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서울을 비롯한 대부분의 지역은 햇볕이 쨍쨍한, 겨울답지 않게 맑고 깨끗한 하늘을 자랑한다고 하는데요... 이곳 강릉은 지금 폭설이 내리고 있습니다. 40cm 정도는 온 거 같아요. 그리고 더 무서운 건 내일 오후 3시까지 내린다고 하니... 50cm 넘게 눈이 쌓일 것만 같습니다. 그 현장 모습 보여 드릴게요.








눈을 치웠지만...

너무 많이 내려 결국 포기...

눈 속에 파묻혔어요.

무릎까지 눈이 왔습니다.

보이시나요? ㅠㅠㅠ

백설기 같이 쌓인 눈...

여긴 지붕 때문에 그나마 덜 쌓인 거에요.

경기장이 안 보이네요.

눈에 덮힌 경기장.

그야말로 눈부십니다. ㅠㅠ

눈으로 덮힌 잔디밭.

차들이 눈에 갇히고...

이렇게 보면 참 예쁘지만. ㅠㅠ 고생입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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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행복전도사 최윤희님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시겠지만 자살로 생과 작별했고요 경찰에서는 유서를 공개했습니다.

유서를 읽어보면 최근 극심한 신체적 고통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냈음이 밝혀졌습니다.


2년동안 입원 퇴원을 반복하면서 많이 지쳤습니다.
그래도 감사하고 희망을 붙잡으려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추석 전주 폐에 물이 찼다는 의사의 선고.
숨쉬기가 힘들어 응급실에 실렸고 또 한번의 절망적인 선고.
그리고 또다시 이번엔 심장에 이상이 생겼어요.
더 이상 입원에서 링거 주렁주렁 매달고 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혼자 떠나려고 해남 땅끝마을가서 수면제를 먹었는데
남편이 119신고, 추적해서 찾아왔습니다.

저는 통증이 너무 심해서 견딜수가 없고 남편은 그런 저를
혼자 보낼수는 없고... 그래서 동반 떠남을 하게 되었습니다.

호텔에는 정말 죄송합니다. 용서 또 용서를 구합니다.
너무 착한 남편, 미안하고 또 미안할 뿐입니다.

그동안 저를 신뢰해주고 사랑해주신 많은 분들께 죄송 또 죄송합니다.
그러나 700가지 통증에 시달려본 분이라면
저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해주시라 생각합니다.
모든분들께 다시한번 죄송합니다.,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최윤희님은 '흉반성 루푸스'와 '세균성 폐렴'을 앓았다고 합니다. CBS 보도에 따르면 루푸스는 “자가면역질환으로, 인체 외부로부터 지키는 면역계의 이상으로 인해 오히려 면역계가 자신의 인체를 공격하는 질환”이라네요.

저는 최윤희님의 유서 중 “700가지 통증에 시달려본 분이라면 저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해주시라 생각합니다”가 가장 눈에 들어왔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을 떠나기 전 저희 할아버지께서도 제게 그런 말씀을 하셨거든요.

2008년 8월 27일. 제 할아버지는 87세를 일기로 제 곁을 떠나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떠나기 일주일 전 쯤 저희 집 아파트 욕실이 수리 중이라 집 근처 할아버지네로 가서 샤워를 했어요. 바로 다음날 저는 조모컵 한일 올스타전 취재 때문에 일본에 가야했거든요.

샤워를 하고 나오는데 할아버지가 헬레나왔냐면서 인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저는 할아버지께 네, 라고 짧게 이야기하고 바로 집으로 돌아가고 말았어요.

그때 할아버지는 기저귀를 바꾸고 계신 중이었거든요.

목욕을 하고 나오시다가 바닥이 미끄러워져서 할아버지는 넘어지셨고 허리를 많이 다쳤습니다. 수술을 해야하는데 고령이라 병원에서는 아무래도 힘들 것이라고 그냥 두시는 게 나을 거라고 말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일제시대 때 허리를 심하게 다치셨고 그래서 나이가 들고 나서도 허리 때문에 늘 고통스러워하셨죠. 그 허리를 또 다치고 말았는데, 이제는 수술을 해야하는데, 전신마취는 어렵고 마취를 하고 수술을 한다고 해서 회복이 어렵고. 더 이상 손쓰기 어려운 상황이었던 거죠.

그뒤로 할아버지는 누워서만 지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기저귀를 차야만 했고 둘째 고모가 같이 먹고 자면서 할아버지를 간호했어요. 정해진 시간마다 기저귀를 갈아끼워주고 목욕을 시켜주고 이발과 면도도 직접 해줬고요.

그런데 가끔 고모가 일이 있어서 할아버지와 함께 잠들지 못하는 날이면 늘 핸드폰을 손에 쥐어주고 무슨 일 생기면 꼭 전화하라며 신신당부를 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할아버지는 불을 켜놓고 가라고 하셨대요.

불꺼진 방에서, 암흑 속에서 혼자 어둠을 맞이하는 게 무서우셨나봅니다.

고모는 나중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 이야기를 하면서 펑펑 울었습니다. 제 손을 잡고요.

가야할 때가 가까워졌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쩜 할아버지는 어둠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는게 두려웠던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도 엉엉 울면서 그날 저녁, 할아버지의 부름에도 대답하고선 모른 척하고 갔던게 너무나 마음이 아팠습니다.

제게 할아버지는 언제나 큰 산이었고, 그림자도 밟을 수 없는 어른이었습니다. 제가 흔들릴 때마다 엄마, 아빠보다 더 심한 말로 저를 꾸중하시는 참으로 어려운 사람이었습니다. 늘 강했던 사람이 손녀 앞에서 기저귀를 갈아끼우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일부러 못본 척, 모른 척 하고 할아버지 집을 나섰죠.

그런데 그게 마지막 만남이었다고 생각하니, 제 마음 속에 영원히 후회인 순간으로 남아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때 할아버지 옆에 앉아서 손을 잡고선 손녀가 왔다고 이야기해야만 했어요.

그리고 얼마 전 할아버지와 관련해 또 다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돌아가시기 전, 응급실로 실려갔던 위험한 순간이 있었다고 합니다.

허리 통증이 너무 심해서, 반신불수의 날들로 있다 보니, 우울증까지 겹쳤고 이렇게 힘들게 사는 것을 그만하고 싶다는 마음에 그동안 모아놓았던 수면제를 드셨다네요.

할아버지가 너무 오래 주무시는데, 뭔가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응급실에 갔고 수면제를 드신 것 같다는 말에 위세척을 하고 겨우 살렸다고, 고모가 제게 말했습니다.

그때 정신을 차린 할아버지께서 고모에게 하신 말씀은, 몸과 마음이 너무 아프고 힘들어서, 였다고.

어둠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는게 두려워서 불을 켜놓고 겨우 잠드셨던 할아버지. 살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렇지만 눈을 뜨고 있는 매 순간에는 늘 격심한 고통이 몸과 마음을 감싸고 있으니 다 놓아버리고 싶은 마음 역시 함께 있었고.

살고 싶은 마음과 죽고 싶은 마음이 늘 시소처럼 왔다갔다 반복하며 하루를 지배했고 그렇게 힘들다는 말씀만 하시다 하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할아버지가 수면제를 드셨을 때, 응급실에 모시고 가고 깨어나는 모습을 봤을 때, 그때 고모는 왜 수면제를 드셨냐며 책망하는 말씀을 드리지 못했대요.

얼마나 힘들었으면. 내가 모르는 고통이 얼마나 힘들게 했으면 우리 아버지가 그랬을까. 하는 생각에 그저 눈물만 났대요.

행복전도사 최윤희님의 영면 소식을 들으며 저는 다시 한번 당시 할아버지의 선택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2년 전 세상을 떠난 저희 할아버지의 모습이 겹쳐, 사랑하던, 세상에서 단 하나 뿐인 나의 할아버지를 보낼 때처럼 눈물만 흘릴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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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경희대 패륜녀 사건으로 때 아닌 사이버 세상이 뜨겁습니다. 하지만 그 사건에 고마운 건, 노동자들의 삶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줬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겨울 ‘고려대 폐지전쟁’이라는 검색어가 실시간 검색 순위 상위에 올랐던 적이 있습니다.

솔직히, 그 단어를 클릭하기 전까지만 해도, 학교에 폐지가 너무 많아서, 그래서 폐지수거와 관련해 전쟁이라는 격한 단어를 쓴 게 아닐까, 하는  -지금 보면 말도 안되는- 생각을 했습니다.


대학시절, 학교에는 크고 작은 행사들이 참 많았습니다. 특히나, 대동제와 정기전 등의 큰 행사가 끝나고 나면, 학교는 쓰레기 천국이 따로 없었습니다. 워낙에 재학생 수도 많았고, 또 외부 손님들도 많았고, 또 무엇보다 치우는 사람들보다 버리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폐지수거를 전쟁으로 표현했구나, 라고 자연스레 생각 했었죠.

고려대에서 청소를 하고 계시는 노동자들이 지난해 12월 본관에서 3일 동안 농성을 벌였습니다. 용역업체가 환경미화원들의 정년을 70살에서 60살로 낮추려 했고, 폐지를 판돈으로 밥값을 충당했던 관행을 막았기 때문이죠.

그 과정에서 저는 많은 것들을 알게 됐습니다. 처음 용역업체와 맺은 계약서에는 오전 6시부터 일을 하기로 돼있지만, 학교 측의 요구에 맞추기 위해서는 새벽 4시까지 출근을 해야 했다고 합니다. 2시간 일찍 나와야지만 업무량을 맞출 수 있었기 때문이죠. 초과근무수당은 없었고,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매일 일해야 손에 주어지는 돈은 96만원. 식비가 나오지만 한 달에 3만 5천원밖에 나오지 않았고, 부족한 식비는 학교 내에서 버려지는 폐지를 주워다 파는 돈으로 메웠습니다. 그러다 “학교와의 계약에 따라 앞으로 폐지를 개별적으로 팔면 고발하겠다”는 공문을 받았다고 합니다. 고려대에서 폐지수거를 위해 다른 용역업체와 계약을 하게 됐기 때문이죠.

