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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으로 그린 세상/청춘불패

7년전, 세상과 사람을 사랑하라고 조언해준 김수환 추기경님을 추억하며

7년 전, 이제 막 대학신문 수습기자 딱지를 뗐을 때, 무슨 복을 그리 받았는지 김수환 추기경님 인터뷰를 맡게 되었다. 1993년 9월 동네성당에서 세례를 받으면서 헬레나라는 성당본명을 얻게 되었을 때, 그때부터 알게 됐던 김수환 추기경님은 내게 참 멀고도 큰 사람이었다. 세례를 받은지 꼬박 10년 만에 김수환 추기경님을 뵈었을 때, 그 순간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추기경님이 앉아 계셨던 쇼파 뒤로 햇볕이 쏟아졌는데, 11월 초였기에 날씨는 추웠지만 방안의 공기만은 참으로 따뜻하였다. 그곳의 빛은 초겨울이 아닌 이른 봄의 햇볕처럼 그렇게 따스히도 추기경님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그날 추기경님은 내게 당신의 사진이 담긴 열쇠고리와 나무로 만든 묵주를 주시며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라며, 사람과 세상을 사랑하라며, 빛과 소금 같은 존재가 되길 바란다는 덕담을 건네 주셨다. 그때 나를 보던 그 표정은 너무나 평화로웠고 또 인자로워서 마치 내 할아버지를 보는 것 같아 "추기경님과 사진을 찍어도 될까요?"라는 부탁을 드렸더랬지. 그때 옆에 서 계시던 보좌 신부님은 긴 인터뷰 때문에 피곤하시니 이제 그만 가라고 하셨지만 추기경님은 허허 웃으시며 "한 장 정도는 괜찮다"며 어린 헬레나 옆에서 활짝 웃으셨지.

추기경님의 선종 소식을 들으며 7년 전 그 가을날이 생각나 먹먹해진 가슴을 부여잡으며 잠시 그날을 떠올려본다. 그리고 7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도 우리의 고개를 끄덕이게 만다는, 당시 추기경님이 들려줬던 이야기를, 추기경님이 읊었던 말씀 그대로 적어 올려본다.

△사회가 혼란스러울 때, 고견을 들을 수 있을 정도의 원로는 안타깝게도 많지 않다고 합니다. 한국 사회에 진정한 원로가 없는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보시나요?
- 우선 나이 든 사람들 중 학식 있고 모범적인 사람이 별로 없어서 원로가 없다는 말이 나온 것 같아요. 그렇지만 젊은 사람들이 연예인 같은 유명인에게만 매력을 느껴서 늙은이가 사회에서 밀려나간 것일 수도 있어요. 또, 장유질서가 뿌리 깊던 예전과 달리 누구나 평등하다는 생각이 광범위하게 퍼진 요즘 사람들이 원로를 찾지 않아서 원로가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해요.

△현 정부 출범 즈음, 정국 운영에 대한 조언을 주시기도 하셨는데요, 국민의 정부 5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 글쎄요. 그 분이 정권에서 물러난 후 좀 더 시간을 갖고 지켜봐야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지만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된 것만으로도 지금까지 지역, 가난 등의 이유로 소외됐던 사람들의 상처가 어느 정도 치유했다고 생각돼요. 그러나 취임 전 IMF 위기에 적절히 대처해 인기가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후 편향된 인사정책이라든가 권력남용, 아들의 비리사건 등은 이전 대통령의 전처를 밟는 것 같아 아쉬움이 남네요.

△그렇다면 좀 더 외연을 넓혀, 우리 사회의 리더가 갖춰야 할 덕목은 무엇이며 대선후보가 갖춰야 할 자질은 무엇인가요?
- 총리 인증과정에서 드러나듯 가장 중요한 것은 청렴결백이고, 또 그 사람 말을 믿을 수 있는 정직성이에요. 그리고 지역·계층·세대·노사 간의 갈등과 같은 문제들을 국민의 의견을 수렴해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리더가 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같은 맥락으로 그런 사람이라면 남북문제도 통일로 이끌 수 있다고 생각되네요.

△북한 핵문제는 초미의 관심사입니다. 이를 근거로 대북 지원에 대한 의견이 분분한데, 우리나라의 대북 정책은 어떤 입장을 견지해야 할까요?
- 대북정책은 근본적으로 화해와 협력을 바탕으로 이끌어야 해요. 인간적으로 솔직하게 얘기할 수 있는 파트너 관계도 유지해야 하구요. 물론 우리가 일방적으로 주거나 북쪽에 매달리는 것은 곤란하죠. 최근 북한의 핵 보유문제가 불거졌는데, 북한이 핵폭탄을 얼마나 갖고 있는지 모르지만 그것으로 우리를 협박해서는 안되며, 이는 북한을 위해서도 현명하지 못한 행동이에요.

△지난 9·11 테러를 일부 전문가들은 문화 충돌로 보기도 했습니다. 종교 또한 문명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데요, 문명 대립으로까지 치닫고 있는 세계 평화를 어떻게 풀어가야 할까요?
- 종교가 다르다고 해서 적대적인 관계가 생기는 것은 아니에요. 9·11사태 역시 이슬람교와 크리스트교가 서로 달라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일부 이슬람교도가 정치적 이유로 조성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테러를 감행했는데, 그들이 이슬람교도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종교와 연관짓는 것일 뿐이에요. 물론 문제가 있다면 폭력이 아닌 사랑과 용서로 해결해야겠죠. 폭력은 다시 폭력을 낳으며, 악순환이 계속되니까요.

△ 과학은 점차 발달해, ‘신의 영역’을 향하고 있다고 평가되기도 합니다.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우리들이 과학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 과학은 자연의 신비를 벗겨내고, 과학자를 통해 하느님이 사람을 만든 신비로움에 조금은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광대한 자연과 하늘의 별, 이런 것들은 볼 때마다 놀랍잖아요. 또, 원자 역시 연구자들이 연구와 분석을 거듭해도 끝이 없는 것을 보면 정말 신비스러워요. 우리의 몸 역시 원자로 구성되었다는 점에서 땅을 이루고 있는 것과 근본적으로 같다고 볼 수 있어요. 이 점에서 우리 몸도 한없는 신비 속에 있다고 할 수 있어요. 따라서 신비로움을 밝혀내는 과학의 발전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과학은 그 자체의 발전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고 소중함을 간직할 수 있을 때 의미가 있는 거예요. 요즘 인간 배아복제다 해서 인간 존중이나 생명존중에 바탕을 둔 윤리관 없이 단지 편리함 추구하기 위한 연구를 하기도 하는데, 이런 연구는 자칫하면 인류에 재앙을 불러올 수도 있어요. 무엇보다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과학이 돼야겠어요.


7년 전, 내 카메라에 담았던 추기경님의 생전 모습. 이날 사제관은 아름다운 빛으로 반짝였었다. 그 빛이 주던 온화함을 앞으로도 잊지 못하리라. 헤어지기 전 내 손을 잡아주셨던,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지던 추기경님의 손 끝, 그 마디 마디까지도.

제게 해주셨던 말씀대로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더라도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해 노력하며 살겠나이다. 하늘에서 편히 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