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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만원 세대’를 아는가. 여기서 88만원은 비정규직 전체 평균 임금인 119만원에 20대 평균 소득 수준 비율인 74%를 곱한 수치를 뜻한다. 그러나 88만원 세대는 88만원의 월급을 받으며 살아가는 청년 비정규직만을 지칭하는 말은 아니다. 그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20대의 불안한 현실을 상징한다. 또 K리그 연습생들의 고단한 삶을 투영하고 있다.


K리그의 88만원 세대들

지난해 2008K리그 신인선수 선발 드래프트에서 ‘선택받은 자’는 91명이었다. 드래프트 전체 신청자의 31.3%에 불과한 수치다. 그 중 28명은 번외로 지명됐다. 프로축구연맹은 2006년부터 신인선발 드래프트제를 다시 도입했다. 번외지명은 6라운드까지 선수를 선발한 뒤 이뤄진다. 순위 외 선발이기 때문이다. 2006년에는 12명의 선수가 번외로 뽑혔지만 2007년 31명, 2008년 28명으로 점점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수치상으로 각 구단이 번외지명을 적극 활용하고 있음이 한눈에 보인다.

1순위로 입단한 선수들은 5000만원의 연봉을 받게 된다. 이에 반해 번외지명 선수들이 받는 연봉은 1200만원에 불과하다. 번외지명된, 소위 ‘연습생’이라 불리는 그들은 우리 사회의 또 다른 ‘88만원 세대’다. 그러나 연봉 1200만원을 열두 달로 쪼개 매달 통장에 들어오는 돈이 100만원이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숙소 생활을 하기 때문에 관리비 명목으로 매달 10만원(수원 5만원, 제주·포항 없음)이 빠져 나간다. 결국 이들이 손에 쥐는 월급은 대략 90만원 선. 만약 국민연금이나 보험에 가입했다면 이보다 더 적은 돈을 받게 된다.

번외지명 제도는 구단 입장에서 볼 때 싼 가격에 쓸만한 선수들을 찾는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특히 자금력이 부족한 구단에게는 유용한 선수 수급수단으로 활용된다. 구단 살림살이가 어려워 검증되지 않은 선수에게까지 많은 돈을 주기란 힘들기 때문이다. 마지막 6순위로 선수를 뽑는다 해도 벌써 연봉이 2000만원에 육박한다. 하지만 이 돈에 400만원만 더 얹으면 번외지명 선수 2명을 뽑을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대전은 지난 드래프트에서 무려 5명의 선수를 번외지명으로 선발했다. 대전 이외의 구단들도 금전적 부담이 덜한 연습생 영입에 갈수록 높은 관심을 보인다. 물론 그들은 “번외지명이 프로를 꿈꾸는 선수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준다”며 서로에게 윈윈(win-win)이라 설명한다.

그렇지만 과연 윈윈이라 할 수 있을까. 냉정히 말해 그 기회란 것도 ‘1년’동안만 제공될 뿐이다. 번외지명 선수들이 그 짧은 시간 안에 자신의 기량을 십분 드러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스타 선수들 틈에서 주전 자리를 차지하기는커녕 2군리그에서조차 살아남기 힘든게 사실이다. 때문에 대부분의 번외지명 선수들은 매년 계약이 끝남과 동시에 흔적 없이 사라지곤 한다. ‘연습생 신화’를 꿈꾸며 입단했지만 결국은 한낱 ‘꿈’에 불과했다는 ‘슬픈’ 결말에 고개를 떨구는 것이다.

어렵고 좁은 길

2007드래프트에서 번외지명된 선수들 중 재계약에 성공한 이는 극히 드물다. 김민구 강수일 안재곤(이상 인천) 최찬양(수원) 조성준(전북) 김민(울산) 정도다. FC서울에 있던 김바우는 대전에 입단했다. 이들 중 강수일(2경기 1도움) 조성준(3경기 1도움)만 1군 경기에 데뷔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번외지명 선수들은 ‘연습생 신화’로 포장되는 성공담이 ‘자신의 이야기가 될 것’이라는 희망을 놓지 못한다.

2006년 드래프트 부활 이후 가장 성공한 연습생을 꼽으라 하면 열에 아홉은 배기종을 거론한다. 배기종은 2006드래프트 당시 번외로 대전에 입단, 주전(27경기 7골3도움)으로 도약하며 신인왕 후보로까지 거론됐다. 비록 시즌 말미에 사전접촉 의혹으로 임의탈퇴, 선수제명위기에 몰렸지만 2007년 수원으로 팀을 옮겨 여전히 선수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주전은 아니지만 교체로 꾸준히 출전(17경기 2도움)하는 그의 모습은 후배 연습생들에게 희망을 안긴다.

지난해 426경기에 출전하며 철인신화를 쓰고 있는 김기동도 1991년 연습생으로 프로생활을 시작했다. K리그 베스트11에 빛나는 장학영도 시작은 연습생이었다. 그리고 이들처럼 성공신화까지는 아니더라도 연습생으로 시작, 꾸준히 1군 경기에 얼굴을 내민 선수들이 있다. 2000년부터 2003년까지 40경기에 출장하며 대전의 특급교체선수로 활약했던 박경규, 2003년 광주에서 이동국 김상식 등 국가대표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한상구가 그 예다.

88만원 세대의 선택과 길

변병주 감독은 “연습생 생활을 감수하면서까지 프로에 몸담고 싶은 마음을 공감한다”며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선수들의 목표는 같다. ‘대표 선발’과 ‘프로 입단’이다. 그렇기 때문에 연습생들은 100만원도 채 안 되는 월급을 받고도 어떻게든 프로생활을 이어가려 하는 것이다.” 인천에서 연습생으로 뛰다 최근 재계약에 성공한 강수일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돈보다 중요한 것은 경험이다. 그 경험을 K리그에서 쌓을 수만 있다면 돈 없이도 좋다고 생각했다. 열심히 하면 돈은 따라오는 법이니까. 그보다 중요한 것은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한 노력과 결과를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정신이다. 그 때문에 해마다 연습생이라도 좋다며 K리그 문을 두드리는 선수들이 생기는 것이다.”

한편 변병주 감독은 “최선을 다한다면 연습생이라도 빛을 볼 수 있다. (이)근호도 노력으로 스타가 된 경우 아닌가. 좌절하지 말고 스스로 ‘대기만성형’이라 생각하며 이겨내라”는 말도 덧붙였다. 변 감독의 당부에는 계약종료 후 자신을 책망할지도 모를 선수들을 향한 배려가 숨어 있다. 요지는 이렇다. 무릇 프로란 전문 의식을 갖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지칭한다. 그러므로 재계약에 실패하여 팀을 떠나게 되더라도 최선을 다했다면 스스로를 프로로 생각하라는 말이다. 길은 또 다시 시작되는 법이니까.

팀을 나오게 된다하더라도 축구인생은 연습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하위리그에서의 새출발도 생각해볼 수 있겠다. 실제로 K리그를 떠난 선수들 중 많은 이들이 내셔널리그에서 제2의 축구인생을 시작한다. 현재 내셔널리그는 과거 실업축구의 한계를 딛고 지역 연고제를 정착, 준 프로리그로의 면모를 갖춰나가고 있다. 비록 두 시즌 연속 승격제로 많은 논란이 있었지만 내셔널리그의 발전 가능성은 무한하다. 그곳에서 뛰는 선수들 역시 리그와 함께 성장하며 못다 이룬 꿈을 펼치고 있다.
 
2006신인선수 드래프트에서 번외지명으로 FC서울에 입단했던 오기재는 2007년 안산할렐루야로 이적해 팀의 주전으로 활약하고 있고, 2006년과 2007년 각각 번외로 울산에 지명됐던 장재완과 윤동헌은 안산 할렐루야에서 새로이 출격준비 중이다. 부산의 장신 공격수 오철석도 빼놓을 수 없겠다. 포터필드 감독 재임 시절 많은 기대를 받았지만 이에 부응하지 못했던 그는 부산교통공사로 1년간 임대돼 실전감각을 키웠다. 2006년 전체 1순위로 대구에 입단했던 황금성은 주전이 보장되지 않자 2007년 인천한국철도로 옮겼다. 2000시드니올림픽대표 출신이지만 전북에서 오래 무명생활을 하던 고민기도 고양국민은행 이적 후엔 주전으로 도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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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지난 주말 대전월드컵경기장에서 대전시티즌과 제주유나이티드와의 2008K리그 2라운드 경기가 열렸습니다. 대전시티즌 개막 첫 홈경기 때문에 더욱 기대가 컸던 경기였죠. 이날 대전시티즌 서포터스 퍼플크루 분들께서 열심히 준비한 휴지폭탄이 사방에서 터져 장관을 연출했답니다. 비록 아쉽게도 대전시티즌이 0-2로 패했지만 개막전인지라 나름 뜻깊고 특별했던 날이었습니다. 미처 경기장에 가지 못한 분들을 위해 보여드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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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어린 시절 집 앞 마당에는 제 이름을 딴 나무가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늘 그 나무 앞에 저를 세워놓곤 했죠. “3cm나 자랐네? 우리 딸 다음 달에는 얼마나 더 자랄까? 빨리 나무만큼 커야지.” 그렇게 저는 나무와 함께 자랐습니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저의 성장을 대견스러워하셨고요. 세상 모든 어머니들의 마음은 무릇 그런 법이랍니다. 하지만 그땐 너무 어렸나봅니다. 그 마음을 채 헤아리지 못했으니까요.


혹시 2006년 3월 12일이 어떤 날이었는지 기억하시나요? 짐작컨대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떠올릴 수 있는 이는 아마도 무척 드물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먼저 말씀드립니다. 그날은 K-리그 개막전이 열린 날이었습니다. 또한 제가 프레스 카드라는 걸 처음으로 들고 갔던 날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더욱 잊을 수 없는 그런 날이지요. 그럴 수 밖에요. 기자 데뷔전을 치룬 날이니까요. 그러고 보니 프레스 출입구를 찾기 못해 혼자 수원월드컵경기장을 두 바퀴나 돌았던 기억도 나는군요.

그날, 자원봉사자들을 잡고 물어 물어 겨우 경기장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어느새 선수들은 에스코트 키즈 손을 잡고 필드 안으로 들어서더군요. 그때 낯선 얼굴 하나가 보였습니다. 출전선수 명단을 살펴봤습니다. 이청용.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습니다. 프로에 입단한지 벌써 3년이나 됐다고 했지만 평소 2군리그를 챙겨보지 않던 제겐 무척이나 생경한 선수였죠. 설렘과 긴장이 가득한 얼굴로 K-리그 데뷔전을 치룬 열아홉 소년, 이청용. 그는 그렇게 제 앞에 나타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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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로부터 꼭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습니다. 아침부터 굵은 빗방울이 떨어졌던 지난 3월 4일. 귓가를 스치는 바람은 차가웠지만 상암 잔디를 적시던 봄비만은 참으로 따뜻했습니다.아마 이청용 선수에게는 더 그랬겠지요. 조금은 먼 미래에 이뤄질 거라 생각했던 데뷔골을 터뜨린 날이니까요. 지난 1년 동안 잠시 잊고 있던 이 미완의 청춘은, 봄비 속에서 아름답게 꽃망울을 터뜨렸습니다.

작년 전북과 치렀던 홈 개막전이 생각납니다. 당시 그는 경기 초반 받은 옐로우 카드를 의식했는지 다소 소극적인 모습으로 뛰었습니다. 결국 전반 29분 한태유 선수와 교체되고 말았습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라커룸으로 들어가던 그 뒷모습을 저는 아직도 기억합니다. 그래서일까요? 껍질을 깨고 나온 지금의 모습이 그저 대견스럽기만 하네요. 한없이 작고 여리게만 봤던 존재가 어느새 이렇게 자랐으니 말입니다.

작은 꽃씨가 바람을 타고 뿌리를 내리고 잎을 틔우는 모습은 말없이 지켜보는 이에겐 무한한 충만감을 안겨줍니다. 문득 그 옛날 제 어머니의 마음도 그랬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다음 달에는 얼마나 더 자랄까?”라고 묻던 어머니처럼 그에게 묻습니다. “여기서 얼마큼 더 자라 우리를 또다시 놀라게 할 생각인가요?”

다들 아시겠지만 요즘 K-리그 최대 화두는 이청용 선수입니다.
리그가 개막한 지 이제 막 한 달이 지났지만 그 기간 동안 이청용 선수가 보여준 모습들은 또래 선수들의 수준을 초월했다는 탄성이 절로 나올 만합니다.


언제부턴가 자연스레 그의 이름이 검색순위 상위에 오르기 시작됐고 하루가 멀다 하고 관련 기사가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청용 선수는 특유의 묵묵함으로 애써 넘어가려고 합니다. “요즘 너무 좋겠어요”라는 말에도 그저 “아니에요”라고 답할 뿐입니다. 사실 이청용 선수는 좀처럼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꼭 한번 마음 속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습니다.

“작년에 정말 많이 힘들었어요. 운동은 원래 힘들 수밖에 없어요. 그렇지만 1군에 있다 다시 2군으로 내려갔을 때, 그땐 참 힘들었어요. 처음엔 제가 못해서 간 거였으니까 괜찮았는데 사람들이 자꾸 괜찮냐고 물어보더라고요. 걱정해주는 그 마음은 알겠지만 너무 많은 사람들이 물어보니까 나중에는 ‘다른 사람들이 봤을 땐 이게 안 괜찮은 거구나…’라는 생각이 들고… 그러다 보니 속상한 마음도 들고… 혼자서 잘 이겨내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여러 말들이 들려오니까 마음이… 그랬어요.”

소년, 이청용은 열여섯이란 어린 나이에 축구선수가 되고 싶다는 꿈을 이루고자 프로에 왔습니다. 축구, 그 하나만을 생각하며 뛰어든 것이죠. 고민은 사치에 불과했고 애써 축구화 끈을 조여매여 외면해야만했습니다. 소년에게 미래는 안개 속의 풍경과도 같았고 자유는 내일을 위해 저당 잡힌 상태였습니다. 오늘 쉬면 내일 뛰어야한다는 생각 때문에 작은 일탈조차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지난 해 여름 FC서울이 컵대회에서 우승했던 날에도 모두들 건배를 외치며 즐거워했지만 이청용 선수는 조용히 숙소로 돌아갔답니다. ‘하루쯤은 괜찮지 않겠어?’라는 유혹을 뒤로 하고 말이죠. 그날 밤에도 잠들기 전, 언제나처럼 야간조명 아래에서 홀로 공을 찼죠. 그렇게 매일 다시 1군 무대에서 뛸 그날을 꿈꿨습니다.

“축구하는 게 그냥 좋았어요. 아직도 제가 어떻게 해서 프로선수가 됐는지 모르겠어요. 그냥 공차는 게 좋았을 뿐인데… 지금도 그래요. 전 이제 스무 살이에요. 그건 말이죠 이제 시작이라는 말과 같은 뜻이에요.” 그의 말을 들으며 어쩌면 지금의 관심이 버거운 짐일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일찍 프로에 뛰어든 탓에 어른스럽게 보이지만 그는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소년일 뿐입니다. “중학교 때 전교생의 응원을 받으며 결승전에서 뛰었던 날이 제일 신났어요. 다음 날 피곤해서 수업 시간에 졸았는데 선생님들도 그냥 넘어가주시고 학교 친구들도 축구부 최고라고 축하해주고… 지금껏 축구하면서 가장 즐겁게 뛴 경기였어요.” 덧니까지 보이며 웃었던 그 모습을 생각하면 더 그렇습니다.

“술은 한 번도 입에 대본 적 없는데… 앞으로도 그래야죠.”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싶어요. 그게 제 꿈이에요.” “축구 그만 두면요? 어렸을 때부터 빵을 너무 좋아했어요. 빵집 주인이 되고 싶어요!” "밥도 잘 먹어요. 살이 안 쪄서 그렇죠. 엄마가 해주는 김치찌개가 제일 맛있어요. 김치찌개 있으면 밥 세 그릇 뚝딱이에요.” “여행 많이 다녀보셨어요? 어느 나라가 제일 좋았어요? 축구만 하고 살아서 여기 저기 다녀본 적이 없어서 궁금한 게 많아요. 참. 저는 꼭 한번 홍콩에 가보고 싶어요.”

이렇듯 어린 시절부터 축구 하나만 생각하며 뛰었기에 하고 싶은 것도 모르는 것도 참 많습니다. 어머니의 마음으로 바라보는 이유 역시 그 때문인지 모릅니다.사실 마음 한편에는 지금의 관심과 열광이 금세 돌변하면 어떡하나, 하는 염려도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껏 그런 순간과 과정들을 꽤 많이 봤으니까요. 그러다 혹 다치는 것은 아닌지 벌써부터 걱정됩니다. 한번 부러진 민들레 줄기도 낫기까지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자연이 그럴 지언데 사람 역시 예외일 수는 없겠죠.

“항상 좋을 수만은 없어요. 갑자기 슬럼프에 빠질 수도 있겠죠. 주전은 언제든지 바뀌는 법이고요. 언젠가는 그런 순간과 만날 거예요. 많이 힘들겠지만 그래도 이겨내야죠. 혼자서 이겨내는 수밖에 없어요. 누구도 대신할 수는 없으니까요. 지금껏 잘 극복했으니까 앞으로도 잘 할 거라고 믿어요. 저는 제 자신을 믿어요.”

그리고 덧붙여 말합니다.

“그래도 조금씩 조금씩 기대가 커져가는 건 사실이에요.”

어쩜 그건 우리가 이청용 선수에게 하고 싶은 말일지도 모릅니다. 그는 또 얼마나 자란 모습으로 우리를 경이감에 빠뜨릴까요? 아이의 성장에 웃음 짓던 어머니의 마음으로 오래도록 지켜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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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지난 토요일(8일) 2007K리그 우승팀 포항과 2007FA컵 우승팀 전남과의 개막전을 시작으로 일요일(9일)에는 6개 구장에서 K-리그 시작을 알리는 휘슬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개막전 집계 자료에 따르면 총 172,142명의 관중이 입장, 역대 개막전 최다 관중 기록을 수립했다고 합니다. 기존 기록은 2003년 143,981명이었네요.



제가 찾은 수원월드컵경기장에는 총 30,132명의 관중이 찾았습니다. 2번째로 많은 관중들이 경기장을 방문했죠. 참고로 1위는 부산-전북전(32,725명)입니다. 황선홍 감독의 데뷔전이자 안정환(부산)과 조재진(전북)과의 만남, 그리고 빅뱅의 공연으로 여러모로 이목을 끌었는데 역시나 많은 관중이 입장했네요.

“선수들이 경기장을 찾은 팬들에게 좋은 선물을 드렸습니다. 경기 시작 전 많은 관중이 왔으니 꼭 이겨야한다고 강조했는데 만족스러운 결과를 낳아 기쁩니다.” 에두의 연속골로 2-0 승리를 거둔 차범근 감독의 소감입니다.



그러나 팬들 역시 선수들에게 멋진 선물을 안겨줬죠. 수원 서포터스 그랑블루는 이번 개막전에도 멋진 카드섹션을 보여줬습니다. 별 4개가 반짝이더니 이내 푸른제국이라는 글자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아주 짧은 시간동안 진행된 카드섹션을 위해 얼마나 많은 준비를 했을까요? 팀을 향한 넘치는 사랑이 없었다면 불가능했겠죠. 선수들 역시 그 마음에 보답하고자 열심히 뛰었고 그 덕분에 수원은 개막전에서 2-0으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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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광판 아래까지 올라가서 경기를 보던 서포터도 있더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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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서포터스의 '수원사랑' 어떤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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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2008K리그 개막도 얼마 남지 않았네요. 채 일주일도 안 남았으니 말이에요. 이번 시즌에도 많은 외국인 선수들이 팀을 옮기는 대이동을 했습니다. 뽀뽀와 까보레, 따바레즈처럼 한국을 떠나 새로운 리그에서 새출발을 시작한 선수들이 있었는가 하면 더 좋은 조건 하에 다른 팀으로 옮긴 선수들도 있었습니다. 오늘 제가 소개할 선수들은 후자입니다. 소속팀에서의 활약 덕분에 타 팀에서 열렬한 구애를 보냈고

그 덕분에 올시즌부터는 새로운 유니폼을 입고 시작하는 외국인 선수들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브라질 삼총사 데닐손, 루이지뉴, 두두가 바로 오늘의 주인공입니다. 분석글이다 보니 편하게 말을 놓겠습니다. 감안하시고 읽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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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를 부르는 브라질 탱크, 데닐손
3월4일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2007K리그 개막전에서 대전은 수원에 2-1로 패하며 불안한 출발을 보였다. 이후 8경기 무승(4무4패)을 기록하며 팀 전체는 수렁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꿋꿋이 제 몫을 한 선수가 있었다. 데닐손이다. 연속무승행진을 기록하던 기간 중 대전이 올린 전체득점은 겨우 7골. 그중 절반(4골)이 넘는 골이 데닐손의 발끝에서 터졌다. 데닐손의 진가는 이후 더 드러나기 시작했다. 대전은 4월15일 전북전에서 2-0으로 승리하며 뒤늦게 시즌 첫 승을 신고했다. 2골 모두 데닐손의 작품이다. 4월18일 광주전에서는 1-0으로 이기며 창단 10년 만에 100승 고지에 올랐다. 데닐손의 결승골 덕분이었다. 4월은 데닐손에게 ‘잔인한 달’이 아니었다. 데닐손은 5경기 연속골(4월7일~4월22일) 행진을 펼쳤고 대전 선수들은 그에게 ‘데닐신(神)’이라는 별명을 지어줬다.

데닐손은 대전에서 다양한 진기록들도 세웠다. 데닐손은 4월11일 열린 컵대회 서울전에 전반 35초 만에 선제골을 넣었다. 2007시즌 최단시간 골 기록이었다. 물론 한 달 뒤에 방승환(11초)에 의해 밀려났지만 K리그 전체로 봤을 땐 12위에 해당한다. 9월22일 대구전에서는 해트트릭에도 성공했다. 전반 42분 만에 3골을 성공시켰고 이는 2007시즌 최단시간 해트트릭 기록으로 남았다. 동시에 대전에게는 창단 이래 첫 해트트릭을 선물했다. 데닐손은 후반 12분에브라질리아의 추가골을 도왔고 ‘북치고 장구까지’친 데닐손 덕분에 대전은 홈에서 4-1 대승을 거뒀다.

