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내겐 엄마 같았던 할머니.

어린 나를 집에 두고 학교에 나갔던 엄마를 대신하여
엄마 역할을 대신했던 할머니께서 세상을 떠나셨다.

이젠 배우 이동욱으로 유명한 동욱이가
어릴 적 우리집에 놀러왔을 때 
옆에 앉혀놓고 잘생겼다며 이것저것 물어보시던
그리고 나선 얼굴에 빛이 났다며 소녀처럼 좋아했던 내 할머니.

그래도 동욱이가 나왔던 여인의 향기는 보고 돌아가셨구나. 
텔레비전 한가득 동욱이 얼굴이 나오는 걸 무척 신기하게 생각했었는데.
 
빈소는 서울 도봉산 성당
발인은 12월 5일(월) 오전 8시 30분입니다.

할머니의 명복을 기도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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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김수환 추기경님을 떠나보내는 장례미사가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치러졌습니다. 성당 앞마당은 물론이요 성당 옆 카톨릭회관 앞마당까지 가득 매운 카톨릭신자들은 모두가 하나의 마음으로 추기경님의 선종을 애도하며 그 분의 마지막 가시는 길을 지켜봤죠.

차분한 마음으로 추기경님이 성당을 떠나시는 모습까지 지켜본 뒤 성당 앞 언덕길을 내려오는데 참으로 씁쓸한 순간과 만나게 됐습니다. 군중들이 떠나는 모습을 찍고 있던 한 방송사 아나운서가 카메라 기자에게 이렇게 말하더군요.


“펑펑 우는 사람이 없네?”

어쩜 그렇게 그 순간을 바라보던 시각이 극명하게 갈렸을까요. 꺽꺽 우는 사람을 찾아 찍으며 더 좋은 그림을 만들 순 없을까? 그래서 화제뉴스로 포장할 순 없을까? 라는 시각으로 바라보는 그 아나운서를 바라보며 한동안 할 말을 잃었습니다. 대단한 직업정신이라고 칭찬이라도 해줘야하나요.

이번 추기경님의 장례 기간 동안 많은 사람들이 명동 성당을 찾아 조문을 드렸습니다. 수많은 신자들은 30분 간격으로 진행되는 미사에 참석했고 연도를 바쳤죠. 저와 플라이뭉치맨 역시 조문을 위해 여러 번 이곳을 찾았습니다. 그 가운데 만난 사람들 중 존경하는 추기경님을 더 이상 이 땅에서 만날 수 없다는 생각에 눈물을 훔치는 이들이 여럿 있었기는 하였으나 여느 상가집에서처럼 펑펑 우는 사람을 보기는 어려웠습니다.

물론 평생 이 땅의 평화를 위해 없는 이들과 약한 이들과 가난한 자들을 위해 애쓰신 추기경님을 떠나보냈다는 사실은 분명 슬픈 일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안식과 평화를 얻으셨기에, 또 마지막까지 우리에게 사랑과 화해, 용서를 온몸으로 설파하고 가셨기에 우리는 슬픔 보단 희망을 읽습니다. 또한 천주교의 관점에서는 죽음이란 끝이 아닌 시작이요, 아버지의 나라에서 영원을 얻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선종’이란 표현을 쓰며 차분하고 경건한, 그리고 신성한 마음으로 추기경님의 떠남을 맞이하지 않았던 가요. 그런데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방송사라는 곳에서 단순히 이슈화를 위해, 시청자들의 시각적 집중을 위해 펑펑 우는 사람들의 모습을 화면으로 잡으려는 생각만 하다니요. 그런 사람들을 찾기 위해 카메라를 연방 바삐 돌리는, 그리고 나선 우는 사람이 없다 말하는 모습. 솔직히 보기 싫었습니다. 숙연함으로 젖어있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담는 것만으로도 충분할텐데 말이죠. 참으로 실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번 장례기간 동안 ‘명동의 기적’이란 표현을 써가며 ‘엄청나게 길게 늘어선 줄’을 부각시킨 언론의 선정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한 것 같아 마음은 꽤나 편치 않았습니다. 부디 복되신 추기경님의 선종을 더럽히지 마시길 바랍니다. 앞으로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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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김수환 추기경님의 5일 장이 끝나고 장례미사 있던 날. 역시나 많은 이들이 명동성당 앞에 운집했습니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진 못했지만 성당 밖에서 스크린으로 생중계 되는 장례미사 모습을 보며 약 2시간에 가까운 시간동안 장례미사를 드리며 서있었습니다.

추기경님이 이제 흙으로 돌아가는 날 새벽부턴 눈이 내렸죠. 세상의 모든 것을 하얗게 덮은 눈처럼 우리 마음에 평화와 사랑을 내려주신, 증오와 미움은 그렇게 곱게 덮어주신 추기경님은 이제 흙으로 돌아갔지만 우리는 그분을 영원히 기억할 것입니다. 글/헬레나 사진/플라잉뭉치맨


성당 안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은 밖에서 서서 장례미사를 드렸습니다.

1만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옥상 위에서 신자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기자들.

신자들의 모습.

야외에서 생중계로 이렇게 볼 수 있었죠.

정진석 추기경님의 모습입니다.

역시나 취재열기는 뜨거웠습니다.

이 말씀이 왜 그리 마음을 아프게 하던지요.

이곳에도 기자들이...

명동성당 근처에는 모두 신자들이 자리잡은 채 장례미사를 드렸습니다.

경건하고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사제들의 모습.

이곳에서 기자들이...

영성체 중인 신자들.

그리스도의 몸, 아멘.

이제 추기경님이 나오십니다.

경찰차의 호의 아래 나오실 준비를 했습니다.

모두들 두 손을 잡은 채 고인이 되신 추기경님을 기다렸죠.

관 속에 잠드신 추기경님이 계신, 바로 그 운구차량의 모습입니다.

마지막 가시는 길, 그렇게 손을 내저으며 모두들 슬퍼했습니다.

전 이 사진만 봐도 눈물이 나네요...

추기경님 사진을 보며 쉽게 발걸음을 떼지 못하는 사람들.

그렇게 생전 모습을 마음과 기억속에 담은 채 돌아왔습니다.


고맙습니다. 말씀대로 사랑하며 살게요. 혜화동 할아버지. 훗날 하늘에서 꼭 다시 만나길 기도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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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김수환 추기경님의 얼굴을 뵐 수 있는 마지막 밤이었던 어제(18일) 저녁. 6시 종이 울리지마자 미리 준비한 두툼한 잠바를 챙기고 회사를 나왔다.

어제 오후 명동성당을 찾았던 엄마는 2시간 동안 기다린 끝에 추기경님을 뵙고 집으로 돌아왔다고 하셨다. 말이 2시간이지 실제로는 꽤 긴 시간이라 추위를 심하게 느낄 거라며 단단히 채비하라는 조언을 해주셨다. 엄마의 말씀을 떠올리며 장롱 속에 모셔뒀던 오리털 파카를 꺼내 입고 갔다.


명동역에 내린 시간은 오후 7시. 9번 출구 밖으로 긴 줄이 보이길래 '설마 이줄이 전부 명동성당을 가기 위한 줄일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설마했는데 이럴수가. 명동성당을 향한 줄이 맞았다. 그 길의 끝을 찾기 위해 5분 가량 걸은 뒤 겨우 끄트머리를 찾을 수 있었다. 추기경님을 뵙기 위한 긴 기다림은 그렇게 하여 시작했다.


