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FC에는 월드컵을 빛낸 스타들이 많이 있습니다. 최순호 감독이 90년 이탈리아월드컵에서 터뜨린 동점골은 영국 일간지 타임스가 선정한 역대 월드컵 베스트골 50위 중 29에 뽑힌 바 있죠.

최진철 코치는 2002년과 2006년 대한민국 대표팀의 수비의 핵으로 활약했습니다. 늦은 나이에 대표 선수가 됐지만, 이렇게 훌륭한 선수를 왜 이제야 발견했냐며 모두의 박수를 받았고 2006년 스위스전에서 보여준 붕대 투혼은 모두를 눈물흘리게 만들었죠.

이을용 선수는 또 어떤가요. 2002년 미국전에서 PK를 실축했지만 3-4위전에서 보란듯이 프리킥골을 터뜨리며 든든한 ‘믿을필더’로 활약했죠.

대한민국 대표팀의 첫 경기 그리스전을 앞두고 최순호 감독님, 최진철 코치, 이을용 선수 등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월드컵을 먼저 치른 국가대표 선배로서 우리 대한민국 대표팀이 어떤 경기를 치렀으면 좋겠냐고 물어봤더니 세 분 모두 “꼭 이겨야한다”고 강조하더군요. 승리를 바라는 마음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죠.

한데 세 분은 단순히 이겼으면 좋겠다가 아니었어요. 첫 단추를 어렵게 뀄을 때 2번째, 3번째 경기를 풀어나가기 어렵기 때문에 무조건 이겨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뛰어야한다고 하셨습니다.

사실 중요한 경기를 수없이 많이 뛰었더라도 월드컵 무대는 다릅니다. 우리가 상상하지 못하는 긴장과 부담이 선수들의 마음을 지배한다고 합니다. 문제는 바로 여기서 시작한다고 하네요.

최진철 코치는 말씀하셨습니다. 축구 인프라가 발전하고 훌륭한 축구 유전자를 가진 선수들이 일찍부터 좋은 환경에서 축구를 시작했기 때문에 예전과 달리 우리나라 선수들의 실력도 급성장했다고요. 따라서 유럽팀이라 할지라도 충분히 대등한 경기를 펼칠 수 있다고 말입니다.

문제는 잘할 수 있을까? 라는 의구심, 잘해야할텐데, 하는 부담, 그리고 그로 인한 긴장에서 출발한다고 했습니다. 그럴 때 선수들은 약속된 플레이도 잘 나오지 않고 자기 자리를 못찾고 헤매거나, 수동적인 플레이를 하기 쉽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최진철 코치도 첫 번째 폴란드전이 다른 나라도 아닌 우리나라, 그러니까 ‘홈’에서 열린 경기였음에도, 경기장 가득 붉은악마로 가득 차 응원 속에서 뛰었음에도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고 합니다.

물론 지금의 선수들은 W세대인지라 이기고 지는 것보다 경기 자체를 즐기는 마음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고 하지만 그래도 월드컵은 선수라면 모두가 생각하는 ‘꿈의 무대’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 중압감은 강심장이라 할지라도 버티기가 힘들다는 것, 적어도 첫 번째 경기에서만큼은 그렇다는 것. 그것이 월드컵을 먼저 치른 ‘선배’들의 중론이었습니다.

그간 우리나라는 늘 첫 경기를 어렵게 풀었고 그래서 늘 ‘경우의 수’를 생각하게 만들었죠. 사실 2002년 월드컵과 2006년 월드컵에서 -비록 2006년은 16강 진출에 실패했지만 1승 1무 1패라는 어웨이에서 열린 월드컵 가운데 가장 좋은 성적을 거뒀었죠-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첫 경기에서 승리를 거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선 첫경기에서 거둔 승점 3점은 그 이상의 값어치를 갖고 있다고 입을 모아 말씀하셨습니다. 그로 인해 2번째 3번째 경기를 수월하게 풀어나갈 수 있고 그로 인해 다른 팀을 압박할 수 있다는 게 바로 최순호 감독, 최진철 코치, 이을용 선수가 공통적으로 내린 결론이었습니다.

단순히 이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제게, 세 분과의 대화는 선수들이 첫경기를 앞두고 어떤 상태인지 한번 더 선수들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었던 좋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동안은 그저 막연히 짐작만 했는데 말이죠.

다음 포스팅에서는 최진철 코치가 2002년과 2006년 월드컵 당시를 회고하며 제가 이야기해주신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월드컵편”을 올려드리겠습니다. 덧붙이자면 처음에 코치님이 해주신 월드컵 이야기를 듣고 저는 정말 놀랬답니다. 기대되시죠?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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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황선홍 밴드로 요즘 인기몰이 중이신 최진철 코치. 무뚝뚝한 인상과 말 없는, 그러나 화가 날 때는 확 달아올라 그 화를 쉽게 잘 참지 못하는 다혈질 성격 때문에 제게는 늘 어려운 코치님이십니다.

그래서 처음 황선홍 밴드 CF가 나왔을 때, 헤드폰을 끼고 “오 대한민국~ 승리의 함성~”을 외치는 첫 번째 CF를 봤을 때만해도 평소 코치님 모습 그대로인 듯하여 제게는 큰 감흥이 오지 않은 그런 CF였습니다.

그런데 2탄이 곧 나왔어요. 발로 손을 두 번 올렸다 내린 뒤, 큰 박수를 치는 동작이 나오는 CF였는데요, 그 CF가 나온 뒤에 코치님과 단둘이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때 코치님께서 “음치인 줄 알았는데 박치에다 몸치였다”며 CF를 찍던 당시의 고통을 몸소 재연하시더라고요. 처음에 그 동작을 배우는데 너무 어려웠다면서 계속해서 엉거주춤하는 자세로 배웠다고 하시는데, 그 모습이 절로 상상해 순간 웃음이 나왔습니다.

동작을 익힌 다음에는 CF촬영에 들어갔는데 반나절 동안 같은 동작을 반복하며 찍었다고 하네요. 찍고 난 코치님의 소감은...?

“팔이랑 다리가 아고고 너무 아파 죽는 줄 알았어.”

아무래도 다리를 들어 올리고 큰 박수를 반복해서 치는 동작이다 보니 팔과 다리의 움직임이 컸죠. 축구를 할 때 쓰는 근육과는 다른 근육을 쓰다 보니 힘들었나봅니다.

그러나 코치님은 이내 씩 웃으면서 “그래도 축구만 하다 보니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서 재미있게 찍었지”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로부터 며칠 뒤 강원FC 선수단은 K-리그 심판 가이드라인 교육을 받았습니다. K-리그 경기 영상을 심판들과 같이 보고 파울과 반칙, 경고 및 퇴장에 대한 심판들의 지침과 선수들이 지켜야할 룰에 대해 배웠는데, 교육이 끝나고 질의 응답 시간이 있었죠.

한데 선수들은 저녁 늦게까지 심판 교육을 받은 터라 꽤나 피곤했어요. 빨리 숙소로 돌아가 쉬고 싶은데 코치님들의 질문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끝났겠지, 하는데 최진철 코치님이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질문도 길었는데요, 마침 그때 앞자리에 앉아있던 어린 선수가 앉은 자리에서 다리와 손을 올렸다 내렸다하면서 CF 속 최진철 코치님을 흉내내더라고요. 그때 와, 하며 선수들이 웃었는데 코치님은 왜 선수들이 웃는지 그 이유를 아마도 몰랐을 겁니다. 물론 저도 웃음을 참지 못한 1인이었죠. ^^

그리고 얼마 전. 드디어 사건이 터졌습니다.

프로축구 2군리그인 R리그 경기가 열린 강릉축구공원. 오후 3시에 열리는 경기라 꽤나 더웠습니다. 오후 1시 30분부터 나와 준비를 한 터라 더위에 지쳤고, 짜증도 나기 시작했죠.

그런데 볼보이 자원봉사를 하게 된 한 학생이 최진철 코치님이 지나가자 CF속 춤 동작을 흉내내더라고요. 경기가 나가기 위해 웜업을 하는 시간은 다소 진지한 시간인데, 그 모습을 보고 선수들이 순간 웃고 말았습니다.

갑자기 최진철 코치님이 “학생, 이리와 봐!”하며 버럭 소리를 지르시더라고요.

순간 큭큭 웃던 선수들의 얼굴에선 긴장이 감돌았고, 문제의 그 학생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그 자리에 얼음처럼 서있었습니다.

“이리와 보라는 소리 안 들려!”

최진철 코치님이 다시 고함을 치셨습니다.

그 학생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표정으로 코치님 앞에 쭈뼛쭈뼛 걸어갔죠.

“아까 한 거 뭐야? 엉? 내가 보는 앞에서 다시 해봐!”

학생이 가만히 있자 화가 잔뜩 난 표정으로 “내 말 안 들려? 다시 해보라고!”하셨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코치님의 화가 풀리지 않을 것 같았는지 학생은 천천히 아까 했던 동작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다리를 살짝 올렸다 내렸고 그때마다 손도 함께 올라갔다 내려갔죠.

한참동안 그 동작을 보시던 최진철 코치님은 여전히 화가 난 표정을 말씀하셨습니다.

“동작이 그게 아니잖아. 마지막에 큰 박수를 딱딱 쳐줘야한다고. 이렇게.”

그러시더니 큰 박수를 치시며 “알겠어? 이렇게!하시더라고요.

이번에도 웃음이 나왔지만 이대로 큰 소리로 웃었다간 경기에 임하는 자세가 이게 뭐냐며 야단을 맞을 것 같아 입을 가린 채 힘들게, 아주 힘들게 웃음을 참았답니다.

그날 경기가 끝나고 저와 선수들은 말했죠.

역시 최진철 코치님은 국가대표 출신이라 그런지 달라. 대인배야, 라고요.

