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start 2008 예부터 우리나라는 숫자 ‘3’을 특별히 여겼다. 단군신화 속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숫자도 바로 3이다. 3은 1과 2를 더한 숫자. 즉 양을 의미하는 1과 음을 뜻하는 2가 합쳐진, ‘음과 양을 하나로 묶는다’는 속뜻을 지닌 완전한 숫자다. 하늘 땅 바람, 천 지 인, 탄생 삶 죽음, 처음 중간 끝, 과거 현재 미래 등 3은 모든 이치와 접목시켜 설명할 수 있다. 이는 K리그에도 해당된다. 보통 데뷔 첫해 뛰어난 플레이를 선보였던 선수일지라도 다음해에는 그보다 못한 모습을 보일 때가 많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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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기훈
대학시절 그들은
1983년 생 대학선수들에게 2005년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해였다. 대학 4학년. 어느덧 졸업반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그해 12월에는 드래프트도 열릴 예정이었다. 이들은 드래프트 부활 ‘첫 세대’이자 자유계약 사이에 ‘낀 세대’였다. 프로축구연맹에서는 이 같은 선수들의 입장을 고려, 그해까지만 자유계약을 허락했다. 그러나 프로팀과 계약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신의 실력을 입증해야만 했다. 대학선수들 대부분은 청소년대표 경력이 없었다. 결국 이들이 자신의 기량을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은 전국대회를 통해서만 이뤄질 수 있었다. 대회에서 좋은 모습을 선보이면 대학선발에 뽑히는 길도 열렸다. 다행히 2005년에는 큰 대회가 많이 열렸다. 3월에는 한일대학선발정기전인 덴소컵, 8월에는 대학선수들의 축제 터키유니버시아드대회가 열릴 예정이었다. 11월 마카오에서 열리는 동아시아대회에선 대학선수들 위주로 나간다는 소식도 들렸다. 때문에 일찍감치 그 대회를 목표 삼아 운동하는 선수들도 있었다. 물론 장남석도 예외는 아니었다. 지난 3년간 쓴 눈물을 2번이나 삼켜야했던 그에게 2005년은 여느 해와 달랐다.
장남석
배기종
2005년 1월 대학선발 훈련이 재개됐다. 3월에 열릴 한일대학친선경기 덴소컵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염기훈 장남석 배기종도 발탁됐다. 세 선수가 처음 만나는 순간이었다. 재밌는 사실은 이들이 대학선발팀의 공격을 책임졌다는 사실이다. 장남석을 최전방에 놓고 좌우날개에 염기훈 배기종을 세웠다. 보름 간의 훈련 후 다시 팀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배기종은 동계훈련 막바지에 종아리 근육이 파열되는 부상을 입었다. 대학선발과의 인연은 그렇게 끝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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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왕을 잡아라
2005덴소컵은 12월4일 의정부종합운동장에서 열렸다. K리그 챔피언결정전 2차전이 열린 날이었다. 덴소컵에 참여했던 선수들은 자연스레 K리그를 화제로 삼았다. 가장 큰 관심사는 ‘2006신인왕은 누가 될까?’였다. 그들이 내린 결론은 염기훈이었다. 선수들 사이에서 ‘대학축구는 염기훈으로 통한다’는 이야기가 농담처럼 떠돌던 때였다. 그러나 대학축구 최강자로 인정받던 염기훈에게도 K리그는 높고 어려운 무대였다. 염기훈은 동계훈련 첫날부터 최강희 감독에게 호되게 깨졌다. 전북은 브라질전훈에서 4-4-2 포메이션을 시험가동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가 새로 맡은 보직은 왼쪽 미드필더. 당시 염기훈은 문전 앞에서 어슬렁거리다 공이 올 때만 뛰는 습관이 몸에 배있었다. 잘나가는 대학 스트라이커들이 으레 갖고 있는 버릇 중 하나였다. 훈련 때마다 최 감독은 염기훈의 수비 문제를 지적했다. 그러나 불호령 뒤에는 “수비를 제대로 할 줄 알아야 진짜 공격수”라는 귀중한 가르침이 있었다. 그는 곧 ‘공격수는 공격만 잘하면 된다’는 생각이 잘못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비디오분석관에서 부탁, 자신의 훈련모습이 녹화된 비디오를 구한 뒤 단점을 파악하며 연구했다. 결국 노력은 결과로 보답했다. 3월4일 열린 2006K리그 슈퍼컵 울산전에 선발출장하며 신인선수들 중 가장 먼저 데뷔전을 치렀다. 장남석도 곧 K리그에 데뷔했다. 3월12일 홈에서 열린 울산전에 후반 시작과 동시에 투입되며 신고식을 치렀다. 배기종은 가장 늦은 3월15일에 데뷔전을 치렀다. 반면 데뷔골은 가장 빨랐다. 그는 후반19분 교체투입 8분만에 이관우의 프리킥을 헤딩골로 연결,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시민구단 연습생이 데뷔전에서 데뷔골을 기록했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 뉴스였다.
