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2월 20일 ‘K리그 신인선수 선발 드래프트’가 열린 그랜드힐튼호텔. 1순위를 시작으로 8순위를 지나, 이윽고 번외지명 선수까지 발표했지만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이름을 듣지 못했다. 거리에 나서자 잿빛 건물들 사이로 눈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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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네, 선생님. 그렇게 됐어요. 저 이제 어떡하죠?” 유난히 추웠던 겨울로 기억한다. 그리고 그해 겨울 미포조선 최순호 감독은 모든 것이 막막했던 대학 졸업반 어느 무명 선수를, ‘가능성’ 하나만 믿고 받아줬다. 그러나 그날로부터 채 3년도 지나지 않은 지금, 그는 어느새 ‘내셔널리그의 반니스텔루이’로 불리며 팀의 중심으로 성장했다. ‘그’가 누구냐고? 오늘 우리가 만날 주인공, 김영후의 이야기다.
괴물 공격수의 등장
미포조선은 지난 6월7일 안산 와~스타디움에서 열린 2008내셔널리그 할렐루야와의 경기에서 3-1로 승리하며 22경기 연속 무패행진(16승6무)을 세웠다. 이날 미포조선이 세운 눈부신 기록 뒤에는 해트트릭을 작성하며 팀 승리를 견인한 김영후의 공이 깃들어 있다. 이날 3골을 보태며 김영후는 현재(6월11일 기준) 10골(10경기)로 이길용(창원시청/6골 8경기)에 4골차 앞선 득점 선두를 달리고 있다. 내용을 살펴보면 그의 질주가 더욱 대단하게만 보인다. 일단 경기당 득점률이 무려 ‘1골’이다. 이쯤 되니 지난 시즌 맨체스터Utd.의 호나우도가 보여줬던 득점력(34경기 31골)이 부럽지 않을 정도다. 덕분에 연일 언론에 이름이 오르내리며 유명세도 탔다. “운이 좋았어요. 수비수들이 공을 걷어내도 꼭 제 앞에 떨어지더라고요.”
그러나 정작 그가 세운 대단한 기록은 따로 있다. 지난 5월10일 김영후는 천안시청을 상대로 8경기 연속골을 성공시키며 내셔널리그 최다 연속골 기록(2007년 이후선 7골)을 갈아치웠다. 그와 동시에 K리그 연속골 기록(1995년 황선홍, 2000년 김도훈)과도 타이를 이뤘다. 이것 역시 그의 말마따나 단지 ‘운’으로만 설명할 수 있을까. “90분 내내 경기가 안 풀리더라도 찬스는 온다고 생각해요. 그 순간을 골로 연결시키기 위해서는 항상 집중력을 가져야하죠. 골 넣는 비법이라면 비법이겠죠. 물론 개인적으로 조금 아쉽기도 해요. 1골만 더 넣었다면 K리그 기록까지 깰 수 있었으니까요. 축구팬들의 관심을 조금이나마 내셔널리그로 돌릴 수 있는 좋은 기회였는데 이를 놓쳐 아쉽네요.”
그러더니 앞에 놓인 포도 주스를 한 모금 마시며 잠시 입을 축였다. “골 행진이 이어질 때 대표팀 쪽에서 제가 뛰는 모습이 담긴 테이프를 저희 팀에 요청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형들이 인터넷에 관련 기사가 떴다면서 보여줬거든요. 기대요? 제 실력을 알았기에 큰 기대는 없었어요. 그렇지만 그 후로 달라진 점이 하나 있긴 해요.”
순간 김영후의 눈이 반짝였다. 뭘까. “요즘은 경기 때마다 전담 마크맨이 붙어요. 제가 공만 잡으면 기를 쓰고 달려들죠. 처음엔 ‘왜 나만 따라다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반복되다 보니 짜증도 나고 급기야 평정심도 잃게 되더라고요. 그런데 최순호 감독님이 이를 눈치 채셨는지 ‘그런 과정을 이겨내야 좋은 공격수가 되는 것’이라고 조언해주시더군요.” 최순호 감독이 던진 충고의 힘이 컸던 모양이다. 최근 3경기(7·8·9라운드) 연속 침묵했던 김영후는 결국 지난 할렐루야전에서 올 시즌 첫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다시 기지개를 폈다.
아픔의 순간도 있었지만
“드래프트에서 탈락했을 때 정말 낙담했어요. 이것 하나만 바라보며 지난 4년 간 열심히 뛰었는데… 한 순간에 모든 것이 무너진 듯한 마음이었죠. 그렇지만 부모님을 생각하며 마음을 곧추 세웠습니다. 이런 모습 보이려고 그 반대를 무릅쓰고 축구를 시작했던 건 아니었으니까요.”