월드컵에서 보여줬던 그 모습 그대로, 은퇴 뒤에도 여전히 멋진 최진철 코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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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지난 한일전 2-0 통쾌한 승리로 모두의 관심은 박지성에게 쏠려있습니다. 경기 내내 두 개의 심장이라는 별명처럼 지칠 줄 모르는 활동량을 선보이며 공수의 징검다리를 역할을 하던 모습은 왜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에 그가 필요한지 알게 해주는 대목이었습니다.

경기 시작 전 출전선수 명단을 알릴 때 울려퍼지던 일본 서포터들의 야유를 들으면서 한국 밖에서도 모두가 주목하는 키 플레이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기도 했고요,


박지성의 세레모니 또한 연일 화제였죠. 전반 선제골을 터뜨린 후 무심한 표정으로 관중석을 바라보던 박지성의 세레모니는 언론에서도 많이 궁금해했는데요, 저 역시 어떤 대답이 나올까 무척 궁금했답니다.


사실 그간 박지성은 히딩크 감독을 비롯해 동료 선수들과 주로 얼싸안으며 세레모니를 하곤 했는데요, 가끔 손으로 심장을 두드리거나 아래에서 위로 올리면서 관중들을 ‘Cheer up’ 시키는 세레모니를 하기도 했지요. 예전에 A매치에서 골을 성공시킨 후 손가락을 X자로 교차하는 세레모니를 했었는데, 그때 많은 기자들은 박지성을 기다리며 그 세레모니의 의미를 궁금해했답니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어떤 의미를 갖고 한 건 아니었는데...”였습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의미가 있어보였어요. 그가 관중석을 물끄러미 쳐다봤을 때 경기장 내 일본 팬들은 침묵했으니까요. 그의 표정에서는 “봐라. 이것이 바로 대한민국의 실력이고 투혼이고 저력이다”라는 뜻도 읽혀졌거든요.


이번에는 예상을 빗나가지 않는 대답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자신에게 보낸 야유에 답을 하고 싶었다는 박지성의 대답.

그 말 속에서 세계 무대 위에서도 담대하게 뛰던 모습이 떠올랐고, 그 시간들 속에서 우리의 생각보다 더 크게 성장한, 무거운 존재감을 함께 느낄 수 있었습니다.

보통의 선수들은 그러한 야유를 들으면 부담을 갖거나 혹은 흥분하거나, 이렇게 극으로 갈리기 쉬운데 외려 침착한 모습으로 실력으로 승부하겠다던 박지성의 모습에서는 냉철한 전략가의 모습으로 보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한일전을 앞두고 가진 외신 기자들과의 인터뷰 도중에는 “교토 퍼플상가에서 뛰던 10년 전보다 일본 대표팀은 확실히 약해졌다”는 발언으로 모두를 놀라게 하기도 했지요.

사실 1999U-20세계청소년축구대회 준우승, 2000시드니올림픽 8강, 2001아시안컵 우승을 거두며 2000대 초반 아시아의 축구강국은 일본이라는 여론이 지배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10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한국의 축구는 연일 진화하고 있지만 일본은 나카다 히데요시의 은퇴 이후 쇠퇴하고 있다는 게 대세입니다.

그런 가운데 박지성이 일본대표팀의 현 전력과 관련해 아주 냉정한 분석을 해줬네요. 알다시피 존경하고, 또 닮고 싶은 사람의 말에는 힘이 있습니다. 플라시보 효과 또한 가져다주죠. 그런 점에서 박지성의 말은 우리 대표팀 선수들에게 큰 힘이 됐을 거라고 봅니다. 아무래도 한일전은 스포츠이기 전에 우리의 가슴 아픈 역사가 먼저 떠오르기에 국민들은 승리를 바라고, 그러한 간절한 마음을 알기에 선수들은 이겨야만 한다는 압박 속에서 경기에 임합니다. 선수단 내 만연해있던 부담을 긍정의 힘으로 바꾼 박지성은 타고난 리더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는 개인적으로 4강이라는 불가능한 목표를 세운 것에 대해서도 그것은 일본만의 목표일 뿐 우리는 16강 진출이 목표라고 말했는데요, 그 간결한 대답에서 현실을 회피한 채 오리무중하고 있는 일본대표팀에 대한 나름의 비꼼(?)도 느껴져서 ㅎ 그 말을 들으며 혼자 지긋이 웃어보기도 했습니다.

한데 박지성은 경기가 끝난 후에도 일본대표팀의 수준이 10년 전보다 낮아졌다고 외신과의 인터뷰 도중 했던 말을 다시 하며 재확인해줬는데요, 정말 놀라움의 연속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항상 뭔가 민감한 질문에는 즉각적인 대답을 회피하던 박지성이었기에, 기자들도 “~ 때문에 ~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하겠지, 하며 그의 대답을 늘 예상하곤 했거든요. 상대의 평가를 내리기에는 늘 조심스러워했고, 늘 잘한다고 칭찬했고, 정석에 가까운 말들만 하던 박지성이었죠. 할 말은 하되, 냉정함을 잃지 않는 모습에서 캡틴이 달라졌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지난 한일전에서 전반 17분 이청용 혼다를 태클로 저지하자 심판이 휘슬을 불었죠. 그 다음 장면이 참 인상적이었는데요, 박지성이 주심에게 다가가 뭔가 이야기를 하며 제스처를 취하는 모습이었죠. 주장은 선수를 대표해 심판에게 항의를 할 권리는 없다는 건, 피파 경기 규칙서에도 나오는 ‘룰’이지만 그래도 주장이라면 의도하지 않은 정당한 태클이었다며 심판에게 다가가 대표로 말하는게, 선수단 내의 암묵적인 또다른 ‘룰’이죠.

그간 경기장 내에서 늘 착했던 주장은, 2010남아공월드컵을 앞두고는 적극적으로 변했습니다. 단순히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하기에 이청용 선수를 대신해 정당한 태클이었다며 얘기해준 것은 아니겠지요. 그간 다른 선수 뿐 아니라 본인이 반칙을 당해도 벌떡 일어나 다시 달리는 박지성이 지난 한일전에는 엔도의 백태클로 넘어지자 주심에게 왜 경고를 주지 않느냐는 제스처도 취해봤고요.

이뿐만이 아니죠. 박지성이 주장이 된 이후 대한민국 대표팀에는 크고 작은 변화들이 생겼죠. 늘 정해진 시간에 다 같이 아침을 먹는 규칙도 자유롭게 먹는 걸로 바꿨구요, 당일 아침이 되야지만 통보되던 훈련 스케쥴도 전날 공지되는 걸로 바꿨죠. 선수들도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 이유였는데,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위치에서 능동적으로 준비하는 위치로 바꿨다는 점에서 이러한 변화는 혁신이었습니다.

경기를 앞두고 가는 버스 안에서 신나는 음악을 들으며 중압감에서 벗어나게 하는가하면 고개 숙인 채 끌려나가는 듯이 앉아 있던 라커룸 분위기도 자신들이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자유롭게 경기에 나설 준비를 할 수 있도록 바꿔놓았습니다.

뭐든 즐기는 마음으로 해야 실력이 발휘될 수 있는 법이죠. 잘해야만한다는 생각이 중압감으로 작용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양발을 묶는 보이지 않는 족쇄로 작용하겠죠.


이번 월드컵은 사실상 그에게 마지막 월드컵입니다. 더 이상 월드컵에 나서지 못한다고 해서 그의 축구인생이 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죠. 더 많은 것들을 기대하게 만드는 박지성의 모습을 보며, 이번 남아공월드컵 이후 펼쳐질 박지성의 축구인생이, 저는 무척이나 궁금하고 또 기다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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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강원FC는 크로아티아 출신 수비수 스티페 라피치(STIPE LAPIC, 만26세)를 영입했다. K-리그 공식등록명은 ‘라피치’로, 배번은 18번으로 결정되었다.

라피치는 186cm 83kg의 건장한 하드웨어를 지닌 중앙수비수로, 2008-09시즌 리그 4위에 오르며 2009-10시즌 유로파리그(前 UEFA컵) 출전티켓을 획득한 크로아티아 1부리그 슬라벤 벨루포(Slaven Belupo)팀에서 활약하였다.


2000-01시즌 크로아티아의 명문팀 하이두크 스플리트(Hajduk Split)에서 1군무대에 데뷔한 라피치는 2001-02시즌 PSV 아인트호벤으로 이적, 2002-03시즌까지 뛰었다. 특히 PSV 아인트호벤 시절 당시 히딩크 감독의 지도 아래 이영표, 박지성과 한솥밥을 먹는 등 한국과 남다른 인연을 자랑한다.

이후 쿠반(Kuban, 러시아 1부리그), SV 파싱(SV Pasching, 오스트리아 1부리그), 짐브루(Zimbru, 몰도바 1부리그) 등에 적을 두며 다양한 해외리그 경험을 쌓았다.

라피치는 크로아티아 U-17, U-19, U-21, U-23대표팀을 단계별로 밟는 등 엘리트 코스를 거쳤으며 2008-09시즌 UEFA컵 3경기 출장, 현재 진행 중인 2009-10시즌 유로파리그 2경기 출장 경험을 갖고 있다.

제공권 장악능력과 장신 공격수와의 몸싸움에도 밀리지 않는 터프함, 세트피스 상황에서의 공격가담 능력이 인상적인 베테랑 수비수다.

노련미 넘치는 라피치의 합류로 기존 김봉겸, 곽광선이 지키고 있던 강원FC의 플랫4 수비벽은 한 층 더 두터워지게 되었다.

한편, 강원FC는 구단 경영의 투명성 확보를 위해 외국인 선수 계약과 관련한 세부사항을 공개하기로 결정했다. 라피치와의 계약기간은 2009년 7월 28일부터 2011년 12월 31일까지며 이적료 20만불, 연봉 20만불(세금 포함)이다. 앞으로도 강원FC는 외국인 선수 영입으로 인한 이적료나 각종 계약에 관한 사항을 전부 공개할 것이다.

