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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레나의 꿈의 구장/Footballers

청각장애 기자, '외눈'수비수 곽태휘를 만나다

지난 2월, 축구라면 월드컵 즈음에나 관심 갖던 지인들에게서 꽤나 많은 질문을 받아야만했다. 스포츠 뉴스에 나온 저 잘생긴 선수는 누구냐가 주 관심사였는데, 화면 속 얼굴을 보아하니 곽태휘였다.

시인 바이런의 말처럼, 그는 자고 일어나보니 유명해져있었다. 2008동아시아연맹선수권 중국전에서 터뜨린 역전골 덕이었다. 일단, 당시 터뜨린 역전골로 대 중국전 30년 무패(16승11무) 기록을 잇는데 일조한 덕도 컸으나 그보다 더 큰 이유가 따로 있었다.




무엇보다, 그것은 개인적으로 곽태휘를 꼭 만날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였고 관련된 사연을 이제 소개하련다.

곽태휘가 고등학교 3학년 진급을 앞둔, 2월의 어느 날이었다. 당시 훈련 도중 상대 수비수가 찬 공이 곽태휘의 얼굴을 강타했는데, 순간 번쩍할 정도로 꽤나 큰 충격이었다. 설상가상 공은 급회전하며 눈을 눌렀는데 그 때문에 망막이 찢어지고 말았다. 다음날 전안방출혈 증세로 근처 대학병원에서 망막박리수술을 받았지만 그의 시력은 끝내 회복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도 곽태휘의 왼쪽 눈은 대략적인, 그러니까 뿌연 윤곽들로 가득 찬 세상만 보여줄 뿐이다.

“처음엔 많이 불편했어요. 아무래도 예전과 달리 원근감이이나 입체감이 떨어지니까요. 그렇지만 이젠 괜찮아요. 극복했습니다.”

참으로 담담히 말하던 곽태휘에게, 나 역시 한쪽으로만 세상의 소리를 듣는다는 이야기를 넌지시 건넸다. 당신은 극복했다 말하지만, 실제론 극복하기 위해 지금도 노력 중이란 사실을 알고 있다며. 어쩜 그것은 나의 이야기일 뿐 아니라 곽태휘, 더 나아가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또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 맞아요. 이젠 어느 정도 익숙해진 것 같지만 여전히 햇볕이 세게 비춘다거나 야간조명을 바라볼 때면 원근감을 맞추기가 힘들어요. 그리고 오른쪽 눈만 사용하다보니 자꾸 시력이 떨어지고 있어요. 그 때문에 병원에서는 운전도 하지 말라고 권고했어요. 내심 ‘이렇게 오른쪽 시력마저 나빠지다 보면 나중에 오른쪽 눈으로 생활하는 것 마저 힘들어지는 게 아닐까’하는 걱정이 들더라고요.”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순간 울컥 감정이 밀려와 눈물이 쏟아질 뻔 했다. 왼쪽 귀로만 생활하는 나 역시 그와 비슷한 고민을 하던 터였기 때문이다. 만약 성한 왼쪽 귀의 청력마저 떨어진다면 기자생활을 할 수 있을까. 경기 종료 후 시끄러운 운동장에서 감독님과 선수들의 멘트를 딸 수 있을까. 그리고 그 반대편에서 곽태휘는 오른쪽 눈의 시력마저 떨어진다면 선수생활을 할 수 있을까. 경기 종료 후 날 반기는 팬들과 몰려오는 기자들의 모습을 볼 수 있을까, 라는, 어찌 보면 같은 고민을, 우리는 그렇게 같은 장소에서 하고 있었다.

내가 늘 선수나 감독 오른쪽에 서 있는 이유다. 그래야만 성한 왼쪽 귀로 그들의 목소리를 온전히 들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런 고민엔 답도 없잖아요. 그래서 ‘왜 자꾸 나쁜 쪽으로만 생각하지? 좋아질 거라고만 생각하자’고 다짐했죠. 그랬더니 막막했던 마음이 한결 편안해지더라고요. 그때 퍼뜩 깨달았죠. 어떤 인생을 사느냐는 다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사실을요. 혼자만 힘들다고 생각하면 안돼요. 누구에게나 시련은 찾아오는 법이니까요. 도망가기보단, 넘어지더라도 ‘나는 할 수 있다’고 믿고 일어서는 자세를 갖춰야겠죠.”
17살 늦은 나이에 대구공고 축구부 문을 두드렸을 때, 감독은 그에게 말했다. “지금 와서 축구를 하겠다고? 너무 늦었는걸. 졸업할 때까지 1게임도 못 뛸지 모를 텐데, 괜찮겠어? 그래도 하겠어?” 만약, 그때 ‘너무 늦었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발걸음을 돌렸다면 지금의 곽태휘는 없었을 것이다. 망막 부상 이후 “축구선수로 대성하기는 힘들 것”이라는 세간의 목소리에 흔들렸다면, K리그와 대표팀을 누비는 곽태휘의 모습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오늘의 곽태휘를 만든 8할은, 역경에 굴하지 않던 ‘긍정성’에 있었다.

헤어지기 전 곽태휘는 당부했다. 자꾸 안된다, 안된다 생각하면 더 안되게 될 수밖에 없다고, 그러니 이제는 된다, 된다 하며 될 수밖에 없게 만들라고. 그렇게 말하며 그는 웃었다.

그리고...

그날로부터 보름 후인 지난 11월1일 곽태휘는 수원과의 경기 도중 입은 인대 부상으로 또다시 수술대에 올라가게 됐다. 현장에서 그 모습을 지켜봤던 나로서는, 그의 가족 못지 않게 심히 마음이 아프다 .하나 작금의 시련을 슬기롭게 이겨낼 것이라 생각하며 애써 위안하련다. 곽태휘, 그는 성치 않는 몸으로도 최고의 자리에 우뚝 선 슈퍼맨이니까. 그 이름 석자가 그대로 희망의 증거니까.

물론 이 글을 쓰는 나역시 최근 오른쪽 청력이 곱절로 떨어져 이제는 서포터스의 큰 함성 정도밖에 들을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됐지만, 그도 또 나도 지금의 시련을 슬기롭게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믿음은 곧 희망이며, 생을 일으킬 수 있는 근원이니까.

이렇듯 내게 한없는 용기를 준 곽태휘를 위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앞으로 있을 재활의 시간을 잘 버텨내길 바란다는 기도일 뿐. 그리하여 누구보다 성공적인 복귀전을 치렀으면 좋겠다는 마음일 뿐. 그러니 그날이 올 때까지 이곳 경기장에 앉아, 누구보다 가장 강했던 '슈퍼맨' 곽태휘를 기억하며 글을 쓰련다.


곽태휘에게 건투를. 그리고 희망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