대전은 2007시즌을 데닐손 타이슨 페르난도, 이렇게 세 명의 용병과 함께 시작했다. 그러나 야심차게 영입한 타이슨은 부상에 시달리며 경기에 나서지 못했고 페르난도는 리그 적응에 실패했다. 국내 공격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최근식은 부상-수술-재활 수순을 밟고 있었고 우승제는 슬럼프가 심했다. 정성훈만 간신히 면치레 하는 수준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데닐손은 꾸준히 제 기량을 보여줬으니 대전 입장에선 구세주일 수밖에 없었다. 데닐손은 지난해 24경기에 출장하며 14골이나 넣었다. 득점순위로만 따지면 18골을 넣은 까보레에 이은 2위다. 데닐손을 처음 영입했던 최윤겸 前감독은 “골 결정력이 탁월하다”며 칭찬했다. PO에서 데닐손을 상대했던 박병규(울산)는 “탱크처럼 힘이 상당히 좋아 애를 먹었다”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데닐손은 파워 넘치는 드리블러답게 문전 앞까지 위협적으로 달려드는 스타일이다. 찬스가 생기면 놓치지 않고 바로 슈팅으로 연결한다. 슈팅수로만 따지면 87회로 정규리그 1위다. 어찌보면 골 욕심이 많아서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데닐손은 골 수당 때문에 과욕을 부리는 일부 용병들과 다르다. 그의 진가는 슈바 영입 이후 더욱 드러났다. 대전은 여름 휴식기 동안 타이슨과 페르난도를 내보내고 슈바와 브라질리아를 데려왔다. 지난 시즌 데닐손이 올린 5도움 중 4도움이 바로 이들의 합류 이후 이뤄진다. 특히 슈바와의 콤비 플레이가 눈부셨다. 3경기 연속도움(9월22일~10월6일)도 이때 이뤄졌다.

후반기 대전은 3-4-3에서 4-3-3 포메이션으로 새 옷을 입었다. 최전방 데닐손을 중심으로 좌우날개로 브라질리아와 슈바가 섰다. 그러나 라인을 따라 뛰는 브라질리아와 달리 슈바는 살짝 처진 상태에서 데닐손과 자주 스위칭을 시도하며 그를 도왔다. 확실히 데닐손 혼자 고분분투하던 전반기와는 달랐다. 시즌 종료 후 몸값이 오른 데닐손은 아랍에미레이트리그에서 뛰기로 결정하며 11월 중순 경 두바이로 떠났다. 그러나 러브콜을 보냈던 감독이 성적부진으로 경질되는 바람에 허공에 붕 뜬 상태가 됐다. 다행히 포항이 적극적인 영입의사를 밝혔다. J리그 某팀보다 더 좋은 조건이었다. AFC챔피언스리그에 출전한다는 사실도 그의 마음을 크게 움직였다.

지난 시즌 우승팀 포항은 3-4-1-2 포메이션으로 성공시대를 이뤘다. 올해도 포메이션은 크게 변화되지 않을 전망이다. 부상이라는 이변이 없는 한 투톱 중 한 자리는 데닐손 몫이다. 데닐손의 짝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알도, 이광재, 남궁도, 고기구 중 유력한 후보는 알도와 남궁도다. 그중 데닐손-남궁도 투톱이 눈여겨볼만하다. 동계훈련 기간 중 데닐손은 남궁도와 함께 뛰며 루미니아1부리그 소속팀 U.클뤼를 2-0으로 눌렀다. 골도 사이좋게 하나씩 기록했다. 데닐손을 향한 파리야스 감독의 믿음은 크다. 지난 해 야심차게 영입한 마우리시오(전반기) 슈벵크 조네스(이상 후반기) 모두 ‘실패한 농사’로 평가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올해는 다르다. 그 중심에 데닐손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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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의 별을 꿈꾼다, 루이지뉴 
2006시즌 대구FC 브라질 트리오 에듀(3골) 지네이(4골) 가브리엘(2골)이 성공시킨 골은 도합 9골이다. 용병 셋의 합작이라고 말하기엔 심히 부끄러운 성적표다. 그래서일까. 이듬해 박종환 감독 후임으로 온 변병주 감독은 터키에서 진행된 동계훈련 기간 동안 용병 영입에 가장 큰 신경을 썼다. 그런데 때 마침 변 감독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은 선수가 나타났다. 그가 바로 루이지뉴다. “루이지뉴는 화려한 드리블과 빠른 스피드, 거기다 골 결정력까지 겸비한 선수였다. 보는 순간 ‘저 선수다’ 싶었다.”

루이지뉴는 산토스FC의 촉망받던 유망주 중 하나다. 1997년 산토스 유스팀에 들어가 호빙유(레알마드리드) 디에고(브레맨) 등과 같이 축구를 배웠다. 그중 디에고와는 함께 방을 쓰며 우정을 쌓았다. U-17 및 U-20대표팀(2001년~2005년)에서 뛰었으며 파리아스 감독과 그때 처음 연을 맺었다.

루이지뉴를 향한 변 감독의 신뢰는 컸다. 루이지뉴는 그 덕분에 FC서울과의 개막전을 시작으로 3월 첫 달, 6경기 연속 선발출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플레이는 감독의 기대와는 반비례했다. 개막달 루이지뉴가 기록한 골은 단 2골. 그것도 2번 모두 필드골이 아닌 PK골이다. 보다 못한 변 감독의 따끔한 지적이 이어졌다. 이런 식이라면 다시 브라질로 돌려보내겠다는 엄포도 있었다. 그뒤 4월에 다시 만난 루이지뉴는 분명 달라져 있었다. 4월에만 무려 9골을 몰아넣었다. 루이지뉴는 그 비결을 ‘에닝요 덕분’이라 설명했다. 요지는 이렇다. “에닝요는 패스를 통해 경기를 풀어나갈 줄 아는 선수다. 3월 말부터 합류한 에닝요는 내게 많은 도움이 됐다.” 컵대회에서 7골을 넣은 루이지뉴는 5골을 넣은 데얀, 데닐손을 제치며 득점왕을 수상했다. “데뷔 첫해 받은 상이라 더 기쁘다”는 소감처럼 K리그에서 보낸 첫 시즌은 스스로도 만족스러워 보였다. 그렇지만 소속팀 대구는 2007K리그에서 12위를 기록했다. 그나마 12위도 감독내홍으로 수난시대를 맞이한 부산(13위)과 만년꼴찌 광주(14위) 덕분이라는 이야기도 들어야만 했다. 자존심이 상할 법도 했다. 그러나 칭찬의 목소리도 있었다. 이근호-루이지뉴 투톱의 위용만큼은 여느 팀에 뒤지지 않는다는 평이 그것이다.

루이지뉴는 수비수와 일대일 상황일 때 개인기를 이용, 돌파하는 스타일의 선수는 아니다. 주로 수비 배후 공간으로 돌아들어가는 걸 즐기는 편이다. 이때 보여주는 놀라운 스피드와 정확한 슈팅은 그간 골을 많이 넣을 수 있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다. 대구에서 함께 운동했던 조홍규는 “문전 앞에서 보여주는 공을 향한 집착과 집중력, 위치선정은 무서울 정도로 좋다”라고 평했다. 그의 말처럼 루이지뉴는 문전 앞에서만큼은 기가 막힐 정도로 골 냄새를 잘 맡는다. 지난 해 기록한 18골 가운데 PK 3골을 제외해도 자그마치 14골을 골에어리어 안에서 성공시켰다. 조홍규는 “골키퍼를 제외한 모든 선수들이 골에어리어 안에서 뒤엉킨 상황에도 기가 막히게 골이 될 만한 위치를 찾아냈다”고 회상했다. 175cm의 단신이지만 공중볼 장악능력도 좋다. 4월14일 수원전에서는 수원의 장신수비벽을 뚫고 동점 헤딩골을 성공시켰다. 그러나 그런 루이지뉴에게도 단점은 있다. 스리백을 쓰는 팀을 만날 때면 ‘한없이 작아진다’는 것이다. 맨투맨 수비에 약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그럴 때면 이근호가 나타나 좌우 중앙에서 활발히 움직이며 이를 뚫어줬다. ‘태양의 아들’ 이근호의 커버 플레이가 빛났기에 루이지뉴도 동반상승할 수 있었다. 덧붙이자면 지난 시즌 이근호가 8골로 득점순위 8위(국내선수 1위)에 오를 수 있던 까닭도 바로 여기서 기인한다.

2007시즌을 끝으로 대구와 계약이 만료된 루이지뉴는 울산에 새둥지를 틀었다. 지난 해 울산은 공격수들의 연이은 악재 때문에 FC서울 못지않은 분루를 삼켰다. 호세를 시작으로 마차도 양동현이 부상으로 시즌을 접어야만 했다. 여름 이적시장 때 이천수는 네덜란드로 떠났고 정경호와 맞트레이드 한 염기훈은 피로골절로 시즌 막바지였던 PO때 겨우 출전할 수 있었다. 노장 우성용 혼자 울산의 공격을 담당하기엔 버거웠다. 울산이 올 시즌을 영입한 용병은 루이지뉴 브라질리아 레안드롱(임대복귀)이다. K리그를 통해 이미 검증된 선수들과 하고 싶다는 김정남 감독의 의지가 읽혀지는 대목이다. 올해도 울산은 스리톱과 투톱을 적절히 혼용하며 경기에 임할 계획이다. 투톱일 경우 루이지뉴는 우성용(양동현)과 함께 빅 앤 스몰 조합을 구성할 예정이다. 반면 스리톱에서는 중앙이 아닌 측면에서 타깃맨을 지원사격할 듯하다. 오른발을 주로 쓰기 때문에 염기훈이 아닌 이상호 또는 브라질리아와의 경쟁이 예상된다. 이천수가 떠난 뒤 울산은 ‘스타’없는 밤하늘을 바라봐야만 했다. 2008년 루이지뉴는 과연 그곳을 빛낼 별이 될 수 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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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의 날개가 되어라, 두두
“두두는 20분 만에 2번이나 결정적인 찬스를 잡았다. 그 중 1번은 골키퍼 선방에 막혔지만 정확하게 골대 안으로 들어갔다. 두두를 보고 배울 필요가 있다.” 2007년 3월11일 전남과의 원정경기에서 FC서울은 정조국의 결승골로 1-0 승리를 거뒀다. 그러나 귀네슈 감독은 공격수들에게 쓴소리를 가했다. 골을 넣지 못한 두두의 위치선정과 감(感)을 보고 배우라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그날 두두는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후문이다. 귀네슈 감독 부임 이후 벤치멤버로 밀려났기 때문이다. FC서울은 개막전에서 대구를 상대로 2-0으로 이겼지만 두두에게는 잊고 싶은 경기였다. 승리가 거의 확정적이던 후반42분 아디 대신 투입됐기 때문이다. 두두의 수난시대는 그 뒤로도 계속됐다.

2007시즌 초 귀네슈 감독은 4-4-2 포메이션으로 팀을 재정비하며 ‘공격축구론’을 펼쳤다.  두두에게는 왼쪽 측면을 맡겼다. 갑작스레 왼쪽 윙어로 보직을 변경하게 됐지만 두두는 스트라이커 출신답게 중앙을 파고들며 날카로운 공격을 선보였다. 이렇듯 귀네슈 감독의 공격축구에 힘을 실어주는 듯 했지만 문제는 ‘주전’이 아니라는데 있었다. 박주영이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수원을 4-1로 이겼던 그날도 두두는 후반43분 교체선수로 투입됐다. 시즌 시작 이래로 6경기 연속 교체출전. 말이 좋아 ‘조커’였지 한때 성남에서 최고의 공격 삼각편대를 이뤘던 두두에게는 자존심에 금이 갈 법한 사건이었다.

그리고 4월29일 홈에서 경남에게 3-0으로 지는 모습을 벤치에서 지켜봐야만 했던 그날이후 두두는 사라졌다. 배가 아프다는 이유였다. 몇몇 선수들은 태업(怠業)에 들어갔다고 추측했다. 그러나 곧 병명이 밝혀졌다. ‘스포츠 헤르니아’였다. 두두는 수술 대신 재활을 선택, 브라질로 돌아갔다. 그리고 여름 휴식기가 끝날 쯤 두두는 부상에서 완벽히 회복한 상태로 팀에 복귀했다. 당시 FC서울은 김은중, 정조국, 박주영, 심우연 등 주전 공격수들의 부상으로 신음 중이었다. 팀이 어려운 상황에서 두두는 복귀전이었던 8월8일 포항전에서 귀중한 결승골로 귀네슈 감독에게 승리를 안겼다. 이어 열린 제주전에서는 1골 1도움으로 2경기 연속 공격포인트를 기록했다. 마치 2년 전 FC서울로 팀을 옮기자마자 3경기 연속 공격포인트를 기록했던 그때를 보는 듯 했다.

2004년 8월 브라질1부리그 크루제이루에서 뛰던 두두는 계약금 10만 달러에 성남과 계약했다. 이듬해 두두는 최고 전성기를 누렸다. 박주영, 마차도와의 득점경쟁은 모두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두두는 2005시즌 10골 4도움으로 마차도(13골 1도움) 박주영(12골 1도움)에 이어 득점랭킹 3위를 기록했다. 참고로 함께 성남 공격 삼각편대를 이뤘던 김도훈은 5위, 모따는 9위(7골 4도움)였다.

당시 김도훈-두두-모따로 구성된 삼각편대의 공격력은 매서웠다. 지금은 모따를 더 인정하지만 그때만 해도 모따보다는 두두였다. 상대 수비수들이 두두만 잡으면 된다고 말할 정도였다. 두두는 성남을 2004컵대회 우승과 2004AFC챔피언스리그 준우승으로 이끌었다. 2005후기리그와 2006전기리그 우승컵도 들었다. 2006컵대회에서 준우승을 했을 때엔 히칼도(前서울,4도움)를 제치고 도움왕(5도움)도 수상했다. 두두는 컵대회를 마치고 FC서울로 전격 이적했다. 당시 팀을 이끌던 이장수 감독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기리그 내내 득점이 없어 고민이었다. 그렇기에 두두의 영입은 큰 의미가 있다. 만족스런 보강이다.” 2006 후기리그 때만 해도 두두는 2년차 슬럼프에 빠졌던 박주영을 제치고 주전자리를 꿰찼다. 그러나 두두는 전형적인 브라질리언이었다. 자율적인 분위기에서는 절제하지 못하는 성격 탓에 체중은 점점 증가했다. 성남시절에는 팀 규정상 아침저녁으로 몸무게를 체크하며 관리했다. 그러나 FC서울에서는 모든 것을 자신이 통제하고 관리해야만 했다. 볼 컨트롤과 왼발 프리킥은 여전히 뛰어났지만 늘어난 체중 탓에 결국 움직임은 예전만 못했다.

2008시즌을 앞두고 두두는 비록 임대지만 다시 친정팀 성남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성남으로의 복귀는 그에게 전화위복이 될 듯하다. 왼쪽 윙포워드 자리를 다시 찾았기 때문이다. 2005후기리그와 2006전기리그 우승컵을 들 당시 성남에게는 ‘두두’와 ‘모따’라는 양 날개가 있었다. 두두가 다시 찾은 날개가 될 수 있을지는 아직 모른다. 그러나 김학범 감독 아래서 예전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면 두두는 부활이라는 이름하에 분명 천마의 화려한 날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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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메트로섹슈얼의 대명사 베컴이 한국에 왔습니다. 삼일절 빅매치로도 불렸던 FC서울과 LA갤럭시와 경기에선 풀타임을 소화하며 모두의 눈을 즐겁게 했지요. 친선경기임에도 불구하고 베컴은 90분 내내 중앙미드필드 진영을 넓게 뛰어다니며 공격과 수비 모두에서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또한 환상적인 오른발로 코너킥과 프리킥, 페널티킥 모두를 보여주기도 했고요. 경기 후 갖은 기자회견에서 어느 기자 분은 “박지성 선수를 어떻게 평가하냐”는 질문을 던졌죠. 베컴도 한때 맨체스터Utd.의 멤버였으니까요.


베컴은 “좋은 선수다. 그가 뛰는 경기를 본 적도 있다. 맨체스터Utd.는 아무 선수나 있는 팀이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베컴의 칭찬 때문이었을까요? 박지성 선수는 그날 열린 풀험과의 경기에서 시즌1호골을 성공시켰답니다. ^^

어쨌거나 2월29일과 3월1일, 2일에 걸쳐 베컴을 따라 다니며 그의 모습을 영상에 담아봤습니다. 미처 베컴을 보지 못한 팬들을 위해 ‘베컴과 함께 했던 1박2일’을 공개합니다. 재밌게 감상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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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얼마 전 자료조사 중 무척 재미있는 사진을 찾았습니다. 1974년에 발간된 월간축구를 뒤적이던 중 당시 대표팀에서 뛰던 선수들의 사진을 보게 됐죠. 그런데 순간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답니다. 뉴하트의 ‘은성’이 사진 속에 있었거든요. 배우 지성을 닮은 어느 선수의 모습에서 은성의 향기가 물씬 풍기더군요. 낯선 선수에게서 은성의 향기를 맡게 될 줄이랴. 그것도 약 35여 년 전 사진에서 말이죠. 아래 사진을 보세요. 어느 선수를 말하는지 아시겠죠? ^^ 그렇다면 다시 한 번 질문 드리겠습니다. 그 선수의 이름을 맞출 수 있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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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김호곤 대한축구협회 전무이십니다. 김호곤 전무는 대전시티즌 김호 감독, 울산현대 김정남 감독과 함께 1970년대 한국축구 전성기를 이끌었던 선수입니다. 80년대 이후 출생한 축구팬들에게는 2004아테네올림픽 8강신화를 쓴 감독으로 기억되고 있지요. 2005년 11월에는 대한축구협회 전무이사로 발탁되어 축구행정가로서의 제2의 인생을 살고 계십니다. 이 사진이 실린 다음 페이지에는 김 전무의 일문일답도 함께 실렸는데요, ‘큰 영향을 준 선수가 누구냐’는 질문에 김 전무께서는 “상업은행팀에 있을 때 김호 선수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라고 답했답니다.


또 앞으로는 “개인기 개발에 역점을 두고 싶다”며 “갑자기 운동량이 많아 몸이 무겁다. 박스컵도 중요하지만 북괴와의 대결이 가능할지도 모르는 아시아 경기를 생각하면 부담을 느낀다. 개인기 개발을 연마하며 극복하겠다”고 설명했죠. ‘박스컵’과 ‘북괴’라는 단어에서 세월의 흐름이 느껴지죠? ^^ 부가 설명 드리자면 박스컵은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만든 대회였는데요, 지금의 아시안컵처럼 아시아 국가들이 참여해 우승을 다투는 대회였습니다. 대회가 열릴 때면 박정희 대통령 내외가 경기장을 찾아 관람했고 시상까지 직접했다고 하네요. 


그나저나 그 다음 대답도 재미납니다. “졸업반(연세대)도 되었고 틈있는대로 수업에 충실하겠다.” 당시 김호곤 전무의 소속은 연세대학교 축구부. 대학생다운 대답이 아닐 수 없네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없냐고 묻자 김 전무는 “심판들은 제발 재미있는 게임운영이 되록 연구했으면”이라는 대답을 남겼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심판의 경기운영능력은 선수들에게 아쉽게 다가오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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ㅎㅎㅎ 슬럼프에서 페이스 업! 하고 계신다네요.



김호곤 전무는 국가대표팀을 ‘청룡’이라 부르던 1970년대 그 시절 우리나라를 빛낸 태극전사 중 하나였습니다. 1971년부터 1978년까지 자그마치 8년 간 국가대표선수로 활약했지요. 대표팀 부동의 풀백이었던 김 전무는 1973년 체육기자단이 뽑은 베스트 11에도 뽑혔답니다. 어떤가요? 재밌게 보셨나요? 매주 수요일과 목요일 밤, 우리를 즐겁게 해줬던 뉴하트 종영에 맞춰 보여드리는 사진이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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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Restart 2008 
예부터 우리나라는 숫자 ‘3’을 특별히 여겼다. 단군신화 속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숫자도 바로 3이다. 3은 1과 2를 더한 숫자. 즉 양을 의미하는 1과 음을 뜻하는 2가 합쳐진, ‘음과 양을 하나로 묶는다’는 속뜻을 지닌 완전한 숫자다. 하늘 땅 바람, 천 지 인, 탄생 삶 죽음, 처음 중간 끝, 과거 현재 미래 등 3은 모든 이치와 접목시켜 설명할 수 있다. 이는 K리그에도 해당된다. 보통 데뷔 첫해 뛰어난 플레이를 선보였던 선수일지라도 다음해에는 그보다 못한 모습을 보일 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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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기훈

그래서 나온 말이 ‘2년차 징크스’ 아니겠는가. 2006K리그에는 염기훈 장남석 배기종 3명의 선수들이 신인왕 경쟁에 가세, 아름다운 승부를 펼쳤다. 그러나 이들 모두 이듬해에는 첫해만 못한 모습으로 징크스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렇지만 2008년 데뷔 3년차에 접어드는 해. 완전함을 의미하는 숫자 3이 이들에게는 어떤 결과를 가져다줄까. 잠시 시계를 뒤로 돌려 3년 전 모습으로 돌아가 보자. 그뒤에 판단해도 늦지 않는다.


대학시절 그들은
 
1983년 생 대학선수들에게 2005년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해였다. 대학 4학년. 어느덧 졸업반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그해 12월에는 드래프트도 열릴 예정이었다. 이들은 드래프트 부활 ‘첫 세대’이자 자유계약 사이에 ‘낀 세대’였다. 프로축구연맹에서는 이 같은 선수들의 입장을 고려, 그해까지만 자유계약을 허락했다. 그러나 프로팀과 계약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신의 실력을 입증해야만 했다. 대학선수들 대부분은 청소년대표 경력이 없었다. 결국 이들이 자신의 기량을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은 전국대회를 통해서만 이뤄질 수 있었다. 대회에서 좋은 모습을 선보이면 대학선발에 뽑히는 길도 열렸다. 다행히 2005년에는 큰 대회가 많이 열렸다. 3월에는 한일대학선발정기전인 덴소컵, 8월에는 대학선수들의 축제 터키유니버시아드대회가 열릴 예정이었다. 11월 마카오에서 열리는 동아시아대회에선 대학선수들 위주로 나간다는 소식도 들렸다. 때문에 일찍감치 그 대회를 목표 삼아 운동하는 선수들도 있었다. 물론 장남석도 예외는 아니었다. 지난 3년간 쓴 눈물을 2번이나 삼켜야했던 그에게 2005년은 여느 해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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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남석

2002년 중앙대에 입학했던 장남석은 신입생임에도 불구하고 실력을 입증 받아 주전으로 뛰기 시작했다. 그해 중앙대축구부와 U-19대표팀간 연습경기가 자주 열렸다. 그때마다 장남석의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박성화 감독은 이듬해 봄 훈련멤버로 그를 발탁했다. 그러나 문제는 장남석의 몸상태에 있었다. 마침 중앙대축구부원들에게는 10일간의 휴가가 주어졌고 그는 오랜만에 받은 휴가를 즐기던 중이었다. 휴가 9일 째 되던 날 소집을 받고 파주에 갔으니 그 상태로 연습게임을 제대로 뛸 리 만무했다. 결국 아랍메이레이트에서 열렸던 U-20월드컵은 동기 김치우만 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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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기종

2004년 8월에는 대학선발선수들이 주축이 돼 베트남에서 열린 LG컵2004축구대회에 출전했다. 그 대회를 준비하기 위해 대학선발선수들은 보름간 영국전지훈련까지 다녀왔다. 그러나 허리부상 때문에 장남석은 가지 못했다. 당시 주축이 됐던 대학선발선수들은 염기훈(울산) 배기종(수원) 최효진(포항) 조용형(제주) 권순태(전북) 김민오(울산) 이현진(수원) 김신영(사간토스)등이었다. 염기훈과 배기종은 이때 처음 만났다. 당시 대학선발팀 부동의 스리톱은 염기훈 최효진 김신영이었다. 배기종은 미드필더 요원으로 주로 교체로 출전했다. 배기종이 갖고 있던 슈퍼 조커로서의 능력은 이때도 발휘됐다. 베트남국가대표팀과의 결승전에서 한국대학선발팀은 3-4로 뒤지고 있었다. 어느새 전광판 시계는 후반4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때 배기종이 PK를 얻어냈고 이를 염기훈이 성공시켰다. 연장전에서 터진 역전골로 우승은 한국대학선발팀에게 돌아갔다.

