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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레나의 꿈의 구장/Footballers

FC서울 슈퍼조커 이상협을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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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을 수 없던 그 미소
2007년 7월20일 저녁 8시 상암월드컵경기장. 63,000 여명의 관중들이 모였기 때문일까요? 피부와 폐에 닿는 공기들은 무척이나 끈적거렸습니다. 양손으로 열심히 손부채질을 했지만서도 더위는 좀처럼 가시지 않더군요. 이미 땅거미는 짙게 깔렸는데도 말이죠. 

그때 갑자기 “와~”하는 함성이 들렸습니다. 전광판에 선수들의 모습이 잡혔기 때문이죠. 에스코트 어린이의 손을 잡은 FC서울과 맨체스터Utd. 선수들이 경기장에 들어서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제 시선은 유독 한 선수에게만 쏠렸습니다. 이렇게 이야기만 하고 끝낸다면 대부분 ‘맨유 선수 중 하나겠지’라고 추측할지 모릅니다. 맨유 선수들이야말로 평소 보기 힘든 세계적인 선수들이니까요. 저와 친한 지인들은 “혹시 비디치 아니야?”라고 물을지도 모릅니다. 네, 저는 그 선수를 무척이나 좋아하거든요.

그러나 제 시선을 사로잡은 선수는 따로 있었습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다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그는 그렇게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가며 경기장을 가득 메운 관중들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긴장과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으로 말이죠.

그 주인공은 다름아닌 이상협 선수였습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신나게 만든 것일까요? 맨체스터Utd.라는 명문팀과의 경기에 선발 출장했다는 사실이 그를 춤추게 만들 것일까요? 빈 좌석을 찾아볼 수 없는 상암경기장을 처음 봤기 때문일까요? 그래서 경기장 곳곳에서 터지던 플래시보다 더 반짝이는 눈빛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러나 사실 FC서울 선수들에게 관중들로 가득 찬 경기장 모습은 낯선 풍경이 아닙니다. FC서울은 그해 4월8일 수원전에서 이미 프로축구 최다 관중 기록을 세운 터였습니다. K-리그 한 경기를 보기 위해 찾은 55,397명의 관중이라.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정말 대단한 기록이었죠.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이상협 선수는 그날 뛰지 못했답니다. 2군에 있었기 때문이죠. 사실 그는 2006년 가을 무릎 연골이 찢어지는 부상을 입고 말았습니다. 그 때문에 2007년 초 무릎 수술을 해야만 했죠. 재활을 하는 데에만 자그마치 3달이라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덕분에 터키 전지훈련에도 따라가지 못했고요. 축구화도 3월이 돼서야 겨우 신어볼 수 있었답니다. 

 “그 경기요? 안 봤어요. 보기 싫었어요. 홈 경기장에서 많은 관중들 앞에서 뛰는 건 모든 선수들의 꿈이잖아요. 보면 더 뛰고 싶은 생각이 들 것 같아서 일부러 안 봤어요.”

그런데 말이죠, 수만 명의 관중들 앞에서 뛰고 싶다던 그 꿈은 생각보다 빨리 이뤄졌답니다. 3개월 전, 경기를 보지 않겠다며 시무룩한 얼굴로 텔레비전 전원을 꺼버린 그때의 이상협 선수는 어디로 간 걸까요? 7월20일, 그날 그 자리에는 얼굴 한 가득 행복한 웃음꽃이 만개한 이상협 선수만 있었을 뿐입니다.

“저희 팀이 14개 구단 중에서 제일 인기 많잖아요. 항상 많은 사람들 앞에서 뛸 수 있어서 좋아요. 그 중에서도 홈 경기장에서 뛸 때가 제일 좋아요. 그런데 오늘처럼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뛰었다는 건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너무 좋아요.”

경기가 끝난 후, 스물 두 살의 이상협 선수는 열두 살 소년 이상협으로 돌아가 웃었습니다. 좀처럼 잊기 힘든 웃음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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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협이 누구에요?
 
‘이상협’이라는 이름을 처음 알게 된 3년 전 그때가 생각납니다. 2004년 10월 말레이시아에서 열렸던 아시아 청소년 대회 취재를 마치고 비행기에 올라탔을 때였습니다. 비행기에서 만났던 이강진 선수는 제게 이렇게 말했죠. 

