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13년 전 전라북도 무주.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 스키점프 국가대표팀이 급조됩니다. 한데 국가대표팀이라고 하기엔 뭔가 다들 불안 불안, 엉성하기만 하네요. 뭐 물론 미국서 알파인 스키 주니어 대표팀에 몸담았던 밥은 인재죠. 그러나 클럽 웨이터 출신의 홍철이나 고깃집에서 서빙과 돈관리만 도맡아하고 있던 재복, 곰인형 만드는 할머니와 바보 동생을 돌봐야하는 가장 칠구, 그리고 좀 많이 모자란 봉구를 살펴보면 말이 좋아 국가대표지, 국가를 대표하기엔 뭔가 많이 부족한 듯합니다. 게다 국가대표 코치라는 분은 어린이 스키교실 강사 출신이네요. 스키 점프(Ski Jump)의 스펠링을 몰라 스카이 점프(Sky Jump)로, 그것도 당당히 칠판에 적는 사람이 코치라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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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거나 그런 방종삼 코치의 지도 아래 선수들은 스키점프의 세계에 입문하게 됩니다. 소싯적 스키는 타봤으나 스키점프는 처음인 선수들에게 훈련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겠죠. 한데 변변한 연습장도 없어 공사장에서 러닝을 하고, 높이에 적응하기 위해 재복이네 고깃집 앞마당 나무에 줄을 연결시켜 활강을 연습합니다. 시속 90km로 달리는 승합차 위에 스키를 고정시킨 뒤 점프 자세로 버티는가 하면 문 닫은 놀이공원 후룸라이드에 비닐장판을 깐 뒤 점프대로 개조, 뛰어내리기를 반복합니다.
이렇듯 스키점프가 뭔지도 모르는 선수들이었으니 시작은 오합지졸이 당연했습니다. 그러나 땀과 함께 보낸 시간들 속에서 그들은 선수로 성장하였습니다. 그리고 달게 된 태극마크. 처음으로 참가했던 올림픽이었던 나가노 동계올림픽에서 선수들은 꼴찌로 대회를 마감했지만, 2003 동계유니버시아드 개인전, 단체전 금메달, 2003 동계아시안게임 단체전 금메달, 2009 동계유니버시아드 개인전, 단체전 금메달 등의 기록에서 알 수 있듯 국제대회에서 연일 ‘코리아 바람’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들의 선전을 기대한 이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무관심 속에서도 그들은 스스로의 이름을 대표하겠다며 온 마음을 다해 뛰었고, 하늘을 날고 싶은 그들의 꿈은 참으로 아름답고, 또 멋지게 이뤄졌습니다.
영화 국가대표를 보며 저는 국가대표 속 주인공을 꼭 닮은 선수들이 생각났습니다.
바로 강원FC 선수들입니다.
2008년 4월 강원도에 프로축구팀이 창단된다는 발표 후 정확하게 8개월 만에 강원FC가 탄생했습니다. 첫 훈련은 12월부터였죠. 개막까진 불과 3개월. 100일 남짓한 시간동안 어찌 조직력을 쌓을지 걱정이었습니다. 선수단 구성을 면면이 살펴보면 더 그랬죠. 최순호 감독 이 울산미포조선 지휘봉을 잡고 있던 당시 최 감독의 지도 아래 있던 김영후와 김봉겸, 유현, 안성남, 강릉시청에서 몸담고 있던 이강민, 오원종, 창원시청 출신의 하재훈과 부산교통공사에서 온 김진일까지. 내셔널리거 출신 선수들이 꽤 많았죠.