2005년 1월 대학선발 훈련이 재개됐다. 3월에 열릴 한일대학친선경기 덴소컵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염기훈 장남석 배기종도 발탁됐다. 세 선수가 처음 만나는 순간이었다. 재밌는 사실은 이들이 대학선발팀의 공격을 책임졌다는 사실이다. 장남석을 최전방에 놓고 좌우날개에 염기훈 배기종을 세웠다. 보름 간의 훈련 후 다시 팀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배기종은 동계훈련 막바지에 종아리 근육이 파열되는 부상을 입었다. 대학선발과의 인연은 그렇게 끝났다.


2005전국대학축구대회 4강전에서 호남대와 중앙대가 만났다. 호남대 주장 염기훈과 중앙대 주장 장남석과의 자존심 대결이 볼만했다. 그러나 장남석은 8강전에서 발목이 부러지는 부상을 입고 말았다. 피로골절이었다. 장남석은 결국 2008유니버시아드대회에서 나가지 못했다. 이렇듯 염기훈 장남석 배기종은 함께 대회를 준비하며 시즌을 시작했지만 맺음은 염기훈으로 끝났다. 염기훈은 전북과 우선계약도 체결했다. 물론 피로골절로 시즌을 접은 장남석에게도 희소식이 날아왔다. 박종환 감독의 눈에 들어 대구와 계약을 맺게 된 것이다. 그러나 배기종만은 상황이 달랐다. 부상 회복 후 2005동아시아대회에서 나갔지만 그는 여전히 벤치멤버였다. 그해 12월20일에는 2006신인선수 드래프트가 열렸다. 그러나 8라운드가 진행될 때까지 배기종을 뽑은 팀은 아무데도 없었다. 결국 배기종은 번외지명으로 간신히 대전행 마지막 기차에 올라탔다.


신인왕을 잡아라
2005덴소컵은 12월4일 의정부종합운동장에서 열렸다. K리그 챔피언결정전 2차전이 열린 날이었다. 덴소컵에 참여했던 선수들은 자연스레 K리그를 화제로 삼았다. 가장 큰 관심사는 ‘2006신인왕은 누가 될까?’였다. 그들이 내린 결론은 염기훈이었다. 선수들 사이에서 ‘대학축구는 염기훈으로 통한다’는 이야기가 농담처럼 떠돌던 때였다. 그러나 대학축구 최강자로 인정받던 염기훈에게도 K리그는 높고 어려운 무대였다. 염기훈은 동계훈련 첫날부터 최강희 감독에게 호되게 깨졌다. 전북은 브라질전훈에서 4-4-2 포메이션을 시험가동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가 새로 맡은 보직은 왼쪽 미드필더. 당시 염기훈은 문전 앞에서 어슬렁거리다 공이 올 때만 뛰는 습관이 몸에 배있었다. 잘나가는 대학 스트라이커들이 으레 갖고 있는 버릇 중 하나였다. 훈련 때마다 최 감독은 염기훈의 수비 문제를 지적했다. 그러나 불호령 뒤에는 “수비를 제대로 할 줄 알아야 진짜 공격수”라는 귀중한 가르침이 있었다. 그는 곧 ‘공격수는 공격만 잘하면 된다’는 생각이 잘못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비디오분석관에서 부탁, 자신의 훈련모습이 녹화된 비디오를 구한 뒤 단점을 파악하며 연구했다. 결국 노력은 결과로 보답했다. 3월4일 열린 2006K리그 슈퍼컵 울산전에 선발출장하며 신인선수들 중 가장 먼저 데뷔전을 치렀다. 장남석도 곧 K리그에 데뷔했다. 3월12일 홈에서 열린 울산전에 후반 시작과 동시에 투입되며 신고식을 치렀다. 배기종은 가장 늦은 3월15일에 데뷔전을 치렀다. 반면 데뷔골은 가장 빨랐다. 그는 후반19분 교체투입 8분만에 이관우의 프리킥을 헤딩골로 연결,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시민구단 연습생이 데뷔전에서 데뷔골을 기록했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 뉴스였다.

데뷔골은 염기훈이 가장 늦었다. 3월29일 대전전에서다. 전반7분만에 선제골을 넣었다. “데뷔골이 결승골로 끝날 거라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배기종 때문에 물거품이 됐다.” 이번에도 배기종은 머리로 끝냈다. 후반32분 헤딩 동점골을 성공시켰다. 염기훈과 배기종의 골로 양 팀의 승부는 무승부로 끝났다. 배기종에게 ‘슈퍼서브’로 등극한 이유를 묻자 “경기가 안 풀리면 무조건 들어가니 항상 몸을 만들어라는 선배들의 조언 덕분”이라 말했다. 4월23일 대전전을 앞둔 장남석의 마음은 비장했다. 경기 전날 출전선수 명단에 배기종의 이름이 올랐기 때문이다. 벌써 배기종은 4골1도움을 기록하며 신인왕 후보로 거론되고 있었다. 반면 장남석은 1골1도움으로 이에 못 미친 상태였다. 이들이 그라운드에서 부딪힌 시간은 약 11분에 불과하다. 배기종은 후반10분 교체 in, 장남석은 후반21분 교체 out이었기 때문이다. 경기는 1-1 무승부로 끝났다. 장남석은 전반17분 터뜨린 선제골로 5경기 무득점의 침묵을 깰 수 있었다. 염기훈과 장남석은 7월19일 대구월드컵경기장에서 만났다. 빗속에서 진행된 이날 경기는 3-3이라는 스코어에서 알 수 있듯 치열했다. 대구가 1-2로 지고 있던 전반37분 장남석의 동점골이 터졌다. 그러나 염기훈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후반33분 최철순의 도움으로 염기훈은 평소 자신있던 왼발로 경기를 원점으로 되돌렸다. 경기 종료 후 수비수 최성환은 장남석에게 다가가 “염기훈에게 포인트를 줘서 미안하다”며 “대전전에서는 배기종에게 골을 내주지 않겠다”고 말했다. 어느새 염기훈-장남석-배기종 간의 신인왕 경쟁은 그들만의 경쟁이 아닌 듯 했다. 최윤겸 감독은 사석에서 기자들에게 “대전에서 신인왕이 나왔으면 좋겠다”며 배기종이 신인왕을 타기 바라는 마음을 종종 내비치곤 했다. 대구선수들은 “두자리 수 득점이라면 신인왕 수상이 가능할 것”이라며 “앞으로 (장)남석에게 무조건 패스하자”는 이야기를 종종 했다. 그렇지만 신인왕은 염기훈에게 돌아갔다. AFC챔피언스리그 우승의 일등공신, 국가대표팀 발탁, 2006아시안게임 활약 등이 이유였다. “9월23일 전북전 때 베어벡 감독이 경기장에 왔다. 다음날 오장은(3골)과 염기훈(1골)이 아시안게임 멤버로 뽑혔다. 그날 조금만 더 잘했다면 다른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까? 지금도 후회로 남는 순간이다.” 36경기에 출장하며 9골4도움을 기록한 장남석에게는 두고 두고 아쉬운 대목이다. 2006시즌 염기훈은 31경기 7골5도움, 배기종은 7골3도움을 기록했다.


2년차 징크스, 그리고 2008년
장남석과 배기종에게 2007년 겨울은 시련의 시기였다. 신인왕 하나만 바라보며 1년간 뛰었지만 물거품으로 끝났다. 시즌종료 후 장남석은 수술대에 올랐다. 허리 디스크 수술을 받기 위해서였다. 대학시절 내내 그를 괴롭히던 고질병이었다. 장남석은 프로데뷔 후에도 허리통증 때문에 자주 훈련을 쉴 수밖에 없었다. 그 상황에서 게임을 뛸 수 있었던 까닭은 그의 재능을 높이 평가한 박종환 감독의 배려 덕분이었다. 한편 배기종은 두문불출하고 집에만 있었다. 임의탈퇴 선수로 공시됐기 때문이다. 2007년 10월 배기종은 느닷없이 트레이드 파문에 휘말리며 경기에 나서지 못했다. 계약기간 중 구단과 상의없이 이적을 목적으로 다른 팀과 접촉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번외지명인 선수의 경우 계약기간은 1년. 이후엔 이적료 없이 타 구단 입단이 가능하다. 여러 팀에서 제의가 올 법도 했다. 모든 상황을 눈치 챈 대전은 계약기간이 끝나기 전 수원삼성과 2대1 트레이드를 진행했다. 배기종을 보내는 대신 조재민과 황규환을 받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배기종 측은 “선수 동의 없는 계약은 받아들일 수 없다”며 항의했고 결국 괘씸죄로 임의탈퇴 되고 말았다. 다행히 2007년 시즌을 위한 동계훈련이 시작될 즈음 배기종은 계약서에 사인하며 다시 복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장남석은 재활 때문에 동계훈련에 참여하지 못했다. 장남석에게는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대구는 변병주 감독으로 수장을 교체하며 새 시즌을 준비했기 때문이다. “동계훈련에 참여하지 못했기 때문에 시즌 초반부터 기용할 수 없었다.” 장남석의 출장횟수가 저조한 이유에 대한 변병주 감독의 답이다. ‘16경기 2골2도움’이라는 기록보다 더 나쁜 것은 출장시간에 있다. 그중 풀타임 출장은 4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는 이근호 루이지뉴 에닝요와의 경쟁싸움에 밀렸다는 것을 뜻한다. 장남석은 이근호가 대표팀 소집 때문에 팀을 비웠을 때만 풀타임으로 출전할 수 있었다. 그는 “2006년에는 용병들이 못했기 때문에 내게 기회가 많이 왔다. 인정하기 싫지만 올해는 대체요원이었다고 생각한다”라며 담담히 인정했다. 

배기종 역시 호화군단으로 이뤄진 수원에서 주전자리를 꿰차지 못했다. 배기종은 개막전이었던 대전전에서 후반12분 교체투입됐지만 아크 오른쪽에서 프리킥을 얻어내며 수원이 동점골을 얻는데 견인차 역할을 했다. 차범근 감독에게 합격점을 받은 배기종은 이후 3경기 연속 선발로 풀타임을 소화했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약한 체력 탓에 경기 도중 근육이 올라오는 일이 잦았다. 드리블이 좋아 측면에서 빠르게 치고 나갈 수 있었지만 골 결정력은 예전만 못했다. 지난 해 11개의 슈팅 중 유효슈팅은 3개에 불과하다. 슈팅 대비 유효슈팅은 0.27로 같은 포지션에서 뛰고 있는 김대의(0.5) 이현진(0.67) 남궁웅(0.40)보다 낮다. 그런 상황 속에서 9월 초 2군경기 중 인대가 파열되는 부상을 입고 말았다. 진단결과는 2개월 안정. 2007시즌은 ‘17경기출장 2도움’이라는 기록으로 막을 내렸다.

반면 염기훈은 전반기 동안 5골 3도움을 올리며 2년차 징크스와는 상관없는 플레이를 선보였다. 대표팀 발탁 이후 자신감 있는 플레이는 팀에 보탬이 됐고 최강희 감독의 칭찬도 이어졌다. 그러나 문제는 아시안컵 기간 중 발생했다. 아시안컵이 진행되는 동안 염기훈 측은 ‘이적료 15억원 이상이면 이적할 수 있다’는 바이아웃 조항을 들어 이적을 요구했고 즉시 전력이 필요했던 전북은 정경호 임유환과 염기훈을 맞트레이드했다. 그러나 염기훈은 자신이 먼저 이적을 제의한 게 아니라며 구단에 배신감을 느낀다는 말을 남겼다. 설상가상 격으로 일본과의 아시안컵 3‧4위전 도중 오른쪽 새끼발가락이 부러지는 부상을 당하고 말았다. 원인은 피로골절. 선수 스스로는 원치 않는 울산으로의 이적과 이에 따른 오해, 그리고 부상. 연이은 악재로 염기훈 역시 어쩔 수 없는 ‘2년차 징크스’에 희생양이라는 이야기가 오갔다. “내 입으로 시즌 아웃이라 이야기한 적 없다. 복귀할 것이다.” 염기훈은 정규리그 마지막 경기였던 경남전에 교체출전, 복귀신고골을 터뜨렸다. 이후 울산이 PO에서 포항에서 0-1로 패하기 전까지 3경기 연속 출전하며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 2007년 염기훈이 세운 기록은 21경기 6골3도움. 데뷔 첫해 세운 31경기 7골5도움과 비교했을 때 크게 떨어지지 않는 성적이다.   

2008년은 염기훈 장남석 배기종 모두에게 더 이상 가능성이 아닌 진정한 실력을 보여줘야만 하는 해이다. ‘프로데뷔 3년’은 더 이상 신인이 아닌 팀의 중심으로 녹아들어가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물론 쉽지만은 않다. 전지훈련 기간 동안 배기종은 측면공격수에서 중앙공격수로 보직을 바꿨다. 수비부담도 늘어났고 경쟁해야만할 선수들도 늘어났다. 그동안 잃었던 골감각도 어서 빨리 회복해야만 한다. 장남석 역시 마찬가지다. 후반 들어서면 체력이 저하되는 모습을 자주 보였는데 3년차에 접어든 만큼 체력안배를 적절히 할 줄 아는 능력을 키워야할 것이다. 아울러 더 이상 용병들에게 밀려 교체투입용 선수로 전락해서는 안 될 것이다. 염기훈 또한 마냥 마음을 놓을 수 없다. 브라질리아 이상호 등과의 경쟁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스크린플레이에 능하고 왼발프리킥이라는 장점이 있지만 그것만으로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생각은 오산이다. 데뷔 초 염기훈은 “K리그는 전쟁이다. 못하면 밀릴 수밖에 없다. 싸우다 다칠 수도 있다. 힘들고 괴롭다고 그만둘 수도 없다. 항상 준비하며 기다려야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 말처럼 전쟁같은 K리그 현장에서 3년 차 K리거인 그들은 승리의 역사를 과연 쓸 수 있을까. 답은 바로 2008K리그에 있다. 아직은 유보지만 시즌이 끝나면 그 해답을 모두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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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박원재. 그의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것은 2007 K-리그에서부터였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수원과의 플레이오프전이었죠. 당시 그는 수원 홈에서 따바레즈의 프리킥을 헤딩골로 연결하며 팀을 챔피언결정전으로 이끌었습니다. 결승골이었죠.

이어 그는 바로 열린 성남과의 챔피언결정전 1차전에서도 연속골을 뿜어내며 단번에 자신의 이름을 모두에게 알렸습니다. 한 번도 태극마크를 달아보지 못한 '중고 신인'은 그렇게 챔피언결정전을 통해 진정 ‘스타’로 거듭났습니다.



“청소년대표팀이요? 그런 거랑은 거리가 멀었어요. 고교선발에도 안 뽑혔는걸요. 전 팀에서 잘하는 선수가 아니라 다른 잘하는 선수들 뽑혀 가는 거 구경만 하던 평범한 선수였죠.”


그렇지만 그는 늘 꿈꿨습니다. 포항스틸러스 홈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볼을 줍던 어린 볼보이는 언젠가는 K-리거가 되겠다고, 그리하여 왼쪽 가슴엔 기필코 태극마크를 달겠다고 말이죠.


“파리아스 감독님이 그러셨어요. 원재 자리에서(왼쪽 미드필더) 원재 만한 기술 가진 선수는 없다고요. 제가 처음 포항에 왔을 때 제일 눈에 들어온 선수가 바로 원재에요. 제가 경기(에 공격수로) 나설 때면 항상 왼쪽에 서요. 원재랑 하고 싶어서요. 원재만큼 체력 좋고 발재간 있고 또 성실한 선수도 드물어요. 사람이 잘하다보면 건방져질 수 있는데 워낙 착한 아이니까 앞으로도 성실함을 잃지 않을 거라고 봐요. 조만간 국가대표로도 뽑히고 ‘왼쪽 미드필더’하면 누구나 ‘박원재’를 떠올릴 그런 날이 올 거예요.” (포항스틸러스 팀 동료 이광재)


이광재 선수의 말처럼 박원재 선수는 해가 바뀌자마자 닻을 올린 허정무호에 탑승하며 꿈에 그리던 국가대표 선수가 됐습니다. 지난 1월 30일 칠레와의 평가전에서는 A매치 데뷔전도 치렀고요. 좀처럼 공격의 활력을 보이지 못했던 대표팀은 박원재 선수의 투입 이후, 왼쪽 측면에서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던 박 선수 덕분에 -비록 대표팀 선수들은 여전히 득점엔 실패했지만- 마지막까지 칠레 문전 앞을 위협할 수 있었습니다. 박원재 선수를 재발견할 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경기는 충분히 가치있던 경기였죠. (후에 경기를 관람했던 신태용 선수를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그날 날씨 때문에 몸이 덜풀린 공격진 중에서 제 몫을 했던 선수는 염기훈 선수와 박원재 선수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오늘 열린 2010월드컵 아시아예선 투르크메니스탄전에서는 후반 40분 조용형 선수 대신 투입돼 약 8분가량 왼쪽 날개로 뛰었습니다. 비록 출전 시간은 짧았지만 갓 A매치 데뷔전을 치른 햇병아리 선수에겐 소중한 경험이 됐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말이죠, 박원재 선수가 투입될 당시 관중석과 기자석에서는 잠깐 웃음보가 터졌답니다. 이날 경기에서는 박지성 선수도 뛰었는데요, 박지성 선수와 흡사한 외모를 지닌 탓에 ‘박지성 동생’ 혹은 ‘3초 박지성’으로 불린 박원재 선수도 함께 뛰게 됐으니 재밌을 수밖에요.






“한번은 월포에 다 같이 운동하러 갔는데 어떤 꼬마 저를 보고 ‘박지성이다!’ 딱 그러는 거예요. 그랬더니 옆에 있던 그 아이 아버지께서 그러시더라고요. ‘박지성 아니야. 가짜야.’ (웃음) 또 한 번은 홈경기 때, 아마 수원전이었을 거예요. 다쳐서 뛰지 못하는 바람에 관중석에 앉아서 경기를 봤거든요. 그런데 앞에 앉아있던 꼬마 2명이 경기 내내 계속 힐끔힐끔 쳐다보는 거예요. 전반전 끝나고 나선 자기들끼리 ‘박지성 맞지?’ ‘박지성인 거 같은데?’ 그러더라고요. 그때 옆에서 듣고 있던 아줌마도 궁금했나봐요. 못 참겠다며 저한테 박지성 아니냐고 물어보더라고요. 그래서 말했죠. '지성이 형은 지금 영국에 있는데요. 전 박지성이 아니라 박원재에요.' (오)범석이도 대표팀 다녀올 때마다 매번 그랬어요. 정말 똑같이 생겼다고요. 나중에 사진 한번 같이 찍어보라고 하던 걸요. 그렇지만 실제로 본 적은 한 번도 없어요.”


그때만 해도 박원재 선수는 K-리그 선수였기 때문에 박지성 선수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답니다. 그러나 드디어 국가대표팀에 승선하고 말았네요. 그 덕분에 박지성 선수와 함께 훈련을 받게 됐고 이렇게 게임까지 뛰게 됐고요. 그리고 언론과 팬들은 형제처럼 닮은 외모를 지적하며 관심을 기울이고 있죠.


개인적으로 박지성 선수를 닮았다는 이유로 박원재 선수가 조명을 받고 있는 상황을 저는 좋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는 끈기와 성실로 똘똘 뭉친 선수고 그 때문에 피치 위에서는 누구보다 열심히 뛰어다닙니다. 백패스와 횡패스를 지양하며 그 때문에 공격지향적인 플레이를 선보이지만 수비 가담 시에도 역시 적극적이죠.


이처럼 수많은 장점을 가진 좋은 선수이기 때문에 저는 박지성 선수를 닮은 그의 외모가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단지 박지성 선수의 외모만 닮은 평범한 선수가 아니기 때문이죠. 언젠가는 ‘박원재’라는 자신의 이름으로 승부를 거는, 그리하여 ‘박원재’라는 그 이름 자체로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선수가 될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그렇겠죠. K-리거의 꿈은 그렇게 영그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스타 역시 그런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겠고요. 다시금 새로운 별을 꿈꾸렵니다. 박원재 선수, 부디 당신이 그 주인공이 돼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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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2월 4일은 봄의 시작을 알리는 ‘입춘’입니다. 아직 봄을 느끼기에는 날은 꽤 춥지만 '입춘‘이라는 단어를 듣는 것만으로 우리는 벌써 봄이 다가왔음을 마음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봄만큼 우리를 설레게 하는 단어가 또 있을까요? 봄은 계절의 시작이며 시작은 늘 설렘과 두근거림을 동반한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렇게 두 눈을 반짝이며 봄을 기다리는 것이겠지요.




물론 모두의 마음은 비슷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느 사람들보다 더 기쁜 마음으로 봄을 기다리는 청년들이 있답니다. 바로 K-리그 선수들입니다. 


겨우내 힘들게 땀 흘리며 시즌을 준비했던 이들은 이제 봄이 옴과 동시에 2008 시즌을 맞이하게 됩니다.

팬들의 환호성을 들으며 잔디 냄새를 맡으며 그렇게 피치 위를 뛰어다니게 되겠죠. 봄이 오면 말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이렇게 인내하며, 긴 겨울을 이겨내며 봄소식만을 기다리는 것이겠지요.


영상 속 주인공들은 인천유나이티드 선수들입니다. 그들의 동계훈련 현장을 살짝 담아봤습니다. 즐겁게 봐주시고 응원 한마디 부탁드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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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플라이뭉치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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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개구진 웃음이 참 인상적이었던 김두현 선수가 드디어 결혼을 했습니다. 영원히 소년으로만 제 기억 속에 남을 것 같던 그가 드디어 한 가정의 가장이 되었네요.

그전까지 제게 김두현 선수는 가까이 하기엔 참 어려운 선수였습니다. 그러나 지난 해 독일월드컵을 앞두고 가진 짧은 인터뷰는 그간 가지고 있던 그의 이미지를 한번에 깨뜨린 아주 좋은 계기가 되었죠.

K-리그 MVP까지 수상한 선수라면 조금 어깨에 힘이 들어갈 법도 했지만 그는 언제나 먼저 인사하고 웃어주던 선수였습니다. 그리고 좋은 소식이 있을 때면 늘 제게 먼저 알려주는 고마운 선수였지요. 빨리 기사 쓰면 더 좋지 않냐는 이유 때문이었으니까요. ^^

그런 그가 결혼을 한다며 제게 청첩장을 건네줬습니다. 꼭 와서 도장 찍고 가라는 협박성 멘트와 함께요. 축구를 취재한지 얼마 되지 않아 어리버리하던 그 시절, 저를 도와주던 그의 마음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기쁜 마음으로 결혼식장까지 달려갔지요.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김두현 선수는 언제나처럼 환한 미소를 지으며 반겨줬습니다. 축하해줘서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하면서요.