지인 없이 홀로 추도 행렬에 동참했던 난 느릿느릿 행진이 진행되는 가운데 이런 저런 상념에 잠겼었다. 추기경님을 처음 뵜을 때 감히 "추기경님, 너무 좋아합니다. 싸인해주세요~"라던 21살 어린 내가 생각났다. 그것도 노랗게 탈색한 머리를 하고선 싸인과 사진촬영을 부탁드려 '쟨 뭘까?'라는 어른들의 시선을 받았었지. 그 뒤 6개월 뒤 추기경님을 다시 뵙게 되었을 땐 삭발한 머리를 기른 지 얼마 안돼 남자같은 스포츠 머리를 하고선 나타나 '쟨 누구길래 추기경님을 귀찮게 하는 걸까?'라는 시선을 다시 한번 받기도 했고.

옆에 계시던 신부님은 추기경님이 피곤해하시니 인사만 하고 가라 하셨지만 당시 추기경님은 허허 웃으시며 괜찮다며 내게 당신의 묵주와 열쇠고리를 선물로 주셨다. 추기경님 방 서랍에는 나무로 만든 묵주와 추기경님의 사진이 담긴 열쇠고리, 그리고 손 안에 쏙 들어가는 사진들이 수십개가 있었는데 추기경님을 뵈러 온 사람들에게 주기 위한 선물로 보였다. 그때도 난 혼자 사는 늙은 고모가 생각나 감히, 묵주를 하나 더 주실 수 있냐는 부탁까지 했었고. 집에 돌아와선 그 묵주가 너무 소중해 뜯지도 않은 채 서랍 속에 고이 모셔두었다.  지금까지 말이다. 이제는 고인이 되신 추기경님을 뵈러 가는 길, 묻혀 두었던 기억들은 그렇게 수면 위로 하나 둘씩 떠올랐다. 기다리는 시간이 즐거웠던 까닭이다.

2시간 쯤 지나자 슬슬 한기가 느껴졌다. 두툼한 잠바를 입었음에도 내 몸은 춥다고 외치고 있었고, 특히나 구두를 신은 발은 얼얼해 감각을 느낄 수 없었다. 3시간이 가까워졌을 땐 칼로 베는 듯한 통증마저 느껴졌다. 그러나 이 행렬에서 이탈할 수는 없었고 옆에서 묵주기도를 외는 아주머니들의 낮은 음성을 들으며 한 걸음 한 걸음씩 명동성당을 향해 갔다.

올라가는 길목마다 자원봉사자들이 고생이 많다며 따뜻한 차를 건네주었고 내 뒤에 계신 아주머니들, 실제론 많이 연로하셔 할머니에 가까운, 그 분들을 향해선 "조금만 참으면 추기경님을 뵐 수 있었습니다"라는 말씀과 함께 추운 손을 잡아주며 초콜렛을 주기까지 했다. 순간,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세요"라던 추기경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추기경님 안에서 우리는 그렇게 사랑을 실천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 추기경님께 고마움을 느끼던 순간이었다.

수 시간 기다리다 보면 화장실 생각도 날 터. 특히나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에게는 더 어려웠을 시간이다. 고맙게도 명동성당 가는 길가에 있는 음식점과 카페들은 '화장실 마음껏 쓰세요' '화장실 사용 가능합니다'라는 문구를 입구에 붙여 사람들에게 화장실을 내주는 성의를 보여줬다.

그리고 기다린지 3시간 30분이 되었을 때 마침내 명동성당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자원봉사자들과 신부님들은 아직도 뒤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많으니 조의는 목례로 간단히 부탁드린다는 이야기를 반복해서 외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우리보다 더 오래 바깥에 있었을 그분들의 얇은 겉옷이 눈에 띄더라. "신부님. 고생 많으십니다"라고 인삿말을 건네자 신부님은 깍지 낀 손을 한 채 맑은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신부님이 나눠준 검은 리본을 왼쪽 가슴에 부착한 채, 잠바를 벗고 옷을 가다듬은 뒤 드디어 명동성당 내부로 들어갔다. 3시간 45분만에 들어선 순간이었다. 들어서자 제단 앞에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잠들어 계신 추기경님이 보였다. 기억보다 더 작고, 또 흰머리도 더 많던 추기경님은 사람들의 연도를 들으며 그렇게 긴 잠 속에 빠진 듯한 모습으로 누워계셨다. 눈물이 날 줄 알았는데, 이 짧은 3초를 영원히 기억하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잊고 싶지 않아 나가는 문까지 가면서도 내내 뒤를 돌아 추기경님의 마지막 모습을 망막에 담았다. 잊지 말아야지. 기억과 마음과 심장에 아로새긴 채 살아야지.

4시간에 가까운 기다림. 그리고 3초간의 만남. 추위와 싸우며 보낸 긴 시간이었지만 아쉬움보단 아련함이 더 많았던 시간이었다. 성당에서 나와 2000원을 주고선 양초를 샀다. 내 앞에 서 있던 모르는 이가 자신의 촛불로 내 양초에 불을 지펴주는데 사랑은 이렇게 시작은 작은 손길이지만 넘어가고 넘어가는 과정에서 넓고 큰 힘을 발휘하며 전파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래서 성모마리아상 앞에 불 붙은 양초를 고이 놓은 뒤 추기경님께 감사기도를 드렸다.

추기경님의 선종 이후 내 삶과 내 주위 사람들을 더 아끼며 사랑하며 살겠다는 다짐을 하게 돼 감사드린다며. 추기경님의 마지막 말씀대로 아낌없이 더 사랑하며 살겠다고 말씀드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간, 집에 도착하자 쇼파 위에서 선잠을 주무시던 팔순이 넘은 할머니가 인기척에 눈을 뜨는 모습이 보였다. 오랜만에 할머니 옆에 앉아 주름진 살로 뒤덮인 마른 손을 잡아 봤다. 추기경님의 말씀처럼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의미는, 그리고 사랑하세요 라는 말의 속뜻은 이렇게 삶 속에서 조금씩, 실천하는 가운데 깨닫는 것이겠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오랜만에 깊이 잠들 수 있던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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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오후 2시쯤 명동성당 근처에 도착했을 때, 길게 늘어선 조문행렬을 보며 깜짝 놀랐습니다. 모두들 추기경님의 마지막 모습을 조금이라도 뵙기 위해 어렵고 먼 걸음을 마다 않고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너무 많이 사랑받았다던 추기경님 마지막 말씀이 떠오르더군요. 하늘에서 맑게 웃을 추기경님이 떠올랐습니다. 그날 따라 명동성당을 감싸던 하늘은 왜 그리도 파랗던지요. 구름 한점 없는 청명한 하늘이 꼭 추기경님의 마음 같아 혼자서 고개를 끄덕거렸습니다.


