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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레나의 꿈의 구장/Footballers

러시아 고려인들의 희망 오범석











사까나시(Sacanage). 일본어처럼 들리지만 실지 포르투갈어로, 장난꾸러기 개구쟁이 등의 뜻을 갖고 있다. 오범석의 별명이기도 한 이 단어는 보통의 별칭이 그러하듯 그의 캐릭터와 더없이 잘 어울렸다. “안녕하세요. 범석이에요”라던 첫 인사를 들었을 순간에도, “저 와플 무지 좋아하는데, 먹으면서 해도 되죠?”라며 스스럼없이 말하던 모습을 보게 됐을 때도, 그의 별명이 생각나 가만히 고개를 끄덕끄덕 했었다. 그러나 “한국 사람과 이렇게 오래 이야기 나누기는 실로 오랜만”이라며 자신의 속내를 탈탈 털어놓던 이 청년은, 알고 보니 “꿈을 이룰 때까지 쉼 없이 달리겠다”며 자신을 향한 채찍질도 마다 않던 참으로 속 깊은 ‘프로’였다.


시베리아 바람과 만나다
유로2008에서 러시아대표팀을 맡고 있는 히딩크 감독을 필두로 최근 제니트를 UEFA컵 정상으로 이끈 아드보카트 감독과 그 휘하에 있는 김동진과 이호까지. 덕분에 러시아는 더 이상 ‘사회주의’ ‘붉은광장’ 등의 무거운 단어들만 연상되는 나라가 아니다. 그러나 가까워진 체감 거리와 달리 여전히 쉽게 소식을 접할 수 없는 ‘미지의 땅’인 것도 사실인지라 그곳 리그에서 뛰고 있는 오범석에게 던지고픈 질문들은 꽤나 많았다. 다행히도 그 역시 들려줄 이야기가 쌓였다며 주머니 속 꾹꾹 담아놓은 일화들을 하나씩 풀어놓기 시작했다.

“러시아 리그 ‘빅4’는 CSKA 모스크바, 스파르타크 모스크바, 로코모티브 모스크바, 제니트를 가리켜요. 사마라FC는 현재 6위라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 중위권 수준의 팀이죠. 입단 테스트는 거치지 않았어요. 이곳 감독님께서 제가 뛰는 경기를 DVD로 보셨는데 그 자리에서 바로 ‘오케이’하셨거든요. 제 공격력이 마음에 들었대요.”

그의 데뷔전은 꽤나 만족스러웠다. 동양에서 날아 온 ‘원더보이’는 3월15일 러시아 프리미어리그 개막전 텔렉 그로니즈와의 경기에서 ‘Man Of the Match’에 뽑히며 감독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몸소 증명했다.

“저희가 1-0으로 앞서고 있었는데 후반 19분에 상대 공격수가 골키퍼와 1-1 찬스를 만들어냈어요. 어떡하겠어요. 그냥 두면 골이니까 바로 태클로 끊었죠. 그 때문에 페널티킥을 내줬지만 다행히 실축했고 그 후 저희가 2골 더 넣으며 3-0으로 경기를 마감했어요. 그날 단장님이 다가와서 ‘네가 최고였다’며 엄지손가락을 들더라고요. 그런데 이번에는 감독님이 쓱 오시더니 ‘오범, 5포인트(주-러시아에서는 선수 평점 만점이 5점이다)’하셨어요. 라커룸에서도 선수들이 다들 잘했다고 칭찬해줘서 기분 좋았죠.”

그날 저녁 선수들은 호텔 근처 레스토랑에 모여 오범석의 성공적인 데뷔전와 개막전 승리를 자축하는 작은 모임을 가졌다.

“러시아 선수들이 ‘이걸 마셔야 진정 러시아에서 뛰는 선수라고 말할 수 있다’면서 보드카를 권하더라고요. 마셨냐고요? 당연하죠. 그 자리에서 못 마시겠다며 혹여 몸이라도 사린다면 다시는 동료로 인정해주지 않을 거라는 분위기였어요. 그래서 눈 딱 감고 한 잔 쭉 들이켰죠. 생각보다 독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그 자리에 있었어요(웃음).”