그에게 축하 악수를 건네는데 순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왜 그러냐고요? 김두현 선수의 손이 땀으로 축축히 젖어있었거든요. 그래서 씩 웃으며 물어봤죠. "A매치 때도 긴장 잘 안하면서 오늘은 왜 이렇게 긴장하세요? 손이 땀으로 가득해요." 그러자 그는 절대 아니라며 변명했답니다. "아니에요. 긴장해서 그런게 아니라요 요기 안이 너무 더워서 그래요."

그렇지만 다들 짐작하시겠죠? 식장 내부는 전혀 덥지 않았습니다. 저 역시 두꺼운 코트를 입고 있었지만 땀 한방울 나지 않았거든요. 역시, 김두현 선수는 긴장을 한  것 같습니다. ^^

국가대표 출신 선수답게 그의 결혼식에는 수많은 축구스타들이 참석해 결혼식을 축하해줬습니다. 그러나 역시 가장 빛났던 사람은 오늘의 주인공 김두현 선수와 정혜원 씨였죠. 반짝반짝 빛나던 그들의 모습처럼 앞으로 함께 걸을 길도 그렇게 오래도록 반짝반짝 빛났으면 좋겠습니다. 두 사람의 행복을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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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긴장된 표정으로 하객들을 맞이하고 있는 김두현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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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대기실에서 만난 신부 정혜원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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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현 선수 팬들도 축하하러 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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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 쪽 친지께서 평소 팬이었다며 신랑 김두현 선수를 꽉 안아주셨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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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되서 나타난 조재진 선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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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명보 코치도 결혼식장에 나타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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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냐고요? 바로 고종수 선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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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리그에서 뛰고 있는 오범석 선수도 휴가 기간을 맞이해 결혼식에 참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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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원 선수가 왜 이렇게 웃고 있냐고요? 제 얼굴을 못 알아본게 미안하다며 요렇게 웃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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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객으로 참석한 김은중 선수는 사인하기 바뻤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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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박주영 선수는 전화하기 바뻤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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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옆에 자리잡은 김진규 선수 모습도 보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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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명보 코치는 고종수 선수와 오랜만에 만나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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늠름한 모습으로 입장하고 있는 신랑 김두현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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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손을 꼭 잡고 들어서는 신부 정혜원 씨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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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랑, 신부 맞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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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가 아름다웠던 신부 정혜원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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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지하게 주례사를 듣고 있는 두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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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의 사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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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잡은 두 손을 보고 있자니 너무나 부러웠습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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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가는 홍경민 씨와 유리상자가 불렀답니다. 사진 속 모습은 홍경민 씨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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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자는 만세삼창 대신 입맞춤을 시켰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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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랑 신부의 행진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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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찍기 전 분주한 모습의 선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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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사진 찍기 3초 전부터는 다들 멋있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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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운드에서 보던 모습과는 조금 색다른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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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촬영을 위한 신랑 신부의 입맞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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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현 선수, 정혜원 씨 오래 오래 행복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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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허정무 감독이 돌아왔습니다. 다시 돌아오기까지 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네요. 2000년 이후 외국인 감독들의 독무대였던 대표팀 감독 자리가 7년 만에 국내파에게로 다시 돌아왔네요.

허정무 감독이 대표팀 수장으로 가기 전 가나안 농군학교에서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전남 드래곤즈 선수단과 함께 2박 3일동안 의식개혁 및 인성에 관한 교육을 받았거든요.

그곳에서 가장 재밌던 풍경은 모든 사람들이 새벽 5시에 일어나 저녁 10시까지 시간표에 맞춰 생활하는 것이었습니다. 경기장에서 멋진 모습만 보여줬던 선수들이 학생처럼 지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저 웃음만 나오더군요. 그 와중에 조를 나눠 방과 식당 청소도 직접 했답니다. 이는 청소에 손을 뗀지 이미 오래인(?) 고참 선수들 역시 빠질 수는 없었습니다.

자, 짐작하시겠죠? 왜 제가 재밌어했는지요. 허정무 감독 역시 청소에서는 해방될 수 없었답니다. 처음 모든 사람들이 청소를 해야만한다고 했을 때 ‘설마?’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지만 후에 허정무 감독이 선수들 틈에 섞여 식당 테이블을 닦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수긍됐죠. 그리고 조금 놀라기도 했고요.

이곳의 규칙이라고 하지만 감독이라면 충분히 거부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허정무 감독은 “모두가 해야하는 것이라면 솔선수범하겠다”며 열심히 청소를 했답니다. 물론 막판에는 청소감독 역할을 하며 살짝 빠지는 모습을 보였지만요. 

이때만 해도 K-리그에서 계속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허정무 감독을 내년부터는 대표팀에서 만나게 되네요. 이렇게 하여 지난 8월 베어벡 감독이 사퇴하며 4개월 동안 공석으로 있었던 대표팀 감독 자리도 드디어 주인을 찾았습니다.

사실 그간 축구팬들 사이에서는 허정무 감독은 잠그기 전술만 일관하는 재미없는 축구의 선봉주자라는 인식이 강했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만난 허정무 감독은 누구보다 선수들을 생각하며 늘 고민하고 공부하는 지도자라는 인식이 더 강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원칙을 중요시하죠. 그것은 곧 정도(正道)를 걷겠다는 의지를 말합니다.

그래서 저는 허정무 감독을 믿기로 했습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데도 열심히 청소를 하던 그 모습을 생각해서라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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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와, 저기 신인왕 수상자 하태균 선수 지나가는데요. "

12월 6일 오전 11시 유니버설 아트센터. 그곳 현장에서 만난 김형일은 또 다른 신인왕 후보 하태균이 지나가자 웃으면서 말했다. 아직 발표 전이지 않냐고 묻자 양손을 저으며 말했다.


"저는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영광이에요. 한 해 동안 열심히 뛰었던 다른 선수들을 위해 박수쳐주다 가려고요. 부모님도 오시겠다고 했는데 제가 말렸어요. "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시민구단에서도 한번쯤은 신인왕이 탄생해야하지 않냐며 내심 기대했던 것도 사실이다. 물론 그 같은 생각에는 29경기 출장 1도움이라는 기록도 한몫했다.

" 저도 그런 생각 본 적은 있어요. 기적의 주인공이 되고 싶다는 바람도 있었고요. 시즌 초반 제가 말씀드렸던 목표 기억하세요? 6강 플레이오프 진출하겠다고 말했잖아요. 그 목표를 이룬 것만으로도 제겐 뿌듯한 한해였어요. 이제 한 계단 올라섰으니 내년에는 더 높이 올라가야죠. "

대전시티즌이 6강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던 순간, 그는 기적을 꿈꿨다. 그러나 아쉽게도 주인공은 되지 못했다. 지난 해 신인왕 수상자 염기훈은 하태균에게 신인왕 트로피를 건넸고 기나긴 여정은 그렇게 끝이 났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김형일은 하태균을 위한 진심어린 박수를 잊지 않았다.

" 아쉬운 마음도 있지만 하태균 선수에게 축하한다는 인사말은 건네고 싶어요. 그리고 저를 처음 발탁해주신 최윤겸 감독님, 부족한 부분 많이 가르쳐주시는 김호 감독님께도 감사드린다는 말씀 드리고 싶고요. 두 분의 은혜는 절대 잊지 못할 거예요. 올 한해 제가 상상하던 것 이상으로 많은 사랑과 인정을 받았어요. 내년에는 더 잘해서 베스트 11에도 이름 올릴게요. 오늘 보니까 베스트 11에 뽑힌 선수들은 앙드레김 선생님이 디자인한 옷을 입었던데 너무 멋있네요. 내년 이맘때는 꼭 그 옷 입고 인사드릴게요(웃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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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지난 11월 21일 안산 와~스타디움. 한국 올림픽대표팀은 2008 베이징 올림픽 아시아 최종 예선 6차전 바레인전에서 0-0 무승부를 거둠으로써 올림픽행 티켓을 땄다. 경기 종료 후 선수들은 " 해냈다 " 는 기쁨에 서로의 어깨를 두드리며 그 순간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약간의 실랑이가 일어났다.


축구협회 직원 한명이 그라운드로 내려와 박주영의 손을 잡고 어디론가 데리고 가려한 것이다. 박주영이 안가겠다며 뒷걸음질을 치자 이번에는 직원 한명이 더 내려와 뒤에서 그를 밀어 기자단이 있는 쪽으로 데리고 갔다. 알고 보니 박주영은 바레인전 최우수 선수(Man of the Match)로 뽑혔던 것. 시상을 하기 위해서라도 꼭 가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문득 지난 8월 3일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그날은 올스타전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당시 박주영은 다른 선수들과 함께 구세군 서울 후생원을 방문, 그곳 어린이들과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특히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던 어린이를 위해 직접 음료수 캔을 따주는 모습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 때문에 옆에 있던 이근호, 김치곤의 야유를 받기도 했다.

" 오늘 이렇게 아이들 만나보니까 어떠세요? " 내심 기분 좋다는 대답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 인터뷰 하기 싫어요. " 옆에 있던 다른 기자가 다시 한 번 물었다. " 그래도 오늘은 즐거운 날이잖아요. 아이들이랑 재밌게 노시던데 짧게라도 소감 말씀해주시면 안되나요? " " 전 원래 인터뷰 안해요. " 그러나 무뚝뚝한 표정도 잠시, 옆에 있던 아이들이 " 형, 공 차러 가요 " 라고 말하자 박주영은 이내 활짝 웃으며 말했다. " 그래. 빨리 가자. "


박주영은 올스타전이라는 즐거운 행사 앞에서도 극도로 말을 아꼈다. 그것은 경기 최우수 선수로 뽑혔던 바레인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꼭 그날만 그랬던가. 어느 날은 골을 넣고도 바로 라커룸에 들어가는 바람에 소속팀 홍보 관계자들의 발목을 동동 구르게 만들기도 했다.


도대체 왜 그럴까? 그와 관련해 박주영은 언젠가 지인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 바 있다.


" 축구 선수니까 축구로 말하고 싶어요. "


그렇다. 모든 해답은 그 안에 들어 있다. 그동안 박주영은 그라운드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했다. 그러나 여자친구의 유무에도 세인들은 지나친 관심을 드러냈으며 부상 역시 대단한 뉴스인양 보도가 돼왔다. 그 와중에 박주영은 지쳐갔고, 결국 우리가 만난 건 기자들을 피한 채 시무룩한 표정으로 지나가는 지금의 박주영 뿐이다.


2005년 데뷔 첫해 30경기 출장, 18득점 4도움을 올리며 신인왕을 수상했던 박주영은 이듬해에는 30경기 출장 8득점 1도움이라는 다소 저조한 기록으로 K-리그 베스트 11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그것은 올해도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부상'이라는 악재까지 겹쳤다는 사실이다. 그 때문에 '14경기 출장 5득점'이라는 축구천재와는 거리가 먼 기록을 남길 수밖에 없었다.


오늘(3일)은 박주영이 2005년 3월 9일 대구전에 교체로 출장, 프로 무대를 밟은 지 꼭 1000일 째 되는 날이다. 그러나 그의 데뷔 1000일은 가는 곳마다 돌풍을 일으켰던 데뷔 첫해와 비교해보면 조용하다 못해 쓸쓸하다는 느낌마저 준다.


그러나 그를 향한 기대와 희망을 저버릴 시간은 아직 아니다. 박주영의 나이는 이제 겨우 23살. 그는 지금의 3년보다 앞으로의 10년이 더 빛날 선수일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라도 '동트기 전 새벽이 가장 어둡다'는 옛말의 주인공이 바로 박주영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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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올 한해  몇 번이나 경기장을 갔는지 궁금해 다이어리를 꺼내 하나 하나 세어봤습니다. 정확하게 72번이더군요. 많기도 하여라. ^^ 그래도 제 머리와 가슴은 그 모든 경기들을 기억하고 있답니다. 어쩜 다이어리와 이곳 블로그에 후기를 끄적인 덕분인지도 모르겠죠.


그 수많은 경기들 중 저는 아마추어 선수들이 뛰었던 경기들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지금도 제 머릿 속에는 텅빈 운동장에서 뛰었던 선수들이 모습이 가장 강렬했던 기억으로 자리 잡아 있네요. 경기장이 너무 조용한 나머지 관중석에 앉아있던 제게도 선수들이 하는 말이 또렷이 들려 언젠가는 멋쩍어하며 웃었던 기억도 나는군요.


올 한해 대학 축구 결승전이 열리는 날이면 늘 경기장에 가곤 했습니다. 8월에는 안동까지 가서 뙤약볕 아래서 경기를 지켜보다 일사병에 걸려 쓰러지기도 했고(승부차기까지 갔거든요! 140분 동안 햇볕 아래 있었으니 몸이 축날 수 밖에요.) 갑자기 기온이 뚝 떨어진 10월의 어느 날에는 찬 바람을 쐬며 수원종합운동장에 있었습니다. 얼마 전에는 대학축구 마지막 경기를 보기 위해 양구까지 내려갔고요.


가끔 사람들은 묻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리도 열심히냐고요. 전국을 헤매면서까지 봐야만 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이냐면서요.


물론 그때마다 제 대답은 간단합니다.

"치열함 때문에요."


치열함.


그렇습니다. 전 그저 그들의 지독한 치열함이 좋아서 그럴 뿐입니다.


경기장에 서 있을 때면 그들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옵니다. 때론 상대를 향해 욕을 하고 태클에 걸려 넘어지고 맙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곧 일어섭니다. 그러고 나서 다시 달리지요. 공 하나를 향해 뛰는 그들을 바라볼 때면 저는 늘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단지 힘들다는 이유로 쉽게 포기하려는, 늘 잘할 수 있을까? 라며 자주 주저앉은 제 자신에 대해 말이죠.


하지만 그들은 그런 저와 다릅니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도, 심장이 터질 듯한 고통 속에서도 그저 공을 향해, 공과 함께 뜁니다. 단지 비장한 각오가 있어서 그런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희망, 바로 희망 때문이지요.


언젠가는 관중들로 가득 찬 경기장에서 달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 말입니다.


공과 잔디, 그리고 땀방울 하나 하나가 바로 그들이 품는 품입니다. 그렇게 온마음으로 키워내는 꿈이지요. 저는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며 ‘치열하다’라는 단어의 뜻을 다시 배운답니다.


올 시즌 마지막 경기가 끝나면서 저는 그들과 잠시 이별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카메라를 향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해보라고 말했지요. 그랬더니 선수들은 조금은 쑥스러운 표정으로, 그렇지만 마음 속 이야기들을 남김없이 하더군요.


“이번 경기만 그러는 게 아니라 일단 예선, 16강, 심지어 결승에 가도 가족들이나 선수들 주위 사람들 이외에는 경기를 보러 안 오세요. 항상 마찬가지에요. 이번 경기는 수도권에서 했는데도 주위 사람들 외에는 안 오더라고요. 좀 섭섭하다고 해야 하나… 저희는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뛰고 있는데 많이 안 오시니까 속상하죠.”


“K-리그 가기 전까지의 성장과정이라 보면 되요. 저희가 대학에 있으면서 이런 대회를 통해 많이 배우고 성장하거든요. 그러고 나서 K리그에 가게 되면 더 잘하게 되는 거죠. 성장과정이라 보면 되요.”


저희가 아직 나이도 어리고 경험도 부족하다보니 K-리그보다는 경기 흐름도 조금 늦고 재미없을지도 몰라요. 그래서 K-리그보다 인기가 없는 것일 수도 있겠고요. 그렇지만 저희 열심히 하고 있어요. 관심 많이 가져주세요. K-리그에 나가기 전의 성장과정 속에 있는 거니까 가끔 보게 되더라고 큰 응원 부탁해요.”


“오늘은 좀 많이 온 건데… 관중 없는데서 많이 뛰어봤어요. 관중이 많으면 신나겠지만 아마추어는 어쩔 수 없이 적잖아요. 그래서 프로에 가기 위해 더 노력하게 되는 것 같아요. 사람들 많은데서 뛰고 싶은 마음에, 성공하고 싶은 마음에 열심히 하게 되죠. 앞으로도 죽어라 해야죠. 관심 갖고 많이 지켜봐줬으면 좋겠어요. 대학 축구도 한국 축구인데 프로만큼 실업만큼은 아니더라도 관심 가졌으면 좋겠어요.”


좀 실감이 안 나죠. 관중들이 없으니까. 아마추어 축구라도 많이 보러왔으면 좋겠어요. 많이 오면 뛰는 우리도 재밌어요. 아마추어 축구도 똑같아요. 프로축구처럼 박진감 넘치고 파워있고 스피드 있고… 프로랑 틀릴 게 없어요. 그러니 프로축구만 사랑해주실 게 아니라 아마추어도 많이 보러 와서 응원해주면 저희가 더 힘을 받고 열심히 할 것 같습니다.”


“관중이 없어요. 그렇지만 프로랑 별 차이 없어요. 압박이나 스피드도 좋고요. 프로에 있는 선수들도 다 아마추어 리그를 거친 뒤 가는 거랍니다. 그러니 아마추어 축구도 많이 봐줬으면 좋겠어요. 스타들이 다 거치고 가는 곳이에요. 박지성 선수도 여기에서, 이런 아마추어 무대에서 뛰다 프로에 간 거잖아요. 좋은 선수들 아마추어 리그에도 진짜 많아요. 많이 봐주세요. 아마추어 경기를 많이 봐줘야 저희도 발전되고 그렇게 많이 응원해주신다면 국가대표 선수들처럼 열심히 좋은 모습 보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국가대표 선수들도 다 이렇게 아마추어 리그를 거치고 갔다는 사실, 잊지 마세요. 아마추어 축구도 재밌고 스피드 있고 압박 부분에서도 프로랑 별 차이 없으니까 많이 봐주세요(웃음).”


선수들은 제게 말했습니다. 조금만 관심을 가져달라고요. 스타는 갑자기 탄생하는 게 아니니까요. 이렇게 작은 곳에서부터 서서히 자라는 법이니까요.


물론 그들은 딱히 지켜보는 사람들이 없을 지라도 묵묵히 제 몫을 해낼 것입니다. 달릴 때만큼 행복한 순간은 또 없으니까요. 좋아하는 일이 가장 잘하는 일이 될 수 있도록 끝없이 노력하겠지요.


그렇지만 칭찬해주세요. ‘그들만의 리그’에서 ‘모두의 K-리그’에 가기 위해 노력하는 그 자세를 말이에요. 그리고 격려해주세요. 언젠가는 한국을 빛낼 선수가 될 수 있을 거라고요.


박지성 선수도, 설기현 선수도, 또 이천수 선수와 박주영 선수 또한 이렇게 텅빈 운동장에서 뛰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나요? 그들 역시 한때는 대학무대를 빛냈던 선수들입니다.


그러니 조금만 시선을 낮춰 바라봐주세요. 


별은 이렇게나 가까운 곳에서 빛나고 있습니다. 그들 이마 위에 송글송글 맺힌 땀방울처럼 그렇게 반짝반짝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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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지난 11월 21일 안산와~스타디움. 한국 올림픽대표팀이 올림픽 본선 6회 진출을 확정 짓던 순간 이근호는 " 너무 좋아서 뭐라고 말해야할지 모르겠어요 " 라는 말만 반복해서 했다.

그러나 오늘(26일) 이근호에게서 다시 한 번 그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삼성하우젠 2007 베스트 11에서 이근호는 데닐손(31표)을 단 1표 차로 제치며 까보레(83표)와 함께 공격수 부문 최고 선수로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당시 이근호는 바레인전이 끝난 후 " 이 참에 K-리그 베스트 11도 노려보지 않겠냐 " 는 물음에 " 워낙 쟁쟁한 공격수들이 많아서 힘들 것 같아요 " 라며 손사래를 친 바 있다. 그 대답을 기억하냐고 묻자 " 당연히 기억하죠 " 라는 대답과 함께 수화기 너머로 호탕한 웃음소리를 들려줬다.


" 전 진짜 생각조차 못했어요. 올 시즌 까보레, 데얀, 모따, 데닐손 등 외국인 공격수들이 좋은 활약을 보였잖아요. 그 가운데서 저를 뽑아주신 건 내년에 더 열심히 하라는 의미인 것 같아요. 내년에는 더 잘해서 믿음에 꼭 보답하겠습니다. "


물론 올 시즌 27경기 출장하며 10골 3도움을 올리며 대단한 활약을 선보인 이근호이지만 그 행진이 살짝 주춤했던 시기도 있었다. 후반기 이근호는 2골 1도움만 기록하며 드디어 '이근호 바람'이 끝난 것은 아니냐는 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올림픽 대표팀을 오가면서 체력적인 부분에서 조금씩 한계를 느꼈어요. 원래 체력은 자신 있었는데 후반기 들어가면서 페이스를 잃어가기 시작했죠. 바레인전 때는 75분 쯤 되니까 힘들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처음 있는 일이었어요. 내년 동계훈련 때는 장기 레이스에도 버틸 수 있도록 체력을 보강할 계획이에요. "


그렇지만 지금의 이근호를 만든 8할은 바로 세상을 밝고 긍정적으로 보는 시선에 있었다.


"후반기 때 조금 못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올 시즌 내내 항상 최선을 다해 뛰었어요. 그래서 누군가 스스로에게 점수를 주라고 하면 10점 만점에 8.5점을 주겠어요. 나머지 깎인 1.5점은 앞으로 보완해야죠. 부족한 게 있어야 더 열심히 하는 법 아니겠어요? 내년에는 정규리그에서만 10골 이상을 넣고 싶어요. 2008 북경 올림픽에서도 멋진 모습 보여드릴게요. "


이근호는 지금의 자신을 만든 사람들을 향한 감사 인사도 잊지 않았다.


"우선 변병주 감독님께 가장 감사드려요. 지금도 다른 선수들은 팀에서 훈련 중인데 저만 쉬고 있어요. 제 자신도 모르게 체력저하가 왔을 거라면서 일단은 푹 쉬라고 하시더라고요. 인생의 선배로서, 또 때론 푸근한 아버지처럼 그렇게 항상 저를 이끌어주시는 고마운 선생님이세요. 올 시즌 대구라는 팀에서 변 감독님을 만난 건 정말 제 인생에서 큰 기회이자 행운이었죠. "


그래서였을까. 올 한해 가장 기뻤던 순간을 꼽으라고 하자 이근호는 " 변병주 감독님과 함께 첫 승 기념 물벼락을 맞았을 때 " 라고 말했다.