폐지처리를 놓고 고려대와 환경미화노동자들이 벌인 폐지전쟁은 폐지처리를 새 용역업체에 넘기는 대신 기존 노동자들을 고용한 업체와 새 업체, 두 곳으로부터 2만 5천원의 추가 식비를 받기로 합의했습니다. 또 내년에도 용역업체와 재계약이 성사되면 식비 상승분을 지급하겠다고 했는데, 문제는 고려대가 용역업체 공개입찰을 통해 기존 두 업체가 아닌 새 업체와 계약을 했다는 것에 있었죠.

고려대 환경미화 노동자들의 폐지전쟁은 결국 본관 농성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들은 △ 앞선 두 업체가 인상한 식비 2만5천원을 새로 선정된 업체들이 그대로 승계하고 △ 노조활동비 명목으로 매달 60만원씩 받아오던 활동보조금을 보장하고 △ 현재 정년으로 명시된 70세 보장을 학교 측에 요청했습니다.

본관 농성이 승리로 끝난 것은 아니지만 환경미화노동자들이 연대를 조직해 자신들의 권리찾기에 나섰다는 점에서 저는 승리였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대학시절, 제 친구들이 학교 앞에 놀러오면 캠퍼스 투어를 시켜주곤 했는데, 그때마다 친구들은 제게 말했습니다. “너희 학교 화장실에서는 좋은 냄새가 나.”

사실, 폐지전쟁이 있기 전까지 저는 어머니, 할머니 연배의 노동자들이 새벽 4시에 출근에 윤이 날 때까지 걸레질을 하는 것도 몰랐고, 화장실 내 물품실, 그러니까 청소도구들이 쌓여있는 제일 마지막 칸에서 휴식을 취하고, 집에서 싸온 차가운 도시락을 먹는다는 사실 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1교시 수업을 위해 학교에 도착할 때면 건물 내 은은히 퍼져있는 좋은 냄새, 그러니까 우리 학교 냄새라고 생각했던 향긋한 냄새를 위해 흘린 눈물과 땀은 모른 채 말이죠.

이번 경희대 패륜녀 사건 녹취록을 들으면서, 누군가는 왜 그 어머니 노동자가 인격을 비하하는 발언까지 했는데, 왜 당하고만 있었냐며 안타까워했고 또 분개했습니다.

하지만 또 누군가는 그랬습니다. 격무 속에서 최저임금을 받고 일하면서도 언제든 해고될 수 있다는 불안감에 시달렸기 때문이라고요. 노동 피라미드 최하층에 있던 사회적 약자였기 때문에 그랬을 거라고요.

화폐시대로 넘어오면서, 자본주의시대가 도래하게 되면서 언제부터인가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은 돈과 권력의 많고 적음으로 나눠졌습니다. 직업엔 귀천이 없다던 말도 실제로 직업에 귀천이 있기 때문에 나온 말이었죠. 그리고 그 귀천의 척도는 얼마나 더 대접받으며 얼마나 더 많은 돈을 벌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힘을 과시할 수 있는가로 매겨졌습니다.

저는 살면서 진정 어린 뜨거움조차 주지 못하면서도 길가의 연탄재는 함부로 차며 지냅니다. 내 손에 더러운 것이 묻히는 것은 싫지만 공중 화장실은 한 번도 깨끗하게 사용한 적 없으며 더러운 화장실을 보면 여전히 기겁합니다.

무엇보다 다른 사람의 상처에는 무심하면서도 종이에 새끼손가락이 조금이라도 베어 피라도 날라 치면 아프다며 온갖 울상입니다.

그러나 지극히 나 중심적인 사고 속에서도 우리의 어머니와 할머니 노동자는 최소한의 권리조차 묵살된 일상 속에서 살며 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녀에게 돌을 던지기 전에 내 과오를 되돌아봅니다. 부끄러움에 고개가 숙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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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오늘은 제 30회를 맞는 장애인의 날. 강원FC는 ‘장애인의 날’을 맞아 장애와 비장애를 넘어 교감과 소통이 공존하는 특별한 강원FC 홈경기를 가졌습니다.

‘강원래와 꿍따리유랑단’을 초청하여 특별한 식전행사를 준비했는데요, 클론의 강원래가 단장으로 있는 꿍따리유랑단은 그간 전국의 보호관찰 청소년과 소년원 학생들을 위해 다양한 문화공연을 선보이며 여러 번 언론의 화제에 오르기도 했던 단체입니다. 강원래씨를 비롯해 심보준(안면장애가수), 조성진(한 손 마술사), 최재식(한 손 무에타이 챔피언), 기홍주(시각장애, 무대연출)씨 등 7명의 단원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이번에는 강원래씨가 직접 강원FC 홈경기장에 나와 축구관련 댄스 메들리와 함께 ‘교통사고로 중도장애인이 됐지만 꿈을 잃지 않고 노력하고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들려줬습니다.

학창시절 클론으로 인기몰이하던 분인지라 강원래씨가 구단 사무실로 왔을 때, 사실 신기한 느낌이 더 컸습니다. 휠체어를 타고 왔지만 가수시절과 똑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얼마 전 라디오스타에서 봤을 때는 강한 느낌이 컸는데요, 실제로 사무국장님과 앉아 이야기를 하는 모습은 이웃집 아저씨 같고, 참으로 편하고 수더분한 느낌만 들더군요.

저는 옆에서 연맹 직원 분과 이야기를 나눴는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아직까지 애인없는 제 신세한탄으로 이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강원래씨가 그 이야기를 주의깊게 들었나봐요. 갑자기 저를 부르더니 나이를 묻더라고요. 그래서 제 나이를 얘기해줬더니 이분 어떠냐면서 79년생인데 자기 소유의 체육관 관장으로 있다면서 믿음직한 남자라고 적극적으로 소개팅을 추진해주시더군요. ^^

그때 제 눈빛이 ‘이 사람은 누구시길래?’라고 말하고 있었나봐요. “아니, 무에타이 챔피언 출신 최재식 선수를 몰라요?”하시길래 제가 “네...”라고 소심하게 대답하자 그 분의 오른팔을 잡아 올리시면서 “한 손 무에타이 챔피언 최재식 선수를 모르는 사람이 있다니~~!”하시더군요. 그제야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오른팔이 없는 분이시더라고요. 누구에게나 팔은 있다고 자연스레 인식했던터라 눈여겨 보지 않았던 거지요. 하지만 우리와 틀린 사람은 없어도 다른 사람은 있는 법이잖아요.

그러면서 강원래씨는 제 혈액형도 물어봤어요. 제가 O형이라고 하자 최재식 선수는 A형이라면서 A형과 O형은 잘 맞는 편이라고 가운데서 이야기를 하는데, 재밌는 건 제가 강원래씨한테 최재식 선수에 대해 궁금한 거 물어보고 최재식 선수가 대답한 걸 강원래씨가 다시 저한테 전해주는 풍경이었습니다. 서로 마주보고 있었는데, 그냥 물어봐도 될 법했는데... ㅎ 나중에는 “아니, 내가 지금 가운데서 뭐하는 거죠? 무슨 상견례 사회자로 나온 것 같네...”하시면서 하하 웃으시더라고요.

사무실 안을 한가득 밝게 채운 그런 환한 웃음이었지만, 그렇게 웃게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의 시간을 보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물론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앞으로도 절대로 모르는 아픔이겠지요. 어쩌면 막연하게 추측하는 것이 그분께 실례가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가수로서의 생활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보란듯이 무대 위에 서서 음지에 있는 사람들을 양지로 인도하고 있는 강원래씨의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 ‘희망의 증거’였고 모두에게 존경의 박수를 받을 만했습니다.

강원래씨는 요즘도 꿍따리유랑단과 함께 소년원, 갱생원, 보호관찰소, 교도소 등을 돌며 뮤지컬식 연극을 통해 희망과 꿈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왜 우리 소년원에서는 공연을 하지 않냐는 연락도 간간히 받는다고 하네요. 강원래씨는 그분들이 열심히 노력해 다시금 새롭고 멋진 인생을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공연 시작 5분 전 대기하고 있을 때 저를 보며 양 손을 휘휘 저으며 반갑게 인사하던 강원래씨. 그 미소를 이 짧은 묘사력으로는 설명하지는 못하겠지만, 그 미소처럼 밝은 날들이 계속 되기를 바란다는 제 마음만은 이 글을 읽는 모든 이들에 전해졌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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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11월8일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흥미로운 주제의 방송을 내보냈다. ‘내겐 너무 완벽한 라이벌 - 엄마 친구 아들이 무섭다’편을 통해 ‘엄친아’를 바라보는 시각과 그로 인한 문제점들을 살펴보는 시간을 가졌다.

엄친아는 ‘엄마 친구 아들’의 준말이다. 누구네 집 아들은 이번 시험에서도 1등했더라. 누구네 집 아들은 이번에 또 반장됐더라. 누구네 집 아들은 어느 대학에 붙었더라. 어린시절 엄마의 잔소리에 늘 등장하는 주인공은 언제나 실체를 알 수 없는 엄마 친구 아들이었다. 그런데 이 존재를 알 수 없는 녀석은, 늘 뭐든지 나보다 한발 앞서 나가곤 했다. 뭐든지 잘하고 뭐든지 척척 해내고 뭐든지 자기 것으로 만드는 대단한 놈이었다.



참, 축구계에서 대표적인 엄친아는 카카다. 예쁜 아내에 천사 같은 아들, 여기에 꾸준한 경기력과 뛰어난 재능으로 모자라 성실함, 더불어 인품까지 갖췄으니 카카야말로 최고의 엄친아가 아닐는지.

