가한 사람들은 적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와중에도  정기수요시위에 참가하기 위해 중국, 일본,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외국인들이 비행기를 타고 이곳까지 찾아왔습니다.


<성명서 낭독 중>

지난해 13명의 일본군위안부 희생자 할머니들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이제 남은 할머니들은 단 109명 뿐. 이 할머니들이 모두 세상을 뜨기 전에 우리 모두 힘을 모아 일본정부로부터 공식사과와 법적배상을 받아야할 것입니다.


정기수요시위가 끝나고 저는 앞으로 열과 성을 다하여 할머니들을 돕기로 굳게 마음먹었습니다. 돌아오는 길, 미국인 친구 앤써니가 그동안 일본군위안부 할머니들과 관련한 다큐멘터리를 만들어(관련기사 http://blog.daum.net/dreamdiary/6894986) 세계 사람들에게 알릴 동안 저는 무엇을 했는지 역시 반성했습니다. 부끄럽더군요. 하지만 이젠 더 이상 반성하며 부끄러워하는 사람이 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2008년 새해 목표가 새로이 세워졌지요.


마지막으로 지난 해 우리 곁을 떠난 고 김우명달 할머니, 고 김옥순 할머니, 고 문부전 할머니, 고 진경팽 할머니, 고 황순이 할머니, 고 석복달 할머니, 고 이순선 할머니, 고 최주선 할머니, 고 김기아 할머니, 고 박우득 할머니, 고 서옥득 할머니, 고 강도아 할머니, 고 오랑 할머니의 명복을 기원합니다.


할머니들이 못 이룬 모든 것들을 남아 있는 저희들이 꼭 이루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그곳에서 편히 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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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12월 31일 밤 11시. “어서 오십시오”하는 운전기사의 목소리가 어쩐지 낯설다. 고개를 들어보니 여자다. 여자 버스운전기사를 보기는 또 처음이라 기사 바로 뒷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평소 가던 길이 아닌 광화문 바로 앞에서 안국동을 지나 대학로로 가는 길로 버스가 지나갔다. 알고보니 제야의 종 행사 때문에 광화문에서 종로 가는 모든 길에 차량통제가 이뤄졌다나.


문제는 운전기사 분께서 그 길이 초행이시라는 점. 옆 차선에 있던 운전기사에게 길을 물어 보기에 “그 길 제가 알아요”라는 말과 함께 나의 설명이 시작됐다. “직진이요.” “우회전이요.” “다시 직진이요.”


그러다 카운트다운이 시작됐고 나는 그렇게 버스 안에서 새해를 맞았다. 바람이 세찼기 때문일까. 버스 안은 추웠다. 길 설명도 열심히 해드렸는데 난방 좀 빵빵하게 해주시지. 괜히 심통이 나 MP3 볼륨을 높였다. 이어폰에선 영화 어거스트 러쉬, 엔딩 타이틀 'Someday'가 흐르고 있었다. 그래, 언젠가는.


그렇게 조용히 하루가 지날 줄 알았는데 새벽 3시 경 받은 전화 한 통은 결국 나를 울게 만들었다. 모르겠다. 더 가진 자의 여유일런지도. 무릇 인간관계란 더 많이 좋아하는 사람이 불리할 수밖에 없는 법 아니던가.


감정이 메말랐던 2007년은 지났고 나의 2008년 첫날은 이렇게 과잉으로 시작되고 말았다. 지인들은 자고 있냐는 문자에 답이 없었고 그냥 그렇게 잠이 들겠지 했는데 전화가 왔다. 철수였다.


철수는 그러니까 한달 전 밤문화 취재 때 알게 된, 일명 삐끼. 난 그 아이의 본명을 모른다. 그저 철수라는 다소 촌스러운 가명만 알 뿐. 알고 보니 철수라는 이름은 초등학교 교과서에 따온 이름이 아니란다. 내 머릿속의 지우개에서 정우성이 열연했던, 수진이가 한없이 사랑하고 또 사랑했던 남자, 그 ‘장철수’에서 갖고 온 이름이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 것만 같은 그 세계에서 녀석은 꽤나 로맨티스트였고 영화광이었다. 내 앞에서 온갖 영화의 대사를 줄줄 외는데, 그 자체만으로 내게 점수 만점을 딴 생각보다 멋진 녀석이다.


결국 난 아침 8시까지 철수와 통화를 했다. 자그마치 3시간동안. 처음엔 좋은 부모 밑에서 걱정 없이 자라 대학까지 다닌 철없는 아이의 투정이라며 나를 야단치던 녀석은 결국 내 이야기를 열심히 들어줬고 또 그러다 결국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 어쩌다 빚을 지고 결국 2탕씩 뛰며 돈을 벌어야하는지 남김없이 내게 알려주었다. 그 중에서 영화 속 수진이 같은 공주님과의, 지금은 모 방송국에서 AD생활을 하고 있는 옛 여자 친구와의 사랑 이야기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아이 철수야, 고마워. 두바이에서도 열심히 일 하렴.


2008년 첫날밤은 대략 그렇게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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