신생팀 답지 않게 돌풍행진 중인 강원FC에 등장한 동유럽 출신 수비수에 K-리그 팬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PROFILE
이름 : 스티페 라피치(STIPE LAPIC)
국적 : 크로아티아
생년월일 : 1983년 1월 22일
신체조건 : 186cm 83kg
前소속팀 : Slaven Belupo(크로아티아)
포지션 : DF
경력 : U-17, U-19, U-21, U-23대표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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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영원히 겁없는 아이, 앙팡테리블로만 남을 것 같던 고종수가 전격 은퇴를 선언했다. 1998년 이동국, 안정환과 함께 K리그 르네상스를 열였던 그를, 우리는 이제 더이상 그라운드 위에서 보지 못한다.

2007년 여름 아버지 김호 감독과 함께 대전으로 둥지를 튼 그에게서 나는 부활의 날갯짓을 엿봤었다. 인터뷰를 이유로 가진 만남에서 고종수는, 이대로 선수생활이 끝날 것 같아 자살도 생각했었지만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지기는 싫었다, 며 다시 일어서겠다는 말을 계속해서 강조했었다. 허름한 대전시티즌 숙소에서 진행된 고종수와의 인터뷰는, 그래서 더 기억에 남고 그때문에 내 마음을 더욱 아프게 만든다.  


사진 출처: 스포탈코리아

앙팡테리블과의 재회

오후훈련 시작 전 조심스레 다가가서 물었다. “저녁 식사 후에 인터뷰하면 된다고 들었어요. 괜찮으시죠?” 짜증 섞인 목소리로 고종수가 말했다. “나는 11시 반이라고 들었어요. 그때부터 숙소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전달과정에서 착오가 벌어진 듯 했다. 당황스런 기색을 애써 감춘 채 그에게 다시 물었다. “어쩜 그렇게 10년 전이랑 똑같으세요?” 그제야 고종수는 웃었다. “그때를 기억하세요?”라고 말하며.

저녁 식사가 끝난 후 고종수는 “잠깐 방에 좀 갔다 올게요”라고 말했다. 괜히 걱정스런 마음에 숙소 계단을 지키고 서 있었다. 5분 쯤 지났을까. 핸드폰을 들고 내려오는 고종수의 모습이 보였다. “안 오시는 줄 알았어요”라고 말하자 고종수는 “아, 진짜 사람들은 왜 자꾸 마음대로 저에 대해 생각하죠?”라며 반문했다. 그것은 공백 기간 동안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이기도 했다. 그 때문에 맺힌 응어리가 많았나 보다. 고종수는 자리에 앉아 마자 ‘리지니’ 이야기부터 꺼냈다.

“1999년 수원에 있을 때 선수들이 리니지를 많이 했어요. 저녁에 운동 끝나고 나면 남들처럼 통닭집에서 맥주를 먹겠어요. 뭘 하겠어요. 그래서 다들 당구장 아니면 PC방에 가곤 했죠. 그런데 당구를 치면 계속 서있어야 하잖아요. 그러면 몸이 쉽게 피곤해진다며 감독님께서 당구장에는 잘 못가게 하셨어요. 그래서 가끔씩 PC방에 가기 시작했는데 한번은 친구가 리니지를 하고 있더라고요. 옆에서 구경하다 자연스레 하게 됐죠. 그런데 이게 중독성이 정말 강해요. 한 한달 정도 했나봐요. 어느 날 인터뷰 중에 쉬는 시간엔 뭘 하냐는 질문을 받았어요. 그래서 PC방에 다닌다고 했죠. 그랬더니 주로 무슨 게임을 하냐고 다시 묻더라고요. 당시 제 대답이 ‘리니지요’였어요. 그때 딱 세 마디 한 게 지금까지 온 거예요. 그 뒤로는 한 번도 해본 적 없었는데 말이에요. 그런데 내가 성을 먹었다느니, 레벨이 높다느니, 밤낮으로 리니지만 하다가 축구를 안 하게 됐다느니… 사람이 잠도 안자고 리니지만 하면 어떻게 되는지 아세요? 죽어요. 죽어. 어떻게 해서 소문이 그렇게까지 났는지 모르겠어요. 그러다 음식점을 차렸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엔 울컥 했어요. 그러면서 생각했죠. ‘아, 빨리 복귀해서 운동장에 있어야겠구나. 운동장에 없으니까 자꾸 이런 소리가 나오는구나’라고요.”

잠깐 침묵하나 싶었지만 이내 이야기는 계속 됐다.

“팬들이 그랬어요. ‘예전의 화려한 모습을 바라는 게 아니다. 푸른 그라운드에 서있는 그 모습만이라도 보고 싶다’라고요. 용기를 많이 냈죠. 여기서 그만뒀으면 ‘게임 중독에 빠져 연예인들과 술만 마시다가 축구를 망친’ 고종수로 밖에 기억이 안 될 거 아니에요. 안 좋은 선례의 대표적인 주인공이 되겠죠. 그렇다면 제 삶이 얼마나 불행할까요? 그동안 제가 프로무대에서 뛴 지도 어느새 횟수로 13년째에요. 그 시간동안 나름 열심히 했다고 하지만 그게 나만의 생각이 될 수도 있잖아요. 저는 그저 축구선수 고종수로만 기억되길 바라요. 그런데 꼭 앞에 수식어가 붙네요. 건방지다느니, 게으른 천재라니… 그게 싫었어요. 그래서 ‘다시 운동장에 돌아오자.’ ‘10분이라도 뛰고 관두자.’ 그 마음으로 다시 재기하게 된 거예요.”

그렇지만 그 공백의 시간들을 온전히 메운다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입단 당시 최윤겸 前감독님께서 참 잘해주셨어요. 무엇보다 저를 믿어주셨고요. 그런데 마음이 너무 앞선 게 화근이었어요. 전지훈련 가서 한달 만에 8kg를 뺐는데 그게 문제였죠. 단백질 섭취도 안하고 살만 급히 빼다보니 근력이 떨어지고 말았거든요. 결국 근육을 다 못쓰게 돼버렸어요. 감각만 끌어올리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에요. 거기서 끝난게 아니에요. 3월 중순엔 연습 중에 패스를 하다 왼쪽 사타구니 쪽 근육이 그만 파열되고 말았어요. 빨리 운동장에 나가고 싶은 마음에 과욕을 부린 게 결국 전반기를 그냥 보내버리게 된 계기가 되고 말았죠.”

지난 봄 검정색 모자를 푹 눌러쓴 채 경기를 지켜보던 고종수의 모습이 생각난다. 모자가 갖고 있던 본디 색보다 더 어두운 빛을 하고 있던 그의 얼굴 역시 기억난다.

“정말 뛰고 싶었어요. 그러면서 깨달았죠. 나는 어쩔 수 없는 축구 선수구나. 그러니 꼭 이 악물고 운동해서 복귀하자. 그렇게 다시 한 번 다짐했죠.”

부활의 서곡을 불러라
“함성소리를 듣는데 온 몸에 소름이 쫙 돋더라고요. 경기장을 돌면서 모든 사람들에게 큰절을 올리고 싶었어요.”

2007년 8월 1일. 부산과의 FA컵 16강전에서 고종수는 2년 1개월 만에 경기에 나섰다. 2005년 7월 10일 수원전 이후 처음이었다. 그 뒤 고종수는 10분(8월 12일 포항전), 22분(8월 19일 인천전), 27분(8월 26일 전북전), 40분(9월 2일) 이렇게 조금씩 출전 시간을 늘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난 9월 15일 서울전에선 올 시즌 처음으로 선발 출장해 90분 풀타임을 소화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의 눈길을 사로잡은 경기는 앞서 열린 성남전이었다. 그는 그날 ‘고종수는 아직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모두에게 증명했다.

“0-1로 지고 있을 때 반전을 바라면서 투입됐죠. 처음에는 잘 풀렸어요. 관중들이 환호해주니까 힘이 저절로 났거든요. 마지막에 역전할 수도 있었는데 좀 어이 없는 상황이 발생하고 말았죠. 물론 그 심판은 못 봤다고 할 수 있어요. 하지만 ‘난 몰랐는데…’가 끝은 아니잖아요. 우리나라 축구가 발전하기 위해선 서로가 발전해야죠. 그날 제가 심판 판정이 잘못됐다고 어필을 많이 했잖아요. 누군가는 그 모습을 보며 아직도 저를 싸가지 없는 놈으로 생각할 지 몰라요. 하지만 모든 선수들에겐 이기고 싶은 욕망이 있어요. 지는 거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러다보니 감정이 자기도 모르게 올라가는 거예요. 게임 끝나면 죄송스럽지만 그래도 경기 중엔 분이 안 삼켜져요. 그래서 성남전 때도 그랬던 것 같아요.”

시련의 고비를 이제 막 건넌 그는 후배 선수들을 위한 진심어린 충고 역시 아끼지 않았다.

“그동안 인생에 대해 많이 배울 수 있었어요. 최고의 자리에도 올라가봤고 최악의 자리까지도 가봤잖아요. 지금도 이 순간에도 과거의 저처럼 방황하는 선수들이 많이 있겠죠. 중요한 건 자기 스스로 잘못됐다는 사실을 느끼고 깨닫는 거예요. 그 전까지는 주체하기가 힘들죠. 어디 가면 사람들이 알아봐주지, 젊고 혈기는 왕성하지, 여자들은 축구 선수라며 다 좋아해주지. 정말 귀신이 끌어당기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요. 그러니 옆에서 누가 이야기해도 그게 나쁜 건지 모르죠. 그러다 후회할 날이 올 거예요. 옛날에 김호 감독님도 저 불러놓고 많이 야단치고 그러셨거든요. 그래도 제가 끝까지 정신을 못 차리니까 결국엔 포기하고 마셨죠. 그렇지만 보세요. 결국엔 후회했잖아요. 그러니 저처럼 뒤늦게 후회하지 말아요.” 그러나 이렇게 교훈적인 멘트로 끝낼 고종수가 아니었다. “그리고 앞으로 질문은 그냥 직설적으로 하세요. 뭘 그렇게 돌려 말하세요.” 역시나 그의 입심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했다.