어쨌거나 학창시절 엄친아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해도 과언이 아니겠지만 나를 힘들게 했던 것은 엄친아가 아닌 한 살 터울의 내 동생이었다.

초등학교 졸업 당시 우리학교에서는 각 반 1등에게 ‘이사장상’을 주는 제도가 있었다. 지난 1년 동안 이상장상만 바라보며 공부했지만 졸업 당시 내 손에 쥐어진 상은 개근상이 전부였다. 선생님은 아깝게 놓쳤다며 내 어깨를 다독거렸고 난 애써 열심히 했지만 어쩔 수 없나보지, 하며 스스로를 위안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1년 뒤 동생은 보란 듯이 졸업식날 아침, 단상 위에 올라가 이사장상을 탔고 그 모습을 바라본 부모님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만연했다. 언니도 못탄 걸 동생이 해냈다며 어른들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태어나서 처음 느낀 좌절이었다.

내가 중학교 입학 당시만 해도 배치고사가 있었다. 배치고사 1등이 입학식 당일 다른 입학생들을 대신해 신입생 선서를 하는 풍습이 있었다. 워낙 1등과는 거리가 멀었던지라 시험을 치르는 내내 그저 좋은 친구들이 있는 반에 편성됐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하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1년 뒤 동생은 어색한 단발머리를 하고선 모두 앞에서 ‘선서’를 외치고 있었다.

고등학교 입학 때도 그랬다. 당시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에서는 입학식날 각반 1등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제도가 있었다. 입학 당시 그 모습을 지켜보며 박수를 쳤던 나는 1년 뒤에도 그 자리에서 박수를 치고 있었다. 다만 달랐던 것은 단상 위에 올라가 장학금을 받는 동생이 있고 없고의 차이였을 뿐이었다.

그 뒤로 매학기 동생은 학교로부터 장학금을 받았다. 그 말은 곧 늘 반에서 1등이었다는 사실을 뜻했고, 동생과 나와의 가족관계가 드러나서부터는 나는 늘 동생보다 공부 못하는 언니로 불리게 되었다.

“야, 너 동생은 이번에도 또 1등해서 장학금 받았는데 넌 언니가 돼서 그게 뭐니?” “자존심도 안상하니?” “동생 좀 보고 배워라.” “모르는 거 있음 동생한테 물어보면 되겠다?” “동생은 특별히 과외 받는 것도 없지? 그런데 어쩜 그렇게 공부를 잘하니.”

그런데 스트레스 때문이었는지 그때부터 내 키는 더 이상 자라기를 거부하였다. 또 다른 시련의 시작이었다. 큰집이었기 때문에 명절 때면 늘 친척들이 우리집에 모였는데, 그때마다 어른들은 동생과 나를 불러놓곤 ‘누구 키가 더 큰가’ 대결을 펼치곤 했다. 일 년에 2번 씩 설날과 추석 때면 늘 반복됐기에 나중에는 일종의 관례 내지는 의식 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나 나와는 상관없이 동생은 중력의 지배를 받지 않은 듯 했다. 쭉쭉, 사랑받는 콩나물처럼 시원하게 잘도 자랐다. 곧 동생은 나를 앞질렀고 그때부터 동생보다 키도 작은 언니라는 수식어까지 덤으로 선물 받아야만 했다.

한데 나도 사람이었던지라 더 이상의 비교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학교와 집에 ‘당신들은 모르겠지만 나도 사람입니다’라는 한줄 편지를 남긴 채 그대로 가출을 감행하고 말았다. 그래도 모범생 기질은 버리지 못했던 터라, 부반장 손에 보충수업 학급비와 제출하지 않은 명단을 아침 등교길에 전해준 뒤 그대로 사라지고 말았다.

물론 그때는 PC방이 이제 막 곳곳에 생기고 있던 시절이라 고등학교 2학년생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은 없었다. 하여 저녁까지 교보문고에서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다 문을 닫으면 버스를 타고 미리 알아본 아파트로 이동하였다. 낮 시간에 그나마 제일 안전해 보이는 아파트를 물색했고, 저녁이면 그곳에 가 계단에 앉아 잠을 청하였다. 그렇게 3일을 보냈다. 4일째 되던 날 밥 사주겠노라던 친구 말에 약속장소에 가봤더니 그곳엔 엄마가 계셨다. 결국 엄마 손에 이끌려 집에 오며 나의 가출일기는 끝이 났다.

물론 그 뒤로도 동생과의 비교는 심심치 않게 일어났다. 예쁘고, 키 크고, 공부도 잘하고-영어 및 수학 경기대회는 늘 전담해서 출전하는-팔방미인 동생을 둔 덕분에 나는 늘 외롭고 힘들었고 또 괴로웠다. 심적 고생을 알아주는 이는 없었고 내 주변 사람들은 모두 동생과 나를 비교하기에 바빴다.

자연스럽게 말수는 줄어들었고 사람들은 그저 사춘기를 심하게 앓고 있구나, 라며 멋대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 즈음 내가 터놓고 말할 수 있는 상대는 일기장뿐이었다. 매일 밤 수십 쪽에 걸쳐 나의 속내를 털어놓았다. 쇼펜 하우어가 봤다면 형님, 하며 고개 숙였을 정도로 음울한 문장들의 연속이었다. 그래도 나는 개의치 않고 썼다. 쓰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은 나날이었으니까, 머릿속에 더 이상 단어조차 떠오르지 않을 때까지, 머리가 마비될 때까지 쓰고 또 썼다.

뭐하나 제대로 할 줄 없는 아이였다. 그러나 쓴다는 행위는 나를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과정이었고 그렇게 나는 여물었고 스스로 상처를 치유했고 그로인해 성장할 수 있었다. 선생님의 추천으로 나간 백일장에서 상을 탄 이후로 용기를 내 전국대회에 작품을 출품했고 알아주는 대회에서도 서너 번 수상자 명단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 전 전국대회에서만 십수 개의 상을 탈 수 있었는데, 그때 깨달았다. 아, 나 같은 애도 잘하는 게 있구나.

그렇지만 돌이켜보면 동생보다 잘하는 것은 생각보다 많았다. 피아노를 배웠을 당시 처음 곡을 습득하는 능력이나, 그 곡을 외우는데 걸리는 시간 모두 더 뛰어났고 또 빨랐다. 자전거라는 단어를 가지고 글을 쓸 때면 동생은 단순히 자전거의 장단점에 대해 기술했지만 난 할아버지의 자전거, 영화 마이걸에서 두 주인공의 우정의 매개체였던 자전거, 알베르토 아저씨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가던 토토의 웃음 등 내가 기억하는 자전거, 그리고 그 자전거와 얽힌 기억들을 떠올리며 글을 썼다. 그게 동생과 나의 차이였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동생과 나는 잘하는 영역이 서로 달랐던 것뿐이라고. 다만 문제는 그것을 알아주는 어른들이 부족했다는 사실에 있었다. 어린왕자의 독백처럼, 어른들은 숫자만 좋아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늘 그렇게 1등만 하는 동생만 인정했나 보다.

물론 그렇다고 동생이 미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때마다 난 무능력한 나를 탓하기 바빴으니까. 그게 참 무서운 거다. 스스로 무능력을 인정하게 되면, 난 못난 사람이니까 열심히 해도 소용없어, 라는 생각 역시 쉽게 하게 된다. 그 뒤에 오는 것은 나태뿐이다. 노력해도 ‘못난’ 나는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왜 그들은 각자 다른 영역에서 최고가 될 수 있는, 내재된 ‘잠재성’을 살펴보지 않은 것일까. 왜 그저 학업성적과 그 속에서 매겨지는 등수에만 집착했던 것일까. 그 성급함이 누군가의 미래에 그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정녕 모르는 것일까.

다행히 나는 비교적 일찍, 내가 좋아하고 또 잘할 수 있는 일을 발견했기에 비교가 주는 그늘에서 빨리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어느 누군가는 이 땅의 수많은 엄친아들과 비교 당하며, 무엇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는 한심한 놈 취급을 받을 지도 모른다.

그렇게 열등감에 시달려 좌절하는 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스스로를 믿어라. 자신이 믿지 않는다면 당신 자신을 믿어줄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니, 부디 믿어라. 자신의 몸과 마음을.

믿는 만큼 사람은 자라기 마련이고, 그 믿음이 곧 능력의 바로미터가 될 것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못한다할지라도 능력은 숨죽여 자라고 있으니 때를 기다려라. 그 능력이 자라고 자라, 언젠가는 모두를 놀라게 할 것이니.

그리고 마지막. 엄친아보다 무서운 건 다름 아닌 엄친아를 조장하며 비교하는 ‘일부’ 사람들과 그들이 속해있는 사회다. 먼 훗날 태어날 내 아이만은 부디 엄친아 없는 세상에서 키우고 싶다. 소박한 바람일지, 헛된 꿈일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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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작년 이맘 때 정선희씨를 처음 만났던 걸로 기억합니다. 케이블 방송 온스타일에서 ‘핑크 알파’라는 프로그램을 제작했는데, 저도 그 프로그램의 패널로 출연했죠. 2달 동안 방송을 찍으면서 주말마다 정선희씨를 만났지요. 그 프로그램의 사회자가 정선희씨였거든요.

알파걸. 사회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20대 여성을 지칭하는 신조어입니다. 어찌하여 연이 닿아 저도 알파걸 중 하나로 뽑혔고 금융, 예술, 정치, 공학, 의료 등에 종사하는 다른 20대 여성들과 함께 매 주 주제를 갖고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눴죠. 알파걸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가 프로그램의 요지였죠.

