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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다방/Society

인생의 선배로서 조언을 아끼지 않던 정선희씨를 기억하며

작년 이맘 때 정선희씨를 처음 만났던 걸로 기억합니다. 케이블 방송 온스타일에서 ‘핑크 알파’라는 프로그램을 제작했는데, 저도 그 프로그램의 패널로 출연했죠. 2달 동안 방송을 찍으면서 주말마다 정선희씨를 만났지요. 그 프로그램의 사회자가 정선희씨였거든요.

알파걸. 사회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20대 여성을 지칭하는 신조어입니다. 어찌하여 연이 닿아 저도 알파걸 중 하나로 뽑혔고 금융, 예술, 정치, 공학, 의료 등에 종사하는 다른 20대 여성들과 함께 매 주 주제를 갖고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눴죠. 알파걸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가 프로그램의 요지였죠.

첫 녹화가 있던 날, 정선희씨는 “안녕하세요, 반가워요!”라고 소리치며 우리에게 인사했습니다. 가까이서 연예인을 보기는 처음이라, 연예인은 저렇게 당당하고 밝구나, 라고 혼자 생각했었죠. 돌아가면서 직업과 이름을 말했는데 단 한 번에 외우는 그 기억력에 놀랐고, 녹화 도중 대본에 없는 이야기들을 돌발적으로 했을 때도, 마치 준비하고 있었다는 듯이 받아치는 말솜씨에 감탄했습니다. 타고난 방송인이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였죠. 그리고 잠깐의 휴식시간. 정선희씨는 크리스피 도넛을 모두에게 돌렸고 도넛을 함께 먹으며 첫 만남이 주는 어색함을 떨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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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일주일의 시간이 흘렀고 다시 녹화를 가졌습니다. 그날은 마침 25년 넘게 사는 동안 남자친구 없이 지낸 제가 주인공이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제가 소개팅 하는 장면을 찍었는데,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제 소개팅은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소개팅 ‘남’께서 저의 애프터를 거절하고 집에 가셨거든요. 아, 정말이지 자존심 상하더군요. 그것도 아주 많이요. 그 장면이 그대로 방송에 나갈 생각을 하니 참 끔찍하다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그때 정선희씨는 “왜 자기가 매력적인 여자라는 걸 모르죠?”라고 말했습니다. “자신감을 가져요. 당신은 오래 만날수록 매력이라는 향기를 뿜어내는 사람이니까, 소개팅 같은 단발성 만남에서 잘 되기 힘들지도 몰라요. 그러니 잘 안된다고 속상해하지 말고요! 옆에서 오랫동안 지켜본 사람이라면 당신이 좋은 사람이라는 걸 분명 알테고, 그런 사람이 ‘인연’으로 다가올 거예요.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아요”라고 제게 말했죠.

이렇게 사람들 사이에선 잘 웃고, 말도 재밌게 잘하는데, 왜 일대일로 만날 때는 긴장하고 굳냐며,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는 것도 추천해주셨습니다. 그러다 보면 이성 앞에서 자연스럽게 말과 행동을 취할 수 있다면서요.

정선희씨는 그동안 정신없이 일만 하며 살아왔는데, 인연이라는 건 참 신기하게도 갑자기 찾아왔다며 이제는 고인이 되신 안재환씨 이야기를 해줬습니다. 마침 그날은 결혼식 드레스를 맞추고 온 날이었답니다. 특별한 날이라서, 남들과 다른 황금색 드레스를 맞췄다는 정선희씨 이야기에 우리는 부럽다며 고개를 끄덕였죠.

그날은 정선희씨와 녹화 도중 쉬는 시간 내내 정신없이 수다를 떨었던 것 같습니다. 그녀는 이제 막 사회에 발 딛은 우리에게, 언젠가는 일에 지쳐 모두 그만두고 떠나버리고 싶은 순간이 올 거라고 말했습니다. 그때는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마음 편히 생각하며 조금 속도를 늦추는 것도 그 순간의 고개를 넘는 좋은 방법이 될 것이라고 조언 해줬죠. 당신 스스로도 30대 어느 날 모든 것을 그만두고 싶은 위기가 있었지만, 잊고 있었던 마음의 여유를 다시 떠올리며 극복했다고 회상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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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모에 한창 신경 쓸 20대 인지라 성형수술 이야기도 우리에겐 화두였는데, 내 인생의 실리콘은 코 하나면 됐다는 솔직한 이야기로 우리를 웃게 만들었고, 옷과 어울리지 않는 귀걸이를 하고 나왔을 때는 자신의 귀걸이를 빌려주기도 했습니다. 이 귀걸이가 나을까, 저 귀걸이가 나을까, 갸우뚱 거리다 이거다, 하며 건네줬죠. 또 한번은 원피스를 입고 왔던 날, 마이크를 걸 데가 없다며 쩔쩔 매고 있을 때 윗 속옷에다 걸면 된다는 팁을 가르쳐줬고, 나중에는 직접 제 속옷에다 마이크를 끼워주는 친절까지 발휘해줬답니다. 오크우드 커피숍 주방에서 같이 옷을 갈아입기도 했고요. 돌이켜보면 참 털털했던 사람이었던 같습니다. 정선희씨는 말이죠.

그리고 마지막 녹화가 끝나고 꼭 한달 뒤에 결혼식이 열렸습니다. 당시 정선희씨는 함께 출연했던 우리 모두에게 청첩장을 주는 것을 잊지 않았고 결혼식에 참석해 축하인사를 건넬 수 있었습니다. 예식이 끝나고 축가를 부르기 위해 온 DJ DOC의 노래에 맞춰 춤을 추다가 당시 티아라와 면사포가 떨어지기까지 했는데, 역시 선희언니답다며 지켜보던 우리는 박수치며 웃었답니다. 신랑 신부의 귀여운 웨이브도 여전히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결혼식 참석자들에게는 작은 컵이 선물로 주어졌는데, 컵에는 감사합니다, 잘 살겠습니다, 라는 두 문장이 손글씨로 예쁘게 써있습니다. 두분의 알콩달콩한 사랑도 함께 새겨진 것 같아 책상 위에 잘 간직하고 있었는데, 이 글을 쓰며 그 컵을 다시 보고 있자니 마음 한켠에 서늘한 바람이 부네요.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싫어하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고, 그런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도 웃어야한다며, 아무리 노력해도 웃음이 도통 나오지 않을 때면 손으로 등을 긁으며 웃으라는 말과 함께 시원하게 웃던 정선희씨의 모습을, 저는 어제 일처럼 선연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눈물과 고통으로 덮힌 그 얼굴이 더 마음 아프게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정선희씨의 상실을 당사자가 아니기에 온전히 이해할 수 없지만 저 역시 인생의 소중한 사람을 잃었던 아픔을 여전히 심장이 기억하고 있기에, 고인의 명복과 마음속 평화가 내리길 진심으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