오해에 대해 말하다
“나요, 기자들 별로 안 좋아해요. 많이 당했거든요. 가끔씩 기자들이 편하게 이야기나 하자며 만나자고 그랬어요. 그때마다 기사로 안 쓰겠다고 약속까지 하며 말하길래 그 말 믿고 속마음을 있는 그대로 얘기한 적이 많았어요. 그런데 꼭 다음날 제가 한 이야기가 기사로 전부 나오더라고요. 그것 말고도 할 말은 정말 많아요. 대표팀에 있다가 무릎 수술하러 독일 갈 때도 그랬어요. 감독님과 이야기 한 뒤 간 거였는데 다음날 신문 1면에는 ‘고종수 국가대표 퇴출!’이라고 나오더라고요. 가판만 본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겠어요. ‘쟤 또 무슨 사고 쳤나보다’ 하겠죠. 그냥 ‘수술차 독일행’ 이렇게 써도 되는 거잖아요. 왜 있지도 않은 이야기를 지어내서 쓰고 그러냐고 항의라도 하면 그냥 미안하다는 말로 끝나더라고요. 늘 저에 대한 이야기는 자극적으로 쓰는 것 같아 항상 속상하고 마음이 안 좋았어요. 한번은 1면에 ‘고종수, 기자들 반말하지마!’ 라고 나왔더라고요. 그게 어떻게 된 건 줄 아세요? 어느 날 파주에서 훈련하고 있는데 어떤 기자가 다가와서 ‘내가 야구 담당하다 이번에 축구 쪽으로 다시 왔어. 야, 반갑다’라고 하더라고요. 딱 봤는데 나랑 나이 차이가 별로 안 나 보였어요. 그래서 ‘저 아세요?’라고 물어봤죠. 그랬더니 빨개진 얼굴로 ‘죄송합니다’라고 말하고 가더라고요. 거기서 저는 끝났나보다 생각했죠. 그런데 웬걸요. 다음날 신문 1면에 ‘나한테 반말하지마!’라는 제목의 기사로 제 이야기가 실렸더라고요. 또 그냥 지나치며 1면만 본 사람들은 ‘고종수 또 또라이 짓 했네’ 이럴 거 아니겠어요. 억울할 때가 많았죠.”

물론 고종수가 말하는 ‘억울한 순간’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요즘도 운동 선수는 운동만 해야 하지 않냐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럼 공부하는 사람들은 공부만 하나요? 그럴 순 없잖아요. 솔직히 사람인데 어떻게 그래요. 물론 일단 축구 선수니까 축구를 잘해야겠죠. 그렇지만 운동장 밖에서 축구 외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끼가 있다면 보여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쉴 때 뮤직비디오 하나 찍었다고 ‘네가 연예인이라도 되냐?’ ‘그 시간에 축구나 하지 이 정신 나간 놈아’ ‘그냥 축구 그만두고 딴따라나 해’하는 반응들은 너무 아쉽고 억울했죠.”

그에게 요즘 젊은 선수들이 큰 제약 없이 광고나 패션화보를 찍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봤다. 그러자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톡톡 뛰는 대답이 돌아왔다.

“미리 다 욕먹으면서 ‘선빵’ 쳤잖아요. 그래서 편한 거죠. 군대 갔다 오셨어요? 지금 가는 애들은 선배들에게 이런 얘기 많이 듣잖아요. ‘지금처럼 군 생활하면 나는 5년도 할 수도 있겠다. 너넨 복에 겨운 거다’라고요. 그 말처럼 제가 운동할 때도 선배들이 참 운동 편하게 한다고 그랬어요. 그때마다 저는 그냥 웃었죠. 지금 후배들에게 ‘나 때문에 너네 편한 거다’라고 말한다면 후배들 역시 제가 그랬듯 그냥 웃기만 할 걸요.”

시련의 나날 속에 꺾인 청춘
“교토 퍼플상가에서 방출 당한 후 수원으로 복귀했을 때, 그때가 제일 힘들었어요. 건방지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분이 생각하는 축구와 제가 하고 싶은 축구는 너무 차이가 컸어요. 그때는 미드필드 플레이가 없었거든요. 하지만 만날 뻥뻥하면 보는 사람 입장에서 그게 재밌겠어요? 무슨 만루 홈런 치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하는 건 야구가 아니라 축구인데 말이에요. 흔히 프랑스 축구를 ‘아트사커’라고 부르잖아요. 저는 우리나라 선수들도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문제는 왜 안하느냐 이거죠. 시합장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데 그러지 못할 때가 많아요. 그걸 연습장에서 혼자 남아서 해야 하나요? 프로 선수라면 하나의 상품이고 그걸 잘 포장해야지만 소비자인 팬들이 볼 때 ‘괜찮다’는 소리가 나오는 법이에요. 그런데 보통은 ‘그냥 그렇네’라는 반응이 나오잖아요. 그건 ‘안 좋네’보다 더 무서운 거예요. 그런 와중에 제 정신이 그냥 나가 버린 것 같아요. 일단 팀 스타일엔 안 맞지, 그 상황에서 2군 게임 뛰라고 하지, 자존심은 상할대로 상해버렸지, 그래도 열심히 뛰었는데 전반 끝나자마자 바로 교체 해버렸지. 그러면서 정신이 확 나가버렸어요. 쥐뿔로 없는 게 자존심만 센 거죠. 그래서 ‘축구 그만두겠습니다. 좋은 성적 거두십시오’라고 적힌 편지를 감독님 책상 위에 올려 놓고 그냥 팀을 나와 버렸어요. 그러고 나서 호텔에 박혀있었죠.”

그가 자살을 생각한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글쎄요. 그때는 내가 뭐에 쓰였는지 모르겠어요. 자존심도 많이 상했고 축구에 대한 회의도 느껴졌고요. 그래서 우울증에 시달리다 자살까지 생각했던 것 같아요. 죽으러 영동대교까지 갔다가 그냥 돌아왔지만… 그 이야기는 더 하고 싶지 않네요.”

우여곡절 끝에 다시 팀으로 돌아왔지만 신은 여전히 그에게 평온을 허락하지 않았다.

“당시 숙소생활을 안했는데 구단에서 훈련이 있건 없건 무조건 9시에 와서 6시까지 있으라 고 그랬어요. (길들이기 단계였나요?) 그 단계가 아니라니까요. 거진 완전 아웃된 단계에요. 보통 오전 훈련만 있는 날에도 저는 혼자서 저녁까지 숙소를 지키고 있어야만 했어요. 물론 처음엔 그럭저럭 괜찮았죠. 그런데 한 2주 쯤 지났을까. 짜증이 확 나버리더라고요. 그래서 구단가서 임의탈퇴 시켜달라고 했죠. 그때는 제가 무슨 정신으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아시죠? 원래는 교토 퍼플상가에서 나오면서 FC서울에 가려고 했던 거. 그런데 수원 쪽에서 안 된다며 FIFA에 제소까지 하면서 나를 데리고 갔잖아요. 그렇게 대우할 거면서 도대체 날 왜 데리고 갔는지… 그러다 임의탈퇴는 2대 1로 트레이드로 자연스레 풀렸어요.”

여기서 그가 말한 트레이드는 지난 2005년 1월 자신과 조병국을 묶어 전남에 내주는 조건으로 김남일을 영입한 것을 말한다.

“자존심 많이 상했죠. 그때 관뒀어야 했는데…(웃음). 그런데 사람 일이 다 그런 거잖아요. 위에 있을 때도 있지만 밑에 있을 때도 있는 거고… 그러니 크게 상관 안 해요. 축구 선수는 운동장에서 자기 실력을 보여줘야지 다니면서 ‘나는 누구보다 더 잘해’ ‘나는 어딜가도 누구보다 더 잘할 수 있어’ 이렇게 말하는 건 아무 소용없다 생각해요. 다른 사람들이 운동장에서 뛰는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보고 판단하는 거지 백날 혼자서 말만 하면 뭐해요. 전남에 있을 때도 선수로서 할 건 다했어요. 허정무 감독님이 워낙 스타일이 강하기 때문에 맞춰가는게 힘들었지만 그래도 감독이 원하는 걸 선수는 당연히 따라가는 거니까요. 전남에서 나오게 된 건 애당초 1년 계약이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마침 가을 쯤에 발목에 자란 뼈를 제거하는 수술을 하는 바람에 시즌이 일찍 마감된 것 뿐이고요.”

그렇다면 무적(無籍) 상태로 2006년을 보낸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사연이 깁니다. 다른 팀으로 가려고 했는데 마지막에 틀어지는 바람에 못 가게 된 거예요. 마지막에 윗사람이 틀어서 안됐다고 들었어요. 저는 붕 떠버린 거죠. 그래서 2006년을 그렇게 보낸 거예요. 1년 동안 혼자 운동하며 있었어요. ‘이렇게 하면 뭐해’라며 운동 안하고 있다가 ‘아냐, 다시 해야 해’라며 마음 고쳐먹고 다시 운동하고. 그렇게 좀 운동하다 ‘아, 젠장. 하면 뭐하냐고’라며 다시 한탄하고. 그런 생활의 반복이었죠.”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처음 고종수가 대전에 입단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많은 사람들은 ‘과연 잘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던졌다. 시민구단 대전시티즌과 그간 그라운드의 반항아로만 표상되던 고종수와의 조합은 너무나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저는 대전보다 더 어려운 상황 속에 있다 이곳에 왔어요. 그래서 지금 이렇게 팀에 들어와 운동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너무 좋아요. 무엇보다 대전에서는 다른 팀에서 느끼지 못한 걸 많이 느낄 수 있어 좋고요.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이죠?) 따뜻함? 왠지 맑음? 왜 웃으세요? 진짜에요. 사람들이 다 맑아요. 순수하고 맑고 거리낌 없고. 솔직히 상위권 팀들은 ‘너를 잡아야 내가 산다’라는 인식이 서로들 강해 겉으로만 친한 척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대전은 그런 느낌을 좀처럼 받을 수 없어요. 선수들 간의 끈끈한 정을 이 팀에서 많이 느끼고 있어요.”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좋았던 것은 단지 대전 유니폼을 입었다는 이유만으로 무한한 지지와 격려를 보내준 대전 팬들의 존재였다.

