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이 바뀌는 두 고등학생의 이야기 <너의 이름은>

다시 태어나면 도쿄의 남자가 되고 싶다고 산사에서 소리치던 시골 소녀 미츠하. 소녀의 꿈은 자고 일어나니 기적처럼 이루어진다. 도쿄 소년 타키와 영혼이 바뀌게 된 것! 

아파트 복도 앞에 펼쳐진 도쿄의 아침 풍경을 바라보며 눈을 반짝이는, 타키의 몸을 한 미츠하를 보고 있자니 문득 선샤인호텔에 나와 이케부쿠로와 시부야 거리를 거닐며 두 눈 반짝이던 13년 전 내가 떠올랐다. 

황혼, 그 기적의 시간에 미츠하와 타키가 만나던 순간에는 내 심장은 그야말로 터져버릴 것 같았다. 미츠야가 살던 마을 정경을 보니 몇년 전 J리그 경기를 보기 위해 빅스완을 향해 걸어가던, 니이가타 그 시골길이 생각났다.

무엇보다 수채화처럼 맑고 투명하게 일본의 자연을 담아낸 감독의 서정이 참 좋았다. 꼬이고 얽혀도 결국엔 이어진다는, 인연과 운명에 대한 강렬한 메시지가 오래도록 가슴에 남아 두번이나 보게 된 영화다. 여운이 참 오래 남는다.




ps.

-대피하라는 방송이 나와도 어찌 할지 모르는 사람들을 보며, 또 그냥 있어보라는 대사까지 보고 있자니 세월호가 떠올랐다. 일본 사람들은 후쿠시마 원전 폭발사고를 떠올렸다고.

-사람이든, 사물이든 마음을 다해 이름을 부를 때 비로소 진짜 의미가 생기는 법이다. 도서관 자료실에 있던 미츠하의 이름은 타키가 부르는 순간 내가 지키고 싶은 소중한 사람이 되었다. 

-현실세계를 애니에 담던 감독의 성향을 알기에 꼭 배경이 된 일본 내 지역들을 방문해 인증샷을 찍고 싶은 목표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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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전날 밤, 내일 오후에는 요코하마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죠. 그래서 시부야에서 요코하마까지 가는 지하철에 올라탔습니다.

지상으로 뚫는 지하철을 타고 가던 도중 펼쳐진 강과 하늘과 너른 들판은 참으로 예뻤습니다. 야구장에서 오후 훈련 중인 선수들의 모습도 살짝 보였죠. 이어폰 사이로 흘러나오는 유희열이 새롭게 선보인 음악, ‘여름날’이 참 어울리는 그런 여름날의 어떤 오후였습니다.


모도가치 주카가이 역에서 내려 요코하마 외국인 묘지가 있는 곳까지 올라갔습니다. 그곳에 있던 비석들을 바라보며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있던 중 고양이 아저씨를 만났고 그 아저씨와 함께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다 고양이만 찍는다는 고양이 사진사 야베를 만나게 됐지요. 그리고 야베 덕분에 그날 저녁 요코하마 미나토미라이역 근처에서 불꽃축제, 그러니까 일본어로는 ‘하나비’가 열린다는 사실을 알게 됐죠.

일본의 불꽃축제는 어떨까, 라는 궁금한 마음에 따라갔는데, 정말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스고이를 연발하는 일본 사람들 틈에서 저역시 참 멋지고 아름답다는 감탄사를 연신 내뱉었죠. 알고 보니 매년 여름이면 도쿄 이곳 저곳에서 불꽃축제가 열린다는 군요. 보통 7월 하순에서 8월 중순 주말에 몰린다고 하니 이즈음 도쿄 여행을 준비하는 분들은 미리 알아보고 가세요.

일단 제가 알고 있는 건 일단 8월 초마다 도쿄만 하루미 부두에서 개최되는 불꽃축제입니다. 도에이 오에도센 가치도키역에서 약 3분만 걸으면 불꽃놀이 장소에 도착할 수 있다고하니 참고 하세요.