첫 녹화가 있던 날, 정선희씨는 “안녕하세요, 반가워요!”라고 소리치며 우리에게 인사했습니다. 가까이서 연예인을 보기는 처음이라, 연예인은 저렇게 당당하고 밝구나, 라고 혼자 생각했었죠. 돌아가면서 직업과 이름을 말했는데 단 한 번에 외우는 그 기억력에 놀랐고, 녹화 도중 대본에 없는 이야기들을 돌발적으로 했을 때도, 마치 준비하고 있었다는 듯이 받아치는 말솜씨에 감탄했습니다. 타고난 방송인이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였죠. 그리고 잠깐의 휴식시간. 정선희씨는 크리스피 도넛을 모두에게 돌렸고 도넛을 함께 먹으며 첫 만남이 주는 어색함을 떨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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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일주일의 시간이 흘렀고 다시 녹화를 가졌습니다. 그날은 마침 25년 넘게 사는 동안 남자친구 없이 지낸 제가 주인공이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제가 소개팅 하는 장면을 찍었는데,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제 소개팅은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소개팅 ‘남’께서 저의 애프터를 거절하고 집에 가셨거든요. 아, 정말이지 자존심 상하더군요. 그것도 아주 많이요. 그 장면이 그대로 방송에 나갈 생각을 하니 참 끔찍하다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그때 정선희씨는 “왜 자기가 매력적인 여자라는 걸 모르죠?”라고 말했습니다. “자신감을 가져요. 당신은 오래 만날수록 매력이라는 향기를 뿜어내는 사람이니까, 소개팅 같은 단발성 만남에서 잘 되기 힘들지도 몰라요. 그러니 잘 안된다고 속상해하지 말고요! 옆에서 오랫동안 지켜본 사람이라면 당신이 좋은 사람이라는 걸 분명 알테고, 그런 사람이 ‘인연’으로 다가올 거예요.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아요”라고 제게 말했죠.

이렇게 사람들 사이에선 잘 웃고, 말도 재밌게 잘하는데, 왜 일대일로 만날 때는 긴장하고 굳냐며,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는 것도 추천해주셨습니다. 그러다 보면 이성 앞에서 자연스럽게 말과 행동을 취할 수 있다면서요.

정선희씨는 그동안 정신없이 일만 하며 살아왔는데, 인연이라는 건 참 신기하게도 갑자기 찾아왔다며 이제는 고인이 되신 안재환씨 이야기를 해줬습니다. 마침 그날은 결혼식 드레스를 맞추고 온 날이었답니다. 특별한 날이라서, 남들과 다른 황금색 드레스를 맞췄다는 정선희씨 이야기에 우리는 부럽다며 고개를 끄덕였죠.

그날은 정선희씨와 녹화 도중 쉬는 시간 내내 정신없이 수다를 떨었던 것 같습니다. 그녀는 이제 막 사회에 발 딛은 우리에게, 언젠가는 일에 지쳐 모두 그만두고 떠나버리고 싶은 순간이 올 거라고 말했습니다. 그때는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마음 편히 생각하며 조금 속도를 늦추는 것도 그 순간의 고개를 넘는 좋은 방법이 될 것이라고 조언 해줬죠. 당신 스스로도 30대 어느 날 모든 것을 그만두고 싶은 위기가 있었지만, 잊고 있었던 마음의 여유를 다시 떠올리며 극복했다고 회상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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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모에 한창 신경 쓸 20대 인지라 성형수술 이야기도 우리에겐 화두였는데, 내 인생의 실리콘은 코 하나면 됐다는 솔직한 이야기로 우리를 웃게 만들었고, 옷과 어울리지 않는 귀걸이를 하고 나왔을 때는 자신의 귀걸이를 빌려주기도 했습니다. 이 귀걸이가 나을까, 저 귀걸이가 나을까, 갸우뚱 거리다 이거다, 하며 건네줬죠. 또 한번은 원피스를 입고 왔던 날, 마이크를 걸 데가 없다며 쩔쩔 매고 있을 때 윗 속옷에다 걸면 된다는 팁을 가르쳐줬고, 나중에는 직접 제 속옷에다 마이크를 끼워주는 친절까지 발휘해줬답니다. 오크우드 커피숍 주방에서 같이 옷을 갈아입기도 했고요. 돌이켜보면 참 털털했던 사람이었던 같습니다. 정선희씨는 말이죠.

그리고 마지막 녹화가 끝나고 꼭 한달 뒤에 결혼식이 열렸습니다. 당시 정선희씨는 함께 출연했던 우리 모두에게 청첩장을 주는 것을 잊지 않았고 결혼식에 참석해 축하인사를 건넬 수 있었습니다. 예식이 끝나고 축가를 부르기 위해 온 DJ DOC의 노래에 맞춰 춤을 추다가 당시 티아라와 면사포가 떨어지기까지 했는데, 역시 선희언니답다며 지켜보던 우리는 박수치며 웃었답니다. 신랑 신부의 귀여운 웨이브도 여전히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결혼식 참석자들에게는 작은 컵이 선물로 주어졌는데, 컵에는 감사합니다, 잘 살겠습니다, 라는 두 문장이 손글씨로 예쁘게 써있습니다. 두분의 알콩달콩한 사랑도 함께 새겨진 것 같아 책상 위에 잘 간직하고 있었는데, 이 글을 쓰며 그 컵을 다시 보고 있자니 마음 한켠에 서늘한 바람이 부네요.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싫어하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고, 그런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도 웃어야한다며, 아무리 노력해도 웃음이 도통 나오지 않을 때면 손으로 등을 긁으며 웃으라는 말과 함께 시원하게 웃던 정선희씨의 모습을, 저는 어제 일처럼 선연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눈물과 고통으로 덮힌 그 얼굴이 더 마음 아프게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정선희씨의 상실을 당사자가 아니기에 온전히 이해할 수 없지만 저 역시 인생의 소중한 사람을 잃었던 아픔을 여전히 심장이 기억하고 있기에, 고인의 명복과 마음속 평화가 내리길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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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지난 7월31일 새벽 3시 인천국제공항. 새벽 4시5분에 출발하는 나고야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일찌감치 게이트 앞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새벽인지라 졸음이 쏟아졌고 의자에 앉아 몸을 기댄 채 쉬고 있는데, 마침 텔레비전에서 영화가 나오더군요. 잠도 쫓을 겸 영화나 보자는 생각이 들어 시선을 돌렸습니다.



한데, 저는 순간 제 눈을 의심하고 말았습니다. 일단 오른쪽 상당에 노란동그라미 안에 있던 ‘19’ 숫자도, 또 ‘섹스 아카데미’라는 제목 자체도 저를 놀라게 만들기 충분했으니까요. 아무리 야심한 시각이라 하더라도 공공장소입니다. 모두에게 열린 장소였고 일본행 비행기를 타기 위한 사람들 중에는 가족 단위로 일본을 방문하려는 이들도 꽤 많았습니다.

제 앞에 있던 아이들이 힐끔힐끔 영화를 보더군요. 영상에는 영화 속 야한 장면이 나오지 않지만 제목에서 느껴지듯, 영화는 3류였고 또 상당히 야했습니다. 공공장소에서 아무렇지 않게 팔짱 끼고 볼만한 내용의 영화는 정녕 아니었죠. 제가 찍은 영상에는 여자들이 가슴을 드러낸 채 남자들과 키스를 하는 장면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영상은 차마 블로그에 올릴 수 없어 ‘자삭’했습니다.

새벽 시간에 담당자가 없어서 그랬다는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습니다. 변명에 불과하니까요.

새벽이었지만 탑승객들이 비행기를 타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당연히 공항을 관리하는 사람들도 있었겠죠. 조금만 주의를 기울였다면 다함께 성인영화를 시청하는 일따위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른 뿐 아니라 어린이들도 이용하는 인천국제공항에서, 앞으로는 성인영화를 보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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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최장집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님의 ‘마지막 수업’이 있었습니다. 교수님은 2007년 1학기 ‘인간과 정치’ 학부 수업을 마지막으로 25년 간 학생들을 가르쳤던 교정을 떠나시게 됐죠. 교수님의 마지막 수업을 듣기 위해 1200여 명의 학생들이 인촌기념관에 모였습니다. 그중에는 졸업생도 있었고, 동료 교수님들도 있었습니다. 또 이를 취재하기 위해 달려온 수십 명의 기자들도 있었고요.


한때, 그러니까 1998년에는 ‘색깔론’에 휘말리기도 하셨습니다. 당시 최장집 교수님은 <월간조선>으로부터 ‘친북파’, 이른바 ‘빨갱이’로 내몰리고 말았습니다. 결국 이에 반발한 지식인들이 ‘안티조선’ 운동을 벌였고 그때 시작된 안티조선 운동이 어느새 오늘로 10년째를 맞이합니다. 그리고 교수님은 ‘한국의 정치와 나의 정치학’이라는 주제로 마지막 수업을 하게 되셨고요.




“대학이 외향적 발전이라고 하는 것은 눈부시게 발전해왔습니다. 몇 달이 멀다하고 학교에 건물이 새로 들고 캠퍼스는 눈부시게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캠퍼스 외향적 모양은 미국에 못 미치는 게 아니죠. 우리 외향적 발전과 병행해서 학문의 발전, 교육의 발전, 대학이 한국교육의 산실이 되서 계속 인재를 양성해서 사회에다 배출하는 영향을 내실있게 하고 교수는 연구에 충실해서 새로운 진리를 만들 수 있는 역할을 하면 이상적이겠죠. 오늘의 대학은 영혼(soul)이 없습니다. 대학이 학문의 위엄을 실현하고 자율성을 실현하고 기대만큼 하지 못하는 게 오늘의 현실이고 매우 아쉽게 생각합니다. 대학이 진리를 추구하는 열정을 얼마나 갖고 있는가. 저 자신도 매우 스스로를 회의하게 생각합니다. 대학이 이런 환경 만드는데 뒷 받쳐주고 있냐고 생각할 때 별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더 부정적으로 말하면 현재 한국사회의 모든 문제의 근원은 대학과 교육으로 부터 나온다고 과언이 아닙니다. 왜냐. 그것은 기업이나 국가관료나 언론이나 정당이나 모든 인적자원은 대학에서 공급하기 때문에 대학이 좋은 인재를 사회에 배출한다면 문제가 자동적으로 해결된다고 볼 수 있는 거죠."