그 뿐인가요. 지금은 강원FC 포백 수비의 핵인 전원근, 곽광선, 오른쪽 날개자원인 이창훈, 박종진, 강원의 비밀경기 윤준하, 중앙자원 권순형 모두 대학출신 선수들입니다. 프로 경험이란 전무한 풋내기들이었죠. J리그서 10년간 선수로 뛰었던 마사와 울산, 전북에서 프로생활을 했던 정경호, FC서울 캡틴 출신의 이을용만이 K-리그 경험을 갖고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시작해야하는 상황이었으나 문제는 제대로 시작할 줄 아는 이는 적었다는 사실에 있었습니다. 대다수 선수들은 프로가 무엇인지 잘 몰랐으니까요. 후에 이을용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처음 선수들을 봤을 땐 답이 안 나왔습니다. 답답했죠. 애들 정신 상태가 전혀 프로선수답지 않았거든요. 프로선수라면 응당 해야 할 것들, 자기관리 같은 것들을 하나도 모르더라고요. 나중에는 ‘이 선수들과 함께 올 시즌을 과연 잘 버틸 수 있을까’ 의문마저 들었을 정도였으니까요. 과연 얘네들이 잘할 수 있을까' 싶었어요.”
선수들은 대학 및 내셔널리그 시절 때처럼 인스턴트 음식이나 탄산음료 섭취를 즐겨했습니다. 저녁 11시가 되는 시간까지도 노트북과 전화기를 끼고 살았고요. 훈련이 없는 시간이면 정신없이 낮잠을 자는 선수들도 많았고요.
최순호 감독은 선수단 식단에서 탄수화물과 나트륨 섭취를 줄이는 대신 단백질 섭취를 늘였습니다. 식사 후 바로 낮잠 자는 일을 막기 위해 5분 만에 밥그릇을 비워도 무조건 처음 식사한 시간을 기점으로 30분 간 테이블에 앉아 동료들과 대화를 나누게 하였습니다. 소화 뿐 아니라 친분도 도모할 수 있는 일석삼조의 시간이었죠.
하지만 여전히 선수단 생활환경은 열악했습니다. 선수들은 클럽하우스가 없어 관동대 여학생 기숙사 위층 유니버스텔에서 살았고 체육관 훈련과 배드민턴 동호회의 연습경기가 겹치면 동호회원들의 연습이 끝날 때까지 마냥 기다리다 구석에서 몸을 풀어야만 했습니다. 잔디구장을 빌릴 수 없는 날이면 주문진까지 가서 훈련을 해야 했는데, 설상가상이라고 인조잔디구장 아니겠어요. 인조잔디에 발목을 다칠까봐 늘 조심조심, 걱정하며 선수들은 뛰어야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개막전은 다가오고 강원FC의 승리를 점치는 이는 없었습니다. 심지어 모 축구잡지에서는 올 시즌 강원의 전력을 15개 팀 중 14번째라는 내용의 기사를 내보내기까지 했었죠.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신생팀이 하면 얼마나 하겠어, 라는 시선뿐이었죠.
그리고 3월 8일 개막전. 베스트 11 중 8명의 선수에게 그날 그 경기가 데뷔전이었습니다. 2만 명이 넘는 관중 앞에서 경기를 치러본 사람은 정경호, 마사, 이을용 뿐이었고요. 하지만 승리는 전반 28분 터진 윤준하의 결승골을 소중히 지킨 강원FC의 것이었습니다. 시민, 도민구단이 창단 첫 경기에서 승리를 거둔 적은 지금껏 없었기에 강원FC의 개막전 승리는 더욱 의미가 깊었습니다.
승리의 디딤돌이 된 결승골의 주인공 윤준하는 또 어떻던가요. 청소년대표, 심지어 대학선발로도 뽑힌 적 없는 무명선수였습니다. 3순위로 지명된 지방대학 출신의 무명선수가 쏘아 올린 마법 같은 결승골은 참으로 동화 같은 이야기였죠. 그리고 그 선수는 일주일 뒤 열린 강원FC 첫 원정경기에서 다시 한 번 동화 속 왕자님 같이 등장하게 됩니다.
올 시즌 강력한 우승 후보, 부자구단 FC서울. 국가대표 선수들이 즐비한 서울을 상대해야만 하는 강원FC에는 국가대표 선수들이 단 한명도 없었습니다. 국가대표 경력을 가진 ‘과거’가 있는 선수는 월드컵서 좀 날렸던 이을용과 박지성 단짝으로 더 유명한 정경호 뿐이었죠.