이 밖에 스미다가와(7월 마지막 토요일, 도쿄 최대 규모의 불꽃놀이, 도쿄 메트로 긴자센 도에이 아사쿠사센 아사쿠사역에서 도보 2분) 에도가와(8월 초, 음악과 어우러진 불꽃축제, 게이세이혼센 에도가와역에서 도보 15분)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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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사진만 찍는 포토그래퍼 야베입니다.
제게 아름다운 여름밤을 알려준 고마운 친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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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일기 > Asia'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환상적인 일본 불꽃축제 현장  (149) 2008.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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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K리그를 대표하는 선수들과 J리그를 대표하는 선수들이 만나 한판 대결을 가졌습니다.

도쿄국립경기장에서 열린 ‘한일 올스타전’이 바로 그것입니다. 올해 처음 갖는 이 경기를 차마 놓칠 수는 없었기에, 또 실로 오랜만에 열린 또 하나의 '한일전'인지라  저는 자비를 털어 비행기를 타고 도쿄까지 날아 갔습니다.



그런데 올스타전이 코앞인데도 도쿄에서 저는 관련된 행사 포스터를 하나도 보지 못했습니다. 2006년 클럽월드컵 경기를 보기 위해 도쿄에 방문했을 때만 해도 거리 곳곳에는 대회 관련 홍보물이 넘쳐났죠. 때문에 이번에는 너무 홍보에 무심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였습니다.

그렇지만 막상 시합 당일엔 2만명이 넘는 관중들이 경기장을 찾았고 그래서 정말 깜짝 놀랐답니다. 한데 특이한 점은 한 가지 더 있었습니다. ‘올스타전’이라는 특별한 경기 같은 경우 그간 K리그 연맹에서는 경기 시작 전과 전반전이 끝난 하프타임 때, 이렇다 할 공연이나 행사 같은 것들을 마련하곤 했답니다. 그런데 J리그 연맹에서 모든 것을 준비한 이번 올스타전에서는 그런 이벤트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경기 시작 전 선수들을 소개하는 영상이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경기는 초반 J리그 올스타전 선수들이 지배하는 양상이었으나 행운의 여신은 우리 편이었습니다. 선제골은 최성국 선수의 몫이었습니다. 전 일본 관중들로 둘러싸였다는 사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골이 들어갈 때마다 벌떡 일어나서 마구 마구 소리를 질렀답니다. 그때마다 저와 제 친구들을 둘러싸고 있던 일본 관중들은 그저 침묵할 뿐이었죠. 그래서 원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들인가 보다 했는데 3-0으로 지고 있다가 1골을 만회하자 다들 소리치며 좋아하더군요. 저처럼 벌떡 일어섰던 관중들도 있었습니다. ^^

K리그 올스타 선수들은 독도문제 때문에 예민해져 있는 이 시점에서 일본에게 절대 질 수는 없다며 정말 이를 악 물고 뛰었다고 하더군요. 최성국 선수는 첫 골을 성공시킨 후 총을 쏘는 시늉을 했는데 다분히 독도문제와 관련한 ‘의미’가 있는 세레모니였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경기 종료 후 "이번 올스타전을 통해 한일 양국의 축구가 서로 돈독하게 발전을 도모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던 최성국 선수의 발언처럼, 단순히 이기고 지는 것에서만 끝내서는 안되겠죠.

어쨌거나 일본 적지에서 무려 3골이나 터뜨리며 시원하게 이긴 모습은 정말 ‘더위’를 한번에 날려보내기에 충분했습니다. 별중의 별, K리그 올스타선수들은 역시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별들이었습니다.

중계 카메라에는 잡히지 않았던 뒷풍경들, 한번 보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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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종료 후 일본국가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있던
일본 꼬마와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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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4년 전 한 국회의원 당선자가 제가 다니던 대학교로 찾아와 “낮은 자리에서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국회의원이 되겠다”고 인사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매번 총선이 끝나면 반복되는 당선자들의 ‘앵무새’ 같은 발언이죠. 이번에도 어김없이 똑같은 풍경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서민들의 애환을 듣겠다고, 진정 서민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정치인이 되겠다고 말합니다.



