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왕을 수상할 자격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강원FC의 괴물 공격수 김영후가 ‘2009 쏘나타 K-리그 대상’을 앞두고 신인왕을 향한 강력한 의지를 피력했다.

김영후는 “내셔널리그에서 K-리그에 오기 위해 시퍼런 칼날을 갈며 노력했다. K-리그에 입성한 이후엔 신인으로서 최고의 영광을 이룰 그날을 꿈꾸며 또다시 칼을 갈았다”며


“올 시즌 스스로의 점수를 매겨 본다면 100점 만점에 120점을 주고 싶다. 많은 유혹이 있었지만 이를 이겨냈고 꾸준함과 성실함, 그리고 팀을 위한 헌신적 플레이로 승부를 걸었다. 그 덕에 부끄럽지 않은 결과물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고 데뷔시즌을 평했다.


김영후의 표현대로 ‘성실함’만으로 승부를 건 지난 1년이었다.

전반기를 마치고 최순호 감독은 김영후의 막판 집중력이 떨어지는 원인을 체력부족으로 보았다. 개인 면담시간에 최 감독은 김영후에게 ‘4kg을 줄일 것’과 ‘지구력을 기를 것’을 요구했다. 지난 6월 A매치로 K-리그는 3주간 휴식기를 맞았고 김영후는 최 감독의 조언대로 K-리그에 맞는 ‘몸만들기’에 돌입했다.

김영후는 식사량을 30% 줄임과 동시에 저녁마다 춘천 봉의산과 태백산을(1차 여름 전지훈련은 춘천에 베이스를 두고 화천, 양구 지방을 돌며 훈련 했으며 2차 훈련은 태백에서 진행됐습니다) 1시간가량 뛰기 시작했다. 전력으로 쉬지 않고 달리다 보면 구토 증세가 오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김영후는 토한 뒤 다시 달리기를 반복했다. 이를 옆에서 지켜본 윤준하는 “왜 형의 별명이 괴물인지 알겠다”며 “한번 목표를 설정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이룬다고 하더라. 무시무시할 정도였다”고 혀를 내둘렀다.

약 3주간의 휴식기가 끝나고 6월 21일 다시 재개된 성남과의 경기에서 김영후는 1골 1도움을 올리며 승리를 견인했다. 이후 6월 27일 전북전 2골, 7월 4일 포항전 1골, 7월 12일 대전전 1골, 7월 19일 서울전 1골 등 5경기 연속골에 성공하며 올 시즌 최다연속골이라는 대기록을 작성하였다. 이는 1984년 조영증 現NFC 센터장이 세운 6경기 연속골 이후 신인선수가 세운 최다연속골 기록이기에 더욱 의미가 깊었다.

김영후의 기록이 눈부신 또 다른 이유는 바로 강팀들을 상대로 득점행진을 이어나갔다는 사실에 있다. 4월 11일 전남전 2골 1도움, 6월 21일 성남전 1골, 6월 27일 전북전 2골, 7월 4일 포항전 1골, 7월 19일 서울전 1골, 8월 2일 인천전 2골 등 득점의 70%(13골 중 9골)가 6강 플레이오프 진출팀을 상대로 이뤄졌다. 한마디로 강팀에 더욱 강한 ‘킬러’로서의 본능을 맘껏 발휘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유병수는 13골 중 단 4골(6월 21일 포항전 1골, 9월 12일 서울전 1골, 9월 19일 성남전 1골, 10월 4일 포항전 1골)만 성공시키는데 그쳤다. 득점의 30%에 불과한 수치니 김영후의 기록과 사뭇 대조된다.

13골 8도움. 공격포인트 1위. 김영후가 올 시즌 리그에서 보여준 기록만으로도 그는 이미 ‘최고’라는 칭호를 받기에 충분하다. 위치선정에 능할 뿐 아니라 때에 따라서는 조력자의 역할도 마다않던 김영후의 존재는 강원이 올 시즌 신선한 돌풍을 일으키는데 가장 큰 일등공신이었다. 더구나 미드필드에서 공격력을 뒷받침해줄 선수들이 극히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폭발적인 득점력을 선보였다는 점에서 김영후는 올 시즌 활약은 더욱 박수받을만 하다.

동료선수들의 투표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김영후는 국내 축구전문월간지 베스트일레븐이 12월호 특집으로 K-리그 14개구단(광주 제외) 165명의 선수를 상대로 조사한 ‘2009년 K-리그 최고의 플레이어’에서 선수들이 직접 뽑은 ‘최고의 신인’에 올랐다.

김영후는 ‘최고의 신인’ 부분에서 전체 점수 495점 중 211점을 차지하며 당당히 1위에 등극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2위 유병수(137점)를 무려 74점이나 따돌리며 정상에 올랐다는 사실이다. 백분율로 따지게 되면 더욱 대단한 결과임을 알 수 있다. 김영후가 K-리그 선수들에게 42.6%의 지지를 얻었는데 반해 유병수는 불과 27.7%만을 얻는데만 그쳤다. 소속팀의 6강PO 진출이라는 유병수의 프리미엄도 K-리그 선수들의 마음을 움직이기엔 다소 부족했다. 이렇듯 한 시즌 동안 직접적인 스킨십이 이뤄진 선수들의 표가 김영후에게 쏠렸다는 점은 올 한해 선수들도 인정할 만큼 최고의 활약을 보냈다는 반증으로 볼 수 있다.

김영후는 “다른 내셔널리그 출신 선수들에게 ‘내셔널리거도 K-리그에서 충분히 통할 수 있다’는 희망을 선사했다는 점에서 보람을 느꼈다”며 “앞으로도 계속 내셔널리그나 아마추어 무대에 있는 선수들에게 또 다른 희망의 증거로 남고 싶다. 이제 시작인만큼 더 땀 흘리며 노력하겠다”고 남다른 소회를 밝히기도 하였다.

김영후의 또 다른 별명은 ‘7전8기의 사나이’다. 혹자는 ‘오뚝이 인생’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K-리그 드래프트서 실패하며 내셔널리그에 입성했지만 김영후는 “K-리그를 향한 꿈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고 했다. “꿈을 잃는 순간 그대로 추락한다고 생각했다. 더 높이 날기 위해 더 큰 무대에서 뛰는 나를 꿈꿨다”고 회상했다.

또한 김영후는 “K-리거의 꿈을 이룬 뒤 목표는 10골이라고 밝히자 모두들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내셔널리그에서만 뛰었기 때문에 K-리그를 잘 모르고 하는 소리라며 웃었다. 하지만 모두가 안 된다고 생각했을 때 나는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고 지난 시간을 돌아봤다.

결국 김영후는 10골을 넣고 싶다던 시즌 초에 세웠던 목표 이상의 결과를 이뤄낼 수 있었다. 이에 대해 “사람은 믿는 만큼 자라는 법이다. ‘긍정의 힘’으로 이뤄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내셔널리거로서 보낸 설움과 역경을 딛고 K-리그에 우뚝 선 김영후는 인간 승리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지금도 “나의 실패가 내셔널리그 전체의 실패로 비춰질까봐 늘 어깨가 무겁다”고 말한다. 그래서 내년 시즌 목표도 높이 잡았다. “올해는 신인왕을, 내년에는 득점왕을 타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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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괴물은 역시 괴물인 것 같습니다. 강원FC의 괴물 공격수 김영후가 전북현대와의 2009 K-리그 27라운드 경기를 앞두고 남다른 기대감을 표했기 때문이죠.

