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미국월드컵 출전 이후 한국여자축구는 2004올림픽 본선탈락, 2006아시안게임 노메달, 2008올림픽 본선탈락, 2008동아시아연맹선수권 3전전패 등 국제대회에서 거푸 쓴잔을 들이키며 한동안 정체기에 빠져있었다. 그러나 2008아시안컵에서의 선전을 발판삼아 여자축구는 다시금 새로운 반전을 꿈꾸고 있다. 물론 한국의 여자축구는 여전히 척박한 땅 위에 놓여있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비옥한 대지로 만들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는 이들이 있기에 ‘그래도 발전과 희망를 엿볼 수 있다’라고 감히 말할 수 있겠다. 바로 여자축구 실업팀 ‘대교 캥거루스’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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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축구계에 최근 불어오는 대교 캥거루스의 바람이 매섭다. 대교 캥거루스는 올 시즌 첫 대회였던 춘계연맹전에서 3전 전승으로 우승한데 이어 지난 8월 강릉에서 열린 통일대기전국대회에서도 또다시 우승컵을 차지하며 2관왕의 위업을 달성했다. 이미 지난해에도 대교 캥거루스는 탄탄한 조직력을 바탕으로 통일대기, 전국선수권, 추계연맹전에서 내리 우승컵을 품에 안은 바 있다. 명실공히 대한민국 최강 실업팀으로 불러도 부족함이 없다.
대교 캥거루스가 여자축구에서 차지하는 입지는 국가대표 명단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최근 소집한 피스퀸컵 참가명단(20명)을 살펴보면 무려 9명의 선수들이 대교 캥거루스 소속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차세대 골잡이로 떠오른 박희영을 비롯해 차연희, 이장미, 홍경숙, 김유미 등이 대표적인 선수들이다. 대교 출신의 이들 모두는 올 한해 여자대표팀이 선전하는데 있어 가장 큰 역할을 한 주춧돌이었다.
그렇다면 어느덧 한국 여자축구의 ‘대세’로 자리 잡은 대교 캥거루스의 저력은 과연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무엇보다 튼튼한 스쿼드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대교 캥거루스에는 앞서 언급한 국가대표 선수들 이외에도 뛰어난 기량을 자랑하는 선수들이 대거 포진해 있다. 일단 공격진용에는 지난 2006아시안컵 태국전에서 무려 6골을 폭발시킨 153cm의 단신 ‘슈퍼 땅콩’ 정정숙과 2006년 처음 실시된 여자축구 드래프트에서 전체 1순위로 지명된 바 있는 청소년대표 출신 박은정이 있다. 미드필드에는 여자실업축구사상 최초로 ‘트레이드’를 통해 영입한 ‘왕언니’ 유영실(前충남일화)과 최미진, 이은혜, 송유나 등 청소년대표 출신의 젊은 선수들이 절묘한 신구조화를 이루고 있다. 노장 김유미가 주축인 수비진에는 황보람, 박현희 등 국가대표 출신 선수들이 철옹성을 구축하고 있으며 주전 골리 전민경은 대표팀 내에서 동갑내기 장신 골키퍼 김정미(현대제철)와 선의의 경쟁을 펼치며 성장 중이다.
최강의 지원
대교 캥거루스가 정상에 오르기까지에는 무엇보다 모기업 대교의 아낌없는 지원이 큰 역할을 했다. 대교그룹은 지난 2008년 4월 배드민턴팀과 여자축구단을 통합해 ‘대교 스포츠단’을 발족시켰다. 아마추어 스포츠 사상 최초의 종합 스포츠단 창단으로, “상대적으로 큰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는 비인기 스포츠를 집중적으로 육성하겠다”는 기치 아래 진행된 터라 더욱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또한 “남이 안하는 종목, 비인기 종목을 적극 지원해 인기종목을 만들고 최정상의 팀으로 만들어보자는 그룹차원의 분명한 목표와 의지”라던 서명원 단장의 말에선 팀 창단의 굳건한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물론 스포츠단 창단 이전에도 모기업의 지원은 파격적이었다. 대교는 이미 2007년 10월 여자 실업팀들 가운데 최초로 클럽하우스를 건립한 바 있다. 경기도 시흥 대교 연수원 옆에 위치한 클럽하우스에는 전용 잔디축구장과 함께 숙소, 훈련장, 샤워실, 마사지실, 식당 등 각종 부대시설이 마련돼 있는데, K리그에서도 전용 클럽하우스를 갖추지 못한 팀들이 수두룩한 현실을 감안한다면 실로 파격적인 지원이 아닐 수 없다.
