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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매표소 직원은 풀햄 목도리를 선물로 줬답니다. 그리고 좌석은 제일 좋은 자리(W석)로 끊었습니다. 설기현 선수를 가까이서 보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죠. 그런데 문제는 바로 다음에 발생했습니다. 지인이 제 대신 카드로 계산을 했는데 하필이면 그 카드가 맨체스터유나이티드 카드였지 뭐에요.
갖고 있던 카드는 그것 하나 뿐이라 하는 수 없이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쓱 내밀었죠. 그러자 매표소 직원들은 “맙소사!”를 연발하며 어쩔 줄 몰라하더군요. 한 직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어서 빨리 나가라는 시늉을 하더군요. ^^; 그 순간의 표정들을 하나 하나 묘사하지 못함이 아쉬울 따름입니다.
크레이븐코티지는 무척 아담한 경기장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시야감이 좋았죠. 제가 앉은 자리 바로 앞에서 선수들은 열심히 몸을 풀고 있었습니다. 경기 시작 전부터 풀햄 팬들이 경기장 자랑을 정신없이 한 까닭이 이해되더군요. 손만 뻗으면 닿는 거리에 프리미어리거들이 뛰어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설기현 선수도 있었습니다. 설기현 선수를 만나기 위해 이곳 크레이븐코티지까지 온 것이지만 막상 실제로 보게 되니 아무 말도 안 나오더군요. 수십분 전까지 저는 이곳이 말로만 듣던 프리미어리그구나, 라며 감탄하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이 거대한 꿈의 무대 위에 설기현 선수가 있었네요! 그 대단함이 주는 위압감에 눌려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설기현 선수는 몸을 풀고 있던 와중에도 한국에서 온 팬들이 자신의 이름을 연호하자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해줬습니다. 하프타임 때는 동료와 패스를 주고받다 사인을 해주기 위해 관중석까지 왔고요. 돌아서서 가던 그에게 친구가 ‘파이팅!’이라고 외치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더군요.
그러나 아쉽게도 설기현 선수는 그날 경기에 출장하지 못했습니다. 로이 호지슨 신임 감독 부임 초기였던 지난 1월, 설기현 선수는 4경기나 뛰었지만 골을 기록하지 못했죠. 그 때문에 점점 입지가 좁아진 듯합니다. 경기에 나설 기회를 잡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호사가들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설기현에게도 위기가 왔다”고 떠들어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곧 위기를 기회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누구보다도 설기현 선수만의 묵묵함과 꾸준함, 그리고 뚝심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날, 묵묵히 피치 위를 뛰며 출전 준비하던 그의 모습은 제게 다음과 같이 말했지요. 일희일비하지 않겠다고, 그렇게 시련을 이기겠노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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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제 마음을 알았는지 그는 지난 2월6일 2010 남아공 월드컵 아시아지역 3차 예선 조별리그 1차전 투르크메니스탄전에서 2골1도움을 기록하며 한국의 4-0 대승을 이끌었습니다. 이날 경기의 M.O.M(Man Of the Match)으로 뽑힌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요.
그는 지금도 기억하겠죠. 2만5천여 명의 관중들이 한마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외치던 그 순간을요. 그리고 그날의 환호성을 잊지 않는다면, 그 목소리에 감사한다면 다시금 부활의 날개짓을 필 것이라 믿습니다. 설기현 선수의 선전을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참, 그날 경기가 끝난 후 출장하지 못한 선수들은 경기장에 남아 가볍게 러닝을 했는데요, 그 모습을 보던 중 "설기현 선수, 저희 이제 가요. 힘내세요!"라고 끝인사를 했습니다. 관중석에 서서 아주 큰 목소리로요. 그랬더니 러닝 중이던 설기현 선수는 양손을 흔들며 화답해줬답니다. 헤헤, 설기현 선수,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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