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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4년이 지났다. 런던의 기쁨에 빠져있다보니 베이징에서의 추억은 어느새 흐릿해졌다. 그래도 강렬하게 기억되는 선수들이 있다. 바벨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던 순간 장미보다 아름답게 웃던 장미란이 그렇고, 하계올림픽 최초로 금메달을 획득한 수영의 박태환이 그랬다.

그리고 또 한 선수가 있다. 금메달이 확정되는 순간 아이처럼 펑펑 울던 최민호가 내게는 여전히 머리와 마음에 남는 선수다.

최민호의 별명은 한판승의 사나이. 별명처럼 최민호는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연이은 한판승으로 결승까지 진출했다. 최민호가 보여주던 그 시원스럽던 플레이와 한판으로 경기가 종료되는 순간의 짜릿함은 내게 유도의 묘미를 알려주었다.

세레머니는 또 어땠던가. 한판승을 거둘 때마다 검지를 들고서 흔들던 모습은 퍽 인상적이었다. 한판으로 이겼다는 걸 뜻했는데, 무심한 표정으로 한판승 세레모니를 하고 나서는 모습이 맘에 들어 그즈음 축구선수를 만날 때면 그 세레모니를 권유하기도 했었다.

어쨌거나 그렇게 투지와 자신감 넘쳐보이던 최민호가 금메달 확정 후에는 상대 선수였던 파이셔의 가슴에 안겨 펑펑 우는 게 아닌가. 그해 올림픽 기간 중 많은 선수들이 웃고 울었지만 나로 하여금 엄마의 마음으로 지켜보게 만들었던 순간은 그때가 유일했다. 내 안의 모성애를 건드렸던 선수였다.

최민호는 올림픽을 준비하며 체중조절이 가장 어려웠다고 고백했다. 감량을 앞두고 스트레스를 못 이겨 폭식을 하기도 했었단다. 배가 부른데도 계속 음식을 꾸역꾸역 먹다가 토한 적도 있었다고. 금메달을 따고 나서 그동안 못 먹었던 라면을 먹고 자야겠다고 웃었는데, 그 덕분에 귀국 후에는 라면CF를 찍기도 했었다.

그랬던 최민호의 소식을 다시 들은 건 올 초. 그러니까 런던올림픽이 얼마 남지 않을 때였다. 60kg급이던 최민호가 체급을 올려 66kg에 도전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올림픽 도전에 실패했다는 뉴스가 들려왔다.

최민호는 대표선발전에서 조준호에게 2차례나 이겼으나 세계랭킹에서는 뒤진 상태였다. 체급변경 시간이 짧아 대회에 많이 나서지 못했기 때문이다. 치열한 토론 끝에 세계랭킹이 앞선 조준호가 올림픽 시드배정에서 더 유리할 것이라는 이유로 올림픽 티켓을 얻게 됐다.

4년 전 최민호가 있던 자리에는 새로운 올림픽 유도스타들이 차지했다. 노장투혼 송대남과 독한 야생마 김재범, 그리고 최민호를 대신해 출전했지만 판정번복의 희생양이 된 조준호가 그 주인공들이었다.

얼마 전 참석하게 된 런던올림픽 유도 국가대표 선수단 환영의 밤 행사장에서도 그랬다. 금메달을 딴 송대남과 김재범은 식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로 바빴다. 테이블에 있던 유도 관계자들은 연신 두 선수를 불러댔고 덕분에 기념촬영과 사인해 주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나 좀처럼 송대남과 김재범 두 금메달리스트와의 인증샷 찍기 행렬은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급기야 김재범은 밥 좀 먹고 하면 안 되냐며 사정을 하는데 보던 내가 다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마침 내가 있던 자리는 메달리스트들 좌석과 가까웠고 보던 내 정신도 놓을 상황이었다. 사람들이 없는 구석으로 자리를 이동했는데, 고개 숙인 채 저녁을 먹고 있던 한 남자의 실루엣이 참 낯익었다.

최민호였다. 단 한 번도 실제로 만난 적은 없었지만 어떻게 한 번에 딱 알아보았는지. 처음에는 신기했고 다음으론 반가웠다. 그러나 잠시의 감정이었다. 그의 자리는 메인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고, 알아보는 이도 드물었다. 영광의 시간이 지나간 자리에는 침묵만 있는 듯했다. 그렇게 박수쳐주고 열광하던 사람들의 시선은 이제 저 중앙 테이블에 앉아 있던 송대남과 김재범에게만 꽂혀 있었다.

식사를 다 마쳤을 때 조심스레 다가가 사진 한 장 같이 찍어도 되겠냐고 물었다. 앉아있던 최민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생각보다 체구가 작아 깜짝 놀랐다. 내게는 거인 같은 사람이었는데, 그는 이 작은 체구로 세계 최강자의 자리에 올랐구나. 보이지 않던 곳에서 흘렸던 땀의 무게가 느껴지던 순간이었다.

 

 

그날 환영행사에서 최민호는 말이 없었다. 금세 저녁을 먹고 나선 행사장 밖 접이식 의자에 앉아 대표팀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이원희하고만 이야기를 나눌 뿐이었다. 그러나 그 조용했던 올림픽 메달리스트들이 나오자 따라 나온 사람들로 금세 행사장 밖은 시끄러워졌다. 그 혼란 속에서 최민호는 조용히 행사장을 떠났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묻고 싶었던 것도, 하고 싶었던 것도 참 많았는데. 사진 한 장 같이 찍자는 말이 전부였다. 최민호 역시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대신했고.

4년 전 흘렸던 눈물과 메달 획득 후 겪어야만 했던 방황과 혼돈, 좌절을 알고 있다고, 아쉽게 대표팀에 선발되지는 못했지만 막판 대표선발전에서 보여줬던 모습을 보며 은퇴 후 어떤 유도인으로 다시 나타날지 기대하게 됐다는 말을 건네지 못한 게 지금도 아쉽다.

다시 만나게 된다면 꼭 말하고 싶다. 당신의 유도인생에서 가장 빛나던 시절이 2008년 베이징올림픽, 그러니까 과거가 아닌 현재와 미래가 될 수 있기를 응원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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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준결승에서 브라질에게 0-3으로 패하고 많은 사람들은 이제 끝이라고 생각했다. 영국을 상대로 혼신의 힘을 다해 준결승까지 올라갔지만 잃은 것 역시 많은 경기였다. 선수들은 혈투로 체력이 바닥으로 떨어졌고 조2위로 올라가는 바람에 이동시간이 많았다. 카디프에서 맨체스터로 다시 카디프로. 이동경로가 짧았던 일본에 비해 불리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현지에서 전해들은 올림픽대표팀 소식. 체력이 이미 떨어져 몸이 많이 힘들다고 하였다. 걱정이 컸다. 그런데 마음이 아프기 때문에 몸이 힘들 새가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경기가 져서 마음이 아픈 것일까.

한데 선수들의 대답은 달랐다. 홍명보 감독님과 올림픽 대표팀 동료들과 뛰는 마지막 경기였기에 선수들은 몸이 힘들다는 것을 생각할 새도 없었다고 한다. 선수들은 자신들이 뛰는 올림픽 대표팀의 이야기는 한편의 영화와도 같았다고 했다. 이 영화가 런던에서 해피엔딩으로 끝났으면 좋겠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군면제. 그보다 더 중요하는 것은 홍명보 감독님과 올림픽팀을 위해서 자신들이 무언가 해줄 수 있는게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군면제보다 중요한 것. 팀을 위한 희생. 선수들의 마음에는 그것 뿐이었다. 팀보다 위대한 선수는 없다는 것이 이 팀의 명제였는데, 다시 한번 그 명제를 깨달은 순간이었다.

대회에 나가기 전에 강원FC의 불멸의 풀백 오재석이 그랬다. 준비된 사람이 기적을 일으키는 법이라고 배웠어요, 런던에서의 기적같은 결과 상상합니다, 그 생각을 하면 행복해져요, 라고.

올림픽팀과 함께한 4년 간의 시간. 너무나 행복했기 때문에 이 팀에서 보답하고 싶었다고 한다. 선수 한명 한명이 흘린 땀들은 값졌다. 그리고 그들이 모인 팀은 위대했다.

군면제 타이틀이 걸린 아시안게임에서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봐 노심초사하며 강박감에 눈물 흘렸던 어린 소년들은 어느새 남자가 되었고 전사가 되었다. 축구 종주국인 영국을 상대로, 영국 홈에서 7만 관중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뛰었다. 배운데로 플레이를 하며 팀을 생각하면 우리는 행복할 것이라고, 올림픽팀만의 행복한 축구만 생각하며 뛰었다.

언론과 팬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식었다를 반복할 때 박주영은 선수들을 모아서 그랬다고 한다. 우리가 잘하면 박수보내고 우리가 못하면 쓴소리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런 말들에 일희일비하면 안된다. 우리는 팀이다. 팀을 생각하며 우리가 얼마나 즐겁게 함께 훈련했는지만 생각하자고.

 

 

오늘 이 축구가 이 친구들과 함께하는 마지막 시간이었다는 주장 구자철의 소감. 우리 올림픽대표팀은 마지막이라는 간절감을 가슴에 담고 싸웠고 결국은 간절함의 차이가 승패를 가로질렀다. 한일전 2-0승리라는 스코어는 그냥 나온 것이 아니었다.

“저희의 도전이 빛을 발할 시간입니다. 4년간 고생한 우리의 꿈이 꼭 이뤄어지도록 기도해주세요.”

런던으로 출국하기 전 오재석이 팬들에게 남긴 인사말. 그 도전의 끝이 해피엔딩이 되어, 축구공 하나로 온 국민이 함께 행복할 수 있어서 나도 행복했다. 그래서 이 태극전사들에게 진심으로 고마운 시간이었다.

준결승에 올랐을 때, 아직 역사를 쓰지 못했다고 했던 선수들. 그러나 올림픽에서 첫 메달을 따며 새로운 역사를 썼다. 2002년 월드컵을 보며 축구선수의 꿈을 키운 이들이 10년 후 런던에서 기적을 썼듯이 이 선수들을 보며 꿈을 키울 키즈들이 새롭게 쓸 축구역사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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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경기 종료 후 벤치에 앉아 눈물을 쏟는 선수가 보였다. 그 선수를 위로해주는 동료들의 모습도 잡혔다. 대한민국 여자핸드볼대표팀이었다. 올림픽 핸드볼 4강전에서 우리나라는 노르웨이에 25-31로 패하며 결승 진출에 실패했다.

 


그러나 실패라는 표현이 맞을까. 우리나라 여자핸드볼은 1984년 로스앤젤레스올림픽에 처음 출전해 은메달을 따낸 이후 지금까지 8회 연속 4강 진출이라는 대기록을 작성 중이다.

1988년 서울올림픽과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두 대회 연속 금메달을 땄으며 2004년 아테네올림픽과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은메달과 금메달을 추가했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을 제외하고 출전한 대회마다 메달을 목에 걸고 금의환향했던 여자 핸드볼 대표팀이다.

올림픽에선 효자종목이었다. 그러나 국내에선 비인기종목 중 하나였다. 노르웨이와의 준결승전이 펼쳐진 경기장은 관중들로 가득 찼는데, 만원관중이 적응되지 않았단다. 관중들의 열기로 집중하기 힘들었다는 이야기가 마음 아프게 들렸다.

노르웨이 여자대표 선수들에게서는 게르만족의 향기가 느껴졌다. 남성 못지않게 골격 좋고 체력이 뛰어난 그들을 상대로 우리대표팀은 열심히 싸웠다. 그러나 우리 대표팀 전력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김온아와 정유라, 심해인 등 주축 선수들이 부상으로 이탈하며 스쿼드를 구축하기에 어려움이 컸다. 오죽하면 우생순으로 유명한 임오경 해설위원이 더 다치면 안 된다고, 차라리 내가 다쳤으면 좋겠다며 눈물을 흘렸겠는가.

그러나 여자 핸드볼 국가대표 선수들은 한국 여성들의 강한 투혼을 코트 뒤에서 입증해주었다. 결승실패가 아닌 동메달을 향한 도전으로, 관점을 달리해 바라보고 싶은 멋진 그녀들이었다.

여자 배구 국가대표팀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겠다. 여자 배구대표팀 또한 준결승에서 세계 최강 미국을 만나 세트 스코어 0-3(20-25, 22-25, 22-25)으로 패했다. 미국은 현재 국제배구연맹 랭킹 1위를 달리고 있는 세계 최강자다. 이번 런던올림픽 비치발리볼에서도 자국 선수가 금-은을 겨뤘을 정도니, 배구공으로 세계를 제압했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의 배구강국이다.

 


그러나 여자 배구대표팀은 이번 런던올림픽에서 기적의 드라마를 연출했다. 죽음의 조에 묶여 언론에서는 8강 진출이 희박하다고 내다봤지만 조별예선 3차전에서 2008년 베이징올림픽 금메달인 브라질(세계랭킹 2위)을 3-0으로 대파하며 이목을 집중시켰다.

8강에서는 강호 이탈리아(세계랭킹 4위)를 3-1로 잡으며 36년 만에 올림픽 준결승에 진출했다. 중국(세계랭킹 3위)과도 풀세트 접전을 벌이는 등 기적과 반전의 시나리오를 써내려갔다.

이번 런던올림픽에서 우리 여자대표팀은 세계랭킹 1위(미국), 2위(브라질), 3위(중국), 4위(이탈리아)와 모두 만났지만 그녀들은 세계랭킹 앞에서 위축하지 않았다. 외려 당당했고 더 강인한 모습으로 싸웠다. 이번에도 결승진출 좌절이라는 표현을 쓰고 싶지 않다. 1976년 몬트리올에서 동메달을 땄던 우리 여자배구대표팀은 36년 만에 다시 한 번 메달을 따기 위한 도전에 나선다. 그 사실만으로도 박수박기에 충분한 자랑스러운 여자대표팀이다.

그리고 마지막. 손연재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메달 가시권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 소녀를 향한 언론의 관심은 뜨거웠다. 그것을 좋게 볼 수 없었던 네티즌들의 악플도 대단했다. 그러나 매트 위에서 손연재는 귀여운 소녀가 아니었다. 불처럼 뜨거운 예술혼이 느껴졌다. 이는 고스란히 점수로 이어졌다. 리듬체조 예선 첫날 손연재는 후프와 볼 종목에서 합계 55900점(후프 28.075점, 볼 27.825점)을 받아 전체 24명 중 4위에 올랐다.