“제 친구 중에 이상협이라고 있거든요. 걔도 참 잘하는 친구인데… 와서 같이 뛰었다면 좋았을 것 같아요. 우승 기쁨도 함께 누렸을 텐데 말이에요.”

누군지 모르겠다고 하자 이강진 선수는 “17세 청소년대표팀에서 함께 뛰었다”며 “정말 잘하는 친구”라고 아낌없이 칭찬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강진 선수의 말대로 이상협 선수는 17세 청소년대표팀에서 잘 나가는 에이스 중 하나였답니다. 어디 한번 그의 출전 기록들을 살펴볼까요? 2003년 1월 러시아에서 열렸던 U-17 친선대회에서 이상협 선수는 3게임이나 연속으로 골을 성공시켰습니다. 팀 내 최다 득점자였죠. 같은 해 4월 이탈리아에서 열렸던 친선대회와 6월에 열린 부산컵에서는 각각 2골을 기록하며 자신의 입지를 다졌습니다. 덕분에 핀란드에서 열린 U-17 청소년 월드컵 예선 3경기 모두를 뛸 수 있었죠.   

그렇지만 그도 선수입니다. 그리고 시련 없는 선수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네 인생이 그렇듯 말입니다. 그에게 다가온 첫 번째 시련은 바로 19세 청소년대표팀 탈락이었습니다. 그 시련이 주는 아픔과 좌절의 쓴맛 앞에서 고개 숙이고 있을 때 생은 또다른 시작이라는 초대장을 보냈습니다. 그의 실력을 알아본 FC서울이 입단계약서를 내밀었거든요.

그 나이 또래 축구 소년들의 꿈은 다 그렇겠죠. 대표팀 발탁, 그리고 프로 입단. 그 큰 두 개의 꿈 중 하나를 이뤘으니 아주 조금은 숨을 돌렸을 듯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찰나의 시간에 불과했습니다. 프로생활은 그에게 결코 녹록치만은 않았으니까요.  

서서히 프로에 녹아들다
“게임 못 뛰는 게 제일 힘들었죠. 고등학교 때만해도 제가 제일 잘한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막상 프로에 와보니까 그게 아니더라고요. 저보다 나이 어린 애들보다 훨씬 못하는 거예요. ‘왜 안 되지?’, ‘왜 안 될까?’하면서 고민했어요. 그러다 나중에는 2군 게임도 못 뛰게 됐어요. 정말 너무 많이 힘들었죠.”


그가 입단 첫해를 어떻게 보냈는지는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굳이 아픈 기억을 들춰가며 물어보고 싶은 마음 또한 없습니다. 그저 제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들을 떠올려보며 ‘이 정도 쯤 힘들었겠지’라고 추측할 뿐입니다.

제가 기억하는 그의 첫 모습은 입단 1년 후인 2006년 7월 19일 울산전입니다. 그는 후반 15분 정조국 선수와 교체되며 데뷔전을 치렀습니다. 그리고 2분 쯤 뒤에 첫 번 째 슈팅을 날렸죠. 그것은 K-리그 무대에서 그가 처음 날린 슈팅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슈팅은 그대로 골로 연결이 됐습니다. 아, 가슴 시린 데뷔골이었습니다.

결국 그의 데뷔골은 그날의 결승골이 돼 FC서울에게 승리를 안겨줬죠. 그 모습을 바라보며 ‘이럴 때 신데렐라라는 표현을 쓰는가 보다’라며 고개를 끄덕였던 기억이 납니다. 비록 그해 시즌, 무릎 부상으로 비록 2경기밖에 뛰지 못했지만 그는 이렇게 단 2경기만으로 자신의 이름을 모두에게 각인시켰습니다.

누군가는 그 모든 것들이 그의 강한 의지 때문에 가능했다고 말합니다. 지지 않으려는 그 마음이 쓰러질 것만 같은 순간마다 그를 일으켜 세운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네, 모두 맞는 말입니다. 언젠가 이상협 선수도 경기장에서 그와 비슷한 말을 했거든요.
 “게임에 들어가면요, 죽기 살기로 뛰어요. 지는 게 싫거든요. 뛰면서도 절대 진다는 생각은 안 해요. 그래서 골 먹히면 너무 화가 나요.”