“감사하게 생각해요. 그냥 흘러 지나가듯 감사하다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감사해요. 이 팀에 와서 아직까지 크게 도움은 안됐지만 팬들과 함께 다시 한 번 날고 싶어요. 올 시즌은 준비도 많이 부족했고 감독님도 바뀌는 등 정신 없었지만 앞으로 서로 힘을 더 합쳐야겠죠. 그래서 좋은 모습 보여드릴게요. 꼭 다시 날게요.”
동화 속 네버랜드의 피터팬은 동심을 잃어버린 순간 날지 못했다. 그러나 고종수는 스스로 어른이 되길 거부하며 날기를 거부했다. 하지만 추락하던 순간, 그 마지막 찰나에 그는 깨달았다. 다시 날자고. 마지막으로 꼭 다시 한 번.

물론 아쉽게 그의 비상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변치 않는 믿음만이 그를 곧 날게 해줄 것이라는 사실을. 아마도 그것은 지금 우리가 고종수의 부활을 믿고 싶은 가장 큰 이유일지도 모른다.


사진 출처: 오센

이제 더이상 선수 고종수로선 만날 수 없겠지만 축구인 고종수의 삶은 앞으로도 계속 되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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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겨울 이적시장 개장과 함께 나라 밖으로 시선을 돌리는 선수들이 일종의 ‘붐’을 이루고 있다. 최근 가장 각광받고 있는 해외진출지는 단연 일본이다. 기존의 용병 보유한도에서 아시아 국가선수 한 명을 추가로 영입할 수 있는 아시아쿼터제 시행과 ‘엔고 현상’에 탄력을 받아 조성환(포항→삿포로) 조재진(전북→감바오사카) 박동혁(울산→감바오사카) 이정수(수원→교토퍼플상가) 김진현(동국대→세레소 오사카) 등이 이미 대한해협을 건넜다. 연일 J리그행 뉴스가 전해지고 있는 가운데 또 한 곳, K리거들의 주요 이적 대상지로 오르내리는 나라가 있다.


멀게는 톨스토이와 차이코프스키의 고향으로 알려진, 가깝게는 히딩크 감독이 유로2008을 통해 다시 한 번 ‘마법’을 부린 그곳. 바로 러시아다.

러시아 커넥션
한국 선수들의 유럽 진출형태는 2002월드컵 이후 질과 양에서 점점 다양해지고 있다. 다소 무모하게 잉글랜드, 스페인, 이탈리아 등 ‘빅 리그’로의 곧장 진출을 마냥 바라던 모습에서 차츰 ‘선배’ 설기현처럼 벨기에, 네덜란드, 프랑스 등 유럽 위성리그에 우선 진출해 실력을 검증받은 후 이를 발판으로 더 큰 무대로 나아가는 현실적 방향으로 수정되고 있다. 자연스럽게 네덜란드, 프랑스, 포르투갈 등 ‘디딤돌’로 삼을만한 리그들이 주목을 끌기 시작했는데, 최근 러시아리그가 그중 하나로 급부상한 것이다.

2006년 울산 소속이던 현영민이 제니트에 진출한 이후 김동진, 이호(이상 제니트) 김동현(루빈 카잔) 오범석(사마라) 등 다수의 K리그 젊은 ‘재능’들이 러시아리그의 문을 두드렸다. 오범석이 2008시즌 내내 주전으로 맹활약했고 김동진의 경우 비록 부상 때문에 마지막 방점을 완벽히 찍지는 못했으나 2007-08시즌 UEFA컵에서 팀이 우승하는데 일조하는 등 한국 선수들은 짧은 개척역사에도 불구하고 무시할 수 없는 성과를 남겼다. 물론 성공소식만 들린 것은 아니다. 아드보카트 감독 부임 이후 벤치멤버로 밀린 현영민(울산)과 러시아 특유의 기후에 적응하지 못한 김동현(성남)이 K리그로 유턴했고, 티모슈크에 주전 자리를 빼앗긴 이호 역시 K리그로 돌아왔다.

금번 이적시장에서 톰 톰스크가 조원희, 정경호, 신영록 등에 관심을 보이며 러시아리그가 다시 조명받고 있다. 톰 톰스크는 지난 해 16개 팀 중 13위(7승8무15패/승점29)에 그치며 간신히 강등을 면한 중하위권팀으로, 1994년부터 1998년까지 부천(現제주)을 이끌었던 ‘신사’ 니폼니시 감독이 지휘봉을 잡고 있다. ‘K리그통’ 니폼니시 감독이 전력 강화 차원에서 정경호, 조원희, 신영록의 영입을 구단에 요구하며 K리거들의 러시아리그행 여부가 다시 한번 수면 위로 오르기도 했다. (재정 악화에 따른 예산 축소로 신영록만이 “계약기간 1년에 연봉 40만 달러 조건의 구두계약에 합의”하는데 성공했으나 신영록은 최종적으로 터키로 기수를 돌렸다.)

유럽 리그의 블루칩
1992년 구소련 해체 이후 탄생한 러시아리그는 한국 뿐 아니라 유럽 축구계의 새로운 ‘블루칩’으로서 각광받고 있다. 이미 조(맨체스터 시티) 파블류첸코(토튼햄) 등이 러시아리그를 발판 삼아 프리미어리그에 진출했고, 바그너 러브(CSKA모스크바) 아르샤빈(제니트) 등 유망한 선수들이 리그에서 활약했거나 활약 중이다. 2004-05시즌에는 CSKA모스크바가, 2007-08시즌에는 제니트가 UEFA컵에서 우승을 차지한데 이어 유로2008에서 러시아리그 소속 선수들이 주축이 된 러시아대표팀이 ‘4강 신화’의 기적을 쏜 것 또한 관심의 기폭제로 작용했다.

찬란했던 구소련의 영광을 뒤로한 채 한동안 유럽축구의 변방으로 저평가되던 러시아리그가 이처럼 급부상하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역시나 프로스포츠에 늘 따라다니는 꼬리표, 바로 ‘돈’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수 없다. 2000년대 들어 러시아 최대 천연가스회사인 가즈프롬으로 대표되는 러시아 에너지 재벌들이 러시아 클럽들에 막대한 투자를 쏟기 시작했다. 상상을 뛰어넘는 자금력을 등에 업은 러시아 구단들은 선수 영입에 아낌없는 금액을 투자했고 세계적인 선수들의 러시아행이 꼬리를 물었다.

K리그 선수들이 러시아리그에 강한 유혹을 느끼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러시아리그에 정통한 한 에이전트는 “K리그에서 3~4년 뛰어야 모을 수 있는 돈을 러시아에서는 한 시즌만에 받을 수 있다. 돈 앞에서 흔들리지 않을 선수는 없을 것”이라고 현실을 이야기했다. 빅 리그의 교두보로 삼을 수 있는데다 높은 연봉까지 보장되는, 한마디로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을 수 있는 곳이 바로 러시아리그인 것이다.

뿐 아니라 외국인에게 다소 배타적인 사회 분위기와는 달리 리그에선 외인 선수들의 비중이 높아 텃새가 심하지 않다는 점,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점 등도 국내 선수들을 유혹하는 요인 중 하나다. 현지적응 문제, 그중에도 특히 언어 문제는 해외에 진출하는 선수들이 해결해야 할 큰 문제 중 하나인데 현지어가 아닌 영어로도 의사소통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플러스요인이다. 리그 일정이 추춘제인 대다수 유럽 리그와 달리 봄에 시작해 초겨울에 끝나는 구조를 갖고 있다는 점도 한국 선수들의 이적을 보다 수월하게 만들어주는 조건 중 하나다.

진정 신세계인가
그러나 러시아무대를 마냥 장밋빛 신세계라고만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다른 리그와 마찬가지로 러시아리그 역시 실력을 인정받지 못하면 도태되고 마는 잔혹한 ‘정글의 세계’인 까닭이다. 특히 한국 선수들은 상대적으로 체격조건이 좋은 동구권 선수들을 상대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고 한다.

사마라FC에서 주전으로 활약 중인 오범석은 “선수들의 체격이 크고 경기 스타일 또한 꽤나 터프하다. 몸싸움 때 느껴지는 강도가 K리그와는 다르다. 잘못 부딪히면 십자인대가 파열되기 십상”이라며 어려움을 토로했다. 덧붙여 “바깥에선 벨기에, 네덜란드 등의 리그보다 저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러시아리그 빅4(CSKA모스크바, FK모스크바, 로코모티브모스크바, 제니트)의 수준은 유럽 3대 리그 클럽 못지않다. 이런 팀들과 경기를 치르는 가운데서도 꾸준히 실력을 발휘해야 비로소 인정받을 수 있는 법인데, 말처럼 쉽지만은 않다”고 말했다. 지난해 국가대표 선발을 앞두고 오범석의 경기력을 체크하기 위해 러시아를 방문했던 대표팀 박태하 코치는 “러시아리그의 수준이 생각보다 높더라. 경기전개 속도가 상당히 빨랐고 파워도 넘쳤다. 깜짝 놀랐다”고 말하며 오범석의 의견에 힘을 실었다.

