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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플라잉뭉치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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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저희 집은 차례를 지내지 않습니다. 친척들도 대부분 외국에 있기 때문에 명절은 늘 집에서 뒹굴대며 쉬는 날이지요. 그렇지만 올해 설 연휴도 그렇게 보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오래 전부터 계획을 세웠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계시는 나눔의 집에서 봉사활동을 하기로 말이죠.


2월 7일 설날 아침에 나눔의 집에 가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전날 저녁 가는 방법을 확인하기 위해 나눔의 집 홈페이지에 들어가 봤지요. 그리고 그곳에서 예상치 못한 소식을 접해야만했습니다. 지돌이 할머니의 별세 소식이었습니다.



결국 나눔의 집 봉사활동을 잠시 뒤로 미룬 채 저는 경기도 양평에 위치한 용문효병원에 가기로 했습니다. 발인은 2월 8일 아침 9시. 양평까지 가기 위해선 새벽 6시에 집에서 출발해야만 했지요. 그런데 문제는 그날이 아버지 생신이라는데 있었습니다. 아버지 생신은 음력 1월 2일, 설 다음날입니다. 연휴 때면 온 가족이 집에 있기 때문에 저희는 항상 아침에 함께 미역국을 먹으며 조촐한 잔치를 엽니다.


하지만 저는 그곳에 가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가족들에게 양해를 구한 뒤 양평으로 향했습니다. 추운 새벽 바람과 싸우며 도착한 그곳에서 저는 사진 속으로나마 지돌이 할머니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정말로 마음이 아팠던 것은 너무나 적은 사람들만이 할머니의 마지막을 지켰다는 사실입니다. 어쩌면 그것이 작금의 현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물이 났습니다. 이 글을 쓰는 저 역시 할머니들의 아픔을 모른 채 그저 하루하루 살아가기에만 바쁘죠. 할머니들의 피 맺힌 절규와 아픔, 잊고 싶은 상처가 얼마나 깊고 처절한지 전혀 모른 채 말입니다.


장례식장에 있던 사람들이 한명 씩 나와 자신이 기억하는 지돌이 할머니에 대해 이야기하다 눈물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도 눈물이 났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다시 영상편집을 하면서 또 한 번 울었습니다.


(영상이 조금 깁니다. 그렇지만 꼭 끝까지 봐주세요.)




1923년 6월 5일 경북 경주군 안강면에서 태어난 지돌이 할머니는 18살에 결혼해 남편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남편이 징병으로 끌려갔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중국 방직공장에서 일할 사람을 찾는다는 말에 속아 그만 1945년 3월 13일 흑룡강성 동령현 석문자 위안소에 끌려가고 말았습니다. 할머니가 겨우 23살이 됐을 때의 일입니다.


그러나 해방 후에도 한국으로 돌아올 방법을 찾지 못해 중국인과 결혼, 슬하에 1남1녀를 두었습니다. 그러던 중 1997년 나눔의 집 도움으로 생존이 확인됐고 2000년 6월 1일 귀국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공동체 나눔의 집에서 생활하게 됐습니다. 


그 후 2000년 11월 24일 국적회복이 허가됐고 이듬해 2월 8일 대한민국 국적을 회복했습니다. 나눔의 집에서 생활하시면서 수요일이면 일본대사관 앞으로 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알렸던 할머니는 최근 초기 치매 증세를 보이다가 결국 지병으로 2월 6일 오후 5시 24분 양평 용문효병원에서 끝내 운명하시고 말았습니다.


2월 8일 오후 1시 강원 인제 하늘공원에서 화장된 할머니의 유해는 나눔의 집 법당에 안치됐습니다. 그리고 지돌이 할머니의 별세로 이제 나눔의 집에 계신 할머니는 8명뿐입니다. 미 의회에서 위안부 결의안이 통과됐지만 일본은 아직 공식 사과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일본 정부는 이렇게 시간만 끌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다 피해자 할머니들이 모두 돌아가시면 일본군 위안부는 없었다고 발뺌하겠죠.



그것은 있어서도, 또 있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일본 정부의 사과를 받아내기 위해서라도 오래 오래 살 겁니다!”라고 외치셨던 할머니들도 언젠가는 모두 눈을 감으실 것입니다. 그 할머니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기 전에 우리 모두 힘을 모아 일본의 공식 사과를 받아냅시다. 여러분의 작은 관심들이 쌓이고 모이면 세상은 분명 바뀔 수 있을 것입니다. 

(사진을 보실 분은 이곳을 클릭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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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박원재. 그의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것은 2007 K-리그에서부터였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수원과의 플레이오프전이었죠. 당시 그는 수원 홈에서 따바레즈의 프리킥을 헤딩골로 연결하며 팀을 챔피언결정전으로 이끌었습니다. 결승골이었죠.

이어 그는 바로 열린 성남과의 챔피언결정전 1차전에서도 연속골을 뿜어내며 단번에 자신의 이름을 모두에게 알렸습니다. 한 번도 태극마크를 달아보지 못한 '중고 신인'은 그렇게 챔피언결정전을 통해 진정 ‘스타’로 거듭났습니다.



“청소년대표팀이요? 그런 거랑은 거리가 멀었어요. 고교선발에도 안 뽑혔는걸요. 전 팀에서 잘하는 선수가 아니라 다른 잘하는 선수들 뽑혀 가는 거 구경만 하던 평범한 선수였죠.”