김영후는 “이번 전북전은 춘천에서 열리는 마지막 홈경기입니다. 춘천 시민들에게 홈에서 마지막으로 인사드리는 날이니만큼 꼭 승리하고 싶어요”는 말로 운을 뗀 뒤 깜짝 놀랄만한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전북과의 첫 대결이 있었던 6월 27일은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에요. 힘든 어웨이 경기에서 5-2로 대승을 거뒀을 뿐 아니라 프로 입단 이후 2번째로 멀티골을 터뜨렸기 때문이죠. 전북전과 관련해선 이처럼 기분 좋은 추억만 가득한데, 이번에는 홈에서 어린 시절 우상이던 이동국 선수와 그라운드에서 다시 만나게 됩니다. 무척 의미깊은 경기가 될 듯 하네요.”

김영후의 말에 따르면, 학창시절 포항에서 이동국이 뛰는 경기를 직접 볼 기회가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이동국의 나이는 20살을 갓 넘겼었고, 고로 27살인 지금의 김영후보다 훨씬 어렸다네요. 한데 이동국의 플레이는 약관을 막 넘긴 어린 선수의 플레이가 아니었다고 합니다.

“축구선수로선 아직은 어린나이인데... 어떻게 저렇게 성숙된 플레이를 할 수 있는 거지?”

김영후는 당시 대단한 충격이었다고 지금도 회상합니다. 지금 자신은 그때의 이동국보다 훨씬 더 많은 나이인데도, 전성기 시절 이동국이 보여줬던 플레이에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고, 역시 K-리그에서 최고의 공격수인 것 같다고 평했습니다.

또한 김영후는 “현재 이동국 선수에 이어 득점 2위를 달리고 있는데, 그 덕분에 많은 분들이 올 시즌 득점왕 레이스에서 이동국 선수의 강력한 경쟁자로 나를 많이 지목하는 것 같아요. 그렇지만 아직은 스트라이커로서 부족한 점이 많아요. 어린 시절부터 좋아했던 선수와 함께 이름을 올릴 수 있다는 점에서 영광이라 생각합니다”라며 겸손한 자평을 내놓았습니다.

뭐랄까요. 김영후에게서 느껴지는 마음의 여유가 참 좋았습니다. 더 잘하고 싶다며 발을 동동 구르기 보단, 노력하면 자연스레 얻을 수 있을 거라 믿으며, 묵묵히 밭을 가는 소처럼 꿈을 위해 달리는 그 모습이 아주 많이 좋았습니다.

확실히 내셔널리그에서 보낸 시간은 그에게 하늘은 참고 노력하는 자에게 길을 열어주신다는 진리를 알려준 것 같았습니다.

어린시절 우상이었던 이동국을 여전히 존경하고, 또 함께 뛰며 많은 것을 배우고 싶다던 김영후. 그 말처럼 훌륭한 축구선수가 되고 싶다던 그의 꿈도 이뤄질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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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떨거지 차봉군이 FC소울 선수가 됐다구!” - 맨땅에 헤딩 2화 中

MBC 수목드라마 <맨땅에 헤딩>에 나오는 대사입니다. 자연스레 수원삼성 차범근 감독과 FC서울이 연상되죠. 실제로 차봉군이 데뷔전을 치렀던 경기장은 FC서울이 홈으로 삼고 있는 상암월드컵경기장이고 드라마 중간 나오던 서포터들은 FC서울 서포터스 수호신이었습니다.

그러나 내셔널리그에서 고군분투하다 극적으로 K-리그에 입성, 데뷔전을 치른 후 시나브로 팬들에게 강렬히 이름을 기억시킨다는 차봉군의 이야기는 올 시즌 K-리그서 많이 본 누군가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과연 누구일까요?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대요. 그러니까 아무리 어둡고 캄캄해도… 무서워하면 안 돼. 조금만 기다리면 해가 뜨니까… 어두울수록 빛이 가까운 거니까.” - 맨땅에 헤딩 2화 中

숙소에 앉아 MBC 수목드라마 <맨땅에 헤딩>을 보고 있던 김영후는 극중 주인공 차봉군(유노윤호)의 에이전트 김해빈(고아라)의 독백을 들으며 옅은 미소를 지었습니다. 처음 내셔널리그에 입성할 당시 그의 어머니가 자신에게 해줬던 이야기가 생각났기 때문이죠.

2005년 12월 20일은 K-리그 신인선수 선발 드래프트가 열린 ‘운명의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냉혹한 현실과 만난 날이기도 하고요. 눈이 아주 많이 내렸던 그날, 김영후를 지명한 구단은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2005년 한국축구대상 대학부 최우수선수상(MVP)을 수상하기도 했던 그였지만 프로의 벽은 실로 높았습니다. ‘선택받지 못한 자’라는 좌절 속에서 며칠을 보내고 있던 중 모교 숭실대 축구부 감독에게서 “프로 연습생과 울산현대미포조선 行 중 하나를 택하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당시 김영후의 어머니는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두운 법”이라는 말과 함께 “미포조선에서 열심히 뛰다 보면 또 다른 빛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조언해줬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믿음과 기도, 그리고 노력이 함께 한다면 곧 밝은 태양이 비추는 아침이 돌아올 것”이라 말했고, 그 말대로 꼭 3년 후인 2008년 11월 20일. 김영후는 ‘K-리그’라는 아침 해와 드디어 만나게 되었지요.

2009 K-리그 신인선수 선발 드래프트에서 강원FC 최순호 감독이 우선지명한 김영후는 “올 시즌 목표는 10골”이라는 말과 함께 취재진 앞에서 웃는 여유까지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디지털 캠코더로 고스란히 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현재 <맨땅에 헤딩> 연출을 맡고 있는 박성수 PD였습니다.

제가 박성수 PD와 만난 순간이기도 했지요. 그날 저는 베스트일레븐 8월호에 실릴 인터뷰 때문에 김영후와 인터뷰를 가졌던 7월 이후 약 4개월만에 만났던 터라 그와 아주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있던 중이었죠. 당시 박성수 PD가 그런 저와 김영후의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때만해도 저는 박성수 PD의 얼굴을 모르고 있던 터라, 속으로 ‘어. 모자를 푹 눌러쓴 저 아저씨는 누구지. 계속 쳐다보고 계시네’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강원FC가서도 잘할 거라고 믿는다는 덕담을 건네며 악수를 나눈 뒤 돌아서는데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던 아저씨(?)가 제게 다가와 축구 드라마를 준비하고 있는데 도움을 받고 싶다며 명함을 건넸습니다. 드라마를 준비하고 있다며 설명을 하시는데 처음엔 ‘혹시 사기꾼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었답니다. 방송국 PD라고 사칭하면서 사기치는 사람들 이야기를 좀 들었나요. 지금에 와서 다시 생각해보니 날 드라마에 출연시키고 싶다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ㅎ 

그리고... 집에 가서 정말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제게 명함을 주신 그 PD님이 지금도 최고의 드라마로 회자 중인 ‘네 멋대로 해라’를 연출했던 그 PD님이더라고요. 그리하여 김영후 덕분에 저는 박성수 PD와 만나게 되었고 축구 드라마를 준비하는 시간 동안 아주 조금 도움을 줄 수 있었습니다. 크진 않았던, 미약한 도움이었지만 그래도 제가 알고 있는 축구 지식, 축구 선수들과 얽힌 에피소드들이 드라마에 녹아내릴 수 있다는 사실은 무척이나 기쁜 일이었습니다.

무명선수가 국가대표가 되기까지, 그리고 3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는 가운데 결국엔 꿈을 이룬다는 내용의 축구드라마를 준비하고 있던 박성수 PD는 내셔널리그에서 K-리그로 입성한 김영후의 7전8기 스토리를 눈여겨 지켜보고 있던 터였습니다. 그래서 드래프트 현장에서 김영후의 곁을 떠나지 않았고 그러다 자연스레 저와도 만나게 된 것이지요. 김영후의 이야기는 드라마를 준비할 당시 주인공 차봉군의 캐릭터 설정에 아주 많은 영향을 끼쳤고요.