데뷔골은 염기훈이 가장 늦었다. 3월29일 대전전에서다. 전반7분만에 선제골을 넣었다. “데뷔골이 결승골로 끝날 거라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배기종 때문에 물거품이 됐다.” 이번에도 배기종은 머리로 끝냈다. 후반32분 헤딩 동점골을 성공시켰다. 염기훈과 배기종의 골로 양 팀의 승부는 무승부로 끝났다. 배기종에게 ‘슈퍼서브’로 등극한 이유를 묻자 “경기가 안 풀리면 무조건 들어가니 항상 몸을 만들어라는 선배들의 조언 덕분”이라 말했다. 4월23일 대전전을 앞둔 장남석의 마음은 비장했다. 경기 전날 출전선수 명단에 배기종의 이름이 올랐기 때문이다. 벌써 배기종은 4골1도움을 기록하며 신인왕 후보로 거론되고 있었다. 반면 장남석은 1골1도움으로 이에 못 미친 상태였다. 이들이 그라운드에서 부딪힌 시간은 약 11분에 불과하다. 배기종은 후반10분 교체 in, 장남석은 후반21분 교체 out이었기 때문이다. 경기는 1-1 무승부로 끝났다. 장남석은 전반17분 터뜨린 선제골로 5경기 무득점의 침묵을 깰 수 있었다. 염기훈과 장남석은 7월19일 대구월드컵경기장에서 만났다. 빗속에서 진행된 이날 경기는 3-3이라는 스코어에서 알 수 있듯 치열했다. 대구가 1-2로 지고 있던 전반37분 장남석의 동점골이 터졌다. 그러나 염기훈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후반33분 최철순의 도움으로 염기훈은 평소 자신있던 왼발로 경기를 원점으로 되돌렸다. 경기 종료 후 수비수 최성환은 장남석에게 다가가 “염기훈에게 포인트를 줘서 미안하다”며 “대전전에서는 배기종에게 골을 내주지 않겠다”고 말했다. 어느새 염기훈-장남석-배기종 간의 신인왕 경쟁은 그들만의 경쟁이 아닌 듯 했다. 최윤겸 감독은 사석에서 기자들에게 “대전에서 신인왕이 나왔으면 좋겠다”며 배기종이 신인왕을 타기 바라는 마음을 종종 내비치곤 했다. 대구선수들은 “두자리 수 득점이라면 신인왕 수상이 가능할 것”이라며 “앞으로 (장)남석에게 무조건 패스하자”는 이야기를 종종 했다. 그렇지만 신인왕은 염기훈에게 돌아갔다. AFC챔피언스리그 우승의 일등공신, 국가대표팀 발탁, 2006아시안게임 활약 등이 이유였다. “9월23일 전북전 때 베어벡 감독이 경기장에 왔다. 다음날 오장은(3골)과 염기훈(1골)이 아시안게임 멤버로 뽑혔다. 그날 조금만 더 잘했다면 다른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까? 지금도 후회로 남는 순간이다.” 36경기에 출장하며 9골4도움을 기록한 장남석에게는 두고 두고 아쉬운 대목이다. 2006시즌 염기훈은 31경기 7골5도움, 배기종은 7골3도움을 기록했다.
2년차 징크스, 그리고 2008년
장남석과 배기종에게 2007년 겨울은 시련의 시기였다. 신인왕 하나만 바라보며 1년간 뛰었지만 물거품으로 끝났다. 시즌종료 후 장남석은 수술대에 올랐다. 허리 디스크 수술을 받기 위해서였다. 대학시절 내내 그를 괴롭히던 고질병이었다. 장남석은 프로데뷔 후에도 허리통증 때문에 자주 훈련을 쉴 수밖에 없었다. 그 상황에서 게임을 뛸 수 있었던 까닭은 그의 재능을 높이 평가한 박종환 감독의 배려 덕분이었다. 한편 배기종은 두문불출하고 집에만 있었다. 임의탈퇴 선수로 공시됐기 때문이다. 2007년 10월 배기종은 느닷없이 트레이드 파문에 휘말리며 경기에 나서지 못했다. 계약기간 중 구단과 상의없이 이적을 목적으로 다른 팀과 접촉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번외지명인 선수의 경우 계약기간은 1년. 이후엔 이적료 없이 타 구단 입단이 가능하다. 여러 팀에서 제의가 올 법도 했다. 모든 상황을 눈치 챈 대전은 계약기간이 끝나기 전 수원삼성과 2대1 트레이드를 진행했다. 배기종을 보내는 대신 조재민과 황규환을 받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배기종 측은 “선수 동의 없는 계약은 받아들일 수 없다”며 항의했고 결국 괘씸죄로 임의탈퇴 되고 말았다. 다행히 2007년 시즌을 위한 동계훈련이 시작될 즈음 배기종은 계약서에 사인하며 다시 복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장남석은 재활 때문에 동계훈련에 참여하지 못했다. 장남석에게는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대구는 변병주 감독으로 수장을 교체하며 새 시즌을 준비했기 때문이다. “동계훈련에 참여하지 못했기 때문에 시즌 초반부터 기용할 수 없었다.” 장남석의 출장횟수가 저조한 이유에 대한 변병주 감독의 답이다. ‘16경기 2골2도움’이라는 기록보다 더 나쁜 것은 출장시간에 있다. 그중 풀타임 출장은 4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는 이근호 루이지뉴 에닝요와의 경쟁싸움에 밀렸다는 것을 뜻한다. 장남석은 이근호가 대표팀 소집 때문에 팀을 비웠을 때만 풀타임으로 출전할 수 있었다. 그는 “2006년에는 용병들이 못했기 때문에 내게 기회가 많이 왔다. 인정하기 싫지만 올해는 대체요원이었다고 생각한다”라며 담담히 인정했다.
