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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으로 그린 세상/청춘불패

태어나서 처음으로 촌지를 받았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로 기억합니다. 예쁘게 포장된 선물 하나가 눈에 띄었습니다. 엄마 책상 위에 놓여 있었죠. 그리고 호기심을 참지 못한 전 엄마 허락 없이 그 자리에서 포장을 뜯고 말았답니다. 다들 이해하시죠? 그 나이 때는 종종 그런 법이잖아요.

"에이, 뭐야. 책이잖아. 무슨 포장을 이렇게 예쁘게 한 거야. 쳇." 그런데 중간 부분에 뭔가가 끼워져 있는 게 눈에 띄었습니다.

그 무엇인가는 다름 아닌 하얀 봉투였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수표 한 장이 있었습니다.


"엄마, 서점 아저씨가 실수했나봐. 모르고 책 안에다 돈 넣었어! 이 책 어디서 산거야?"

부엌에서 마늘을 빻고 있던 엄마는 깜짝 놀라며 도로 넣으라고 하셨죠. 다행히도 엄마 허락 없이 왜 포장을 뜯었냐는 야단은 맞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봉투 덕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로부터 14년 뒤 제 동생이 임용고사에 통과하여 '선생님'으로 불리게 된 그날, 엄마는 30여년 전 먼저 선생님이 된 '인생의 선배'로서 해줄 이야기가 있다 하셨습니다.

"누구나 처음 교단에 서게 되면 좋은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소망을 품게 되지. 그렇지만 매 순간 난관과 유혹에 시달리다보면 '좋은 선생님이 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스스로 품게 되곤 한단다. 그 순간을 슬기롭게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야. 아이들의 맑은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볼 수 있는, 그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는 것이지."

그러면서 자연스레 촌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셨습니다. 한번 받기는 어렵지만 두번 째 받기는 쉬운 법이므로 잠깐의 망설임이 있을지라도 거절할 줄 아는 용기와 지혜를 발휘하라고 말이죠. 엄마는 30년 가까운 교직생활 동안 우연히 받게 된 촌지 한 장도 넘어가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 엄마의 조언이었으니 더 깊이 새겨들 수 밖에 없었죠.

그렇지만 옆에 앉아 엄마와 동생과의 대화를 들으며 '촌지 이야기'는 제겐 먼 나라 이야기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정계나 재계 쪽에서 일하는 사람도 아니었고 교직에 있는 사람 또한 아니었으니까요. 프리랜서 글쟁이에게 촌지라뇨.



얼마 전부터 정기적으로 쓰게 된 기사가 있습니다. 바로 사업으로 자수성가한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성공 노하우를 알려주는 인터뷰 기사입니다. 오늘도 저는 그 기사를 쓰기 위해 한 분을 만나게 됐죠. 제가 만난 그분은 '기술혁신으로 세상을 선도하자'는 이념으로 회사 창설 20년 만에 우량기업으로 키워낸 대단하신 분이었습니다. 약 1시간 가량 그분의 이야기를 들으며 인터뷰어와 인터뷰이와의 만남을 넘어선, 개인적으로 많이 배울 수 있었던 뿌듯한 시간이었습니다.

인터뷰를 마친 뒤 인사를 드리고 나오려는데 그분이 제게 묻어군요. "식사하셨습니까?" 그리고 그 질문과 동시에 흰 봉투를 제 코트 왼쪽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깜짝 놀라 오른손으로 봉투를 꺼내려고 하자 다른 한손으로 제 손을 누르며 "제가 바빠서 식사 대접은 못하겠고 대신 이걸로 집에 가시면서 맛난 저녁 하십시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순간, 언젠가 엄마가 해줬던 그 이야기가 떠오르더군요.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기 위해선 단호하게 거절할 줄 아는 용기와 지혜가 필요하다는 그 말씀 말입니다.

그 봉투를 다시 그 분 손에 쥐어드리자 "아니 정성을 이렇게까지 거부하시나? **신문 기자, ##방송 기자 만났을 때도 안 이랬는데. 어려서 뭘 몰라서 그러는데 선배들한테 얘기 못 들었어? 이럴 때는 그냥 '고맙습니다'하고 받는 게 예의야"라며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말씀하시더군요.

어떻게 이 상황을 모면할지 몰라 일순 당황스러웠습니다.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한 일을 이렇게 예상치 못한 순간에 겪게 됐으니까요. 그래서 엄마는 지혜도 필요하다고 하셨나 봅니다.

"식사를 못 사주시는 게 마음에 남으신다면 다음에 시간 되실 때 알려주세요. 그때 맛난 식사 사주시는 걸로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돌려드리겠습니다. 설 잘 보내세요. 안녕히 계십시오."

그렇게 말씀 드린 뒤 건물을 나서는데 만감이 교차하더군요. 여러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가장 크게 들었던 생각은 '응, 잘했어. 헬레나.' 그것이었습니다.

제겐 꿈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두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 수 있는 그런 좋은 글을 쓰고 싶다는 오랜 꿈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진실된 글을 써야겠죠. 그리고 진실된 글을 쓰기 위해선 늘 진실된 삶을 살고자 노력해야겠죠. 그것은 곧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이라 외치며 고뇌하던 어린 날의 우상 윤동주 시인의 자세와도 같습니다.

제가 만약 '수백만 원 든 것도 아닐 텐데.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니까 고맙게 받자'라며 봉투를 받았다면 제 꿈은 영원히 꿈나라 속에서만 존재했겠죠. 스스로를 속이는 사람은 결코 좋은 글을 쓸 수 없을 테니까요. 그래서 혼자 흐뭇해하며 그렇게 찬바람 속에서도 연신 웃으며 집으로 돌아왔답니다.



언젠가 제게도 아이가 생긴다면, 그 아이가 첫 직장을 얻게 됐을 때 저도 오늘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겠죠. 그 옛날 제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더 기분 좋은 웃음을 지을 수 있었던 하루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