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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레나의 꿈의 구장/Footballers

'여자 박주영' 박은선의 부활을 기다리며

2003년 10월15일 전국체전 여고부 축구 결승전이 열린 정읍공설운동장. 사람들의 눈동자는 한곳을 향해 있었다. 그리고 그 소실점의 끝에는 박은선이 있었다. 열일곱 어린 나이로 아시아선수권과 여자월드컵을 접수한 여고생 골잡이의 움직임에 사람들은 좀처럼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2005동아시아선수권. 박은선은 감각적인 힐킥으로 단 한 번도 넘지 못했던 만리장성을 무너뜨리며 원년대회 우승 트로피를 한국에 안겼다. 박은선이 가장 화려하게 빛나던 시절이었다.


당시 세상은 그녀에게 ‘천재’, ‘여자 박주영’이라는 호칭을 쉬이 허락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하나 그게 마지막이었다. 우리가 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있던 박은선과 만난 순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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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그녀를 힘들게 했을까

박은선의 A매치 출전이 또 무산됐다. 5월28일 개막하는 2008여자아시안컵을 앞두고 대표팀에 차출됐던 박은선은 결국 부상을 이유로 소속팀 서울시청으로 돌아갔다. 올해만 벌써 3번째 있는 일이다. 안익수 감독은 지난 3월 2008아시안컵 예선을 앞두고 박은선을 23명의 소집훈련 명단에 넣었다. 하지만 그녀는 “발탁은 감사하나 아직 몸과 마음 모두 준비되지 않았다”는 내용의 글을 여자축구연맹 홈페이지에 올리며 대표팀 부름을 고사했다. 박은선은 4월25일·28일 중국 친황다오에서 열린 중국과의 친선경기를 앞두고 다시 한 번 엔트리에 이름을 올렸으나 역시 허리 및 무릎 부상으로 복귀를 미뤘다.

마지막 A매치가 2005년 8월16일 열린 남북통일축구경기였으니 햇수로만 벌써 4년째. 여자대표팀에서 박은선의 모습을 보지 못한 지도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본디 비범한 이들의 삶엔 굴곡이 많은 법이라고 하지만 박은선은 유독 심한 듯하다. 2004아시아여자청소년선수권에서 결승전 해트트릭을 포함, 8골을 터뜨리며 득점상과 최우수선수상을 수상하면서 한국여자축구의 ‘New hope’으로 떠올랐지만 그 이후의 나날들은 순탄치 않았다.

이듬해 3월 박은선은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고교에서 실업으로 직행했고 여자축구연맹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선수들은 대학에 입학해 2년 간 뛰어야 한다’는 선수선발 세칙(3조3항)을 어겼다는 이유로 ‘연맹 주관 3개 대회 출전 금지’ 징계를 내렸다. 그것도 그나마 여론의 힘 덕분에 수위가 약해진 것이었다. 그러나 와중에도 박은선은 2005동아시아선수권에서 한국을 우승으로 이끌었고 가을에는 ‘FIFA 올해의 선수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시련은 이대로 끝난 것일까.

하지만 박은선은 기대와 달리 비딱한 길을 타기 시작했다. 이런저런 개인적 고민이 스스로를 불편하게 만들었고 그녀는 점점 필드에 흥미를 잃어가는 듯 보였다. 박은선은 2006년 5월26일 아시아여자선수권을 앞두고 소집된 국가대표 훈련 도중 합숙소를 2차례나 무단이탈했다. 그녀의 기나긴 방황 역시 함께 시작됐다.

방황과 부활의 교차점
사실 박은선은 2005동아시아선수권을 앞둔 합숙훈련 당시에도 대표팀 이탈 문제를 일으킨 적이 있다. 이 때문에 대표팀 내부적으로 ‘박은선이 우리 팀에 정말 필요한 선수인가?’에 대한 투표가 진행됐다는 비하인드 스토리도 숨어있다. 결과적으로 대다수 의견이 ‘필요하다’였기에 그녀는 다시 대표팀으로 들어올 수 있었으나 찜찜한 기운은 남아있었다. 그러나 2006년에는 사정이 달랐다. 여자대표팀을 맡고 있던 안종관 감독은 “나로선 할 만큼 다 해봤다”고 잘라 말했다. 월드컵 본선 티켓이 걸린 중요한 대회를 앞두고 2차례나 숙소를 무단이탈한 박은선을 더 이상 봐줄 수 없었다는 뜻이다.

박은선 문제는 결국 협회 상벌위원회에 회부됐고 ‘국가대표단 축구단 운영규정과 협회, 대표단의 명령 지시를 위반했거나 기타 훈련 규범을 지키지 아니한 자는 6개월 이상의 출전 정지 및 자격 정지의 징계를 내린다’는 규정에 따라 6개월 출전 및 자격 정지 징계가 떨어졌다. 전체를 생각했을 때 피할 수 없었던 일이다. 다만, 박은선의 빈자리가 생각보다 컸다는 게 문제다.