그 시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은 또다시 노쇠한 몸을 이끌고 거리에 나왔습니다. 할머니들의 목소리를 들어주는 이들은 적었지만 그래도 할머니들은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할머니들에게 명예와 인권을!”이라고요.

국회의원 당선자들께 묻습니다. 할머니들의 목소리가 들리시나요? 당신들은 이 할머니들을 위해 어떤 고민을 하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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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나눔의 집에서 생활하시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필기 할머니께서 3월5일 아침 7시 45분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지난 1월 지돌이 할머니를 떠나 보낸지 채 100일도 안됐는데 이렇게 또 한 분의 할머니를 가슴에 묻은 채 보내는군요. 너무나 마음이 아프네요.

1925년 6월18일 경남 진양군 지수면 승내리에서 태어난 문필기 할머니는 1943년 가을 18살의 나이에 동네 아저씨의 말만 믿고 따라 나섰다가


중국 만주 위안소에서 2년이라는 세월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이제부터는 할머니가 하신 말씀 그대로를 나눔의집 홈페이지를 참고하여 여러분께 알려드립니다. 다소 충격적인 내용도 있습니다. 그래도 끝까지 읽어주세요.

“마을에서 일본인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50대의 아저씨가 공부도 하고 돈도 벌 수 있는 곳에 보내 주겠다고 하여 집에서 입던 옷 그대로 따라 나섰다가 트럭을 타고 부산까지 갔고 거기서 조선인 여자 4명과 함께 열차로 서울, 평양, 신의주를 거쳐서 만주의 ‘위안소’로 끌려가서 ‘위안부’(성노예) 생활을 하게 되었다.”

“우리들은 모두 만주에 있는 군위안소에 배치되었다. 그곳의 겨울은 매우 길고 아주 추웠다. 여름은 짧았고 우리나라의 가을 날씨 같았다. 위안소에는 30 명가량의 위안부들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조선인 위안부들이었다. 대개 18~19세가량 되었다. 위안소에서 가까운 부대소속 군인들이 교대로 파견 나와 보초를 섰다. 위안소에서 우리를 감독하고 돈표를 모아서 계산하는 일을 하는 조선인 남자 두 명이 있었다. 그들 중 한 사람은 우리들을 괴롭히지는 않았으나 키가 작은 또 다른 군속은 우리를 회초리로 때리고 지독하게 굴었다. 특히 위안부들이 일본인 군인들과 싸우거나 군인을 상대하지 않으려 하면 심하게 때렸다.”

“위안소는 일본식 집이었는데 위안소 주변에는 부대가 있었다. 위안소 건물 주위를 둘러싼 담도 있었다. 1층에는 우리를 감독하던 조선인 남자 두 명의 숙소와 식당이 있었다. 2층에는 위안부들의 방이 있었는데 다다미 한 장 반 정도의 크기였다. 위안부 한 사람이 한 개의 방을 사용했다. 처음에 위안소에 도착하자 성병이 있는지 처녀인지 등을 검사했다. 그 후 군의는 나에게 몇 달 동안 간호부일을 시켰다. 그래서 부상병의 상처를 소독하고 붕대로 감는 일을 배워서 했다. 그리고 병원의 빨래도 했다. 낮에는 병원 일을 하고 밤에는 군의가 나에게 자러 왔다. 나는 그 군의에게 처음으로 정조를 빼앗겼다. 여자에게 정조가 중요하다고 듣고 자랐고 내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으므로 내 몸을 버렸다는 생각에 많이 울었다. 간호부 일을 하는 동안은 군의 외에 다른 군인들은 상대하지 않았으나, 몇 달 후에는 간호부일을 그만두게 하고 위안부짓을 시켰다. 그러나 위안부짓을 하면서도 부상자들이 많을 때는 가끔씩 병원에 가서 간호부일을 해야 했다.”