몽펠리에 세계선수권 11위가 그간 손연재에게는 최고성적이었다. 그래서 이번 올림픽을 앞두고 10명만 오를 수 있는 결선진출을 목표로 세웠는데, 카나예바, 차카시나, 드미트리예바 등 리듬체조계의 별들 아래 이름을 올린 것만으로 이미 절반 이상의 성공이다.

곤봉과 리본에서 실수를 하지 않는다면 우리나라 체조역사상 최초로 올림픽 결선진출이라는 위업을 작성하게 된다. 작지만 강한 소녀의 꿈이 이뤄지는 순간을 함께 지켜본다는 것은 그래서 흥미롭다.

이상은 하루동안 우리나라 여자대표 선수들이 써내려간 이야기다. 이번 런던올림픽에서 그녀들이 보여준 투혼은 귀감받기에 충분했다. 그 감동이 아름다운 결실로 마무리되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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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결승전. 신나는 음악에 맞춰 늠름하게 나오는 선수들을 보고 있는 그 시간은 내 편, 네 편 없이 마음 편히 즐기는 유일한 순간이다. 그런데 헉, 하고 말았다. 김현우의 오른쪽 눈이 퉁퉁 부어올랐기 때문이다. 피멍이 들었고 심하게 부어버려 오른쪽 눈은 감겨있다는 표현이 더 맞을 지도 몰랐다.

 


종목을 떠나 운동선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시야’ 아니던가. 특히나 레슬링 같은 1-1 겨루기 종목 선수의 경우 한쪽 눈이 안 보이면 거리감을 확보하기 힘들어진다. 치고 빠지면서 적정 거리를 유지하면서 상대를 잡아야하는데 제대로 할 수 나 있을지. 김현우의 부모 마음이 돼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경기는 완승이었다. 패시브를 받았을 때도 김현우는 노련하게 빠져나오며 위기를 극복했고 헝가리의 타마스 로린츠를 2-0 완벽한 스코어로 물리쳤다. 대표적인 효자종목으로 불렸지만 내가 기억하는 금메달 레슬러는 빳데루 돌풍을 일으켰던 1996년 아틀란타 올림픽의 심권호와 MC몽 도플갱어로 알려진 2004아테네올림픽 그레코로만형 60㎏급 정지현이 전부다. 그런데 이렇게 또 한명, 영광의 레슬러가 추가됐다.

왼쪽 눈으로만 싸운 슈퍼맨 김현우.

 

 


외눈으로 힘겹게 싸운 승리에 감격했는지 금메달이 확정되자 김현우는 감독과 코치가 있는 벤치로 달려가 감격의 포옹을 나눴다. 고마운 마음에 김현우가 절을 하자 코칭스태프도 맞절을 한다. 어쩔 줄 몰라하는 그 기쁨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쁘고 즐거웠는데, 어느새 김현우는 태극기를 들고 매트를 한바퀴 돌더라.

이번 올림픽에서 처음으로 제대로 본 태극기 세레모니. 대한민국이 밉고 싫을 때도 많았는데. 또 이렇게 한계를 이겨낸 국가대표 선수가 태극기를 흔들 때만큼은 그렇지 않다.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에, 내 가족과 친구들을 만나게 해준 이곳에 고마운 마음이 생긴다. 조국을 자랑스러워하는 선수의 모습을 보고 있다보면 절로 감정이입이 된다. 그게 우리의 힘이겠지, 하는 생각에 눈물이 난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선수들 가까이서 마음 고생하면서 운동하는 모습을 지켜봐서 그런지, 이번 올림픽에서 나는 몇 번을 울었는지 모른다.

 


나 같은 마음으로 지켜본 국민을 위해서, 김현우는 매트를 한참 돌다 중앙에 곱게 놓은 채 큰 절을 올렸다. 울컥 하는 마음이 들었는데 그 모습을 사진기로 담는 진지한 심판의 모습에 그만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김현우는 레슬링을 “내 삶의 전부”라고 정의했다. 유도선수였던 초등학생은 레슬러로 전향한 뒤 인생이 바뀔 것을 예감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앞두고 체중감량에 실패해 다음 올림픽을 기약했지만, 그때의 아픔은 스스로를 정진시키는 채찍질이 되었다. 나보다 더 땀을 많이 흘리는 사람은 없다, 라고 말할 수 있는 당당함은 지난 4년 간 쏟은 고통의 시간이 없었다면 나올 수 없는 것이었다.

 


우리팀 선수들과 이번 올림픽을 지켜보며 나눴던 이야기 중 하나가 모든 선수들이 노력하겠지만 훈련량으로 따지면 레슬링을 이길 종목은 없을 거라는 이야기였다. 그 지옥훈련 속에서 살아남은 강인한 레슬러임에도 김현우는 어쩜 그렇게 해맑게 웃을까. 감독님 말씀대로 눈웃음이 예쁜 선수였다는. 어떻게 왼쪽 눈으로만 싸웠냐는 질문에도 “정신력으로 했다”며 웃던 미소천사. 우리를 울고 웃게 만든 김현우에게 박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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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체조역사상 최초의 금메달을 양학선이 목에 걸었다.

양학선이 남자 기계체조 도마 결선에서 1,2차 평균 16.533점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체조역사상 최초의 금이다. 유옥렬(1992년 동메달), 여홍철(1996년 은메달), 양태영(2004년 동메달) 등 체조 선배들이 이루지 못한 꿈이었다.


양1. 이름부터 뭔가 있어보이게 들린다. 양학선은 지난해 세계선수권에서 공중에서 3바퀴, 1080도를 도는 유일한 기술을 처음 선보였다. 국제체조연맹은 이 기술에 양학선의 이름을 붙여 규정집에 등재시켰다. 여홍철의 ‘여2’에서 반바퀴를 더 돌아 착지하는 이 기술에 국제체조연맹은 “도마 역사상 가장 난이도가 높은 기술”이라고 찬사를 보낸 바 있다. 결선 1차시기에 이 기술을 선보인 양학선은 착지에서 두 걸음 나가는 다소 불안한 모습을 보였지만 기술의 난이도를 인정받아 데니스 아블랴진을 0.134로 제치고 끝내 금메달을 따냈다.

사실 양학선의 금메달을 크게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에겐 이미 여홍철과 양태영이 흘린 분루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홍철도 1996년 아틀란타 올림픽 때 이미 자신의 이름을 딴, 당시 최난이도 기술이었던 ‘여1’과 ‘여2’로 대회에 나섰다. 그러나 착지에서 실수하며 금메달을 아쉽게 내주고 말았다.

양학선의 키는 159cm. 대한민국 여자 평균키에 미치지 못한다. 작은 체구 때문에 열등감을 느낄 법도 했지만 양학선은 이를 체조에 적합한 신체로 승화시켰다. 공중에서 3바퀴를 돌 때도 양한선의 팔고 다리는 곧고 단단함을 잃지 않았다. 작은 새의 비상은 뭉클했고 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과 2011년 도쿄세계선수권에 이어 다시 한번 세계를 놀라게 만들었다.

또 한번 심장이 두근했던 순간은 양학선의 경기종료 후의 모습이었다.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었을텐데, 함께 출전했던 선수들은 양학선의 활약을 진심으로 축하해주었다. 체조계에서의 양학선의 위치가 얼마나 빛나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전세계 선수들도 인정한 선수라니! 올림픽이라서 더 아름답게 보인 장면이기도 했다.

 

 


태릉선수촌 훈련비를 모아 매달 부모님께 드렸던 효자 양학선. 체조협회장인 포스코건설 측에서는 대회 전부터 금메달을 딴 선수에게는 포상금 1억원을 지급한다고 하였단다. 단칸방과 비닐하우스에서 먹고 자던 지난 날 드디어 보상받는 듯하다.

양학선은 또 다른 우리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가진 것보다 가지지 못한 것들이 많고, 가질 수 없는 것 역시 즐비한 채 살고 있다. 양학선도 그랬다. 그러나 양학선이 우리와 달랐던 것은 관점을 바꿔 단점을 장점으로 승화시켰고 환경에 대한 불만도 감사와 최선으로 잠재웠다는 점이다.

 

그것은 기본을 잃고 사는 우리에게 양학선의 금메달이 알려준 귀한 가르침이었다. 꿈을 이루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자세가 무엇인지 알려줬기에 양학선의 비상은, 그래서 눈부실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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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역기를 들 때, 남들은 힘을 넣기 위한 호령쯤으로 생각했지만 그 신음소리를 나는 늘 제대로 듣지 못하였다. 그 역기를 들기까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한계와 싸워야했다. 그 고통을 아는 나였기에 화면 속의 그녀와 쉽게 대면할 수 없었다.

마지막 3차 시기에서 두 손 모아 기도했다. 그러나 장미란은 170kg을 들지 못하였고 인상 125kg, 용상 164kg, 합계 289kg으로 4위에 오르며 이번 런던올림픽을 마감했다.

베이징올림픽이 끝나고 장미란에게서 연락이 왔다. 연락처가 바뀌었단다. 그런데 뒷번호가 특이했다. 혹시 런던올림픽을 의미하냐고 묻자 그렇다고 했다. 2012. 장미란의 핸드폰 뒷번호. 그녀는 베이징올림픽이 끝나자마자 다시 런던올림픽을 준비하고 있었다.

저녁에 가끔 통화를 할 때 장미란은 간식 먹을 시간이라며 서둘러 전화를 끊곤 했다. 그런데 장미란은 그게 정말 싫다고 하였다. 배가 부른데 종목 특성상 간식도 챙겨먹어야한다고. 부른 상태에서 또 먹는 게 자신은 힘들다고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 중 하나가 장미란의 식사량이다. 장미란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많이 먹지 않았다. 배가 부르면 바로 수저를 놓고 식사를 끝내곤 했는데, 그때도 수저를 놓지 못하는 나를 보며 잘 먹는 내가 부럽다고 하였다. 그리고 나서 나는 후식까지 또 시켜먹었는데 그때도 그녀는 먹지 않았다. 장미란과 만날 때마다, 혹은 우리의 만남 소식을 듣고 나서,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늘 나의 기분을 언짢게 하곤 했다. 몇몇 남자들이 웃으며 그녀의 외모와 관련해 나에게 건네는 이야기들은 하나같이 분리수거조차 안 되는 것들이었다. 장미란은 꿈을 위해 자신의 여성성까지 희생하면서 자신 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이름까지 걸고 싸웠던 자랑스런 역도 선수였다. 그렇게 희화화할 대상은 아니었는데, 철없는 몇몇 사람들이 외모를 비하하며 내게 그녀와 관련된 농담을 할 때마다 내가 당한 것처럼 분이 상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도 장미란은 천상 여자라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넓고 포근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태릉선수촌에서 합숙훈련을 하고 있던 와중에도, 그 잠깐의 외출시간을 할애해 내 생일을 축하해줬고 직접 만든 카드를 줄 정도로 배려심이 넘쳤다.

운동을 하느라 꾸미지 못하던 그녀에게 가장 큰 사치는 네일아트였다. 살이 벗겨지고 굳은살이 새로 박여 늘 상해있던 장미란의 손이었지만 가끔 시간이 날 때면 네일아트를 받으러 가는 듯했다. 예쁘게 손톱을 다듬고 투명매니큐어를 바르는 게 가장 큰 사치였다.

대용량 수분크림을 하나 사고선 그것 하나만 바르고 운동했던 장미란. 나중에 시간이 되면 꼭 같이 메이크업 받아보러 가자고 했는데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강릉에 도착했다고 맛있는 카페를 알려달라고 했는데, 그런 것들에겐 ‘통’이 아니었던지라 잘 모르겠다고 했던 것도 마음에 남는다. 집으로 가던 버스 안에서 나를 설레게 하던 그 아이와 있었던 이야기를 했을 때, 소녀처럼 맞장구쳐주던 모습도 잊지 못한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앞두고 중국에 가려고 했지만 회사 일정 때문에 가지 못했었다. 그래서 4년 뒤 런던올림픽 때는 꼭 가겠다고, 마지막 대회일지도 모르는 그 역사의 현장에서 나도 아버님과 같이 태극기를 흔들며 응원하겠다고 했는데, 결국 지키지 못한 약속이 돼버렸다. 그게 참 많이 슬프다.

장미란은 크고 튼튼한 차를 타고 다녔었다. 몸이 재산인 운동선수였기 때문에 늘 조심하며 지냈다. 그런데 운이 나쁘면 이럴 수도 있구나, 했다. 어떻게 뒤차가 들이박는 접촉사고를 당한 것인지. 그 사고나 나지 않았더라면, 하는 가정을 참 많이 했던 지난 새벽이었다.

 


역기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내려놓았을 때, 장미란은 4년 전 금메달을 땄던 그때처럼 무릎을 꿇은 채 짧게 기도를 하고, 바벨을 만지며 굿바이 키스를 보냈다. 국민들을 향한 큰절도 잊지 않았다.

그것이 우리에게 보내는 마지막 작별인사인 것 같아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이 헤어짐이 영원함이 아니기에, 또 다른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날 장미란인 것임을 알면서도 말이다.


내 소중한 벗이었고, 내 큰 영웅이었던 장미란. 그녀 마음 속 평화를 위해, 바벨 앞에서의 그녀처럼, 오늘은 내가 장미란을 위해 아주 오래 기도를 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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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여자 양궁 개인전 결승이 열린 로즈크리켓 경기장. 단체전에 이어 또다시 금사냥에 나선 기보배와 한국 코치들이 무려 3명이나 있는 멕시코대표팀의 로만 아이다가 결승전에 나섰다. 이번 올림픽부터 세트제로 룰이 바뀌었고 5세트를 마친 스코어는 5-5.

쉽게 갈 줄 알았다. 1세트에서 기보배는 3발 모두 9점을 쏘며 27점을 기록한 반면 로만은 두 번째까지 19점을 쏜 뒤 마지막 발을 6점에 쏘고 말았다. 27-25로 기보배가 1세트를 먼저 챙겼다.

그러나 결승전답게 피말리는 접전이었다. 2세트는 26-26으로 비겼고 두 번 연속 10점을 쏜 로만이 26-29로 3세트를 가져갔다. 세트 스코어는 3-3 동점이 됐다.