2006년 7월 호주에서 열린 아시아여자선수권에서 여자대표팀은 호주(0-4) 북한(0-1)에 패하며 2007년 중국에서 열리는 여자월드컵 출전권 확보에 실패했다. 같은 해 11월에 열린 피스퀸컵에서는 브라질(0-1) 캐나다(1-3) 이탈리아(1-2)에 연달아 패하며 단 1승도 거두지 못했다. 당시 안종관 감독은 “전력에서 잠시 이탈한 선수들이 돌아오면 달라질 것”이라며 박은선 공백의 아쉬움을 에둘러 표현했다. 12월 2006아시안게임에서도 북한 중국 일본에 밀려 노메달의 수모를 겪는 등 여자대표팀은 잇달아 열린 국제대회에서 연방 실망스런 성적만 내놓았다. 박은선 없는 여자대표팀은 골에 배고팠다. 박은선의 대안은 보이지 않았다.

2007년 1월 드디어 박은선의 징계가 해제됐다. 하지만 박은선은 소속팀 서울시청이 중국으로 동계훈련을 떠나기 이틀 전 “축구를 그만두고 싶다”는 갑작스럽고 당황스러운 쪽지를 남긴 뒤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즈음 박은선 아버지와 구단 사이에서 연봉문제로 갈등이 있었는데 그것이 원인이 된 것 같다는 막연한 추측만이 난무했다. 6개월간 소식이 끊어졌다. 그리고 늦여름, 잠적했던 박은선이 돌아왔다. 복귀 이유는 ‘아버지’때문이었다. 자신의 아버지가 골수암 판정을 받고 투병 중이라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1년여의 공백이 있었지만 박은선은 8월과 9월 여왕기종별대회와 추계여자축구연맹전에 연속으로 득점왕에 오르며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를 지켜보던 서울시청 서정호 감독은 “지도자 입장에서 돌출행위가 못마땅할 때도 있었지만 이제는 포용하고 안고 가야한다”라며 “(박)은선이가 이렇게 되기까지엔 나 뿐 아니라 부모, 관계자들 등 어른들의 책임이 크다”고 뼈있는 말을 남겼다.

서로의 마음을 열고
돌이켜보면 박은선은 늘 크고 작은 고민 사이 속에 놓여 있었다. 축구는 그녀를 자유롭게 만드는 해방구였지만 한편으론 늘 발목을 잡는 구속이기도 했다. 부상 때문에 잠시 쉬고 싶은 순간에도 팀은 언제나 그녀를 필요로 했다. 그저 참고 뛰어야 하는 무수한 날들이 계속 됐다. 때론 ‘골 넣는 기계’쯤으로만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다. 사람들은 “저건 여자 선수의 플레이가 아니다”며 대형 스트라이커의 탄생에 열광했지만 남다른 신체적 특징 때문에 남모르게 정체성에 대한 고민도 많았다. 아무 것도 모른 채 축구만 하던 시절을 떠나 뒤늦게 사춘기가 찾아왔지만 선수이기 이전에 ‘하나의 여성’이라는 사실을 알아주는 이는 없었다.

실력에 걸맞은 대우를 해주겠다는 유혹은 많았으나 믿을 수 있는 사람을 가려내기는 힘들었다. 서로 자신 밑에 두기 위해 다퉜을 뿐 그녀의 상처와 방황의 근원을 알아주는 이 역시 드물었다. 지금도 많은 지도자들은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보며 깊이 깨우쳐야 한다”고만 지적할 뿐 “네 잘못이 아니야”라며 다독일 줄은 모른다. 실력 뿐 아니라 인격까지 함께 인정하고 대해주지 못함이 그저 아쉬울 따름이다.

“대표팀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기에 제 몸과 마음이 만들어진 다음에, 준비된 다음에 합류해서 예전보다 발전된 모습으로 국가대표팀에 보탬이 되고 싶습니다.”

지난 3월 박은선이 여자축구연맹 홈페이지게시판에 올린 글의 일부다. 그중에서 ‘몸과 마음이 만들어진 다음에’라는 부분이 눈에 띈다. 본디 국가대표 발탁 고사 이유는 ‘부상’ 때문이었으나 그녀는 글을 쓰며 ‘마음’도 넣었다. 사실 몸보다 마음이 더 아픈지도 모르겠다. 한국여자축구의 희망이라 부르는 박은선은, 하지만 실상 한국여자축구의 희생양인지도 모르겠다. 여자축구 관계자들과 지도자들에게 묻고 싶다. 진정 박은선을 받아들일 수 있겠는지. 승리를 위한 도구가 아니라 한 명의 선수로서 말이다. 그리고 박은선에게 묻는 것이 바른 순서라는 생각이다. 


박은선, 당신을 기다려도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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