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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레나의 꿈의 구장/Footballers

요르단전에서 만난 희망, 이청용 선수

2010월드컵 아시아 지역 3차 예선 요르단과의 경기 전날 우리 대표팀은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마지막 연습훈련을 가졌습니다. 경기장에 들어서는 이청용 선수에게 “내일 좋은 일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인사말을 건넸습니다. 그는 “저도 좋은 일 있었으면 좋겠어요”라는 말로 화답했습니다. 여기서 좋은 일이란 바로 ‘요르단전 출격명령’을 뜻합니다.



그간 대표팀 부동의 오른쪽 날개는 프리미어리거 설기현 선수였습니다. 하지만 이번 대표팀 소집훈련 전부터 언론에서는 설기현 선수의 경기력 저하에 의문을 던져왔습니다. 지난 1월 이후로 설기현 선수가 소속팀 풀럼에서 경기에 나서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소집 첫날 가진 국민은행과의 연습경기에서 여실히 드러났습니다. 설기현 선수는 2퀴터와 3쿼터 연이어 뛰었지만 움직임은 예전과 달리 날카롭지 못했으며 특유의 돌파 역시 보이지 않았습니다. 3쿼터 말미에는 이런 자신의 모습이 답답했는지 소매까지 걷어 올린 채 짧은 탄성을 뱉으며 뛰었지요.

물론 그날 이청용 선수 또한 크게 도드라진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했습니다. 평소 리그에서 보여주던 모습만 못했다는 표현이 더 맞겠네요. “국민은행과의 연습경기가 중요할 것 같으므로 잘하고 싶다”고 말했지만 스스로의 발언에 반한 경기력 때문인지 조금은 실망한 듯 한 얼굴이었습니다. 1쿼터를 마치고 선수들은 둥글게 앉은 상태에서 허 감독님의 이야기를 들었죠. 그 짧은 시간 내내 이청용 선수는 고개를 숙인 채 한숨을 내쉬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설기현 선수가 요르단전까지 경기력을 회복하기란 어려운 듯 보였습니다. 시간이 짧았기 때문이죠. 그 때문에 조심스럽게 이청용 선수의 선발이 점쳐지고 있었습니다. 분위기도 그런 쪽으로 흘러가는 듯 한 모습이라 부러 이청용 선수에게 좋은 일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덕담을 건넸던 것이지요. 평소 자신의 감정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은 이청용 선수인지라 티는 내지 않았으나 짧게나마 지은 미소에서 저는 기대감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기대하지 않았다면 그는 절대로 웃지 않았을 테니까요.

경기 당일 날 엘리베이터를 타고 기자석으로 이동하려는데 후배 기자가 제게 말해줬습니다. “이청용 선수가 선발 명단에 들었어요.” 설마했는데 이렇게나 빨리 그의 A매치 데뷔전을 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고백하건데, 그는 제가 무척이나 특별한 선수였습니다. 저의 기자 데뷔전과 그의 프로 데뷔전이 같았기 때문이죠.

처음 기자증을 갖고 프로 경기를 취재하러 갔던 그날, 그러니까 2006년 3월 13일, 그는 수원과의 원정 경기에서 프로 데뷔전을 치렀습니다. 그는 슈팅 하나도 기록하지 못한 채 팀 내 ‘최다 파울자’로 이름을 올리며 경기를 마쳐야만 했습니다. 경고까지 하나 받으면서 말이죠. 이렇게나 파울이 많았던 까닭은 그만큼 긴장이 컸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이렇게 담담히 그의 데뷔전 모습을 적어 내려가고 있는 저 역시 그날의 기억으로부터는 자유롭지 못합니다. 기자 출입구를 찾지 못해 경기장을 뱅뱅 돌다가 결국은 물어물어 입장해야만 했지요. 덕분에 저는 선수들이 에스코트 어린이와 경기장에 입장할 때서야 겨우 기자석에 도착할 수 있었죠. 이청용 선수나 저나 그날만큼은 ‘어수룩했던 나 자신’으로 기억할 듯합니다.

그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 후로 리그에서 그의 모습을 볼 때면 자연스레 제 모습을 투영했던 이유가. 2004년 열여섯 어린나이로 프로에 입단한 이후, 2006년 2년 만에 기회를 잡았지만 4경기 1도움이라는 다소 실망스런 성적으로 그해를 마감해야만 했습니다. 2006년 7월 29일 전남전이 마지막 경기였으니 그 해 시즌 절반을 그는 관중석에서 보냈습니다. 조금만 더 잘했다면 기회를 잡았을 텐데, 라는 실망감으로 그는 남은 시즌을 보냈겠죠.

하지만 2007년 귀네슈 감독의 부임과 함께 그는 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귀네슈 감독은 FC서울의 어린 선수들에게도 주전 기회를 보장했고 2006년 당시의 아픔을 기억한 그는 특유의 끈기로 그 기회를 잡고 말았습니다. 2007년 3월 21일 수원전. 박주영 선수가 해트트릭을 터뜨리며 수원을 4-1로 이겼던 그날, 상암경기장을 찾은 관중들의 머릿속에는 비단 박주영 선수의 이름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유연한 움직임으로 수비수들을 따돌리며 최전방까지 침투한 뒤 박주영 선수에게 보낸 패스를 어찌 잊을 수 있을까요.