일어나라, 부딪혀라, 그리고 이겨내라
“이제 러시아 생활에는 어느 정도 익숙해졌지만 운동이 끝나면 언제나 혼자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죠. 아무리 둘러봐도 즐겁게 대화할 사람, 하루를 공유할 사람, 세끼 식사를 같이 할 사람 모두 없어요. 심심해요. 아니 외롭다는 표현이 더 맞겠네요. 가끔 가족이나 친구들에게서 전화가 오는데 그때마다 ‘여보세요’하는 제 목소리를 듣고 다들 깜짝 놀라곤 해요. 하도 말을 안 하고 있다 보니 목소리가 잔뜩 잠겨 있거든요.”

이렇듯 그가 모국어를 쓰는 시간은 하루에 몇 차례 지인들과 통화하는 순간이 유일한 듯 했다. 그래서 이방인들은 늘 외롭고 힘든가 보다. 오범석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근성이 없었다면 버텨내기 힘들었을 거예요”라는 말과 함께.

“힘들어도 약한 모습 보이면 절대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넘어질 때마다 ‘아, 역시 동양인들은 작을 뿐 아니라 약하기까지 하구나’라고 생각하며 얕볼까봐 외려 더 강한 모습을 보여주려고 해요. 심지어 연습 도중 넘어져도 금세 일어나죠. 한번은 골키퍼 코치가 ‘참 신기하다. 왜 항상 그렇게 빨리 일어나냐’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아프지 않으니 빨리 일어나는 것 아니냐’고 되레 반문했죠. 여기서 제 별명이 뭔지 아세요? ‘개(собака, 싸바까)’에요. 사냥개처럼 한번 물면 안 놓는다고 붙여진 별명이에요. 그 정도로 다부지게 하고 있습니다.”
얼핏 악전고투하고 있다는 듯이 비춰질 수도 있겠으나 오범석에게도 뿌듯한 순간은 있다. 사마라 시내를 나설 때면 자신을 알아보는 팬들이 부쩍 늘었기 때문이다. 얼굴 가득 번지는 웃음을 보니 그도 시나브로 쌓여가는 반응이 꽤나 만족스러운 듯 보였다.

“한번은 러시아 선수들과 회를 먹으러 갔는데 현지 종업원이 ‘오범석?’하며 절 알아보더라고요. 사실 러시아에서도 동양인들에 대한 인종차별은 심한 편이에요. 특히 형편이 어려운 고려인들이 주 타깃이죠. 저도 몇 번 겪었어요. 식당에 가면 종업원들이 주문을 제대로 안 받는 등 대놓고 무시하곤 했는데 이제는 식당에서 먼저 절 알아보니 참 감회가 새롭더라고요. 요즘은 거리에서 절 알아보고 제 이름을 부르며 싸인 받는 사람들도 생겼어요. 그럴 때마다 기분 좋죠. 그렇지만 앞으로 더 잘해야겠다는 일종의 사명감을 더 크게 느껴요.”

확실히 축구는 국경과 인종을 초월한 무언의 힘을 갖고 있다. 비단 언어가 통하지 않는다할지라도 선수가 전하는 메시지는 공과 함께 움직이는 몸놀림만으로 충분하다. 지금, 오범석이 어깨 가득 책임의식을 느끼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처음 러시아에서 도착했을 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김동진을 안다. 좋은 선수다. 다른 한국 선수들의 수준도 비슷한가?’였어요. 그때 깨달았죠. 제가 실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저 혼자 감당하고 끝낼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요. 저 때문에 다른 한국 선수들의 수준까지 폄하될 수도 있잖아요. 반면 제가 잘한다면 한국 선수들에 대한 좋은 이미지가 형성될지도 모를 일이죠. 만약 그렇게 된다면 앞으로 후배들이 러시아에 진출하기도 좀 더 수월해질 테고 더 많은 길이 열릴 수 있을 거예요.”

러시아에 오기까지 크고 작은 부딪힘 속에 있던 오범석이기에 이 같은 헤아림은 당연한 마음인지도 몰랐다. 동시에 지금이 바로 이적과 관련한 가슴앓이를 물어볼 적절한 시간이라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지난 2월 사라마FC 동계훈련에 참가했던 오범석은 월드컵3차예선 투르크메니스탄전을 앞두고 허정무호에 추가 발탁되며 급히 귀국했다. 당시 공항에는 제법 많은 취재진이 몰렸다. 포항과 사마라FC 사이에서 의견을 좁히지 못한 채 이적 난항을 겪고 있던 오범석의 입장을 듣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오범석은 극도로 말을 아꼈고 속사정을 들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로부터 여러 날이 지났고 이제는 그도 원하던 바를 이뤄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적과 관련된 질문은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고맙게도 오범석은 “처음으로 털어 놓는 이야기”라며 먼저 말문을 열었다.

