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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레나의 꿈의 구장/Footballers

국가대표 꿈꾸는 고아축구소년의 감동스토리

베트남의 여름 날씨는 질퍽하게 녹아내린 아이스크림을 만졌을 때의 느낌과 많이 닮았다. 기온이 높을 뿐만 아니라 습기까지 심해 그늘에 앉아 있어도 끈적끈적한 기분은 여전하다. 2004년 8월28일 베트남 호치민 탄 롱 스포츠센터 경기장 내 날씨는 더 했다. 4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그곳에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운집했기 때문이다. 2004LG컵국제친선대회 베트남국가대표팀과 한국대학선발팀 간의 결승전을 보기 위해 아침부터 모인 사람들이었다.

후반45분 전광판에 적힌 숫자는 3-4. 베트남이 앞서고 있었으니 경기장은 한바탕 축제 분위기였다. 그러나 PA중앙으로 돌파하던 배기종(前광운대)을 막으려던 수비수의 태클이 상황을 반전시켰다. 결국 염기훈(前호남대)이 왼발로 페널티킥을 성공시키며 승부를 연장으로 돌렸다. 그리고 연장 후반13분 쐐기골이 터졌다. 작은 몸집의 한 선수가 자신을 두 겹 세 겹으로 에워싸던 벽을 뚫고 결승골을 터뜨렸다. 4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선연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의 이름은 한승현. 오늘 우리가 만날 주인공의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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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는 없다
작년이요? 말도 마요. 부상을 달고 살았죠. 운동할 때마다 자꾸 다치다 보니 점점 경기에 나가는 횟수가 줄어들었어요. 선수한테 그것보다 더 힘든 게 있을까요? 축구를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어요. 모든 게 귀찮아져 마냥 손 놓고 있었는데 이우형 감독님께서 그런 저를 불러주셨어요. 참 이상한 거 있죠. 전혀 생각이 없었는데, 갑자기 이곳에서 뛰게 된다면 다시 예전의 나로 돌아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냥 마음속에서 그런 희망이 절로 생겼어요.”

여기서 예전은 그의 대학시절을 의미한다. 2006년 가을, 드래프트를 목전에 뒀을 즈음 한승현은 김신영(前한양대)과 함께 대학무대 ‘최대어’로 불렸다. 그런데 예상 밖의 소식이 들려왔다. 한승현의 울산미포조선行.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의아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는 왜 그런 선택을 하게 된 것일까.

“처음부터 프로에 못갈 것 같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항상 잘한다는 소리만 들으며 뛰었으니까요. 그런데 그때 마침 미포조선에서 드래프트 1순위 못지않은 대접을 해주겠다고 연락이 왔어요. 제 능력을 믿겠다더군요. 저를 믿겠다는데 어찌 뿌리칠 수 있겠나요. ‘그래, 나를 인정해주는 곳에서 맘껏 뛰어보자’는 생각으로 간 거죠.”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금도 후회는 없다’란다. 대학선발에서 함께 공격을 책임지던 염기훈이 신인왕을 받았을 때도 그는 가장 먼저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대학동기 김영빈이 인천Utd.에서 주전으로 나서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녀석, 진짜 잘됐네”라며 웃었다고 한다.

“대학시절 함께 뛰던 선배들, 동기들이 프로에서 잘하는 모습을 보면 가끔 부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하지만 크게 신경 쓰진 않아요. 중요한 건 ‘나를 원하는 팀에서 과연 얼마만큼 실력을 보여줄 수 있는가’ ‘내가 가진 능력을 입증할 수 있는가’ 이게 아닐까요?”

이우형 감독 또한 한승현의 의중을 읽은 듯했다. 방황하던 한승현을 고양국민은행으로 불러들이며 이 감독은 “꾸준히, 그리고 스스로를 향한 믿음만 갖고 뛰어라”는 덕담을 건넸다. 이보다 힘이 되는 영양제가 또 있을까. 한승현은 뛰다가 걷고 싶어질 때면 ‘감독님의 조언’을 떠올리며 다시 뛴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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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름은 누군가의 희망

“얼마 전 고등학교 동창회에 다녀왔어요. 갔더니 다들 너무 반가워하는 거예요. 뜻밖이었죠. 이름도 모르는 친구들이 제게 다가와서 ‘네가 우리에게 희망이야’라고 얘기하더군요. 순간 고개가 절로 숙여지더라고요. 힘들다는 이유로 운동을 그만 두려했던 철없던 제 모습이 생각났거든요.”