그해 7월 맨체스터Utd.와의 친선경기에서 FC서울은 0-4로 졌지만 이청용 선수의 측면 플레이만큼은 유독 빛났습니다. 덕분에 그는 호날도와 함께 기자들이 선정한 경기 MVP에 뽑혔습니다. 평소 가장 존경하던 선수가 바로 호날도였으니 더욱 감회가 새로웠겠죠. 그날 전 조금씩 자신의 꿈에 다가가는 이청용 선수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물론 요즘도 중학교 시절 친구들과 수다 떠는 시간을 좋아하고 밥보다 빵이 좋다며 팬들이 건네주는 던킨도너츠 앞에서 웃음을 거둘 줄 모르는 그 모습을 보면 영락없는 소년 같습니다. 여느 사커키즈처럼 새벽에 중계된 해외리그 경기를 찾아 노트북에다 다운받는 모습도 그렇고요. 그렇지만 와중에도 그는 시나브로 한국과 K-리그를 책임질 선수로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LA갤럭시와의 친선경기에서는 베컴을 상대로 전혀 기죽지 않는 모습을 보여줬는가 하면(저는 그날 베컴이 이청용 선수의 포커페이스에 외려 말렸다고 생각합니다. 이청용 선수의 깊은 태클에 베컴이 성을 냈는데 보통 그럴 때 어린 선수들이 기죽기 쉽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후에도 전혀 기죽지 않으며 자신의 기량을 맘껏 펼쳤죠.) 지난 5월 25일 성남전 후반21분 선제골을 터뜨린 후에는 FC서울 서포터스과 함께 기쁨을 나누는 모습으로 눈길을 끌기도 했습니다. 기뻐하는 팬들을 상대로 반응을 유도하는 그의 모습이 진정 프로다웠기 때문이죠.

그런가 하면 이따금 교체할 때마다 보여주는 모습도 상당히 인상적입니다. 두 손을 위로 올린 채 박수를 치며 관중들에게 인사를 하기 때문이죠. 수줍어하며 제대로 인사조차 못하던 2년 전 그의 모습을 떠올려보면 시간이 참 많이 흘렀음을, 어느새 프로선수가 다됐음을 저는 깨닫곤 합니다. 이렇듯 기자와 선수로 자신의 영역에서 같은 날 출발했지만 그는 참 빠르게 성장했습니다. 저는 아직까지 제자리에 머물러있는데 말이지요. 그리고 지금의 모습은 곧 이청용 선수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그리고 묵묵히 땀 흘렸음을 증명하는 것이겠지요.

피 끓는 청춘이기에 보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즐기고 싶은 것도 많을 텐데도 그는 모든 것을 참고 견디고 이겨냈습니다. 외려 그런 것들에 빠지는 자신을 경계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관심을 받는 여느 선수들이 보여준 행보와는 사뭇 달랐죠. 그래서 저는 저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인격적으로는 성숙한, 그를 존경합니다. 좀처럼 인내하지 못하는 저로서는 그가 대단하게 보일 수밖에요.

3년 전, 2005년 3월 13일 박주영 선수가 데뷔골을 터뜨렸던 그날, 이청용 선수는 탄천종합운동장 한켠에 앉아 언젠가는 박주영 선수와 꼭 경기를 같이 뛰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곧 그 꿈을 이뤘고 그 꿈은 대표팀에서도 이어지게 됐습니다. 요르단전에서 함께 선발명단에 이름을 올렸으니까요. 경기 시작 전 김남일 선수는 손수 이청용 선수에게 다가가 어깨를 치며 격려를 해줬습니다. 박주영 선수 역시 경기 내내 이청용 선수에게 끊임없이 이야기를 건넸고요. 나중에 물어보니 뺏겨도 좋으니 과감히 하라고, 뒤에서 도와줄 테니 자신감 갖고 하라는 이야기였다네요.

대표팀 소집 첫날 그에게 물었습니다. 만약 이번에 A매치 데뷔전을 치르게 된다면 어떻겠냐고요. 그는 “긴장도 되겠지만 설레기도 해요. 자신있게 하다보면 기회가 오지 않을까요? 기회가 왔을 때 열심히 해서 잡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라는 대답을 들려줬습니다.

그의 대답이 놀라운 이유는 ‘설렌다’는 표현에 있습니다. 저는 그 말에서 이청용 선수의 자신감을 읽을 수 있었죠. 아니나 다를까 요르단전이 끝난 후에도 그는 비슷한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쩔뚝거리며 경기장을 나서는 그에게 데뷔전 소감을 묻자 그는 “형들 도움 때문에 쉽게 무사히 경기를 마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K리그 데뷔전보다 훨씬 덜 긴장했어요”라고 말했지요.

큰 경기에서 주눅 들기보다 부담을 털어내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에 최선을 다하자’는 그 모습에서 저는 이청용 선수가 가진 당참과 강함을 느낍니다. 쉬이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모든 것을 가슴 속 깊이 되새김질하며 뛰는 그 모습에서 뭐든지 쉽게 말로 뱉는 제 모습을 반성합니다.

요르단과의 2-2 무승부 결과에 많은 팬들은 걱정했고 우려를 표했고 또 그 중에는 성낸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희망을 걸고 싶습니다. 그날 우리는 이청용이라는 새 희망을 발견했기 때문이지요. 그 희망이 대한민국 축구대표팀에게 큰 힘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누군가는 초심을 잃지 않을까, 라는 우려를 표할 수도 있겠지만 그의 꿈은 무척 높기에 쉽게 닿지 않을 것이며 그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목표를 이룰 그날까지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처음과 끝이 같을 사람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에 저는 조용히 그의 성장을 바라볼 것입니다.

그의 성장이야말로 우리 대표팀의 선전이 될 것이 분명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