추기경님은 떠나셨지만 우리에게 전파한 사랑의 말씀은, 가르침은 오래도록 우리 곁에 남아 잔잔히, 그리고 쉼없이 계속 될 거라 믿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의 선종에 마음 아파하던, 그러나 한편으론 영원한 안식에 축복의 기도를 올리던, 오늘 만난 사람들을 기억합니다. 그날의 모습을 이곳에다 올립니다. 글/헬레나 사진/플라이뭉치맨

조문객들이 많아지자 입구 아래서부터 안내팻말이 있었습니다.

영하 10도 가까이 내려갔지만 추위는 문제되지 않았죠.

노인분들도 많았답니다.

하늘은 파랬죠.

김수환 추기경님 생전 사진을 담는 시민들.

추기경님의 생전 모습이 담긴 사진입니다.

모두들 한번씩 올려다보곤 했죠.

이날 따라 명동성당을 감싸던 하늘은 청명했습니다.

선종... 마음이 뭉클해졌습니다.

추기경님은 항상 말씀하셨죠.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라고요.

시간이 길어질 수록 줄은 점점 길어졌습니다.

입구를 메운 사람들.

취재열기도 뜨거웠습니다.

각계 종계단체 인사들이 애도를 표하고 갔습니다.

성모마리아상 앞에서 기도 드리는 교인들.

추기경님의 평화를 빌며 밝힌 촛불들.

강기갑 의원도 조문행렬에 끼었습니다.

취재진들의 질문에도 답했죠.

우리가 기억하는 모습은 화면 속 이 모습이죠.

줄서 기다리는 와중에도 기도 드리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았죠.

명동성당 올라가는 고개가 조문행렬로 가득찼습니다.

박근혜 의원도 왔습니다.

매우 혼잡하니 조문은 간단히 목례로 부탁드린다는 종이를 들고 계셨던 자원봉사자분.

문희상 의원은 울먹이면서 말씀을 잇더군요.

내란음모사건 관련자로 합수부에 끌려와 조사를 받던 한 감방 안에서 화장실 물로 영세를 받았는데, 그 신부가 바로 김 추기경님이었다고 하네요.

울먹이던 순간.

추기경님이 늘 말씀하셨던 어머니.

오세훈 서울시장도 조문행렬에 함께 했습니다.

밤이 조금씩 찾아왔지만 조문행렬은 도통 끝날 줄 몰랐습니다.



그렇게 밤은 또 지나갔고 우리는 또다시 슬픔 속에서 하루를 보냈습니다. 추위 속에도, 그 추운 바람을 맞으며 수 시간을 기다렸다 수초만 인사 드리고 나올 수 밖에 없었지만 모두들 그 찰나를 영원으로 기억하며 추기경님 가시는 길을 지켜봤습니다. 안식을 얻은 추기경님을 바라보며, 우리 마음에도 평화가 내리길 기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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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7년 전, 이제 막 대학신문 수습기자 딱지를 뗐을 때, 무슨 복을 그리 받았는지 김수환 추기경님 인터뷰를 맡게 되었다. 1993년 9월 동네성당에서 세례를 받으면서 헬레나라는 성당본명을 얻게 되었을 때, 그때부터 알게 됐던 김수환 추기경님은 내게 참 멀고도 큰 사람이었다. 세례를 받은지 꼬박 10년 만에 김수환 추기경님을 뵈었을 때, 그 순간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추기경님이 앉아 계셨던 쇼파 뒤로 햇볕이 쏟아졌는데, 11월 초였기에 날씨는 추웠지만 방안의 공기만은 참으로 따뜻하였다. 그곳의 빛은 초겨울이 아닌 이른 봄의 햇볕처럼 그렇게 따스히도 추기경님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그날 추기경님은 내게 당신의 사진이 담긴 열쇠고리와 나무로 만든 묵주를 주시며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라며, 사람과 세상을 사랑하라며, 빛과 소금 같은 존재가 되길 바란다는 덕담을 건네 주셨다. 그때 나를 보던 그 표정은 너무나 평화로웠고 또 인자로워서 마치 내 할아버지를 보는 것 같아 "추기경님과 사진을 찍어도 될까요?"라는 부탁을 드렸더랬지. 그때 옆에 서 계시던 보좌 신부님은 긴 인터뷰 때문에 피곤하시니 이제 그만 가라고 하셨지만 추기경님은 허허 웃으시며 "한 장 정도는 괜찮다"며 어린 헬레나 옆에서 활짝 웃으셨지.

추기경님의 선종 소식을 들으며 7년 전 그 가을날이 생각나 먹먹해진 가슴을 부여잡으며 잠시 그날을 떠올려본다. 그리고 7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도 우리의 고개를 끄덕이게 만다는, 당시 추기경님이 들려줬던 이야기를, 추기경님이 읊었던 말씀 그대로 적어 올려본다.

△사회가 혼란스러울 때, 고견을 들을 수 있을 정도의 원로는 안타깝게도 많지 않다고 합니다. 한국 사회에 진정한 원로가 없는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보시나요?
- 우선 나이 든 사람들 중 학식 있고 모범적인 사람이 별로 없어서 원로가 없다는 말이 나온 것 같아요. 그렇지만 젊은 사람들이 연예인 같은 유명인에게만 매력을 느껴서 늙은이가 사회에서 밀려나간 것일 수도 있어요. 또, 장유질서가 뿌리 깊던 예전과 달리 누구나 평등하다는 생각이 광범위하게 퍼진 요즘 사람들이 원로를 찾지 않아서 원로가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해요.

△현 정부 출범 즈음, 정국 운영에 대한 조언을 주시기도 하셨는데요, 국민의 정부 5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 글쎄요. 그 분이 정권에서 물러난 후 좀 더 시간을 갖고 지켜봐야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지만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된 것만으로도 지금까지 지역, 가난 등의 이유로 소외됐던 사람들의 상처가 어느 정도 치유했다고 생각돼요. 그러나 취임 전 IMF 위기에 적절히 대처해 인기가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후 편향된 인사정책이라든가 권력남용, 아들의 비리사건 등은 이전 대통령의 전처를 밟는 것 같아 아쉬움이 남네요.

△그렇다면 좀 더 외연을 넓혀, 우리 사회의 리더가 갖춰야 할 덕목은 무엇이며 대선후보가 갖춰야 할 자질은 무엇인가요?
- 총리 인증과정에서 드러나듯 가장 중요한 것은 청렴결백이고, 또 그 사람 말을 믿을 수 있는 정직성이에요. 그리고 지역·계층·세대·노사 간의 갈등과 같은 문제들을 국민의 의견을 수렴해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리더가 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같은 맥락으로 그런 사람이라면 남북문제도 통일로 이끌 수 있다고 생각되네요.

△북한 핵문제는 초미의 관심사입니다. 이를 근거로 대북 지원에 대한 의견이 분분한데, 우리나라의 대북 정책은 어떤 입장을 견지해야 할까요?
- 대북정책은 근본적으로 화해와 협력을 바탕으로 이끌어야 해요. 인간적으로 솔직하게 얘기할 수 있는 파트너 관계도 유지해야 하구요. 물론 우리가 일방적으로 주거나 북쪽에 매달리는 것은 곤란하죠. 최근 북한의 핵 보유문제가 불거졌는데, 북한이 핵폭탄을 얼마나 갖고 있는지 모르지만 그것으로 우리를 협박해서는 안되며, 이는 북한을 위해서도 현명하지 못한 행동이에요.