박성수 PD는 본격적인 드라마 촬영 전 K-리그 경기장을 둘러보며 사전답사에도 심혈을 기울였는데, 박 PD가 처음 찾았던 경기장이 바로 강릉종합운동장입니다. 박성수 PD가 강릉에 왔던 4월 10일. 경포 근처 횟집에서 저녁을 함께 했는데, 그날  인터뷰 때문에 김영후와 문자를 주고 받던 저를 보고 있던 중 제 핸드폰을 뺏으시더군요. 그러더니 “우리 가슴 뛰게 만드는 멋진 골 기대!”라고 문자를 제 이름으로 보내시더라고요.

드라마 준비 중 강릉 월드구장에서 강원FC 선수단 훈련을 지켜보던 박성수 PD님. 드라마의 리얼리티를 위해 사전준비에도 참 열심히셨죠.

한데 신기하게도 그 문자는 곧 효력을 발휘했습니다. 전남드래곤즈와의 11라운드 경기가 열렸던 다음날, 김영후는 박성수 PD가 보는 앞에서 K-리그 데뷔골에 이어 추가골까지 터뜨리며 ‘괴물 공격수’의 부활을 모두에게 알렸습니다. 그 골은 지켜보던 이들의 가슴을 뛰게 만드는 정말로 멋진 골이었습니다.

<맨땅에 헤딩>이 처음 방송됐던 9월 9일 저녁. 저와 주무는 김영후의 방에 가서 “오~ 김영후 드라마 드디어 나오는 거야?”라며 놀려댔습니다. 다음날 드라마를 본 소감을 묻자 “1회 때 차봉군이 내셔널리그에서 뛰는 장면이 나오는데, 작년까지 몸담아 뛰었던 곳이라 보는 순간 가슴이 짠했어요. 차봉군의 최종목표가 ‘국가대표’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제 목표 역시 태극마크를 다는 거예요. 제가 ‘원조’인 만큼 차봉군보다 먼저 국가대표가 됐으면 좋겠네요”라며 웃더군요.

또한 김영후는 2회 마지막 장면에서 차봉군이 FC소울 입단 확정 소식을 들은 뒤 “나는 K-리거다!”라고 소리치는 장면을 <맨땅에 헤딩> 최고 명장면으로 뽑았습니다. “우선지명으로 강원FC에 입단하게 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저 역시 차봉군처럼 ‘드디어 K-리거가 됐다’고 방에 앉아 소리쳤던 기억이 나요. 꿈을 향해 달려가는 차봉군의 모습에서 내셔널리그 무대에 있었을 당시 K-리거가 되겠다는 꿈을 잊지 않고 노력했던 그때의 나를 떠올려보곤 해요”라고 말했지요.

누군가는 축구가 실종된 축구드라마라고 하지만 이상하게도 제게는 참으로 현실 같은 축구드라마로 느껴집니다. 드라마에 나오는 대사 하나 하나가 제겐 곧 현실이었으니까요. <맨땅에 헤딩>에서 에이전트 해빈은 차봉군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죠.

“좀 바보같지만 나한테는 소중한 '첫 번째, 내 선수' 에요.”
“차봉군. 진짜 멋진 선수로 만들 거에요. 에이전트 일 할 수 있게 해준 선수고... 공동 운명체니까.”

제게도 김영후는 소중한 우리팀 강원FC의 첫 번째 내 선수입니다. 언젠가 저는 그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영후 선수 위해서라면 잘 부탁드린다며 고개 숙여 인사할 수 있어요. K-리그에서 가장 멋진 선수로 만들 거에요. 그래서 꼭 신인왕 타게 도울 거구. 어쩜 신인왕 타는 날 엉엉 울지도 몰라요. ^^”라고요.

지난 여름, 맨체스터Utd.와 FC서울과의 친선경기가 열렸던 날, 상암월드컵경기장에 사람들로 가득찼다는 문자를 보내자 김영후는 “상암이세요? 완전 좋겠다^^”라고 답문을 보내왔지요. 그날 저는 김영후에게 장문의 문자를 보냈습니다. “오늘은 TV앞에서 그들을 보고 있지만 언젠가는 맨체스터Utd 선수들과 함께 뛸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더 넓은 무대에서 멋지게 뛸 영후 선수 모습을 그려보며. 지금도 최고지만 앞으로는 더 최고의 선수가 될 거라 믿어요.”

해빈도 봉군에게 비슷하게 말한 적이 있죠. “내 꿈이 뭐냐면요.. 맨유 가는 거. 그쪽이랑.생각만 해도 숨이 막혀요. 올드 트래포드에서.. 공중에 뜬 볼을 발리슛으로 내다 꽂는 거야. 함성 소리.. 들려요? 차봉군을 보고.. 열광하는 거야. 그쪽이 달리는 모습... 골세레머니 하는 모습 보면서.. 어떤 사람은.. 살고 싶어질 거에요.”

어디 그뿐인가요. K-리그 미디어데이 때 운전을 못하는 저로 인해 김영후는 강릉에서 서울까지 무려 3시간 30분 동안 쉬지 않고 운전을 했었답니다. 돌아오는 길에는 피곤에 지쳐 영동고속도로에서 졸기도 했고요. 그날 어찌나 심장이 덜컹했었는지요. 그래서 지난 여름 전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새벽 6시마다 운전교육을 받았습니다. 면허를 따기까지 꼬박 1달 반이라는 시간이 걸렸는데요, 새벽잠이 너무 많아 여느 때의 저라면 침대에서 좀처럼 일어나지 못했겠지만 운전학원을 다니던 그때만큼은 달랐습니다. 자명종 소리와 함께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으니까요. 하루 빨리 운전면허를 따 선수 대신 내가 운전할 것. 단순명료했지만 절대적으로 지킬 수 밖에 없던 저와의 약속 때문이었죠.

그리고 지난 8월 조모컵 한일올스타전이 열렸던 그때, 저는 드디어 제 차로 김영후를 인천까지 데려다줄 수 있었죠. 제가 초보운전이었기 때문에 김영후는 거듭 자신이 운전하겠다고 했지만 “운전하느라 힘 빼면 안되요. 우리 선수니까요”라며 운전대를 잡았죠. 마치 해빈이 봉군에게 “비 맞으면 안돼. 내 선수”라고 말했듯이요.

김영후는 제게 말했습니다. “꿈을 이룰 수만 있다면 맨땅이 아닌 시멘트바닥에라도 헤딩할 수 있어요”라고요. 그 말이 참 와닿더라고요. 그런 절박함과 치열함이 지금의 김영후를 만들지 않았나 싶습니다. 앞으로도 저는 <맨땅에 헤딩>을 보며 자충우돌하는 봉군에게서 김영후의 모습을 대입시키겠죠. 차봉군도, 김영후도 언젠가는 꿈에 그리던 태극마크를 가슴에 달길 바라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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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인정하긴 싫지만 전남 앞에만 가면 작아지는 강원FC인 것 같습니다. 전남의 촘촘한 수비벽을 뚫기에 아직 선수들의 경험이 부족한 것일까요. 강원FC는 전남에 무려 4골을 허용하며 1-4로 패했씁니다. 파워형 스트라이커 슈바를 막기 위해 곽광선과 라피치, 두 장신센터백이 고군분투했지만 라피치가 부상으로 교체아웃된 후반 23분 이후부턴 승부의 추는 전남으로 기울었습니다. 결국 후반 30분 이규로의 골로 3-1로 달아난 전남은 후반 46분 추가시간에 터진 김민호의 골에 힘입어 4-1 대승으로 경기를 마감했습니다. 이날의 승리로 K-리그 베스트팀이라는 영광에 오른 전남. 그러나 반전은 있겠죠. 다음 경기에서는 강원FC가 다시 날아오르길 기원합니다.


