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UAE와의 2차전을 앞두고 대표팀에 때 아닌 비상등이 깜빡였다. 꼭짓점 김두현은 무릎 부상으로, 캡틴 김남일은 경고 누적으로 각각 그라운드에 나설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핵심전력이 2명이나 이탈하는 바람에 ‘무주공산’이 된 허리를 과연 누구에게 맡길까. ‘박지성 시프트론’이 대두되는 가운데, 허정무 감독은 UAE전을 하루 앞두고 가진 기자회견에서 “박지성을 중앙이 아닌 측면 미드필더로 활용하겠다”고 밝혔다. “다른 선수와의 조화를 위해서”가 주 이유였는데, 여기서 다른 선수라 함은 바로 기성용을 뜻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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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 ‘막둥이’ 기성용이 위태롭던 2010월드컵의 꿈을 살렸다. 9월10일 상하이에서 열린 2010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북한전에서 한국은 후반 23분 터진 기성용의 동점골에 힘입어 1-1 무승부로 경기를 마칠 수 있었다. A매치 2번째 출장만에 터뜨린, 새내기의 데뷔골이었다. 무엇보다 패색이 짙던 한국에 귀중한 승점 1점을 안겨준 골이었기에 더없이 값진 골일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한 달 뒤인 10월11일, UAE전을 앞두고 치러진 우즈베키스탄과의 ‘모의고사’에서 기성용의 진가는 다시 한 번 발휘됐다. 이날 한국은 오랜만에 골 폭죽을 터뜨리며 3-0 대승을 거뒀는데, 첫 테이프를 끊은 주인공이 바로 기성용이었다. 기성용은 전반 3분 만에 이청용의 크로스를 골로 연결시키며 2경기 연속골을 기록, 허정무호의 ‘신데렐라’로 등극했다.
이날 한국은 기존 4-3-3시스템을 과감히 버리고 새롭게 4-4-2시스템으로 나서는 ‘변신’을 택했다. 허정무 감독은 교체카드를 모두 써가며 다양한 조합을 실험했고, 김정우-기성용 중앙MF조합 역시 그 중 하나였다. 사실 김정우와 기성용의 만남은 지난 2008올림픽대표팀에서 이미 이뤄진 바 있었기에 실상 낯선 콤비는 아니었다. 그리고 경기가 시작되자 그간 감춰져 있던 그들만의 특별함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기성용의 적극적인 공간 침투는 공격의 물꼬를 틀었고 오른쪽 윙미드 이청용과의 콤비 플레이는 또 다른 득점찬스의 기회가 되었다. 그때마다 김정우는 공격이 잘 이뤄질 수 있도록 밸런스를 맞춰주며 1차 저지선으로서 제 몫을 충분히 해냈다. 10월15일 열린 UAE전에서도 김정우-기성용은 다시 한번 중용되며 모두의 기대에 부흥했다. 이날 기성용은 아쉽게 3게임 연속골에는 실패했지만 한국대표팀의 ‘제2의 공격옵션’으로 자리매김하기에 충분한 움직임을 시종일관 보여줬다. 기성용의 등장이 반가운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변화의 시작
UAE전을 앞두고 다시 소집된 대표팀의 ‘색깔’은 확실히 달라져 있었다. 허정무호 출범 이후 그간 대표팀은 4-3-3포메이션을 고수했고, 공격은 주로 윙포워드의 측면돌파와 원톱의 포스트플레이 아래서만 이뤄지는 편이었다. 그러나 측면에서 중앙으로 반복되는 패턴은 상대에게 읽히기 쉬운 ‘수’였고, 이는 최전방공격수의 고립과 결정력 부족이란 문제와 한데 얽히며 자연스레 ‘골가뭄’으로 귀결됐다. 그러나 금번에 소집된 대표팀은 누차 지적됐던 단점들을 많은 부분 극복하며 ‘환골탈태’했다. 그 중심에 놀랍게도 ‘신예’ 기성용이 있었다.
박지성, 이청용이 측면에서 중앙을 파고들면 어김없이 기성용이 나타나 빈 곳을 커버하며 조력했고, 측면자원들의 크로스 및 패스 타이밍에 맞춰 1선으로 침투, 상대 골문을 날카롭게 위협했다. 특히 전방 공격수들이 적극적인 움직임으로 수비수들의 시선을 따돌릴 때면 어김없이 기성용이 나타나 공간을 찾아 노렸고, 이청용과의 ‘약속된 플레이’ 역시 빛을 발했다. 이청용이 절묘한 침투패스로 수비 뒤 공간을 노릴 때마다 기성용이 이를 슈팅으로 연결시킨 장면도 자주 연출됐는데, 기성용은 “미리 계산된 플레이”라며 “클럽(FC서울)과 대표팀에서 함께 훈련하는 동안 끊임없이 대화하며 준비했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적극적인 모습 뒤에는 “공격할 때는 과감하게, 마음껏 들어가라”던 허정무 감독의 주문도 한몫 했다. 기성용이야말로 미드필드 지역에서 효과적으로 공격의 시발점 역할을 해낼 수 있는 ‘재능’임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곧 우즈베키스탄전 3-0, UAE전 4-1 대승을 거둘 수 있었던 중요한 키워드로 작용했다.