“위안부들은 모두 똑같은 원피스를 입었다. 아침과 저녁으로 하루 두 끼의 식사만 주었다. 밥은 우리가 교대로 했다. 위안소에 있을 때 월경을 시작했다. 군인들이 많은 토요일, 일요일에는 월경 중에도 군인을 상대해야 했다. 그때는 참 괴로웠다. 평일 날 아침에 일어나면 함께 모여 조회를 하고 가끔 군인들이 나와서 방공연습을 시키기도 했다. 조회는 일주일에 서너 번 정도 했는데 위안소 마당에 모여 일본에 충성하자는 황국신민의 서사를 외우고 일본 군가도 불렀다. 그러나 일요일에는 장교들이 자고 가므로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이 대중없었다. 평일에는 군인들이 싸움터에 나가느라 낮에는 거의 오지 않고 저녁부터 왔다. 가끔 외출 나온 군인들이 낮에 왔다. 그래서 평일은 열 명 내외의 군인이 다녀갔다. 토요일과 일요일은 아침 여덟 시부터 군인들이 왔다. 토요일과 일요일은 점심밥도 주므로 하루 세 끼를 먹을 수 있었다. 밥 먹는 시간 외에는 계속 군인을 받아야 했다. 저녁 일곱 시 이후에는 장교들이 왔다. 장교들은 초저녁부터 와서 긴 밤을 자고 다음날 새벽이나 아침에 갔다. 군인들은 모두 일본인이었다. 조선인이 들어오면 붙잡고 실컷 울기라도 하겠는데 3년 동안 조선인 군인은 한 번도 못 보았다.”

“군인들은 위안소에 왔다갈 때 손바닥 반만 한 크기의 누런 색 돈표를 내고 갔다. 장교는 사병보다 더 많은 액수의 돈표를 냈다. 어떤 군인은 돈표를 안 내려는 이도 있었다. 돈표를 받으면 우리가 갖지 않고 우리를 관리하던 조선인 남자에게 갖다 주었다. 그러면 그 개수를 세어서 위안부 각자가 하루 몇 명의 군인을 받았나를 막대 그래프로 크게 그려 벽에 붙여놓았다. 나는 다른 위안부들보다 군인을 적게 받는 편이어서 자주 혼났다. 군인이 적은 평일은 열 명 내외를 상대했고, 토, 일요일은 40~50명을 상대해야 했다. 우리는 돈표를 갖다 주기만 했지 돈은 한 푼도 받지 못했다.”

군인들은 문 밖에 줄을 서 있다가 차례로 들어왔는데 서로 먼저 들어오려고 자기들끼리 싸우곤 했다. 그들은 각반을 벗고 기다렸다. 앞 사람이 위안소 안에 오래 있으면 빨리 나오라고 문을 두드리고 법석을 떨었다. 군인들은 위안소에 한번 들어오면 사병은 삼십 분, 장교는 한 시간 있을 수 있도록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대개는 5분 내외면 끝내고 나갔다. 군인 한 사람을 상대하고 나면 1층에 있는 목욕탕에 내려가서 소독약을 넣은 물로 밑을 씻고 와서 다시 군인을 받았다. 소독약이 목욕탕에 있었다. 군인들 중에는 여자를 오래 못 봐서 그런지 들어오자마자 사정해 버리는 이도 많았다. 나를 괴롭히거나 못되게 구는 군인에게는 죽을힘을 다해 반항했다. 그래서 군인과 싸우고 있으면 밖에 줄서서 기다리던 군인들은 시간 끌지 말고 빨리 나오라고 욕했다. 또 군인과 싸우면 많이 맞기도 했다.”