그날 경기 취재를 온 기자들에게 주인공은 이청용, 기성용이 지키고 있는 FC서울이었습니다. 강원FC는 조연에 불과했죠. 그러나 강원FC는 김진일의 선제골에 이어 윤준하의 결승골에 힘입어 서울을 2-1로 꺾으며 파란의 주인공이 됐습니다.
드래프트에서 떨어진 뒤 갈 곳 없어 내셔널리그에서 절치부심했던 선수들. 모래바람이 일렁이는 맨땅에서 달리고 부딪히며 선수생활을 했던 그들이 만들어낸 드라마는 그날 상암의 밤을 감동으로 적시기에 충분했습니다.
어디 그 뿐이던가요. 지난 6월 21일에는 K-리그 최다우승클럽이라는 거대한 타이틀을 갖고 있던 성남을 상대로 4-1 대승을 거두기도 했지요. 경기 시작 전 최순호 감독은 “오늘 엔트리에 올라간 17명의 선수 연봉을 합치면 성남의 이호 연봉과 비슷하겠다”며 웃었지요. 그러나 더 가지지 못한, 그렇게 없는 선수들은 빠듯한 삶에 지친 우리에게 대승을 선물했습니다. 경기 종료 후 최순호 감독은 마지막까지 열심히 뛰어준 선수들에게 고맙다며 눈물을 글썽거렸고, 저 역시 같은 마음이었기에 속눈썹에 매달린 눈물 방울방울을 훔쳐내야만했습니다.
강원FC는 현재 6위에 랭크돼있습니다. 시즌이 절반 이상 지난 지금 강원FC가 K-리그에 남긴 기록은 꽤 됩니다. 우선 3경기 연속 4골 이상 승리(5월 24일 울산전 4-3 승, 6월 21일 성남전 4-1 승, 6월 27일 전북전 5-2 승)하며 K-리그에 신기록을 세운 것도 빼놓을 수 없겠죠. 프로축구연맹이 선정한 주간 베스트팀에는 최다 선정(8회) 됐을 뿐 아니라 파울 수는 제일 적은 신사적인 팀으로 모두의 박수를 받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무명의 선수들이 만들어낸 드라마입니다. K-리그 선수가 되고 싶다는 꿈이 만들어낸 이야기입니다. 좌절하는 대신 도전하겠다며 마지막까지 희망을 품은 결과입니다. 꿈을 이루고픈 간절함이 만든 길입니다.
유니폼에 박힌 자신의 이름을 걸고 살아가는 선수들. 자신의 이름이 부끄럽지 않기 위해 종료 휘슬이 울리는 순간까지 뛰는 선수들. 태극마크가 없어도 각자의 인생에선 자신이 대표라고 생각하는 선수들. 그렇게 자신의 인생을 대표해 치열하게 사는 선수들 모두가 바로 국가대표인 것이죠. 마치 영화 <국가대표> 속 주인공 헌태(하정우) 흥철(김동욱) 재복(최재환) 칠구(김지석) 봉구(이재응)이 그러했듯이 말입니다.
영화 <국가대표> 말미에는 두려움 대신 자신에 대한 믿음만으로 전속력을 다해 점프대 위로 도약하는 선수들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들의 비상을 함께 날아오르는 것만 같은 기분에 공감하는 것처럼,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지만 모두의 예상을 깨고 선전 중인 강원FC의 모습에서 우리네 인생을 대입해봅니다.
물론 여전히 강원FC에는 국가대표 선수가 단 한명도 없습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도전하는 그 모습은 아름답습니다. 그러하기에 나 역시 당신들처럼 쉼 없이 달릴 것입니다. 땀 흘린 만큼, 언젠가는 보상받는다는 걸 당신들이 알려줬기에, 내 인생의 국가대표가 되겠다는 약속과 함께, 그렇게 달리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