공을 향해 끝까지 달려가거라! 윤준하의 모습.

이날 경기에서 강원FC 선수들 중 유일한 득점자였던 안성남.

프로데뷔골이었으나 안타깝게도 팀의 패배로 빛이 바래졌습니다.

질주본능 박종진의 모습.

이규로(좌)와 전원근(우) 두 젊은 측면자원들의 불꽃튀었던 대결.

날아올라, 전원근.

괴물 김영후. 이날도 도움을 추가하며 공격포인트 1위자리 굳히기에 들어갔다.

1-4로 패했지만 끝까지 응원에 열심히였던 강원FC 서포터스 나르샤.

강원FC 선수들 뿐 아니라 감독 코치진들까지 달려가 감사인사를 전했다.

기자회견 중인 강원FC 최순호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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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베트남의 여름 날씨는 질퍽하게 녹아내린 아이스크림을 만졌을 때의 느낌과 많이 닮았다. 기온이 높을 뿐만 아니라 습기까지 심해 그늘에 앉아 있어도 끈적끈적한 기분은 여전하다. 2004년 8월28일 베트남 호치민 탄 롱 스포츠센터 경기장 내 날씨는 더 했다. 4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그곳에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운집했기 때문이다. 2004LG컵국제친선대회 베트남국가대표팀과 한국대학선발팀 간의 결승전을 보기 위해 아침부터 모인 사람들이었다.

후반45분 전광판에 적힌 숫자는 3-4. 베트남이 앞서고 있었으니 경기장은 한바탕 축제 분위기였다. 그러나 PA중앙으로 돌파하던 배기종(前광운대)을 막으려던 수비수의 태클이 상황을 반전시켰다. 결국 염기훈(前호남대)이 왼발로 페널티킥을 성공시키며 승부를 연장으로 돌렸다. 그리고 연장 후반13분 쐐기골이 터졌다. 작은 몸집의 한 선수가 자신을 두 겹 세 겹으로 에워싸던 벽을 뚫고 결승골을 터뜨렸다. 4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선연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의 이름은 한승현. 오늘 우리가 만날 주인공의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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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는 없다
작년이요? 말도 마요. 부상을 달고 살았죠. 운동할 때마다 자꾸 다치다 보니 점점 경기에 나가는 횟수가 줄어들었어요. 선수한테 그것보다 더 힘든 게 있을까요? 축구를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어요. 모든 게 귀찮아져 마냥 손 놓고 있었는데 이우형 감독님께서 그런 저를 불러주셨어요. 참 이상한 거 있죠. 전혀 생각이 없었는데, 갑자기 이곳에서 뛰게 된다면 다시 예전의 나로 돌아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냥 마음속에서 그런 희망이 절로 생겼어요.”

여기서 예전은 그의 대학시절을 의미한다. 2006년 가을, 드래프트를 목전에 뒀을 즈음 한승현은 김신영(前한양대)과 함께 대학무대 ‘최대어’로 불렸다. 그런데 예상 밖의 소식이 들려왔다. 한승현의 울산미포조선行.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의아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는 왜 그런 선택을 하게 된 것일까.

“처음부터 프로에 못갈 것 같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항상 잘한다는 소리만 들으며 뛰었으니까요. 그런데 그때 마침 미포조선에서 드래프트 1순위 못지않은 대접을 해주겠다고 연락이 왔어요. 제 능력을 믿겠다더군요. 저를 믿겠다는데 어찌 뿌리칠 수 있겠나요. ‘그래, 나를 인정해주는 곳에서 맘껏 뛰어보자’는 생각으로 간 거죠.”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금도 후회는 없다’란다. 대학선발에서 함께 공격을 책임지던 염기훈이 신인왕을 받았을 때도 그는 가장 먼저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대학동기 김영빈이 인천Utd.에서 주전으로 나서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녀석, 진짜 잘됐네”라며 웃었다고 한다.

“대학시절 함께 뛰던 선배들, 동기들이 프로에서 잘하는 모습을 보면 가끔 부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하지만 크게 신경 쓰진 않아요. 중요한 건 ‘나를 원하는 팀에서 과연 얼마만큼 실력을 보여줄 수 있는가’ ‘내가 가진 능력을 입증할 수 있는가’ 이게 아닐까요?”

이우형 감독 또한 한승현의 의중을 읽은 듯했다. 방황하던 한승현을 고양국민은행으로 불러들이며 이 감독은 “꾸준히, 그리고 스스로를 향한 믿음만 갖고 뛰어라”는 덕담을 건넸다. 이보다 힘이 되는 영양제가 또 있을까. 한승현은 뛰다가 걷고 싶어질 때면 ‘감독님의 조언’을 떠올리며 다시 뛴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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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름은 누군가의 희망

“얼마 전 고등학교 동창회에 다녀왔어요. 갔더니 다들 너무 반가워하는 거예요. 뜻밖이었죠. 이름도 모르는 친구들이 제게 다가와서 ‘네가 우리에게 희망이야’라고 얘기하더군요. 순간 고개가 절로 숙여지더라고요. 힘들다는 이유로 운동을 그만 두려했던 철없던 제 모습이 생각났거든요.”

프로필을 보면 알겠지만 한승현은 ‘소년의 집’으로 널리 알려진 부산 알로시오 고등학교 축구부 출신이다. 그는 그곳에서 수녀님을 ‘엄마’라 부르며 자랐다. 그의 엄마는 전교생의 엄마이기도 했다.

“4살 때였나. 학교 앞에 있는 절 엄마 수녀님이 발견하셨대요. 그 뒤로 학교가 제 집이 됐죠. 그곳에서 축구를 배웠고 지금도 휴가 받을 때면 가장 먼저 가는 곳이니까 언제나 소중한 ‘나의 집’이죠.”

한승현은 그곳 아이들에게 ‘희망’같은 존재다. 축구가 좋아 택했던 친구들 중에서 입때껏 공을 차고 있는 사람은 현재 한승현이 유일하다. 그래서일까. 그들은 한승현의 오늘날에서 못다 이룬 지난 날의 꿈을 투영하는 중이다. “네가 희망이야”라는 말에는 그런 이유가 숨어 있다.

“다들 축구를 그만둬서 아쉬워요. 하지만 후원 없이 대학교에서 축구를 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에요. 당장 축구화 살 걱정부터 해야하니까요.” 한승현에게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홀로 축구를 그만두지 않는 이유는 무엇이냐고. 일말의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희망 때문에요.” 무엇에 대한 기대와 바람이냐고 다시 한번 물었다.

“제가 훌륭한 선수가 된다면 사람들은 제가 나온 학교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겠죠. 그러면 알로시오 고등학교를 한 번 더 바라보는 계기가 될 거예요. 사람들이 그곳에도 가능성을 지닌 선수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좋겠어요. 제가 그 기회를 만들어주고 싶어요.”

어쩌면 버림받았다는 피동형 문장과 함께 누군가를 원망하며 살았을지도 모를 젊은 날이다. 그러나 적어도 축구만은, 그의 삶에 한없는 능동성만을 부여했다. “11살 적 처음 축구를 시작했어요. 축구가 절 택한 게 아니라 제가 축구를 선택한 거죠. 그 덕분에 방황 없이 자랄 수 있었어요. 앞으로 고양국민은행에서도 흔들림 없이 잘하고 싶어요. 제가 받은 은혜와 감사를 고등학교 후배들에게 돌려주기 위해서라도요.”