“문제의식을 넓게 가지고 사회정의나 책임의식 갖는 일에 관심을 갖는 노력은 스스로 갖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공부를 폭넓게 하세요.

“그간 한국사회는 좋은 리더를 갖지 못했어요. 현재 대통령도 좋은 리더가 되길 바랬는데. 촛불집회를 많이 보고 배워서 됐으면 좋겠어요. 좋은 리더란 단순한 리더가 아니라 말하자면 기존의 우리사회가 처한 문제를 변화시킬 수 있는 정치적 능력을 갖고 비전을 갖고 정책을 그 사람을 구심점으로 해서 대표할 수 있는 리더를 기대합니다. 그 시작을 처음 하는 건 좋은 정당이 해야 되고 이 정당을 통해 좋은 리더들이 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오늘의 강의를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강의가 끝났지만 수많은 학생들은 교수님 곁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저 역시 그 옆을 떠나지 못한 학생 중에 하나였고요. 학보사 수습기자였던 시절, 제 카메라에 처음 교수님을 담았던 그해 늦가을이 생각납니다. 말씀 도중에 안경을 뺐다, 꼈다 하는 교수님은 마지막 강의 도중에도 안경을 뺐다, 도로 쓰기를 반복하셨죠. 수년전 당시의 추억이 생각나 교수님께 인사를 드리고 돌아가는 길, 살포시 웃음이 나왔습니다. 다시 또 수년이 시간이 흐른 뒤에 저는 오늘의 ‘마지막 수업’을 떠올리며 같은 웃음을 짓겠지요.

교수님,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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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98학번 선배와 오랜만에 모교에 놀러갔습니다. 대학시절 저는 ‘아마추어 축구부’라는 동아리에서 활동을 했는데요, 오늘 동아리에서 신입생환영회가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왜 환영회를 4월에 하냐고요? 보통 3월은 신입생이 오고 가는 기간이라 한달 늦게 4월에 하게 됩니다. 4월이면 이제 신입생들이 어느 정도 동아리에 정착하는 기간이니까요. ^^



제가 입학할 당시 아마추어 축구부에는 여학생이 한명도 없었답니다. 저는 그 동아리에 ‘제발’로 걸어 들어간 유일한 여학생이자 또 새내기였죠.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기만 합니다. 남학생들만 드글드글한 그곳에 눈 똥그랗게 뜨고 들어간 20살의 제 모습을 떠올려보면요. 그렇지만 그렇게 겁없고 당찼던 그 시절의 제가 있었기에 지금의 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오늘 제가 만난 새내기들도 저마다 목표를 갖고 대학에 입학한 것이겠지요. 20대 초반, 격정적인 나날들 속에서 그 목표들이 흔들릴 때도 있겠지만 그 뿌리만은 부디 단단하기를 염원해봅니다. 가지는 흔들려도 그 밑동만큼은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켜야하니까요.

사발식을 마친 후 이제 정말 동아리 사람이 된 것 같다고, 환영해줘서 또 환영받아서 기분 좋다며 활짝 웃던 20살 08학번 후배들의 얼굴이 참 예뻐보였습니다. 그 후배들을 위해서라도 꼭 좋은 선배가 돼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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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최근 개그우먼 박나래가 자신의 미니홈피에 성형 후 사진을 공개해 화제다. 그녀의 미니홈피 제목은 “여자답게 살고 싶었습니다”였다. 그 문구를 보자 순간, 까닭모를 슬픔이 몰려왔다. 흔히 말하는 ‘미모’를 갖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그간 받았을 차별과 설움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문득 학창시절 선생님이 내게 했던 말이 생각난다. “너희 집 돈 많니? 아님 너 얼굴이 예쁘기라도 하니? 이것도 저것도 아닌 이상 공부 열심히 하는 게 최고야. 안 그러면 후회한다.”애석하게도 중,고교 시절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였다. 오죽했으면 고3시절 급훈이 ‘1시간 더 공부하면 남편 얼굴이 바뀐다’였을까.

기실 우리 집은 돈이 많은 것도 아니었고 나 역시 연예인 같은 외모를 갖고 태어나지 못한 터였다. 그러나 다행히도 내겐 꿈이 있었다.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을 울리는 그런 아름다운 글을 쓰고 싶다는 꿈 말이다. 학창시철 오직 그 꿈만 생각하며 공부했다. 다른 건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좋았다.

물론 지금도 글을 쓰고 싶다는 꿈을 가졌다는 사실에 안도할 때가 많다. 왜냐고? 글은 그저 문장과 그 문장들을 응집시키는 구성력, 마지막으로 글쓴이의 진심으로만 승부를 걸면 되니까. 외모 따윈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지난 해 말에는 모 여자 연예인이 성형수술 뒤 과다출혈로 중환자실로 실려 갔는 내용의 뉴스가 보도된 적이 있다. 안면윤곽수술이 아니라 치아교정 때문이라고 밝혔지만 본인 스스로 “수술하다 죽을 수는 없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상태는 심각했다.

얼마 전 여성포털사이트 마이클럽에서는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성형모델 선발대회’를 열었다. 1등을 차지한 조수정 씨는 우승 조건으로 앞으로 연예인 활동을 지원받게 됐다. 역시나 네티즌들의 뜨거운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며 그녀의 이름은 ‘순간검색어’에도 올라갔다.

최근 대학에 들어간 친척동생은 코수술도 해달라고 엄마를 조르고 있는 중이다. 쌍꺼풀 하는 김에 코도 하면 어떻겠냐는 것이 동생의 이유. 두 개를 동시에 하면 할인까지 된다나? 친척동생은 예뻐져서 꼭 ‘아나운서’가 될 테니 한번만 믿어달라며 징징대고 있다.

그녀들이 왜 수술대가 올랐고, 또 오를 예정인지 아는가. 그렇다. 이제는 외모가 경쟁력인 시대가 됐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불과 얼마 전까지도 면접에서 번번이 국물을 마셨던 친구가 생각난다. 쌍꺼풀이 없어 강한 외모에 고민하던 친구는 결국 수술대에 올라섰다. 그녀는 쌍꺼풀 수술 이후 부드러운 인상으로 바뀌었고 결국 원하던 회사에도 입사했다.

요즘도 학생들은 각 학교 별로 얼짱을 뽑아 순위를 매기며 몸짱 아줌마는 아주 오래 전에 제2의 ‘봄날’을 맞았다. 어느새 뉴스를 전달하던 아나운서들에게도 ‘얼짱 아나운서’라는 별명이 붙기 시작했고 네티즌들은 어느 연예인이 제일 동안인지 설전을 벌인다. 그래서인가. 잠깐 쉬다 나오는 그녀들은 깡마른 몸에 지나치게 어울리지 않는, 지방으로 가득 찬 얼굴을 하고선 화면 앞에 나타난다. “감기 때문에 얼굴이 좀 부었어요”라는 말과 함께.

물론 박나래의 선택을 전적으로 이해한다. 수술을 통해 자신감을 얻고 자신있게 살아갈 수 있다면-이미 수술사실을 공개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녀의 당당함이 읽혀지지만- 그녀는 앞으로 제2의 인생을 살아갈 것이다. 수술대에 올랐을 심정으로, 거울 앞에 앉아 바뀐 얼굴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외쳤을 다짐대로 살아간다면, 그것은 분명 멋진 인생일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진정 나를 슬프게 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정말 이 세상은 과연 외모로만 모든 것을 평가할까?  어느새 ‘성형수술 권하는 사회’가 되고 만 것일까? 선배와 술을 마시던 지난 저녁 내내 나는 한참동안 그 질문을 반복해서 던졌다. 그랬더니 한참동안 말이 없던 선배는 내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잊었어? 폴포츠가 있잖아.”

그렇구나. “외모보다 중요한 것은 꿈을 향한 노력, 그리고 그 덕분에 더 빛나게 된 재능이에요”라고 속삭이던 그 남자를 한동안 잊으며 살았구나.

폴포츠가 누구냐고? 폴포츠는 영국판 아메리칸 아이돌 격의 프로그램인 ITV ‘브리튼즈 갓 탤런트(Britain’s Got Talent)’ 최종 우승자다. 그리고 이제는 모두가 인정하는 세계적인 오페라 가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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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시절 폴포츠는 단지 뚱뚱하고 못생겼다는 이유만으로 늘 주변 사람들의 놀림거리가 되곤 했다. 때문에 그 시절 그의 유일한 친구는 ‘음악’과 ‘노래 부르기’뿐 이었다. 그것이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오페라 가수가 되겠다는 꿈도 그렇게 영글어 갔다. 그러나 용기를 갖고 찾아간 음반사들은 저마다 “목소리는 좋지만 외모 때문에 아무래도 힘들 것 같다”는 대답만 들려줬다.

“나의 외모만 보고 무시할 땐 정말 슬펐어요. 그래도 절망하지 않고 기회를 찾아다녔죠.” 여기서 ‘기회’란 ‘브리튼즈 갓 탤런트(Britain`s Got Telent)’ 오디션을 말한다.

언뜻 봐도 싸구려처럼 보이기만 한 양복, 부러진 치아와 뚱뚱한 몸매. 폴포츠는 오페라와는 어울리지 않는 외모를 한 채 무대 위에 올라섰다. “오페라를 부르겠습니다”라고 말하며.