4세트는 3연속 10점으로 30점을 기록한 기보배가 22점에 그친 로만을 압도했지만 이어 벌어진 5세트에서는 로만이 기보배를 1점 차로 꺾으며 금메달을 위한 슛오프에 돌입했다. 단 1발로 메달의 색이 달라지는데, 어찌 보면 러시안 룰렛 같기도, 그러다보니 축구에서의 승부차기와도 비슷한 룰인 듯싶었다. 보는 이의 심장마저 쫄깃해지는 느낌이랄까.

기보배가 화살을 날리는 순간, 바람이 불었다. 그녀의 머리가 날릴 정도의 바람. 과녁 앞에서는 그보다 더 심한 강풍이 불고 있었고 이를 극복하지 못했던 것인지 8점을 기록했다.

영화 최종병기 활에서 그러지 않았던가. 두려움은 직면하면 그 뿐, 바람은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는 것이다, 라고. 로만 역시 8점을 쐈고 기보배의 화살이 로만보다 중앙에 5mm 더 가까웠기에 승리의 여신은 기보배의 손을 잡았다.

과녁 앞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는 강심장으로 만들기 위해 양궁대표팀은 산으로, 바다로, 그도 모자라 야구장으로, 군부대로, 심지어 공동묘지까지 달려가며 훈련을 했다. 구렁이를 칭칭 감은 채 소리 지르며 화살을 쐈던 기보배의 모습이 생각난다.

그렇지만 이번 개인전에서 기보배는 유독 긴장한 모습이었다. 슈팅 타이밍이 평소보다 길었다. 제한시간에 임박해서 화살을 쏘는 경우가 많았고 원하던 점수가 나오지 않을 때는 얼굴을 돌리며 한숨을 내쉬는 모습도 보였다. 심리적 압박감을 극복하지 못한 듯했다. 슛오프에서 8점을 쏘고 로만의 차례가 됐을 때는 고개를 돌린 채 보지 않았다.

영혼까지 증발시킨다는, 그 정도로 치열하게 경쟁한다는 국내 대표선발전에서는 강한 기보배였지만 유독 메이저대회에서는 약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지난해 토리노에서 열린 세계선수권 대회에서는 32강에서 패했다. 세계랭킹 1위였던 그녀의 충격적인 탈락.

그 후 1년간 화살을 쏠 때마다 패배의 아픈 트라우마가 화살처럼 머리와 가슴을 건드렸을 것이다. 대표팀 내에서도 유독 마음이 여린 기보배였다고 하니. 그 어려움의 시간을 참고 견딘 뒤에 건진 메달이기에 더욱 값져보였다. 그녀의 트레이드마크인 반달 눈웃음만큼이나.

 


그리고 같은 날 동메달을 딴 여자 펜싱 플뢰레 대표팀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길옥(강원도청) 전희숙(서울시청) 오하나(성남시청) 남현희(31·성남시청) 이 네 명의 여제들은 2009년부터 올해까지 4년 연속 아시아선수권 단체전 우승을 기록한 검객 중의 검객이다.
그 중에서도 남현희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겠다. 대중이 기억하는 남현희는 2008베이징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딴 그때의 남현희일 것이다. 올림픽 은메달의 스포트라이트가 워낙에 커서였지만 2006도하아시안게임에서 남현희는 개인전과 단체전 금메달을 땄고 2010광저우아시안게임에서도 개인과 단체 모두 금메달을 목에 걸며 2연패의 위업을 달성했다.

아시아선수권에서도 3년 연속 2관왕에 오른 명실 공히 아시아의 최강자였지만 세계무대에서는 늘 마지막 문턱을 넘지 못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결승전에서는 종료 4초 전 역전 유효타를 허용해 은메달에 머물렀고 이번 대회에서도 개인전 준결승과 3-4위전에서 연달아 막판 역전을 허용하는 바람에 노메달에 그치고 말았다.

 


단체전에서도 동메달을 딴 후에서야 남현희는 개인전에서 메달을 따지 못해 죽을 지경이었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남현희에게는 마지막일 수도 있는 국제대회였다. 2006년 성형파동으로 대표팀에서도 쫓겨나며 자격정지 2년이라는 중징계도 받았지만 2008년 올림픽에서 보란 듯이 은메달을 따냈던, 그래서 더 기특했던 그녀. 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예쁘게 꾸미고 다니는 여자운동선수들에게 그럴 시간에 운동이나 더 하라며, 개인의 취향을 존중하지 않는 지도자나 팬들을 보는 경우가 그동안 많았다. 그 편견을 남현희가 깨준 것 같아 더 큰 박수를 보냈던 기억이 난다.

155cm 밖에 되지 않은 키로 머리 하나 큰 유럽 선수들을 상대로 기죽지 않은 플레이를 선보였던 남현희. 치고 빠지는 남현희 특유의 현란한 스텝을 이제는 볼 수 없을지 몰라도 대한민국 펜싱 역사는 기억할 것이다. 한국 펜싱 사상 최초로 올림픽에서 2개의 메달을 딴 땅콩검객 남현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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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유도 90kg이 끝나고 대한체육회에 올라온 글이다. 대한체육회도 송대남의 금메달을 예상하지 못했나보다. 사진이 없어 급하게 싸이월드에서 퍼온 사진으로 축하 포스팅을 작성했다. 이럴 때 사람들이 웃프다, 라는 말을 쓰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금메달 세레모니 때 찍은 사진. 사진을 보니 그제야 송대남의 나이와 연륜이 느껴진다. 보통의 국가대표 선수들과 다르게 웃으니 얼굴에 주름이 한가득이다. 바로 전 권총에서 금메달을 딴 19살 김장미를 보다 송대남으로 시선을 돌려서인가. 프로필을 살펴보니 1979년생이다. 우리나이로 34살. 축구계에서는 노장으로 취급받는 나이인데, 유도계에서는 환갑으로 여겨지는 나이란다. 세계랭팅 17위의 ‘할아버지’ 선수의 금메달 획득은 대한체육회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사진을 미리 준비하지 못한 체육회를 마음 놓고 탓할 수만은 없겠다.

 

 

 


연장전에서 11초 만에 기습적인 안뒤축 감아치기를 성공시키며 경기를 끝냈다. 둘째손가락으로 관중석도 가리키더니 엄지로 KOR가 박혀있는 자신의 백넘버를 우리에게 보여주던 송대남. 매트에 인사를 하고 멋지게 내려왔는데, 동서지간인 ^^정훈 감독을 만나고 나서부턴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메달 세레모니 중에도 그는 울먹울먹했다. 활짝 웃다가 명치끝에서부터 올라오는 울음을 꾹꾹 눌러 참는 모습이 보였다. 관중석을 한 바퀴 돌며 인사할 때도 같은 모습이 반복됐다. 현장에서 중계하던 김정일 아나운서는 결국 그런 송대남의 모습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물론 나 역시 그랬다.  

송대남은 34살에 처음으로 올림픽에 참가했다. 그동안은 인연이 없었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서는 권영우,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는 김재범에게 밀렸기 때문이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최종선발전에서는 한참 어렸던 후배 김재범에게 올림픽 티켓을 내줬다. 당시 김재범은 이원희를 제압한 왕기춘을 피해 체급을 81kg로 올렸고 같은 체급이었던 송대남에게 도미노처럼 영향을 끼치고 말았다. 그때 송대남의 나이가 서른이었고 10살 가까이 차이나는 어린 후배의 베이징올림픽 은메달 소식을 들으며 자연스럽게 은퇴를 생각했다.

 


그런 송대남에게 자신의 처제를 시켜주고 재기의 발판을 마련해준 사람이 유도대표팀 정훈감독이다. 그 뒤 81kg급에서 다시 정상을 달리게 됐지만 2010년 11월 무릎 수술로 매트 위를 떠나있어야했다. 끊어진 십자인대를 잇는 수술인데, 보통 축구선수들이 받는 수술과 비슷한 듯하다. 경기 중 손상된 인대를 재건하는 수술의 경우 재활까지 4-5개월이 걸린다. 강원FC의 배효성의 경우 인대만 부분적으로 파열됐는데 복귀까지 3달이 걸렸다. 수술을 하고나면 재활까지 시간이 더 걸릴 수밖에 없는데 송대남은 1달만에 재활훈련을 끝냈다고 한다. 배효성도 근육이 촘촘히 자리 잡고 있어 회복이 빨랐는데 송대남도 비슷했다. 남다르게 발달한 근육세포 덕이라고 하나 여기에 본인의 의지와 노력이 첨가됐기에 복귀가 빨랐던 것 같다. 송대남의 간절함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이듬해인 2011년 3월 송대남은 파격적인 결정을 내렸다. 90kg으로 체급을 변경하기로 한 것이다. 체급변경은 쉬운 일이 아니다. 베이징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최민호도 66kg으로 체급을 올렸다가 밀리며 이번 런던올림픽에는 참가하지 못했다. 90kg으로 체급을 올리자 기존에 쉽게 사용했던 기술들이 근력과 파워에 밀리며 먹혀들지 않았다. 적응에는 시간이 필요한 법이지만 올림픽까지는 딱 1년 남았고 국가대표선발전까지는 이보다 더 적은 시간이 주어졌다. 상상을 넘어선 훈련량 말고는 달리 극복할 방법이 없었다.

34살 송대남은 유도 90kg급에 출전한 선수들 가운데 37세 영국의 윈스턴 고든 다음으로 나이가 많다. 나이 뿐 아니다. 유도국가대표팀에는 용인대-마사회라는 성골출신 선수들이 즐비하다. 유도계에서는 비주류라고 할 수 있는 청주대를 나와 시청 소속 선수로서 그 끈끈한 카르텔 속으로 비집고 들어가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가 세상의 편견과 맞서 싸우는 것이다. 주변에서 넌 안 될 거야, 라고 말하면 그 소리가 듣기 싫어서, 혹은 정말로 이루지 못할 것 같아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지기 때문이다. 그것이 반복되다 보면 어느새 부딪히고 도전하던 내 자신의 모습은 과거라는 파도에 휩쓸려 사라지고 만다. 슬픈 일이다.

태릉선수촌에서 띠동갑에 가까운 선수들과 훈련하면서, 송대남은 나이 많고 체력 떨어진 34살 노장 선수가 무엇을 이룰 수 있겠냐는 주변의 안타까운 시선과 만났을 것이다. 나이가 숫자에 불과하지 않기 때문에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는 이 사회에, 송대남의 금메달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그렇다. 우리는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야한다. 그래야 송대남처럼 편견 속에서도 도전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고, 그처럼 꿈을 이룰 수 있는 법이다. ‘오빠’ 송대남에게 존경의 박수를 보낸다. ^^ 

 

김병지 선수도 송대남 선수를 이렇게 멋지게 축하해주셨다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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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김재범이 유도 81kg 이하급에서 금메달을 땄다. 효자종목으로 불리던 유도에서 따낸 첫 번째 금메달이었다. 4년 전 자신을 누르고 베이징올림픽 금메달리스트에 오른 독일의 비쇼프와의 한판대결에서 따낸 금메달이었기에 그 감격은 남달랐다.

4년 전 비쇼프의 안다리 걸기 기술에 유효를 내준 뒤 일방적으로 밀렸던 김재범이었지만 4년 후는 달랐다. 안다기 걸기로 선제점을 따내며 우위에 올랐고 2분 여 뒤에는 엎어치기 공격에 성공했다. 비쇼프는 모든 것을 다 내려놓은 표정을 한 채 경기 내내 끌려 다녔다. 효과적인 공격과 안정적 전술이 빛나던 완벽한 경기였다.

 

 


금메달이 확정되고 하늘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는데, 김재범의 마음이 조금은 짐작이 되었다. 같은 상대와 만나 통한의 눈물을 흘렸던 4년 전 과거의 ‘나’와 지금 이 순간을 위해 4년 간 단내 나는 훈련과 고통을 참았던 지금의 ‘나’가 오버랩되는 바람에 좀처럼 눈물을 참기 힘들었을 것이다.

도복을 가다듬고 승부를 겨뤘던 두 선수가 인사를 나누는데, 김재범이 격정의 눈물을 터뜨리며 좀처럼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채 비쇼프에게 그만 안기고 말았다. 81kg급의 새 영웅도래를 인정한 것인가. 비쇼프는 그런 김재범을 수초간 다독거려주며 축하해주고 있었다.

 

 
유도는 예로 시작해 예로 끝나는 스포츠다. 예의와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을 가장 중요시하게 생각하는데, 패배를 깨끗이 인정하고 진심어린 박수를 보내주던 비쇼프에게선 스포츠의 진정성이 느껴졌다.

 

 


시상대에 오르기 전 멋진 대결을 펼친 비쇼프를 향해 김재범이 손을 내밀었다. 사나이답게 하이파이브를 하며 축하해주는 비쇼프의 모습 또한 선명하게 각인됐다. 어디 그 뿐이던가. 경기장을 한 바퀴 돌며 관중에게 인사를 할 때도 비쇼프는 금메달인 김재범에게 먼저 나가라며 손짓했고 기자들 앞에서 포즈를 취할 때도 가운데로 에스코트하며 금메달리스트 김재범을 우대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키 커 보이려고 까치발한 건 정말 웃음이... ^^

 


메달의 색깔이 바뀌는 숨 막히는 순간 앞에서 규칙과 존중은 실종되기 쉽다. 선수들에게 올림픽의 기본정신을 강조하지만 경기 종료 후 자신의 패배가 확정됐을 때에도 스포츠맨쉽을 발휘하기란 쉽지 않다.

믿고 싶지 않은 패배 앞에서 실천하기란 쉽지 않음을 알기에 비쇼프의 여유와 진심어린 축하는 유난히 더 반짝반짝 빛났다.

그리고 마지막. 김재범이 보여준 투혼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금메달 확정 후 플래시인터뷰에서 김재범은 “4년 전에는 죽기 살기로 했다. 그러니 졌다. 지금은 죽기로 했다. 그래서 이겼다”라는 소감을 밝혔다.

매트 위에서 죽을 각오로 경기에 임했다는 이야기였는데, 그의 몸 상태를 살펴보니 그럴 만 했다. 왼쪽 팔꿈치 인대는 늘어났고 왼쪽 손가락 인대는 1달 전에 끊어졌다. 움직일 때마다 덜렁거린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고장 난 왼쪽 무릎과 고질적인 왼쪽 어깨탈골이 김재범을 괴롭혔다. 결국 성한 곳 하나 없는 왼쪽을 포기한 채 오른쪽으로만 공격하며 버티며 결승까지 올랐던 것이다.