축구 외적으로 시선을 돌리면 ‘외로움’이란 난제와 만나게 된다. 아직은 치안이 불안해 여가시간을 오로지 집에서 보내야 하는 것도 젊은 선수들에게는 고충이다. 다른 유럽국가처럼 교민사회가 발달하지 않은 곳이기에 같이 어울릴 한국인 이웃조차 없다. 오범석이 머물고 있는 사마라에는 한국인이 단 한 명도 없다고 한다. 이 때 만나게 되는 내부의 적이 바로 외로움이다. 워낙에 낙천적인 성격을 자랑하는 오범석은 “요리도 하고 한국 TV드라마를 보며 잘 적응하고 있다”고 말했지만 제니트에서 한 시즌을 뛰고 돌아 온 현영민은 “하루에 운동하는 시간은 고작 1~2시간인데 나머지 시간은 할 일이 없었다. 우울증에 걸릴 정도로 힘들었다”며 이국 생활의 고통을 토로했다.

어려움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유럽에서 제일 넓은 영토를 가진 나라이기 때문에 어웨이 경기 때마다 해외 원정에 버금가는 긴 여정을 감수해야한다는 점도 선수에게는 큰 짐이다. 최근엔 국제사회의 기류 또한 심상치 않다. 얼마 전 첼시의 구단주 로만 아브라모비치가 주식에서 막대한 손해를 입으며 프리미어리그 구단주 재산 순위에서 3위로 미끄러졌다는 보도가 있었다. 비단 아브라모비치에 국한된 이야기만은 아니다. 러시아리그의 부흥을 주도한 에너지 재벌들이 전 세계에 불어 닥친 미국발 금융위기 한파에 직격탄을 제대로 맞은 상황이다.


당연히 투자는 위축될 수밖에 없다. 러시아리그에 대한 관심을 다시 불러일으킨 ‘촉매제’ 톰 톰스크의 정경호, 조원희 이적설이 ‘없던 일’이 된 가장 큰 요인도 경기 침체로 인한 구단의 지출 축소 때문이었다.

히딩크와 아드보카트, 두 감독만으로도 우리에게 친숙하게 다가오고 있는 러시아가 ‘신세계’로 자리 잡아 한국축구 해외진출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수 있을까. 하지만 선수들이 간과하지 말아야할 것은 ‘달콤한 유혹’이면서 넘어야할 ‘적잖은 장벽’도 있다는 사실이다. 덮어두고 무작정 나간다면,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신세계가 어둔 터널에 그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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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사까나시(Sacanage). 일본어처럼 들리지만 실지 포르투갈어로, 장난꾸러기 개구쟁이 등의 뜻을 갖고 있다. 오범석의 별명이기도 한 이 단어는 보통의 별칭이 그러하듯 그의 캐릭터와 더없이 잘 어울렸다. “안녕하세요. 범석이에요”라던 첫 인사를 들었을 순간에도, “저 와플 무지 좋아하는데, 먹으면서 해도 되죠?”라며 스스럼없이 말하던 모습을 보게 됐을 때도, 그의 별명이 생각나 가만히 고개를 끄덕끄덕 했었다. 그러나 “한국 사람과 이렇게 오래 이야기 나누기는 실로 오랜만”이라며 자신의 속내를 탈탈 털어놓던 이 청년은, 알고 보니 “꿈을 이룰 때까지 쉼 없이 달리겠다”며 자신을 향한 채찍질도 마다 않던 참으로 속 깊은 ‘프로’였다.


시베리아 바람과 만나다
유로2008에서 러시아대표팀을 맡고 있는 히딩크 감독을 필두로 최근 제니트를 UEFA컵 정상으로 이끈 아드보카트 감독과 그 휘하에 있는 김동진과 이호까지. 덕분에 러시아는 더 이상 ‘사회주의’ ‘붉은광장’ 등의 무거운 단어들만 연상되는 나라가 아니다. 그러나 가까워진 체감 거리와 달리 여전히 쉽게 소식을 접할 수 없는 ‘미지의 땅’인 것도 사실인지라 그곳 리그에서 뛰고 있는 오범석에게 던지고픈 질문들은 꽤나 많았다. 다행히도 그 역시 들려줄 이야기가 쌓였다며 주머니 속 꾹꾹 담아놓은 일화들을 하나씩 풀어놓기 시작했다.

“러시아 리그 ‘빅4’는 CSKA 모스크바, 스파르타크 모스크바, 로코모티브 모스크바, 제니트를 가리켜요. 사마라FC는 현재 6위라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 중위권 수준의 팀이죠. 입단 테스트는 거치지 않았어요. 이곳 감독님께서 제가 뛰는 경기를 DVD로 보셨는데 그 자리에서 바로 ‘오케이’하셨거든요. 제 공격력이 마음에 들었대요.”

그의 데뷔전은 꽤나 만족스러웠다. 동양에서 날아 온 ‘원더보이’는 3월15일 러시아 프리미어리그 개막전 텔렉 그로니즈와의 경기에서 ‘Man Of the Match’에 뽑히며 감독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몸소 증명했다.

“저희가 1-0으로 앞서고 있었는데 후반 19분에 상대 공격수가 골키퍼와 1-1 찬스를 만들어냈어요. 어떡하겠어요. 그냥 두면 골이니까 바로 태클로 끊었죠. 그 때문에 페널티킥을 내줬지만 다행히 실축했고 그 후 저희가 2골 더 넣으며 3-0으로 경기를 마감했어요. 그날 단장님이 다가와서 ‘네가 최고였다’며 엄지손가락을 들더라고요. 그런데 이번에는 감독님이 쓱 오시더니 ‘오범, 5포인트(주-러시아에서는 선수 평점 만점이 5점이다)’하셨어요. 라커룸에서도 선수들이 다들 잘했다고 칭찬해줘서 기분 좋았죠.”

그날 저녁 선수들은 호텔 근처 레스토랑에 모여 오범석의 성공적인 데뷔전와 개막전 승리를 자축하는 작은 모임을 가졌다.

“러시아 선수들이 ‘이걸 마셔야 진정 러시아에서 뛰는 선수라고 말할 수 있다’면서 보드카를 권하더라고요. 마셨냐고요? 당연하죠. 그 자리에서 못 마시겠다며 혹여 몸이라도 사린다면 다시는 동료로 인정해주지 않을 거라는 분위기였어요. 그래서 눈 딱 감고 한 잔 쭉 들이켰죠. 생각보다 독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그 자리에 있었어요(웃음).”

일어나라, 부딪혀라, 그리고 이겨내라
“이제 러시아 생활에는 어느 정도 익숙해졌지만 운동이 끝나면 언제나 혼자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죠. 아무리 둘러봐도 즐겁게 대화할 사람, 하루를 공유할 사람, 세끼 식사를 같이 할 사람 모두 없어요. 심심해요. 아니 외롭다는 표현이 더 맞겠네요. 가끔 가족이나 친구들에게서 전화가 오는데 그때마다 ‘여보세요’하는 제 목소리를 듣고 다들 깜짝 놀라곤 해요. 하도 말을 안 하고 있다 보니 목소리가 잔뜩 잠겨 있거든요.”

이렇듯 그가 모국어를 쓰는 시간은 하루에 몇 차례 지인들과 통화하는 순간이 유일한 듯 했다. 그래서 이방인들은 늘 외롭고 힘든가 보다. 오범석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근성이 없었다면 버텨내기 힘들었을 거예요”라는 말과 함께.

“힘들어도 약한 모습 보이면 절대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넘어질 때마다 ‘아, 역시 동양인들은 작을 뿐 아니라 약하기까지 하구나’라고 생각하며 얕볼까봐 외려 더 강한 모습을 보여주려고 해요. 심지어 연습 도중 넘어져도 금세 일어나죠. 한번은 골키퍼 코치가 ‘참 신기하다. 왜 항상 그렇게 빨리 일어나냐’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아프지 않으니 빨리 일어나는 것 아니냐’고 되레 반문했죠. 여기서 제 별명이 뭔지 아세요? ‘개(собака, 싸바까)’에요. 사냥개처럼 한번 물면 안 놓는다고 붙여진 별명이에요. 그 정도로 다부지게 하고 있습니다.”
얼핏 악전고투하고 있다는 듯이 비춰질 수도 있겠으나 오범석에게도 뿌듯한 순간은 있다. 사마라 시내를 나설 때면 자신을 알아보는 팬들이 부쩍 늘었기 때문이다. 얼굴 가득 번지는 웃음을 보니 그도 시나브로 쌓여가는 반응이 꽤나 만족스러운 듯 보였다.

“한번은 러시아 선수들과 회를 먹으러 갔는데 현지 종업원이 ‘오범석?’하며 절 알아보더라고요. 사실 러시아에서도 동양인들에 대한 인종차별은 심한 편이에요. 특히 형편이 어려운 고려인들이 주 타깃이죠. 저도 몇 번 겪었어요. 식당에 가면 종업원들이 주문을 제대로 안 받는 등 대놓고 무시하곤 했는데 이제는 식당에서 먼저 절 알아보니 참 감회가 새롭더라고요. 요즘은 거리에서 절 알아보고 제 이름을 부르며 싸인 받는 사람들도 생겼어요. 그럴 때마다 기분 좋죠. 그렇지만 앞으로 더 잘해야겠다는 일종의 사명감을 더 크게 느껴요.”

확실히 축구는 국경과 인종을 초월한 무언의 힘을 갖고 있다. 비단 언어가 통하지 않는다할지라도 선수가 전하는 메시지는 공과 함께 움직이는 몸놀림만으로 충분하다. 지금, 오범석이 어깨 가득 책임의식을 느끼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처음 러시아에서 도착했을 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김동진을 안다. 좋은 선수다. 다른 한국 선수들의 수준도 비슷한가?’였어요. 그때 깨달았죠. 제가 실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저 혼자 감당하고 끝낼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요. 저 때문에 다른 한국 선수들의 수준까지 폄하될 수도 있잖아요. 반면 제가 잘한다면 한국 선수들에 대한 좋은 이미지가 형성될지도 모를 일이죠. 만약 그렇게 된다면 앞으로 후배들이 러시아에 진출하기도 좀 더 수월해질 테고 더 많은 길이 열릴 수 있을 거예요.”