그를 다시 만난 것은 2007년 4월 15일 울산전입니다. 박주영 선수와 이천수 선수가 만난다며 상암벌 빅 매치라고 떠들었지만 소문난 잔치가 그러하듯 경기는 예상과 달리 지루했습니다. 그리고 이상협 선수는 바로 그날 1군 복귀 신고식을 치렀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아쉽게도 그의 시즌 첫 경기는 0-0 무승부에 묻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못내 억울했나봅니다. 그래서 다섯 경기 만에 강렬한 모습으로 다시 나타났나봅니다. 혹시 그해 5월2일 전북전, 그날을 기억하시나요? 잘 기억이 안 난다고 말씀하시는 분들께는 조금 더 힌트를 드리겠습니다. 이상협 선수가 누드 세레모니를 선보였던 날이라고 하면 기억에 도움이 될까요? ^^

얼마나 기뻤으면 유니폼을 벗어 던지며 서포터스에게 달려갔을까요? 올 시즌 터진 자신의 첫번째 골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넘치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나봅니다. 그러나 그 골은 비단 이상협 선수 본인 뿐 아니라 모두에게 큰 의미를 가진 골이었습니다. 바로 FC서울의 6경기 연속 무득점 행진을 끊어버린 골이었으니까요.

후에 그에게 농담조로 혹시 의도한 세레모니가 아니냐고 물어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상협 선수의 대답은 “그렇다”였습니다.

“경기 전에 골을 넣으면 어떤 세레모니를 할까 종종 생각해요. 재미있는 세레모니를 보여주면 팬들이 좋아하잖아요. 프로 선수니까 경기장을 찾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줘야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면서 제 존재도 각인시키고… 결국 모두에게 좋은 것 아니겠어요? (웃음).”

그 때문에 출전선수 명단에 이상협 선수의 이름을 발견할 때면 늘 알 수 없는 기대감에 사로잡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오늘은 또 어떤 세레모니로 우리를 즐겁게 해줄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죠. 그리고 그는 그 기대에 부흥하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뜁니다. 그것이야말로 프로선수 이상협의 꿈이니까요.

끝나지 않을 그의 꿈
현재 FC서울은 박주영 선수의 이적과 김은중, 정조국 등 주전 공격수들의 부상으로 최전방을 책임질 선수들이 부족한 상황입니다. 데얀 선수가 제 몫을 해주고 있다고는 하다만 혼자는 힘든 법입니다. 신예 이승렬 선수는 데뷔 첫 시즌인지라 아직은 경험이 부족하고요. 그런 현실 속에서 슈퍼 조커로 등장한 사람이 바로 이상협 선수입니다.

그는 어제 열린, 리그 1위 자리를 놓고 다툰 성남과의 일대혈전에서 종료 3분 전 극적인 결승골을 터뜨렸습니다. 실로 마법같은 등장이었지요. 왼쪽 측면에서 문전 앞을 향해 달려들던 이상협 선수의 움직임을 삽식간에 읽은 이청용 선수의 넓은 시야와 정확한 크로스도 대단했지만, 무엇보다 단 한번의 터치로 골을 성공시킨 이상협 선수의 결정력을 칭찬하지 않고 넘어갈 수는 없겠지요.

그에게 물었습니다."요즘 기분 좋죠? 게임도 많이 뛰고 골도 많이 넣고 무척 행복할 것 같아요." 이상협 선수는 땀으로 젖은 머리를 털며 “힘든 걸요”라고 대답하더군요. 그러더니 이내 씩 웃었습니다. 물론 애써 짓는 그런 웃음은 아니었답니다. 저는 그 웃음의 의미를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몸은 조금 피곤하도 힘들지라도 이렇게 뛰는 지금이 좋다. 그렇게 말이지요.  

언젠가는 17세 때 입었던 대표 유니폼을 다시 한 번 입어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가끔은 팬 투표로 올스타전에 선발돼 뛰는 모습을 상상해보곤 하죠. 수원과 만날 때엔 보란 듯이 코를 납작하게 눌러주고 싶습니다. 지는 것은 정말 싫으니까요. 경기가 없는 날이면 자신을 알아보는 팬들과도 우연히 만나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은퇴 후에도 기억해주는 사람들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모든 것들은 지금 그가 꾸는 꿈입니다. 그리고 숨 쉬며 달리는 이 시간동안만큼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꿈들입니다.

그 목록 속 하나의 꿈이 이뤄지면 또 하나의 꿈이 뭉게뭉게 피어오르겠지요. 그렇게 조금씩 자라며 축구선수 이상협이 되는 것이겠지요.

앞으로도 그의 꿈이 영원하길 바랍니다. 꼭 그랬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