올 초 김재범은 방송사와의 인터뷰 도중 올림픽이 끝나면 쉴 날이 많기 때문에 내 몸이 참고 버텨줬으면 좋겠다는 속내를 털어 논 적이 있다. 습관성 어깨 탈골은 수술 밖에 방법이 없다. 재활을 통해 치료를 한다고 하더라도 결국 예기치 않은 충격으로 인해 다시 탈골되고 손으로 뼈를 맞추는 일을 반복한다. 축구선수들 중에도 수비와 태클을 반복하다 어깨를 다치고 습관성이 되는 선수들도 종종 있는데 결국엔 다들 수술대에 올라간다. 운동을 하는 동안 탈골을 막는 방법은 수술 밖에 없기 때문이다.

“올림픽이 끝난 후 수술대 위에 올라가서 어떻게 되든 상관없으니 올림픽 때까지만 버텨줬으면 좋겠다”던 김재범은 결승전 당일에는 “팔이 부러져도 좋으니 오늘까지만 버티게 해달라고 기도했다”고 말했다.

 


그 절박함이 지금의 김재범을 괴물로 만든 것일까. 김재범은 이번 런던올림픽 금메달로 그랜드슬램(올림픽, 세계선수권, 아시안게임, 아시아선수권) 작성이라는 위업을 달성했다.

한계를 극복한 괴물 김재범의 이야기와 깨끗하게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며 축하와 격려를 아끼지 않은 비쇼프의 모습은, 연일 오심으로 우리 마음을 멍들게 했던 올림픽이 그래도 살아있음을 알려주는 방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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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2008년 대한민국 수영역사상 처음으로 올림픽메달을 안겨줬던 소년, 박태환. 수영의 불모지라고 할 수 있는 우리나라에서 나고 자란 선수가, 아시아인이 아닌 전세계인과 경쟁을 치러야했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는 사실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하지만 박태환의 금메달 소식은 그저 반가운 스포츠 뉴스 중 하나에 불과했다. 기본적으로 국제대회에서 선수들이 전해주는 이야기는 하나의 감동스토리로 연결되곤 하는데, 단지 금메달을 땄다는 이유만으로 박태환 스토리에 갑자기 감동을 받을 순 없었다. 사실 모든 국가대표 선수들이 그만큼의 땀을 흘리지 않던가. 열심히 하는 것은 기본이기에 박태환 관련 뉴스는 내게 그저 배경지식을 보태는데 도움을 주는 일에 불과했다.

4년 뒤에 런던올림픽에서 다시 만난 박태환. 여전히 ‘마린보이’라는 별명이 잘 어울리는 선수였다. 아직도 청년보다는 소년이라는 단어를 써야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마냥 어리게만 보였던 박태환은 분명 진화했다. 부정출발이라는 오심으로 400m 예선탈락이라는 충격적 사건이 터진 직후에야 깨달았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을테고,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던 그 순간에도, 박태환은 미소를 잃지 않았고 담담하게 자신의 생각을 전달했다. 쉽지 않았을 일이다. 결국 은메달을 따고 믹스트존에서 인터뷰를 하며 지옥에서 천국으로 간 시간을 복기할 때, 그제야 박태환은 꾹꾹 눌러왔던 감정들을 내보였다. 그러나 그는 혼자 숙소 방에 앉아 오심이 번복되길 기다리며 괴로움과 싸워야했음에도 시합이 끝나기 전까지는 결코 내색하지 않았다. 그 감정의 절제가 쉽지 않음을 알기에, 어느새 박태환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의 경지에 올라와있음을 나는 깨달았다.

그리고 다시 시작된 자유형 200m에서 박태환은 또다시 은메달을 땄다. 400m 결승을 마치고 인터뷰 내일 하면 안 되냐며 눈물을 보였던 박태환이, 이번엔 진행요원들의 제지가 있을 때까지 기자들과 믹스트존에서 인터뷰를 했단다.

“아넬은 왜 그렇게 빨라요? 마지막 5m는 정말 못 가겠더라고요. 근데 저보다 신체가 크잖아요.”

경기 후 진행된 인터뷰 기사를 읽어보니 싱글벙글 박태환의 모습이 그러졌다. 이럴 땐 또 소년 같은데 또 어른스럽게 은메달의 의미를 이야기한다.

“아넬은 물론 쑨양과 같이 200m에서 레이스 같이 했다는 게 의미가 있어요. 색깔은 금이 아니지만 올림픽 은메달이 아니라 메달을 또 하나 걸 수 있다는 거 역시 큰 의미에요. 런던이라는 무대가 큰 의미가 있었어요. 금도 따고 싶었지만 전 그래도 은색이 더 멋있는 것 같아요.”

결승에서 쑨양과의 만남을 라이벌 구도로 보는 언론 앞에서 박태환은 “아시아선수 2명이 자유형 200m에서 함께 은메달을 딴 것은 큰 의미”라며 아시아수영의 발전으로 의미를 확대시켰다.

박태환은 진화했다. 이제는 정신적으로도 성숙한 박태환에게서 나는 레전드의 향기를 느낀다.

박태환은 이제 명실공히 한국 수영계의 살아있는 영웅이다. 그가 가르는 물살 위에서 늘 새로운 역사가 쓰여지고 있다. 박태환은 2006년 도하아시안게임 3관왕(자유형 200m, 400m, 1500m)과 대회 MVP으로 우리를 놀라게 했으며 이듬해에는 한국 수영 역사상 최초로 세계선수권 대회 우승(자유형 400m)이라는 위업을 작성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는 동양인 최초로 400m 금메달을 땄으며 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에서는 3관왕에 오르며 아시안게임 2연속 3관왕이라는 새로운 기록을 올렸다. 박태환은 이듬해인 2011년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하며 다시 한 번 금자탑을 쌓았다. 그리고 이번 올림픽에서는 우리나라 남자선수들 가운데 최초로 2연속 2개 메달 획득이라는 또 다른 기록을 세웠다.

 


유난히 승부사기질이 강한 박태환이기에 금메달을 따고 싶은 마음은 누구보다도 컸을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남은 에너지까지 다 쏟아낸 박태환이기에 “후회는 없다”며 웃었다. 그 웃음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은메달이 더 예쁜 것 같다”는 박태환의 그 진심이 나는 더 예쁘다. 금만이 빛나는 존재이고 귀중한 것이라고 생각하던 우리에게 색깔과 상관없이 모든 메달은 값지고 고귀하다는 것을 박태환은 말과 행동으로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박태환이라 쓰고 레전드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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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실격 후 가진 플래시 인터뷰. 실격처리가 어떻게 된 건지 아는가? 본인의 레이스에 문제가 있었냐고 생각하나? 결과를 기다려봐야지 알 수 있을까? 페이스는 괜찮았던 것 같은데?


경기 후 중계사와 갖는 인터뷰이기 때문에 플래시 인터뷰는 실격과 상관없이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어디서 부정출발을 했는지도 모르는, 요즘 말로 ‘멘붕’ 같은 상황 앞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그런데도 박태환은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 덤덤하게, 그리고 옅게 웃으며 말했다.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중요한 경기에서 뼈아픈 패배를 당했을 때, 선수들은 아무 말도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관계자에게 인터뷰를 하지 않게해달라고 부탁하는 선수가 있는가하면 애써 기자들을 외면하고 가는 선수도 있다. 혹 인터뷰를 하게 되더라도 표정관리가 되지 않아 정신적으로 얼마나 무너졌는지를 얼굴과 화법에서 드러내는 선수도 있다.

모든 것이 무너질 수도 있는 상황 앞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하려던 박태환을 보며 처음에는 놀랐고 이후에는 마음 아팠다.

“(실격 후) 계속 숙소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오후에 경기가 있는지 없는지 몰라 답답했다. 마냥 기다리는 상황이라 답답했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 당시에도 박태환은 예선에서 부정출발로 실격 당한 아픈 기억이 있다. 그때 중학생이던 박태환은 화장실에서 2시간 동안 혼자 울며 앉아있었다고. 꿈이 조각나는 것만큼 좌절스러운 것이 또 있을까. 평행이론이 생각나는 상황이었다. 박태환은 숙소에서 기다리던 그 4시간이 참 길었다고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바닥으로 떨어진 듯 한 그 순간, 기적처럼 결승행 소식이 들려왔다. 그리고 우리는 대한민국의 아들 박태환의 레이스를 보기 위해 지난 새벽을 지새웠다.

초반부터 박태환은 거세게 나갔다. 실격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한 나름의 작전이었던 듯하다. 그러나 기세를 잡아 1위로 달리던 박태환은 350m 지점부터 역전을 당하며 3분40초14를 기록한 쑨양에게 금메달을 내주고 말았다.

3분42초06. 2위. 만약 실격파동이 있지 않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결과. 그럼에도 박태환은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으며 플래시 인터뷰에 응했다. 시상대에 오르기 전 얼굴에서 아쉬움이 읽혀지지도 했으나 다시 웃으며 시상대에 올랐다.

“최선을 다해 후회는 없다. 나에게는 은메달도 값지다”던 박태환은 “내 자신을 이겨내고 쫓아가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결과적으로 내 실력이 부족해 졌다. 그래도 아시아 선수가 금메달을 따서 좋다”며 라이벌 쑨양에게 축하인사를 전했다.

여전히 청춘의 한가운데 있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중요한 순간마다 고초와 만났던 박태환이다. 이를 극복하며 운동하면서 길러진 또 다른 것이 혜안이 아니었나 싶다. 그의 인터뷰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으니.

“2009년 바닥으로 내려갔다 힘들게 다시 올라왔다. 그런데 오늘은 그 모든 걸 하루 만에 다 한 것 같다. 롤러코스터라도 탄 것처럼.”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최초로 메달 2개를 목에 걸었던 박태환은 2009년 로마세계선수권대회에서 출전했던 자유형 200m, 400m, 1500m 모두 결승 진출에 실패하는 수모를 겪은 바 있다. 그리고 2년 뒤 2010 팬퍼시픽 수영 선수권 대회에 자유형 400m와 200m에서 금메달과 은메달을 따며 다시 재기에 성공했었다. 2년 간 고초와 극복을 반복하느라 정신적으로 힘들었는데, 이번엔 하루 만에 극에서 극으로 달렸으니 마인드 컨트롤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울었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아니라며 그냥 답답했다고 말했던 박태환. 마지막에 결국 참았던 눈물을 쏟아내며 내일 인터뷰 하면 안 되겠냐며 자리를 떴지만 400m 레이스가 펼쳐졌던 7월 28일, 박태환이 보여준 모습은 한국 수영계의 ‘레전드’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실격 후 방송사와의 인터뷰에서 감정 노출을 자제했던 모습과 아시아 선수의 금메달 획득을 축하한다고 말하며 보여준 마음 씀씀이, 그리고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마지막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으며 최선을 다해 응해준 태도에서 프로다움의 가치와 깊이를 느낄 수 있었다.

박태환이 보여준, 가장 빛나던 레이스가 아니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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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대학시절 언젠가 황영조 선수가 특강을 하러 온 적이 있습니다.

당시 그는 운동기계 같은 삶을 강요하는 현 운동계의 시스템에 대해서 열변을 토했습니다. 어떤 날은 훈련이 너무 힘들어 달리고 있던 도중 도로 위로 뛰어들고 싶다고 말이죠. 차라리 차에 치여서 다쳐 운동을 못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많이 힘들었다고 하는데, 얼마나 고통이 심했으면 다치다 못해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까, 하는 생각에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우리에게는 국민 마라토너였죠. 이봉주 선수가 오늘 은퇴를 했습니다. 1990년 전국체전에서 처음 42.195km를 달렸던 그는, 자신이 데뷔했던 그 전국체전에서 은퇴하며 선수생활을 마감했습니다.

19년의 선수생활 중 그간 그가 완주한 마라톤 코스는 41회. 중도포기는 단 두차례에 불과할 정도라고 하니 세계 마라톤사에 앞으로도 지워지지 않을 기록인 듯 싶습니다. 참고로 몬주익의 영웅 황영조 선수는 마라톤 완주 횟수가 8번이라고 하니 이봉주 선수가 얼마나 대단한 기록을 세웠는지 짐작이 가시죠?

은퇴를 하며 눈물을 흘렸던 이봉주 선수. 아마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지 못했다는 아쉬움도 컸겠지요. 황영조 선수가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며 손기정 옹에 이어 다시 한번 월계관을 썼지만 다음 대회였던 애틀란타올림픽에 나선 이봉주 선수는 아쉽게 은메달에 그쳤습니다. 2001년 마라토너들에게는 꿈과 같은 보스톤마라톤에서 1위를 하며 화려하게 꽃을 피웠지만 이상하게도 우리에겐 1인자보단 2인자로 기억되는 이봉주 선수.

하지만 그가 마라톤을 그만두지 않고, 달리고 또 달리며 계속해서 도전했던 이유는 단순히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기 위함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대회를 앞두고 고기만 먹다 다시 탄수화물만 섭취하는 식이요법과(강원FC 선수들도 소고기만 먹다 경기 이틀 전에는 탄수화물 섭취를 늘리는데 정말 괴롭다고 하더군요. 한데 마라토너들은 이보다 더 강도가 높으니 그 고통이 어떨지... 다는 아니더라도 조금은 이해가 갑니다.) 하루 30~40km를 달리는 지옥훈련까지. 메달만이 목표였다면 그는 이겨내지 못했겠죠.

힘들지만 달리는 것이 좋았다던, 그리고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고 싶다던 이봉주 선수. 평발인 것도 모자라 양발 사이즈가 달라 뛸 때 몸의 균형이 맞지 않았지만 특유의 꾸준함과 도전정신으로 신체적 약점을 극복했습니다.

힘들고 배고프다는 이유로 마라톤에 도전하는 선수들이 없는 요즈음, 이봉주의 역주는 단순히 마라톤이 아닌 우리 인생에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나이와 신체에서 오는 불리함을 극복하고, 고통 속에서도 띄었던 걸음 걸음은, 나를 비롯한 또다른 누군가에게는 희망의 다른 이름이었겠죠.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제는 사랑하는 아들과 함께 그간 함께 하지 못했던 시간들을 보상받으세요.

이제는 더 이상 뛰는 모습을 보지 못하겠지만 우리 기억 속에는 최고의 마라토너로 남아있을 것입니다. 포기를 모르던 당신의 모습은 우리 생애 최고의 감동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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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최근 나이트클럽에서 여성의 뺨을 때린 혐의로 조사를 받았던 유도국가대표 왕기춘 선수가 자신의 팬카페에 “앞으로 매트에 서는 모습을 보지 못할 것”이라며 은퇴를 시사하는 글을 남겼습니다.