그렇지만 그는 늘 꿈꿨습니다. 포항스틸러스 홈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볼을 줍던 어린 볼보이는 언젠가는 K-리거가 되겠다고, 그리하여 왼쪽 가슴엔 기필코 태극마크를 달겠다고 말이죠.


“파리아스 감독님이 그러셨어요. 원재 자리에서(왼쪽 미드필더) 원재 만한 기술 가진 선수는 없다고요. 제가 처음 포항에 왔을 때 제일 눈에 들어온 선수가 바로 원재에요. 제가 경기(에 공격수로) 나설 때면 항상 왼쪽에 서요. 원재랑 하고 싶어서요. 원재만큼 체력 좋고 발재간 있고 또 성실한 선수도 드물어요. 사람이 잘하다보면 건방져질 수 있는데 워낙 착한 아이니까 앞으로도 성실함을 잃지 않을 거라고 봐요. 조만간 국가대표로도 뽑히고 ‘왼쪽 미드필더’하면 누구나 ‘박원재’를 떠올릴 그런 날이 올 거예요.” (포항스틸러스 팀 동료 이광재)


이광재 선수의 말처럼 박원재 선수는 해가 바뀌자마자 닻을 올린 허정무호에 탑승하며 꿈에 그리던 국가대표 선수가 됐습니다. 지난 1월 30일 칠레와의 평가전에서는 A매치 데뷔전도 치렀고요. 좀처럼 공격의 활력을 보이지 못했던 대표팀은 박원재 선수의 투입 이후, 왼쪽 측면에서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던 박 선수 덕분에 -비록 대표팀 선수들은 여전히 득점엔 실패했지만- 마지막까지 칠레 문전 앞을 위협할 수 있었습니다. 박원재 선수를 재발견할 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경기는 충분히 가치있던 경기였죠. (후에 경기를 관람했던 신태용 선수를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그날 날씨 때문에 몸이 덜풀린 공격진 중에서 제 몫을 했던 선수는 염기훈 선수와 박원재 선수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오늘 열린 2010월드컵 아시아예선 투르크메니스탄전에서는 후반 40분 조용형 선수 대신 투입돼 약 8분가량 왼쪽 날개로 뛰었습니다. 비록 출전 시간은 짧았지만 갓 A매치 데뷔전을 치른 햇병아리 선수에겐 소중한 경험이 됐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말이죠, 박원재 선수가 투입될 당시 관중석과 기자석에서는 잠깐 웃음보가 터졌답니다. 이날 경기에서는 박지성 선수도 뛰었는데요, 박지성 선수와 흡사한 외모를 지닌 탓에 ‘박지성 동생’ 혹은 ‘3초 박지성’으로 불린 박원재 선수도 함께 뛰게 됐으니 재밌을 수밖에요.






“한번은 월포에 다 같이 운동하러 갔는데 어떤 꼬마 저를 보고 ‘박지성이다!’ 딱 그러는 거예요. 그랬더니 옆에 있던 그 아이 아버지께서 그러시더라고요. ‘박지성 아니야. 가짜야.’ (웃음) 또 한 번은 홈경기 때, 아마 수원전이었을 거예요. 다쳐서 뛰지 못하는 바람에 관중석에 앉아서 경기를 봤거든요. 그런데 앞에 앉아있던 꼬마 2명이 경기 내내 계속 힐끔힐끔 쳐다보는 거예요. 전반전 끝나고 나선 자기들끼리 ‘박지성 맞지?’ ‘박지성인 거 같은데?’ 그러더라고요. 그때 옆에서 듣고 있던 아줌마도 궁금했나봐요. 못 참겠다며 저한테 박지성 아니냐고 물어보더라고요. 그래서 말했죠. '지성이 형은 지금 영국에 있는데요. 전 박지성이 아니라 박원재에요.' (오)범석이도 대표팀 다녀올 때마다 매번 그랬어요. 정말 똑같이 생겼다고요. 나중에 사진 한번 같이 찍어보라고 하던 걸요. 그렇지만 실제로 본 적은 한 번도 없어요.”


그때만 해도 박원재 선수는 K-리그 선수였기 때문에 박지성 선수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답니다. 그러나 드디어 국가대표팀에 승선하고 말았네요. 그 덕분에 박지성 선수와 함께 훈련을 받게 됐고 이렇게 게임까지 뛰게 됐고요. 그리고 언론과 팬들은 형제처럼 닮은 외모를 지적하며 관심을 기울이고 있죠.


개인적으로 박지성 선수를 닮았다는 이유로 박원재 선수가 조명을 받고 있는 상황을 저는 좋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는 끈기와 성실로 똘똘 뭉친 선수고 그 때문에 피치 위에서는 누구보다 열심히 뛰어다닙니다. 백패스와 횡패스를 지양하며 그 때문에 공격지향적인 플레이를 선보이지만 수비 가담 시에도 역시 적극적이죠.


이처럼 수많은 장점을 가진 좋은 선수이기 때문에 저는 박지성 선수를 닮은 그의 외모가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단지 박지성 선수의 외모만 닮은 평범한 선수가 아니기 때문이죠. 언젠가는 ‘박원재’라는 자신의 이름으로 승부를 거는, 그리하여 ‘박원재’라는 그 이름 자체로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선수가 될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그렇겠죠. K-리거의 꿈은 그렇게 영그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스타 역시 그런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겠고요. 다시금 새로운 별을 꿈꾸렵니다. 박원재 선수, 부디 당신이 그 주인공이 돼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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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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