‘내셔널리그’에서 ‘National’이 되겠다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는 법”이라는 말이 있다. 한승현은 이를 “누구에게나 기회는 온다”라고 해석한다. “고양국민은행은 가족 같은 팀이에요. 그러다 보니 전체적인 분위기도 밝고 덕분에 조직력도 타 팀에 비해 잘 다져졌어요.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이 그대로 전력으로 이어진 거죠. 못했을 때 크게 나무라거나 탓하는 사람이 없다 보니 자신감을 갖고 뛸 수 있어요. 이곳에서라면 제게 다가온 기회들을 잘 잡을 수 있을 듯해요.”

역시나 목소리에서부터 자신감이 가득 묻어 나온다. “올해가 제 축구인생에서 중요한 발판이 될 거예요. 독하게 해야죠. 남과 똑같이 하면 남 이상이 될 수 없어요. 남을 뛰어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죠.” 말을 아껴 잠시 침묵하던 그는 속내를 드러냈다.

“내셔널리그에서 ‘National’이 되고 싶어요. 그래서 꼭 태극마크를 가슴에 달래요. 내셔널리그 선수 중에서 국가대표 선수가 나오지 말라는 법도 없잖아요.” 그것이 내셔널리그에 입성하며 세운 ‘제1목표’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제2목표는? “재미있는 축구를 보여드리는 것이죠. 팬들에게 내셔널리그도 K리그 못지않게 박진감 넘치고 흥미롭다는 사실을 느끼게 해드리고 싶어요. 신나고 즐거워서 돌아서면 다시 또 보고 싶어지는 그런 경기를 보여드릴게요. 그러니 많은 분들이 경기장으로 발걸음 하셨으면 좋겠네요.”


누군가는 아무 것도 없다 말했지만 스스로는 모든 것을 다 가졌다고 생각했다. 축구화가 없으면 운동화를 신고 뛰면 된다고 다짐했다. 왜 내셔널리그로 가느냐는 지인들의 물음에는 National이 되고 싶은 마음 때문이라 답했다. 희망의 존재가 되고픈 소년의 꿈은 그렇게 내셔널리그와 같은 키로 자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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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2005년 12월 20일 ‘K리그 신인선수 선발 드래프트’가 열린 그랜드힐튼호텔. 1순위를 시작으로 8순위를 지나, 이윽고 번외지명 선수까지 발표했지만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이름을 듣지 못했다. 거리에 나서자 잿빛 건물들 사이로 눈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손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네, 선생님. 그렇게 됐어요. 저 이제 어떡하죠?” 유난히 추웠던 겨울로 기억한다. 그리고 그해 겨울 미포조선 최순호 감독은 모든 것이 막막했던 대학 졸업반 어느 무명 선수를, ‘가능성’ 하나만 믿고 받아줬다. 그러나 그날로부터 채 3년도 지나지 않은 지금, 그는 어느새 ‘내셔널리그의 반니스텔루이’로 불리며 팀의 중심으로 성장했다. ‘그’가 누구냐고? 오늘 우리가 만날 주인공, 김영후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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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공격수의 등장

미포조선은 지난 6월7일 안산 와~스타디움에서 열린 2008내셔널리그 할렐루야와의 경기에서 3-1로 승리하며 22경기 연속 무패행진(16승6무)을 세웠다. 이날 미포조선이 세운 눈부신 기록 뒤에는 해트트릭을 작성하며 팀 승리를 견인한 김영후의 공이 깃들어 있다. 이날 3골을 보태며 김영후는 현재(6월11일 기준) 10골(10경기)로 이길용(창원시청/6골 8경기)에 4골차 앞선 득점 선두를 달리고 있다. 내용을 살펴보면 그의 질주가 더욱 대단하게만 보인다. 일단 경기당 득점률이 무려 ‘1골’이다. 이쯤 되니 지난 시즌 맨체스터Utd.의 호나우도가 보여줬던 득점력(34경기 31골)이 부럽지 않을 정도다. 덕분에 연일 언론에 이름이 오르내리며 유명세도 탔다. “운이 좋았어요. 수비수들이 공을 걷어내도 꼭 제 앞에 떨어지더라고요.”

그러나 정작 그가 세운 대단한 기록은 따로 있다. 지난 5월10일 김영후는 천안시청을 상대로 8경기 연속골을 성공시키며 내셔널리그 최다 연속골 기록(2007년 이후선 7골)을 갈아치웠다. 그와 동시에 K리그 연속골 기록(1995년 황선홍, 2000년 김도훈)과도 타이를 이뤘다. 이것 역시 그의 말마따나 단지 ‘운’으로만 설명할 수 있을까. “90분 내내 경기가 안 풀리더라도 찬스는 온다고 생각해요. 그 순간을 골로 연결시키기 위해서는 항상 집중력을 가져야하죠. 골 넣는 비법이라면 비법이겠죠. 물론 개인적으로 조금 아쉽기도 해요. 1골만 더 넣었다면 K리그 기록까지 깰 수 있었으니까요. 축구팬들의 관심을 조금이나마 내셔널리그로 돌릴 수 있는 좋은 기회였는데 이를 놓쳐 아쉽네요.”

그러더니 앞에 놓인 포도 주스를 한 모금 마시며 잠시 입을 축였다. “골 행진이 이어질 때 대표팀 쪽에서 제가 뛰는 모습이 담긴 테이프를 저희 팀에 요청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형들이 인터넷에 관련 기사가 떴다면서 보여줬거든요. 기대요? 제 실력을 알았기에 큰 기대는 없었어요. 그렇지만 그 후로 달라진 점이 하나 있긴 해요.”

순간 김영후의 눈이 반짝였다. 뭘까. “요즘은 경기 때마다 전담 마크맨이 붙어요. 제가 공만 잡으면 기를 쓰고 달려들죠. 처음엔 ‘왜 나만 따라다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반복되다 보니 짜증도 나고 급기야 평정심도 잃게 되더라고요. 그런데 최순호 감독님이 이를 눈치 채셨는지 ‘그런 과정을 이겨내야 좋은 공격수가 되는 것’이라고 조언해주시더군요.” 최순호 감독이 던진 충고의 힘이 컸던 모양이다. 최근 3경기(7·8·9라운드) 연속 침묵했던 김영후는 결국 지난 할렐루야전에서 올 시즌 첫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다시 기지개를 폈다.

아픔의 순간도 있었지만
“드래프트에서 탈락했을 때 정말 낙담했어요. 이것 하나만 바라보며 지난 4년 간 열심히 뛰었는데… 한 순간에 모든 것이 무너진 듯한 마음이었죠. 그렇지만 부모님을 생각하며 마음을 곧추 세웠습니다. 이런 모습 보이려고 그 반대를 무릅쓰고 축구를 시작했던 건 아니었으니까요.”

부모님의 만류 속에서 시작한 축구였다. 김영후 역시 그 마음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외아들이 식사 도중 코피까지 흘려가며 피곤해하는 모습을 마냥 두고 볼 어버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한번은 훈련 시간이 다가오자 제가 못나가도록 문을 잠그시더라고요. 그런데 그것으로 부족했는지 방문 앞을 지키고 계셨어요. 결국 급한 마음에 2층에서 뛰어 내려 훈련장으로 달려갔죠. 그만큼 축구가 정말 하고 싶었어요. 그게 11살 적 일이니 벌써 15년 전이네요.”