"데뷔골을 넣었던 전남전(3월 18일) 때보다 울산전(3월 21일)당시가 더 기뻤어요. 후반 45분에 제가 넣은 골 덕분에 저희가 2-1로 이겼죠. 시즌 첫 승이었어요. 이적 후 처음으로 기록한 결승골이었죠. 그 때 제가 울산 선수들을 세 명이나 제쳤는데.… 제 평생 가장 멋진 골로 기억될 거예요. 그런데 그날 (박)주영이가 수원을 상대로 해트트릭을 기록하는 바람에 역사 속으로 묻혀버렸지만 말이에요(웃음). "


그렇게 말하며 이근호는 다시 한 번 시원하게 웃었다. " 의식하지 않고 저만의 스타일대로 열심히 할게요. 팬 여러분들, 예쁘게 봐주세요. 아셨죠? "


이렇듯 마지막까지 이근호는 웃음을 잃지 않으며 '태양의 아들'답게 밝은 모습만 전해주었다. 이근호의 마음에선 벌써 봄이 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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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2007 삼성하우젠 K-리그 우승팀은 ‘전통의 명가’ 포항 스틸러스에게 돌아갔습니다.

11월 11일 성남 탄천운동장에서 열린 챔피언결정전 2차전에서 포항은 전반 43분 터진 죠네스의 선제골을 잘 지켜 2연승(1차전 3대 0 포항 승)으로 너무나 쉽게 2007 시즌 K-리그 우승컵을 들어 올렸지요.


이번 포항의 우승은 여러모로 인상 깊습니다. 우선은 리그 5위 팀이 '6강 플레이오프 제도' 덕분에 경남, 울산, 수원을 연거푸 제압하며 결국엔 우승했다는 사실이 가장 눈에 띕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포항의 우승이 더욱 주목을 끄는 이유는 바로 ‘축구는 이름값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명제가 ‘참’임을 다시 한 번 증명시켜줬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비록 1차전에서 장학영 선수에게 한 골을 허용했지만 골키퍼 정성룡 선수는 특유의 침착함으로 마지막까지 포항의 골문을 지켜냈습니다. 청소년대표 시절 한 살 어린 차기석 선수에게 밀리며 2인자의 설움을 겪어야만 했지만 그는 홀로 계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묵묵히 이겨냈지요. 결국 정성룡 선수는 이번 챔피언결승전에서 포항을 우승으로 이끌며 ‘진정한 1인자’로 빛났습니다. 그래서 더욱 그가 대단하게만 보이는군요.

박원재 선수 역시 그렇습니다. 그는 이번 대회에서 포항 스틸러스가 배출한 또 다른 스타지요. 수원과의 플레이오프에서 결승골을 터뜨리며 팀을 챔피언결정전으로 이끈 그는 챔피언결정전 1차전에서도 연속골을 뿜어내며 단번에 자신의 이름을 모두에게 알렸습니다. 한 번도 태극마크를 달아보지 못한 ‘중고 신인’이 챔피언결정전을 통해 ‘스타’로 거듭났습니다. 또 하나의 신데렐라 역사를 쓴 그 모습이 그저 대견스럽기만 하네요. 


최효진 선수도 빼놓을 수 없겠죠. 2005년 인천 유나이티드에서 뛰었던 그때, 그는 울산에게 우승컵을 내주며 굵은 눈물방울을 잔디 위로 쏟아내야만 했지요. 당시 이를 보다 못한 장외룡 감독이 직접 나서 그를 달래줘야만 했을 정도로 그는 참 서럽게 울었습니다. 그러나 그날의 아픔은 결국 오늘의 기쁨으로 승화됐습니다. 올 시즌 포항으로 이적하며 오범석 선수에게 밀려 벤치 설움도 겪었지만 그는 결국 주전 자리를 꿰차며 우승의 주역이 되었네요. 그 모습에 대견하다는 생각만 연신 드는군요.  


이광재 선수는 또 어떻고요. 경남과의 6강 플레이오프 첫 경기에서 골을 기록하며 기분 좋은 조짐을 보였던 그는 이어 펼쳐진 울산전과 성남과의 챔피언결정전 1차전에서도 역시 골을 기록하며 ‘특급 조커’로서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보여줬습니다. 역시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가봅니다.


그러고 보니 포항 수비의 핵 조성환 선수도 칭찬해주고 싶습니다. 한때 ‘김호의 아이들’ 중 하나로 총망 받는 미래를 보장받는 듯 했지만 포항 이적 후 잠시 잊혀진 존재가 됐던 것도 사실입니다. 더욱이 지난겨울 진행했던 루마니아 리그 진출이 여러 가지 사정에 의해 중단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는 많은 우려의 눈으로 그를 지켜봤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역시 프로였습니다. 마지막까지 완벽한 플레이로 포항의 수비를 책임졌으니까요.  그의 노고 역시 칭찬하지 않을 수 없겠죠.   


‘돌아온 스트라이커’ 고기구 선수를 빼놓을 수 없겠네요. 지난 해 포항은 이동국 선수의 갑작스런 부상으로 최전방 공격수의 부재를 걱정해야만 했지만 이는 기우에 불과했습니다. 9골3도움이라는 놀라운 성적으로 이동국 선수의 자리를 확실히 메운 고기구 선수가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올 시즌 개막전이었던 3월 4일 인천전에서 첫 골을 기록한 이후 10월 10일 울산전까지 그는 연이은 골 침묵 속에서 괴로워해야만 했습니다. 그 때문에 경남, 울산, 수원과의 플레이오프 경기에서 중용되지 못하는 결과와 만나야만 했고요. 그러나 성남과의 챔피언결정전에서 파리아스 감독은 그에게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고기구 선수는 그 믿음에 보답했지요. 성남과의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보여준 그의 골은 정말 멋졌습니다.


마지막으로 노장 투혼을 불사른 K-리그 17년 차 김기동 선수를 언급하고 싶습니다. 그는 이번 챔피언결정전 2차전을 마지막으로 필드 플레이어로서는 최다출장(426경기)인 대기록을 세웠습니다. 만약 그만의 지독한 ‘자기 관리’가 없었다면 우승컵을 드는 오늘 역시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17년 만에 손에 든 우승컵, 그 뒤에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 뒤에 얻은 승리가 있었습니다. 진정한 승자가 된 그에게 존경의 인사를 올리고 싶습니다.    


이로서 2007 K-리그도 끝이 났습니다. 2007 시즌 일정표가 나오길 기다렸던 지난겨울이 엊그제 같은데 시간은 참 빠르기도 하지요. 어느새 다음주에는 신인 선수 드래프트 일정까지 잡혀있고요. 내년에는 또 어떤 선수들이 등장하여 우리 가슴을 설레게 할까요?  그 생각만으로도 제 마음은 어느새 내년 봄을 꿈꾸며 빠르게 뛰기 시작하네요.


모두들 수고하셨습니다. 내년에 다시 만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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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얼마 전 벌어진 국회위원들의 룸살롱 파문을 다들 기억할 것입니다. 국회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 소속 몇몇 국회의원들은 지난 22일 대전 7개 기관 국감을 마친 뒤 룸살롱 방식으로 운영되는 모 단란주점에서 폭탄주 파티를 가졌습니다. 성접대를 받은 국회의원이 있었는가하면 그 모든 비용을 피감기관이 지불한 것으로 알려져 아주 큰 파문을 일으켰죠.


처음 국회위원들의 룸살롱 사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어린 시절 어른들이 자주 하던 말씀처럼 “역시 정치하는 놈들은 썩었어. 그러니 우리나라가 이 모양이지”하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일이-경우는 조금 다르겠지만-우리나라 축구대표팀에서도 발생하고 말았군요.


뉴시스의 보도에 따르면 지난 아시안컵 기간 중 대표팀 선수 중 일부(4명)가 숙소를 이탈, 자카르카 현지 룸살롱을 찾았다고 합니다. 선수들이 처음으로 룸살롱을 찾은 7월 13일은 바레인전을 이틀 앞둔 날이었습니다. 알콜의 타격 때문이었을까요? 우리 대표팀은 그날 김두현의 선제골에도 불구하고 1-2로 패하고 맙니다. 그러나 그들은 바레인전이 끝난 후에도 다시 룸살롱을 방문하고 말았습니다. 이틀 후에는 다시 인도네시아와의 경기가 있었는데 말이죠. 다행히 인도네시아에게 1-0으로 이기며 8강에 진출했지만 만약 사우디 아라비아가 바레인을 대파하지 않았다면 '조별예선 탈락'이라는 수모를 겪었을지도 모릅니다.


뉴스가 보도된 이후 축구팬들 사이에서는 갑론을박이 벌어졌습니다. 누군가는 단합을 위해 맥주 몇 병 마신 것 가지고 다들 호들갑 떨고 있는 듯하다고 말했습니다. 취재를 하고 기사를 쓰는 와중에 와전된 것 아니냐며 물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축구는 팀 스포츠이기 때문에 아무리 ‘단합’이 중요하다 하더라도 그것을 술로 푼 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라고요. 얼마만큼의 피로와 스트레스가 그들을 괴롭혔는지는 모르겠지만 "숙소를 무단으로 이탈하여 음주를 했다" 사실은 분명 크게 잘못됐습니다. 어떤 이유를 대더라도 면죄부가 될 수 없습니다. 그저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변명거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더욱이 룸살롱 아가씨들의 증언도 있었습니다. 그녀들은 선수들의 얼굴과 이름, 그리고 자신들에게 준 팁까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를 대표해서 간 선수들입니다. 뛸 때마다 빠른 박자로 뛰던 그들 심장 위에는 태극마크가 있었습니다. 선택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축구 선수들이 꿈꾸는 바로 그 태극마크 말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대한민국의 표상을 가슴에 단 채 뛰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며 끝없이 응원했습니다. 이란과의 8강전, 이라크와의 준결승전, 마지막으로 일본과의 3~4위전까지 말입니다.


혹시 아시나요? 매 경기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제발, 힘을 내세요. 이렇게 응원할게요”라고 외쳤다는 사실을요. 그러나 당신들은 우리의 한없는 마음과 간절했던 염원, 그리고 변함없던 믿음을 저버렸습니다. 아주 무참히 짓밟아버렸습니다. 더운 날씨 속에서 말라리아 예방약을 먹어가며, 물갈이 때문에 고통스런 와중에도 열심히 뛰던 그 모습에 가슴 저려했던 모든 순간들이 원망스럽습니다. 아무 것도 모른 채 거짓 연기에  당한 것만 같은 생각도 듭니다.


네, 물론 압니다. 숙소를 이탈한 선수는 소수에 불과하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들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선수들은 아시안컵 우승을 위해 온 몸을 다해 뛰었죠. 후에 고트비 코치는 사석에서 제게 말했습니다. 근육에 경련이 일어나는데도 다시 일어나서 뛰고 또 뛰는 모습은 눈물겨웠다고 말이지요.

 

하지만 절제와 자기관리로 후배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할 몇몇 노장 선수들이 아시안컵 기간 중에 보인 일탈행동은 그 어떤 눈물 어린 호소로도 용서받기 힘들 것입니다. 물론 시즌 중간에 술을 마시는 것은 개인의 자유의사에 달려있습니다. 우리나라 축구팬들은 그 사생활까지 간섭할만큼 참견쟁이가 아닙니다.


그렇지만 당신들은 대한민국이라는 이름 아래 중요한 국제대회에 출전한 대표 선수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시안컵 기간은 잠깐의 일탈이 주는 쾌감을 즐길 시간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런데도 당신들은 너무나 무책임한 행동을 저지르고 말았군요. "아가씨들에게 팁까지 주며 2차까지 갔다"는 내용에선 결국 할 말을 잃고 말았습니다. 무엇이 그리도 즐거웠기에 새벽 5시까지 그녀들과 함께 한 것인가요. 그것도 시합을 바로 앞두고 말입니다.


당신들은 우리 마음에 거대한 실망만 안겨줬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당신들이 뛰는 K-리그를 사랑하는 팬으로서 작금의 현실에 아주 많이 마음이 아픕니다. 이 마음은 과연 무엇으로 보상받을 수 있을까요?


다음은 대한축구협회 홈페이지(http://www.kfa.or.kr)에 실린 <아시안컵 대표팀 일부 선수의 물의와 관련한 사과문> 전문입니다. (2007년 10월 30일 기준)


대한축구협회는 2007 아시안컵 기간 동안 일부 대표선수들의 부적절한 행동이 있었다는 보도를 접하고 당혹감과 송구스러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정확한 사실 여부를 파악해야겠지만 축구팬과 한국축구를 사랑하는 분들께 심려를 끼쳐드린 것에 대해 깊이 사과드립니다.

대한축구협회는 그동안 대표선수들이 소집되면 선수들에게 한국축구뿐만 아니라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선수로서 명예와 자존심을 갖고 행동도 ‘대표선수’답게 처신하라고 누누이 강조하고 교육했습니다만 이번과 같은 사태를 낳게 되어 죄송스러울 따름입니다.

대한축구협회는 조속한 시일 내에 이번 사고의 진상을 규명하고 필요하다면 해당 선수의 징계 등을 통해 다시는 이러한 일이 재발되지 않도록 대책을 세우는 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축구팬과 한국축구를 사랑하는 국민들께 머리 숙여 사죄드리며, 대한축구협회는 이번 사고를 교훈삼아 대표팀 운영에 더욱 만전을 기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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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내겐 기쁨과 감동으로 점철됐던 시간.
20071014 @퍼플아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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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대전시티즌 숙소는 ‘대전시티즌’이라는 이름과 어울리지 않게 국곡리 어느 깊은 산골짜기에 있습니다. 핸드폰도 잘 안 터지는 그곳에 가기 위해선 택시 아저씨들에게 늘 웃돈을 더 줘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시 대전 시내로 가기 위해선 콜택시를 불러야 하고요. 물론 그때마다 택시 아저씨들은 ‘거기까진 못가겠다“며 거부하기 일쑤죠 



 2007년 6월 9일. 그날 저는 인터뷰를 하기 위해 대전시티즌 숙소를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그만 이야기가 길어지고 말았죠. 질문이 꽤 많았거든요. 인터뷰가 끝난 뒤 숙소 밖으로 나갔을 때 저를 반긴 건 칠흑 같은 어둠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떡하겠어요. 그 어둠을 뚫고 집에 가야만 했죠. 114 안내전화를 통해 콜택시 전화번호를 알아낸 다음 열심히 통화를 시도했답니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역시나 “힘들겠는데요” 뿐이었습니다.


 계단 한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다시 통화 버튼을 눌렀습니다. 멀리서 계곡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더군요. 한쪽 풀숲에서는 개구리들의 합창이 계속 됐죠. 6월의 밤바람은 꽤나 시원했답니다. 3층에서는 웬 선수가 열심히 SG워너비의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었고요. 집에 갈 차만 있었다면 무척이나 낭만적으로 다가왔을 순간이었을 거예요. 아마. 


 ‘내가 과연 오늘 집에 갈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한 선수가 다가왔습니다. “기자님, 제가 (장)현규 형한테 차 키 빌려올게요. 유성 터미널까지 데려다드리면 되죠? 잠깐만 기다리세요.” 골키퍼 유재훈 선수였습니다. “아, 안 그러셔도 되는데. 괜찮아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택시 부르기가 너무 힘들다는 것을 이미 깨달아버린 저는 “아, 네. 고맙습니다”라고 말한 뒤 그를 기다렸답니다. ^^;


 잠시 후 유재훈 선수가 내려왔습니다. 차 주인인 장현규 선수에게 마음속으로나마 감사인사를 드린 뒤 차에 올라탔습니다. 우리의 대화는 그렇게 곧 시작됐죠.


“요즘 참 좋으시겠어요.” “그러게요. 경기장에서 뛸 때 선수는 가장 행복한 법이죠.” “데뷔전 기억나요. 그날 비가 참 많이 내렸는데…” “아… 그때요…”


 5월 16일 저녁 8시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FC서울과의 경기에서 유재훈 선수는 K-리그 데뷔전을 치렀습니다. 그날은 경기 시작 전부터 비가 참 많이도 내렸죠. 킥 오프 휘슬이 울렸을 때도 비는 좀처럼 멈출 기색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때문에 유재훈 선수는 종종 공을 놓치며 불안한 모습을 보였죠. 가뜩이나 데뷔전이라 잔뜩 긴장까지 했는데 말이에요.
 
 결국 그는 전반 31분 김은중 선수에게 선제골을 허용하고 말았습니다. 그 골은 결국 그날의 결승골이 되었고 대전시티즌은 0-1로 패하고 말았죠. 무척 속상했겠지만 그에게서 프로 입단 1년 6개월 만에 K-리그 데뷔전을 치룬 소감을 듣고 싶었습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맺은 결실은 승패에 상관없이 빛날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그러나 저는 그의 곁에 다가갔다 곧 한 걸음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눈물로 범벅된 그의 얼굴을 봤기 때문이죠.


 “제가 그 골만 막았어도 컵 대회 플레이오프 진출을 꿈꿀 수 있었을 거예요. 제 실수 때문에 이젠 희망조차 가질 수 없게 됐어요.”


 그렇습니다. 그의 말처럼 대전시티즌은 FC서울에게 패하면서 컵 대회 플레이오프 탈락을 확정 짓고 말았지요. 그렇지만 어떻게 그것이 전적으로 골키퍼인 그만의 책임일까요? 그런데도 그는 자신 때문이라며 눈물을 펑펑 쏟았습니다.


 “데뷔전 때 흘린 눈물이 참 인상 깊었다”는 이야기를 꺼내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날 하늘에서는 비가 끝없이 내렸어요. 마치 제 마음을 위로해주는 듯 했어요. 그날 내린 비와 그 빗속에서 흘린 눈물을 기억해요. 물론 패배가 부끄러워 눈물 흘린 건 아니에요. 비록 제 데뷔전은 패배로 끝났지만 이제 시작이잖아요. 그래서 절망하지도 또 낙담하지도 않아요. 그동안 사람들은 저라는 선수가 대전시티즌에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잖아요. 그렇지만 그날 그 경기 덕분에 저는 제 존재를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었어요. 그것만으로도 만족하고 감사해요. 앞으로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제 이름을 알리려고요. 그러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노력해야겠죠.”


 하지만 그날 그보다 더 인상 깊었던 것은 따로 있었습니다. 바로 “7년 동안 만난 여자친구의 기도 덕분에 여기까지 온 거예요. 그녀에게 감사해요”라던 데뷔전 소감이었죠.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 만났어요. 신앙심이 참 깊어요. 힘들 때마다 늘 저를 위해 기도해주거든요. 그 기도 힘으로 제가 버틴 것 같아요. 고맙죠. 어느새 만난 지도 7년 째에요. 그러다보니 결혼까지 생각하게 됐어요. 그런데 막상 고민이 되더라고요. 결혼을 하기 위해선 돈이 필요한데 제가 프로에 입단한지 이제 2년 차라 아직 돈을 많이 모으지 못했거든요. 참 고민이었죠. 돈을 좀 더 모은 뒤에 할까도 생각해봤어요. 그런데 (최)은성이 형이 그러더라고요. 결혼하는데 돈이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건 아니라고요. 살면서 차근차근 모으면 되는 거니까 좋은 사람 놓치지 말고 빨리 결혼하라고 충고해주셨어요. 형 이야기 들으니까 답이 보이더라고요. 함께 살면 경제적으로 더 힘들지도 몰라요. 그래도 서로 더 아껴 살면 되지 않겠어요? 저 챙겨준다고 그동안 울산에서 고생 많이 했는데 결혼하면 제가 옆에서 챙겨주면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로 만들어주고 싶어요. 날짜도 정했어요. 12월 1일에 울산에서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어요. 그때 시간되면 꼭 오세요. 청첩장 보내드릴게요(웃음),”


 그리고 어제(2일) 8시, 유재훈 선수는 대전월드컵경기장을 찾은 18,184명의 관중 앞에서 자신이 사랑하는 그녀, 배정현 씨에게 사랑을 고백했습니다.  


 "당신의 미소에 힘을 얻고 당신의 말 한마디에 용기가 생기고 당신의 환한 얼굴에서 희망을 봅니다. 당신과 함께 가는 길이라면 거친 가시나무 길도 험난한 바위산과 마주한다 해도 두려움도 머뭇거림도 거칠 것도 없습니다. 오직 당신만이 나에게는 희망과 용기를 주는 사람이니까요. 언제나 나에게 변함없는 사랑을 주는 늘 나에게 변함없는 행복을 주는 항상 내 삶의 활력소가 되는 이 사람을 사랑합니다. 저와 평생을 함께 해 주십시오." 그렇게 말하며 그는 무릎을 꿇은 채 청혼했지요.


 어제도 경기장에는 추적추적 비가 내렸답니다. 데뷔전을 치르던 그날처럼 말이죠. 그가 했던 말이 생각납니다. 데뷔전 당시 맞은 비를 잊을 수 없다던 그 말이요. 그러나 어제 내린 비는 그보다 더 특별히, 또 깊이 기억될 것이 분명합니다. 비록 경기엔 뛰지 못했지만 평생의 동반자가 될 그녀에게 다시 한 번 진실된 사랑을 고백했으니까요. 그리고 그 순간, 퍼플아레나를 찾은 수많은 관중들의 진심어린 축하 인사를 받을 수 있었으니까요. 무엇보다 그 많은 사람들이 그 아름다운 순간을 기억해줄 증인이 됐으니까요.


 그날 대전시티즌의 승리를 기원한 사람들은 아쉽게 1-2 패배를 지켜보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그들 기억 속에는 아쉬운 역전패만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정현아, 7년이란 시간동안 변함없이 내 곁을 지켜줘서 너무 고맙다. 가까이에서 지켜주지 못해서 항상 맘에 걸리고 힘들었는데 이제부터라도 옆에 두고 널 지켜 주고 싶어. 세상 모든 어려운 일 내가 다 막아주는 너만의 골키퍼가 되서 말이야. 사랑해!! 많이!!"


 냉정한 승부의 세계가 펼쳐지는 축구장에도 낭만은 있었네요. 비록 가진 것은 부족하지만 마음만은 부자인,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두 사람의 앞날을 축복합니다. 지금처럼 한결같은 마음으로 오래 오래 사랑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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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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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1일 저녁 7시 수원월드컵경기장. 수원은 전반 16분 터진 하태균 선수의 선제골을 잘 지켜내 전남에게 1-0 승리를 거뒀습니다. 이날 경기로 5연승을 거둔 수원은 2위에서 1위로 올라가며 성남을 승점 2점 차로 따돌렸지요.


 
경기 종료 후 라커룸으로 들어가던 선수들 틈에서 김치우 선수를 발견했습니다. 다가가서 괜찮냐며 인사를 할까 잠시 고민했죠, 하지만 이럴 땐 그저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반 16분 김치우 선수는 문전 앞에서 에두 선수가 올린 공을 헤딩으로 걷어냈습니다. 그러나 그 공은 참으로 무심하게도 페널티에어리어 왼쪽에 있던 하태균 선수 앞으로 떨어지고 말았죠. 하태균 선수는 침착하게 오른발로 발리 슈팅을 때렸고 결국 그 골은 결승골이 됐습니다. 본의 아니게 어시스트라도 한 것처럼 된 그 상황이 그에겐 편하지 않았겠죠.


