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헬레나의 꿈의 구장/Footballers

대표팀 수비불안, 선수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시나브로. 순 우리말로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조금씩’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정수를 만나러 가는 길, 내내 음표처럼 머릿속에 떠오르던 단어였다. 물론 이유는 간단했다. 이보다 더 그를 절묘히 설명할 수 있는 단어는 없었으니까.

되짚어보면 2002년 경희대 졸업과 동시에 안양LG에 입단한 그에게 관심을 갖던 이는 없었던 것 같다. 아니, 없었다. 고교시절 청소년대표팀에 잠시 몸담은 적이 있다만 그렇다고 꾸준히 엘리트 코스를 밟은 선수는 아니었기에 당연한 결과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정수는 조금씩 발화했고 어느새 K리그를 넘어 국가대표까지 접수했다. 하나 최근엔 대표선발의 기쁨을 누릴 새도 없는 듯했다. 대표팀 수비불안이 때 아닌 화두로 등장해, 관련된 당사자로서 이런 저런 고민이 많아 보였기 때문이다. 이정수를 만났다. 섭씨 30도를 넘나드는 기온보다 더 뜨거운 이야기들이 오간 시간이었다.

다시, 태극마크와 만나다
“처음 대표팀에 뽑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많이 놀랐습니다. 지난 해 5월 부상을 입는 바람에 8개월가량 쉬었거든요. 오랫동안 경기장에서 얼굴이 보이지 않자 심지어 다른 팀 선수들이 ‘이정수 혹시 은퇴한 거냐’고 저희 팀 선수들에게 물어봤을 정도였죠. 그만큼 공백이 길었어요. 다행히 올 시즌에는 개막전을 시작으로 꾸준히 경기에 나가고 있지만 대표팀 발탁까진 생각해보지 않았어요. 리그 적응이 먼저였거든요.”

그러나 그곳엔 분명 그의 이름이 있었다. 2010월드컵 3차예선 북한과의 1차전에 나설 24명 엔트리 명단. 그 안엔 이정수, 그의 이름도 있었다. 무려 3년 만에 승선한 태극호였다. 덧붙이자면 이정수는 2005년 7월 동아시아선수권을 앞두고 대표팀에 전격 발탁된 바 있다. 안타깝게도 당시 허벅지 근육이 파열되는 부상으로 중도하차했지만 말이다.

“아쉬운 전적이 있기에 마음을 비운 채 대표팀에 들어갔어요. 그저 뽑혔다는 사실에만 의의를 뒀죠. 당연히 곽태휘 선수가 뛸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발목 통증을 호소하며 못 뛰겠다고 하더군요. 그로 인해 제게 기회가 주어졌고 다행히도 ‘제 것’으로 만들며 잘 잡은 것 같습니다.”

북한전 당시 이정수에게 내려진 특명은 바로 ‘정대세를 잡아라’. 이정수는 A매치 데뷔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침착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몫을 해냈다. 결과는 0-0 무승부. ‘인민루니’ 정대세는 이정수라는 ‘벽’에 막혀 단 1골도 성공시키지 못했다. 이정수 또한 “실점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만족한다”며 자신의 데뷔전에 평균 이상의 점수를 주었다. 일련의 상황 속에서 그에게 5월31일 홈에서 열린 요르단전 출격명령이 떨어진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이었다.
“기대가 컸지만 결과는 아쉽습니다. 전반까지 잘하다 후반에 내리 2골을 내줬으니까요. 솔직히 말하면 2골 다 먹지 않아도 될 골이었습니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제 잘못도 있었고요. 그날따라 귀신이라도 씌었는지 자세가 한쪽으로 쏠리며 돌아가는 바람에 상대 선수를 못 봤어요. 커버링도 늦었고요. 요르단에게 동점골을 허용하던 순간이 너무 아쉬워 잠도 못 이룬 채 밤새 그 장면만 100번 넘게 본 것 같아요.”