위안부 생활을 하면서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다. 어떤 군인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받아 주지 않는다고 술을 먹고 와서 칼을 뽑아 들고 행패를 부렸다. 또 어떤 군인은 술 먹고 위안소에 들어와 칼을 다다미에 꽂아놓고 성행위를 하는 사람이 많아 방바닥에 칼자국이 많이 있었다. 이것은 자기 하고픈 대로 실컷하게 해달라는 위협이었다. 그러다 안 되면 칼을 가지고 덤벼드는데 이럴 때는 빨리 피하거나 혹은 누가 찾는다고 거짓말을 시켜 내보내곤 했다. 그곳에 간 지 1년쯤 되었을 때 어떤 군인이 너무 괴롭히길래 나도 화가 나서 발로 찼더니 그는 내 옷을 다 찢고 발가벗겨 때리고 칼을 들이댔다. 그리고는 밖에 나가서 시뻘겋게 달구어진 인두 모양의 불쑤시개를 가지고 들어와 내 겨드랑이를 지졌다. 그 상처로 석 달 동안 고생했다. 특히 긴밤 자는 장교들은 여러 번 접촉을 요구하며 아주 귀찮게 굴어 밤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또 긴밤 자는 장교 중에는 술이 잔뜩 취해 들어와서는 밤새도록 다 토하고 잘 되지도 않으면서 접촉을 하려 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면 나는 비위가 상해 참을 수가 없었다.”

가족들이 미칠 듯이 그리워 매일 울고 남의 슬픈 소리를 조금만 들어도 울곤 했다. 나는 집 생각, 엄마 생각으로 마음에 병이 나서 몸져눕기도 했었다. 살고 싶지도 않았다. 우리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병원에 가서 성병검사를 받기 위해 소변 검사, 피 검사 등을 받았다. 위안소에 있을 때 나는 임질에 걸린 적이 있었다. 그래서 606호 주사도 맞고 약도 발라 나았다. 성병이 걸렸을 때는 군인을 상대하지 않고 쉬었기 때문에 그래도 지내기가 좀 나았다. 그 외에 다른 병을 앓은 적은 없었다.”

“내가 위안소에 간 지 3년째 되는 스무 살에 종전이 되었다. 갑자기 군인들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위안소에 오질 않아 편안하게 잘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련 군인들이 위안소에 들어와 총을 들이댔다. 그들은 우리의 옷을 벗기려 했다. 일본 군인들이 도망가고 나니까 이제 소련 군인들이 우리를 겁탈하려는 것이었다. 그때 우리를 관리하던 이북 출신의 조선인 남자가 큰일 났으니 쓰던 물건 모두 팽개치고 어서 도망가자고 했다. 그래서 그와 그의 부인, 기요코 그리고 나 이렇게 네 명이 함께 얼굴에 시커멓게 칠을 하고 위안소 건물 뒤로 돌아 나와 도망쳤다. 나머지 위안부들은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 각자 뿔뿔이 흩어졌다.”

“중국에서 뚜껑도 없는 화차를 타고 압록강까지 온 다음 걸어서 흥남에 도착. 그 후 밤낮을 걸어서 평양, 개성을 거쳐 서울에 도착하였고 그 곳에서 주먹밥과 고향 가는 기차표를 얻어 집에 돌아왔다. 고향에 와보니 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진주에서 여관을 운영하던 사촌 이모집으로 가서 일을 거들다가 목포, 광주, 전주등지의 술집에도 있었고 마산에서 대폿집을 하던 중, 36세 때 철도의 선로꾼을 만나 살림을 차렸으나 남편이 병들어 죽었고…”

그 뒤 할머니는 1992년 6월 피해자 신고를 하며 세상과 일본을 향해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하셨죠.

“동네 문방구에 가서 위안부에 관해 써 붙여 놓은 것을 보았고, 또 TV에서 위안부 출신 할머니들의 증언을 들었다. 그래서 나도 신고해서 억울함을 면할까 싶어 1992년 6월에 신고했다. 처음에는 신고하는 것을 매우 망설였으나 지금까지 내 가슴속에만 넣고 있던 것을 다 털어놓고 나니 가슴이 후련하다.”

2000년에는 국제인권변호인단이 수여한 인권상을 수상하셨고 2003년 10월9일 나눔의 집에 입소하여 지금까지 생활하셨습니다. 작년 3월 지병 악파로 병원 입원하기 전까지는 매주 수요일마다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리는 정기시위에 참석하셨고 작년 5월에는 미국하원 결의안 조속통과를 위한 영상편지를 발송하기도 하셨습니다.