그가 오페라 투란도트 중 ‘공주는 잠 못 이루고(Nessun Dorma)’를 부르던 순간, 차가운 표정으로 보고 있던 심사위원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방청객 중 몇몇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고 노래가 끝나는 순간 일제히 기립박수를 보냈다. 아메리칸 아이돌에서 독설만 퍼붓기로 유명한 독설가로 심사위원 사이먼 코웰 역시 “정말로 휴대폰 외판원이 맞냐”며 “당신은 우리가 찾아낸 보석”이라는 칭찬을 아낌없이 던졌다.

“당신은 우리 눈을 확 뜨게 만드는 신선한 공기 같군요”
“우리는 지금 막 다이아몬드를 발견했어요. 지금은 작은 석탄 조각이지만 당신은 곧 다이아몬드가 될 거예요.”


이 동영상은 곧 유튜브에 올라갔고 9일 만에 1천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다운받았다. 이는 유튜브 사상 최고의 조회수였으며 그는 그렇게 전 세계 사람들에게 놀라운 감동을 선사했다. 그리고 지난 8월에는 드디어 평생의 꿈을 이루게 되었다. 바로 자신의 목소리가 담긴 앨범이 탄생한 것이다.

“꿈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세요. 자신이 생각한 길을 걷다보면 언젠가는 이뤄질 거예요. 저처럼 기적이 일어날지도 몰라요.”

그렇지만 그것을 단순히 기적이라 치부하고 싶지는 않다. 혼이 담긴 노력, 그리고 그 노력을 통해 더욱 빛을 발한 재능, 마지막으로 ‘노래’ 하나만을 생각한 진심어린 마음. 폴포츠에게는 그 모든 것들이 있었기에 세상이 그의 존재를 알아준 것이 아닐까.

그리하여 나는 폴포츠를 통해 다시금 희망을 읽는다. 그리고 깨닫는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이아몬드는 검고 지저분한 석탄에서 시작된다고. 그러니 든든한 희망을 가득 안고 세상을 살아가야지. 그리하여 꼭 좋은 글을 쓰고 싶다는 내 꿈을 이뤄가야지. 다시 한번 나지막한 목소리로 되뇌며 다짐해본다.


설령 이 세상이 성형 권하는 사회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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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대학시절 저는 사진기자로 현장을 누볐습니다. 가장 바쁘게 지냈던 때는 아마도 2005년 여름인 것 같습니다. 매일 카메라를 들고 거리에서 살았으니까요. 그해 8월 15일 광복절 당일에도 저는 땀을 뻘뻘 흘리며 취재 중이었죠. 마침 그날 저녁에는 숭례문 앞에서 광복 60주년 기념 음악회가 열렸고 저는 그 현장을 취재해야만 했습니다.

어렵사리 숭례문 근처에 있던 건물을 섭외했고 옥상에 올라가 광복 60주년 기념 음악회 풍경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키가 작았던 지라 화각을 위해선 몸 절반을 옥상 밖으로 뻗은 채 사진을 찍어야했답니다. 그때 건너편에서 제 모습을 보고 있던 선배는 걱정이 됐던지 전화로 "그러다 떨어지겠다! 좀 조심하면서 찍어!"라며 야단을 쳤죠.

비록 몸은 힘들었지만 그래도 그날 저녁은 낭만적인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조명이 바뀔 때마다 아름답게 바뀌던 숭례문, 음악회 내내 제 귓가로 조용히 울려퍼지던 선율들, 마지막으로 선선히 불던 바람 덕분에 말이죠. 아직도 그 순간을 저는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후에 대한상공회의소에서 파트파임으로 6개월 가량 일하게 됐을 때 저는 아침, 점심, 저녁마다 숭례문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상공회의소는 숭례문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거든요. 숭례문과 마주칠 때마다 기분 좋은 웃음이 절로 나왔죠. 다른 이들은 몰라도 숭례문만은 치열했던 20대 초반, 제가 보냈던 그 나날들의 기억을 모두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 뒤 상공회의소 파트타임직을 끝내면서 안타깝게도 숭례문 근처로 갈 일이 없게 돼버렸습니다. 결국 그게 제가 숭례문과 만난 마지막 순간이 돼버렸군요. 그게 2006년 10월의 일이니 벌써 2년 전이네요.

숭례문이 불에 타고 있다는 뉴스를 들었을 때 치열했던 제 삶의 한 순간이 타버리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리고 결국 전소돼 버리고 말았다는 보도에선 제 마음도 함께 다 타버린 듯한 기분도 들었습니다.


어느 누구를 탓하기 이전에 국민으로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는 말을 먼저 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이 새벽,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고 2005년 여름 제가 찍었던 숭례문 사진을 찾아봅니다. 조명빛에 따라 반짝반짝거리던, 이제는 과거 속에만 남아있는 숭례문의 모습입니다.


music by 콩자반님의 Free BG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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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재밌는 기사를 발견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기 전에 꼭 해야 할 50가지 일’ 이라는 제목의 기사였죠.

그 기사를 읽다 보니 제 대학시절이 생각났어요. 그래서 ‘필’ 제대로 받은 김에 이제 막 대학생이 되려는 인생의 후배님들을 위해 ‘요것만은 꼭 해봐라!’ 목록을 작성해봤답니다.



추려서 23개만 소개하는데요,
다른 분들도 추천하고 싶은 것들이 있으면 트랙백 걸어주세요.
이제 대학생이 되는 저희 집 막내둥이에게도 유익할 것 같네요. 그럼! ^^


1. 철학수업을 수강하라. 모든 학문의 기초 아니던가. 졸리더라도 들어보자. 남는 게 크다. 2. 선거운동에 참여하라. 사실 가장 추천하는 방법은 후보로 나가는 것. 그것이 어렵다면 후보를 도와주는 선거운동원이 돼보는 것을 추천하고 싶다. 그것도 어렵다고? 그럼 투표만이라도 해라.
3. 혼자 밥 먹고 혼자 영화 먹고 마지막엔 나 자신을 위한 꽃을 사서 선물하자. 무언가를 혼자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막상 해보면 왜 그렇게 무서워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4. 부모님과 술을 마셔보자. 10대에는 어렵고 힘들어서 하지 못했던 가슴 속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어쩜 그분들께서 들려주실 지도 모른다. 
5. 자원봉사. 다른 사람을 도와봐야 세상을 조금 알 수 있는 법. 시간 없다는 것은 핑계다. 그럼 기부금으로 돕는 방법도 있으니까. 대학시절 난 내 용돈의 10%를 매달 자선단체에다 기부했다. 돈 없어서 못하겠다는 것 역시 핑계다. 술 값, 커피 값 아끼면 보내줄 돈 다 생긴다.
6. 한번 쯤의 일탈. 대학생 때 아니면 점점 일탈하기 힘들어진다. 부모님 몰래 애인과 여행가보는 건 어떨까? 뭐라고? 그건 일탈이 아니라 일상이라고? ^^
7. 배낭여행. 취업하면 안다. 배낭여행 간다고 2달 씩 해외를 돈다는 것은 꿈에서도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연휴 때 월차 붙여서 일주일 자리 비우는 것도 눈치를 보는 현실에선.
8. 도서관에서 밤 새보기. 공부 안하고 책상 위에서 퍼질러 자도 좋다. 그 시간에도 초롱초롱 빛난 눈으로 공부하는 학생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만 안다면.
9. 종교 동아리 학생과의 토론.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가? 혹은 믿어도 좋다. 종교만큼 견해를 좁히기 힘든 주제도 없으니까. 당신의 포용력과 사고의 한계를 시험하는 생각보다 괜찮은 시간이 될지도?
10. 필름이 끊어질 때까지 술 마셔보기. 그리고 끊긴 친구 챙겨보기. 그렇다면 술은 적당히 마셔야만 한다는 결론을 뼈저리게 체험할 수 있을 거다.
11. 수업 땡땡이 치고 애인과 동물원 가보기. 한 두 번은 그렇게 놀아보는 것도 꽤 즐겁지. 유년시절 소풍의 기억을 떠올리며 하루 쯤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도 그때 아니면 못한다.
12. 동아리에 가입하라. 졸업 후에도 학교 놀러갈 구석이 생긴다. 하하하.
13. 일기 열심히 쓰기. 사람의 기억창고는 무한대지만 무엇이 들어있는지 찾아내는데엔 아직 한계가 있다. 기억하기 위해 기록하자. 즐거운 순간들이 얼마나 많은데. 뭘해도 예쁜 나이 아닌가.
14. 악기 혹은 운동 배우기. 악기나 운동, 하나는 제대로 할 줄 알아야 사회에서도 인정받는다. 뭐 때론 음치민정이 사랑받기도 하지만. ^^
15. 사랑 하되 후회 없이 않기. 그래서 그 사랑이 끝나더라도 조금만 슬퍼하기. 이건 더 설명안해도 알지?
16. 고백하기. 차일 것 두려워말라. 나중에 왜 말하지 않았을까, 라고 후회하는 것보단 낫다. 자로고 훌륭한 감독은 많이 져보면서 성장하는법이다. 그건 사랑도 마찬가지다.
17. 외국어 배우기. 토익 공부도 좋지만 회화 공부도 신경 쓰자. 언제 어디서든 빛을 발할지 모를 소중한 능력이니까. 참, 인사말과 고맙다는 말을 나라별로 외우는 것도 추천!
18. 삭발. 여자라서 삭발을 못한다면 삭발을 할 때의 마음을 상상하며 굳은 결심을 해봐라. 그렇지만 진짜 독한 마음이라면 삭발도 가능하다. 실제로 난 했으니까. 덕분에 학교와 집이 뒤집어졌지만. ^^;
19. 마라톤. 마라톤 대회에 참가 신청서를 내보자. 그리고 매일 밤 달리며 준비해보자. 힘들어도 참는 법 배우는 데엔 마라톤만큼 좋은 것도 없다. 
20. 연애? 좋다. 대신 피임은 확실히 하자.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울지도 말고.
21. 한 달에 제발 한권만이라도 책, 책, 책을 읽자. 이건 정말 하기 힘들다. 그러나 했을 때 남는 것은 정말 많다. 너무 많다.
22. 돈을 벌어보자. 부모님께 감사한 마음이 절로 생길 것이다. 또한 절제와 보람을 동시에 배우는 기적을 경험할 것이다. 물론 치사하고 더럽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도 간간히 있겠지만 그래도.
23. 매달 정기적으로 돈을 부어보자. 펀드도 좋고 적금도 좋다. 꾸준히 한다는 것 자체만으로 칭찬받을만한 일이다. 그렇게 해서 모은 돈은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을 하는데 써보자.