노력에 노력으로
“올림픽에서 겪은 좌절이 나를 강하게 만들었다.” 기성용에게 최근 대표팀에서 보여준 놀라운 성장 비결을 묻자 그는 “성장했다기보단 마음가짐이 달라졌기 때문”이라 대답했다. 2008올림픽은 기성용에게 경험과 한계를 동시에 안겨준 대회였다. 이탈리아와 카메룬과의 경기를 통해 클래스의 ‘다름’과 세계무대의 높은 ‘벽’을 동시에 실감했던 그는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가장 먼저 헬스장을 찾았다. 그간 소홀히 했던 웨이트트레이닝에 매진해 체력과 근력을 ‘수준 이상’ 끌어올리기 위해서였다.
동시에 오후 훈련 종료 후 30분 간, 저녁식사 후 다시 30분 씩 개인적으로 슈팅연습 시간을 가졌다. 어린 시절부터 킥력 하나는 남다르다 생각했지만 2% 부족한 결정력이 늘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물론 처음엔 골망을 출렁이는 공보다 크로스바를 넘기는 공이 더 많았다. 하지만 그의 말마따나 ‘들어갈 때까지 하겠다’는 오기가 그만둘 수 없게 하였고, 어느 날부턴가 자신감 있게 슈팅을 때리는 자신과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8월23일 대구전에서, 기성용은 2005년 겨울 FC서울 입단 이후 근 3년 만에 K리그 데뷔골의 기쁨을 맛봤다. 당시 리저브 멤버로 경기장에 따라갔던 그는 갑작스레 아픈 이을용을 대신해 선발출장했고, 결승골을 터뜨리며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2008올림픽 이후 클럽에서 3골1도움, 대표팀에서 2골을 기록한 이면에는 남 모르는 곳에서 땀 흘렸던 기성용만의 노력이 숨어 있었다. 관련해 지난해까지 U-20대표팀에서 기성용을 지도했던 조동현 감독은 “기성용은 너른 시야, 브레인, 패싱력 등 중앙미드필더로서 갖춰야할 장점들을 두루 갖췄다. 그러나 지금의 기성용이 있기까지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다름 아닌 자기관리와 노력”이라고 말했다.
물론 이에 대해 기성용은 “좋은 환경에서 축구를 배울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라며 낮춰 설명한다. 보통 학원축구 시스템 아래서 뛰는 선수들, 그중에서도 주전급으로 분류되는 선수들은 전국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기 위해 혹사당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그러나 기성용의 경우는 달랐다. 호주에서 중고교 시절을 보내는 동안 기성용은 신체발달에 맞춰 하루에 정해진 시간에만 공을 차며 기본기를 탄탄히 익힐 수 있었다.
유학 도중 일년만에 갑자기 키가 12cm나 자라기도 했는데, 당시 그가 수학했던 존 폴 아카데미에서는 훈련 속도를 늦춰 무게중심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갈 수 있게 도와주었다. 덕분에 급성장으로 깨져버린 바디밸런스를 다시 맞출 수 있었고, 이는 오늘날 기성용이 비슷한 신장을 가진 다른 선수들과 달리 안정감 있게 볼을 소유, 관리할 수 있는 가장 큰 요인이 되었다.
올 한해 기성용은 숨 돌릴 틈도 없이 클럽과 U-20대표팀, 올림픽대표팀, 국가대표팀을 오가며 바쁘게 뛰고 있다. 근 1년 만에 대단한 성장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K리그 휴식기에도 쉬지 못한 채 각 급 대표팀을 오고 가던 기성용의 모습은 확실히 염려스러울 때가 많다. 실제로 UAE전이 열리기 이틀 전, 기성용은 경미한 ‘몸살’기를 보이며 응급실에서 링겔을 맞았다고 한다. 피로가 쌓여 저항력이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추측해본다.
‘혹사론’과 관련된 질문에 기성용은 “가끔 ‘아직 나이도 어린데 부담없이, 즐겁게 축구를 할 순 없을까. 좋은 성적을 거둬야한다는 압박 없이 뛰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하지만 대표팀에 뛰는 것은 ‘특권’ 아닌가. 남들이 좀처럼 갖지 못한 기회를 가진 만큼 힘들어도 영광스럽게 생각하겠다. 그리고 내가 가진 가능성을 드러내기 위해 더 많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지난해 U-20월드컵 당시 눈물을 쏟으며 16강탈락을 아쉬워하던 모습이 선연한데, 소년은 어느새 어른으로 훌쩍 자라 있었다. 그러나 그의 성장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더 자랄 기성용이 기대되고 그 시간이 즐거울 수밖에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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