러시아에 오기까지 크고 작은 부딪힘 속에 있던 오범석이기에 이 같은 헤아림은 당연한 마음인지도 몰랐다. 동시에 지금이 바로 이적과 관련한 가슴앓이를 물어볼 적절한 시간이라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지난 2월 사라마FC 동계훈련에 참가했던 오범석은 월드컵3차예선 투르크메니스탄전을 앞두고 허정무호에 추가 발탁되며 급히 귀국했다. 당시 공항에는 제법 많은 취재진이 몰렸다. 포항과 사마라FC 사이에서 의견을 좁히지 못한 채 이적 난항을 겪고 있던 오범석의 입장을 듣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오범석은 극도로 말을 아꼈고 속사정을 들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로부터 여러 날이 지났고 이제는 그도 원하던 바를 이뤄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적과 관련된 질문은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고맙게도 오범석은 “처음으로 털어 놓는 이야기”라며 먼저 말문을 열었다.

“처음 축구를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제 꿈은 오로지 ‘해외진출’이었습니다. 바이아웃 조항이 없었다면 포항과 계약하지 않았겠죠. 그 부분은 포항과 합의가 됐기 때문에 계약서에 넣은 것입니다. 시즌이 끝나고 러시아에서 접촉이 들어와 구단에 문의했는데 난데없이 벌써 성남과 얘기가 다 끝났다고 하더라고요. 황당했죠. 그 뒤 여러 말을 들었어요. 몸값 올리려고 저런다는 이야기도 들었고 심지어 포항 팬들에게선 ‘배신자’라는 소리까지 들었고요. 이젠 지나간 일이지만 여전히 그런 점들은 많이 아쉽고 속상해요. 전 절대로 포항을 배신하거나 완전히 저버린 게 아닌, 그저 선수로서 오랫동안 품어온 꿈을 이루고자 잠시 떠난 거예요. 무엇보다 포항은 저를 키워준 곳이기에 마지막 인사는 그곳에서 꼭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너무 멀어진 것만 같아요. 마음이 멀어지면 다시 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아울러 그는 “지금에 와서 고백하지만 지난 겨울 ‘많은 것을 포기하게 되더라도 러시아에 가겠습니다’던 발언 뒤에는 ‘K리그에서 더 이상 뛰지 못하게 되더라도 꼭 가겠습니다’라는 속뜻이 담겨 있었다”고 했다. 기실 임의탈퇴 이야기까지 나왔을 때, 일순 고민은 있었으나 해외진출을 이룰 수만 있다면 기꺼이 감당하겠다고 다짐한 오범석이다. 그만큼 간절했어요.” 그 짧은 한 마디에 모든 이유가 담겨 있었다.

꿈을 이룰 때까지, 돌아가지 않겠다
“선수로 있는 동안만큼은 축구와 관련된 것들을 최대한 많이 배우고 또 경험하고 싶어요. 지금은 러시아에서 있지만 몇 년 안에 꼭 네덜란드 잉글랜드 등 서유럽 무대로 당당히 진출하고 싶어요. 당장은 큰 목표로 비춰질 수도 있겠지만 천천히 계단을 밟고 있는 중이므로 언젠가는 꼭 이룰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물론 아직은 절반도 채 못 걸었지만요.”

오범석은 “몸과 마음이 힘들다는 이유로 포기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며 거듭 강조했다.
“원래 제가 아침잠이 상당히 많은 편이에요. 어머니가 아침마다 아무리 세게 흔들어도 잘 못 일어나는 아이였죠. 그렇지만 초등학교 5학년 때 처음 축구를 시작한 이후로는 아무리 졸려도 새벽 6시면 벌떡 일어나 아침운동을 하러 나갔어요.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잠을 더 청한 적은 한 번도 없었죠. 그렇게 지금까지 마음먹은 것이 있다면 늘 실천으로 옮기며 살아왔어요. 지금도 그래요. 목표를 이룰 때까지는 절대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치열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법한 지난날의 단련은 이렇듯 스스로를 향한 믿음을 키워냈다. 그 시간들 속에서 켜켜이 쌓인 믿음이 없었다면 “러시아에서 뛰는 게 즐거워요. 꿈의 첫발을 내딛었으니까요”라고 말하는 오늘의 오범석 역시 없었을 것이다.

“맞아요. 전 제가 가진 능력을 믿습니다. 언젠가 (설)기현이 형이 벨기에를 거쳐 잉글랜드에 입성하기까지 많이 힘들었기 때문에 후배들에게는 자신과 같은 길을 추천해주고 싶지 않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그렇지만 그렇게 말한 형도 결국 인내한 덕분에 프리미어리그에 진출하며 결실을 맺었잖아요. 저라고 왜 못하겠어요. 아무리 힘들어도 견딜 겁니다. 게다가 아직 전 제 한계조차 느껴보지 못했는걸요. 갈 길이 멀기만 한데 벌써부터 벽에 도달할 수는 없는 법이죠.”

24살이라는 나이가 도통 어울리지 않을 정도의 두둑한 배짱이 마음에 들었고 진지한 이야기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여유가 눈에 찼다. 모쪼록 계단을 밟고 가는 그 걸음이 부디 멈춤 없이 이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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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A조
6월11일 체코(1) VS 포르투갈(3)

4년 전 유로2004에서 나란히 4강까지 올랐던 포르투갈과 체코는 객관적으로 A조에서 8강 진출이 가장 유력한 국가로 꼽혔다. 맞대결에 앞서 각각의 서전도 승리로 장식했던 터였으니 보다 흥미로운 일전이 예상됐다. 하지만 분위기가 같지는 않았다.




결과와 내용 모두 완벽에 가까웠던 터키전 승리 후 포르투갈은 자신감이 충만했고 만족스럽지 않은 과정 속에 어렵사리 개최국 스위스를 꺾었던 체코는 무언가 불안했다. 더군다나 포르투갈에는 호나우도라는 걸출한 플레이어가 있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포르투갈에는 호나우도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경기 시작 8분 만에 체코의 수비라인이 불협화음을 일으키며 선제골을 허용했을 때 자칫 쉽게 무너질 수도 있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불과 10분 뒤 코너킥을 통해 동점을 만들며 균형추를 돌려세웠다는 점이다. 실상 이후 한동안은 밀고 밀리는 양상이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짚자면, 밀었던 포르투갈에 체코가 밀리지 않았을 뿐이다. 데코를 축으로, 호나우도가 거침없었던 포르투갈의 공세는 그야말로 파괴력이 넘쳤으니 이를 버터냈던 체코의 수비력과 수문장 체흐의 능력에도 박수가 필요하다. 하지만 후반 18분 데코의 패스에 이은 호나우도의 슈팅으로 체코와 체흐는 무너졌다. 인저리타임 콰레스마의 추가골로 3-1 종료. 포르투갈은 2연승으로 8강행을 확정지었고 체코는 답답해졌다.

6월15일 터키(3) vs 체코(2)
포르투갈의 진출과 스위스의 탄락이 확정된 상황이었기에 이날 맞대결의 승자가 8강행 티켓을 거머쥐는 외나무 승부였다. 뚜껑을 열기 전에는, 아무래도 이름값을 견줄 때 체코가 다소 유리하지 않겠냐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였다. 하지만 마지막 경기가 될 수 있다는 동일한 압박감에서 이름값보다 중요했던 것은 결과적으로 ‘기세’였다. 앞서 포르투갈에게 무기력하게 무너졌던 체코. 반대로 스위스와의 경기에서 종료 직전 역전골로 기사회생했던 터키. 분위기는 사뭇 달랐고 이것이 결국 성패를 갈랐다. 실상 분위기 반전에 성공했던 체코다. 전반 34분 콜레르가 축복받은 신체를 앞세운 헤딩으로 선제골을 넣은 것이 컸다. 더구나 후반 17분에 플라실이 추가골까지 기록했으니 이것으로 끝났다는 느낌이 강했다. 공격 쪽으로의 조직력은 미흡했으나 여전히 막아내는 견고함은 흠잡을 데 없었던 체코의 전력을 감안할 때 2골차는 터키에게 상당한 부담이었다. 하지만 이때부터 예기치 않은 전개가 흐르기 시작한다. 후반30분 2차전의 ‘신데렐라’ 아르다가 만회골을 터뜨리며 일방적이던 물줄기를 차단했다. 새내기의 패기는 행운까지 불러왔는데, 종료 3분을 남기고 철옹성 같던 체코 골키퍼 체흐의 실수를 틈타 니하트가 동점을 만드는데 성공하는데, 다잡았던 승리가 물거품 되자 체코는 심히 흔들렸고 다시금 니하트의 비수에 꽂힌 지난 대회 4강은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B조
6월8일 독일(2) VS 폴란드(0)

2006월드컵 조별예선에서 맞붙었던 질긴 인연이 유로2008에서도 계속되며 독일-폴란드는 B조 예선 중 가장 흥미로운 매치업 중 하나로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결과는 지난 월드컵 때와 다르지 않았다. 독일은 우승 후보다운 짜임새를 과시하며 한 수 위의 전력을 선보인 반면 ‘달라진 모습을 보이겠다’는 다짐 속에 깜짝 이변을 노린 폴란드는 전차군단 앞에서 또 한번 분루를 삼켜야 했다. 차대전 당시 독일의 폴란드 침공과 유태인 학살로 인해 ‘유럽의 한일전’이라 불리는 라이벌전답게 양 팀은 경기 시작과 함께 치열한 공방을 이어갔다. 전반 20분, 0-0의 팽팽한 흐름을 깬 건 ‘운명의 장난’처럼 폴란드 태생의 클로제와 포돌스키였다. 클로제는 오프사이드 트랩을 무너뜨리는 발락의 패스를 이어받아 포돌스키에 연결, 선제골을 만들어내며 기선을 제압했다. 독일의 ‘세밀함’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비록 선제골을 빼앗겼지만 폴란드 역시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벤하커 감독은 후반 시작과 함께 승부수를 던졌다. 공격의 실마리를 풀지 못하며 부진했던 주라프스키를 빼고 브라질 출신으로 대회 직전 귀화한 게레이로를 투입한 것. 게레이로는 투입과 동시에 날카로운 패싱력을 선보이며 폴란드의 공격에 숨을 불어넣었지만 독일의 골문은 쉽사리 열리지 않았다. 폴란드의 역공도 잠시, 포돌스키는 환상적인 발리슈팅으로 또 한번 폴란드의 골망을 흔들었고 그의 ‘또 다른 조국’은 그대로 쓰러졌다.

