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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레나의 꿈의 구장/World Football

축구계의 '원더걸스' U-17여자대표팀

조직력의 한계를 보여주며 꼴찌로 마친 동아시아대회, 5년 만에 일본을 꺾었지만 예선탈락의 고배를 마신 아시안컵, 세계정상권과의 격차를 다시 확인한 피스퀸컵까지. 2008년 들어 여자대표팀은 일련의 대회들을 통해 ‘발전의 가능성’을 보았지만 아쉽게도 눈에 띄는 성적은 거두지 못했다.  한국여자축구를 향해 진한 아쉬움이 남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 낙담하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다.


오는 10월28일 뉴질랜드에서 개막하는 U-17여자월드컵에 한국의 낭자들이 참가하기 때문이다. “언니들이 못 넘은 세계의 벽을 우리가 넘겠다!” 지금 열여섯 축구소녀들이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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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이 바로 원더걸스
7월10일 오전 11시30분 파주NFC. 그간 베이징올림픽을 준비하던 남자 선수들과 취재 기자들로 붐볐던 이곳에 다소 한적한 공기가 감돌았다. 올림픽대표팀 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K리그 소속 선수들이 주말경기 출전을 위해 잠시 클럽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적막함을 깬 건 멀리서 들려오던 기합 섞인 목소리였다. 발걸음을 돌려 도착한 청운구장에는 파주NFC에서 종종 마주쳤던 앳된 얼굴들이 모여 있었다. 바로 트레이닝센터에서 여름강화훈련 중이던 U-17여자대표팀 선수들이었다. U-17여자대표팀 선수들은 벌써 10일째 파주NFC에 있었지만 올림픽대표팀과 같은 시기에 훈련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었다. 그만큼 언론의 관심은 오로지 올림픽대표팀만을 향해 있었다.

“괜찮아요. 저희는 잘하고 있으니까요. 10월에 열린 U-17여자월드컵에서도 좋은 성적 거둘 거라고 믿어요.” U-17대표팀 주장을 맡고 있는 지소연의 당찬 각오다. 올림픽대표팀만을 향한 스포트라이트를 바라보며 풀이 죽었을 법도 한데 외려 당당한 모습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축구를 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냥 열심히만 할 생각이에요.” 이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U-17여자대표팀 김용호 감독은 “U-16아시아선수권 이후 자부심과 자신감이 부쩍 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해 3월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U-16아시아선수권에서 한국 U-16여자대표팀은 3위를 기록하며 당당히 세계대회 출전 티켓을 땄다. 각급 여자대표팀들이 부진을 면치 못하던 상황에서 얻은 성과였기에 더욱 값졌고 그래서 더 빛났다. 당시 한국은 4강에서 북한에게 1-4로 패하며 3·4위 결정전을 치르게 됐다. 한데 문제는 상대가 중국이라는 사실에 있었다. 이미 조별예선에서 1-3으로 충격패를 당한 한국이기에 “심리적으로 위축 됐을 것”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열여섯 태극낭자들은 중국에게 ‘2번 질수 없다’는 각오로 뛰었고 선제골을 허용했지만 동점골로 승부를 원점으로 만드는 드라마를 만들었다. 연장전에 이어 승부차기 상황까지 갔지만 선수들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투혼’으로 결국 승리(4PK2)를 낚을 수 있었다. 2008베이징올림픽 본선 진출 좌절, 청소년대표 김지수 선수 사망, 최추경 前대교 감독 사망 등 우울한 소식들만 이어졌던 여자축구계에 희망을 불어넣은 그녀들은 진정 ‘원더걸스(놀라운 소녀들)’였다.

반짝반짝 빛나는
현 U-17여자대표팀은 여자축구계의 ‘황금세대’로 불린다. 일단 스타급 선수 몇 명이 팀 전체 판을 지배하는 기존 여자축구 틀을 대대적으로 깼다는 사실이 고무적이다. 이에 대해 김용호 감독은 “포지션 별로 실력이 비슷비슷합니다. 한 사람이 중심이 될 수 없죠. 철저히 팀 중심으로 움직이라고 가르치고 있는데, 이를 잘 받아들인 덕도 있는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최연소 A매치(15세 8개월)기록을 갖고 있는 ‘탈고교급 스타’ 지소연을 비롯해 골잡이 ‘작은’ 박희영과 ‘여자 홍명보’ 신민아 등 스쿼드를 메우고 있는 선수들 사이에서 실력 차이란 ‘대동소이’할 뿐이다. 덕분에 조직력 하나만은 역대 최고라는 호평도 자자하다. 이미 지난 해 2000시드니올림픽 잉여금으로 개최된 호주 AYOF대회에서 일본 중국 호주 등 여자 축구 강호들을 제치고 우승하며 그 위용을 과시한 바 있다.

덕분에 선수단을 향한 지원도 향상된 실력에 발 맞춰 체계적으로 변했다. U-17여자대표팀은 국가대표팀도 누리지 못한 해외전지훈련을 다녀오는 등 ‘최고 대우’를 받는 중이다. 2007년 11월에는 U-17여자월드컵 개최지인 뉴질랜드로 3주간 전지훈련을 다녀왔으며 오는 8월에는 덴마크와 독일에서 유럽전지훈련을 가질 예정이다. 현지에서 덴마크 U-17여자대표팀 및 독일 여자클럽들과 평가전을 치를 계획도 세워놨다.

