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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레나의 꿈의 구장/Footballers

유로2008 결승골 토레스는 누구?

소년의 이름은 토레스
스페인 출신의 베니테스 감독은 2004년 리버풀에 부임하자마자 챔피언스리그 정상으로 팀을 이끌었다. 변화의 기치를 올릴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베니테스는 이후 자신이 원하는 선수 영입을 당당하게 요구하기 시작했다. 레이나, 아게르, 크라우치(2005-06시즌) 아우렐리오, 아르벨로아, 마스체라노, 쿠이트, 페넌트(2006-07시즌) 등을 영입하며 리버풀의 주축 스쿼드는 확실히 일신했다.



애석하게도 성적이 제자리(두 시즌 모두 3위)를 맴돌았을 뿐이다. 따라서 리버풀에게 2007-08시즌은 '삼세판' 투자였다. 이래도 안 되겠냐는 각오로 창고의 돈을 방출했는데, 다만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코드를 달리했다. 기존의 영입이 전체적인 틀을 잡는 것에 주력했다면 이번에는 수준급 화기 구입에 매진했다. 내 몸집만 키운다고 무작정 상대방이 쓰러지는 것이 아님을 깨달은 모양이다. 베나윤, 보로닌, 바벨 등 준척급 공격자원들이 리버풀에 합류하게 된 배경이다. 하지만 이들이 핵심은 아니었다. 이적료 2650파운드(약 550억원). 입때껏 리버풀이 누군가를 영입하기 위해 이런 거금을 쏟은 적이 없었다. 그만큼 공격력 증대에 목이 말랐다는 방증이다. 2007년 여름,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안 필드에 입성하던 호리호리한 선수의 닉네임은 '소년'이라는 뜻의 엘 니뇨(El Nino). 그때까지만 해도, 앳됨이 느껴지는 페르난도 토레스가 '붉은 제국 재건'의 대안이 될 수 있을지 의구심이 적잖았다.

리버풀의 신진사수로
결과부터 말하자면 2007-08시즌 리버풀은 '절반의 성공'만 거두었다. 맨체스터Utd. 첼시 아스날이 시즌 말미까지 선두경쟁을 벌이는 것에 반해 어느 순간부터 리버풀은 챔피언스리그 출전 자격요건인 '4위'에 안주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반절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까닭은 전적으로 챔피언스리그에서의 선전에 기인한다. 2005-06시즌 우승에 이어 2006-07시즌 준우승, 이어 2007-08시즌에는 4강까지 안착했으니 역시 큰 무대에 강한 리버풀이었다. 16강에서 이탈리아챔피언 인터밀란을, 8강에서 자국리구 호적수 아스날을 제압하고 이룬 성과니 선전이라면 선전이라 할 수 있겠다. 꿈의 무대 4강이 대외적 자존심을 세워줬다면 토레스의 질주는 내부적인 만족이다. 17살 나이로 조국 스페인에서 프로에 입문한 그는 지난 시즌까지 프리메라리가 A.마드리드에서 활약했다. 안 필드에서 보낸 2007-08시즌은 축구 커리어 최초로 해외리그를 경험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토레스가 보여준 모습은 한마디로 '괄목상대'였다. 프리미어리그 적응을 둘러싼 반신반의를 무색케하며 거침없이 질주했다. 토레스는 2007-08시즌 24골을 터뜨리며 자신의 최다골 기록이던 20골(2003-04시즌)을 뛰어넘었고 호나우도(31골)에 이어 득점랭킹 2위에 오르며 리버풀의 신형사수로 멋지게 등극했다. 제어장치를 잃어버린 호나우도의 슈퍼맨급 활약이 아니었다면, 2007-08시즌 프리미어리그 스포트라이트는 오롯이 토레스의 몫이 될 공산이 컸다. 2007-08시즌 '최고 이적생'이라는 타이틀은 토레스라는 큰 그릇을 담기엔 그저 부족하기만 하다.