프로필을 보면 알겠지만 한승현은 ‘소년의 집’으로 널리 알려진 부산 알로시오 고등학교 축구부 출신이다. 그는 그곳에서 수녀님을 ‘엄마’라 부르며 자랐다. 그의 엄마는 전교생의 엄마이기도 했다.

“4살 때였나. 학교 앞에 있는 절 엄마 수녀님이 발견하셨대요. 그 뒤로 학교가 제 집이 됐죠. 그곳에서 축구를 배웠고 지금도 휴가 받을 때면 가장 먼저 가는 곳이니까 언제나 소중한 ‘나의 집’이죠.”

한승현은 그곳 아이들에게 ‘희망’같은 존재다. 축구가 좋아 택했던 친구들 중에서 입때껏 공을 차고 있는 사람은 현재 한승현이 유일하다. 그래서일까. 그들은 한승현의 오늘날에서 못다 이룬 지난 날의 꿈을 투영하는 중이다. “네가 희망이야”라는 말에는 그런 이유가 숨어 있다.

“다들 축구를 그만둬서 아쉬워요. 하지만 후원 없이 대학교에서 축구를 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에요. 당장 축구화 살 걱정부터 해야하니까요.” 한승현에게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홀로 축구를 그만두지 않는 이유는 무엇이냐고. 일말의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희망 때문에요.” 무엇에 대한 기대와 바람이냐고 다시 한번 물었다.

“제가 훌륭한 선수가 된다면 사람들은 제가 나온 학교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겠죠. 그러면 알로시오 고등학교를 한 번 더 바라보는 계기가 될 거예요. 사람들이 그곳에도 가능성을 지닌 선수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좋겠어요. 제가 그 기회를 만들어주고 싶어요.”

어쩌면 버림받았다는 피동형 문장과 함께 누군가를 원망하며 살았을지도 모를 젊은 날이다. 그러나 적어도 축구만은, 그의 삶에 한없는 능동성만을 부여했다. “11살 적 처음 축구를 시작했어요. 축구가 절 택한 게 아니라 제가 축구를 선택한 거죠. 그 덕분에 방황 없이 자랄 수 있었어요. 앞으로 고양국민은행에서도 흔들림 없이 잘하고 싶어요. 제가 받은 은혜와 감사를 고등학교 후배들에게 돌려주기 위해서라도요.”

‘내셔널리그’에서 ‘National’이 되겠다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는 법”이라는 말이 있다. 한승현은 이를 “누구에게나 기회는 온다”라고 해석한다. “고양국민은행은 가족 같은 팀이에요. 그러다 보니 전체적인 분위기도 밝고 덕분에 조직력도 타 팀에 비해 잘 다져졌어요.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이 그대로 전력으로 이어진 거죠. 못했을 때 크게 나무라거나 탓하는 사람이 없다 보니 자신감을 갖고 뛸 수 있어요. 이곳에서라면 제게 다가온 기회들을 잘 잡을 수 있을 듯해요.”

역시나 목소리에서부터 자신감이 가득 묻어 나온다. “올해가 제 축구인생에서 중요한 발판이 될 거예요. 독하게 해야죠. 남과 똑같이 하면 남 이상이 될 수 없어요. 남을 뛰어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죠.” 말을 아껴 잠시 침묵하던 그는 속내를 드러냈다.

“내셔널리그에서 ‘National’이 되고 싶어요. 그래서 꼭 태극마크를 가슴에 달래요. 내셔널리그 선수 중에서 국가대표 선수가 나오지 말라는 법도 없잖아요.” 그것이 내셔널리그에 입성하며 세운 ‘제1목표’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제2목표는? “재미있는 축구를 보여드리는 것이죠. 팬들에게 내셔널리그도 K리그 못지않게 박진감 넘치고 흥미롭다는 사실을 느끼게 해드리고 싶어요. 신나고 즐거워서 돌아서면 다시 또 보고 싶어지는 그런 경기를 보여드릴게요. 그러니 많은 분들이 경기장으로 발걸음 하셨으면 좋겠네요.”


누군가는 아무 것도 없다 말했지만 스스로는 모든 것을 다 가졌다고 생각했다. 축구화가 없으면 운동화를 신고 뛰면 된다고 다짐했다. 왜 내셔널리그로 가느냐는 지인들의 물음에는 National이 되고 싶은 마음 때문이라 답했다. 희망의 존재가 되고픈 소년의 꿈은 그렇게 내셔널리그와 같은 키로 자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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