결국 그의 부모님은 축구선수가 되겠다는 김영후의 꿈을 허락했다. 물론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두 분이 축구를 향한 마음의 문을 열기까지, 꼬박 10년의 시간이 걸렸다. 아들이 뛰는 경기를 보기 시작한 것도 그가 막 대학 3학년이 됐을 때부터였다. “그렇지만 제겐 부모님이 가장 든든한 지원군이자 조언자였어요. 드래프트에서 떨어지고 갈 곳이 없을 당시 대학(숭실대) 감독님께서 ‘프로 연습생과 미포조선行 중 하나를 택하라’고 하셨어요. 그때 부모님께서 미포조선으로 가라고, 가서 열심히 하다 보면 꼭 좋은 일 있을 것이라고 말씀해주셨죠. 그 말씀을 듣는 순간 더 이상 어디로 가야할지 고민할 필요도 없더군요.”

지금도 김영후는 자신의 선택에 “후회는 없다”라고 딱 잘라 말한다. “감사하게도 감독님께서 입단 첫 해부터 기회를 주셨고 덕분에 꾸준히 경기에 나설 수 있었어요. 선수로서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만족합니다. 미포조선과 전 처음부터 궁합이 잘 맞았던 것 같아요.”

그렇지만 뿌리 깊은 떡갈나무도 잎사귀는 바람에 흔들리는 법. 그 역시 마음이 쉬이 흔들린 순간은 없었을까. 에둘러 숭실대 동기 양상민(수원) 이동원(대전) 등이 프로에서 잘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할 때면 어떤 생각이 드냐고 물어봤다. “부러웠죠. 속상한 마음도 들었고요. 하지만 그런 생각들은 이내 버렸어요. 제가 그 친구들보다 먼저 프로에 뛰어들었다 하더라도 그들처럼 성공할 수 있다는 장담은 결코 할 수 없었으니까요.” 덧붙여 말했다. “전 다만 주어진 현실에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이곳에서 더 열심히 노력해서 그 친구들만큼, 아니 그보다 더 잘하고 싶네요.”

소박한 바람
올해도 김영후는 순풍과 함께 뛰고 있다. 덕분에 이렇다 할 부상이나 슬럼프 없이 맹활약 중이다. 이대로라면 개인 트레블(우승·MVP·득점왕)도 노려봄직하다. “아니요. 일부러라도 그런 생각은 안 하려고 해요. 이런 저런 생각들에 빠지다보면 잡념이 많아 집중하기 어려워지니까요.” 물론 대답은 정석에 가까웠으나 그가 누구던가. 2006년 신인왕과 득점왕을 동시에 석권했을 때도, 이듬해 팀이 우승하며 MVP를 거머쥐었을 당시에도 ‘내가 받기엔 과분한 상’이라고 생각했던 김영후다. “정말로 제게는 분에 넘치는 상들이었어요. 작년 5월26일 인천 코레일과의 경기 도중 왼쪽 발목이 부러지는 부상을 당했어요. 재활 후 10월부터 팀에 합류해 뛰기 시작했는데 MVP를 받게 돼 동료들에게 미안했죠. 보이지 않는 곳에서 팀이 우승할 수 있게 도운 선수들이 많았거든요.”

그러나 아직 뼈가 완전히 붙지 않은 상황에서 테이핑과 진통제의 힘을 빌려 뛰었던 김영후의 ‘투혼’을 생각한다면, 고맙고 미안한 이는 외려 동료들이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그건 아마 ‘상턱’으로 통닭과 피자를 돌렸기 때문일 거예요(웃음).” 이 말과 함께 순박한 웃음을 터뜨리는 김영후의 올 시즌 목표는 웃음만큼이나 소박했다.

“관중들이 많이 왔으면 좋겠어요. 아직도 내셔널리그가 K리그만 못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아요. 그렇지만 K리그 못지않게 재미있는 경기가 주말마다 열리고 있어요. 선수들 간 동업자 의식도 강해 서로 경쟁은 하되 깨끗하고 매너 있는 플레이를 선보이고 있고요. 직접 와서 보시면 다들 내셔널리그만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될 거예요. 이렇게 말로 듣는 것과 보는 것은 상당히 다르니까요. 경기장에서 응원해주신다면 힘이 나서 더 즐겁고 재미난 경기 보여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좋은 모습 보여 드릴 테니 꼭 경기장에 놀러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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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뉘엿뉘엿 해가 저물어 갈 무렵, 조세권과 황연석이 긴 그림자와 함께 나타났다. 3월임에도 저녁 바람은 여전히 쌀쌀했다. 황연석은 “몸 좀 녹이세요”라며 뜨거운 녹차를 건넸다. 종이컵을 타고 솟아오르는 따뜻한 김에 시선이 쏠릴 즈음, 옆에 있던 조세권이 “오래 우리면 써요”라며 손수 티백을 꺼내줬다. 실로 간만에 다시 만난 그들의 왼쪽 가슴엔 고양국민은행 엠블럼이 굳게 박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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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권(좌)과  황연석(우)

새로운 출발점 위에서
“프로에 있을 때보다 심적으로 여유로워진 상태입니다. 감독님께서 많이 배려해주시기 때문이죠. 편하게 생활하고 있어요. 운동 환경도 좋아 모든 점에서 만족하고 있습니다.” 황연석이 전해준 근황이다. 듣고 있던 조세권이 거들었다. “K리그와 비교했을 때 부족한 것은 딱히 없습니다. 선수 개인별 능력도 뛰어납니다. 주전 자리를 꿰차기가 쉽지만은 않겠더라고요. 결코 만만하게 봐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죠.” 조세권은 짧게 숨을 내시며 말을 이었다. “과거는 과거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이죠. 현재에 집중해야 앞으로 잘할 수 있습니다.”

조세권이 말한 과거에는 K리그에서 가장 빛났던 순간도 포함된다. 물론 황연석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황연석은 성남이 K리그 3연패를 이룰 당시 ‘슈퍼 조커’로 이름 날리며 우승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2006년에는 30-30클럽(K리그 통산 328경기 출장, 64골 32도움)에도 가입했다. 조세권 역시 일치감치 엘리트 코스(1997U-20월드컵·1998아시안게임·2000올림픽대표)를 밟으며 2001년 드래프트 1순위로 울산에 입단했다. 이후 2005년 울산이 K리그 우승컵을 들기까지 중앙수비라인의 핵으로 활약했다.

“솔직히 아쉬운 마음도 조금 있죠. 대구에서 1년 더 뛰고 싶었거든요. 그렇지만 고양에서 새롭게 뛰게 됐으니 이젠 그런 생각 안하렵니다.” 황연석의 이야기를 들으며 “향후 2~3년 동안은 뛰는데 문제없지 않겠냐”고 묻자 조세권이 끼어든다. “3~4년도 문제없을 걸요.” 그렇다면 이에 대한 황연석의 대답은? “굳이 은퇴시기를 정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몸이 허락하는 한 계속 부딪쳐봐야죠.”

이번에는 조세권에게 시선을 돌렸다. “작년 여름에 임의탈퇴 선수로 공시 됐습니다. 저는 구단, 감독님과 다 합의된 상태에서 나왔다고 생각했는데… 그 의중을 모르겠더군요. 쉽게 말해 백수가 됐죠. 갈 곳이 없다는 사실은 감당키 힘들었습니다. 어찌하다 이렇게 됐나 싶어 죽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습니다. 제가 만약 독신이었다면 정말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즈음 선배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이우형 고양국민은행 감독님이 보자고 하신다고요. 처음엔 싫다며 거절했습니다. 자포자기 상태였기 때문에 축구를 그만 두려고 했거든요. 그때 와이프가 ‘나중에 후회하지 말라’고 충고하더군요.” 시종일관 유쾌한 분위기를 주도하던 조세권에게도 숨은 아픔이 있었다.