가만히 그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데 김치우 선수가 먼저 고개 숙이며 인사했습니다. 땀에 젖은 머리를 귀 뒤로 넘기던 중 저를 발견했나봅니다. 그러더니 오른손을 내밀며 제게 악수를 청하더군요. 그 순간, 잠시 잊고 있었던 2년 전 겨울이 생각났습니다. 맞아요. 그때도 그는 제게 그랬죠.


2005년 12월 4일 일요일 울산문수월드컵경기장. 그날은 챔피언결정전 2차전이 열린 날이었습니다. 당시 인천은 홈에서 열린 1차전에서 1-5로 패하고 말았습니다. 스페인에서 돌아와 후기리그부터 합류했던 이천수 선수는 그 경기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했고 그해 K-리그 M.V.P를 수상하기도 했죠. 물론 2차전에서 인천은 절치부심하며 라돈치치 선수와 임중용 선수의 연속골을 앞세워 2-1로 승리를 거뒀습니다. 그러나 골 득실차로 우승컵은 울산에게 돌아갔습니다.


경기 종료 후 인천 선수들은 눈물을 흘리며 그라운드에 누웠습니다. 노장 김학철 선수는 엉엉 소리 내며 울었고 최효진 선수 역시 좀처럼 눈물을 거두지 못했죠. 장외룡 감독은 괜찮다며 최효진 선수의 어깨를 감싸며 달랬지만 그는 계속 눈물을 흘렸습니다. 인천의 젊은 피였던 이요한 선수 역시 예외는 아니었죠. 시상식대 위에서도 그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힘들게 눈물을 참고 있었습니다.


기쁨과 슬픔이 혼란스럽게 얽힌 그 현장에서 김치우 선수를 만났습니다. 그라운드 위에서는 수많은 기자들이 취재 경쟁 중이었고 저 역시 그런 경험은 처음이라 다소 혼란스러운 상태였습니다. 김치우 선수 역시 그랬겠죠. 더구나 바로 앞에서 우승이라는 꿈을 놓치고 말았으니 경황조차 없었겠죠. 그러나 김치우 선수는 그 와중에도 고개 숙여 인사하며 제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경기 내내 끼고 있던 장갑까지 벗으면서요.


다음 해 겨울 저는 그를 다시 만났습니다. 2006 홍명보 자선축구 전야제 행사가 열렸던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이었죠. 당시 행사장 앞에는 선수들의 모습을 보기 위해 꽤 많은 축구 선수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화장실이 행사장 밖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화장실에 다녀올 때마다 선수들은 팬들에게 둘러싸여 행사장에 쉽게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김치우 선수 역시 화장실에 다녀온 뒤 입구 앞에서부터 팬들에게 잡히고 말았죠. 그러나 그는 여느 선수들과는 달랐습니다. 황급히 사라지던 다른 선수들과는 달리 그는 자신에게 종이를 내민 팬들에게 일일이 사인을 해줬습니다. “사진 찍게 웃어주세요”라던 팬들의 요청도 들어줬고요.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행사장에 다시 돌아온 그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그 많은 팬들의 사인을 다 해줬어요? 대단하세요.” 그러나 그는 오히려 제게 반문했습니다. “어떻게 저를 좋아하는 팬들을 뒤로 한 채 그냥 갈 수 있겠어요?”


그러고 보면 그는 종종 저의 우문에 현답을 내놓으며 저를 놀라게 만들곤 했습니다. 언젠가 “축구가 어떤 존재냐”는 질문에도 그는 이렇게나 멋진 대답을 해줬답니다. “축구는 저에게 학교 같은 존재죠. 축구를 통해 모든 걸 배웠으니까요. 그러면서 어엿한 한 사람으로 자랄 수 있었어요. 열여섯 이후로 그랬던 것 같아요. 그때 엄마가 돌아가셨거든요. 세상을 다 잃은 것만 같았죠. 그렇지만 그 순간에도 내 옆에 있었던 건 축구공이었어요. 그래요.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건 바로 축구에요. 그리고 이젠 그 속에서 행복을 찾아요. 네, 지금은 행복합니다.”


그리고 지난 해 올스타전에 처음 뽑혔을 당시에도 그랬습니다. “올스타전에 뽑혔다고 하니까 주위에서 누가 가장 기뻐하던가요?”라는 물음에 그는 “할아버지, 할머니요”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의외라며 “부모님은요?”라고 다시 물어봤습니다.


 
“엄마는 제가 중학교 3학년 때 돌아가셨어요. 암이었어요.”  예상 밖의 대답에 깜짝 놀라며 무슨 말로 그를 위로해줘야하나 잠시 고민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괜찮다며 자신이 살아온 지난날들에 대해 숨김없이, 그리고 담담히 말해줬습니다.


“처음 축구를 시작했을 때 엄마가 많이 반대하셨어요. 어렸을 때 천식 때문에 몸이 약했거든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2년 동안이나 병원에 다녀야만 했어요. 항상 엄마가 돌봐주시며 신경 많이 써주셨죠. 중학교 입학 전에 비로소 천식이 나았어요. 그러면서 뛸 수 있게 됐죠. 뛸 때마다 숨이 찬다는 그 느낌이 정말로 좋다는 사실도 알게 됐어요. 요즘도 C.A라고 하나요? 5학년 때 특별활동을 해야 했는데 뛰는 게 좋아서 축구부에 들어갔어요. 정식 축구부는 아니었지만 마침 담당하셨던 선생님이 축구선수 출신이셨어요. 선생님께서 ‘풍생중학교에서 축구부원을 모집한다고 하니 한번 지원해봐라. 내가 볼 땐 잘될 것 같다’ 고 말씀하셨어요. 그러면서 제 축구인생도 시작된 거죠. 물론 엄마는 계속 반대하셨어요. 그 때문에 ‘만약 몸이 힘들면 그만해야겠다’ 고 생각했는데, 저도 제가 이렇게 끝까지 할 줄은 몰랐어요. 프로선수가 될 줄 몰랐고, 올스타전에 뽑히게 될 줄도 몰랐고요. 할머니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고요. 하늘나라에서 엄마가가 얼마나 좋아하겠냐면서요. 사실 엄마가 살아계실 때만해도 저는 게임 못 뛰는 선수였거든요. 어렵게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거예요. 엄마도 그때는 모르셨겠죠. 제가 이렇게 될 줄은요.”


“보통 게임 뛰기 전에 국민의례를 하잖아요. 저는 그때마다 엄마를 생각하며 기도해요. 게임이 끝나면 다시 한 번 감사기도 드려요. 엄마 덕분에 무사히 게임 마쳤다고. 엄마는 지금의 저를 만들어주신 분이자 지금도 저를 이끌어주시는 분이에요. 이제는 만날 수 없는 사람이 됐지만 제 마음 속에는 항상 엄마가 계시니까 같이 뛰는 거라고 생각해요. 엄마도 보실 거예요. 제가 이렇게 열심히 뛰는 모습 말이에요. 그래서 아쉽다는 생각은 없어요. 오히려 기분 좋을 뿐이에요. 지금도 날 지켜보고 계시니까요.”


그는 굳이 그 시간들을 잊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부정하려 하지도 않았고요. 그때의 시간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김치우도 없는 것이니까요. 김치우 선수는 무엇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굳이 감추려 하지 않고 기억하고 있는 그대로 제게 들려줬죠.


그의 마지막 말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어렸을 때는 진짜로 제가 제일 불쌍한 줄 알았어요. 그런데 힘들 때만 잘 버티면 또 괜찮잖아요. 이 세상에는 더 어렵고 힘든 사람들이 얼마나 많던가요. 저는 진짜 축구 열심히 해서 돈 많이 벌거에요. 그래서 힘들게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있는 아이들을 많이 도와주고 싶어요.”


그의 지난 날을 알고 있는 제게 그 모습은 ‘희망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축구 선수가 되고 싶다’던 꿈이 없었다면 그는 현실에 절망하며 그냥 그렇게 살았을지도 모르죠. 꿈꾸던 소년이 이제는 다른 누구가에게 꿈같은 존재가 됐다는 사실이 저에겐 마치 동화 같은 이야기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죠. '그리하여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결론에 이르기까지 주인공은 얼마나 많은 어려움 속에 놓여 있어야만 하는지요.
 


그리고 지금 여러분께 들려주려는 이 이야기에는 김치우 선수가 보낸 스물 다섯 해 인생 모두가 담겨져 있습니다.

“엄마 냄새 생각나요?” 누군가 그렇게 물었을 때 나는 잠시 침묵해야만 했습니다. 물론 엄마 생각은 나요. “치우야”하던, 5월의 남해를 닮은 그 목소리와 그때마다 눈초리에 지던 잔주름까지요. 하지만 엄마 냄새는 자꾸 잊혀지는 것만 같아요. 엄마가 보이지 않을 때면 늘 불안해하며 울던 나였는데 말이에요. 꼭 엄마 손을 잡고 있어야 마음이 놓이곤 했는데 말이에요.


그날, 엄마가 마지막 숨을 내쉬었던 그 밤, 모두가 엄마를 잊는다 해도 나, 치우만은 영원히 기억하겠다고 다짐했는데. 그렇게 내 삶의 시간이 멈추는 날까지 잊지 않겠다고 했는데. 시간은 참 야속하게도 내게 망각을 선물하고 말았네요. 그래서 요즘은 엄마에게 고맙다는 말 대신 미안하다는 말을 더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 시절이 생각나요. 그때 난 천식과 싸워야했죠. 그래서 체육시간에도 늘 스탠드에 앉아 뛰어노는 친구들을 구경해야만 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기적처럼 달릴 수 있게 됐어요. 다리가 불편했던 검프가 보호 장비 없이 달렸던 것처럼 말이에요. 네, 맞아요. 천식이 드디어 나았거든요. 그때 달린다는 기분을 태어나서 처음 느낄 수 있었어요. ‘숨이 찬다는 것이 이런 것이었구나’하는 생각도 처음 들었고요. 쿵쿵쿵 뛰는 내 심장이 나는 그저 좋았어요.


이렇게 뛰는 즐거움은 나를 곧 축구의 세계로 인도했죠. 물론 키도 작고 체력도 약했던 나에게 축구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체력훈련 때마다 ‘헉헉’대며 뒤쳐질 수밖에 없었죠. 합숙생활 중에는 선배들에게 이유 없이 맞을 때도 많았습니다. 그때마다 내 머릿속에는 엄마가 보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어요.


당시 풍생중학교 뒤편에는 1,000개의 계단이 있었습니다. 엄마가 보고 싶을 때면 모두가 잠든 새벽, 조용히 일어나 그곳에 갔습니다. 계단 끝에 올라가면 저 멀리 도시의 불빛들이 어른거렸습니다. 엄마가 계신 분당이 있는 곳이었죠. 그때마다 나는 엄마를 생각하며 울었습니다.


중학교 입학할 당시 엄마는 많이 아팠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당시 엄마는 위암 말기였다고 합니다. 거동도 쉽게 못할 정도로 몸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시합이 있는 날이면 늘 경기장에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엄마는 한 번도, 단 한 번도 내가 뛰는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어떤 날은 대기 명단에도 이름을 올리지 못해 벤치에 앉아 있던 내 모습만 보셨죠.


지금도 할머니는 그 점을 가장 안타까워하십니다. “애미가 살아있었다면 치우 네가 국가대표가 돼서 뛰는 모습을 봤을텐데… 그랬다면 얼마나 좋았겠니”라면서요.


생각해보면 중학교 1학년 당시 나와 친구들은 참 많이도 맞았습니다. 주로 선배들에게 아무 이유 없이 맞을 때가 많았죠. 기합 역시 하루가 멀다 하고 이어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 그랬습니다. “이렇게 있을 순 없어. 우리 도망가자!” 이야기 도중 한 친구가 말했습니다. “우리 집에 가자. 아빠한테 다 이야기해놨거든? 너희들 우리 집에서 먹여주고 재워줄게.” 그곳이 어디였는지 이젠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 다만 시골이었다는 사실만은 기억납니다. 서울에서 버스로 한참을 가야만 했거든요.


그러나 버스에서 내린 우리를 반겨준 사람들은 제복을 입은 경찰들이었습니다. 당시 마을 이장이었던 친구 아버지는 우리를 잡기 위해 이미 동네 사람들을 총출동시킨 상태였습니다. “저 놈들 잡아라!”하는 소리에 우리는 일제히 “튀어!”라고 소리치며 도망갔습니다.


15명의 친구들은 어느새 뿔뿔이 흩어졌죠. 그런데 다시 서울에 가기 위해선 다시 읍내로 가야했습니다. 지나가던 용달차를 얻어 탄 덕분에 다행히 읍까지는 쉽게 갈 수 있었죠. 하지만 경찰들은 이미 읍내에 쫙 깔린 상태였습니다.


“아, 어떡하지? 우리?” “일단 숨어있자. 좀 잠잠해지면 다시 나가던지 하자.” 친구와 함께 어느 초등학교 풀숲에 들어가 숨었습니다. 한 30분가량 있었을까요.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뒤통수를 아주 세게 쳤습니다. 그렇습니다. 경찰이었습니다. 그들은 나와 친구 손에 수갑을 채운 뒤 강제로 경찰차에 태웠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왜 병원에 있던 엄마 생각이 났던 것일까요. 엄마는, 세상에서 하나 뿐인 우리 엄마는, 이제 겨울날 볼 수 있는 나무들처럼 앙상해졌어요, 너무 작아져 버렸죠. 그래서 이젠 엄마 가슴에 안길 수 없게 됐어요. 엄마가 너무 작아져서요. 아니, 엄마에겐 이제 나를 안아줄 힘조차 없어요.


엄마가 생각났습니다. 엄마가 보고 싶었습니다. 엄마에게 미안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울었습니다. 경찰차 사이렌 소리보다 더 크게 꺽꺽거리며 울었습니다. 앞자리에 앉아 있던 경찰 아저씨는 그런 나를 보며 “이놈아, 그렇게 걱정할거였으면 왜 도망가냐? 감옥 안가니까 고마 울어라!”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감옥에 가도 좋았어요. 엄마만 살 수 있다면. 정말로 나는 괜찮았어요.


중학교 3학년 어느 날이었습니다. 엄마 상태가 많이 안 좋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새벽 운동을 하고 있던 난 아침도 거른 채 바로 병원으로 달려갔죠.


엄마는 깊은 잠에 빠진 상태였습니다. 독사과를 삼킨 백설공주 같은 모습으로요. 하지만 백설공주 같은 엄마에겐 왕자님 따윈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엄마를 구해줄 수 있는 사람은 세상 그 어느 곳에도 없었으니까요. 그때 나는 너무 어렸습니다. 어린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그저 엄마 손을 잡아주는 일 뿐이었습니다. 단지 그것 뿐이었습니다.


문득 전날 밤 엄마가 내게 했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아가, 마지막으로 네 아빠를 꼭 한번 보고 싶구나, 라던 그 말씀이요.


 
“아빠, 엄마가 많이 아파요. 아빠가 보고 싶다고 하는데 병원 좀 와주세요.” “싫다.” “아빠,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고 하잖아요. 제발 한 번만요. 네? 한번만 병원에 와주세요. 엄마가 아빠 보고 싶다고 하잖아요. 피 토하면서 말했어요. 세숫대야 위로 피를 토하면서도 아빠가 보고 싶다 말했어요. 그러니까 제발요. 아빠, 제발 부탁이에요.” “싫다. 들어가서 운동해라.”


10년 전에도 강남역 지하상가에는 사람들이 참 많았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 속에서 나는 혼자였고 눈물을 쏟으며 병원으로 되돌아갔던 기억이 납니다.


“엄마, 아빠가 바쁘대. 그래서 당장은 시간 내기가 어렵대. 그렇지만 일 덜 바빠지면 꼭 한번 병원 찾아온다고 그랬어. 좀만 기다리면 아빠 볼 수 있을 거야. 그때까지만 참자.”


엄마의 대답은 눈물이었습니다. 나의 거짓말을 이미 눈치 챘는지도 모르죠. 그래서 그렇게 흐느꼈는지도 모르죠.


“왜 울어? 아빠가 그렇게 보고 싶어서? 아빠 같은 사람이 뭐가 보고 싶어? 엄마는 정말 바보야! 엄마 미워!”


나는 마음에도 없는 말들을 그렇게 한참동안 내뱉었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생은 길지 않았기 때문에 후회의 순간들 역시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날만큼 후회스런 날이 살면서 또 있을까요. 아마 앞으로도 영원히 없겠죠.


임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의사 선생님 말씀에 그날 난 할아버지와 함께 새벽 동이 틀 때까지 꼬박 밤을 샜습니다. 그러다 나도 모르게 그만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잠들면 안 되는데… 왜 이러지….’ 눈꺼풀은 자꾸만 내려앉았죠. 잠을 쫓기 위해 나는 병실 밖 화장실로 달려가 찬물을 얼굴에 끼얹었습니다. 그리고 잠시 병실 복도 의자에 앉아 있었던 것 같아요,


“치우야, 빨리 와라! 엄마가… 엄마가…”


병실 문을 열었을 때, 어느새 의사 선생님은 엄마 가슴에 붙어있던 심전도 리드를 떼고 있었습니다. 엄마는 하얀 병실 이불을 곱게 덮은 채 천사 같은 모습으로 잠들었습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


저녁까지 넋을 놓은 채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눈물은 그날 밤부터 터져 나왔습니다. 너무 울어 온몸의 수분이 증발해버린 것만 같았죠. 그렇게 나도 증발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럼 엄마를 다시 만날 수 있을 테니까요. 하룻밤은 눈물과 함께 지나갔고 나머지 이틀은 깊은 잠과 함께 흘러갔습니다. 이틀을 내리자고 일어났더니 친구들은 어머니 관을 들 채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며칠 후 아빠가 나를 보러 왔습니다. 소개시켜줄 사람이 있다면서요. 아빠 옆에 있던 한 여자는 아기를 안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가 여자인지, 남자인지는 지금도 모릅니다. 엄마는 아빠를 미워하지 마라 하셨지만 왜 내게 그런 말씀을 하고 떠났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용서는 쉬운 일이 아니죠. 그러니 내게 가족은 할아버지와 할머니, 두 사람 뿐입니다.


올 초 인천에서 전남으로 이적할 당시 많은 이야기들이 떠돌았습니다. 욕을 하는 팬들도 많았죠. 돈이 그렇게 좋냐며 조롱하던 이들도 있었고요. 하지만 남의 이야기를 쉽게 하는 사람들에겐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나 봅니다.


프로행을 결정했을 당시 많은 구단에서 영입 제의가 들어왔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가고 싶었던 팀은 단 하나, 인천뿐이었습니다. 그곳에 엄마 산소가 있었기 때문이었죠. 인천에 있을 적엔 일주일에 두 번 씩 꼭꼭 엄마를 보러 갔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젠 그때처럼 자주 갈 수 없게 됐네요. 지난 설에 찾아뵙게 마지막이니 벌써 6개월이 지났습니다. 꿈속의 나는 엄마를 보기 위해 이렇게 매일 같이 인천으로 달려가는데 말이에요.


그러고 보니 엄마에게선 늘 제비꽃 향기가 났던 것 같습니다. 제비꽃은 들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꽃 같지만 고개를 숙인 채 한참을 살펴봐야지만 겨우 만날 수 있습니다. 엄마도 그렇습니다. 뒤를 돌아보면 있을 것 같지만 꿈에서만 만날 수 있고, 그것도 한참을 뒤척이다 겨우 잠들 때만 만날 수 있으니까요.


제비꽃의 꽃말은 겸양과 성실입니다. 엄마는 그 꽃말처럼 늘 내게 겸양과 성실을 갖춘 선수가 되라 했습니다. 어느새 엄마가 내 곁을 떠난 지도 올해로 10년 째네요. 그날로부터 10년 째 축구를 하고 있지만 나는 아직 그런 덕목을 갖춘 선수가 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제비꽃 향기를 잊지 않는다면, 그 향기와 함께 실려 오는 엄마 목소리를 기억한다면, 언젠가는 꼭 겸양과 성실을 갖춘 선수가 될 수 있겠죠.

어머니,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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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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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골 누가 넣을까?”
“이근호 선수가 넣지 않을까?”


경기 시작 전 관중석에 앉아 지인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이근호 선수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저는 가슴을 땅땅치며 말했죠. 이근호 선수가 넣을게 분명하다고요. 그냥 그런 예감이 들었습니다.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분명 넣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8월 22일 오후 8시 상암월드컵경기장. 2008 베이징 올림픽 아시아 최종예선 우스베키스탄과의 첫 경기가 드디어 시작됐습니다. 이근호 선수는 변함없이 왼쪽 윙포워드로 선발출장했죠. 경기 내내 그는 특유의 힘을 바탕으로 활발히 측면 돌파를 시도했습니다. 계속해서 혼자 고립돼 있던 원톱 하태균 선수에게 열심히 크로스도 올렸고요. 때론 직접 중앙으로 이동해 슈팅을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고교 시절부터 함께 호흡을 맞춘 김승용 선수와의 스위치 플레이는 또 어떻고요. 그때마다 우즈벡 수비진은 당황해야만했죠.


후반 6분 한동원 선수 대신 이상호 선수가 투입되자 한국팀은 포메이션을 변경했습니다. 하태균 선수와 이상호 선수, 이렇게 두 명의 공격수를 두는 4-4-2 포메이션으로 경기에 임했죠. 이때부터 이근호 선수는 뒤로 돌아 들어가 중앙에서 적극적인 공격을 선보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곧 효과를 보였습니다. 후반 33분 하태균 선수가 페널티 에어리어 왼쪽에서 머리로 떨어뜨려준 공을 받은 이근호 선수는 멋지게 가슴 트래핑 후 왼발 터닝슛을 선보였습니다. 골이었습니다. 그리고 문전 혼전 상황 중에 좁은 지역에서 터뜨린 그 골은 결승골이었기에 더욱 빛났습니다.


골네트가 출렁거리는 순간, 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답니다. 저질댄스를 추려다 기뻐서 달려드는 동료들 때문에 멈춰야만했을 때엔 좀처럼 웃음을 참을 수 없었죠. 그러고 보니 지난 8월 4일 열린 올스타전에서도 그는 거성댄스와 단신댄스 세레모니를 선보이며 지켜 보던 우리 모두를 즐겁게 해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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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올림픽팀에서 오랜 기간 골이 터지지 않았을 때 한번은 “골 좀 넣으라”고 타박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이근호 선수는 “그러게요. 저도 빨리 넣고 싶어요.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으려고요”라고 말했죠. 그런데 그 다음 대답이 또 저를 웃게 만들었답니다. “골 넣으면요, 타잔 세레모니 할거에요. 고트비 선생님이 파마한 제 머리보고 타잔 같대요. 만날 훈련 때마다 타잔이라고 불러요. 그래서 타잔 세레모니 해보려고요. 재밌겠죠? 그런데 제 머리 진짜 타잔 같아요? 잘 어울리지 않나요? 중계 카메라에 잘 나와야하는데…(웃음).”


그로부터 한달 뒤인 2007년 6월 6일. 그날은 공휴일이었습니다. 모처럼 집에서 쉬고 싶었죠. 그러나 제 마음은 대전에 가야한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올림픽 2차 예선 UAE와의 경기가 그곳에서 열렸거든요. 그날도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웬지 이근호 선수가 골을 넣을 것 같다는 예감 말이에요.