왕기춘 선수는 얼마 전 열린 2009 세계선수권대회 남자 73kg에서 우승, 베이징올림픽 은메달의 설움을 극복하며 세계선수권 2연패라는 금자탑을 달성한 바 있습니다. 때 아닌 은퇴 선언은 모두에게 깜짝 놀랄만한 소식이었는데요, 아마도 폭행시비가 생긴 장소와 폭행 대상이 여성이었다는 점에서 파장이 더욱 커졌기 때문에 이러한 발언을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선수입장에서 올 한해 가장 큰 국제대회는 세계선수권이었고 그 대회에서 우승했으니 운동에만 집중했던 자신에게 상을 주고 싶었겠죠. 그간 못 보던 친구들도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런데 장소가 하필 나이트클럽이었고 피해여성은 자신의 친구를 데리고 나가려는 모습에 놀라 따라갔다가 시비가 붙고 뺨을 맞았다고 하니 사건은 일파만파 파장이 클 수밖에 없습니다. 어쨌거나 뺨을 조금 세게 만진 수준이었다고 하여도 폭행은 폭행이고, 더구나 여성에게 가했다는 점에서 더욱 용서받기 힘들 듯합니다.

최근 들어 운동선수들의 스캔들이 자주 터지는 듯합니다. 한데 연예들보다 선수들의 스캔들이 대중에게 충격 내지는 놀라움으로 더욱 크게 다가올 수밖에 없는 까닭은 모름지기 운동선수라면 술, 담배, 이성은 멀리해야한다는 생각이 일반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스캔들이라는 게 술집이나 나이트클럽에서 자주 발생하다보니 스캔들은 선수들의 또 다른 일탈로 받아들여지게 되고 때문에 대중의 반향동안 클 수밖에 없는 거죠.

얼마 전에는 이천수 선수가 술집에서 여성에게 폭행을 가했다며 고소를 당하기도 하였는데요, 운동선수와 여자는 정말 따로 놓기 힘든 문제인 것 같습니다. 불과 국내에만 국한되나요. 박지성 선수가 몸담고 있는, 그래서 우리에게는 국민클럽처럼 여겨지고 있는 맨체스터Utd. 역시 세계적인 클래스의 선수들이 자주 여자문제로 시끌시끌했었죠.

2007년에는 맨체스터Utd. 선수들이 주최한 크리스마스 파티(해마다 맨체스터Utd. 선수들은 크리스마스 파티를 크게 열기로 유명하죠. 이적 초반에는 박지성 선수에게도 파티에 초대받아 간적이 있냐고 물어보기도 했었죠. )에서 조니 에반스가 26세 여성을 성폭행한 혐의를 받고 보석으로 풀려나기도 했었죠.


여성 문제로 가장 많이 언론에 오르내린 사람은 아무래도 C. 호날두가 아닐련지요. 여자친구가 자주 바뀌는 건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2년 전 매춘부들을 집으로 불러들여 나니, 안데르손 등 라틴계 선수들과 함께 파티를 벌인 일은 솔직히 쉽게 넘어가기는 힘든 사건이었죠.

현장에서 선수들을 접하다보면 이런 저런 고민들을 듣게 됩니다. 젊은 날 폭발적으로 자신이 가진 모든 능력을 보여줘서 인정을 받아야하는데, 그 시기가 남들보다 길었으면 한다는 것. 그것이 대다수 운동선수들의 목표입니다. 국가대표가 꿈인 선수들도 많지만 국가대표가 되고 싶다는 꿈보다는 프로에서 선수생활을 오래하고 싶다는 게 꿈인 선수들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은퇴 후에는 선수시절 벌었던 연봉만큼의 소득이 보장되는 것이 아님을 알기에 그들은 더 오래 뛰길 바라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 운동에 해가 되는 술, 담배, 여자를 멀리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선수들은 언제나 정해진 스케쥴 안에서 움직이며 경기를 앞두고는 극한의 고통 속에서 싸워가며 운동을 합니다. 그러니 얼마나 스트레스가 많이 받겠나요. 특히나 경기 결과에 따라 스트레스의 강도는 극명하게 갈립니다. 그래서 운동선수들이 단명한다는 연구결과도 나오는 것이겠지요.

시합이 끝나고 외박이나 휴가가 주어지면 평소에 하지 못했던 것들에 손을 대며 스트레스를 풀게 되는데요, 대표적인 게 바로 술과 여자입니다. 그런데 사실 전 휴가 때 술 마시고 여자 만나는 선수들에게 차마 돌은 던지지 못하겠습니다. 정말 군인처럼 일년에 쉴 수 있는 날이 손으로 셀 수 있을 정도인데, 그 시간에도 몸에 좋은 것만 먹고 일찍 자야한다면... 친구들과 술 마시며 회포를 푸는 것만으로도 직장 내 스트레스가 줄어든다는 걸 아는 사람으로서 이해할 수가 없다는 말은 못하겠더군요.

그러나, 역시나 조절은 필요하겠지요. 고참 선수들은 여자를 만나는 게 문제가 되는 경우는 ‘오버’를 하는 바람에 몸이 축나기 때문이라고 다들 입을 모아 말합니다. 남녀사이를 가까워지게 만드는 게 술이고, 여자를 만나면 꼭 술이 함께 있게 되고, 그러면서 시간을 보내다보면 잠자는 시간이 줄어들어 몸이 축난다는 얘기입니다.

요즘 세상은 잘나가는 운동선수들이 살기엔 너무 많은 유혹들로 가득 차 있죠. 리그가 발전함에 따라 선수들의 연봉은 일반 회사원들이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높기만 하고, 명예와 인기를 동시에 얻습니다. 거기에 근육질의 탄탄한 몸매까지 갖고 있는 터라 모델 못지 않은 옷발을 자랑합니다. 그런 남자들에게서 매력을 느끼지 않을 여자들은 없겠죠.

하여 제 주변 선수들만 봐도 무수히 많은 여자들에게서 연락이 쏟아지더군요. 심지어 여자친구가 있는 사람에게도 No.2가 되도 좋으니 만나자, 바람이나 피자며 육탄공세를 안가리기도 하고요. 운동 선수들에 한해서 나이트나 가라오케 가격을 깎아주기도 하고요. 거기에 지갑은 늘 두둑하니 유흥에 빠지기 쉬울 수도 있겠죠.

뭐 그래도 전 선수들이 휴가 때 여자랑 데이트도 하고 술도 마시는 부분에 대해 이해하는 편입니다. 반복되는 훈련과 시합, 그리고 경기 결과에 따른 희비 속에서 늘 초조하게 살고 있는 그들에게 휴가에도 성직자 같은 삶을 강요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러나 과유불급은 좋지 않는 법이므로 스스로 정한 ‘룰’에 따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래서 제가 이해하는 선은 보통 여자를 만나도 카페 데이트를 하거나 술이 고파도 맥주 몇잔에 국한되는 것이겠지요. 하여 닥치는 대로 여자 만나고 미친듯이 술 퍼마시는 선수는 이해못하겠습니다.

K-리그 현역 최고령 선수인 김기동 선수나 U-20대표팀 서정원 코치 같은 경우는 지금도 탄산음료를 입에 대지 않습니다. 술자리에서 녹차를 마시고요, 인스턴트 식품 또한 멀리하며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김기동 선수는 현역 최고령 득점 기록을 갖고 있고, 그의 매 경기가 곧 기록 갱신의 순간이니 살아있는 레전드라 불러도 과언이 아닙니다. 서정원 코치 역시 바른생활 덕분에 30대 후반에도 오스트리아리그에서 최우수 선수로 뽑히며 전성기 못지 않은 활약을 이어나갔던 것이고요. 확실히 유혹을 이겨가며, 극기의 고통을 이겼을 때 확실히 하늘은 원하는 것을 내려주시는 것 같습니다.


하나를 얻기 위해선 하나를 잃는다는 것은 결국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일정 부분 희생이 있어야함을 뜻합니다. 하고 싶은 걸 다하면서 원하는 걸 이루긴 힘들죠. 그렇기 때문에 아마추어 선수들일지라도 마음과 행동만큼은 프로처럼, 그리고 프로선수들은 프로라는 이름에 걸맞게 노력해야하는 것이겠지요.

그럴 때 대중은 비로소 존경의 박수를 보내는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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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성모를 처음 봤던 건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당시였습니다. TV를 보는데 태극마크가 그려진 모자를 쓰고 있던 어린 소년이 카메라를 잡아먹을 듯 다가가더군요. 순간, 뭐 이런 선수가 다 있나, 하는 황당함에 웃고 말았습니다.

보통 경기 시작 전 호명할 시 선수들은 손을 들며 관중들에게 인사를 하고, 중계 카메라는 그런 선수의 모습을 잡곤 하죠. 한데 성모는 마치 랩퍼 같은 모양새로 카메라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갔고 그 엉뚱함에 저는 와, 하며 웃음보를 터뜨리고 말았던 거죠.


그 4차원 소년은 자유형 1500m 경기에서 은메달을 땄습니다. 기자들이 그에게 달려가 소감을 물었던 것은 당연하고요. 한데 성모의 대답이 재밌었습니다. 저는 좋은데 사람들은 별로 안 좋아할 것 같아요, 이었거든요. 이유인즉슨 "사람들은 금메달만 좋아하잖아요. 2등은 별로 기억도 안하잖아요"였습니다. 1등지상주의를 꼬집은 발언에 놀랐는데요, 그 다음 대답은 다시 저를 웃게 만들었지요. "근데 일본은 이겨서 좋아요. 신나요." 하며 부리부리한 눈빛에 한번 힘을 꽉 주는데, 수영계에 참 재밌는 선수가 나타났구나, 하는 생각을 한참동안 했었지요.


그의 이름은 조성모.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씨의 둘째 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6개월 후 저는 성모를 다시 만났습니다. 20살이 된 성모는 제가 다니던 학교에 입학했고 조오련씨의 아들과 아시안게임 수영 은메달리스트라는 후광이 겹쳐, 당시 학보사 기자였던 전 성모를 인터뷰하게 됐지요.

당시 제가 찍은 성모사진입니다.


당시 성모는 유명한 아버지를 둬서 남들은 부럽다 하지만 자신을 그렇지 못할 때가 많았다고 했습니다. 조오련의 아들이 아닌 조성모라는 이름으로 살고 싶은데 아버지와 같은 수영인으로 살다보니 늘 아버지의 그늘에 가려진 듯한 느낌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내 배시시 웃으며 언젠가는 당당히 자신의 실력으로 평가받겠다고 말했죠.

성모가 수영을 처음 시작한 것은 4살 때. "어느 날 보니 내가 수영을 하고 있었어요. 너무 어려 기억조차 나지 않을 때부터 수영을 했던 것 같아요"라고 말했지요.

성모가 참으로 대견스러웠던 것은 2001년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슬픔 속에서도 묵묵히 물살을 갈랐다는 것에 있었죠.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에서 은메달 뒤에는 그런 아픔이 있었던 것입니다.

멕시코와 미국을 오가며 수영을 배우던 청소년기 시절, 아버지와 어머니 형이 보고 싶어 혼자서 방에 앉아 울기도 많이 울었다는 성모. 외국에서 운동을 하느라 가족과 관련된 추억이 하나도 없어 슬프다며, 돌아가신 어머니 얘기를 했었지요. 측은지심에 아무 말도 못하자 "왜 그런 표정 지으세요? 이젠 괜찮아요. 가끔 집에 밥도 없고 먼지가 잔뜩 쌓여있는 거 보면 엄마 생각이 더 많이 나기도 하지만. 이런 제가 안쓰러우면 가끔 저희 집에 오셔서 청소 좀 해주세요. 진짜 바닥에 먼지가 너무 많아서 소파랑 침대 위에서만 생활하고 있어요"라는 말과 함께 개구쟁이 같은 웃음을 지었지요.

인터뷰가 마치고 같이 체육교육과 사무실이 있는 사대신관을 걷는데, 걸으면서도 뭐가 그렇게 신기한지 이리 휙, 저리 휙 하면서 가던 걸음을 멈추고 구경에 열중했고, 그 때문에 5분이면 가는 그 거리를 15분이나 걸려서 갔었답니다. 지나가던 중 예쁜 여대생이 지나가자 "저렇게 예쁜 아가씨도 고대생인가요? 과연... 소문과는 다른데요..."라는 말로 절 또 웃게 만들었고요.

그러다 대학을 졸업하며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겼습니다. 그러던 중 작년 여름 웹상으로 성모와 다시 연락이 닿게 됐지요. 한국체대 대학원에 다닌다며 근황을 전해준 성모와 저는 그렇게 인터넷으로 간간히 연락을 주고받으며 지냈습니다. 한데 성모의 블로그 글이 제 눈에 참 오랫동안 밝히더군요. 2008년 6월 2일자에 '이 세상'이라는 제목으로 올렸던 글이었습니다.


내 나이 15 첫 올림픽
이 세상 모든 걸 다 가질 수 있고
하고 싶은 거를 다할 수 있을 거라 믿고
누릴 수 있는 것을 다 누릴 수 있을 거라 믿었고

내 나이 19 두 번째 올림픽
세상에 대한 도전이었고
실패는 있었으나 좌절은 없다 생각했고
다음 도전의 목표를 바로 바로 세워 날아갈 수 있었고
겁 없이 행동하는 패기로 뭉쳐진 청년이었고

내나이 만 23 세 번째 올림픽도전
패기로만은...
20대에는 .....
10대의 패기의 조금만이라도 남아있다면...

이번은 실패지만
나 자신은 채찍질 하며 다시 한 번 좌절이 아니라는 걸...

응원해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베이징올림픽 대표 탈락 후 쓴 글이었습니다. 그때 전 성모에게 말했죠. 내게 있어 최고의 수영선수는 조성모였다고요. 역시나 성모는 "진심이십니까. 후후후"라고 운을 뗀 뒤 "누나도 우울하시나요? 우울 한 먹구름 빨리 걷어 버리고... 우울할 때는 저 같은 귀여운 후배에게 맛있는 거 사주세요"라고 말했죠.

아버지 조오련씨가 모방송사 프로그램을 통해 2002년 대한해협 횡단 당시, 연예인들이 응원한다며 태릉선수촌에서 훈련 중인 자기를 보러 오는 게 그렇게 싫었다는 성모. 텔레비전에서 코믹하게 나오는 아버지 모습이 참 보기 싫었다는 성모.

