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조원희를 신데렐라로 부르던 시절이 있었다. 2005년 10월12일 A매치 데뷔전이었던 이란과의 친선경기에서, 조원희는 59초 만에 데뷔골을 터뜨리며 거한 신고식을 치렀고 그해 겨울엔 K리그 베스트11에도 뽑혔다. 하나 신데렐라 스토리는 딱 거기까지였다. 2006월드컵 이후 대표팀과의 연은 끝났고 소속팀에서도 주전 자리를 잡지 못한 채 한 동안 방황의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해가 지나면 새 계절이 돌아오듯 2008년, 다시 만난 조원희는 새로웠다. 한결 풍성해진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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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 듯하다. 올 시즌 수원은 컵대회에 이어 정규리그에서도 1위에 오르며 4년간 묵힌 ‘무관의 한’을 드디어 풀고 말았다. 그러나 영광의 순간에 오르기까지, 그 걸음걸음이 마냥 쉽지만은 않았다. 무엇보다 주전 선수들의 잦은 부상, 그중에서도 중원과 후방의 누수가 가장 큰 이유였다. 초반 백지훈과 안영학이 부상으로 전력에서 이탈했고, 여름에는 신인 박현범이 재활군으로 분류됐다. 여기에 수원 수비의 중심축이었던 이정수 마저 부상병동에 입원하는 악재가 겹쳤다.
그때마다 나서 공백을 메운 사람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조원희다. 올 시즌 조원희는 이운재(26경기)에 이어 가장 많은 경기(23경기)에 나서며 ‘정근’했는데, 만약 경고누적으로 받은 출장정지(3경기)가 없었다면 전경기 출장도 가능했던 시즌이었다. 여기에 상대 예봉을 차단하는 1차 저지선 역할을 제대로 해냈다는 호평까지 받았다. 중원의 힘겨루기에서 조원희가 큰 역할을 해주면서 수원의 리그 1위 등극에 공헌했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다들 과분할 정도로 칭찬을 많이 해주시네요. 멋모르고 열심히 뛰기만 했을 뿐인데 말이죠. 아무래도 측면수비수에서 수비형MF로 보직을 변경한 이후 좋게 봐주시는 것 같아요.”
알다시피 조원희의 본 포지션은 라이트백이다. 그러나 다소 부정확한 크로스가 늘 그의 발목을 잡았다. 특별히 스피드가 부족한 것은 아니었으나 오버래핑 이후 복귀시간이 늦어 ‘돌아오지 않는 풀백’이라는 조소도 들어야만 했다. 설상가상, 2007시즌에는 주전경쟁에서 밀렸고 급기야는 교체선수 명단에도 이름을 올리지 못하는 나날들이 반복되고 말았다.
“2007시즌 전반기 내내 경기에 제대로 나서지 못했어요. 일단 제 스스로에게 실망을 많이 했죠. 하지만 준비만 하고 있다면 언젠가 기회는 다시 올 거라 믿었습니다. 조급해하는 대신 개인운동에 열중하며 그 시간들을 이겨냈죠. 그러다 LA갤럭시와의 친선경기를 앞둔 7월에 차범근 감독님께서 미드필드에서 한번 뛰어 보지 않겠냐고 하셨어요. 마침 중원에 한 자리가 비었거든요. 다시 찾아온 기회였어요. LA갤럭시전이 보직변경 후 대중 앞에 선보인 첫 경기였고 그 뒤로 수비형MF로서의 새 날들이 시작된 거죠.”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고 대다수 전문가들은 조원희의 변신에 합격점을 주었다. 덕분에 새롭게 별명도 생겼다. 팬들은 특유의 투쟁심과 지칠 줄 모르는 체력이 AC밀란의 가투소와 닮았다며 그를 ‘조투소’라 부르기 시작했다.
“물론 저도 가끔 (기)성용이가 대표팀에서 보여주듯 공격적으로 나서고 싶을 때가 있죠. 하지만 제 역할은 ‘청소부’입니다. 지금처럼 앞으로도 뒤에서 묵묵히 궂은일을 도맡을 겁니다.”
오늘의 조원희를 조각한 사람들
소속팀 동갑내기 배기종처럼 크게 알려지진 않았으나, 조원희 또한 월봉 100만원의 연습생 신분으로 처음 K리그 문을 두드린 과거를 갖고 있다.
“2002년 배재고 졸업 후 울산에서 연습생으로 있었죠. 2002월드컵 때 혼자 숙소에서 국가대표팀 경기를 지켜봤던 기억이 나요. 아무도 조원희란 제 이름 석자를 모를 때였죠. 지금도 전 그 시절을 잊고 않고 있어요. 그래서 오늘에 더 감사하며 사는 지도 모르죠. (송)종국이 형과 운동하고 (이)운재 형과 밥을 먹는다는 것, 그때는 정말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어요. 특히 작년에 (안)정환이 형이 저희 팀에 있을 때, 얼마나 좋았는데요. 제 옆에서 축구화 끈을 묶고 있는 정환이 형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막 설레었다니까요.”