잠실에서 미디어다음 블로거 기자 하정임님과 몽구님을 만나 함께 대전에 내려갔죠. 내려가는 차안에 하정임님은 “기사 ‘야마’를 누구로 잡아야할지 모르겠다”며 저에게 조언을 구했습니다. 물론 고민할 필요도 없었죠. 그때 저는 “당연히 이근호죠. 오늘 이근호가 골 넣을 거예요. 분명해요. 이근호 선수만 찍으세요. 믿어도 좋아요”라며 오늘처럼 큰소리 쳤답니다.


결과는 물론 다들 아시죠? 그날 이근호 선수는 2골을 터뜨리며 3-1 대승의 주인공이 됐답니다. 지난 달에 이야기했던 타잔 세레모니도 코트비 코치와 즐겁게 했죠. 올림픽팀에서 넣은 첫 번 째 골이라 경황이 없었을텐데도 양 손으로 가슴을 치며 타잔 흉내를 냈답니다.


경기 종료 후 믹스트존에서 이근호 선수를 다시 만났습니다. 이근호 선수는 먼저 다가와 제게 오른손을 내밀었죠. 축하한다는 인사말을 하기도 전에 그는 “아, 와줘서 고마워요”라며 오히려 제게 감사 인사를 전했습니다. 무엇보다 제게 악수를 건넨 그의 손은 무척 따뜻했습니다. 따뜻한 마음 때문에 아마 그러한 것이겠지요. 


대부분의 선수들은 항상 먼저 선을 긋는 편입니다. 이 사람은 기자니까 조심해야지, 라는 마음으로 기자들을 대하곤 합니다. 격식을 갖추며 이야기를 나누지만 진심은 그다지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저 일 때문에 만나는 것이라는 생각만 들 뿐이죠. 하지만 이근호 선수는 달랐습니다. 그가 제 손을 잡고 고맙다고 말할 때 저는 다시 한 번 따뜻한 인간애와 진실된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악수를 통해 그 모든 것들이 전해졌으니까요.


그리고 오늘 저는 다시 한 번 그 순간과 만났습니다. 우즈벡전이 끝난 후 믹스트존에서 만난 이근호 선수는 언제나처럼 기자들에게 둘러 싸여  있었습니다. 쏟아지는 질문에 대답하기 바빴죠. 그리고 저는 뒤에서 조용히 그 이야기를 받아 적으며 서있었습니다. 인터뷰를 마친 그에게 “너무 축하해요. 제가 넣은 것처럼 기분 좋네요”라는 축하말을 건넸습니다. 그러자 이근호 선수는 가볍게 제 등을 안으며 “행복해요. 대구 한 번 놀러오세요”라고 말했습니다.


뭐랄까요. 기자와 선수로 처음 만났지만 이제는 그 관계를 초월한 것만 같아 가슴이 조금 뭉클했습니다. 어느새 우리는 “축하합니다.” “네, 고맙습니다.” 그런 형식적인 관계에서 벗어난 듯합니다. 기자석에 앉아 있을 때면 냉철하게 경기를 지켜보지만 그래도 마음 한편으로는 그의 눈부신 성장에 기뻐하고 잠깐의 좌절에 안타까워합니다. 무엇보다 프로라는 냉정한 곳에서 이런 진심 어린 만남을 가졌다는 사실에 한없이 감사할 뿐입니다.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 이근호 선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처음 그를 만났던 지난 해 가을을 떠올려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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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승할 거라는 예상은 하고 있었어요. 꿈 자리가 좋았거든요(웃음). 그렇지만 MVP 받는 건 예상 못했어요. 그냥 형들이 네가 받는다. 긴장하고 있어. 이렇게 장난 식으로 이야기했는데 진짜로 받게 될 줄은 몰랐어요. 아버지께서 ‘상 받았으니까 외식할까?’ 하시네요(웃음).사실 1군 게임 못 뛰는 서러움을 떨칠 수 있는 자리가 바로 이곳, 2군리그에요. 그런데 이렇게 우승까지 했으니 그동안의 서러움을 모두 푼 것 같아 기분 좋네요.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리고 저 역시 욕심이 있기 때문에 여기서 만족할 수는 없겠네요. 다른 선수들처럼 이 상을 계기로 더 높이 올라가겠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많긴 많았나 봅니다. 2군리그 결승전이 끝난 후 MVP 수상소감을 묻자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쉬지 않고 말했죠. 그러나 그보다 더 인상 깊었던 것은 까만 머루 같던 그의 눈동자였습니다. 더 뛸 수 있다는 확신과 언젠가는 다시 날아오르겠다는 믿음으로 가득 찼던 그 눈동자를 어찌 잊을 수 있을까요. 기회가 된다면 다시 한 번 그를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한 달 후, 다시 그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게임을 못 뛰는 게 제일 힘들었죠. 항상 좋았던 때만 있었거든요. 지금까지 축구하면서 게임 못 뛴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그런데 나중에는 2군 경기도 못 뛴 거 있죠. 말 그대로 3군이었어요. 사실 지금 당장 경기장에 열 살짜리 꼬마를 데리고 와 봐도 게임 뛰고 싶다 말할 거예요. 그러니 선수 입장에서는 오죽하겠어요. 그런데 전 2군 경기까지 못 뛰었으니 말 다한 거죠. 그때 진짜로 ‘정말 프로라는 곳에서 살아남기가 이렇게 힘들구나’, ‘지금까지 이런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이젠 어떻게 해야 되나’하며 온갖 생각을 다했어요. 그러다 나중엔 청소년 대표팀에도 못 뽑혔어요. 그 상황에서 저는 대표팀은 생각조차 안하고 있었죠. 그런데 주위에서 괜찮다며 위로해주는 거예요. 그게 더 상처가 됐어요. 화살로 다시 날아와 이렇게 제 가슴을 콱콱 찔렀어요.”


계속해서 쏟아지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중,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정말 이상했습니다. 힘들었던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도 그의 얼굴에선 빛이 났거든요. 마치 잘 딱은 거울처럼, 그렇게 오래도록 반짝반짝 말이에요.


“기대도 안했죠. 올림픽 대표팀에 뽑힐 줄은 정말 몰랐거든요. 뽑히고 나서도 과연 잘할 수 있을지 걱정 많이 했어요. 그렇지만 곧 마음 편하게 먹었죠. 처음에 축구 시작할 때의 마음, 축구를 즐기던 그때 그 마음으로 다시 한 번 해보자. 어차피 바라지도 않던 기회니까 한번 죽기 살기로 해보자. 그렇게 다짐했어요.”


믿음은 자신감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 효력을 발휘했습니다. 지난 해 11월 창원과 도쿄에서 연이어 열렸던 일본과의 친선경기에서 이근호 선수가 보여줬던 모습은 ‘왜 그동안 우리는 저 선수를 모르고 있었지?’라는 의문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습니다. 그의 이마 위로 끝없는 서광이 비치는 듯 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 그것도 가장 잘할 수 있는 게 바로 뛰는 거잖아요. 더 많이, 더 열심히 뛰자. 다른 생각보다는 그저 열심히 하겠다는 생각. 그 생각만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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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따뜻한 차를 마시며 꽤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마지막으로 헤어지기 전 그는 “이제 시작인데요. 앞으로 더 좋은 소식 알려드릴 수 있게 최선을 다할게요”라는 인사말을 제게 남겼습니다. 물론 예의상 하는 말이라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그 순간 ‘시작’이라는 그 단어만은 또렷이 들렸기에 저는 온전히 믿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게 제 뜻대로 쉽게 되지는 않지만요, 꼭 다시 날고 싶어요”라던 그의 간절한 기도가 이뤄지길 바랬습니다.


그러나 그날 제가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그의 기도가 이렇게나 빨리 이뤄질 것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왜 저만 보면 그렇게 웃으세요? 저 개그맨 아니에요. 축구선수에요.”


2007년 3월 4일 서울전을 시작으로 이근호 선수는 대구의 주전 공격수로 뛰기 시작했습니다. 그 덕분에 예년과 달리 경기장에서 그를 만날 기회가 늘어났죠. 그런데 그때마다 이근호 선수는 “왜 나만 보면 웃느냐”며 볼멘소리를 했답니다. 그렇지만 어쩌겠어요. 그만 보면 웃음이 나오는 걸요. 그의 모습은 분명 웃음을 자아내는 힘을 갖고 있으니까요.


생각해보세요. 이제 막 걸음마를 뗐다고 생각했던 아이가 어느 날 갑자기 달리기 시작했을 때, 그 성장에 감탄하며 웃지 않을 사람이 과연 어디 있을까요? 더욱이 지난 해의 아쉬움들을 묵은 해에 보내겠다며 씁쓸해하던 그의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으로선 결코 웃지 않을 수 없겠죠.


“축구가 좋아요. 세상에서 제일 좋아요. 여자친구보다 더 좋은 게 축구에요. 제 인생의 전부인 축구를 너무 많이 사랑합니다.”


요즘도 이근호 선수는 만날 때마다 “왜 이렇게 축구가 좋은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제가 연애를 못하나봐요”라며 너스레를 떱니다. 지금에 와서 고백하지만 사실 이근호 선수에게서  “축구가 제일 좋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만 해도 저는 그 속에 실린 진정성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답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잘 알고 있습니다. 축구를 향한 이근호 선수의 진심 어린 사랑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의 이근호 선수를 만든 기저라는 사실도요.


손바닥 뒤집듯 쉽게 바뀌는 세상을 살아가지만 이근호 선수의 축구 사랑만큼은 영원할 것임을 확신합니다. 그것은 마르지 않는 옹달샘처럼, 언제나 지금처럼 퐁퐁퐁 샘솟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근호 선수의 오늘과 내일이 더 기대되는 이유 역시 바로 그 때문일 것입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그를 아끼고 사랑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는 그럴만한 가치를 지닌 선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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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김동표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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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2007 K-리그 올스타전이 8월 4일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열렸습니다. 아침부터 중부지방에는 폭우가 쏟아졌고 그 때문에 행사가 시작할 수 있을지 걱정도 많았습니다. 다행히 경기 시작 전 비는 언제나 그랬냐는 듯 멈췄고 시원한 날씨 속에서 올스타전이 시작됐습니다. 이날 상암에는 2만5,832명의 관중들이 찾았고 37명의 K-리그 올스타 선수들은 그 성원에 힘입어 평소 K-리그에서는 보기 힘든 재미난 모습들을 많이 연출했죠. 박주영 선수와 김남일 선수가 경기 끝나기 전 깜짝 출연해 모두를 놀라게 했으며 이근호 선수는 돌파 도중 넘어지는 실수로 우리를 웃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올스타전 MVP는 해트트릭을 기록한 데닐손 선수에게 돌아갔습니다.

오늘 날씨 때문에 경기장에 못 온 분들을 위한 동영상입니다. 재밌게 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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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김정남 감독님에게는 신기(神氣)라도 있는 것일까요? 전날 열린 기자회견에서 김정남 감독은 ‘결승전에 활약할 기대주’로 양동현 선수를 꼽았지요. 그 말에 양동현 선수는 통쾌한 왼발슛으로 보답했습니다. 그것도 경기가 시작된지 3분 만에요. 울산의 입장에서는 쉽게 경기를 풀어나갈 수 있게 됐습니다. 그 덕분에 미드필드 지역에서 우세를 보이면서 계속해서 FC서울을 압박했죠.


그런데 이게 웬 운명의 장난입니까. 전반 48분, 최원권 선수는 왼발로 중거리슛을 날렸습니다. 그리고 박동혁 선수는 그 순간 그만 공에 손을 대고 말았지요. 골문을 향해 가던 공이 아니었는데도 말이에요. 결국 그는 핸드볼 파울로 경고를 받았으며 FC서울에게는 페널티킥이 주어졌습니다.


“페널티킥은 항상 자신 있어요. 거의 져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요”라며 늘 자신하던 김영광 선수였지만 이번에는 어쩔 수 없었나봅니다. 공은 김영광의 움직임보다 빨랐습니다. 결국 1-1 무승부로 전반전이 끝났습니다.


그때 고개 숙인 채 라커룸으로 들어가던 박동혁 선수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자신의 핸드볼 파울로 인해 페널티킥이 주어졌을 때, 그는 제일 먼저 김영광 선수에게 달려가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습니다. “일부로 그런 게 아닌데 이렇게 돼버렸네. 영광아, 잘 할 수 있지? 너만 믿는다.” 어떤 마음으로 그 이야기를 했을지 짐작이 갑니다. 그리고 고개 숙이던 그 순간의 마음까지요. 그렇죠. 쉽게 갈 수 있었던 경기가 어렵게 가게 됐으니 동료들의 얼굴을 어찌 제대로 보겠습니까.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문득 지난 겨울, 박동현 선수가 제게 했던 말이 생각나는군요.


“사실 제가 인터넷으로 뉴스 같은 건 절대 안 봐요. 다른 선수들은 보는데 저는 절대 안 보죠. 댓글 같은 거 보면 상처 받거든요. 예전에 우즈베키스탄하고 경기할 때 실수로 실점한 적이 있어요. 그때 사람들이 제 미니홈피까지 와서 욕하고 그랬는데, 그때 정말 많이 상처받았어요. 그때 정말 힘들었는데. 밥도 안 들어갈 정도였어요. 운동할 때, 밥 먹을 때, 심지어 잠잘 때까지 의욕이 없었어요.”


2006년 6월 3일 독일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우즈베키스탄전. 그날 박동혁 선수는 패스하는 과정에서 실수로 그만 상대 공격수에게 공을 뺏기는 실수를 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것은 골로 연결됐고 박동혁 선수는 눈물을 흘리며 태극마크를 반납해야만 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더이상 태극마크를 달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거죠.  


“전반전 끝나고 다들 괜찮다고 위로해줬어요. 그 덕분에 마음 편히 먹고 다시 경기장에 나섰고 그래서 골이 터진 것 같아요. 내가 뭔가를 해줘야한다는 생각이 컸거든요.”


그 생각이 크긴 컸나 봅니다. 후반 18분 박동혁 선수는 기적처럼 역전골을 터뜨립니다. 골이 터지지마자 그는 FC서울 서포터즈 앞으로 달려가 ‘쉿!’하며 조용히 하라는 골 세레모니를 선보였습니다. 그게 끝일까요? 네, 아니었습니다. 곧 이어 티샷을 날리는 세레모니까지 선보였죠. 우리가 이기는 모습 보기 싫으면 말해. 골프공처럼 날려보내줄까? 마치 그렇게 말하는 듯한 그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습니다.


결국 경기는 2-1 울산현대의 우승으로 끝났습니다. 1998년 아디다스컵 이후 9년 만에 맛보는 컵대회 우승이었죠.  그리고 경기가 끝나자 그날의 모든 취재도 끝났습니다. 그런데 불꺼진 경기장을 나서던 중 한 아저씨께서 제게 다가와 부탁을 하시더군요. 사진기가 없어서 그런데 사진 한 장 찍어줄 수 없냐고 말이에요. 물론 어려운 일 아니었기에 흥쾌히 찍어드리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아저씨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고 저는 깜짝 놀라고 말았지요. “내가 박동혁이 애비인데 우리 동혁이 뛰는 거 보려고 군수님도 오셨어요. 단체사진 잘 좀 부탁합니다.” 이럴 수가. 지옥에서 천국으로, 결승골의 사나이 박동혁 선수의 아버님이었습니다. 그래서 더 특별히 신경쓰며 사진을 찍어드렸습니다. ^^


이렇게 해서  컵대회도 드디어 끝났습니다. 다음 경기가 열리는 8월 8일까지  K-리그도 잠시 휴식기에 들어갑니다. 물론 그 와중에도 크고 작은 축구대회가 열릴 예정입니다. U-20 청소년월드컵, 아시안컵, 피스컵, U-17 청소년월드컵 등등이요. 그러나 제 마음은 벌써부터 K-리그가 다시 시작하는 8월 8일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날까지 모두들 건강하세요. K-리그가 다시 시작하는 8월 8일에 웃으면서 다시 만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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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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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이 생각나요.
저녁 식사 후에 선생님은 저를 어딘가로 데리고 가셨죠.
숙소 뒷편에 이런 곳도 있었구나, 하는 찰나에
선생님의 보물이 눈에 띄었습니다.
아, 선생님께서는 이걸 보여주시기 위해 저를 여기까지 데리고 가신 거였더군요.
그제서야 고개를 들어 선생님을 올려다보며 웃었습니다.

“저게 그 비바 K-리그에 나왔던 그 토끼들이군요.”
“그렇죠. 참 예쁘죠?”
“네. 선생님이 직접 먹이 주시면서 키우는 것도 알고 있어요.”
“그렇죠. 얘네들이 어느덧 새끼까지 낳고 이렇게 늘었네요.”
“자식처럼 잘 키우셨어요.”
“그런데 내 자식 같은 우리 대전시티즌 아이들은 한 번도 토끼를 보러 안 오네요.”
“정말요? 한 번도 안와요? 그래도 한번은 올 수 있을텐데… 아쉽네요.”
“원래 그때는 하나만 보게 돼있어요. 당장 경기 나가서 이기는 게 중요하니까. 나 역시 그게 아쉽죠. 조금만 여유를 갖고 주위를 둘러보면 좋으련만. 삶의 여유를 갖는다면 세상이 다르게 보일 수 있을텐데 우리 아이들은 아직 그걸 모르네요. 물론 하나에만 모든 걸 바치면서 뛰고 있다보니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요.”
“언제까지 그렇게 사는 거죠? 영원히 안 바뀌나요?”
“바뀌죠. 선수 생활이 끝나면 다들 바꿔요. 그런데 그때 바뀌는 건 너무 늦는 것 같아요. 조금만 더 일찍 눈을 떴으면 좋으련만.”
“저도 가끔 그런 생각 하는데. 선생님도 그런 생각하셨군요.”
“기자님이 우리 애들 많이 도와주세요. 하나만 아는 녀석들이니까. 옆에서 좋은 이야기도 많이 해주시고요. 부탁해요. 내 자식 같은 아이들이니까.”
“선생님이 부탁 안하셔도 선생님 밑에서 자라는 선수들이니까 분명 선생님 마음 다 알 거예요. 제가 아는 대전시티즌은 그런 팀이에요.”
“그렇게 생각해주니 고맙네요.”
“그런데요, 저 오늘 숙소 처음 와봤는데 주위 풍경들이 참 좋아요. 선수들은 다들 피 끓는 청춘이니까 시골 구석에 있다고 투덜댈 수도 있겠지만, 음… 뭐랄까? 시골에서 살던 어린시절이 생각나요. 무척 아늑하고 편안해요. 나중에 결혼하면 신랑한테 국곡리에서 살자 그럴까봐요. ^^”
“가끔 오면 좋지 만날 있어봐요. 젊은 사람들은 살기 힘들어요.”
“아닌데요. 풀 냄새, 나무 냄새, 꽃 냄새… 너무 좋은데요. 여기 온지 겨우 1시간 밖에 안됐는데 벌써 정들었어요.”
“허허허.”

그날, 저녁바람은 참 따뜻했어요.
어느새 노을이 지고 있었고
주홍빛으로 물든 햇볕은 은은하게 선생님의 얼굴을 감싸고 있었죠.
우리 아빠 같던 선생님의 그 인자한 웃음이 좋았고
바람에 실려 오던 자연 냄새가 좋았어요.
기분 좋게 마른 나무 냄새 또한요.
그렇게 머리를 쓸어 넘겨주던 그 바람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요.
그날의 기억을 모두 담고 있는 그 바람을 어찌 잊을까요.

인터뷰를 마친 뒤 인사를 드리기 위해 방에 찾아갔을 때
선생님은 홀로 누운 채로 텔레비전을 보고 계셨어요.
“기자님, 조심히 들어가세요”라며
언제나처럼 존댓말로 제게 먼저 인사해주시던
선생님의 그 인자함에 저는 또 한 번 감동 받았죠.

그날 밤,
숙소를 나오던 제 머리 위로는
수많은 별들이 은가루를 뿌리며 떨어지고 있었고
제 마음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국곡리의 밤하늘을 잊지 못할 것 같다고 속삭였죠.
아주 오랫동안 말이에요.
그 순간,
개골개골 우렁차게 울어대던 개구리들의 합창 소리는 어찌나 씩씩하던지요.
창문 밖으로 흘러나오던,
최신 인기 가요를 흥얼흥얼 따라 부르던
어느 선수의 흥겨운 목소리는 또 어떻고요.

그런데 말이에요,
저는 그날이 마지막 날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그렇죠. 그런 꿈 따윈 절대 꾸지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이렇게 눈물이 나나봐요.
뜨거운 밥을 한 번에 먹을 때처럼 목이 메여오네요.

울지 말아요, 대전시티즌, 이라는 글을 썼던 제가
이제는 대전시티즌을 생각하며,
선생님을 떠올리며,
결국 이렇게 울고 마는군요.

선생님 밑에서 배운 적은 없지만
선생님과 처음 만났던 그날부터
선생님은 제 선생님이었습니다.

잊지 않는다면
그 시간들은 영원할 수 있겠죠.
그러니까 꼭 잊지 않겠어요.

그곳에서 보낸,
이 모든 시간들을 말이에요.

사진출처: Quizas

아래는 최윤겸 감독님이 대전시티즌(www.fcdaejeon.com) 자유게시판에 올린 사과문 전문입니다.


사 과 문

대전 시민 여러분, 대전시티즌 팬들과 선수단, 축구 관계 일선의 지도자, 그리고 특히 대전의 미래인 유소년 어린이들에게.

안녕하세요? 최윤겸입니다.
많은 분들이 아시다시피, 이영익 코치와 저와의 사이에 불미스러운 일들이 발생하였습니다. 오늘 이로 인한 죄송스러움을 전하고자 다시 여러분 앞에 이름을 올립니다.

지도자로써 보여드려서는 안 되는 모습으로 인해 많은 분들에게 실망감을 안겨드렸습니다. 이에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사과의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또한 두 달 전에 마무리 된 후 대전시티즌의 화합과 거듭나는 모습을 기대하시던 많은 분들에게 거듭 반복되는 안 좋은 모습으로 더욱 큰 실망감을 안겨드리게 되어 정말 죄송합니다. 하나의 프로팀을 이끌어가는 지도자로서 다른 사람들의 모범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팀의 화합을 도모하지 못했던 것에 대해 책임을 통감합니다. 그리고 이제 그 책임을 지고 가려합니다.

5년여 동안 대전시티즌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구단 관계자 및 대전 시민, 서포터즈 여러분들과 함께 한 아름다웠던 시간들이 있었던 만큼 이번 사건으로 많은 분들이 아파하는 모습에 개인적으로 가슴 저리는 고통을 느낍니다. 또한 팀을 제대로 이끌지 못했던 제 자신에 대해 더 큰 책임감을 절실히 느끼고 이제 5년여의 세월을 함께한 대전시티즌을 떠나려고 합니다. 제가 가진 것 보다 항상 더 큰 사랑을 주신 대전시티즌 팬들께 감사합니다. 여러분 덕분으로 저는 5년 동안 행복한 축구를 한 사람입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죄송스럽습니다.