이제는 만날 수 없는 할머니의 사진을 보며 박복했던 우리 할머니들의 삶을 생각하며 저는 또 눈물을 흘립니다. 할머니는 오늘 아침 한 줌 재가 되어 우리 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벌써 두 달 만에 두 명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를 보내야만 했습니다. 그 때문에 자꾸만 두려운 마음도 듭니다.


여기까지 읽으면서 일본인들이 저지른 만행에 분노가 느껴지신다면 매주 수요일 낮12시 일본대사관 앞에서 진행되는 정기 수요시위에 함께 해주세요. 이명박 대통령이 일본정부를 상대로 사과를 요구할 수 있도록 압력을 가해주세요. 해외 웹사이트를 통해 더 많은 세계인들이 알 수 있도록, 그리하여 분노할 수 있도록 이 사실을 널리 알려주세요. 나눔의 집에서 어렵게 생활하는 할머니들을 위해 정기후원회원이 돼 주세요.

세상을 바꾸는 힘은 이렇게 쌓이고 쌓여 나오는 것이라 믿습니다. 그러니 꼭 도와주세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문필기 할머니의 명복을 빕니다.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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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은 조선일보 대전지부 전재홍 기자께서 찍은 뒤 나눔의 집에 기증을 하셨다고 합니다. 전재홍 기자께 직접적인 허락을 받고 올리지는 못했으나 할머니의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자 포스팅 하는 과정에서 올렸기에, 혹시라도 이 글을 발견하신다면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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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나눔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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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오늘 아침 기온은 영하 10.1도. 추운 날씨 때문에 아침부터 걱정스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오늘은 일본군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수요시위가 열리는 날이었거든요. 게다가 800차를 맞는 날이기도 했고요.


시위에 참가하는 할머니들께서 고생하시겠구나,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습니다. 그래도 다행히 시위가 시작되자 날씨가 많이 풀렸습니다. 기상청 발표에 따르면 영하 5.1도더군요. 오늘은 많은 사람들이 수요시위에 참가했습니다. 800회를 맞이한다는 소식 때문이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요시위가 800회를 맞이하는 동안 바뀐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16년 동안 매주 수요일마다 일본대사관 앞에 모여 목소리를 높이지만 일본 정부는 여전히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 설 연휴기간 중에는 나눔의 집에서 생활하시던 지돌이 할머니께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할머니는 쓸쓸히, 그리고 조용히 우리 곁을 떠나셨죠. 그래서 더 마음이 무겁고 아팠습니다.


요즘 화두는 아무래도 숭례문인 듯합니다. 그래서인지 숭례문 앞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은 연길 끊이지 않고 있네요. 수요시위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도 저는 그곳을 찾은 많은 사람들을 봤습니다. 조화를 놓고 가는 사람들도 있더군요. 저는 사람들이 놓고 간 국화를 보며 많은 생각을 해봤습니다. 저 수많은 꽃들 중 지돌이 할머니의 넋을 위로하는 꽃은 왜 없을까, 라고요.



일본대사관 앞에서 만난 할머니들은 정기수요시위가 800회로 끝났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슬프게도 또 속상하게도 정기수요시위는 당분간은 계속 되겠죠. 일본정부는 여전히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은폐시키며 공식사과하지 않고 있으니까요.


어느새 일본군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수요시위는 800회를 맞이하지만 바뀐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더더욱 여러분들의 관심이 필요합니다. 할머니들의 아픔은 우리의 아픔이기도 하니까요. 할머니들의 목소리가 묻혀버리지 않도록, 그들만의 공허한 외침이 되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가슴 아픈 과거사가 더 이상 재현되지 않도록 말이죠.


800회를 맞은 정기수요시위에 참석하지 못한 분들을 위한 동영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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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플라잉뭉치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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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저희 집은 차례를 지내지 않습니다. 친척들도 대부분 외국에 있기 때문에 명절은 늘 집에서 뒹굴대며 쉬는 날이지요. 그렇지만 올해 설 연휴도 그렇게 보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오래 전부터 계획을 세웠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계시는 나눔의 집에서 봉사활동을 하기로 말이죠.


