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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나눔의 집 봉사활동을 잠시 뒤로 미룬 채 저는 경기도 양평에 위치한 용문효병원에 가기로 했습니다. 발인은 2월 8일 아침 9시. 양평까지 가기 위해선 새벽 6시에 집에서 출발해야만 했지요. 그런데 문제는 그날이 아버지 생신이라는데 있었습니다. 아버지 생신은 음력 1월 2일, 설 다음날입니다. 연휴 때면 온 가족이 집에 있기 때문에 저희는 항상 아침에 함께 미역국을 먹으며 조촐한 잔치를 엽니다.
하지만 저는 그곳에 가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가족들에게 양해를 구한 뒤 양평으로 향했습니다. 추운 새벽 바람과 싸우며 도착한 그곳에서 저는 사진 속으로나마 지돌이 할머니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정말로 마음이 아팠던 것은 너무나 적은 사람들만이 할머니의 마지막을 지켰다는 사실입니다. 어쩌면 그것이 작금의 현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물이 났습니다. 이 글을 쓰는 저 역시 할머니들의 아픔을 모른 채 그저 하루하루 살아가기에만 바쁘죠. 할머니들의 피 맺힌 절규와 아픔, 잊고 싶은 상처가 얼마나 깊고 처절한지 전혀 모른 채 말입니다.
장례식장에 있던 사람들이 한명 씩 나와 자신이 기억하는 지돌이 할머니에 대해 이야기하다 눈물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도 눈물이 났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다시 영상편집을 하면서 또 한 번 울었습니다.
(영상이 조금 깁니다. 그렇지만 꼭 끝까지 봐주세요.)
1923년 6월 5일 경북 경주군 안강면에서 태어난 지돌이 할머니는 18살에 결혼해 남편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남편이 징병으로 끌려갔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중국 방직공장에서 일할 사람을 찾는다는 말에 속아 그만 1945년 3월 13일 흑룡강성 동령현 석문자 위안소에 끌려가고 말았습니다. 할머니가 겨우 23살이 됐을 때의 일입니다.
그러나 해방 후에도 한국으로 돌아올 방법을 찾지 못해 중국인과 결혼, 슬하에 1남1녀를 두었습니다. 그러던 중 1997년 나눔의 집 도움으로 생존이 확인됐고 2000년 6월 1일 귀국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공동체 나눔의 집에서 생활하게 됐습니다.
그 후 2000년 11월 24일 국적회복이 허가됐고 이듬해 2월 8일 대한민국 국적을 회복했습니다. 나눔의 집에서 생활하시면서 수요일이면 일본대사관 앞으로 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알렸던 할머니는 최근 초기 치매 증세를 보이다가 결국 지병으로 2월 6일 오후 5시 24분 양평 용문효병원에서 끝내 운명하시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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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있어서도, 또 있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일본 정부의 사과를 받아내기 위해서라도 오래 오래 살 겁니다!”라고 외치셨던 할머니들도 언젠가는 모두 눈을 감으실 것입니다. 그 할머니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기 전에 우리 모두 힘을 모아 일본의 공식 사과를 받아냅시다. 여러분의 작은 관심들이 쌓이고 모이면 세상은 분명 바뀔 수 있을 것입니다.
(사진을 보실 분은 이곳을 클릭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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