게다 올 1월에는 여자 실업축구 역사상 최초로 신의손 골키퍼 코치를 영입하는 인사를 단행했다. 알다시피 골키퍼는 포지션 특성 상 필드 플레이어와는 별개로 개인별 맞춤 훈련을 받아야만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간 여자실업팀들은 넉넉지 못한 재정 을 이유로 골키퍼 코치를 별도로 두지 못한 상태였다. 기실 여자실업축구팀은 여자대표팀 선수수급의 바로미터다. 따라서 소속팀에서 훈련을 제대로 받을 수 없게 되면 이는 선수 뿐 아니라 대표팀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간 한국여자축구의 취약점으로 늘 골키퍼 문제가 거론됐던 가장 큰 이유도 바로 이 같은 현실 때문이었다. 그런 점에서 대교 캥거루스의 골키퍼 코치 선임은 골키퍼 육성문제를 해갈시켜줄 ‘단비’같은 해결책이다. 실제로 이는 곧 경기력으로 증명됐는데, 지난 8월 열린 통일대기전국대회에서 대교 캥거루스 주전 골키퍼 전민경은 ‘무실점 선방’의 활약으로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더 높은 도약을 위해
역사적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팀은 리그의 전체적인 수준을 끌어올리는 역할까지 도맡는 경우가 많다. 그간 대교 캥거루스는 여자축구의 새로운 패러다임 창출을 위해 많은 노력을 쏟아왔다. 무엇보다 지난해까지 대교 캥거루스의 지휘봉을 잡고 있던 안익수 現국가대표팀 감독의 공로를 빼놓을 수 없겠다. K리그(성남일화)에서 지도자 경력을 쌓은 안 감독은 그간 여자축구계에 쉽게 시도된 적이 없던 4백을 도입, 전술적 측면에서 대교 캥거루스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며 호평을 받았다. 선수들에게 프로페셔널한 마인드를 심어주기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았는데, 그중 여자축구의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기 위한 노력이 가장 돋보였다.
그간 안익수 감독은 선수들에게는 “남자친구를 만날 때도 떳떳하게 축구선수라고 말할 수 있는 직업적 자부심을 가져야한다”고, 지도자들에게는 “선수들이 뛰는 동안 결코 ‘여성성’이 희생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을 강조해왔다. 그간 여자축구 지도자들은 선수들에게 ‘경기력을 위한다’는 명목 아래 화장기 없는 얼굴, 짧은 단발머리, 헐렁한 티셔츠와 반바지를 암암리에 강요해왔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이 같은 현실은 곧 여자축구선수를 대표하는 이미지를 구축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안 감독은 달랐다. 부임 이후 안 감독은 대교 캥거루스 선수단에 일대 개혁을 단행했는데, 화장, 헤어 스타일, 액세서리 착용을 전적으로 선수들의 자유의사에 맡긴 것이 주 골자였다. 실제로 그해 대교 캥거루스 선수단은 시즌 3관왕을 휩쓸며 외모를 향한 관심과 경기력은 별개의 문제라는 사실을 입증해보였다.
대교 캥거루스는 2002년 창단 이래 구단의 적극적인 지원과 감독의 지도력, 그리고 이를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선수단의 노고라는 ‘삼위일체’ 아래서 성장했다. 알다시피 본디 성장이란, 지원과 배려 그리고 믿음이 어우러질 때 비로소 이뤄지는 법이다. 그런 점에서 대교 캥거루스의 선전은 ‘헝그리 정신’과 ‘투혼’만 강요하던 여자축구계의 풍토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모쪼록 이 같은 대교 캥거루스의 활약에 고무돼 여자축구계에 앞으로 제2, 제3의 대교 캥거루스 같은 팀들이 계속해서 창단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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