△지난 9·11 테러를 일부 전문가들은 문화 충돌로 보기도 했습니다. 종교 또한 문명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데요, 문명 대립으로까지 치닫고 있는 세계 평화를 어떻게 풀어가야 할까요?
- 종교가 다르다고 해서 적대적인 관계가 생기는 것은 아니에요. 9·11사태 역시 이슬람교와 크리스트교가 서로 달라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일부 이슬람교도가 정치적 이유로 조성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테러를 감행했는데, 그들이 이슬람교도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종교와 연관짓는 것일 뿐이에요. 물론 문제가 있다면 폭력이 아닌 사랑과 용서로 해결해야겠죠. 폭력은 다시 폭력을 낳으며, 악순환이 계속되니까요.

△ 과학은 점차 발달해, ‘신의 영역’을 향하고 있다고 평가되기도 합니다.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우리들이 과학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 과학은 자연의 신비를 벗겨내고, 과학자를 통해 하느님이 사람을 만든 신비로움에 조금은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광대한 자연과 하늘의 별, 이런 것들은 볼 때마다 놀랍잖아요. 또, 원자 역시 연구자들이 연구와 분석을 거듭해도 끝이 없는 것을 보면 정말 신비스러워요. 우리의 몸 역시 원자로 구성되었다는 점에서 땅을 이루고 있는 것과 근본적으로 같다고 볼 수 있어요. 이 점에서 우리 몸도 한없는 신비 속에 있다고 할 수 있어요. 따라서 신비로움을 밝혀내는 과학의 발전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과학은 그 자체의 발전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고 소중함을 간직할 수 있을 때 의미가 있는 거예요. 요즘 인간 배아복제다 해서 인간 존중이나 생명존중에 바탕을 둔 윤리관 없이 단지 편리함 추구하기 위한 연구를 하기도 하는데, 이런 연구는 자칫하면 인류에 재앙을 불러올 수도 있어요. 무엇보다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과학이 돼야겠어요.


7년 전, 내 카메라에 담았던 추기경님의 생전 모습. 이날 사제관은 아름다운 빛으로 반짝였었다. 그 빛이 주던 온화함을 앞으로도 잊지 못하리라. 헤어지기 전 내 손을 잡아주셨던,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지던 추기경님의 손 끝, 그 마디 마디까지도.

제게 해주셨던 말씀대로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더라도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해 노력하며 살겠나이다. 하늘에서 편히 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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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수상소식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할아버지가 생각났습니다. 저를 아주 많이 예뻐해주셨던, 지금은 하늘에 계신 제 할아버지가요. 할아버지 당신께선 제가 글 쓰는 사람이 되길 바랐고, 무엇보다 세상을 움직이는 글을 쓰길 원했고, 그래서 늘 기자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제게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할아버지께서 제 수상소식을 들었다면 무척 좋아하셨을텐데,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기도 뿐이라는 생각에, 그날 밤 새벽까지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지난 8월27일 할아버지를 하늘에 떠나보낸 이후 저를 위로해줬던 건 다름 아닌 블로그였습니다. 블로그에 글을 쓰며 마음을 달랬고, 그렇게 하루를 정리하며 다시금 제 삶을 다잡을 수 있었죠. 돌이켜보면 2001년 처음 다음에 블로그를 만든 이후, 블로그란 존재는 제 인생에 있어 꽤 많은 부분을 차지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 가운데 알게 된 블로거뉴스는 일상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이야기들과 작은 사건들도 뉴스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줬습니다. 제가 전송한 뉴스를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고 교류하는 시간은 무척이나 신났고 또 즐거웠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못했던 무명선수의 이야기가 제 블로그를 통해 전해지고, 그렇게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는 사실 역시 제게는 무척이나 뿌듯했던 순간이자 경험이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스포츠전문 블로그를 지향했지만, 실천하는 지식인이 되고 싶은 마음에, 올해 초 취재했던 일본인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이야기도, 결국엔 블로거뉴스가 있었기에 전해질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만으로도 감사한데 이렇게 큰 상까지 주셔서 더욱 감사드립니다.

지금 이 순간이 제 인생에 있어 또 다른 시작인 것 같습니다. 블로거기자상 수상 덕에 앞으로 더 잘해야겠다는 책임의식이 생겼고, 또 더 잘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죠.

지난 날 할아버지께서 하셨던 말씀대로, 언젠가는 모두의 마음을 움직이는 따뜻한 글을 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마도, 그 공간은 지금처럼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블로거뉴스가 되겠죠. 무엇보다 블로거뉴스에서만 맡을 수 있는 잔잔한 사람 향기를 잊을 순 없을테니까요. 그리고 앞으로도 이곳 블로거뉴스가 강자 보다는 약자의 시선에서, 있는 자들보다는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을 생각하는, 그렇게 변함없이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그런 곳이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는 말씀 드리며 끝인사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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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나눔의 집에서 생활하시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필기 할머니께서 3월5일 아침 7시 45분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지난 1월 지돌이 할머니를 떠나 보낸지 채 100일도 안됐는데 이렇게 또 한 분의 할머니를 가슴에 묻은 채 보내는군요. 너무나 마음이 아프네요.

1925년 6월18일 경남 진양군 지수면 승내리에서 태어난 문필기 할머니는 1943년 가을 18살의 나이에 동네 아저씨의 말만 믿고 따라 나섰다가


중국 만주 위안소에서 2년이라는 세월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이제부터는 할머니가 하신 말씀 그대로를 나눔의집 홈페이지를 참고하여 여러분께 알려드립니다. 다소 충격적인 내용도 있습니다. 그래도 끝까지 읽어주세요.

“마을에서 일본인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50대의 아저씨가 공부도 하고 돈도 벌 수 있는 곳에 보내 주겠다고 하여 집에서 입던 옷 그대로 따라 나섰다가 트럭을 타고 부산까지 갔고 거기서 조선인 여자 4명과 함께 열차로 서울, 평양, 신의주를 거쳐서 만주의 ‘위안소’로 끌려가서 ‘위안부’(성노예) 생활을 하게 되었다.”

“우리들은 모두 만주에 있는 군위안소에 배치되었다. 그곳의 겨울은 매우 길고 아주 추웠다. 여름은 짧았고 우리나라의 가을 날씨 같았다. 위안소에는 30 명가량의 위안부들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조선인 위안부들이었다. 대개 18~19세가량 되었다. 위안소에서 가까운 부대소속 군인들이 교대로 파견 나와 보초를 섰다. 위안소에서 우리를 감독하고 돈표를 모아서 계산하는 일을 하는 조선인 남자 두 명이 있었다. 그들 중 한 사람은 우리들을 괴롭히지는 않았으나 키가 작은 또 다른 군속은 우리를 회초리로 때리고 지독하게 굴었다. 특히 위안부들이 일본인 군인들과 싸우거나 군인을 상대하지 않으려 하면 심하게 때렸다.”

