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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레나의 꿈의 구장/World Football

러시아리그, 한국선수들에게 신세계일까


겨울 이적시장 개장과 함께 나라 밖으로 시선을 돌리는 선수들이 일종의 ‘붐’을 이루고 있다. 최근 가장 각광받고 있는 해외진출지는 단연 일본이다. 기존의 용병 보유한도에서 아시아 국가선수 한 명을 추가로 영입할 수 있는 아시아쿼터제 시행과 ‘엔고 현상’에 탄력을 받아 조성환(포항→삿포로) 조재진(전북→감바오사카) 박동혁(울산→감바오사카) 이정수(수원→교토퍼플상가) 김진현(동국대→세레소 오사카) 등이 이미 대한해협을 건넜다. 연일 J리그행 뉴스가 전해지고 있는 가운데 또 한 곳, K리거들의 주요 이적 대상지로 오르내리는 나라가 있다.


멀게는 톨스토이와 차이코프스키의 고향으로 알려진, 가깝게는 히딩크 감독이 유로2008을 통해 다시 한 번 ‘마법’을 부린 그곳. 바로 러시아다.

러시아 커넥션
한국 선수들의 유럽 진출형태는 2002월드컵 이후 질과 양에서 점점 다양해지고 있다. 다소 무모하게 잉글랜드, 스페인, 이탈리아 등 ‘빅 리그’로의 곧장 진출을 마냥 바라던 모습에서 차츰 ‘선배’ 설기현처럼 벨기에, 네덜란드, 프랑스 등 유럽 위성리그에 우선 진출해 실력을 검증받은 후 이를 발판으로 더 큰 무대로 나아가는 현실적 방향으로 수정되고 있다. 자연스럽게 네덜란드, 프랑스, 포르투갈 등 ‘디딤돌’로 삼을만한 리그들이 주목을 끌기 시작했는데, 최근 러시아리그가 그중 하나로 급부상한 것이다.

2006년 울산 소속이던 현영민이 제니트에 진출한 이후 김동진, 이호(이상 제니트) 김동현(루빈 카잔) 오범석(사마라) 등 다수의 K리그 젊은 ‘재능’들이 러시아리그의 문을 두드렸다. 오범석이 2008시즌 내내 주전으로 맹활약했고 김동진의 경우 비록 부상 때문에 마지막 방점을 완벽히 찍지는 못했으나 2007-08시즌 UEFA컵에서 팀이 우승하는데 일조하는 등 한국 선수들은 짧은 개척역사에도 불구하고 무시할 수 없는 성과를 남겼다. 물론 성공소식만 들린 것은 아니다. 아드보카트 감독 부임 이후 벤치멤버로 밀린 현영민(울산)과 러시아 특유의 기후에 적응하지 못한 김동현(성남)이 K리그로 유턴했고, 티모슈크에 주전 자리를 빼앗긴 이호 역시 K리그로 돌아왔다.

금번 이적시장에서 톰 톰스크가 조원희, 정경호, 신영록 등에 관심을 보이며 러시아리그가 다시 조명받고 있다. 톰 톰스크는 지난 해 16개 팀 중 13위(7승8무15패/승점29)에 그치며 간신히 강등을 면한 중하위권팀으로, 1994년부터 1998년까지 부천(現제주)을 이끌었던 ‘신사’ 니폼니시 감독이 지휘봉을 잡고 있다. ‘K리그통’ 니폼니시 감독이 전력 강화 차원에서 정경호, 조원희, 신영록의 영입을 구단에 요구하며 K리거들의 러시아리그행 여부가 다시 한번 수면 위로 오르기도 했다. (재정 악화에 따른 예산 축소로 신영록만이 “계약기간 1년에 연봉 40만 달러 조건의 구두계약에 합의”하는데 성공했으나 신영록은 최종적으로 터키로 기수를 돌렸다.)

유럽 리그의 블루칩
1992년 구소련 해체 이후 탄생한 러시아리그는 한국 뿐 아니라 유럽 축구계의 새로운 ‘블루칩’으로서 각광받고 있다. 이미 조(맨체스터 시티) 파블류첸코(토튼햄) 등이 러시아리그를 발판 삼아 프리미어리그에 진출했고, 바그너 러브(CSKA모스크바) 아르샤빈(제니트) 등 유망한 선수들이 리그에서 활약했거나 활약 중이다. 2004-05시즌에는 CSKA모스크바가, 2007-08시즌에는 제니트가 UEFA컵에서 우승을 차지한데 이어 유로2008에서 러시아리그 소속 선수들이 주축이 된 러시아대표팀이 ‘4강 신화’의 기적을 쏜 것 또한 관심의 기폭제로 작용했다.

찬란했던 구소련의 영광을 뒤로한 채 한동안 유럽축구의 변방으로 저평가되던 러시아리그가 이처럼 급부상하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역시나 프로스포츠에 늘 따라다니는 꼬리표, 바로 ‘돈’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수 없다. 2000년대 들어 러시아 최대 천연가스회사인 가즈프롬으로 대표되는 러시아 에너지 재벌들이 러시아 클럽들에 막대한 투자를 쏟기 시작했다. 상상을 뛰어넘는 자금력을 등에 업은 러시아 구단들은 선수 영입에 아낌없는 금액을 투자했고 세계적인 선수들의 러시아행이 꼬리를 물었다.

