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31일 밤 11시. “어서 오십시오”하는 운전기사의 목소리가 어쩐지 낯설다. 고개를 들어보니 여자다. 여자 버스운전기사를 보기는 또 처음이라 기사 바로 뒷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평소 가던 길이 아닌 광화문 바로 앞에서 안국동을 지나 대학로로 가는 길로 버스가 지나갔다. 알고보니 제야의 종 행사 때문에 광화문에서 종로 가는 모든 길에 차량통제가 이뤄졌다나.
문제는 운전기사 분께서 그 길이 초행이시라는 점. 옆 차선에 있던 운전기사에게 길을 물어 보기에 “그 길 제가 알아요”라는 말과 함께 나의 설명이 시작됐다. “직진이요.” “우회전이요.” “다시 직진이요.”
그러다 카운트다운이 시작됐고 나는 그렇게 버스 안에서 새해를 맞았다. 바람이 세찼기 때문일까. 버스 안은 추웠다. 길 설명도 열심히 해드렸는데 난방 좀 빵빵하게 해주시지. 괜히 심통이 나 MP3 볼륨을 높였다. 이어폰에선 영화 어거스트 러쉬, 엔딩 타이틀 'Someday'가 흐르고 있었다. 그래, 언젠가는.
그렇게 조용히 하루가 지날 줄 알았는데 새벽 3시 경 받은 전화 한 통은 결국 나를 울게 만들었다. 모르겠다. 더 가진 자의 여유일런지도. 무릇 인간관계란 더 많이 좋아하는 사람이 불리할 수밖에 없는 법 아니던가.
감정이 메말랐던 2007년은 지났고 나의 2008년 첫날은 이렇게 과잉으로 시작되고 말았다. 지인들은 자고 있냐는 문자에 답이 없었고 그냥 그렇게 잠이 들겠지 했는데 전화가 왔다. 철수였다.
철수는 그러니까 한달 전 밤문화 취재 때 알게 된, 일명 삐끼. 난 그 아이의 본명을 모른다. 그저 철수라는 다소 촌스러운 가명만 알 뿐. 알고 보니 철수라는 이름은 초등학교 교과서에 따온 이름이 아니란다. 내 머릿속의 지우개에서 정우성이 열연했던, 수진이가 한없이 사랑하고 또 사랑했던 남자, 그 ‘장철수’에서 갖고 온 이름이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 것만 같은 그 세계에서 녀석은 꽤나 로맨티스트였고 영화광이었다. 내 앞에서 온갖 영화의 대사를 줄줄 외는데, 그 자체만으로 내게 점수 만점을 딴 생각보다 멋진 녀석이다.
결국 난 아침 8시까지 철수와 통화를 했다. 자그마치 3시간동안. 처음엔 좋은 부모 밑에서 걱정 없이 자라 대학까지 다닌 철없는 아이의 투정이라며 나를 야단치던 녀석은 결국 내 이야기를 열심히 들어줬고 또 그러다 결국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 어쩌다 빚을 지고 결국 2탕씩 뛰며 돈을 벌어야하는지 남김없이 내게 알려주었다. 그 중에서 영화 속 수진이 같은 공주님과의, 지금은 모 방송국에서 AD생활을 하고 있는 옛 여자 친구와의 사랑 이야기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아이 철수야, 고마워. 두바이에서도 열심히 일 하렴.
2008년 첫날밤은 대략 그렇게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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