“위안소는 일본식 집이었는데 위안소 주변에는 부대가 있었다. 위안소 건물 주위를 둘러싼 담도 있었다. 1층에는 우리를 감독하던 조선인 남자 두 명의 숙소와 식당이 있었다. 2층에는 위안부들의 방이 있었는데 다다미 한 장 반 정도의 크기였다. 위안부 한 사람이 한 개의 방을 사용했다. 처음에 위안소에 도착하자 성병이 있는지 처녀인지 등을 검사했다. 그 후 군의는 나에게 몇 달 동안 간호부일을 시켰다. 그래서 부상병의 상처를 소독하고 붕대로 감는 일을 배워서 했다. 그리고 병원의 빨래도 했다. 낮에는 병원 일을 하고 밤에는 군의가 나에게 자러 왔다. 나는 그 군의에게 처음으로 정조를 빼앗겼다. 여자에게 정조가 중요하다고 듣고 자랐고 내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으므로 내 몸을 버렸다는 생각에 많이 울었다. 간호부 일을 하는 동안은 군의 외에 다른 군인들은 상대하지 않았으나, 몇 달 후에는 간호부일을 그만두게 하고 위안부짓을 시켰다. 그러나 위안부짓을 하면서도 부상자들이 많을 때는 가끔씩 병원에 가서 간호부일을 해야 했다.”

“위안부들은 모두 똑같은 원피스를 입었다. 아침과 저녁으로 하루 두 끼의 식사만 주었다. 밥은 우리가 교대로 했다. 위안소에 있을 때 월경을 시작했다. 군인들이 많은 토요일, 일요일에는 월경 중에도 군인을 상대해야 했다. 그때는 참 괴로웠다. 평일 날 아침에 일어나면 함께 모여 조회를 하고 가끔 군인들이 나와서 방공연습을 시키기도 했다. 조회는 일주일에 서너 번 정도 했는데 위안소 마당에 모여 일본에 충성하자는 황국신민의 서사를 외우고 일본 군가도 불렀다. 그러나 일요일에는 장교들이 자고 가므로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이 대중없었다. 평일에는 군인들이 싸움터에 나가느라 낮에는 거의 오지 않고 저녁부터 왔다. 가끔 외출 나온 군인들이 낮에 왔다. 그래서 평일은 열 명 내외의 군인이 다녀갔다. 토요일과 일요일은 아침 여덟 시부터 군인들이 왔다. 토요일과 일요일은 점심밥도 주므로 하루 세 끼를 먹을 수 있었다. 밥 먹는 시간 외에는 계속 군인을 받아야 했다. 저녁 일곱 시 이후에는 장교들이 왔다. 장교들은 초저녁부터 와서 긴 밤을 자고 다음날 새벽이나 아침에 갔다. 군인들은 모두 일본인이었다. 조선인이 들어오면 붙잡고 실컷 울기라도 하겠는데 3년 동안 조선인 군인은 한 번도 못 보았다.”

“군인들은 위안소에 왔다갈 때 손바닥 반만 한 크기의 누런 색 돈표를 내고 갔다. 장교는 사병보다 더 많은 액수의 돈표를 냈다. 어떤 군인은 돈표를 안 내려는 이도 있었다. 돈표를 받으면 우리가 갖지 않고 우리를 관리하던 조선인 남자에게 갖다 주었다. 그러면 그 개수를 세어서 위안부 각자가 하루 몇 명의 군인을 받았나를 막대 그래프로 크게 그려 벽에 붙여놓았다. 나는 다른 위안부들보다 군인을 적게 받는 편이어서 자주 혼났다. 군인이 적은 평일은 열 명 내외를 상대했고, 토, 일요일은 40~50명을 상대해야 했다. 우리는 돈표를 갖다 주기만 했지 돈은 한 푼도 받지 못했다.”

군인들은 문 밖에 줄을 서 있다가 차례로 들어왔는데 서로 먼저 들어오려고 자기들끼리 싸우곤 했다. 그들은 각반을 벗고 기다렸다. 앞 사람이 위안소 안에 오래 있으면 빨리 나오라고 문을 두드리고 법석을 떨었다. 군인들은 위안소에 한번 들어오면 사병은 삼십 분, 장교는 한 시간 있을 수 있도록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대개는 5분 내외면 끝내고 나갔다. 군인 한 사람을 상대하고 나면 1층에 있는 목욕탕에 내려가서 소독약을 넣은 물로 밑을 씻고 와서 다시 군인을 받았다. 소독약이 목욕탕에 있었다. 군인들 중에는 여자를 오래 못 봐서 그런지 들어오자마자 사정해 버리는 이도 많았다. 나를 괴롭히거나 못되게 구는 군인에게는 죽을힘을 다해 반항했다. 그래서 군인과 싸우고 있으면 밖에 줄서서 기다리던 군인들은 시간 끌지 말고 빨리 나오라고 욕했다. 또 군인과 싸우면 많이 맞기도 했다.”

위안부 생활을 하면서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다. 어떤 군인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받아 주지 않는다고 술을 먹고 와서 칼을 뽑아 들고 행패를 부렸다. 또 어떤 군인은 술 먹고 위안소에 들어와 칼을 다다미에 꽂아놓고 성행위를 하는 사람이 많아 방바닥에 칼자국이 많이 있었다. 이것은 자기 하고픈 대로 실컷하게 해달라는 위협이었다. 그러다 안 되면 칼을 가지고 덤벼드는데 이럴 때는 빨리 피하거나 혹은 누가 찾는다고 거짓말을 시켜 내보내곤 했다. 그곳에 간 지 1년쯤 되었을 때 어떤 군인이 너무 괴롭히길래 나도 화가 나서 발로 찼더니 그는 내 옷을 다 찢고 발가벗겨 때리고 칼을 들이댔다. 그리고는 밖에 나가서 시뻘겋게 달구어진 인두 모양의 불쑤시개를 가지고 들어와 내 겨드랑이를 지졌다. 그 상처로 석 달 동안 고생했다. 특히 긴밤 자는 장교들은 여러 번 접촉을 요구하며 아주 귀찮게 굴어 밤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또 긴밤 자는 장교 중에는 술이 잔뜩 취해 들어와서는 밤새도록 다 토하고 잘 되지도 않으면서 접촉을 하려 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면 나는 비위가 상해 참을 수가 없었다.”

가족들이 미칠 듯이 그리워 매일 울고 남의 슬픈 소리를 조금만 들어도 울곤 했다. 나는 집 생각, 엄마 생각으로 마음에 병이 나서 몸져눕기도 했었다. 살고 싶지도 않았다. 우리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병원에 가서 성병검사를 받기 위해 소변 검사, 피 검사 등을 받았다. 위안소에 있을 때 나는 임질에 걸린 적이 있었다. 그래서 606호 주사도 맞고 약도 발라 나았다. 성병이 걸렸을 때는 군인을 상대하지 않고 쉬었기 때문에 그래도 지내기가 좀 나았다. 그 외에 다른 병을 앓은 적은 없었다.”

“내가 위안소에 간 지 3년째 되는 스무 살에 종전이 되었다. 갑자기 군인들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위안소에 오질 않아 편안하게 잘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련 군인들이 위안소에 들어와 총을 들이댔다. 그들은 우리의 옷을 벗기려 했다. 일본 군인들이 도망가고 나니까 이제 소련 군인들이 우리를 겁탈하려는 것이었다. 그때 우리를 관리하던 이북 출신의 조선인 남자가 큰일 났으니 쓰던 물건 모두 팽개치고 어서 도망가자고 했다. 그래서 그와 그의 부인, 기요코 그리고 나 이렇게 네 명이 함께 얼굴에 시커멓게 칠을 하고 위안소 건물 뒤로 돌아 나와 도망쳤다. 나머지 위안부들은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 각자 뿔뿔이 흩어졌다.”