K리그 선수들이 러시아리그에 강한 유혹을 느끼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러시아리그에 정통한 한 에이전트는 “K리그에서 3~4년 뛰어야 모을 수 있는 돈을 러시아에서는 한 시즌만에 받을 수 있다. 돈 앞에서 흔들리지 않을 선수는 없을 것”이라고 현실을 이야기했다. 빅 리그의 교두보로 삼을 수 있는데다 높은 연봉까지 보장되는, 한마디로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을 수 있는 곳이 바로 러시아리그인 것이다.

뿐 아니라 외국인에게 다소 배타적인 사회 분위기와는 달리 리그에선 외인 선수들의 비중이 높아 텃새가 심하지 않다는 점,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점 등도 국내 선수들을 유혹하는 요인 중 하나다. 현지적응 문제, 그중에도 특히 언어 문제는 해외에 진출하는 선수들이 해결해야 할 큰 문제 중 하나인데 현지어가 아닌 영어로도 의사소통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플러스요인이다. 리그 일정이 추춘제인 대다수 유럽 리그와 달리 봄에 시작해 초겨울에 끝나는 구조를 갖고 있다는 점도 한국 선수들의 이적을 보다 수월하게 만들어주는 조건 중 하나다.

진정 신세계인가
그러나 러시아무대를 마냥 장밋빛 신세계라고만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다른 리그와 마찬가지로 러시아리그 역시 실력을 인정받지 못하면 도태되고 마는 잔혹한 ‘정글의 세계’인 까닭이다. 특히 한국 선수들은 상대적으로 체격조건이 좋은 동구권 선수들을 상대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고 한다.

사마라FC에서 주전으로 활약 중인 오범석은 “선수들의 체격이 크고 경기 스타일 또한 꽤나 터프하다. 몸싸움 때 느껴지는 강도가 K리그와는 다르다. 잘못 부딪히면 십자인대가 파열되기 십상”이라며 어려움을 토로했다. 덧붙여 “바깥에선 벨기에, 네덜란드 등의 리그보다 저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러시아리그 빅4(CSKA모스크바, FK모스크바, 로코모티브모스크바, 제니트)의 수준은 유럽 3대 리그 클럽 못지않다. 이런 팀들과 경기를 치르는 가운데서도 꾸준히 실력을 발휘해야 비로소 인정받을 수 있는 법인데, 말처럼 쉽지만은 않다”고 말했다. 지난해 국가대표 선발을 앞두고 오범석의 경기력을 체크하기 위해 러시아를 방문했던 대표팀 박태하 코치는 “러시아리그의 수준이 생각보다 높더라. 경기전개 속도가 상당히 빨랐고 파워도 넘쳤다. 깜짝 놀랐다”고 말하며 오범석의 의견에 힘을 실었다.

축구 외적으로 시선을 돌리면 ‘외로움’이란 난제와 만나게 된다. 아직은 치안이 불안해 여가시간을 오로지 집에서 보내야 하는 것도 젊은 선수들에게는 고충이다. 다른 유럽국가처럼 교민사회가 발달하지 않은 곳이기에 같이 어울릴 한국인 이웃조차 없다. 오범석이 머물고 있는 사마라에는 한국인이 단 한 명도 없다고 한다. 이 때 만나게 되는 내부의 적이 바로 외로움이다. 워낙에 낙천적인 성격을 자랑하는 오범석은 “요리도 하고 한국 TV드라마를 보며 잘 적응하고 있다”고 말했지만 제니트에서 한 시즌을 뛰고 돌아 온 현영민은 “하루에 운동하는 시간은 고작 1~2시간인데 나머지 시간은 할 일이 없었다. 우울증에 걸릴 정도로 힘들었다”며 이국 생활의 고통을 토로했다.

어려움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유럽에서 제일 넓은 영토를 가진 나라이기 때문에 어웨이 경기 때마다 해외 원정에 버금가는 긴 여정을 감수해야한다는 점도 선수에게는 큰 짐이다. 최근엔 국제사회의 기류 또한 심상치 않다. 얼마 전 첼시의 구단주 로만 아브라모비치가 주식에서 막대한 손해를 입으며 프리미어리그 구단주 재산 순위에서 3위로 미끄러졌다는 보도가 있었다. 비단 아브라모비치에 국한된 이야기만은 아니다. 러시아리그의 부흥을 주도한 에너지 재벌들이 전 세계에 불어 닥친 미국발 금융위기 한파에 직격탄을 제대로 맞은 상황이다.


당연히 투자는 위축될 수밖에 없다. 러시아리그에 대한 관심을 다시 불러일으킨 ‘촉매제’ 톰 톰스크의 정경호, 조원희 이적설이 ‘없던 일’이 된 가장 큰 요인도 경기 침체로 인한 구단의 지출 축소 때문이었다.

히딩크와 아드보카트, 두 감독만으로도 우리에게 친숙하게 다가오고 있는 러시아가 ‘신세계’로 자리 잡아 한국축구 해외진출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수 있을까. 하지만 선수들이 간과하지 말아야할 것은 ‘달콤한 유혹’이면서 넘어야할 ‘적잖은 장벽’도 있다는 사실이다. 덮어두고 무작정 나간다면,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신세계가 어둔 터널에 그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