그때만 해도 어머니를 떠나보낸 뒤 긴 사춘기를 앓고 있던 성모였기에 그러한 반응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겠지요.


그렇지만 그로부터 3년 뒤 성모는 아버지와 형 성웅씨와 함께 독도횡단에 나섰습니다. 삼부자 독도횡단이었지요. 큰 뜻을 위해 또 다시 횡단에 나서는 아버지를 돕는 성모가 참 기특했습니다. 이제는 훌쩍 자라 어른이 된 것이었죠. 바다수영을 오래 하다보면 체온이 쉽게 떨어지기 때문에, 이를 막기 위해 당시 성모는 억지로 살을 찌웠습니다. 십 킬로 가량 찌우는 바람에 온몸에 군살이 붙었고, 운동선수로서 쉽지 않은 선택이었음에도 아버지를 위해 그는 기꺼이 동참했죠. 그렇게 세가족은 울릉도에서 독도까지 120Km되는 거리를 나눠 헤엄치며 독도아리랑을 성공적으로 마쳤습니다.

그로부터 1년 뒤인 2006년 8월, 성모는 개인블로그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죠.

6년 전 이맘때구나
첫 올림픽 나갔는데
그때는 가족이 4명이였는데
지금은 세 명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가 정말 행복했는데...
무엇이 날 건방지게 만들고 사진으로만 봐도
서로들이 별로 친하지 않다는 걸 느낄 수가 있다..
그때는 몰랐는데 사진을 이렇게 보니깐 너무 안 친해 보인다

저때가 딱 내 사춘기 때였다 보다...
어느 장소든 간에 가족들이 싫었었다
보기도 싫었었다...

ㅋㅋ 사직수영장 뒤에 가서 형한테 귓방맹이 맞은 기억도 새록
새록 생각난다...내가 가족들 수영장에 오는 거 쪽팔리다고
말한 거 같다...미친놈 건방진 새끼
지금이라도 더 늦기 전에 가족끼리 아무리 시련이 와도
서로 사랑하면서 행복하게 살고 싶다

오늘 같은 날
내 일에 대한 답이 안나올 때
더욱 가족이 그립다...

울고 싶다 눈물이 말랐다
동정은 받고 싶지 않다.

사실 난 강하니깐.


아버지를 수영'수'자를 쓰며 수령님이라 불렀던 성모. 지난 4월 재혼한 아버지의 행복과 건강을 누구보다도 바랐던 성모. 어머니에 이어 아버지까지 하늘로 떠나보낸 성모의 행복과 건강을 이제는 제가, 두 손모아 온 마음으로 바랍니다.



추억이라는 제목과 함께 개인 블로그에 올라간 사진.


무엇보다 조오련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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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얼음 위에 선 김연아를 본 순간, 김춘수 시인의 명시 <꽃>이 떠올랐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지난 밤, 우리가 만난 김연아가 그랬다. 매혹적인 흑장미는 어느새 강렬한 레드로즈로 다시 나타났고, 소녀에서 여인으로 만개한 그 개화에 우리는 하염없이 박수를 칠 수밖에 없었다.




석연찮은 심판 판정 속에서도 김연아는 2위 안도미키에게 약 20점 앞서며 다시 1위에 올랐다. 이로써 그랑프리 시리즈 5개 대회 연속 우승이라는 위업을 달성했다. 그랑프리 파이널 2회 우승까지 합치면 그랑프리 대회 7개 대회 연속 우승이다.

검정색 드레스에 알알이 박힌 보석들은 ‘죽음의 무도’를 출 때마다 조명빛에 맞춰 반짝거렸다. 그 시간, 천진한 미소의 18살 소녀는 어느 곳에도 없었다. 스모키 메이크업도 인상적이었지만 고개를 움직일 때마다 번뜩이는 그 눈빛은, 모두를 제압하는 강한 힘을 갖고 있었다. 때론 요염하게, 때론 표독스러울 수 정도로 대단한 강렬함으로 김연아는 우리를 사로잡았다.

그리고...

김연아에 의해 재탄생된 ‘세헤라자데’. 천일야화의 주인공인 아랍여인답게 김연아는 강렬한 붉은 색 드레스를 입고 빙판 위에 섰다. 여전히 눈빛에는 생의 절절함이 담겨 있었고 양 손끝에는 섬세함이 실려 있었다. 그렇게 그녀의 온 몸이 만들어내는 곡선에는 내내 우아함이 빛을 발했다.

이날 김연아는 트리플 플립-트리플 토루프 콤비네이션 콤비네이션 점프에 이어더블 악셀 점프 역시 가뿐히 성공했지만 트리플 러츠 점프 도중 착지에 실패, 감점을 당하고 말았다.

그동안 ‘점프의 교과서’ 혹은 ‘점프의 정석’으로 불리던 김연아였다. 그러나 쇼트프로그램에서 트리플 플립-프리플 토루프 콤비네이션 점프에서 ‘롱(wrong) 에지’ 판정을 받았고 그랑프리 대회에서 처음 받은 점프 감점은 많은 부분 부담일 수밖에 없었다. 김연아 역시 경기 종료 후 “오늘 콤비네이션 점프를 시도할 때 긴장 됐던 게 사실”이라며 고백했다.


그러나 수많은 관중들의 응원 속에서 힘을 얻었다던 소감처럼, 김연아는 성공적으로 연기를 마무리하며 환한 미소로 이번 대회를 마감할 수 있었다. 점수를 기다리던 와중에는 양 손가락으로 하트를 만들어주는 팬 서비스까지 있지 않았다. 그 모습에서는 여고생다운 발랄함이 느껴져 웃음이 나왔다. 옆에 잔뜩 쌓인, 관중들이 던진 인형들이 순간 와르르 무너지자 깜짝 놀라며 주워 담는 모습에선 더욱 그랬다. 마치 오래 알고 지낸 동생 같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늘 강한 사람이었다. 언제나 침착했다. 항상 냉정함을 유지했다. 그렇게 평정심을 잃지 않는 ‘강심장’ 김연아로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판정 논란 속에서 긴장하고 연습 도중 집중력을 잠깐 잃을 만큼 그녀 역시 사람이었고 여느 선수와 다르지 않았다. 거기에 온 국민의 기대까지 한 몸에 받고 있으니 열여덟 김연아가 느껴야할, 또 감당해야할 무게감은 분명 우리 상상 이상일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세계 피겨계의 판정-오심의 가능성이 농후한-과 견제와도 싸워야한다.

2008베이징올림픽 당시 박태환도 400m에서 금메달을 딴 다음, 긴장 때문에 잠을 설쳤다고 고백했었다. 온 국민이 금메달을 기대하고 있는데, 그 기대에 부흥하지 못할까봐 긴장됐고 또 걱정됐었다고 하였다.

김연아도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지만 비슷한 마음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해본다.

그래서 더 값지고, 빛났던 김연아의 우승이었다.

온 마음으로 끝없이 박수치고픈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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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미란씨가 무릎팍 도사에 출연했습니다. 체중이 늘지 않아서 고민이라며 무릎팍 도사를 찾아갔지요. 문득 지난 겨울 처음 만났을 때 생각이 나더군요. 함께 커피숍으로 이동 중에 그녀는 제게 말했습니다. “단 걸 별로 안 좋아해요.” 따뜻한 커피와 함께 케이크를 먹자고 제안했는데 그녀는 고개를 살짝 흔들며 덧붙였죠. “먹기 싫은데 체중을 늘려야 해서 억지로 먹는 경우가 많아요.”



그렇게 하여 무릎팍 도사를 찾아간 미란씨는 언제나처럼 호탕하게 웃어 할아버지의 부음 때문에 요 며칠 동안 우울했던 제 마음 속 그늘을 없애줬습니다. 시원시원한 웃음소리는 여전하더군요. 그래서 참으로 오랜만에 웃어봤습니다.

그녀는 무릎팍 도사에게 말했죠. 2004아테네올림픽 때 마지막 순간 탄공홍 선수에게 밀려 속상했지만 아주 잠시 뿐이었다고. 4년마다 열리는 올림픽에 참가한 것도 기뻤는데, 거기다 메달까지 땄으니 아주 많이 기뻤고 또 행복했다고 말이죠. 듣던 중 언젠가 제게 말해줬던, “1등만 빛난다고 생각하고 1등만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더라”던 미란씨의 말이 떠오르기로 했습니다.

방송에선 바벨 앞에서 보여줬던 그녀의 기도 세레머니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세레모니를 보면 알다시피 미란씨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입니다. 2004년에 이어 2008년 올림픽 현장에서도 우리는 마지막 순간에 바벨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던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있었죠.

“종교 없이 하는 선수들이 전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역도는 개인운동이다보니 정점에 갔을 땐 나 스스로 해야하는 거잖아요. 그렇지만 혼자서 하기는 너무 힘들고 때문에 심적으로 의지할 곳을 찾게 되는데 그런 점에서 신앙은 제게 굉장히 큰 힘이에요.”

이렇듯 늘 기도하며 자신을 돌아보는 사람이다 보니 너그러운 마음가짐을 가지게 됐나 봅니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 당시 탄공홍 선수가 마지막 시기에서 역전하며 1위로 등극,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하지만 판정이 다소 애매했죠. 바벨을 든 채로 자리 이동이 계속 있었는데도 버저가 울렸으니까요. 억울한 마음이 들 법도 했지만 미란씨는 은메달을 목에 걸고서 환히 웃었죠. 당시 환한 미소와 함께 관중을 향해 손을 흔들었는데, 굳은 살이 잔뜩 박힌 그 손바닥이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선수촌 앞 정류장에서 미란씨는 탄공홍 선수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미란씨, 그녀를 보고 웃었다고 하네요. 저라면 ‘너 때문에 내가 금메달을 놓치고 말았어. 정말 밉구나’라고 생각하며 외면했을텐데 그녀는 참 대단했습니다. 탄공홍 선수를 바라보며 웃었으니까요. 그런데 이유가 참 재밌었습니다. 미란씨가 들려준 이유는 다름 아닌 “탄공홍 선수가 너무 귀여웠어요”였습니다. 하얀 원피스를 입고 이어폰을 뀐 채 음악을 듣고 있던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웃지 않을 수 없었다네요. 그 마음의 여유가 참으로 인상 깊었습니다.

미란씨의 넓은 마음에 깜짝 놀라고 감탄했던 순간이 또 있습니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이 끝난 후 탄공홍 선수는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그 뒤 새로 등장한 라이벌은 역시 중국이 배출한 무제한급 스타, 무솽솽 선수입니다.

2005년도부터 국제대회 때마다 만나게 됐는데 그때마다 무솽솽 선수는 미란씨를 그냥 외면했다네요. 그럴 때마다 미란씨는 먼저 다가가 “안녕, 잘지냈어?”라고 인사를 했다고 합니다. 그래도 무솽솽 선수는 늘 고개를 훡 돌리곤 했지만요.

그렇지만 미란씨는 이해한다며 “역도 7체급 중에 5체급 금메달을 중국이 다 석권했어요. 나머지 한 체급을 러시아가, 또 다른 한 체급을 제가 가지고 갔는데, 무솽솽 선수도 얼마나 스트레스가 많았겠어요. 자기 나라 다른 선수들은 늘 1등만 하는데 자긴 2등이다 보니, 잘해야겠다는 부담이 늘 컸을 거예요”라고 말했죠.

지난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미란씨는 1위에 오르며 ‘세계선수권 3연패’를 달성했습니다. 코치 선생님들과 기쁨을 나누고 있던 중 한쪽 구석에서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던 무솽솽 선수가 눈에 띄었다네요. 그 모습이 계속 눈에 밟혀 결국 미란씨는 무솽솽 선수에게 다가가 어깨를 감싼 채 토닥토닥 해줬다고 합니다. “괜찮아. 다음에 잘하면 되지. 힘내.”

당시 영어가 짧았던 무솽솽 선수는 알 수 없는 중국어로 미란씨에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미란씨가 알아듣지 못해 고개를 갸우뚱 거리자 “베이징!”이란 아주 짧고 간단한 단어 한 마디로 끝인사를 나눴다네요. 미란씨는 “베이징!”이라는 말에 ‘아, 베이징올림픽에서 만나서 다시 승부를 겨뤄보자고 말하고 싶나보다’라는 생각에 “그래, 베이징!”이라 말한 뒤 무솽솽 선수와 헤어졌다고 합니다. 엄마처럼 따뜻한 마음씨에,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전 또 한번 감탄할 수밖에 없었죠.

참, 이번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후 미란씨가 가장 많이 받았던 질문이 뭔지 아시나요? 바로 남자친구 존재 유무였습니다. 사실 저도 처음 만났을 때 그녀에게 남자친구가 있냐는 질문을 던졌답니다. 당시 그녀는 남자친구가 없다는 말과 함께 다음과 같은 부연설명을 했죠.

“가끔 남자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하죠. 힘든 일이 있거나 고민이 있을 때 가족들은 너무 걱정을 하니까, 그런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고 그럼으로써 힘을 얻을 수 있게 해주는 그런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해요, 하지만 아직까지 크게 남자친구가 필요하다고는 느끼지 않아요. 남자친구에 대해 신경쓸 여력이 아직은 없어요.”

그렇다면 미란씨의 이상형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요.

“능력있는 남자요. 여기서 능력은 돈 같은 물질적인 걸 뜻하지 않아요. 어디서든지 리더가 될 수 있는 그런 능력을 뜻해요. 제가 존경할 수 있고, 배울 게 많은 그런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언젠가는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미란씨는 누구보다 아름다운 영혼을 지닌 사람이니까요.

학창시절 친구들과의 우정을 여전히 소중히 간직한 사람. 짧은 인연이라도 늘 고맙게 생각하는 사람. 부상을 당했을 때도 잠시 쉬어가라는 뜻으로 생각하는 긍정적인 사람. 그리고 그 밝은 긍정성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가르쳐주는 사람. 뮤지컬 보는 것만큼 시사 프로그램 보는 것도 좋아하는 사람. 공부하는 역도선수가 되고 싶다며 영어 공부도 소홀히 하지 않는 성실한 사람. 폴라로이드를 늘 갖고 다니며 지인들의 모습을 직접 찍어주길 즐겨하는 사람. 손으로 만든 카드를 선물하며 감동도 함께 선사하는 사람.