신기록 제조기
제라드가 버티는 허리의 단단함이야 특별히 부족함을 느낄 수 없었고 캐러거가 축이 되는 플랫4의 견고함도 누군가를 부러워할 수준이 아니었던 리버풀이 이제 '우리에게도 상대를 쓰러뜨릴 특급 저격수가 있다'라고 자랑해도 좋겠다. 그만큼 토레스는 발군인데 키건, 달글리쉬, 러시 등 1970-80년대 리버풀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특등사수들의 맺힌 한을 풀어줄 수 있는, 제대로 된 후임병이 들어왔다는 호들갑이 머쓱하지 않을 활약이다. 실제로 리버풀 출신의 플레이어가 한 시즌 20골 이상을 기록한 것은 1995-96시즌 파울러(현 카디프시티/28골)이후 12년만의 경사다. 리버풀이 얼마나 '킬러'에 굶주렸는지 느끼게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지난 3월에는 안 필드 안방에서 2경기 연속으로 해트트릭을 터뜨리는 기염까지 토했다. 1946년 재키 바머가 홈구장을 연방 달군 이후 60년만의 재현이라며 리버풀 전역을 들끓게 한 토레스다. 기복없이 꾸준할 뿐 아니라 이처럼 탄력 받을 때는 몰아치기에도 능하다. 게다 홈에서 특히 강한 면모를 보이니 홈 팬들에게 어필하는 스타성도 충분하다. 챔피언스리그에서 터진 6골을 보태 총 30골을 돌파했으니 2000년대 초 클럽의 아이콘이던 오웬(현 뉴캐슬Utd.)의 한 시즌 최다골(28골)까지 능가했다. 단순히 많이 넣은 수준에서 그치는 것도 아니다. 3월11일 챔피언스리그 4강을 결정지었던 원정 결승골(vs 인터밀란/1-0) 3월30일 리그 4위 경쟁을 벌이던 '머지사이드 더비' 혈투에서의 결승골(vs 에버튼/1-0) 등 결승전급 비중의 매치업에서 승리를 이끄는 기특함까지 선보였다. 열성적이기로 소문한 서포터 '더 콥(The Kop)'이 스페인에서 날아온 '소년'에 열광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제라드, 짝을 만나다
기실 리버풀은 그간 제라드 원맨팀의 인상이 없지 않았다. 굳이 퇴로를 만든다면, 적어도 최전방의 무게는 마뜩지 않았고 더구나 큰 무대의 높은 곳으로 향할 수록 제라드의 힘에 따라 크게 좌우됐다. 암암리에 제라드가 해결사, 혹은 마법사가 되주길 기대했음을 부인하기 힘들 것이다. 그래서 토레스의 등장이 더 반가운지도 모르겠다. 언급했듯 2007-08시즌 토레스는 꾸준했다. 골을 많이 넣었다는 1차적인 성과가 기쁘고 그 이면의 '한결같음'이 고무적이다. 일정수준에 오른 선수라면, 컨디션이 좋을 때의 활약이란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여기서 톱클래스 이냐 아니냐는 '좋은 활약'의 연속성에 따라 갈린다. 그래서 토레스가 인정받고 박수받을 만하다는 것이다. '득점에 따른 기여도'로 범위를 좁힐 때 프리미어리그에서 꾸준한 톱클래스라면 단연 호나우도와 토레스 투톱이다. 물론 으뜸은 호나우도겠다. 하지만 호나우도는 벌써 5시즌 째 축구종가에서 생활하고 있다. 실상 호나우도는 데뷔 시즌 백업요원에 가까웠다. 둘의 상황이 꼭 같지 않으니 무작정 비교대입이 무리가 있으나 확실한 것은 토레스의 현재가 놀랍다는 것이다. 챔피언스리그에서도 마찬가지다. A.마드리드 시절 단 1번도 '꿈의 무대'를 밟은 적조차 없었는데 신기하게도 주눅 드는 모습을 전혀 찾을 수 없었다. 무려 6골이나 터뜨리며 유럽클럽대항전 데뷔무대도 멋지게 장식한 토레스다. 덕분에 고군분투하던 캡틴 제라드의 어깨가 한결 가벼워졌으니 이제야 드디어 제대로 짝을 만난 듯하다. 토레스가 지금과 같다면, 제라드-토레스 조합은 한동안 기세가 등등할 전망이다.

마지막으로

유로2008 예선에서 7경기에 출전했지만 단 2골에 그쳤던 토레스는 본선무대에서도 스웨덴과의 조별리그에서 1골을 뽑는데 그쳐 때 아닌 '2인자'의 수모를 겪어야만 했다. 동료 비야가 해트트릭을 터뜨리며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순간, 함께 조국의 승리에 기뻐했지만 내심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던 것도 사실. 그러나 대망의 결승전, 원톱 출격 명령을 받은 토레스는 전반 33분 실바의 침투 패스를 이어 받아 결승골을 터뜨리며 유로2008에서의 부진을 한순간에 만회했다. 토레스 또한 "그간 유럽선수권을 지켜보며 경기의 일부분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이제 그 상상을 이뤄냈다"며 꿈을 현실로 만든 '오늘'을 자축했다.


44년 만에 조국 스페인에 앙리들로네컵을 안긴 토레스. 수많은 선수들이 뜨고 진 유로2008에서 토레스는 결국 마지막 순간 가장 밝게 빛나, 모두의 뇌리에 가장 강하게 박힌 '별'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 그에게 세계 시선이 몰릴 수밖에 없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