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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레나의 꿈의 구장/신나는 스포츠 세상

부담 딛고 따낸 김연아 우승, 더욱 값졌다


얼음 위에 선 김연아를 본 순간, 김춘수 시인의 명시 <꽃>이 떠올랐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지난 밤, 우리가 만난 김연아가 그랬다. 매혹적인 흑장미는 어느새 강렬한 레드로즈로 다시 나타났고, 소녀에서 여인으로 만개한 그 개화에 우리는 하염없이 박수를 칠 수밖에 없었다.




석연찮은 심판 판정 속에서도 김연아는 2위 안도미키에게 약 20점 앞서며 다시 1위에 올랐다. 이로써 그랑프리 시리즈 5개 대회 연속 우승이라는 위업을 달성했다. 그랑프리 파이널 2회 우승까지 합치면 그랑프리 대회 7개 대회 연속 우승이다.

검정색 드레스에 알알이 박힌 보석들은 ‘죽음의 무도’를 출 때마다 조명빛에 맞춰 반짝거렸다. 그 시간, 천진한 미소의 18살 소녀는 어느 곳에도 없었다. 스모키 메이크업도 인상적이었지만 고개를 움직일 때마다 번뜩이는 그 눈빛은, 모두를 제압하는 강한 힘을 갖고 있었다. 때론 요염하게, 때론 표독스러울 수 정도로 대단한 강렬함으로 김연아는 우리를 사로잡았다.

그리고...

김연아에 의해 재탄생된 ‘세헤라자데’. 천일야화의 주인공인 아랍여인답게 김연아는 강렬한 붉은 색 드레스를 입고 빙판 위에 섰다. 여전히 눈빛에는 생의 절절함이 담겨 있었고 양 손끝에는 섬세함이 실려 있었다. 그렇게 그녀의 온 몸이 만들어내는 곡선에는 내내 우아함이 빛을 발했다.

이날 김연아는 트리플 플립-트리플 토루프 콤비네이션 콤비네이션 점프에 이어더블 악셀 점프 역시 가뿐히 성공했지만 트리플 러츠 점프 도중 착지에 실패, 감점을 당하고 말았다.

그동안 ‘점프의 교과서’ 혹은 ‘점프의 정석’으로 불리던 김연아였다. 그러나 쇼트프로그램에서 트리플 플립-프리플 토루프 콤비네이션 점프에서 ‘롱(wrong) 에지’ 판정을 받았고 그랑프리 대회에서 처음 받은 점프 감점은 많은 부분 부담일 수밖에 없었다. 김연아 역시 경기 종료 후 “오늘 콤비네이션 점프를 시도할 때 긴장 됐던 게 사실”이라며 고백했다.


그러나 수많은 관중들의 응원 속에서 힘을 얻었다던 소감처럼, 김연아는 성공적으로 연기를 마무리하며 환한 미소로 이번 대회를 마감할 수 있었다. 점수를 기다리던 와중에는 양 손가락으로 하트를 만들어주는 팬 서비스까지 있지 않았다. 그 모습에서는 여고생다운 발랄함이 느껴져 웃음이 나왔다. 옆에 잔뜩 쌓인, 관중들이 던진 인형들이 순간 와르르 무너지자 깜짝 놀라며 주워 담는 모습에선 더욱 그랬다. 마치 오래 알고 지낸 동생 같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늘 강한 사람이었다. 언제나 침착했다. 항상 냉정함을 유지했다. 그렇게 평정심을 잃지 않는 ‘강심장’ 김연아로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판정 논란 속에서 긴장하고 연습 도중 집중력을 잠깐 잃을 만큼 그녀 역시 사람이었고 여느 선수와 다르지 않았다. 거기에 온 국민의 기대까지 한 몸에 받고 있으니 열여덟 김연아가 느껴야할, 또 감당해야할 무게감은 분명 우리 상상 이상일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세계 피겨계의 판정-오심의 가능성이 농후한-과 견제와도 싸워야한다.

2008베이징올림픽 당시 박태환도 400m에서 금메달을 딴 다음, 긴장 때문에 잠을 설쳤다고 고백했었다. 온 국민이 금메달을 기대하고 있는데, 그 기대에 부흥하지 못할까봐 긴장됐고 또 걱정됐었다고 하였다.

김연아도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지만 비슷한 마음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해본다.

그래서 더 값지고, 빛났던 김연아의 우승이었다.

온 마음으로 끝없이 박수치고픈 오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