부모님의 만류 속에서 시작한 축구였다. 김영후 역시 그 마음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외아들이 식사 도중 코피까지 흘려가며 피곤해하는 모습을 마냥 두고 볼 어버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한번은 훈련 시간이 다가오자 제가 못나가도록 문을 잠그시더라고요. 그런데 그것으로 부족했는지 방문 앞을 지키고 계셨어요. 결국 급한 마음에 2층에서 뛰어 내려 훈련장으로 달려갔죠. 그만큼 축구가 정말 하고 싶었어요. 그게 11살 적 일이니 벌써 15년 전이네요.”
결국 그의 부모님은 축구선수가 되겠다는 김영후의 꿈을 허락했다. 물론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두 분이 축구를 향한 마음의 문을 열기까지, 꼬박 10년의 시간이 걸렸다. 아들이 뛰는 경기를 보기 시작한 것도 그가 막 대학 3학년이 됐을 때부터였다. “그렇지만 제겐 부모님이 가장 든든한 지원군이자 조언자였어요. 드래프트에서 떨어지고 갈 곳이 없을 당시 대학(숭실대) 감독님께서 ‘프로 연습생과 미포조선行 중 하나를 택하라’고 하셨어요. 그때 부모님께서 미포조선으로 가라고, 가서 열심히 하다 보면 꼭 좋은 일 있을 것이라고 말씀해주셨죠. 그 말씀을 듣는 순간 더 이상 어디로 가야할지 고민할 필요도 없더군요.”
지금도 김영후는 자신의 선택에 “후회는 없다”라고 딱 잘라 말한다. “감사하게도 감독님께서 입단 첫 해부터 기회를 주셨고 덕분에 꾸준히 경기에 나설 수 있었어요. 선수로서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만족합니다. 미포조선과 전 처음부터 궁합이 잘 맞았던 것 같아요.”
그렇지만 뿌리 깊은 떡갈나무도 잎사귀는 바람에 흔들리는 법. 그 역시 마음이 쉬이 흔들린 순간은 없었을까. 에둘러 숭실대 동기 양상민(수원) 이동원(대전) 등이 프로에서 잘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할 때면 어떤 생각이 드냐고 물어봤다. “부러웠죠. 속상한 마음도 들었고요. 하지만 그런 생각들은 이내 버렸어요. 제가 그 친구들보다 먼저 프로에 뛰어들었다 하더라도 그들처럼 성공할 수 있다는 장담은 결코 할 수 없었으니까요.” 덧붙여 말했다. “전 다만 주어진 현실에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이곳에서 더 열심히 노력해서 그 친구들만큼, 아니 그보다 더 잘하고 싶네요.”
소박한 바람
올해도 김영후는 순풍과 함께 뛰고 있다. 덕분에 이렇다 할 부상이나 슬럼프 없이 맹활약 중이다. 이대로라면 개인 트레블(우승·MVP·득점왕)도 노려봄직하다. “아니요. 일부러라도 그런 생각은 안 하려고 해요. 이런 저런 생각들에 빠지다보면 잡념이 많아 집중하기 어려워지니까요.” 물론 대답은 정석에 가까웠으나 그가 누구던가. 2006년 신인왕과 득점왕을 동시에 석권했을 때도, 이듬해 팀이 우승하며 MVP를 거머쥐었을 당시에도 ‘내가 받기엔 과분한 상’이라고 생각했던 김영후다. “정말로 제게는 분에 넘치는 상들이었어요. 작년 5월26일 인천 코레일과의 경기 도중 왼쪽 발목이 부러지는 부상을 당했어요. 재활 후 10월부터 팀에 합류해 뛰기 시작했는데 MVP를 받게 돼 동료들에게 미안했죠. 보이지 않는 곳에서 팀이 우승할 수 있게 도운 선수들이 많았거든요.”
그러나 아직 뼈가 완전히 붙지 않은 상황에서 테이핑과 진통제의 힘을 빌려 뛰었던 김영후의 ‘투혼’을 생각한다면, 고맙고 미안한 이는 외려 동료들이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그건 아마 ‘상턱’으로 통닭과 피자를 돌렸기 때문일 거예요(웃음).” 이 말과 함께 순박한 웃음을 터뜨리는 김영후의 올 시즌 목표는 웃음만큼이나 소박했다.
“관중들이 많이 왔으면 좋겠어요. 아직도 내셔널리그가 K리그만 못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아요. 그렇지만 K리그 못지않게 재미있는 경기가 주말마다 열리고 있어요. 선수들 간 동업자 의식도 강해 서로 경쟁은 하되 깨끗하고 매너 있는 플레이를 선보이고 있고요. 직접 와서 보시면 다들 내셔널리그만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될 거예요. 이렇게 말로 듣는 것과 보는 것은 상당히 다르니까요. 경기장에서 응원해주신다면 힘이 나서 더 즐겁고 재미난 경기 보여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좋은 모습 보여 드릴 테니 꼭 경기장에 놀러 오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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