“중국에서 뚜껑도 없는 화차를 타고 압록강까지 온 다음 걸어서 흥남에 도착. 그 후 밤낮을 걸어서 평양, 개성을 거쳐 서울에 도착하였고 그 곳에서 주먹밥과 고향 가는 기차표를 얻어 집에 돌아왔다. 고향에 와보니 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진주에서 여관을 운영하던 사촌 이모집으로 가서 일을 거들다가 목포, 광주, 전주등지의 술집에도 있었고 마산에서 대폿집을 하던 중, 36세 때 철도의 선로꾼을 만나 살림을 차렸으나 남편이 병들어 죽었고…”

그 뒤 할머니는 1992년 6월 피해자 신고를 하며 세상과 일본을 향해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하셨죠.

“동네 문방구에 가서 위안부에 관해 써 붙여 놓은 것을 보았고, 또 TV에서 위안부 출신 할머니들의 증언을 들었다. 그래서 나도 신고해서 억울함을 면할까 싶어 1992년 6월에 신고했다. 처음에는 신고하는 것을 매우 망설였으나 지금까지 내 가슴속에만 넣고 있던 것을 다 털어놓고 나니 가슴이 후련하다.”

2000년에는 국제인권변호인단이 수여한 인권상을 수상하셨고 2003년 10월9일 나눔의 집에 입소하여 지금까지 생활하셨습니다. 작년 3월 지병 악파로 병원 입원하기 전까지는 매주 수요일마다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리는 정기시위에 참석하셨고 작년 5월에는 미국하원 결의안 조속통과를 위한 영상편지를 발송하기도 하셨습니다.

이제는 만날 수 없는 할머니의 사진을 보며 박복했던 우리 할머니들의 삶을 생각하며 저는 또 눈물을 흘립니다. 할머니는 오늘 아침 한 줌 재가 되어 우리 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벌써 두 달 만에 두 명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를 보내야만 했습니다. 그 때문에 자꾸만 두려운 마음도 듭니다.


여기까지 읽으면서 일본인들이 저지른 만행에 분노가 느껴지신다면 매주 수요일 낮12시 일본대사관 앞에서 진행되는 정기 수요시위에 함께 해주세요. 이명박 대통령이 일본정부를 상대로 사과를 요구할 수 있도록 압력을 가해주세요. 해외 웹사이트를 통해 더 많은 세계인들이 알 수 있도록, 그리하여 분노할 수 있도록 이 사실을 널리 알려주세요. 나눔의 집에서 어렵게 생활하는 할머니들을 위해 정기후원회원이 돼 주세요.

세상을 바꾸는 힘은 이렇게 쌓이고 쌓여 나오는 것이라 믿습니다. 그러니 꼭 도와주세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문필기 할머니의 명복을 빕니다.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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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은 조선일보 대전지부 전재홍 기자께서 찍은 뒤 나눔의 집에 기증을 하셨다고 합니다. 전재홍 기자께 직접적인 허락을 받고 올리지는 못했으나 할머니의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자 포스팅 하는 과정에서 올렸기에, 혹시라도 이 글을 발견하신다면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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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나눔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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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오늘 아침 기온은 영하 10.1도. 추운 날씨 때문에 아침부터 걱정스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오늘은 일본군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수요시위가 열리는 날이었거든요. 게다가 800차를 맞는 날이기도 했고요.


시위에 참가하는 할머니들께서 고생하시겠구나,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습니다. 그래도 다행히 시위가 시작되자 날씨가 많이 풀렸습니다. 기상청 발표에 따르면 영하 5.1도더군요. 오늘은 많은 사람들이 수요시위에 참가했습니다. 800회를 맞이한다는 소식 때문이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요시위가 800회를 맞이하는 동안 바뀐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16년 동안 매주 수요일마다 일본대사관 앞에 모여 목소리를 높이지만 일본 정부는 여전히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 설 연휴기간 중에는 나눔의 집에서 생활하시던 지돌이 할머니께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할머니는 쓸쓸히, 그리고 조용히 우리 곁을 떠나셨죠. 그래서 더 마음이 무겁고 아팠습니다.


요즘 화두는 아무래도 숭례문인 듯합니다. 그래서인지 숭례문 앞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은 연길 끊이지 않고 있네요. 수요시위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도 저는 그곳을 찾은 많은 사람들을 봤습니다. 조화를 놓고 가는 사람들도 있더군요. 저는 사람들이 놓고 간 국화를 보며 많은 생각을 해봤습니다. 저 수많은 꽃들 중 지돌이 할머니의 넋을 위로하는 꽃은 왜 없을까, 라고요.



일본대사관 앞에서 만난 할머니들은 정기수요시위가 800회로 끝났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슬프게도 또 속상하게도 정기수요시위는 당분간은 계속 되겠죠. 일본정부는 여전히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은폐시키며 공식사과하지 않고 있으니까요.


어느새 일본군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수요시위는 800회를 맞이하지만 바뀐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더더욱 여러분들의 관심이 필요합니다. 할머니들의 아픔은 우리의 아픔이기도 하니까요. 할머니들의 목소리가 묻혀버리지 않도록, 그들만의 공허한 외침이 되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가슴 아픈 과거사가 더 이상 재현되지 않도록 말이죠.


800회를 맞은 정기수요시위에 참석하지 못한 분들을 위한 동영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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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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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플라잉뭉치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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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저희 집은 차례를 지내지 않습니다. 친척들도 대부분 외국에 있기 때문에 명절은 늘 집에서 뒹굴대며 쉬는 날이지요. 그렇지만 올해 설 연휴도 그렇게 보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오래 전부터 계획을 세웠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계시는 나눔의 집에서 봉사활동을 하기로 말이죠.


2월 7일 설날 아침에 나눔의 집에 가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전날 저녁 가는 방법을 확인하기 위해 나눔의 집 홈페이지에 들어가 봤지요. 그리고 그곳에서 예상치 못한 소식을 접해야만했습니다. 지돌이 할머니의 별세 소식이었습니다.



결국 나눔의 집 봉사활동을 잠시 뒤로 미룬 채 저는 경기도 양평에 위치한 용문효병원에 가기로 했습니다. 발인은 2월 8일 아침 9시. 양평까지 가기 위해선 새벽 6시에 집에서 출발해야만 했지요. 그런데 문제는 그날이 아버지 생신이라는데 있었습니다. 아버지 생신은 음력 1월 2일, 설 다음날입니다. 연휴 때면 온 가족이 집에 있기 때문에 저희는 항상 아침에 함께 미역국을 먹으며 조촐한 잔치를 엽니다.


하지만 저는 그곳에 가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가족들에게 양해를 구한 뒤 양평으로 향했습니다. 추운 새벽 바람과 싸우며 도착한 그곳에서 저는 사진 속으로나마 지돌이 할머니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정말로 마음이 아팠던 것은 너무나 적은 사람들만이 할머니의 마지막을 지켰다는 사실입니다. 어쩌면 그것이 작금의 현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물이 났습니다. 이 글을 쓰는 저 역시 할머니들의 아픔을 모른 채 그저 하루하루 살아가기에만 바쁘죠. 할머니들의 피 맺힌 절규와 아픔, 잊고 싶은 상처가 얼마나 깊고 처절한지 전혀 모른 채 말입니다.