비록 좋은 모습으로 떠나지 못하는 아쉬움이 남지만, 감독이기 이전에 대전시티즌을 사랑하고 함께한 사람이기에, 이번 사건을 통해 대전시티즌이 한 꺼풀 시련을 이겨내고 더욱 발전된 구단으로 거듭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시민구단이 걸어가야 하는 길을 누군가는 가시밭길이라고 합니다. 그 사람들의 말마따나 힘든 날도 있었고 화가 나는 날도 있었습니다. 어떤 날은 애뜻하고 조금은 서러웠지만, 저를 웃게 하고 행복하게 해주셨던 팬들과 우리 선수들 덕분에 더 강해진 마음으로 당당하게 경기장으로 들어설 수 있었고, 제가 옳다 믿었던 길을 걸어 갈 수 있었습니다.

저는 퍼플아레나, 아름다운 그곳에서 만큼은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저의 가슴을 자랑스럽게 하는 대전팬들이 있는 그곳에서 언제나 좋은 모습으로 보답해드리고 싶었습니다. 그곳에 서고 싶다는 그 하나로 우리 대전 선수들은 겨울 동안 사이플러스 전지훈련에서 굵은 땀방울을 흘렸습니다. 여름의 뙤약볕 아래서 파스냄새와 땀냄새를 풍기는 선수들을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다구 쳤던 것도 그곳에 서기 위함이었습니다.

저 역시 여러분 앞에서는 날이면, 편한 츄리닝을 벗고 일주일에 한번 다림질해 걸어 놓았던 양복을 꺼내 입었던 일들까지, 이제 그 모든 것들에 안녕을 고해야 하는 시간입니다. 퍼플아레나에서 울려 퍼지는 커다란 울림의 응원소리에 저의 소름이 돋게 하던, 그 힘으로 저의 어깨를 밀어주시던 대전의 수많은 팬분들께 마지막으로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이제 저는 떠나지만, 새로운 감독님께도 저에게 주셨던 그 사랑들을 그대로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분께서도 저처럼 대전시티즌의 감독이었기에 행복하다는 느낄 수 있도록 대전팬 분들께 부탁드립니다. 제게 내밀어주셨던 손길을 새로운 감독님께도 이어주십시오.

저는 좀 더 성숙된 큰 사람이 되기 위해 여러분의 곁을 떠나게 되었지만, 우리 선수들은 그 자리에 그대로 여러분들과 함께 대전시티즌을 지키고 있을 겁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선수들을 위해 팬들의 사랑이 사그라지지 않았으면 합니다. 부족한 저를 위해 많은 응원 보내주셨던 마음 그대로 우리 사랑하는 대전시티즌 선수들을 위해 감싸 안아 주십시오. 여러분들이 날려주시던 색종이와 휴지폭탄, 편지와 종이비행기, 잔디를 수놓았던 장미꽃과 노래와 함성을 언제까지나 우리 선수들을 향해 보내주십시오.

퍼플아레나의 푸른 잔디위에 서서 서포터의 응원 속에 여러분께 큰절을 올리며 떠나고 싶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 큰 꿈이 되어버렸습니다. 어쩌면 그 꿈은 지난 두 달을 더 잇게 했던 제 욕심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두 달 전, 머플러로 눈물을 훔치며 저의 이름을 불러주던 어린 딸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또한 지도자로써, 공인으로써 저의 행동에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거듭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하루 빨리 사건이 마무리 되고 구단이 정상화되어 팬들 여러분의 사랑과 관심을 계속 이어갈 수 있는 대전시티즌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은성이, 성훈이, 승진이, 윤열이, 영기, 거룩이, 영주, 데닐손, 성운이, 창수, 현규, 재민이, 준민이, 세인이, 도현이, 형일이, 충현이, 용태, 규환이, 종수, 도성이, 병주, 재훈이, 동원이, 승제, 근식이, 광현이, 주현이, 정훈아. 모두들 눈꺼풀에 아로 새겨져 눈을 감아도 떠도 잊혀 지지 않을 이름들. 얼굴을 마주하고 모두의 어깨를 한번 씩은 부등켜 안아주고 싶지만, 그럴 수 없이 떠나게 되어 미안하구나.

대전시티즌을 사랑하는 모든 여러분. 다시 한 번 사과의 말씀을 전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함께 하는 동안 행복했었습니다.

대전시티즌 감독 최윤겸 拜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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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대전 선수들은 눈물이 참 많습니다.


지난 해 8월 1일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2006 하나은행 FA컵 축구선수권대회 16강전이 생각납니다. 당시 대전은 수원을 만났습니다. 모두가 대전의 별이 될 것이라 믿었던 이관우 선수를 여름 이적 시장에서 영입한 수원은 초반부터 이관우를 축으로 세운 뒤 거세게 대전을 밀어붙였습니다. 그러나 대전은 굳건히 버텼지요. 그리고 마침내 후반 36분 공오균 선수의 시원한 헤딩골에 힘입어 1-0으로 달아났습니다. 이렇게 대전의 승리로 끝나는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수원 역시 이대로 무너질 팀은 아니었나봅니다. 곧 이어 이싸빅 선수가 동점골을 성공시키며 1-1 상황까지 만들어 놓습니다. 결국 경기는 승부차기로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나저나 눈물 이야기를 하던 중 왜 FA컵 16강전 이야기를 하냐고요? 그날 대전은 두명의 키커가 실축하는 바람에 2-4로 지고 말았습니다. 토너먼트로 이뤄지는 FA컵 특성 상 대전 선수들은 고배를 마실 수밖에 없었죠. 제가 눈물 이야기를 꺼낸 이유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그날 PK를 실축한 뒤 장현규 선수가 흘렸던 그 눈물이 생각나서이기 때문입니다. 자신 때문에 진 거라며, 너무 미안하다며 눈물을 펑펑 쏟던 장현규 선수. 동료들이 괜찮다며 어깨를 두드렸지만 장현규 선수는 오히려 그게 더 미안했던지 하염없이 눈물을 쏟으며 채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그로부터 약 두 달 뒤인 10월 22일 후기리그 대구와의 홈경기가 열렸던 날도 생각납니다. 비가 참 많이도 내리던 날이었습니다. 그 비를 다 맞으면서 응원하고 있는 양 팀 서포터즈를 바라보며 대단하다 생각하고 있을 때였죠. 대구 선수의 반칙으로 대전에게 PK가 주어졌습니다. 키커는 정성훈 선수. 가볍게 성공했지만 사전에 골키퍼를 속이는 손동작을 했다는 이유로 무효 처리가 됐습니다. 다시 정성훈 선수 앞에 놓인 공. 그러나 그 공은 무심히도 크로스바 위를 올라갔습니다. 결국 대전은 오장은 선수의 선취골 때문에 1-0으로 지고 맙니다. 그날, 정성훈 선수는 잿빛으로 물든 하늘을 바라보며 오래도록 눈물을 흘렸습니다. 빗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정도로 그의 얼굴은 서럽게 젖어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서 데닐손 선수는 정성훈 선수를 꼭 안아주고 있었지요. 때론 백 마디 위로보다 말 없는 포옹이 더 큰 위로가 되는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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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데닐손 선수의 눈물도 생각나는군요. 지난 해 9월 16일 전북와의 홈경기가 열렸던 날입니다. 김형범 선수의 크로스를 받은 보띠 선수가 골에어리어 정면에서 터뜨린 결승골로 대전이 1-0으로 패한 날이기도 합니다. 종료 1분 전까지 대전 선수들은 계속해서 전북 골문을 몰아붙였습니다. 너무 입술을 꽉 깨물고 뛰어서 저러다 피라도 나는 건 아닌지, 하는 걱정마저 들 정도로 대전 선수들은 정말 절박하게 싸웠습니다. 그렇지만 골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죠. 지금도 저는 대전 선수들의 골 결정력 문제라기보단 전북 수문장 권순태 선수가 너무 잘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해 전북이 AFC챔피언스리그 우승컵을 들기까지 권순태 선수가 보여줬던 신들린 선방은 그야말로 야신 같았으니까요. 그날도 그랬고요. 로스타임이 3분 주어졌던가요? 후반 47분 보띠 선수가 정인환 선수와 교체하기 위해 나갑니다. 그런데 천천히 걸어나가더군요. 누가 봐도 명백한 시간지연 행위였습니다. 보다 못한 강정훈 선수가 달려가 보띠 선수의 어깨를 감싼 뒤 뛰어갑니다. 결국 보띠 선수도 같이 뛸 수밖에 없었죠. 강정훈 선수의 뒷모습에서 저는 다시 한 번 승리를 향한 대전 선수들의 염원과 절박함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곧 이어 들려오는 심판의 종료휘슬. 허탈한 모습으로 앉아있던 정성훈 선수가 눈에 띄었습니다. 다시 경기장 전체로 시선을 돌려봤습니다. 엎드린 채 꼼짝도 않은 한 선수가 보이더군요. 누굴까요? 네. 데닐손 선수였습니다. 한참동안 웅그린 채 머리를 감싸쥐고 있던 그는 곧 다시 일어났습니다. 괜히 걱정스러운 마음에 데닐손 선수 쪽으로 다가갔습니다. 역시, 그의 눈가는 눈물로 젖어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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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 이관우 선수가 떠난 뒤 8번은 결번이 됐습니다. 그때 데닐손 선수가 그 번호를 자신에게 달라고 해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마침 대전시티즌 유소년캠프행사장에서 데닐손 선수를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8번의 의미를 아냐고 묻자 데닐손 선수는 “8번이 갖고 있는 그 특별함을 잘 알고 있다”며 “앞으로 8번을 달고 대전의 승리를 위해 뛰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동안 그를 어떻게 불렀는지 생각해보았습니다. 대전 용병 데닐손. 저는 그를 그렇게 불렀습니다. 물론 저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를 ‘용병’이라 불렀습니다. 생각해보니 우리는 예로부터 전쟁 시 돈을 주고 데리고 온 병사들을 가르켜 '용병'이라 부르곤 했습니다. ‘외국인 선수’라고 부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용병’ 이라는 표현을 썼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미안했습니다. 그래서 데닐손 선수의 눈물은 더 특별하게 기억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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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닐손 선수의 큰 아들 델손의 눈물도 기억납니다. 델손은 참 밝고 붙임성 있는 아이입니다. 경기가 끝날 때면 늘 “다음 대전 경기 때 또 볼 수 있죠?”라며 웃곤 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경기장에 서 있더군요. “델손, 왜 그래?”하고 물어보니 아이는 눈물을 닦으며 저에게 말했습니다. “우선은요, 대전이 져서 속상해요. 아빠가 내 생일 선물로 골을 넣어주겠다고 했는데 그러지 못해 속상해요. 이번에는 대빡이 세레모니 보여준다고 했거든요. 그리고 노란카드가 3장이 돼서 다음 경기에 못 나오게 됐어요. 그런데 다음 경기도 대전 홈경기잖아요. 대전에서 아빠가 뛰는 경기를 못 보게 돼서 속상해요.” 어느새 대전을 ‘아빠가 뛰는 팀’ 이자 ‘나의 팀’ 으로 생각하는 그 마음이 너무 예뻐 참 오랫동안 델손을 꼭 안아줬습니다. 여담입니다만 결국 델손의 아빠, 데닐손 선수는 바로 다음 경기에서 골을 성공시키며 대빡이 세레모니를 보여줬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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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말이죠, 어제는 제가 울고 말았답니다. 삼성하우젠 컵 2007 개막전이 열린 지난 3월 14일. 안정환 선수는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반지의 제왕이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줬습니다. 그리고 대전은… 0-4로 패하고 말았습니다. 사실 전반 끝날 무렵 수원 에두 선수의 골이 들어가며 0-3으로 됐을 때만 해도 제 마음에는 희망과 믿음만 있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후반 36분 수원에게 네 번 째 골을 허용하고 말았습니다. 고개 숙인 최은성 선수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울컥 눈물이 나더군요.그리고 바로  그 순간, 제대로 된 연습구장이 하나 없지만 마음까지 가난한건 아니라며, 오히려 가족 같은 분위기에서 뛸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하지 아냐고 묻던 선수들 얼굴 하나하나가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그 선수들이 입고 있는 자주빛 유니폼, 그 한 가운데에 새겨진 'It's Daejeon'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 말이던가요. 그렇지만 오늘의 패배가 조금은 오래 그들 가슴에 남아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됐습니다. 내 마음 속에서는 언제나 전사이며 영웅인 당신들이 혹시 이대로 무너진다면 이제 나는 어떡하냐며 스탠드 위에서 그만 눈물을 쏟고 말았습니다. 


네. 물론 압니다. 그 경기 하나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요. 시즌은 막 시작됐을 뿐입니다. 이제 3월입니다. 앞으로 9개월이나 더 남아있는데 말이죠. 잠깐 넘어졌다고 울어서는 안 되는 법이거늘 참 바보같이 울고 말았네요. 경기를 마치고 데닐손 선수에게 인사말을 건네자 빨갛게 변한 제 눈을 보더니 살짝 미소를 지어보이더군요. 그리고 나서 데닐손 선수는 제게 말했습니다. 지난번에도 이야기 하지 않았느냐. 오늘 졌다고 내일 지는 건 아니다. 그런 게 바로 축구다. 우린 다시 일어날 것이고 다시 뛸 거다.


 "That is football, isn't it?"


데닐손 선수의 그 말은 참 많은 위안이 됐습니다. 물론 그날 밤 선수들은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을 테지만요.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님을 그들 역시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울지 말아요. 대전시티즌. 그리고 퍼플아레나를 사랑하는 당신들 모두 말이죠.


베컴도 최근에 광고를 통해 그렇게 말했잖아요. 누구나 언젠가는 시련을 겪지. 중요한 건 그 시련에 꺾이지 않는 거야, 라고요. 내가, 당신들이, 그리고 우리가 그러하기를 믿습니다. 꿈 꿉니다. 그리고 희망합니다. 


지난 밤에도 퍼플아레나는 아름다이 빛났을 것입니다. 우리가 슬퍼하며 뒤척이던 그 밤에도 말이죠. 눈물을 쏟으며 경기장을 나서는 날에도 늘 아늑한 어머니의 품처럼 우리를 안아줍니다. 그 덕분에 빛조차 없는 그런 날에도 그곳은 언제나 따뜻하기만 하지요. 기억에는 없지만 어머니의 자궁도 퍼플아레나처럼 그렇게 따뜻했을 것입니다. 퍼플아레나에 갈 때마다 경이로움을 느끼는 이유도 어쩜 그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숫자로 값이 매겨지는 냉정한 프로의 세계에서 그보다 값진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당신들은 땀으로 내게 알려줬습니다.  그래서 고맙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고마움을 앞으로 무한한 사랑과 지지로 갚아 나가려고 합니다. 눈물은 이제 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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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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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프로축구연맹에서는 타워호텔에서 하이트만 국제심판강사와 함께하는 ‘K-리그 심판 판정 강습회’ 를 열었다. 시작에 앞서 한국프로축구연맹 김원동 사무총장은 “심판 역시 경기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 라며 “심판 판정에 대한 이해를 높여 리그 수준을 올리기 위해 이 자리를 마련했다” 고 이번 강습회 개최 이유를 밝혔다.

이날 강의를 맡은 하이트만(63세) 씨는 1961년 처음 심판 자격증을 딴 이후 46년 째 심판 현장에서 활동하는 살아있는 전설로서, 현재는 ▲국제축구연맹(FIFA)심판 강사 ▲북독일축구연맹 심판위원회 회장 ▲유럽축구연맹 1급심판 강사로 활동 중이다. 그는 1974년부터 1990년까지 분데스리가에서 1급 심판으로 뛰었으며 한때 중학교에서 교장 선생님으로 재직한 경력도 갖고 있다. 이번 강습회와 관련해 “심판 발전을 위해 한국프로축구연맹에서 노력하는 모습에 감명 받았다” 며 “K-리그와 좋은 인연을 맺었다는 사실을 무척 기쁘게 생각한다” 고 소감을 밝혔다.

심판의 자질
본격적인 교육에 들어가자 하이트만 씨는 우선 심판이 갖춰야할 자질에 대해 설명했다. 그가 강조한 자질은 다음과 같다. ▲인간애가 있어야 한다 ▲경기장에서는 용기와 결단력을 갖춰야한다 ▲스스로 모범이 돼야한다. ▲갈등에 대처하는 방법과 이를 어떻게 극복해야하는지 알아야한다. ▲경기 중 일어나는 갈등을 사전에 예방할 줄 알아야한다 ▲구단, 선수, 코칭스텝의 상황에 대해 알아야한다. ▲의사소통 방법을 알아야한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한다 ▲진실해야한다  ▲주심, 부심, 대기심 사이에 신뢰와 대화가 있어야한다.

Elbowing(팔꿈치 가격)
여러 반칙상황에 대한 판정 중 우선 팔꿈치가격에 대한 이야기가 먼저 시작했다. 하이트만 씨는 팔꿈치 가격의 경우 “카드를 줄 수 있는 것” 이 아니라 “무조건 카드를 줘야한다” 고 설명했다. 이때 “경고와 퇴장의 경계선은 선수의 몸짓이 무엇을 의도하고 있는가에 달렸다” 며 “일련의 움직임 속에서 일어난 장면인지 일부러 위협을 가하는 행동인지 빨리 파악한 뒤 판정을 내려야한다” 고 했다.

Serious foul play(무모한 태클)
아울러 심판은 "언제나 선수의 안전에 신경써야한다” 며 “공이 아닌 상대의 신체에 발을 대는(또는 드는) 보복성 태클은 무조건 퇴장” 고 말했다. 그는 “심판이 이런 상황에서 선수를 퇴장시키지 않는 것은 기본 규칙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것” 이라며  “이것은 판정에 있어 굉장히 큰 실수를 하는 것” 이라고 다시 한 번 강조했다. 

Handball(핸드볼)
또한 하이트만 씨는 “K-리그 심판들은 핸드볼 상황에서 경고를 주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며 “그러나 국제적으로는 의도한 것이 아닐 경우 경고를 주지 않는다” 고 했다. 기자들의 질문이 이어지자 “선수의 의도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될 것” 이라며 “손이 공 쪽으로 가는 경우와 공이 손 쪽으로 와서 맞는 경우를 생각해봐라” 고 설명했다. 즉 ‘일부러 팔을 뻗어 공에 손을 대는 경우’ 가 아니면 ‘카드를 주지 않는 것이 국제적인 추세’ 라는 이야기.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선수의 동작에 숨긴 의도를 읽어내는 것” 이라며 “물론 이를 정확하게 해석하는 것이 어렵겠지만 이것이 바로 심판의 몫이자 능력” 이라고 다시 한 번 강조했다. 그는 지난 2006 독일월드컵 조별예선 프랑스와 스위스와의 경기 장면을 보여주며 “페널티에어리어 안에서 앙리(프랑스)의 슈팅이 뮐러(스위스)의 팔에 맞았지만 페널티킥을 주지 않은 판정은 맞았다” 고 설명했다. 아울러 “이 상황이 페널티 에어리어 안에서 일어났는지 밖에서 일어났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고 덧붙였다. 

오프사이드(Off side)
오프사이드 판정은 이번 강습회에서 가장 많은 토론이 오갔던 것 중 하나였다. 하이트만 씨는 “오프사이드 위치에 있다하더라도 직접 플레이에 관여하지 않는다면 오프사이드 아니다” 며 “스위스와의 경기 당시 프라이는 오프사이드 위치에 있지 않았다” 고 엘리손도 주심의 손을 들어줬다. 참석자들이 강습 도중 미리 준비한 오프사이드 영상들을 반복해서 보여 달라고 요청하자 “심판들은 한번만 보고 판정을 내리니 이제 얼마나 힘든지 알겠냐” 며 “이번만 특별히 한 번 더 보여주는 것이다” 는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이렇게 하여 오후 2시부터 시작된 강습회는 약 4시간 가량 진행된 뒤 끝났다. 강습을 마치며 하이트만 씨는 “심판들이 쏟는 노력을 알리기 위해 마련한 자리였다” 며 “이번 교육을 통해 심판들을 좀 더 이해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는 바람을 드러냈다. 마지막으로 그는 “세월이 흐르면서 선수들의 기량과 기술은 놀랄 만큼 발전했다” 며 “심판들 역시 이런 흐름에 맞춰 프로가 되기 위해 항상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 달라” 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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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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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지나가는 자리, K-리그 별중의 별들이 수 놓는 아름다운 시간이 찾아왔다!

2006 삼성하우젠 K-리그 올스타전’ 이  지난 20일(일) 오후 6시 인천월드컵문학경기장에서 열렸다. 예년처럼 이번 올스타전 역시 축구팬들의 소중한 한 표(총 42만 7478명 참여)로, 중부(서울, 성남, 수원, 인천, 대전, 대구, 전북)와 남부(광주, 경남, 부산, 울산, 전남, 제주, 포항) 를 대표하는 36명의 ‘별’ 들이 선발됐다.

프로선수라면 누구나 한번쯤 나가고 싶은 꿈의 무대인 올스타전. 혹자는 올스타전을 가리켜 별들의 전쟁이라 부른다. 그러나 꼭 비장한 각오로 뛰어야 하는 혈전의 장은 아니다. 그저 축구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신명나는 축제의 한 마당일 뿐이다.

그러나 시간이 없어 가지 못한 당신을 위해, 혹은 현장에 있었으나 당신이 놓친 1%를 위해, 생생한 현장모습을 공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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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전행사로 팬싸인회가 열렸다.
귀여운 표정의 백지훈 선수와 진지한 얼굴로 싸인 중인 조원희 선수,
그리고 멀리 박주영 선수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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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아하는 선수의 모습을 담기 위해서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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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선수의 사인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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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들의 모습을 열심히 카메라에 담고 있는 소녀 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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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팬사인회가 끝날무렵, 현장은 이렇게 아수라장이 됐다.
사인을 받지 못한 여고생 팬들은 눈물을 흘리며 가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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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고이전에 항의하는 부천 서포터스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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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들의 손을 잡고 입장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아이들.
한 꼬마가 "노브레인 아저씨들 너무 시끄럽게 노래 불러요!" 라며 귀를 막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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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파 페어 플레이 깃발이 들어가기 시작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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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스타전에 선발된 선수들도 아이들의 손을 잡고 입장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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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상이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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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원희 선수 뒤로 휴지폭탄이 폭포수처럼 쏟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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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국의 첫골이 터지자 남부 올스타 선수들이 모여 합동 세레모니를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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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워하는 남부 올스타 선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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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범근 감독님도 함께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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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벤치에 앉아있던 중부 올스타 선수들까지 모두 함께 세레모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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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프타임 때 열린 14구단 계주 달리기.
안타깝게 넘어진 대전시티즌의 우승제 선수!
그리고 성남일화의 조병국 선수는 바톤을 놓쳐 열심히 찾으러 가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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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팬들을 위해서라면 두명도 업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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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돈치치, 오늘 왜 이렇게 잘해!
결국 라돈치치는 5골을 기록, 올스타전 M.V.P에 뽑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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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델 같은 포즈로 사진기자들 앞에 서있는 인천의 라돈치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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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들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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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