그리고 요건 서비스입니다. 언젠가 '다시 스무살이 된다면'이라는 가정 하에 쓴 글입니다.
재밌게 읽어보세요. ^^ http://blog.daum.net/dreamdiary/6706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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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지난 해 겨울 구세군 냄비 모금이 처음으로 목표액에 이르지 못했다는 뉴스를 기억하시나요? 


구세군 자선냄비가 한국에 들어온 시기는 1928년이라고 합니다. 그 이후로 우리는 80여 년간 매년 12월이면 딸랑딸랑하는 종소리와 함께 빛나던 빨간 자선냄비를 보게 됐지요. 그것은 해마다 12월이면 늘 볼 수 있는 익숙한 풍경 중 하나입니다.



올해 구세군이 세운 자선냄비 목표 모금액은 31억 원이었습니다. 그런데 모금 마감일이던 24일까지 목표액을 채우지 못했다는군요. 특히 지난 1일부터 20일까지 집계한 모금액은 그 절반을 조금 넘는 16억 5천만 원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구세군이 약속된 날짜까지 목표액에 이루지 못해 모금기간을 연장한 적은 무척 이례적인 일입니다. 사실 지금까지 이십 몇 년간 살아왔던 저로선, 단 한 번도 듣지 못한 소식이었죠. 그러나 다행히도 모금 실적이 저조해 연장하겠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모금액이 크게 늘어났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25일까지 모인 금액은 약 31억 2백만 원 정도 되었죠.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척 아쉬운 이야기를 들어야만 했습니다. 모금액이 부족한 이유에 대해 몇몇 지인들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거든요. 냄비에 넣는 모금액에는 소득공제 혜택이 없다. 그것이 그들이 기부하지 않는 이유였죠. 오히려 다른 단체에 계좌이체로 기부하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라나요. 그러고 보니 12월 초, 제가 후원하고 있는 세 단체에서 소득공제 영수증이 왔던 게 기억납니다. 요즘은 기부를 해도 그렇게 소득공제 혜택이 주어진다네요.


어쨌거나 소득공제 혜택도 없는데 왜 내냐는 말을 들었을 때 그것이 요즘 세태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씁쓸했습니다. 또 한편으론 너무 성급한 결론이 아니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고요. 그런데 얼마 전 일이 문득 떠오르더군요.  

그날 잠실역내에는 인근 백화점에서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기 위해, 모처럼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위해, 혹은 친구들과의 약속 때문에 오고 가는 사람들로 넘쳐났습니다. 그들의 발걸음은 경쾌했지만 바빴고 그 때문에 자선냄비 앞을 무심히 지나치게 만들었죠.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조심스레 다가가 모금을 한 뒤 시민들의 반응 때문에 속상하지 않냐고 물어봤습니다. 그러자 구세군 자선냄비 앞에 서 계시던 그 분께서는 웃으면서 제게 말했지요.


“사랑하는 마음을 이웃과 함께 나누고 전할 수 있는 넉넉한 마음만 있다면 그걸로 괜찮습니다. 서운한 생각보단 마음은 있어도 형편이 안돼서 못 내시는 분도 계시고 그 때문에 미안한 마음을 담고 가시는 분들은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지금 내지 않는다고 서운한 마음을 품고 있기 보단 여럿이 나누는 그 마음이 널리 퍼져, 언젠가는 함께 도울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을 거라는 생각만 갖습니다. 그리고 믿습니다.”


구세군에 따르면 올해 모금액은 결국 지난해보다 2천만 원 정도 늘어났다고 하네요. 그리고 태안 기름유출 피해지역 복구를 위한 추가 금액을 마련하기 위해 오는 31일까지 서울 일부지역에서 모금활동을 더 하겠다고 합니다.


12월 한 달 동안 구세군 자선냄비 앞에서 종을 흔들며 자원봉사 하셨던 분들, 그리고 주머니 푼돈을 꺼내 이웃사랑에 동참하셨던 시민들, 모두 모두 고맙습니다.


여러분들이 있기에 올 12월은 더욱 따뜻했던게 아닌지요. 다시 한 번 고맙고 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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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집에 가는 길, 오늘도 별 생각 없이 버스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제 눈을 반짝이게 만드는 멋진 풍경이 나타났습니다. 2007 빛의 축제 루체비스타였죠.

루체비스타(lucevista)는 빛을 뜻하는 이탈리아어 루체(luce)와 풍경, 전망을 뜻하는 비스타(vista)가 합쳐져 사랑과 나눔, 빛의 축제를 상징하는 루미나리에의 새로운 이름입니다.

우리가 그동안 알고 있었던 루미나리에의 본 고장은 이탈리아입니다. 지난 해 동계올림픽 취재를 위해 토리노에 갔던 당시 제 눈을 사로잡았던 루미나리에를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거리 전체가 루미나리에로 뒤덮여 있었거든요. 아름답게 반짝반짝 거렸던 토리노의 밤거리를 어찌 잊을 수 있을까요.

그때의 기분에 사로잡혀 캠코터로 정신없이 찍고 있을 때 이곳저곳에서 부산하게 움직이던 사람들을 발견했습니다. NGO ‘기아대책’에서 파견된 자원봉사자들이었지요.

그곳에서 만난 기아대책 김희정 팀장은 이번 루체비스타 행사 의의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루체비스타는 나눔을 통해 사랑을, 그리고 더 나아가 희망의 빛을 전해주기 위해 기획된 행사합니다. 이곳에서 모금된 기금은 굶주린 아이들과 결속 아이들의 난방비로 쓰입니다. 축제를 통해 나눔을 활성화하고 사랑을 널리기 알리기 위해 앞으로 한 달 동안 청계광장에서 진행됩니다.”

사람들의 호주머니에서 나온 작은 정성들이 희망의 빛이 될 수 있을까요? 오늘 제가 본 풍경은 분명 그렇다는 확신을 안겨줬습니다. 그래서 저도 작지만 정성이 담긴 기부금을 낸 뒤 촛불과 러브볼을 샀답니다.

기부금을 내면 동영상 속 시민들처럼 희망 메시지를 적을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희망 나무에 메시지를 달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네요. 1000원을 내면 아이들이 갖고 놀기 좋은 러브볼을 구입할 수 있고요 어린이 키에 맞춘 농구대도 있습니다. 짧은 시간 즐거운 추억을 만들기에는 더 없이 좋은 장소 같네요.

자원봉사자들은 매일 오후 5시에 나와 자정까지 봉사를 하다 간다고 합니다. 그저 봉사가 좋다는 그 마음 하나로 추운 날씨와 싸우며 청계천 광장을 지키고 있지요. 한 자원봉사자는 추위 때문에 발을 동동 구르면서도 “이렇게 돕는 것이 즐겁다”고 말했습니다. 바로 대학생 황정윤 씨였죠.

“처음 봉사를 해봤는데요, 하다 보니 많은 보람이 느껴져요. 춥지만 정성이 모이면 큰 힘이 될 수 있잖아요. 무엇보다 보람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아요. 그렇지만 사실 생각보다 반응이 그렇게 좋지는 않아요. 그래도 아이들이 엄마 손 잡고 와서 모금 해주시는 모습 보니까 기쁘고 좋아요.”

아직 입소문이 나지 않아 반응이 크지는 않다고 합니다. 하지만 서울광장이나 청계천광장을 찾은 많은 시민들이 도와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시민들의 기부금은 결속아동들의 난방비로 쓰입니다. 아이들이 부디 따뜻한 겨울을 보낼 수 있도록 많이들 도와주세요.

2007 빛의 축제 루체비스타는,

일정:12월 6일~ 1월 6일.
시간: 매일 저녁 6시~ 11시.
장소: 서울광장, 청계천 광장~모전교~광릉교~광교 구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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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말로만 듣던 연예인 비공개 결혼식에 가봤습니다.
정선희 씨와 안재환 씨의 결혼식이었죠.

결혼식이 열렸던 호텔에 도착하자 가장 먼저 보인 사람들은
다름 아닌 기자들이었습니다.
그 추운 날씨에 아침 일찍 모여 결혼식에 참석하는 연예인들을 기다리더군요.
차에서 연예인들이 내릴 때마다 정신없이 몰려들어 축하 멘트를 따기 위해 정신이 없었습니다.

비공개 결혼식임에도 수많은 언론사에서 결혼식장을 찾은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요.
대중의 인기를 누리고 사는 사람들의 결혼식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이 찾았고 어떻게 식이 진행됐는지 다들 궁금해할 것입니다.
언론사는 그런 대중의 관심과 궁금증을 해결해주기 위해 이렇게 고생하는 것이겠고요.
포탈싸이트나 연예정보프로그램에서 쉽게 보던 결혼 축하 메시지 영상들은

다 이런 고생 끝에 탄생하는 것이라는 사실도 새롭게 알게 됐습니다.