“다행히 이 감독님이 저를 믿고 받아주셨습니다. 지금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또 아직까지 이렇게 언론에서 관심 가져주는 것도 좋고요. 다들 기대감이 큰가 봅니다. 그 때문에 부담감도 살짝 드네요.” 이번에는 황연석이 마무리 지었다. “이렇게 모두가 기대하는 만큼 꼭 보답해드려야죠.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뛰기 위해 이곳에 왔으니까요.”

경험을 담은 조언
두 선수가 프로무대에서 가장 크게 배운 것은 무엇일까. “자기관리죠.” 약속이라도 한 듯 같은 답을 내놨다. 이어 두 사람 모두 “그러나 제대로 못해 후회가 남습니다”라고 입을 모았다. “저는 자기관리를 잘 못하던 선수였습니다. 젊은 날 마음잡고 자기관리에 철저했다면 지금보다 더 좋은 선수가 될 수 있었겠죠.” 조세권의 대답이다.

이번엔 황연석이다. “프로에서 10년 넘게 뛰었다고 하면 다들 ‘자기관리를 잘했겠구나’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 역시 아쉬운 부분이 많은 걸요. 몸관리를 잘못했을 때 얼마만큼 힘든지 알기 때문에 어린 선수들을 보면 항시 충고해주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곳에도 그런 부분에서 아쉬운 모습을 보이는 후배들이 있더라고요. 나이가 어리면 그만큼 기회도 많이 찾아옵니다. 후배들이 이곳에서 좋은 모습을 보이다 더 좋은 곳으로 가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라도 자기관리는 필수겠죠.”

이에 조세권은 “그렇지만 이곳 후배들은 그런 생각을 안 하는 것 같습니다”라는 말로 아쉬움을 피력했다. “국민은행은 다른 내셔널리그 팀과 달리 운동 여건이 좋습니다. 선수들의 실력 역시 뛰어나고요. 그러다보니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는 확률도, 또 주목받을 수 있는 기회도 많아요. 그래서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열심히 해서 높이 날자’고 생각하는 선수들이 분명 많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K리그에 욕심내는 선수들이 거의 없더군요. 상당히 의외였고 또 많이 안타까웠습니다. 안주하기보다는 도전하는 게 더 좋지 않을까요? 아직 젊은데 말입니다.”

조용히 경청하던 황연석도 공감한다며 운을 뗐다. “제가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를 (조)세권이가 다했네요. 저도 그 부분이 가장 아쉽죠. 젊은 선수들은 욕심을 가져도 될 법한데 그런 게 전혀 없어 보이니까요. 잘해서 인정받고 좋은 팀 가겠다는 욕심은 결코 사치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목표가 생겼을 때 비로소 그것을 현실로 만들고자 노력하고 또 그 과정을 통해 성장합니다. 저는 후배들이 더 높은 곳을 향해 도전하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프로에서 잔뼈가 굵은 선배들이 가감 없이 던진 충고였다.

다시 날아오르기 위해
절실한 자는 살아남는 법을 스스로 터득한다. 마지막 동아줄을 놓는 순간 그대로 추락한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조세권이 꺼냈다. “솔직히 저는 이제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습니다. 여기서 못 뛴다면 집에 가야죠. 그런 생각만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 잘해야겠죠. 또 아무래도 이젠 고참이다 보니 말이나 행동에 있어서도 더 조심스러워야겠고요.” 언뜻 불안한 심기가 읽혀졌으나 다음 말에서 곧 기우임을 깨달았다. “내려갈 곳이 없다는 말은 올라갈 일만 남았다는 뜻이겠지요. 경기에 나서기 위해서라도 제 자신과의 싸움에서 꼭 이기겠습니다. 어려울 때 제게 손을 내밀어준 팀 아니던가요. 멋진 플레이로 천천히 은혜를 갚아가야죠.” 조세권이 새로이 고양국민은행 유니폼을 입으며 다진 각오다.

황연석의 다짐도 비슷했다. “항상 긴장 해야죠. 느슨해지면 힘들어질 수밖에 없으니까요. 벤치를 지키거나, 경기에 나가 지더라도 결코 좌절하지 않을 겁니다. 외려 더 노력해야죠. 후회 없는 한 해를 보내기 위해서라도요.”

올 시즌 한 배를 타게 된 조세권 황연석, 이 두 사람이 세운 목표는 세 가지다. 첫째는 부상 없이 온전히 시즌을 보내는 것. 둘째는 K리그만을 향한 팬들의 시선을 내셔널리그로 돌리는 것. 그리고 마지막은 두 사람의 목소리를 그대로 옮겨 적는 것으로 마무리 하겠다.


“저희의 합류가 팀 전력에 많은 보탬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올해 세운 가장 큰 목표요? 당연히 우승이죠. 자신있습니다. 저희 얼굴이 보고 싶다면 고양국민은행 경기가 열리는 날, 운동장으로 오세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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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북한과의 A매치와 K리그 개막으로 인하여 팬들의 관심은 A대표팀과 프로축구로만 쏠렸습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묵묵히 공을 차고 있는 선수들이 있습니다. 강릉에서 열리고 있는 제56회 대통령배전국축구대회에 참가한 선수들이 그 주인공이죠.

대통령배전국축구대회는 국내에서 규모가 가장 큰 아마추어 축구대회입니다. 이번 대회에는 실업축구팀, 대학팀, K3리그팀 등 총 37개 팀이 참가했죠.



서두에 밝힌 바와 같이 대중의 관심 밖에서 공을 차야하지만 그래도 선수들은 꿋꿋히, 그리고 열심히 뛰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저는 또 많은 것들을 배우고 돌아올 수 있었답니다. 지금 당장은 주목받지 못하더라도 열심히 하자. 그럼 인정받을 수밖에 없어, 라고 스스로에게 말하며 말이죠.

대회는 27일 대망의 결승전을 끝으로 막을 내립니다. 현재 울산미포조선, 할렐루야, 고양국민은행, 선문대가 4강에 진출한 가운데 25일 준결승전을 치릅니다. 제가 만난 치열한 현장의 풍경을 보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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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통공사 선수들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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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클을 피해 돌진하는 경희대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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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추어대회 벤치는 보통 제대로 갖춰지지 않는 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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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프타임 때 목을 축이는 부산교통공사 선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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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풀리네. 경희대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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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승부차기까지 들어갔고 경기는 부산교통공사의 승리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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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대 VS 충북대. 경기 시작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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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대 수비수의 철벽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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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대 에이스 10번 선수를 잡기 위해 충북대 수비수 2명이 동시에 달려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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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아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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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선문대에게 골을 허용하고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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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조망 밖에서 경기를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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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대 감독의 작전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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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반 시작 전 그라운드로 나가는 선문대 선수들. 결국 선문대의 승리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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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시청 VS 국민은행 경기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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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은행 골키퍼 김태영 선수의 캐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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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은 누구에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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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을 향해 점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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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딩경합 후 쓰러진 국민은행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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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를 위해서라면 반칙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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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장의 투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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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안풀리는구나. 결국 국민은행의 승리로 끝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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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는 끝났지만 아마추어 선수들의 노력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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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88만원 세대’를 아는가. 여기서 88만원은 비정규직 전체 평균 임금인 119만원에 20대 평균 소득 수준 비율인 74%를 곱한 수치를 뜻한다. 그러나 88만원 세대는 88만원의 월급을 받으며 살아가는 청년 비정규직만을 지칭하는 말은 아니다. 그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20대의 불안한 현실을 상징한다. 또 K리그 연습생들의 고단한 삶을 투영하고 있다.


