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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레나의 꿈의 구장/World Football

유로2008 '죽음의 조' 다크호스는 루마니아

8년 전의 영광
유로2008 본선 조 추첨이 끝나자 C조에 편성된 감독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원치 않은 결과”라 며 불편한 심기를 잔뜩 드러냈다. 그런데 유독 루마니아 대표팀 사령탑 빅토르 피투르카만은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우리에겐 아주 특별한 기회가 될 것이다. 루마니아가 8강에 진출하는 팀이 되지 말란 법도 없지 않은가?”



물론 프랑스, 이탈리아, 네덜란드라는 유럽의 거물들과 한 배를 탄 입장에서 마냥 기죽을 수는 없으니 짐짓 ‘태연한 척’ 연기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실상 루마니아가 그간 유럽선수권에서 보여준 성적은 신통찮다. 유럽선수권에 처음 얼굴을 내민 시기도 1984년으로 상당히 늦은 편이다. 처음으로 참가한 유로84에서 미풍 넘어 급풍을 꿈꿨지만 스페인과 비긴 후(1-1) 서독(1-2)과 포르투갈(0-1)에 연패하며 유럽 무대의 장벽을 실감했다. 이후 1996년 다시 한 번 본선 진출에 성공했지만 단 1승도 거두지 못한 채 짐을 쌌다.

하지만 4년 뒤는 달랐다. 루마니아가 준비한 시나리오의 제목은 ‘반전의 미학’. 유로2000을 앞두고 전문가들은 잉글랜드, 독일, 포르투갈와 한 조에 속한 루마니아가 “가장 먼저 짐가방을 들 것”이라 예상했다. 조별예선 첫 경기에서 ‘디펜딩 챔프’ 독일과 무승부(1-1)를 기록했지만 대부분 ‘찻잔 속의 돌풍’으로만 여겼다. 이어 포르투갈에 0-1로 패하자 탈락은 어느 정도 기정사실화 됐다. 예선 마지막 상대는 잉글랜드. 루마니아의 ‘반전 드라마’는 바로 이 경기에서 펼쳐진다. 루마니아는 2-2 접전 상황에서 후반44분 가네아의 극적인 페널티킥으로 8강 티켓을 따내고 만다. ‘유럽선수권 8강’은 대회 참가 이래 루마니아가 세운 가장 높은 성적이다.

유로2000은 단순히 ‘좋은 성적’ 이상의 의미를 지닌 대회였다. 잉글랜드전에서 신예 아드리안 무투는 경고누적으로 벤치를 지킨 게오르그 하지를 대신해 선발출장했다. 8강 이탈리아전에서도 무투는 풀타임을 소화하며 루마니아의 ‘새얼굴’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요컨대 유로2000이 루마니아에게 특별했던 까닭은 ‘The King’ 하지와 작별하며 ‘New hero’ 무투를 맞이한, 그리하여 자연스레 ‘세대교체’를 진행했다는 사실에 있다.

공포의 쌍두마차
유로2008 조별예선에서 루마니아는 조1위로 가장 먼저 본선행 테이프를 끊었다. 이 같은 호성적 뒤에 무투와 키부라는 ‘창’과 ‘방패’의 활약이 숨어있다. 그 중 무투의 재기가 눈길을 끈다. 2004년 ‘코카인 파동’으로 첼시를 떠난 무투는 유벤투스로 이적, 세리에A에서 새 출발을 다짐했다. 2006-07시즌 피오렌티나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이후 지금까지 총 33골(61경기)을 터뜨리며 ‘돌아온 골잡이’의 면모를 아낌없이 드러내고 있는 중이다. 가히 괄목할만한 ‘부활의 날갯짓’이다.

이러한 무투의 회생은 곧 ‘A대표팀 활약’이라는 연장선 위에 놓여졌다. 무투는 조별예선에서 4골(9경기)을 성공시키며 루마니아를 조1위로 이끌었다. 전방에서 무투의 화력이 눈에 띄었다면 후방에선 키부의 묵묵한 활약이 돋보였다. 키부는 루마니아가 네덜란드(5실점)에 이어 최소실점(7골)을 기록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2번에 걸친 네덜란드와의 대결에서 훈텔라르(1차전) 반 니스텔루이(2차전) 등 오렌지 군단 주포들에게 단 1골도 허용하지 않았다는 내용 안에 키부의 노고가 깃들어있다.

이처럼 유로2000 당시 전도유망했던, 그러나 아직은 ‘샛별’에 불과했던 이들이 이제 루마니아를 대표하는 ‘쌍두마차’로 자리매김했다. 그리고 이러한 ‘쌍두마차’ 무투와 키부의 질주 뒤에는 ‘마부’ 피투르카 감독의 ‘공’이 숨어있다. 1998년 루마니아 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한 뒤 유로2000 예선을 가뿐히 통과했던 그는 다시 한번 고국에 유럽선수권 본선행 티켓을 선물하며 ‘루마니아의 명장’으로 거듭났다.

AGAIN 2000
“축구는 팀 스포츠다. 고로 한 명의 선수에게만 의지해선 안 된다.” 피투르카 감독의 지도철학이다. 즉 “조직력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물론 예선기간 중 무투가 보여준 활약은 단연 ‘백미’였으나 피투르카 감독은 “현 루마니아 대표팀을 ‘무투의 팀’으로 만들 생각은 없다”고 딱 잘라서 말했다. 실제로 무투의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피투르카 감독은 가능성 높은 신예들에게 많은 기회를 주었다.

가까운 예로 3월26일 러시아와의 평가전을 들 수 있겠다. 루마니아는 이날 치프리안 마리차, 다니엘 니쿨라에, 마리우스 니쿨라에의 연속골로 3-0 승리를 거뒀다. 흥미로운 사실은 득점자 모두 피투르카 감독 밑에서 새롭게 중용되며 성장한 ‘젊은 공격수’라는 것이다. 선수들은 결국 기회를 제공한 감독에게 경기력으로 보답을 한 셈이다. 그중에서도 마리차가 가장 시선을 잡는다. 공격수들 중 나이(1985년生)가 가장 어림에도 불구하고 예선에서 무투(4골)를 제치고 팀 내 최다 골(5골)을 기록했다. 덕분에 주전 전망이 밝은 상황이다.


피투르카 감독이 2006년 8월부터 2008년 3월까지 대표팀에 불러들여 살펴 본 선수는 총 39명. 유로2008에 나서는 전사들은 그중에서 고르고 또 고른 ‘보석’들이다. 그 보석들을 이리저리 수시로 조합해보면서 닦은 조직력이 과연 ‘죽음의 조’에서도 빛을 발할 수 있을 지는 좀 더 지켜봐야하겠다. 일단 주장 키부를 비롯한 루마니아 대표팀 선수들은 “팬들은 우리를 자랑스럽게 생각할 것”이라며 자신 있는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