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8일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흥미로운 주제의 방송을 내보냈다. ‘내겐 너무 완벽한 라이벌 - 엄마 친구 아들이 무섭다’편을 통해 ‘엄친아’를 바라보는 시각과 그로 인한 문제점들을 살펴보는 시간을 가졌다. 엄친아는 ‘엄마 친구 아들’의 준말이다. 누구네 집 아들은 이번 시험에서도 1등했더라. 누구네 집 아들은 이번에 또 반장됐더라. 누구네 집 아들은 어느 대학에 붙었더라. 어린시절 엄마의 잔소리에 늘 등장하는 주인공은 언제나 실체를 알 수 없는 엄마 친구 아들이었다. 그런데 이 존재를 알 수 없는 녀석은, 늘 뭐든지 나보다 한발 앞서 나가곤 했다. 뭐든지 잘하고 뭐든지 척척 해내고 뭐든지 자기 것으로 만드는 대단한 놈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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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거나 학창시절 엄친아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해도 과언이 아니겠지만 나를 힘들게 했던 것은 엄친아가 아닌 한 살 터울의 내 동생이었다.
초등학교 졸업 당시 우리학교에서는 각 반 1등에게 ‘이사장상’을 주는 제도가 있었다. 지난 1년 동안 이상장상만 바라보며 공부했지만 졸업 당시 내 손에 쥐어진 상은 개근상이 전부였다. 선생님은 아깝게 놓쳤다며 내 어깨를 다독거렸고 난 애써 열심히 했지만 어쩔 수 없나보지, 하며 스스로를 위안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1년 뒤 동생은 보란 듯이 졸업식날 아침, 단상 위에 올라가 이사장상을 탔고 그 모습을 바라본 부모님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만연했다. 언니도 못탄 걸 동생이 해냈다며 어른들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태어나서 처음 느낀 좌절이었다.
내가 중학교 입학 당시만 해도 배치고사가 있었다. 배치고사 1등이 입학식 당일 다른 입학생들을 대신해 신입생 선서를 하는 풍습이 있었다. 워낙 1등과는 거리가 멀었던지라 시험을 치르는 내내 그저 좋은 친구들이 있는 반에 편성됐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하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1년 뒤 동생은 어색한 단발머리를 하고선 모두 앞에서 ‘선서’를 외치고 있었다.
고등학교 입학 때도 그랬다. 당시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에서는 입학식날 각반 1등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제도가 있었다. 입학 당시 그 모습을 지켜보며 박수를 쳤던 나는 1년 뒤에도 그 자리에서 박수를 치고 있었다. 다만 달랐던 것은 단상 위에 올라가 장학금을 받는 동생이 있고 없고의 차이였을 뿐이었다.
그 뒤로 매학기 동생은 학교로부터 장학금을 받았다. 그 말은 곧 늘 반에서 1등이었다는 사실을 뜻했고, 동생과 나와의 가족관계가 드러나서부터는 나는 늘 동생보다 공부 못하는 언니로 불리게 되었다.
“야, 너 동생은 이번에도 또 1등해서 장학금 받았는데 넌 언니가 돼서 그게 뭐니?” “자존심도 안상하니?” “동생 좀 보고 배워라.” “모르는 거 있음 동생한테 물어보면 되겠다?” “동생은 특별히 과외 받는 것도 없지? 그런데 어쩜 그렇게 공부를 잘하니.”
그런데 스트레스 때문이었는지 그때부터 내 키는 더 이상 자라기를 거부하였다. 또 다른 시련의 시작이었다. 큰집이었기 때문에 명절 때면 늘 친척들이 우리집에 모였는데, 그때마다 어른들은 동생과 나를 불러놓곤 ‘누구 키가 더 큰가’ 대결을 펼치곤 했다. 일 년에 2번 씩 설날과 추석 때면 늘 반복됐기에 나중에는 일종의 관례 내지는 의식 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나 나와는 상관없이 동생은 중력의 지배를 받지 않은 듯 했다. 쭉쭉, 사랑받는 콩나물처럼 시원하게 잘도 자랐다. 곧 동생은 나를 앞질렀고 그때부터 동생보다 키도 작은 언니라는 수식어까지 덤으로 선물 받아야만 했다.
한데 나도 사람이었던지라 더 이상의 비교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학교와 집에 ‘당신들은 모르겠지만 나도 사람입니다’라는 한줄 편지를 남긴 채 그대로 가출을 감행하고 말았다. 그래도 모범생 기질은 버리지 못했던 터라, 부반장 손에 보충수업 학급비와 제출하지 않은 명단을 아침 등교길에 전해준 뒤 그대로 사라지고 말았다.