장례식장에 있던 사람들이 한명 씩 나와 자신이 기억하는 지돌이 할머니에 대해 이야기하다 눈물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도 눈물이 났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다시 영상편집을 하면서 또 한 번 울었습니다.


(영상이 조금 깁니다. 그렇지만 꼭 끝까지 봐주세요.)




1923년 6월 5일 경북 경주군 안강면에서 태어난 지돌이 할머니는 18살에 결혼해 남편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남편이 징병으로 끌려갔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중국 방직공장에서 일할 사람을 찾는다는 말에 속아 그만 1945년 3월 13일 흑룡강성 동령현 석문자 위안소에 끌려가고 말았습니다. 할머니가 겨우 23살이 됐을 때의 일입니다.


그러나 해방 후에도 한국으로 돌아올 방법을 찾지 못해 중국인과 결혼, 슬하에 1남1녀를 두었습니다. 그러던 중 1997년 나눔의 집 도움으로 생존이 확인됐고 2000년 6월 1일 귀국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공동체 나눔의 집에서 생활하게 됐습니다. 


그 후 2000년 11월 24일 국적회복이 허가됐고 이듬해 2월 8일 대한민국 국적을 회복했습니다. 나눔의 집에서 생활하시면서 수요일이면 일본대사관 앞으로 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알렸던 할머니는 최근 초기 치매 증세를 보이다가 결국 지병으로 2월 6일 오후 5시 24분 양평 용문효병원에서 끝내 운명하시고 말았습니다.


2월 8일 오후 1시 강원 인제 하늘공원에서 화장된 할머니의 유해는 나눔의 집 법당에 안치됐습니다. 그리고 지돌이 할머니의 별세로 이제 나눔의 집에 계신 할머니는 8명뿐입니다. 미 의회에서 위안부 결의안이 통과됐지만 일본은 아직 공식 사과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일본 정부는 이렇게 시간만 끌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다 피해자 할머니들이 모두 돌아가시면 일본군 위안부는 없었다고 발뺌하겠죠.



그것은 있어서도, 또 있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일본 정부의 사과를 받아내기 위해서라도 오래 오래 살 겁니다!”라고 외치셨던 할머니들도 언젠가는 모두 눈을 감으실 것입니다. 그 할머니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기 전에 우리 모두 힘을 모아 일본의 공식 사과를 받아냅시다. 여러분의 작은 관심들이 쌓이고 모이면 세상은 분명 바뀔 수 있을 것입니다. 

(사진을 보실 분은 이곳을 클릭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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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초등학교 4학년 때로 기억합니다. 예쁘게 포장된 선물 하나가 눈에 띄었습니다. 엄마 책상 위에 놓여 있었죠. 그리고 호기심을 참지 못한 전 엄마 허락 없이 그 자리에서 포장을 뜯고 말았답니다. 다들 이해하시죠? 그 나이 때는 종종 그런 법이잖아요.

"에이, 뭐야. 책이잖아. 무슨 포장을 이렇게 예쁘게 한 거야. 쳇." 그런데 중간 부분에 뭔가가 끼워져 있는 게 눈에 띄었습니다.

그 무엇인가는 다름 아닌 하얀 봉투였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수표 한 장이 있었습니다.


"엄마, 서점 아저씨가 실수했나봐. 모르고 책 안에다 돈 넣었어! 이 책 어디서 산거야?"

부엌에서 마늘을 빻고 있던 엄마는 깜짝 놀라며 도로 넣으라고 하셨죠. 다행히도 엄마 허락 없이 왜 포장을 뜯었냐는 야단은 맞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봉투 덕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로부터 14년 뒤 제 동생이 임용고사에 통과하여 '선생님'으로 불리게 된 그날, 엄마는 30여년 전 먼저 선생님이 된 '인생의 선배'로서 해줄 이야기가 있다 하셨습니다.

"누구나 처음 교단에 서게 되면 좋은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소망을 품게 되지. 그렇지만 매 순간 난관과 유혹에 시달리다보면 '좋은 선생님이 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스스로 품게 되곤 한단다. 그 순간을 슬기롭게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야. 아이들의 맑은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볼 수 있는, 그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는 것이지."

그러면서 자연스레 촌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셨습니다. 한번 받기는 어렵지만 두번 째 받기는 쉬운 법이므로 잠깐의 망설임이 있을지라도 거절할 줄 아는 용기와 지혜를 발휘하라고 말이죠. 엄마는 30년 가까운 교직생활 동안 우연히 받게 된 촌지 한 장도 넘어가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 엄마의 조언이었으니 더 깊이 새겨들 수 밖에 없었죠.

그렇지만 옆에 앉아 엄마와 동생과의 대화를 들으며 '촌지 이야기'는 제겐 먼 나라 이야기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정계나 재계 쪽에서 일하는 사람도 아니었고 교직에 있는 사람 또한 아니었으니까요. 프리랜서 글쟁이에게 촌지라뇨.



얼마 전부터 정기적으로 쓰게 된 기사가 있습니다. 바로 사업으로 자수성가한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성공 노하우를 알려주는 인터뷰 기사입니다. 오늘도 저는 그 기사를 쓰기 위해 한 분을 만나게 됐죠. 제가 만난 그분은 '기술혁신으로 세상을 선도하자'는 이념으로 회사 창설 20년 만에 우량기업으로 키워낸 대단하신 분이었습니다. 약 1시간 가량 그분의 이야기를 들으며 인터뷰어와 인터뷰이와의 만남을 넘어선, 개인적으로 많이 배울 수 있었던 뿌듯한 시간이었습니다.

인터뷰를 마친 뒤 인사를 드리고 나오려는데 그분이 제게 묻어군요. "식사하셨습니까?" 그리고 그 질문과 동시에 흰 봉투를 제 코트 왼쪽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깜짝 놀라 오른손으로 봉투를 꺼내려고 하자 다른 한손으로 제 손을 누르며 "제가 바빠서 식사 대접은 못하겠고 대신 이걸로 집에 가시면서 맛난 저녁 하십시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순간, 언젠가 엄마가 해줬던 그 이야기가 떠오르더군요.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기 위해선 단호하게 거절할 줄 아는 용기와 지혜가 필요하다는 그 말씀 말입니다.

그 봉투를 다시 그 분 손에 쥐어드리자 "아니 정성을 이렇게까지 거부하시나? **신문 기자, ##방송 기자 만났을 때도 안 이랬는데. 어려서 뭘 몰라서 그러는데 선배들한테 얘기 못 들었어? 이럴 때는 그냥 '고맙습니다'하고 받는 게 예의야"라며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말씀하시더군요.

어떻게 이 상황을 모면할지 몰라 일순 당황스러웠습니다.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한 일을 이렇게 예상치 못한 순간에 겪게 됐으니까요. 그래서 엄마는 지혜도 필요하다고 하셨나 봅니다.

"식사를 못 사주시는 게 마음에 남으신다면 다음에 시간 되실 때 알려주세요. 그때 맛난 식사 사주시는 걸로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돌려드리겠습니다. 설 잘 보내세요. 안녕히 계십시오."