제가 아는 미란씨는 바로 이런 사람이랍니다. 어때요? 참 멋진 사람이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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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태권도 종주국답게 여자 57kg과 남자 68kg에서 금메달을 추가해, 베이징과학기술대학교 체육관에선 2번 애국가가 울려퍼졌습니다.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임수정 선수와 손태진 선수는 마지막까지 동점의 동점을 거듭 종료 직전까지 모두의 손에 땀을 쥐게 만들었죠.



임수정 선수는 종료 22초 전, 주특기인 뒷차기에 성공하며 터키 아지제 탄리쿨루 선수를 1-0으로 꺾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손태진 선수 또한 로페스 가문(형제 4명이 모두 태권도 선수라네요. 막내는 여자 57kg에서 동메달을 땄고 첫째도 이번에 출전했다고 하네요.)의 셋째 마크 로페스에게 종료 2초전 극적인 오른발차기(혹자는 버저 오른발차기라고 하더군요. 농구에서 버저비터에 빗대서 말이죠. ^^)에 성공, 3-2로 극적인 승리와 함께 금메달을 손에 쥐었죠.

“산도 많이 뛌고 몸도 너무 많이 아팠지만 금메달을 따서...”라며 울먹거리던 임수정 선수와 “목숨 걸고 뛰었습니다. 미국한테 져서는 안되잖아요”라며 스무살 답지 않던 모습을 보여준 손태진 선수. 두 선수 모두 실로 멋졌고 또 아름다웠습니다. 또 그간 올림픽을 준비하며 흘렸던 땀과, 고생의 시간들이 느껴져서 괜시리 마음이 뭉클해졌습니다.

한데 아쉬운 부분이 하나 있었습니다. 사건은 임수정 선수가 금메달을 확정 짓고 기뻐하던 순간 발생했습니다. 당시 관중석에 있던 한국 팬들은 임수정 선수에게 태극기를 던져 주려 했습니다. 태극기를 들고 세레모니 하고픈 선수의 마음은 당연한 것이었고, 열심히 응원하던 한국 팬들 또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싶었죠. 임수정 선수는 그 태극기를 받기 위해 관중석 쪽으로 다가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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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여기서 시작됩니다. 자원봉사자들이 태극기를 받지 못하게 하더군요. 조직위의 방침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저는 아직도 왜 태극기를 받지 못하게 막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관중석에선 이번에 작은 태극기를 던져주려 했으나 또다시 자원봉사자들은 막더군요. 결국 임수정 선수는 태극기 세레모니를 포기한 채, 손을 흔들며 연방 고개 숙여 인사하며 기쁨과 감사를 표현해야했습니다. 그 모습을 중계석에서 지켜보던 문대성 위원은 보다 못했는지 “제가 내려가서라도 줘야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조직위원회의 이 같은 태도를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레슬링도 그랬고 태권도도 그랬습니다. 금메달을 딴 우리 선수들이 태극기를 든 채 매트 위를 뛰어다닌 풍경, 우리는 그간 올림픽 무대에서 늘 보아왔습니다. 2002부산 아시안게임에서 윤성희 선수가 태극기를 손에 쥔 채 매트 위를 몇 번이나 돌고 또 돌던 그 모습을 저는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그 감동을 이번 베이징올림픽에서도 느끼고 싶었는데 여자 57kg급에서는 느끼지 못했습니다.

도대체 왜 베이징올림픽 조직위원회에서는 태극기 세레모니를 막은 것일까요?

곧이어 남자 68kg급 경기가 열렸고 동화 속 소년처럼 뽀얀 피부를 자랑하던 손태진 선수가 극적인 오른발차기로 금메달을 확정지었습니다. 무척 기쁜 일이었으나 마음 한편에는 이번에도 태극기 세레모니를 볼 수 없겠구나, 또 막겠지, 라는 생각 때문에 아쉽고 또 안타까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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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남자 태권도대표팀 김세혁 감독, 손에 뭔가 쥐어져있더군요. 김 감독은 문제의 그것을 펼친 다음 손태진 선수에게 건냈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바로 태극기였습니다.

선수에게 태극기를 직접 주는 것을 자원봉사자들이 제지하자 우리나라 관중들, 머리를 썼나 봅니다. ^^

직접 주는 것을 포기하는 대신
멀리 던진 것이죠. 그리고 김세훈 감독이 그걸 주워서 손태진 선수에게 건넨 거죠.

덕분에 우리는 기다리고 기다리던 태극기 세레모니를 드디어 볼 수 있었습니다.


제가 이해할 수 없는 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감독이 주는 태극기는 되고 관중이 주는 태극기는 안된다? 이보다 더 말이 안되는 상황이 또 있을까요? 이 해괴한 논리는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남자 100m와 200m 결승을 치른 후 관중이 직접 준 국기를 받고 기뻐하던 볼튼 선수에겐 어찌하여 그렇게 관대하고 너그러웠는지 베이징올림픽 조직위원회에 묻고 싶군요. 볼튼 선수가 마이클 존슨 이후 깨지지 않았던 세계기록을 갱신해서 그랬던 건가요? 그래서 베이징올림픽의 '급'이 올라가기라도 했나요?

운영의 묘가 참으로 아쉬운 베이징올림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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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님이 주신 태극기를 들고 세레모니를 펼친 손태진 선수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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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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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대표방송 CNN 올림픽사이트에 올라온 종합 순위표입니다. 총 메달개수로 순위를 따져서 미국이 1위라고 하고있네요. 그러나 총 메달 개수가 아닌 금메달 개수로 순위글 매기게 되면 중국이 44개로 압도적인 1위입니다. 그런데 그동안 매번 올림픽 때마다 금메달 순위로 종합 순위를 매기던 미국이 중국에 밀려 2위로 뒤쳐지게 되자 자기들에게 유리한 방법으로 순위집계를 하고 있네요.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 같은 종합 스포츠 대회에서는 순위를 매기는 방법이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총 메달수고 또 다른 하나는 금메달수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그토록 목이 터져라 외치는 ‘종합 10위’는 흔히 금메달 수를 기준으로 한 10위입니다. 사실 그간 많은 해외 언론들에서도 총합이 아닌 금메달 순으로 순위를 매겼던 것이 사실이죠.

이번 올림픽에서는 중국이 ‘예상대로’ (홈 어드밴티지가 이 정도 일 줄은 몰랐죠. -.-;) 금메달을 휩쓸며 선전하고 있는 반면, 미국은 육상에서 기대했던 만큼 메달 사냥을 못하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중국에게 순위가 밀리게 됐고 그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던지 전년 대회와 달리 총 메달 개수로 순위를 매기고 있습니다.

최근 은메달이나 동메달의 가치  또한 금메달에 밀리지 않는다며, 똑같이 인정해줘야한다는 일련의 목소리에 힘이 실리게 되면서 총 메달개수로 순위를 매기자는 주장이 커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아직은 금메달 개수를 기준으로 순위를 매기는 게 대세인듯 합니다.

그렇지만 다들 아시죠?  올림픽에서는 종합 순위에 대한 공식적인 시상이 없다는 사실 말입니다. 공식적인 집계 또한 없는 게 당연하구요. 그저 우리가 이만큼 잘했다고 자랑하고자 매기는 순위입니다. 그러다보니 기준도 제각각이구요.


그래서 생각해봤습니다. 순위를 꼭 매겨야한다면 -물론 안하는 게 가장 좋지만요- 차라리 전국체전처럼 하면 어떨까 싶네요. 메달마다 점수를 주고 그 중 신기록을 세워 메달을 따게 될 때면 가산점을 주는 방식으로요. 이런 식으로 한 다음 폐막식 때 각 나라 별로 대표가 나와 상을 받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선수단 대표 시상자론 누가 좋을까요? 음. 어디까지나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미소가 아름다운 로즈란 장미란 선수와 이용대 선수(저도 수많은 누나들 중 하나입니다. 므훗)가 나와서 받아야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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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유원철 선수에겐 참으로 미안한 얘기지만, 이번 올림픽이 중반을 넘어 후반까지 가는 지금까지, 저는 그의 이름을 몰랐습니다. 한국체조?하면 늘 양태영 선수의 이름만 어른거렸을 뿐이죠. 최종결선에 올라간 선수들이 나올 때 저의 눈은 양태영 선수만 좇았습니다. 양태영 선수와 함께 나란히 걸어오던 유원철 선수를 봤을 땐 그저 아, 대한민국 선수가 한 명 더 올라왔구나, 라는 생각만 했죠.


남자 체조 평행봉 결선. 다들 긴장이 컸던지 처음부터 실수가 잦더군요. 어떤 선수는 회전 도중 바닥에 쿵,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다행히 부상은 아니더군요. 그리고 우리나라 선수 차례가 왔습니다. 유원철 선수라는 캐스터의 설명이 있었습니다.

아, 체조에 대해 그리 잘 알진 못하지만 그래도 알겠더군요. 정말 완벽에 가까운 솜씨라는걸요. 묘기 수준이라는 말이 절로 나왔습니다. 공중에서 한 바퀴 돈 다음 착지. 몸의 중심이 조금 앞으로 쏠리는 바람에 앞 꿈치가 살짝 나왔습니다. 그러나 정말 깔끔한 착지였고, 마지막까지 완벽하게 마무리했습니다. 그도 만족스러웠는지 두 손을 번쩍 든 채 “해냈다!”는 포즈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점수는 16.250. 예상대로 1위였습니다.

그러나 2명의 선수가 남아있었죠. 다음 순서는 2004 아테네올림픽 오심파문을 딛고 다시 도전한 양태영 선수. 기대가 컸으나 경기 중간, 마지막 착지에서 실수가 있었습니다. 허리 부상이 그의 발목을 잡았죠. 안타깝게도 7위로 미끄러졌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주자. 베이징체육관 내 관중들의 함성소리가 커졌습니다. 자국 출신 선수가 등장한거죠. 중국의 리샤오펑 선수였습니다. 2000시드니올림픽에서도 금메달을 딴, 저력있는 선수라던데. 다른 선수들처럼 실수가 그와 함께 하길 바랐으나 마지막 착지까지 참으로 깔끔했고 16.450점을 얻으며 유원철 선수를 밀어냈습니다.

아쉽게 은메달을 탔으나 모두가 기대하지 않던 상황에서도 꿋꿋이 자신의 몫을 해낸 유원철 선수가 참으로 자랑스러웠습니다. 대한민국 체조대표팀이 숨겨놓은 메달 후보라고 했지만, 전 정말 결선까지 그의 이름조차 몰랐습니다. 너무 무심했던 것 같아, 괜히 미안해졌습니다.

우리가 흔히 그간 노력 혹은 실력에 비해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한 사람들을 일컫을 때 ‘2인자’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2인자가 뭔가 대단한 일을 해냈을 땐 ‘2인자의 설움을 딛고’라고 표현하죠.

한데 유원철 선수는 2인자도 아니었습니다. 양태영 선수와 김대은 선수에 가려 3인자로 지냈죠. 그렇지만 그는 괜찮다고, 섭섭하지 않다며 웃었습니다. 더 전진해서 좋은 선수가 되겠다고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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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상식을 지켜본 사람은 아시겠지만 유원철 선수는 시상대에 올라가기 전, 자신 때문에 0.05점차로 밀려 동메달을 따게 된 안톤 포킨(우즈베키스탄) 선수에게 다가가 악수를 청하는 스포츠맨쉽도 발휘했습니다.

기자회견장에서는 금메달을 차지한 리샤오펑 선수에게 축하의 인사를 건넸죠. 정말로 훌륭하게 연기를 잘했다면서요. 중국 텃세에 눌린 심판을 향한 볼멘소리를 할 줄 알았건만, 그는 담담히 결과를 받아들이더군요. 아쉬운 마음을 남의 탓으로 돌릴 법도 했지만 그는 다음 대회 때 못다 이룬 금메달의 꿈을 이루겠다며 새로운 의지를 보여줬죠.

세상은 그를 3인자로 생각했지만, 그는 주위 시선에 신경쓰는 대신 노력에 노력을 거듭해 언젠가는 최고가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긍정의 힘은 결국 효력을 발휘했죠. 유원철 선수는 대한민국 대표팀에 체조 부분 유일한 메달을 안겨준 사람이 되었습니다. 은빛 미소를 보여준 유원철 선수, 참으로 자랑스럽고 또 대견스러워보입니다.

덧붙임) 29살의 나이는 체조선수로 따지면 중년에서 노년으로 가는 나이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양태영 선수는 참으로 멋진 묘기를 보여줬습니다. 만약 부상이 없었다면 4년 전 아깝게 놓친 금메달을 목에 걸 수 있었을텐데 말이죠. 양태영 선수에게도 격려의 인삿말을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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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미란씨가 인상 1차 시기를 앞두고 있을 때, 전 회사 사무실에 앉아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TV 속 그녀 모습을 지켜봤습니다. 어찌나 긴장이 되던지요. 미란씨 얼굴에서도 살짝 긴장이 느껴지더군요. 끙, 하는 소리와 함께 130kg을 들었을 때 전 잠시 멈췄던 숨을 내쉈습니다. 그녀가 인상에서 세계신기록을 작성하고, 다시 용상에서 세계신기록을 작성하며 금메달을 확정짓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저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손바닥을 쥐락 펴락 하며 지켜봤습니다.

그리고 용상 마지막 3차시기를 세계신기록으로 마감한 순간, 미란씨는 바벨 앞에서 털썩 주저앉은 채 감사기도를 드리더군요. 4년 전, 그러니까 아테네올림픽에서 처음 그녀와 만났을 때도 그녀는 그렇게 무릎 꿇고 기도 드렸죠.

어려운 날들을 이겨내고, 결국은 꿈을 이뤄낸 미란씨가 너무 장하고 대견스러워서, 또 언젠가 제게 했던 그 말이 생각나. 결국 눈물을 흘리고 말았습니다.

“저는 2004년 때만 해도 올림픽이 어떤 대회인지도 몰랐어요. 그냥 나가서 시합하면 된다고 생각해서 크게 긴장도 안했어요. 그런데 이제는 올림픽이라는 게 어떤 건지 아니까 걱정도 되고 두려움도 있고 그래요. 반면에 노련미가 많이 생겼기 때문에 기대도 되지만 두려움이 더 많죠. 왜냐하면 무대 위에 올라가면 누가 대신 해주는 게 아니라 내가 혼자 들어가서 들어야하니까. 솔직한 마음으로 부딤이 많이 되죠. 주변에서 기대를 많이 해주시니까요. 기자분들이 그러더라고요. 종합대회 콤플렉스라고. 제가 세계선수권에서는 우승을 여러 번 했지만 아시안게임이나 올림픽에서는 금메달을 못 땄잖아요. 정작 사람들이 관심갖는 건 종합대회니까 그 기대치를 충족시켜줘야하는데 아쉬움을 안겨드릴까봐 걱정돼요.”