배기종 역시 호화군단으로 이뤄진 수원에서 주전자리를 꿰차지 못했다. 배기종은 개막전이었던 대전전에서 후반12분 교체투입됐지만 아크 오른쪽에서 프리킥을 얻어내며 수원이 동점골을 얻는데 견인차 역할을 했다. 차범근 감독에게 합격점을 받은 배기종은 이후 3경기 연속 선발로 풀타임을 소화했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약한 체력 탓에 경기 도중 근육이 올라오는 일이 잦았다. 드리블이 좋아 측면에서 빠르게 치고 나갈 수 있었지만 골 결정력은 예전만 못했다. 지난 해 11개의 슈팅 중 유효슈팅은 3개에 불과하다. 슈팅 대비 유효슈팅은 0.27로 같은 포지션에서 뛰고 있는 김대의(0.5) 이현진(0.67) 남궁웅(0.40)보다 낮다. 그런 상황 속에서 9월 초 2군경기 중 인대가 파열되는 부상을 입고 말았다. 진단결과는 2개월 안정. 2007시즌은 ‘17경기출장 2도움’이라는 기록으로 막을 내렸다.
반면 염기훈은 전반기 동안 5골 3도움을 올리며 2년차 징크스와는 상관없는 플레이를 선보였다. 대표팀 발탁 이후 자신감 있는 플레이는 팀에 보탬이 됐고 최강희 감독의 칭찬도 이어졌다. 그러나 문제는 아시안컵 기간 중 발생했다. 아시안컵이 진행되는 동안 염기훈 측은 ‘이적료 15억원 이상이면 이적할 수 있다’는 바이아웃 조항을 들어 이적을 요구했고 즉시 전력이 필요했던 전북은 정경호 임유환과 염기훈을 맞트레이드했다. 그러나 염기훈은 자신이 먼저 이적을 제의한 게 아니라며 구단에 배신감을 느낀다는 말을 남겼다. 설상가상 격으로 일본과의 아시안컵 3‧4위전 도중 오른쪽 새끼발가락이 부러지는 부상을 당하고 말았다. 원인은 피로골절. 선수 스스로는 원치 않는 울산으로의 이적과 이에 따른 오해, 그리고 부상. 연이은 악재로 염기훈 역시 어쩔 수 없는 ‘2년차 징크스’에 희생양이라는 이야기가 오갔다. “내 입으로 시즌 아웃이라 이야기한 적 없다. 복귀할 것이다.” 염기훈은 정규리그 마지막 경기였던 경남전에 교체출전, 복귀신고골을 터뜨렸다. 이후 울산이 PO에서 포항에서 0-1로 패하기 전까지 3경기 연속 출전하며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 2007년 염기훈이 세운 기록은 21경기 6골3도움. 데뷔 첫해 세운 31경기 7골5도움과 비교했을 때 크게 떨어지지 않는 성적이다.
2008년은 염기훈 장남석 배기종 모두에게 더 이상 가능성이 아닌 진정한 실력을 보여줘야만 하는 해이다. ‘프로데뷔 3년’은 더 이상 신인이 아닌 팀의 중심으로 녹아들어가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물론 쉽지만은 않다. 전지훈련 기간 동안 배기종은 측면공격수에서 중앙공격수로 보직을 바꿨다. 수비부담도 늘어났고 경쟁해야만할 선수들도 늘어났다. 그동안 잃었던 골감각도 어서 빨리 회복해야만 한다. 장남석 역시 마찬가지다. 후반 들어서면 체력이 저하되는 모습을 자주 보였는데 3년차에 접어든 만큼 체력안배를 적절히 할 줄 아는 능력을 키워야할 것이다. 아울러 더 이상 용병들에게 밀려 교체투입용 선수로 전락해서는 안 될 것이다. 염기훈 또한 마냥 마음을 놓을 수 없다. 브라질리아 이상호 등과의 경쟁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스크린플레이에 능하고 왼발프리킥이라는 장점이 있지만 그것만으로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생각은 오산이다. 데뷔 초 염기훈은 “K리그는 전쟁이다. 못하면 밀릴 수밖에 없다. 싸우다 다칠 수도 있다. 힘들고 괴롭다고 그만둘 수도 없다. 항상 준비하며 기다려야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 말처럼 전쟁같은 K리그 현장에서 3년 차 K리거인 그들은 승리의 역사를 과연 쓸 수 있을까. 답은 바로 2008K리그에 있다. 아직은 유보지만 시즌이 끝나면 그 해답을 모두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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