그렇게 말씀 드린 뒤 건물을 나서는데 만감이 교차하더군요. 여러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가장 크게 들었던 생각은 '응, 잘했어. 헬레나.' 그것이었습니다.

제겐 꿈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두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 수 있는 그런 좋은 글을 쓰고 싶다는 오랜 꿈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진실된 글을 써야겠죠. 그리고 진실된 글을 쓰기 위해선 늘 진실된 삶을 살고자 노력해야겠죠. 그것은 곧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이라 외치며 고뇌하던 어린 날의 우상 윤동주 시인의 자세와도 같습니다.

제가 만약 '수백만 원 든 것도 아닐 텐데.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니까 고맙게 받자'라며 봉투를 받았다면 제 꿈은 영원히 꿈나라 속에서만 존재했겠죠. 스스로를 속이는 사람은 결코 좋은 글을 쓸 수 없을 테니까요. 그래서 혼자 흐뭇해하며 그렇게 찬바람 속에서도 연신 웃으며 집으로 돌아왔답니다.



언젠가 제게도 아이가 생긴다면, 그 아이가 첫 직장을 얻게 됐을 때 저도 오늘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겠죠. 그 옛날 제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더 기분 좋은 웃음을 지을 수 있었던 하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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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새벽부터 제가 살고 있는 서울에는 눈이 정말 정신없이 내렸습니다. 바람까지 심하게 불어 실로 오랜만에 또 제대로 눈보라를 보게 됐죠. 그런데 저는 그 눈보라를 뚫고 그곳에 갔답니다. 어디냐고요?


바로 ‘헌혈의 집’입니다.


지난 밤 전국적으로 혈액이 부족해 일부 병원에서는 수술이 중단된다는 뉴스를 봤거든요. 수혈용인 적혈구 농축액은 2.1일분 밖에 남지 않았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A형과 O형 혈액형이 0.6일치 밖에 남지 않았다는 심각한 소식을 들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마침 제 혈액형이 O형이더군요. 집에 앉아 뉴스를 보며 “큰일났군”이라 말하며 혀를 끌끌 차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바로 헌혈의 집으로 달려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잠이 들었지요.


물론 고민은 있었습니다. ‘날씨도 춥고 바람도 세고… 꼭 오늘가야만 하나?’라는 생각에 한참동안 망설였죠. 하지만 ‘피가 모자라’ 수술을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뉴스를 다시 한 번 떠올리며 집을 나섰습니다.


올해 제가 세운 여러 가지 목표 중 하나가 바로 ‘실천하는 지식인 되기’입니다. 비록 아직 지식인이 되기엔 멀었으나 일단 차근차근 실천부터 하자는 생각에 퍼뜩 헌혈의 집까지 한걸음에 뛰어갔죠.




이렇게 하여 헌혈을 하게 됐습니다. 태어나서 2번째로 하는 헌혈이었지요. 2002년 5월 4일에 했던 헌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으니 정말 오랜만에 한 거네요. 넷째 손가락에서 채혈을 한 뒤 혈액형 검사와 철분 검사를 했는데 다행히 O형 정상 판정을 받았습니다.


여성들의 경우 철분 수치가 낮아서 헌혈을 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네요. 저는 13이 나왔는데 그 정도면 아주 건강한 최고 수치라고 합니다. 사실 몸이 건강하지 못했던 시절이 있었던지라 그간 영양소를 고려하며 식사를 하곤 했는데 역시 보람이 있더군요. 


그리고 수술용 혈액이 부족한 현실을 감안해 320cc 전혈을 하기로 했습니다. 피를 뽑는 동안 궁금한 게 많았던 저는 계속 간호사 언니를 괴롭혔지요. 그래도 싫은 기색 없이 열심히 대답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


이렇게 하여 저의 헌혈의 집 원정기는 끝이 났습니다. 제 몸을 빠져나온 피는 무척이나 따뜻했답니다. 부디 그 피가 힘든 사람들을 위해 좋은 곳에서 잘 쓰여지길 바랍니다. 그리고 헌혈의 집을 나서며 “2달 후에 또 올게요!”라고 약속했는데요, 앞으로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건강하게 생활하려고 합니다.


참, 헌혈과 관련된 루머가 정말 많더군요. 일단 피를 뽑는 주사 바늘은 1회용입니다. 재활용은 절대 하지 않으니 세균 감염이나 에이즈와 관련된 걱정은 부디 내려 놓으세요. 그리고 제 주위 친구들 중에는 주사 공포 때문에 못하겠다고 하는데요, 솔직히 주사 맞는 것보단 훨씬~ 안 아프답니다.


잊지 말아요. 살짝 따끔한 찰나를 참을 수 있다면 당신은 생사의 갈림길에 놓인 환자에게 있어 귀중한 생명의 은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 헌혈을 통해 사랑을 실천해보아요! ^^

추신) 이 모습을 영상으로 담아준 플라잉 뭉치님께 감사 인사 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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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2008년 1월 2일 낮 12시 일본대사관 앞. 제 794차 일본군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수요집회가 열렸습니다. 2008년 새해 첫 정기수요시위기도 했지요.


날씨가 조금 풀렸지만 체감온도는 여전히 영하였습니다. 그 와중에도 일본군위안부 희생자 할머니들은 어김없이 일본대사관 앞을 찾았지요. 그리고 할머니들을 지지하는 시민들도 함께 했습니다.


추운 날씨 때문인지, 아니면 이제는 할머니들의 낮은 목소리가 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는
까닭인지 생각보다 시위에 참가한 사람들은 적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와중에도  정기수요시위에 참가하기 위해 중국, 일본,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외국인들이 비행기를 타고 이곳까지 찾아왔습니다.


<성명서 낭독 중>

지난해 13명의 일본군위안부 희생자 할머니들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이제 남은 할머니들은 단 109명 뿐. 이 할머니들이 모두 세상을 뜨기 전에 우리 모두 힘을 모아 일본정부로부터 공식사과와 법적배상을 받아야할 것입니다.


정기수요시위가 끝나고 저는 앞으로 열과 성을 다하여 할머니들을 돕기로 굳게 마음먹었습니다. 돌아오는 길, 미국인 친구 앤써니가 그동안 일본군위안부 할머니들과 관련한 다큐멘터리를 만들어(관련기사 http://blog.daum.net/dreamdiary/6894986) 세계 사람들에게 알릴 동안 저는 무엇을 했는지 역시 반성했습니다. 부끄럽더군요. 하지만 이젠 더 이상 반성하며 부끄러워하는 사람이 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2008년 새해 목표가 새로이 세워졌지요.


마지막으로 지난 해 우리 곁을 떠난 고 김우명달 할머니, 고 김옥순 할머니, 고 문부전 할머니, 고 진경팽 할머니, 고 황순이 할머니, 고 석복달 할머니, 고 이순선 할머니, 고 최주선 할머니, 고 김기아 할머니, 고 박우득 할머니, 고 서옥득 할머니, 고 강도아 할머니, 고 오랑 할머니의 명복을 기원합니다.


할머니들이 못 이룬 모든 것들을 남아 있는 저희들이 꼭 이루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그곳에서 편히 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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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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