그래서 혹시라도 안부를 묻는 제 작은 인사가, 미란씨에게는 부담이 될까봐, 베이징에 가는 그날까지 전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잘하라는 말조차 짐이 될까봐 특별한 인사 없이 베이징에 가는 그 뒷모습을 조용히 바라봤죠. 제가 할 수 있는 건 다만 기도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고보면 처음 만났을 때부터 미란씨는 참 어른이었던 것 같습니다. 제 이야기를 집중해서 들어주던 그 자세가 좋았고, 다소 썰렁했던 제 농담 앞에서도 참 사람좋게 웃었지요. 헤어지기 전 가방에서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꺼내 그날 함께 보낸 시간들을 담던 그 세심한 마음도 나는 참 좋았습니다.

“역도는 아버지가 시켜서 하게 됐어요. 중1 때부터 권유했는데 솔직히 싫잖아요. 그러다 엄마랑 약속한 게 있었는데 그걸 지키지 못했어요. 거의 도살장 끌려가듯이 가서 억지로 시작을 했어요. 그렇게 시작 했는데 처음엔 많이 힘들었지만 자세 배우는 것도 재밌고 기록도 금방금방 느니까 재밌게 시작했어요. 운동하면서 그만두고 싶을 정도로 힘든 적은 없었어요. 사실 전 제 또래 여자아이들처럼 날씬하지도 않았고 예쁘지도 않았어요. 그렇다고 공부를 남들보다 잘하는 것도 아니었어요. 정말 잘하는 게 아무 것도 없었고 내세울게 아무 것도 없었는데 역도를 하면서,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응원을 받으면서, 또 그 사람들에게 나라는 존재가 희망이 되고 기쁨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정말 역도하길 잘했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사람들에게 알려진 계기가 아테네올림픽 때였잖아요. 그때를 못 잊을 것 같아요.”

그날 우리는 도산공원을 함께 걸었고 근처 카페로 자리를 옮겨 국화향이 나는 따뜻한 차를 마셨죠. 운동선수 장미란과 인간 장미란의 간극에 서서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눴죠. 예쁘지도, 또 공부를 잘하지도 않던 내가 누군가에게 희망의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다는 그 말이 가슴에 참 와닿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시작된 인연을 참 소중하게 생각해주던 미란 씨였습니다. 가끔씩 혼자 태릉선수촌 숙소에 있을 때면 그녀는 제게 손수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곤 했죠. 그때마다 참으로 호탕한 웃음소리로 제 마음을 시원하게 만들어줬죠. 무엇보다 가장 고마웠던 순간은 지난 6월16일, 제 생일날입니다.

생일인데 일을 해야한다며, 속상한 마음을 토로했을 때, 미란씨는 밥을 사주겠다며 약속시간을 잡자고 했죠. 베이징올림픽이 2달도 채 안남았던 때라 조심스러웠습니다. 저와의 만남이 그녀의 소중한 시간을 방해해서는 안됐으니까요. 괜찮겠냐고 3번을 물었죠. 그녀는 웃으며 밥을 먹어야 운동을 하는 것 아니겠냐고 응수했죠.

그녀가 즐겨찾는 이탈리안레스토랑에서 함께 점심을 먹으며 또 한번 즐거운 데이트 시간을 가졌습니다. 제 생일을 쓸쓸한 날이 아닌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날로 만들어준 것도 고마웠는데, 그녀는 손수 만든 카드와 손수건을 선물로 주며 또 한번 날 감동의 바다에 빠드리고 말았죠. "요즘 많이 힘든 것 같은데 힘내요."라던 그 마지막 문장을 저는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힘내라는 말은, 오히려 제가 해주고 싶었던 말이었는데 말이죠.

“아시안게임 가기 10일 전에 허리를 다쳐서 움직이지 못했어요. 어떤 운동이나 마찬가지인데 3일 이상 쉬면 감각을 찾는게 시간이 오래 걸려요. 특히 역도는 어깨나 힘으로 하는 걸로 아는데 세심한 기술이 많이 필요해요. 그런데 일주일 가량 침대에 누워만 있다 갔거든요. 기록도 좋았는데 속상했죠. 그런데 절망하면 뭐해요. 나만 힘들어지는데. 연습 때 아무리 잘해도 시합 때 잘한다는 보장도 없고요. 나 쉬라고 다치게 됐나보다. 그렇게 생각하고 편안히 마음 가지니까 신기하게 몸이 빨리 낫더라고요.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게 좋은 것 같아요.”

미란씨의 내면에는 참 강한 긍정의 정신이 있었죠. 그러한 정신이 전 지금의 미란씨를 세계 최고의 선수로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또 많은 사람들은 그런 미란씨의 모습을 지켜보며 많은 것들을 느끼고 배우겠죠.

열심히 노력하고, 간절히 바라고, 주어진 결과를 담담히 받아들이는 그 모든 모습들, 참으로 아름답고 멋졌습니다. 앞으로도 변함없이 지금의 모습 간직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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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참 미란씨.“우리 아빠가 우스개 소리로 인상이 기술을 많이 요하니까 인상 쓰면서 하는 게 인상이고 용상은 용쓰면서 하는 게 용상이라고. 기억하기가 쉽잖아요. 요령이죠. 용상은 요령도 필요하고 힘도 좋아야해요. 인상은 힘도 좋아야하지만 기술이 더 좋아해요”라고 했던 말이 생각나 경기 말미엔 살짝 웃었어요.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와 한국에서 다시 봐요. 또 게먹으러 가야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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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축구 관련 기사만 쓰던 제게 유도는 참으로 낯선 스포츠입니다. 한판, 절반, 유효, 지도 등등 용어만 알지 실제로 절반과 유효의 차이는 잘 모릅니다. 몇 체급으로 나눠지는지 경기 시간은 몇 분인지 조차 모릅니다.

그런 제가 회사에서 야근 도중 유도 81kg급 준결승이 열린다고 하길래 사무실에서 저녁을 먹으며 경기를 봤습니다.



김재범이라는 낯선 이름의 한 사나이가 서 있더군요. 이미 8강에서 연장 혈투를 치르느라 지친 상태였을 법도 한데, 그는 맹수처럼 상대 엘몬트(네덜란드)에게 달려들었습니다. 그러나 준결승에서도 그는 연장전을 치러야했고 공격의 공격을 거듭한 끝에 결국 종료 6초 전 누르기로 간신히 결승행을 결정지었죠.

그런데 준결승을 치른지 1시간 반 쯤 뒤에 결승전이 열리더군요. 매트와 도복 위로 땀이 후두둑 떨어지던 모습이 생각났습니다. 왜 하루에 결승전까지 다 치르려고 하는지 이해가 안간다는 말을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그만큼 그의 체력 소진이 걱정됐습니다. 마치 내 가족의 일처럼 말이죠.

역시 걱정은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열심히 싸웠지만 체력의 한계를 극복할 수 없었고 잠깐의 틈을 놓치지 않은 상대의 다리 공격에 넘어지며 유효를 내주고 말았습니다. 종료 직전 화면에 클로즈업된 그의 얼굴에서는 패배의 그림자가 느껴졌고 그래서 마음이 안쓰러웠습니다. 폴짝폴짝 뛰며 코치를 무등 태우던 비쇼프(독일)가 왜 그리 얄미워보이던지요.

쉽게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그 모습을 보며 다 헤아릴 수는 없겠지만 그 마음, 조금은 알겠다며 혼자 고개를 끄덕거렸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겠죠. 4년 동안 라면 하나 쉽게 먹지 못하고 체중감량의 압박에 시달려야했으니까요. 대표 선발전이라는 경쟁이 주는 무게에 늘 눌렸을테니까요. 자신과의 싸움에 매 순간 흔들렸을테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4년마다 열리는 스포츠 축제인 올림픽을 위해 그는 모든 것을 참고 이겨내고 또 감수했겠죠. 그것이 5분 만에 이긴 자와 패한 자로 극명하게 갈린다는 그 현실이 참으로 야속했을 것이고 또 좀처럼 받아들이기 힘들었겠죠.

저는 시상식을 보지 못했습니다. 사무실 자리로 돌아와 다시 일을 해야했으니까요. 그런데 다음 싸이트에 접속하려는 도중 활짝 웃는 한 청년의 얼굴에 깜짝 놀라 클릭 버튼을 눌러봤습니다. 김재범이었습니다. 그는 은메달을 목에 걸고 두 손을 번쩍 든 채 세상을 다 가진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습니다.

애써 지어보이는 어색한 웃음이 아닌, 정녕 마음에서 우러나온 그의 미소를 보며 저 역시 웃었습니다. 그런 그의 모습이 바로 우리가 바라고 또 그리던 모습이었으니까요.

알다시피 더욱이 유도라는 비인기종목에서 ‘금메달’은 참 많은 의미가 있을텐데도, 그는 자신의 목에 걸린 ‘은메달’에 그저 감사할 뿐이라는 그런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또 김재범이라는 유도 선수를 통해 세상의 진리를 배우게 됩니다. 최선을 다한 사람에게는 후회란 없다고, 앞으로의 정진만 있을 뿐이라는 진리 말입니다.  물론 지금은 2번째로 끝났지만 지금의 마음가짐이라면 4년 뒤 그는 꼭 '첫번째'가 되어 지금보다 더 많은 박수를 받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꼭 그럴 수밖에 없다고 믿어봅니다.

그리고 감사드립니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한 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소를 보여준 김재범 선수에게, 다시 한번 고개 숙여 감사 인사 전합니다.  

김재범 선수에게 우리 네티즌들이 순금 펜던트를 만들어드립시다. 5000명의 댓글이 달성되면 펜던트가 그에게 수여된다고 하니 아래 주소를 클릭해서 댓글 남겨주세요.

http://petition.beijing2008.media.daum.net/petition/view?id=224 

참, 요 사진들은 언제나 진중한 연합뉴스의 멋쟁이, 진성철 선배가 찍은 사진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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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범 선수에게 우리 네티즌들이 순금 펜던트를 만들어드립시다. 5000명의 댓글이 달성되면 펜던트가 그에게 수여된다고 하니 아래 주소를 클릭해서 댓글 남겨주세요.

http://petition.beijing2008.media.daum.net/petition/view?id=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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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예선부터 준결승까지 ‘한판승’을 펼쳤던 최민호 선수가 결승에서도 역시 ‘한판’으로 오스트리아 루드비히 파이셔 선수를 물리쳤습니다. 준결승까지 담담한 표정으로 오른손 검지손가락을 까닥까닥 흔들기만 했던, 참으로 침착한 모습을 보였던 그였습니다. (마치 "넌 안돼~"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알고보니 '한판승'으로 이겼다는 것을 뜻하는 세레모니 라네요. ^^ 그 세레모니, 한동안 유행이 될 듯합니다. ^^;)



한데 결승전에서는 다르더군요. 하기야 4년 전 아테네올림픽에서 쥐가 나는 바람에 동메달에 그친 '한'을 드디어 오늘, 꿈에서 그리고 또 그리던 '금'으로 풀었으니, 그 심정이야말로 오죽하겠습니까. 매트 위에 무릎을 꿇은 채 눈물을 펑펑 흘리며, 그렇게 오랫동안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최민호 선수에게 다가가 손을 내민 사람이 있었습니다. 최민호 선수는 ‘그’의 손을 잡고 간신히 일어났죠. 그리고 ‘그’는 참으로 따뜻한 표정으로 최민호 선수를 안아줬습니다. 누구냐고요? 여기서 그는 바로 최민호 선수에게 ‘한판’으로 패하며 은메달에 그친, 루드비히 파이셔 선수입니다.

먼저 다가가 패배를 인정하며 악수하는 그 모습도 인상적이었는데 최민호 선수가 도복을 고쳐입을 때까지 기다리며 웃어주더군요. 그것으로 모자라 악수 후 최민호 선수의 손을 번쩍 들어주며 자신이 아닌 최민호 선수가 진정한 ‘챔피언’임을 관객들에게 알려줬습니다. 우리나라에 첫 금메달을 안겨준 최민호 선수의 노고도 인상적이었지만 승패를 깨끗이 인정한 루드비히 파이셔 선수의 스포츠맨십도 그에 못지 않았습니다. 제겐 최민호 선수의 금메달이 주는 감동만큼, 충분히 감동적이었고 제 마음을 울렸습니다.

도복을 갈아입기 위해 경기장을 나서려는데 오스트리아 팬들이 그를 향해 소리치더군요. 알고보니 오스트리아의 유도 영웅이라고 합니다. 그를 위해 중국까지 찾아온 팬들을 위해 그는 환한 웃음과 인사로 답해주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4년 만에 한번씩 찾아오는 올림픽. 오늘처럼 결승전까지 올라가는 기회가 그의 생애에 또 주어질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 순간 무너지며 패했다는 사실은 상처와 앙금으로 남을 수도 있습니다.

한데 그는 자신의 부족함을 깨끗이 인정하며 상대를 축하해주는 넓은 마음을 보여줬습니다.



이렇듯 올림픽의 기본정신인 스포츠맨십을 온 마음으로 보여준 그는 충분히 금메달 못지 않는, 금메달 보다 더 빛난 선수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루드비히 파이셔 선수, 당신도 우리 한국의 최민호 선수 못지 않은 챔피언입니다.

항상 귀여우신, ^^ 뉴시스 이동원 선배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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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드비히 파이셔 선수의 홈페이지도 링크해드립니다. ^^
http://www.paisch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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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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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16일은 내 생일.
미란씨가 가장 먼저 내 생일을 축하해줬다.
손수 만든 생일카드와 냄새마저 좋았던 고운 손수건을 주며.
늘 상대를 먼저 생각하는 그 배려가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압구정 나들이는 꽤나 즐거웠고
그녀가 사준 피자와 파스타는 너무나 맛났다.

너무 고마운 미란씨,
그 마음 잊지 않고 늘 기억할게요.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오직 기도 뿐이네요.
베이징 올림픽에서 꼭 메달 따서
그간의 노력 보답받을 수 있도록
마음 다해 기도할게요.

그리고 앞으로 나도
미란씨에게 고마운 사람될게요. 꼭.
고마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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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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