FIFA랭킹 114위 요르단과 2-2 무승부로 끝난 결과에 대해, 이정수는 굳이 변명하지 않겠다고 했다. 외려 골키퍼 김용대에게만 모든 책임이 전가된 것만 같아 미안하다고 털어놨다. “수비수들끼리 얘기를 많이 해야만 했어요. (이)영표 형이 ‘정수야, 저기로 가지 마라’고 한마디만 해줬다면 먹히지 않았을 골이었습니다. 커뮤니케이션의 부재가 낳은 안타까운 결과죠.”

리더가 없다
대표팀 수비수로서, 현 대표팀 수비진이 직면한 문제들에 대한 이정수의 솔직한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허정무 감독님께선 풀백 1명이 오버래핑을 할 때 나머지 3명은 그대로 자리를 지켜야한다고 말씀하세요. 그런데 대표팀 소집 초반엔 양쪽 풀백이 모두 올라가는 경우가 종종 있었어요. 그럼 중앙수비수 2명만 남게 되고 위험한 상황이 발생하게 되죠. 그래서 영표 형에게 내려와 달라는 얘기를 많이 했어요. 아무래도 포백으로 나설 때는 스리백일 때보다 간격이 더 잘 맞아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비수들간의 의사소통이 중요한 거죠.”

이정수는 짧게 한숨을 내쉰 다음 다시 말을 이었다. “저도 수원에선 풀백을 볼 때가 있기 때문에 측면 수비수들이 어떻게 움직여야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풀백들이 공격에만 치중하고 수비는 소홀히 할 때면 솔직히 화가 납니다. 자신이 해야 할 본분을 다하지 않은 것이니까요. 물론 수원에 있을 땐 나서서 윽박지르고 조율했지만 대표팀에서는 그렇게 하기가 어렵네요. 다들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혹시라도 제가 하는 말과 행동들이 자존심을 건드릴 수도 있으니까요. 그렇다 보니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어요.”

그 때문일까. 허정무 감독 체제로 대표팀이 개편된 지도 벌써 6개월이 넘었건만 여전히 수비라인을 이끌 리더는 보이지 않는다. 이쯤 되면 후방에서 라인을 조율할 지휘자가 등장할 법도 한데 아직 소식조차 없다. 그래서 좀 더 직설적인 질문을 던져보기로 했다. 그 역할을 당신이 해볼 생각은 없는가?

“제가 대표팀 수비수들 중에선 나이도, K리그 경험도 제일 많아요. 어느 정도 리드해야한다는 생각은 늘 갖고 있어요. 그렇지만 전 이제 막 대표팀에 들어왔잖아요. 그 때문에 A매치 경험이 제일 적죠. 대표팀 경험이 풍부하지 못하다보니 위축되는 부분도 없지 않아요. 좀 더 경험도 쌓고 자신감도 붙으면 선수들한테 이렇게 하자고 얘기할 수 있겠지만, 글쎄요. 아직은......”

이내 말끝이 흐려졌다. 아마도, 스스로에게 아쉬운 마음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짐작대로 이정수는 본프레레 감독 시절 부상으로 대표팀에서 낙마한 이야기를 꺼냈다. “2005년 당시 다치지 않고 끝까지 대표팀에 있었다면 지금보다 더 큰 선수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해요. 그랬다면 지금 대표팀 내 고참으로서 수비진을 잘 통솔할 수 있었겠죠. 그때 부상으로 탈락한 게 지금도 두고 두고 아쉽네요.”

희망은 있다
따지고 보면 아쉽고 안타까운 것이 오직 그 뿐이겠는가. “쓸 만한 중앙수비수가 없다”던 누군가의 일침도, 언론과 팬들의 뭇매도 분명 그의 어깨 위엔 보이지 않는 짐처럼 놓여 있을 것이다. “그래서 더 허정무 감독님께서 선수들에게 자신감을 좀 더 많이 심어주셨으면 좋겠어요. 아쉬운 감이 없지 않아 있어요. 아직은 부족하겠지만 그래도 좋은 부분이 있다면 칭찬해주시고 기(氣)도 살려주셨으면 해요. 그럼 저희 수비수들이 힘이 나서, 기대에 부흥하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잘할텐데 말이죠.”