“처음 축구를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제 꿈은 오로지 ‘해외진출’이었습니다. 바이아웃 조항이 없었다면 포항과 계약하지 않았겠죠. 그 부분은 포항과 합의가 됐기 때문에 계약서에 넣은 것입니다. 시즌이 끝나고 러시아에서 접촉이 들어와 구단에 문의했는데 난데없이 벌써 성남과 얘기가 다 끝났다고 하더라고요. 황당했죠. 그 뒤 여러 말을 들었어요. 몸값 올리려고 저런다는 이야기도 들었고 심지어 포항 팬들에게선 ‘배신자’라는 소리까지 들었고요. 이젠 지나간 일이지만 여전히 그런 점들은 많이 아쉽고 속상해요. 전 절대로 포항을 배신하거나 완전히 저버린 게 아닌, 그저 선수로서 오랫동안 품어온 꿈을 이루고자 잠시 떠난 거예요. 무엇보다 포항은 저를 키워준 곳이기에 마지막 인사는 그곳에서 꼭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너무 멀어진 것만 같아요. 마음이 멀어지면 다시 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아울러 그는 “지금에 와서 고백하지만 지난 겨울 ‘많은 것을 포기하게 되더라도 러시아에 가겠습니다’던 발언 뒤에는 ‘K리그에서 더 이상 뛰지 못하게 되더라도 꼭 가겠습니다’라는 속뜻이 담겨 있었다”고 했다. 기실 임의탈퇴 이야기까지 나왔을 때, 일순 고민은 있었으나 해외진출을 이룰 수만 있다면 기꺼이 감당하겠다고 다짐한 오범석이다. 그만큼 간절했어요.” 그 짧은 한 마디에 모든 이유가 담겨 있었다.

꿈을 이룰 때까지, 돌아가지 않겠다
“선수로 있는 동안만큼은 축구와 관련된 것들을 최대한 많이 배우고 또 경험하고 싶어요. 지금은 러시아에서 있지만 몇 년 안에 꼭 네덜란드 잉글랜드 등 서유럽 무대로 당당히 진출하고 싶어요. 당장은 큰 목표로 비춰질 수도 있겠지만 천천히 계단을 밟고 있는 중이므로 언젠가는 꼭 이룰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물론 아직은 절반도 채 못 걸었지만요.”

오범석은 “몸과 마음이 힘들다는 이유로 포기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며 거듭 강조했다.
“원래 제가 아침잠이 상당히 많은 편이에요. 어머니가 아침마다 아무리 세게 흔들어도 잘 못 일어나는 아이였죠. 그렇지만 초등학교 5학년 때 처음 축구를 시작한 이후로는 아무리 졸려도 새벽 6시면 벌떡 일어나 아침운동을 하러 나갔어요.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잠을 더 청한 적은 한 번도 없었죠. 그렇게 지금까지 마음먹은 것이 있다면 늘 실천으로 옮기며 살아왔어요. 지금도 그래요. 목표를 이룰 때까지는 절대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치열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법한 지난날의 단련은 이렇듯 스스로를 향한 믿음을 키워냈다. 그 시간들 속에서 켜켜이 쌓인 믿음이 없었다면 “러시아에서 뛰는 게 즐거워요. 꿈의 첫발을 내딛었으니까요”라고 말하는 오늘의 오범석 역시 없었을 것이다.

“맞아요. 전 제가 가진 능력을 믿습니다. 언젠가 (설)기현이 형이 벨기에를 거쳐 잉글랜드에 입성하기까지 많이 힘들었기 때문에 후배들에게는 자신과 같은 길을 추천해주고 싶지 않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그렇지만 그렇게 말한 형도 결국 인내한 덕분에 프리미어리그에 진출하며 결실을 맺었잖아요. 저라고 왜 못하겠어요. 아무리 힘들어도 견딜 겁니다. 게다가 아직 전 제 한계조차 느껴보지 못했는걸요. 갈 길이 멀기만 한데 벌써부터 벽에 도달할 수는 없는 법이죠.”

24살이라는 나이가 도통 어울리지 않을 정도의 두둑한 배짱이 마음에 들었고 진지한 이야기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여유가 눈에 찼다. 모쪼록 계단을 밟고 가는 그 걸음이 부디 멈춤 없이 이어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