K리그의 88만원 세대들

지난해 2008K리그 신인선수 선발 드래프트에서 ‘선택받은 자’는 91명이었다. 드래프트 전체 신청자의 31.3%에 불과한 수치다. 그 중 28명은 번외로 지명됐다. 프로축구연맹은 2006년부터 신인선발 드래프트제를 다시 도입했다. 번외지명은 6라운드까지 선수를 선발한 뒤 이뤄진다. 순위 외 선발이기 때문이다. 2006년에는 12명의 선수가 번외로 뽑혔지만 2007년 31명, 2008년 28명으로 점점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수치상으로 각 구단이 번외지명을 적극 활용하고 있음이 한눈에 보인다.

1순위로 입단한 선수들은 5000만원의 연봉을 받게 된다. 이에 반해 번외지명 선수들이 받는 연봉은 1200만원에 불과하다. 번외지명된, 소위 ‘연습생’이라 불리는 그들은 우리 사회의 또 다른 ‘88만원 세대’다. 그러나 연봉 1200만원을 열두 달로 쪼개 매달 통장에 들어오는 돈이 100만원이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숙소 생활을 하기 때문에 관리비 명목으로 매달 10만원(수원 5만원, 제주·포항 없음)이 빠져 나간다. 결국 이들이 손에 쥐는 월급은 대략 90만원 선. 만약 국민연금이나 보험에 가입했다면 이보다 더 적은 돈을 받게 된다.

번외지명 제도는 구단 입장에서 볼 때 싼 가격에 쓸만한 선수들을 찾는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특히 자금력이 부족한 구단에게는 유용한 선수 수급수단으로 활용된다. 구단 살림살이가 어려워 검증되지 않은 선수에게까지 많은 돈을 주기란 힘들기 때문이다. 마지막 6순위로 선수를 뽑는다 해도 벌써 연봉이 2000만원에 육박한다. 하지만 이 돈에 400만원만 더 얹으면 번외지명 선수 2명을 뽑을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대전은 지난 드래프트에서 무려 5명의 선수를 번외지명으로 선발했다. 대전 이외의 구단들도 금전적 부담이 덜한 연습생 영입에 갈수록 높은 관심을 보인다. 물론 그들은 “번외지명이 프로를 꿈꾸는 선수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준다”며 서로에게 윈윈(win-win)이라 설명한다.

그렇지만 과연 윈윈이라 할 수 있을까. 냉정히 말해 그 기회란 것도 ‘1년’동안만 제공될 뿐이다. 번외지명 선수들이 그 짧은 시간 안에 자신의 기량을 십분 드러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스타 선수들 틈에서 주전 자리를 차지하기는커녕 2군리그에서조차 살아남기 힘든게 사실이다. 때문에 대부분의 번외지명 선수들은 매년 계약이 끝남과 동시에 흔적 없이 사라지곤 한다. ‘연습생 신화’를 꿈꾸며 입단했지만 결국은 한낱 ‘꿈’에 불과했다는 ‘슬픈’ 결말에 고개를 떨구는 것이다.

어렵고 좁은 길

2007드래프트에서 번외지명된 선수들 중 재계약에 성공한 이는 극히 드물다. 김민구 강수일 안재곤(이상 인천) 최찬양(수원) 조성준(전북) 김민(울산) 정도다. FC서울에 있던 김바우는 대전에 입단했다. 이들 중 강수일(2경기 1도움) 조성준(3경기 1도움)만 1군 경기에 데뷔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번외지명 선수들은 ‘연습생 신화’로 포장되는 성공담이 ‘자신의 이야기가 될 것’이라는 희망을 놓지 못한다.

2006년 드래프트 부활 이후 가장 성공한 연습생을 꼽으라 하면 열에 아홉은 배기종을 거론한다. 배기종은 2006드래프트 당시 번외로 대전에 입단, 주전(27경기 7골3도움)으로 도약하며 신인왕 후보로까지 거론됐다. 비록 시즌 말미에 사전접촉 의혹으로 임의탈퇴, 선수제명위기에 몰렸지만 2007년 수원으로 팀을 옮겨 여전히 선수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주전은 아니지만 교체로 꾸준히 출전(17경기 2도움)하는 그의 모습은 후배 연습생들에게 희망을 안긴다.

지난해 426경기에 출전하며 철인신화를 쓰고 있는 김기동도 1991년 연습생으로 프로생활을 시작했다. K리그 베스트11에 빛나는 장학영도 시작은 연습생이었다. 그리고 이들처럼 성공신화까지는 아니더라도 연습생으로 시작, 꾸준히 1군 경기에 얼굴을 내민 선수들이 있다. 2000년부터 2003년까지 40경기에 출장하며 대전의 특급교체선수로 활약했던 박경규, 2003년 광주에서 이동국 김상식 등 국가대표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한상구가 그 예다.

88만원 세대의 선택과 길

변병주 감독은 “연습생 생활을 감수하면서까지 프로에 몸담고 싶은 마음을 공감한다”며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선수들의 목표는 같다. ‘대표 선발’과 ‘프로 입단’이다. 그렇기 때문에 연습생들은 100만원도 채 안 되는 월급을 받고도 어떻게든 프로생활을 이어가려 하는 것이다.” 인천에서 연습생으로 뛰다 최근 재계약에 성공한 강수일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돈보다 중요한 것은 경험이다. 그 경험을 K리그에서 쌓을 수만 있다면 돈 없이도 좋다고 생각했다. 열심히 하면 돈은 따라오는 법이니까. 그보다 중요한 것은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한 노력과 결과를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정신이다. 그 때문에 해마다 연습생이라도 좋다며 K리그 문을 두드리는 선수들이 생기는 것이다.”

한편 변병주 감독은 “최선을 다한다면 연습생이라도 빛을 볼 수 있다. (이)근호도 노력으로 스타가 된 경우 아닌가. 좌절하지 말고 스스로 ‘대기만성형’이라 생각하며 이겨내라”는 말도 덧붙였다. 변 감독의 당부에는 계약종료 후 자신을 책망할지도 모를 선수들을 향한 배려가 숨어 있다. 요지는 이렇다. 무릇 프로란 전문 의식을 갖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지칭한다. 그러므로 재계약에 실패하여 팀을 떠나게 되더라도 최선을 다했다면 스스로를 프로로 생각하라는 말이다. 길은 또 다시 시작되는 법이니까.

팀을 나오게 된다하더라도 축구인생은 연습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하위리그에서의 새출발도 생각해볼 수 있겠다. 실제로 K리그를 떠난 선수들 중 많은 이들이 내셔널리그에서 제2의 축구인생을 시작한다. 현재 내셔널리그는 과거 실업축구의 한계를 딛고 지역 연고제를 정착, 준 프로리그로의 면모를 갖춰나가고 있다. 비록 두 시즌 연속 승격제로 많은 논란이 있었지만 내셔널리그의 발전 가능성은 무한하다. 그곳에서 뛰는 선수들 역시 리그와 함께 성장하며 못다 이룬 꿈을 펼치고 있다.
 
2006신인선수 드래프트에서 번외지명으로 FC서울에 입단했던 오기재는 2007년 안산할렐루야로 이적해 팀의 주전으로 활약하고 있고, 2006년과 2007년 각각 번외로 울산에 지명됐던 장재완과 윤동헌은 안산 할렐루야에서 새로이 출격준비 중이다. 부산의 장신 공격수 오철석도 빼놓을 수 없겠다. 포터필드 감독 재임 시절 많은 기대를 받았지만 이에 부응하지 못했던 그는 부산교통공사로 1년간 임대돼 실전감각을 키웠다. 2006년 전체 1순위로 대구에 입단했던 황금성은 주전이 보장되지 않자 2007년 인천한국철도로 옮겼다. 2000시드니올림픽대표 출신이지만 전북에서 오래 무명생활을 하던 고민기도 고양국민은행 이적 후엔 주전으로 도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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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