여기엔 축구협회와 여자축구연맹, 각급 대표팀 및 일선 학교 지도자들의 전폭적인 지원과 협조 또한 큰 역할을 했다. 학교들은 최대한 선수차출에 협조하며 ‘대표 선수 만들기’에 온 힘을 쏟았으며, 협회 및 대표팀 지도자들은 지소연 여민지 등의 스타급 선수들이 U-17대표팀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U-19대표팀과 성인대표팀 차출을 자제시키는 등 ‘지극정성’을 쏟았다. 관련해 여자축구연맹 유영운 사무국장은 “U-17대표팀이 처음 참가하는 FIFA대회이니만큼 많은 부분에서 철저히 준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난관은 있지만
하지만 호사다마라 했던가. ‘겁 없는 10대들’의 앞길에도 암초들이 하나 둘 씩 등장했다. 가장 먼저 닥친 것이 바로 부상 악령. 만 13살의 나이로 U-19여자대표팀에 뽑히며 주목받기 시작한 ‘여자 박주영’ 여민지(함성중)가 부상으로 팀에서 이탈하고 말았다. 여민지는 지난 4월2일 전남 해남에서 열린 춘계여자연맹전 삼례여중과의 경기도중 상대 선수와 부딪히며 ‘오른쪽 전방십자인대 파열’이라는 부상을 당하고 말았다. 재활에만 6개월의 시간이 소요되는 중상이었다. 다행히 수술 경과가 좋아 착실히 재활 중이라고 하지만 U-17여자월드컵이 열리는 10월까지 몸 상태가 완벽히 회복될 지는 아직 미지수다. 지소연과 함께 ‘초고교급’ 선수로 인정받던 여민지의 부재는 여러모로 U-17여자대표팀에 타격일 수밖에 없다.

빡빡한 일정도 걸림돌이다. 오는 8월 덴마크와 독일에서 진행되는 유럽전지훈련이 끝나면 선수들은 학교로 돌아가 10월초 광양에서 열리는 전국체전을 준비하게 된다. 이후 체전이 끝나면 대표팀은 다시 소집돼 국내에서 일주일 가량 훈련을 치른 뒤 격전지 뉴질랜드로 입성할 계획이다. 문제는 U-17여자대표팀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동산정보고 선수들이 전국체전에서 서울시 대표로 참가가 유력하다는 사실이다. 대회 참가로 인한 선수들의 체력 저하나 부상을 둘러싼 부분들이 다소 염려스럽다.

그러나 무엇보다 걱정스러운 부분은 바로 U-17여자월드컵 조별예선에서 만날 상대들이다. 이번 U-17여자월드컵에서 한국은 브라질 잉글랜드 나이지리아와 한 조에 묶였다. 여자축구의 전력이 남자축구와 궤를 같이 하는 것은 아니지만 축구 인프라가 체계적으로 갖춰진 전통의 축구 강호들과 만난다는 사실은 아무래도 부담일 수밖에 없다. 김용호 감독 역시 “브라질 잉글랜드 모두 만만치 않은 팀이다. 특히 나이지리아는 전력자체가 파악되지 않았다”며 어려움을 토로했다.

열매를 얻기 위하여
이렇듯 험난한 암초밭을 뚫고 갈 U-17여자대표팀이지만 그들에게는 ‘정신력’이라는 강력한 무기가 있다. 언제까지 ‘정신력’만 강조할 셈이냐는 의문도 들겠지만 여자대표팀, 특히 청소년선수들에겐 실로 중요한 부분일 수밖에 없다. “테크닉도 중요하지만 먼저 볼을 다루는 자세와 마음가짐을 바로잡는 것이 중요하다”는 김용호 감독의 말에서 알 수 있듯, U-17여자대표팀 훈련은 기본기와 정신력에 초점이 맞춰 있다.

최근 여자대표팀이 국제대회에서 실패를 반복하고 있는 까닭은, 바로 ”목표 의식이 사라졌기 때문”이라는 김 감독의 진단 때문이다. 김 감독은 “실전보다 중요한 것이 정신력의 강화”라며 “다음 단계로 발전이 이뤄지기 위해선 왜 이런 훈련을 해야 하는지 스스로 깨달아아 한다”고 강조했다. 단순한 볼 터치 훈련을 하더라도 이 훈련의 ‘목적’이 무엇인지 선수들 스스로 깨닫도록 유도하는 것이 바로 핵심이다.

안팎의 적극적인 지원, 체계적인 훈련, 뚜렷한 목표의식 등이 합쳐진 U-17여자대표팀의 여름은 더욱 뜨겁다.

지금의 좋은 모습이 이 뜨거운 여름을 지나 10월까지 잘 이어진다면 U-17여자대표팀은 첫 출전하는 세계대회에서 필경 낭보를 전해줄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들에겐 진정 ‘결실의 계절’로 남을 것이다. 오는 10월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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