저도 늦게 도착한 터라 자리가 없어 구석에서 서서 지켜봤는데
무한도전 멤버들이나 손호영 씨, 데니안 씨, 길건 씨,

박정아 씨, 김민선 씨 등도 늦게 도착해 어쩔 수 없이 서서 지켜봐야했답니다.
아, 그리고 김제동 씨는 잠바에 모자를 푹 쓰고 오셔서 깜짝 놀랐답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결혼식인데 왜 정장을 안 입고 오셨어요?”라고 했다는. ^^;

식이 끝난 후에는 받은 쿠폰으로 식사를 한 뒤 집에 가기 위해 호텔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때까지 기자 및 리포터 분들은 집에 가지 못한 채 못 다한 인터뷰를 하고 있더군요.
밖에서 다들 족히 4시간은 떨면서 기다리고 있었던 듯합니다.
한 기자 분께 힘들지 않냐고 물어보자 “인터넷 매체에서는 이런 기사에 네티즌 접속률이 높다. 그런 구미에 맞춰가기 위해서는 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하더군요.

요즘 ‘인터넷 찌라시’라는 말들을 사람들은 쉽게 하지만
비공개 결혼식 취재를 위해 반나절 동안 밖에서 떨면서 고생하며 인터뷰를 하는
그들 모습을 보며 인터넷 언론사들 입장에서도 생각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선희 씨, 안재환 씨 결혼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백년해로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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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오랜만에 학교 행사에 놀러갔습니다. 여전했죠. 바람엔 잊고 있던 옛 향기가 실려 왔습니다. 갑자기 가슴이 뭉클해지더군요. 그리고 그 시절 나와 같은 눈빛을 하고 있던 후배들을 바라보며 그 옛날, 그러니까 스무살이라는 아주 예쁜 나이를 하고 있던 나를 떠올려봤습니다. 

제가 다니던 학교는 해마다 가을이면 자매 결연을 맺고 있던 다른 대학과 친선경기를 치르곤 합니다. 학교 운동부 선수들끼리의 시합이었는데, 그 시합을 하는 날이면 대부분의 학생들은 잠실주경기장을 찾아가 응원을 했습니다. 물론 꼭 경기장을 가야만 한다는 지침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날은 공식적으로 수업이 없는 날입니다. 그 때문에 여행을 가는 친구들이 있었는가 하면 반대로 ‘나완 상관 없는 이야기’라 말하며 도서관에 가는 이들도 있습니다. 때론 집에서 뒹굴 대며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도 있지요.

스무 살 가을, 저는 어디에 있었을까요? 대다수 학생들처럼 경기장에 있었답니다. 그곳에서 2만 학우들을 바라보며 열심히 응원했지요. ‘Young Tigers’-우리 말로는 새끼 호랑이 쯤으로 해석될 수 있는-라는 단어가 새겨진 유니폼을 입고서요.

'Young Tigers'는 제가 다니던 학교의 응원단 기수부 이름이었습니다. 기수부는 깃발을 가지고 응원하는 사람들로 모인 단체입니다. 그리고 오직 새내기만 할 수 있다는, 조금은 특별한 규칙이 있는 모임이기도 합니다. 대학에 입학한지 채 한 달도 안됐을 때 처음 그 단체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대학 2학년 생은 절대 할 수 없습니다, 라는 전제 조건은 이내 제 마음을 흔들어버리고 말았답니다.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다잖아. 그 마음 하나로 원서를 냈고 얼마 후 20대 1의 경쟁률을 뚫은, 억세게 운 좋은 아이들 대열에 합류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엔 마냥 좋았을 뿐이죠. 그 뒤에 펼쳐질 험난한 날들을 예상하지 못한 채로요.

기수부 훈련은 8월에 시작됐습니다. 아침 9시. 정확히 40명의 새내기 기수부원들은 모두 아침 9시까지 와야합니다. 1명이라도 오지 않으면 우리는 그 친구가 올 때까지 엎드려 뻗쳐를 해야만 합니다. 어느 날은 한 친구가 1시간이 지나도록 오지 않아 팔과 다리가 달달달 떨릴 때까지 기합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너무 힘들어 무릎을 땅에라도 대는 순간이면 “거기 너 뭐야!”라는 소리를 들어야만 했지요. 

응원동작을 배우면 신이라도 날 줄 알았건만 그것 역시 착각에 불과했습니다. 4시간 동안 쉬는 시간 없이,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채 응원만 했던 적도 있었거든요. 즐거울 것 같죠? 국민체조 같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수월한 동작도 뙤약볕 아래서 4시간 동안 반복해서 한다면, 제대로 버틸 사람은 아마 한 명도 없을 듯 합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기합은 선착순 달리기입니다. 그 벌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400m운동장을 전력으로 달린 다음 먼저 도착한 5명만이 엎드려 뻗쳐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5명에 들어가지 못한 나머지 사람들은 다시 전력 달리기를 합니다. 다시 다섯 순위에 안에 든 사람들은 엎드려 뻗쳐를 합니다. 나머지는 계속 달립니다. 어떤 기합인지 아시겠죠? 그런데 혹시 전력을 다해 400m를 반복해서 뛰다보면 어떻게 되는지 아시나요? 결국엔 수돗가로 달려갈 수밖에 없습니다. 저절로 구토가 나오기 때문이죠. 그것은 운동량이 부족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또 그만큼 ‘빡세기 때문에’ 감수해야만 하는 고통이기도 합니다.

그날, 그 기합을 받던 도중 왜 이런 고생을 사서하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 그만하자. 집에 돌아갈래. 그 생각에 점점 속도를 늦췄고 곧 대열에서 뒤쳐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운동장 한 켠에서 운동을 하고 있던 럭비부 선수들이 제게 달려와 “조금만 더 힘내요. 아셨죠? 파이팅!”라며 박수를 쳐주더군요. “할 수 있어요. 나중에 저희 시합할 때 열심히 응원해주셔야죠. 저희도 힘들게 운동하면서 이겨내고 있잖아요. 그러니 포기하지 말아요”라면서요.

고마운 마음에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모래 바람이 털썩이던 운동장 위로 눈물을 쏟으며 다시 달렸습니다. 힘든 기합을 모두 이겨내며 버틴 오기 때문이라도, 지금까지 쏟은 노력을 알아주는 럭비부 선수들 때문이라도, 무엇보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라도, 저는 끝까지 버티기로 다시 한 번 다짐했습니다.

물론 극한의 고통과 싸울 때마다, 제 마음 속에서는 ‘참자’와 ‘그만하자’. 이 두 마음 사이의 장렬한 전투가 벌이지곤 했습니다. 그리고 그 싸움 뒤에 남은 것은 피로와 굳은 살, 그리고 뭉친 근육들 뿐이었습니다. 그 해 8월과 9월은 그 기억들만 가득합니다.

그래도 시간은 흘러 흘러 기다리던 행사날이 돌아왔습니다. 그날, 저희에게 주어진 공간은 아주 작은 하얀 단상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응원단 현단원들에게는 저희와 달리 크고 멋진 중앙 무대가 주어졌지요. 그 뿐만 아닙니다. 응원복에서도 많은 차이가 있었습니다. 현단원들은 화려한 디자인의 개량한복을 입을 수 있었지만 저희에게 주어진 옷은 빨간색 후드 티셔츠와 검은색 반바지 뿐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경기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학생들의 시선은 당연히 중앙 단상 쪽으로 쏠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밑 작은 단상에서 응원하던 저희 모습을 보던 학생들은 거의 없었죠. 그래도 뭐가 좋았는지 참 즐겁게, 시종일관 웃으면서 응원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순간만큼은 그간 최선을 다해 노력한 제 자신에게 주어진 성과의 시간이었으니까요. 그러니 그저 즐기면 되는 것이었죠. 누가 나를 어떻게 보는지는 결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경기 종료 후에는 승리한 선수들이 운동장을 지나 단상까지 걸어갈 수 있도록 길을 만들어야했습니다. 그리고 그 길을 만들기 위해 우리는 깃발을 든 채 서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지요. 바로 깃발 무게였습니다. 깃발을 든지 10분 쯤 지났을까요. 팔 근육은 어느새 경련을 일으키며 떨기 시작했습니다. 어느새 이곳 저곳에서는 신음소리가 조금씩 들려왔습니다.

하지만 이만큼 힘들다, 라는 사실을 굳이 알리고 싶지 않습니다. 또 힘들었으니 이젠 칭찬해달라며 제 자신을 내세우고 싶다는 마음 역시 없습니다. 저는 그저 아무 탈 없이 행사가 진행됐으면 좋겠다는, 그러기 위해서라도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야한다는 생각만 있었을 뿐입니다.

행사가 끝난 후 제 얼굴을 덮은 것은 땀과 눈물이었습니다. 그간 흘렸던 땀방울에게 고마워, 마지막까지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긴 스스로에게 감사해, 저는 아무 말도 못한 채 펑펑 눈물을 흘리며 서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시간들이 그리워 다시 한번 눈물을 흘려야만 했습니다.

그때 처음 알게된 것 같습니다. 주목받는 것보다 뒤에서 묵묵히 제 몫을 하는 것이 더 어렵다는 사실과 그 순간을 참고 이겨냈을 때 비로소 빛이 난다는 진리, 그리고  매 순간 최선을 다했을 때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다는 교훈 말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스무살의 내가 깨달았던 그 모든 것들을 스무살의 후배들이 배운 듯 합니다. 그들은 그 옛날 제가 그랬듯 같은 순간에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으니까요. 물론 언젠가는 그 후배들 역시 저와 똑같은 생각을 하며 자신들의 후배들을 바라볼테지만요. 나도 너처럼 울었단다, 라면서요.

그래서 사람들은 종종 '인생은 아름답다'는 말을 하나 봅니다. 그런가봅니다.

잊지 말아요.
오늘 당신이 흘린 눈물을.
눈물은 최선을 다한 자만이 받을 수 있는 선물이니까요.
모두가 당신의 노고를 모른다 하여도
스스로 인정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당신은 충분히 아름다이 빛나는 사람이니까요.

그러니 우리, 잊지 말아요.
당신의 얼굴을 덮은 눈물 방울 방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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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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