어려운 이야기였을텐데도 이정수는 참으로 담담하게 풀어냈다. 아울러 중앙수비수 논란과 관련해서도 동의할 수 없다며 자신만의 의견을 피력했다. “이 부분은 다른 선수들과도 얘기해 봤는데요, K리그 중앙수비수들이 특별히 실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렇다 할 중앙수비자원이 부족하다는 이야기에도 동의할 수 없어요. 대표팀 수비수들이 수차례 뒷공간을 내줬다는 지적도 있었는데요, 유로2008을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빅클럽에서 뛰는 수비수들도 그런 공간을 내줄 수밖에 없습니다. 공격수들이 먼저 움직이고 수비수들은 따라가는 입장이다 보니 그런 상황이 발생하죠. 세상에서 완벽한 축구란 존재하지 않아요. 다만 실수를 줄이려는 노력만 있을 뿐이죠.”

그렇다면 기대 이하의 수비 조직력과 관련해선 어떤 이야기를 들려 줄 수 있을까. “풀어야만 할 숙제죠. 그렇지만 다들 아시지 않나요? 그동안 대표팀이 상대 팀에 맞춰 스리백과 포백을 혼용하는 동안 같은 선수들이 꾸준히 경기에 나선 적이 없다는 사실 말입니다. 수원이나 성남의 포백라인이 K리그에서 최고라 평가받는 까닭은 그만큼 오랜 시간 발을 맞췄기 때문이에요. 이제는 눈빛 하나만으로도 서로의 의견을 알 수 있을 정도로 환상의 호흡을 자랑하죠. 일단은 대표팀 수비수들에게도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고 봐요. 지금보다 좀 더 오래 훈련을 하다보면 유기적으로 호흡이 잘 맞춰질 거라고 봅니다. 그렇게 되면 경기력은 자연스레 따라오겠죠.”

약속된 시간도 어느덧 끝나가고 있었지만 ‘열혈남아’ 이정수의 이야기 보따리는 좀처럼 바닥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만큼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수비수로서 고민이 많았음이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그는 “10번 잘해도 1번 못하면 욕먹을 수밖에 없는 게 수비수의 숙명 아니겠냐”며 옅게 웃었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학원축구를 돌아보면 어린 선수들이 수비수를 기피하는 경향이 크다고 하더군요. 이를 보고 언론에서는 전문수비수 양성이 시급하다고 하는데요, 다들 너무 단편적으로만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공격수 출신 수비수로서 말씀드리자면, 저 같은 ‘보직변경’이 수비수로 살아가는데 있어 더 도움이 되는 순간도 많습니다. 아무래도 상대 공격수의 움직임을 읽는 것도 수월하거니와 패싱력이나 기동력 또한 전문수비수 출신보다 뛰어날 수밖에 없으니까요.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좀 더 넓게 보자는 겁니다. K리그가 제대로 된 전문수비수들을 키워내지 못했다며 위기론을 외치시는 분들이 있는 것도 압니다. 물론 위기로 느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 반대쪽에서는 위기를 기회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선수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주셨으면 합니다. 좀 더 따뜻한 시선으로 지켜봐주세요.”

들어가기에 앞서 이정수를 가리켜 ‘시나브로’라는 단어와 참 잘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썼었다. 그와의 인터뷰를 마치며 ‘시나브로’는 이정수 뿐 아니라, K리그 판을 움직이는 거개 수비수들 앞에 수식해야할 단어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그랬다. 언뜻 정체하고 있는 듯 보였지만 실제론 모두 계단을 밟고 있었으므로. 단지 계단과 계단 사이의 거리가 멀 뿐 그들 모두는 전진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정수는, “희망은 있다”라고 말했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