2월 7일 설날 아침에 나눔의 집에 가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전날 저녁 가는 방법을 확인하기 위해 나눔의 집 홈페이지에 들어가 봤지요. 그리고 그곳에서 예상치 못한 소식을 접해야만했습니다. 지돌이 할머니의 별세 소식이었습니다.



결국 나눔의 집 봉사활동을 잠시 뒤로 미룬 채 저는 경기도 양평에 위치한 용문효병원에 가기로 했습니다. 발인은 2월 8일 아침 9시. 양평까지 가기 위해선 새벽 6시에 집에서 출발해야만 했지요. 그런데 문제는 그날이 아버지 생신이라는데 있었습니다. 아버지 생신은 음력 1월 2일, 설 다음날입니다. 연휴 때면 온 가족이 집에 있기 때문에 저희는 항상 아침에 함께 미역국을 먹으며 조촐한 잔치를 엽니다.


하지만 저는 그곳에 가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가족들에게 양해를 구한 뒤 양평으로 향했습니다. 추운 새벽 바람과 싸우며 도착한 그곳에서 저는 사진 속으로나마 지돌이 할머니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정말로 마음이 아팠던 것은 너무나 적은 사람들만이 할머니의 마지막을 지켰다는 사실입니다. 어쩌면 그것이 작금의 현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물이 났습니다. 이 글을 쓰는 저 역시 할머니들의 아픔을 모른 채 그저 하루하루 살아가기에만 바쁘죠. 할머니들의 피 맺힌 절규와 아픔, 잊고 싶은 상처가 얼마나 깊고 처절한지 전혀 모른 채 말입니다.


장례식장에 있던 사람들이 한명 씩 나와 자신이 기억하는 지돌이 할머니에 대해 이야기하다 눈물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도 눈물이 났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다시 영상편집을 하면서 또 한 번 울었습니다.


(영상이 조금 깁니다. 그렇지만 꼭 끝까지 봐주세요.)




1923년 6월 5일 경북 경주군 안강면에서 태어난 지돌이 할머니는 18살에 결혼해 남편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남편이 징병으로 끌려갔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중국 방직공장에서 일할 사람을 찾는다는 말에 속아 그만 1945년 3월 13일 흑룡강성 동령현 석문자 위안소에 끌려가고 말았습니다. 할머니가 겨우 23살이 됐을 때의 일입니다.


그러나 해방 후에도 한국으로 돌아올 방법을 찾지 못해 중국인과 결혼, 슬하에 1남1녀를 두었습니다. 그러던 중 1997년 나눔의 집 도움으로 생존이 확인됐고 2000년 6월 1일 귀국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공동체 나눔의 집에서 생활하게 됐습니다. 


그 후 2000년 11월 24일 국적회복이 허가됐고 이듬해 2월 8일 대한민국 국적을 회복했습니다. 나눔의 집에서 생활하시면서 수요일이면 일본대사관 앞으로 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알렸던 할머니는 최근 초기 치매 증세를 보이다가 결국 지병으로 2월 6일 오후 5시 24분 양평 용문효병원에서 끝내 운명하시고 말았습니다.


2월 8일 오후 1시 강원 인제 하늘공원에서 화장된 할머니의 유해는 나눔의 집 법당에 안치됐습니다. 그리고 지돌이 할머니의 별세로 이제 나눔의 집에 계신 할머니는 8명뿐입니다. 미 의회에서 위안부 결의안이 통과됐지만 일본은 아직 공식 사과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일본 정부는 이렇게 시간만 끌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다 피해자 할머니들이 모두 돌아가시면 일본군 위안부는 없었다고 발뺌하겠죠.



그것은 있어서도, 또 있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일본 정부의 사과를 받아내기 위해서라도 오래 오래 살 겁니다!”라고 외치셨던 할머니들도 언젠가는 모두 눈을 감으실 것입니다. 그 할머니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기 전에 우리 모두 힘을 모아 일본의 공식 사과를 받아냅시다. 여러분의 작은 관심들이 쌓이고 모이면 세상은 분명 바뀔 수 있을 것입니다. 