6월12일 크로아티아(2) vs 독일(1)
1차전에서 똑같이 승점 3점을 획득했건만 독일은 폴란드를 상대로 우승후보다운 경기력을 선보였던 반면, 크로아티아는 한 수 아래 오스트리아를 맞아 고전을 면치 못했다. 따라서 전차군단으로 승부의 추가 쏠리는 건 어쩌면 당연했다. 하지만 크로아티아는 독일을 물리쳤고 세간의 예상이 틀렸음을 보란 듯이 증명했다. 강력한 수비조직력과 중원에서의 우세가 빚어낸 값진 승리였다. 1차전과 동일하게 꾸려진 크로아티아의 포백라인은 전차군단의 예봉을 철저히 무력화시켰고 공격시, 모드리치의 볼배급을 기반으로 빠른 역습 전개를 시도하며 전차군단의 수비진을 당황케 했다. 반면 독일은 유난히 무기력했다. 최전방에 투입되는 패스는 번번이 차단당했고 세트피스와 중거리 슈팅에 의존한 채 공격활로를 찾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결국 크로아티아는 전반 24분 프라니치의 크로스를 받은 스르나가 기습적인 선제골을 성공시키며 전반을 리드한 채 끝마쳤다. 후반 시작과 동시에 뢰프 감독은 얀센을 제외하고 오돈코를 투입, 반격에 나섰다. 하지만 오히려 후반 17분 올리치에게 추가골을 허용하며 패배의 그림자는 더욱 짙게 드리워졌다. 경기 종료 10분을 남기고 포돌스키의 만회골로 추격의지를 불태웠지만 경기를 뒤집기에 크로아티아의 수비력은 매우 촘촘했다. 1998월드컵 8강에서의 완승(3-0)에 이어 또다시 메이저무대에서 전차군단을 물리친 크로아티아의 8강행이 확정된 순간이었다.

C조
6월9일 네덜란드(3) VS 이탈리아(0)

무려 30년 동안 ‘낮은 땅’을 지배한 징크스가 있었다. 네덜란드는 1978년 아르헨티나에서 열린 월드컵 이후 단 1번도 이탈리아에게 승리를 거두지 못한 상태였다. 때문에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예선기간 네덜란드가 보여준 실망스러운 공격력을 떠올리며 오렌지군단의 ‘아주리 징크스’가 계속 이어질 것이라는 다소 어두운 전망을 내놓았다. 그러나 네덜란드는 ‘카테나치오’로 월드컵을 제패한 이탈리아를 상대로 3골이나 뽑아내며 모두의 예상을 보기 좋게 뒤엎었다. 모든 것은 전반26분 PA 왼편에서 슈나이더가 보낸 낮고 빠른 패스에서 시작됐다. 이것이 반 니스텔루이 발에 맞고 들어감과 동시에 분위기는 네덜란드 쪽으로 기울었다. 5분 후 반 브롱코스트의 다리에서 시작해 쿠이트의 머리를 거친 패스를 슈나이더가 환상 발리슛으로 마무리 지었을 때 사실상 승부는 갈렸다. 강하고 빨랐던 네덜란드에 반해 이탈리아는 시종일관 무거웠고 또 무력했다. 토니는 외롭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고립됐고 이따금씩 머리를 향해 올라오는 크로스를 보며 뛰기 바빴다. 그러나 오이에르와 마티센, 두 센터백에 가로막히며 이마저도 쉽지 않았다. AC밀란이 자랑하는 중원의 삼총사 가투소 피를로 암브로시니는 중원장악에 실패했는데 바로 이 부분이 이탈리아의 중요한 패인으로 분석됐다. 가투소의 터프한 장악력을 찾을 길이 없었고 악전고투하던 피를로는 안쓰러움마저 자아냈다.

6월17일 프랑스(0) VS 이탈리아(2)
개막 전만 해도 우승 후보 간의 만남으로 이목을 끌었으나 뚜껑을 열어보니 ‘조별리그 탈락’이라는 벼랑 앞에서 가진 대결이었다. 도메네크 감독은 지난 네덜란드전에서 무려 4골이나 허용한 수비라인에 변화를 줬다. 체력저하로 다소 부진한 모습을 보였던 튀랑 대신 아비달에게 중앙수비를 맡긴 것. 이에 맞서는 이탈리아는 카사노-토니 투톱으로 공격에 변화를 꾀했다. 그러나 도메네크 감독의 무리한 용병술은 결국 ‘화’를 불러일으키고 말았다. ‘센터백’이라는 맞지 않은 옷을 입은 아비달은 불편해보였고 계속해서 토니에게 뒷 공간을 내주며 불안한 모습을 선보였다. 급기야 전반 23분에는 페널티에어리어 안에서 골키퍼와 1대 1 찬스를 만든 토니에게 무리한 반칙을 가한 뒤 레드카드로 경기장을 떠나고 말았다. 키커로 나선 피를로는 빠르고 강한 슈팅으로 선취골을 기록했다. 실점도 실점이나 전반 10분 리베리가 부상으로 교체된 데 이어 아비달까지 레드카드로 잃었으니 프랑스 입장에서는 전의를 상실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프랑스의 불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후반 17분 데 로시의 프리킥이 벽을 쌓았던 앙리의 발을 맞고 굴절되며 이탈리아의 2번째 골로 연결된 것이다. 같은 시각 루마니아를 2-0으로 누른 네덜란드의 ‘덕’까지 보태 이탈리아는 조2위로 8강 진출에 성공했고 지네딘 지단의 은퇴 이후 첫 메이저대회에 나선 프랑스는 총체적인 부진 속에서 쓸쓸히 퇴장했다.

D조
6월10일 스페인(4) VS 러시아(1)
‘에이스’ 아르샤빈이 지역예선 최종전에서 퇴장을 당해 본선 2경기에 나설 수 없었고, 2007-08UEFA컵 득점왕 포그레브니야크는 부상으로 엔트리에서 제외됐다. 게다가 V.베레주츠키의 부상으로 줄곧 손발을 맞춰온 플랫3 대신 익숙지 않은 플랫4를 가동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러시아는 온전하지 못한 상황에서 필드에 나서야했고 그러한 약점은 고스란히 드러났다. 물론 스페인은 조직력이 정비되지 않은 러시아의 약점을 놓치지 않고 유효적절하게 공략했다. 스페인이 기록한 4골 모두 상대공격 차단 후 기습적인 역습에 의한 카운터 펀치였다. 전반20분 카프데빌라가 수비진에서 단박에 넘겨준 볼을 토레스가 욕심을 부리지 않고 비야에게 이어주며 첫골을 만들어냈고, 전반44분 카프데빌라-이니에스타-비야로 연결된 단 2번의 패스로 골 폭죽을 쏘아 올렸으며, 후반30분에는 파브레가스가 센터서클 부근에서 넘겨준 원터치 패스를 비야가 침착하게 밀어 넣으며 러시아의 혼을 빼놓았다. 4번째 파브레가스 골 역시 비야의 저돌적인 역습돌파가 시발점이었다. 물론 러시아에게도 기회는 있었다. 전반23분 시체프의 크로스를 지리아노프가 슈팅으로 연결했지만 골포스트를 맞추는 등 불운도 따랐다. 그때 ‘정점’을 찍어줬더라면 결과가 이렇게까지 참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참이나 늦은 후반41분 코너킥을 파블류첸코가 헤딩골로 연결했지만 러시아의 추격은 거기까지였다.

6월14일 스웨덴(1) VS 스페인(2)
거침없는 상승세를 이어온 호적수끼리 대결답게 팽팽한 균형이 이어졌다. 일단 먼저 폭발한 쪽은 스페인이었다. 전반15분 실바의 크로스를 토레스가 동물적인 감각으로 발에 맞추며 자신의 유로대회 1호골을 터뜨렸다. 허나 전반24분 '위험지역의 파수꾼' 푸욜이 발바닥 부상으로 알비올과 교체되어 나가며 암흑의 그림자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흔들리기 시작한 수비진은 10분도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위기를 자초했는데 상대 풀백 스투르가 오른쪽 측면에서 넘겨준 볼을 제대로 커버하지 못한 채 이브라히모비치에게 힘없이 골문을 열어주고 만다. 하지만 암초가 드리운 건 스웨덴도 마찬가지였다.


후반 시작과 함께 이브라히모비치가 무릎 통증을 호소하며 로젠베리와 교체된 것이다. ‘승리의 열쇠’는 핵심선수의 부상으로 좌불안석했던 스웨덴에 차분히 대응한 스페인의 몫이었다. 스페인의 수비진이 시간이 흐를수록 안정감을 더해간 반면 스웨덴은 이브라히모비치의 공백을 여실히 체감한 채 마지못해 잠그기를 선택한다. 이에 스페인은 후반14분 공격성향이 강한 파브레가스와 카솔라를 투입하며 스웨덴을 쉴 새 없이 두드렸다. 기어코 후반종료 직전 카프데빌라가 후방에서 길게 넘겨준 볼을 비야가 상대 수비수 한손을 가볍게 유린한 뒤 골키퍼 이사크손 옆을 스치는 슛을 작렬시키며 치열했던 승부에 종지부를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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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