지난날을 잊지 않았다던 조원희는, 작금의 터를 마련해 준 옛 은사를 향한 감사인사 또한 잊지 않았다. 바로 광주상무 이강조 감독이다. 조원희의 말을 그대로 옮겨 적자면 “그저 거칠기만 했던 자신을 어르고 채찍질하며 다듬어 주신 분”이라고.
“2004년 11월 상무 제대 이후 고민이 많았어요. 수원에서 오라는 제의가 있었지만 가서 잘할 수 있을 지 확신이 안 섰거든요. 그때 이 감독님께서 ‘가라. 지금의 너라면 가서 충분히 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어요. 저를 향한 감독님의 믿음이 없었다면 오늘날 ‘수원맨’ 조원희도 없었을 거예요.”
그러고 보니 4년 째 수원 지휘봉을 잡고 있는 차범근 감독 이야기 또한 빼놓을 수 없겠다.
“아직 젊다 보니 솔직히 구단에서 외박을 받을 때면 오랜만에 친구들과 맥주 한 잔 마시며 놀고 싶다는 충동이 들어요. 하지만 마음처럼 행동할 순 없어요. 당장 내일은 쉬겠지만 모레 다시 훈련이 잡혀 있으니까요. 차범근 감독님은 정말 예리하세요. 선수들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나태해지거나 그로 인해 컨디션이 떨어지는 걸 단박에 알아차리시거든요. 그리고 냉정하게 내치시죠. 그걸 잘 알기에 어쩔 수 없이 숙소에 남아 개인 운동을 하게 되요. 감독님께선 항상 ‘지금 이 순간에도 다른 사람이 치고 올라오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라’고 말씀하세요. 제가 올 시즌 중원에서 붙박이로 뛰었잖아요. 하지만 이 자리는 절대 저를 위한, 저만의 자리가 아니에요. 그래서 이렇게 악착같이 노력하며 버티고 있는 것인지도 몰라요.”
그리고 덧붙임. “얼마 전 차 감독님께서 ‘원희, 자네 올해 몇 살인가?’하고 물어보시더라고요. 그래서 ‘스물 여섯입니다’라고 대답했더니 껄껄 웃으시더라고요. ‘쇠도 씹어 먹을 나이네’하시면서요. 그만큼 아직은 짱짱한 청춘이라는 뜻이겠죠. 그러니 더 많이, 또 열심히 뛰어야하지 않겠어요?”
나는 결코, 멈추지 않겠다
조원희는 좀처럼 지침을 모르는 사나이다. 덕분에 데뷔 이래로 제법 오랫동안 ‘근성’이란 수식어를 이름 앞에 달고 다녔다. 그 때문에 무식할 정도로 지독하다는 소리도 섭섭지 않게 들었다. 팔이 부러진 상태에서 경기를 뛴 적도 있다고 하니, 이쯤 하면 말 다 했겠다 싶을 정도다.
“상무 시절 한번은 전반 도중에 왼쪽 요골(아래팔의 바깥쪽에 있는 뼈)이 부러지고 말았어요. 당시 오른쪽 풀백으로 뛰었으니 드로인은 제 담당이었어요. 한데 큰 뼈가 부러진 상황인지라 왼팔이 머리 위로 올라갈리 없었죠. 아픔을 참아가며 겨우 왼팔을 머리 쪽에 대고 나선 오른팔로 공을 던졌어요. 그런 상태에서 전후반 90분을 모두 소화하고 나왔어요. 누군가는 미쳤다고 했지만 그만큼 전 절실했어요. 어떻게 잡은 기회인데요. 이 자리만큼은 누구에게도 뺏기고 싶지 않았거든요. 이제 막 K리그에 자리 잡기 시작했을 때라 더 욕심이 났는지도 몰라요.”
그로부터 5년의 시간이 흘렀고, 어느덧 조원희도 프로 7년차 중고참급 선수 대열에 올라섰다. 그러나 조원희는 지금도 말한다. 여전히 부족하고, 그래서 아직은 조심스러운 것들 투성이라고.
“얼마 전 이회택 기술위원장께서 ‘원희 네가 한국 축구 팬들을 다 없애는구나!’라며 버럭 야단을 치셨어요. 아무래도 제 경기력이 마음에 안 드셨던 거죠. ‘기성용 봐라. 후배지만 배울 건 배워라!’던 그 말씀을 지금도 잊을 수 없어요. 하지만 믿어요. 노력하면 언젠가 모두에게 인정받는 그런 날이 올 거라고요. 그럼 그때 꼭 다시 한 번 조원희의 재발견이라고 써주세요.”
시간이 지나고 또 한 번 계절이 바뀌면 조원희는 한결 더 깊어진 모습으로 나타날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인터뷰가 끝나자마자 축구화를 손에 쥔 채 연습구장으로 총총 달려가던 조원희의 뒷모습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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