(사진을 보실 분은 이곳을 클릭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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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2008년 1월 2일 낮 12시 일본대사관 앞. 제 794차 일본군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수요집회가 열렸습니다. 2008년 새해 첫 정기수요시위기도 했지요.


날씨가 조금 풀렸지만 체감온도는 여전히 영하였습니다. 그 와중에도 일본군위안부 희생자 할머니들은 어김없이 일본대사관 앞을 찾았지요. 그리고 할머니들을 지지하는 시민들도 함께 했습니다.


추운 날씨 때문인지, 아니면 이제는 할머니들의 낮은 목소리가 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는
까닭인지 생각보다 시위에 참가한 사람들은 적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와중에도  정기수요시위에 참가하기 위해 중국, 일본,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외국인들이 비행기를 타고 이곳까지 찾아왔습니다.


<성명서 낭독 중>

지난해 13명의 일본군위안부 희생자 할머니들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이제 남은 할머니들은 단 109명 뿐. 이 할머니들이 모두 세상을 뜨기 전에 우리 모두 힘을 모아 일본정부로부터 공식사과와 법적배상을 받아야할 것입니다.


정기수요시위가 끝나고 저는 앞으로 열과 성을 다하여 할머니들을 돕기로 굳게 마음먹었습니다. 돌아오는 길, 미국인 친구 앤써니가 그동안 일본군위안부 할머니들과 관련한 다큐멘터리를 만들어(관련기사 http://blog.daum.net/dreamdiary/6894986) 세계 사람들에게 알릴 동안 저는 무엇을 했는지 역시 반성했습니다. 부끄럽더군요. 하지만 이젠 더 이상 반성하며 부끄러워하는 사람이 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2008년 새해 목표가 새로이 세워졌지요.


마지막으로 지난 해 우리 곁을 떠난 고 김우명달 할머니, 고 김옥순 할머니, 고 문부전 할머니, 고 진경팽 할머니, 고 황순이 할머니, 고 석복달 할머니, 고 이순선 할머니, 고 최주선 할머니, 고 김기아 할머니, 고 박우득 할머니, 고 서옥득 할머니, 고 강도아 할머니, 고 오랑 할머니의 명복을 기원합니다.


할머니들이 못 이룬 모든 것들을 남아 있는 저희들이 꼭 이루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그곳에서 편히 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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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전북현대가 K-리그 자존심을 지켰다.


15일 저녁 7시 20분 일본 도쿄 국립경기장에서 벌어진 2006 클럽 월드컵 5-6위전에서 이현승과 김형범 제칼로의 골로 오클랜드 시티를 3-0으로 제압했다. 지난 11일 클럽아메리카에게 1-0으로 패한 아쉬움을 릴레이골로 달래며 이번 5위라는 성적으로 이번 클럽 월드컵을 마감했다.  


 


 전북현대 선수들이 에스코드 키즈와 함께 입장 중이다.



선발로 출전한 선수들이 기념촬영 중이다.



오클랜드시티에서 뛰고 있는 일본의 축구영웅 테루가 보띠와 경기 시작 전 인사를 나누고 있다.



전북현대 서포터즈들의 열띤 응원이 시작됐다.



제칼로가 오클랜드시티 수비진을 뚫고 드리블을 하고 있다.



어제(14일) 18세 생일을 맞은 이현승은 이번 대회 최연소 골을 기록했다.



임요환이 드로잉을 하기 전 위치를 살피고 있다.



이번 대회 주관방송사 니혼TV는 전북현대 최고의 선수로 김형범을 뽑았다.



전북의 두번 째 골을 기록한 김형범이 주장 김현수와 하이파이브를 하고 있다.



최진철이 오클랜드시티 공격수와 정면으로 부딪힌 후 통증을 호소하며 그라운드에 쓰러져 있다.



3-0으로 대승한 후 전북현대 선수들이 서포터즈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



오클랜드시티 선수들과 유니폼을 교환한 후 다함께 기념촬영 중이다.

보띠의 환한 미소가 무척 인상적이다.

그는 "경기에 뛰지 못해 아쉽지만 전북 선수라는 사실이 무척이나 기쁘다" 고 소감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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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