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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레나의 꿈의 구장/Footballers

소년가장 김치우의 아름다운 뒷모습



FC서울 김치우가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훈련소에 입대했네요. 그래도 마음은 꽤나 뿌듯할 거 같아요. 생애 처음으로 K리그 우승 메달을 목에 걸었으니까요. 무엇보다 팀을 우승시킨 일등공신 중 하나였으니 기쁨의 깊이는 남달랐겠죠.

지난 1일 서귀포 월드컵경기장에서 벌어진 제주유나이티드와의 챔피언결정전 1차전. 후반 10분 교체되어 들어온 김치우는 종료 직전 오른발로 귀중한 동점골을 터뜨리며 승부를 원점으로 돌렸습니다. 김치우의 1차전 동점골이 없었다면 1-2로 패했을 테고 2차전에서 2-1로 이겼다하지만 각각 1승을 나눠가졌기에 승부차기가까지 갈 상황이었죠.

그랬기에 김치우의 동점골은 역전 결승골과 다름 없는 귀중한 골이었습니다. 그러나 김치우의 공은 이뿐만이 아닙니다. 지난 11월 7일 열린 K리그 정규리그 최종전에서도 김치우는 오른발로 극적 결승골을 성공시키며 팀을 정규리그 1위로 올려놓았지요.


이번 2차전에서 김치우는 선발로 출장했습니다. 후반 25분 이승렬과 교체돼 나가기까지 왕성한 활동량을 선보였는데요, 전반 10분 데얀의 골도 시작은 김치우의 발끝에서였답니다. 김치우의 슈팅이 김호준에게 맞고 나온 걸 다시 데얀이 성공시켰으니까요. ^^

사실 김치우에게 2010년은 잊고 싶은 시즌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남아공월드컵 엔트리에서 탈락했기 때문이죠. 첫 원정 16강 진출이라는 기적의 역사를 만들었던 대한민국 축구국가대표팀. 한때는 그들과 함께 뛰었던 김치우였지만 지난 여름에는 시청자의 입장으로 선수들의 모습을 지켜봐야했습니다.

많이 부러웠을테고 또 많이 아쉬웠을테고, 그래서 속이 쓰라렸을 겁니다.

이대로 시즌을 마감하며 훈련소에 들어갔다면 앞으로도 그의 축구인생에서 잊고 싶은 기억으로 남을 한해였겠죠. 그러나 김치우는 슬럼프를 극복했고 상처를 이겨냈습니다. ‘해결사’이자 ‘조력자’로서 묵묵히 제 몫 이상을 다해 뛰었고 우승이라는 두 글자를 팀에 안겨둔 채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입대를 하게 됐습니다.

우승 다음날 입대를 하였으니 그는 지금 까까머리를 하고선 훈련소에서 잠 못 드는 첫날 밤을 보내겠죠. 트레이드 마크인 긴 머리, 그래서 팬들에게선 치우 언니로 불렸던 그 머리를 어떻게 잘라냈을까. 스포츠머리는 또 얼마나 어색할까. 궁금한 마음도 큽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김치우를 참 아꼈습니다. 그가 해줬던 내 마음을 울렸던 그 아름다웠던 말들 때문이었죠. 벌써 4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김치우가 제게 해줬던 말들은 지금도 별처럼 제 가슴 속에 박혀있습니다.

“축구는 저에게 학교 같은 존재죠. 축구를 통해 모든 걸 배웠으니까요. 그러면서 어엿한 한 사람으로 자랄 수 있었어요. 열여섯 이후로 그랬던 것 같아요. 그때 엄마가 돌아가셨거든요. 세상을 다 잃은 것만 같았죠. 그렇지만 그 순간에도 내 옆에 있었던 건 축구공이었어요. 그래요.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건 바로 축구에요. 그리고 이젠 그 속에서 행복을 찾아요. 네, 지금은 행복합니다.”

국가대표에 뽑히면 할아버지 할머니가 가장 좋아할 거라면서 옅게 웃던 소년가장 김치우.

“엄마는 제가 중학교 3학년 때 돌아가셨어요. 암이었어요”라며 말하기 힘든 이야기를 제게 해줬다는 건, 그만큼 마음을 열고 저와의 인터뷰에 응해줬던 것이겠지요. 그래서 지금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아마 앞으로도 그렇겠지요.

“처음 축구를 시작했을 때 엄마가 많이 반대하셨어요. 어렸을 때 천식 때문에 몸이 약했거든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2년 동안이나 병원에 다녀야만 했어요. 항상 엄마가 돌봐주시며 신경 많이 써주셨죠. 중학교 입학 전에 비로소 천식이 나았어요. 그러면서 뛸 수 있게 됐죠. 뛸 때마다 숨이 찬다는 그 느낌이 정말로 좋다는 사실도 알게 됐어요. 요즘도 C.A라고 하나요? 5학년 때 특별활동을 해야 했는데 뛰는 게 좋아서 축구부에 들어갔어요. 정식 축구부는 아니었지만 마침 담당하셨던 선생님이 축구선수 출신이셨어요. 선생님께서 ‘풍생중학교에서 축구부원을 모집한다고 하니 한번 지원해봐라. 내가 볼 땐 잘될 것 같다’ 고 말씀하셨어요. 그러면서 제 축구인생도 시작된 거죠. 물론 엄마는 계속 반대하셨어요. 그 때문에 ‘만약 몸이 힘들면 그만해야겠다’ 고 생각했는데, 저도 제가 이렇게 끝까지 할 줄은 몰랐어요. 프로선수가 될 줄 몰랐고, 올스타전에 뽑히게 될 줄도 몰랐고요. 할머니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고요. 하늘나라에서 엄마가가 얼마나 좋아하겠냐면서요. 사실 엄마가 살아계실 때만해도 저는 게임 못 뛰는 선수였거든요. 어렵게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거예요. 엄마도 그때는 모르셨겠죠. 제가 이렇게 될 줄은요.”

그때만 해도 김치우는 팀 대표로 올스타전에 나간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참 설레인다고 제게 말했죠. 그랬던 김치우는 어느새 국가대표에도 이름을 올렸고 팀을 우승으로 이끌며 K리그 선수로서는 모두가 부러워하는 최고의 순간까지 맛보게 됐네요.

“보통 게임 뛰기 전에 국민의례를 하잖아요. 저는 그때마다 엄마를 생각하며 기도해요. 게임이 끝나면 다시 한 번 감사기도 드려요. 엄마 덕분에 무사히 게임 마쳤다고. 엄마는 지금의 저를 만들어주신 분이자 지금도 저를 이끌어주시는 분이에요. 이제는 만날 수 없는 사람이 됐지만 제 마음 속에는 항상 엄마가 계시니까 같이 뛰는 거라고 생각해요. 엄마도 보실 거예요. 제가 이렇게 열심히 뛰는 모습 말이에요. 그래서 아쉽다는 생각은 없어요. 오히려 기분 좋을 뿐이에요. 지금도 날 지켜보고 계시니까요.”

하늘나라에게 계신 어머니의 보살핌으로, 그 어머니의 평화를 빌던 기도의 힘으로 김치우는 지금 이 자리까지 왔습니다. 이제는 군인 김치우로 뛰어야할 날들이 주어졌지만 그 속에서도 우리에게 축구가 줄 수 있는 최고의 감동을 안겨줄 거라고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