물론 그때는 PC방이 이제 막 곳곳에 생기고 있던 시절이라 고등학교 2학년생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은 없었다. 하여 저녁까지 교보문고에서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다 문을 닫으면 버스를 타고 미리 알아본 아파트로 이동하였다. 낮 시간에 그나마 제일 안전해 보이는 아파트를 물색했고, 저녁이면 그곳에 가 계단에 앉아 잠을 청하였다. 그렇게 3일을 보냈다. 4일째 되던 날 밥 사주겠노라던 친구 말에 약속장소에 가봤더니 그곳엔 엄마가 계셨다. 결국 엄마 손에 이끌려 집에 오며 나의 가출일기는 끝이 났다.
물론 그 뒤로도 동생과의 비교는 심심치 않게 일어났다. 예쁘고, 키 크고, 공부도 잘하고-영어 및 수학 경기대회는 늘 전담해서 출전하는-팔방미인 동생을 둔 덕분에 나는 늘 외롭고 힘들었고 또 괴로웠다. 심적 고생을 알아주는 이는 없었고 내 주변 사람들은 모두 동생과 나를 비교하기에 바빴다.
자연스럽게 말수는 줄어들었고 사람들은 그저 사춘기를 심하게 앓고 있구나, 라며 멋대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 즈음 내가 터놓고 말할 수 있는 상대는 일기장뿐이었다. 매일 밤 수십 쪽에 걸쳐 나의 속내를 털어놓았다. 쇼펜 하우어가 봤다면 형님, 하며 고개 숙였을 정도로 음울한 문장들의 연속이었다. 그래도 나는 개의치 않고 썼다. 쓰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은 나날이었으니까, 머릿속에 더 이상 단어조차 떠오르지 않을 때까지, 머리가 마비될 때까지 쓰고 또 썼다.
뭐하나 제대로 할 줄 없는 아이였다. 그러나 쓴다는 행위는 나를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과정이었고 그렇게 나는 여물었고 스스로 상처를 치유했고 그로인해 성장할 수 있었다. 선생님의 추천으로 나간 백일장에서 상을 탄 이후로 용기를 내 전국대회에 작품을 출품했고 알아주는 대회에서도 서너 번 수상자 명단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 전 전국대회에서만 십수 개의 상을 탈 수 있었는데, 그때 깨달았다. 아, 나 같은 애도 잘하는 게 있구나.
그렇지만 돌이켜보면 동생보다 잘하는 것은 생각보다 많았다. 피아노를 배웠을 당시 처음 곡을 습득하는 능력이나, 그 곡을 외우는데 걸리는 시간 모두 더 뛰어났고 또 빨랐다. 자전거라는 단어를 가지고 글을 쓸 때면 동생은 단순히 자전거의 장단점에 대해 기술했지만 난 할아버지의 자전거, 영화 마이걸에서 두 주인공의 우정의 매개체였던 자전거, 알베르토 아저씨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가던 토토의 웃음 등 내가 기억하는 자전거, 그리고 그 자전거와 얽힌 기억들을 떠올리며 글을 썼다. 그게 동생과 나의 차이였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동생과 나는 잘하는 영역이 서로 달랐던 것뿐이라고. 다만 문제는 그것을 알아주는 어른들이 부족했다는 사실에 있었다. 어린왕자의 독백처럼, 어른들은 숫자만 좋아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늘 그렇게 1등만 하는 동생만 인정했나 보다.
물론 그렇다고 동생이 미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때마다 난 무능력한 나를 탓하기 바빴으니까. 그게 참 무서운 거다. 스스로 무능력을 인정하게 되면, 난 못난 사람이니까 열심히 해도 소용없어, 라는 생각 역시 쉽게 하게 된다. 그 뒤에 오는 것은 나태뿐이다. 노력해도 ‘못난’ 나는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왜 그들은 각자 다른 영역에서 최고가 될 수 있는, 내재된 ‘잠재성’을 살펴보지 않은 것일까. 왜 그저 학업성적과 그 속에서 매겨지는 등수에만 집착했던 것일까. 그 성급함이 누군가의 미래에 그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정녕 모르는 것일까.
다행히 나는 비교적 일찍, 내가 좋아하고 또 잘할 수 있는 일을 발견했기에 비교가 주는 그늘에서 빨리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어느 누군가는 이 땅의 수많은 엄친아들과 비교 당하며, 무엇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는 한심한 놈 취급을 받을 지도 모른다.
그렇게 열등감에 시달려 좌절하는 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스스로를 믿어라. 자신이 믿지 않는다면 당신 자신을 믿어줄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니, 부디 믿어라. 자신의 몸과 마음을.
믿는 만큼 사람은 자라기 마련이고, 그 믿음이 곧 능력의 바로미터가 될 것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못한다할지라도 능력은 숨죽여 자라고 있으니 때를 기다려라. 그 능력이 자라고 자라, 언젠가는 모두를 놀라게 할 것이니. 그리고 마지막. 엄친아보다 무서운 건 다름 아닌 엄친아를 조장하며 비교하는 ‘일부’ 사람들과 그들이 속해있는 사회다. 먼 훗날 태어날 내 아이만은 부디 엄친아 없는 세상에서 키우고 싶다. 소박한 바람일지, 헛된 꿈일지는 모르겠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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