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반 7분. 코너 근처에서 이영표가 그리수 선수의 파울을 얻어 낸 뒤 기성용이 프리킥을 차올렸습니다. 문전에서 올라오는 볼을 보던 이정수가 그리스 수비수들 사이로 뛰어 올리며 선제골을 터뜨렸습니다. 2002년 월드컵 3-4위전 터키전에서 이을용이 터뜨렸던 우리나라 대표팀 월드컵 최단시간 골을 2분이나 단축시킨, 시원한 선제골이었습니다.

이정수. 그는 사실 대한민국 대표팀의 베스트 11은 아니었습니다. 허정무 감독의 애제자 조용형 - 곽태휘 두 센터백 콤비의 그늘에 가려진 제 3의 수비수였죠. 처음부터 선발을 장담하던 멤버는 아니었으나 곽태휘의 부상과 조용형의 대상포진 증세로 이정수는 그 공백을 메울 대안이었고, 덕분에 월드컵 출전이라는 기회를 잡을 수 있었죠.

이정수는 기회란 노력한 자만 붙잡을 수 있다는 축구계의 정설을 실력으로 입증했습니다. 선수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보통 유럽 수비수들은 세트 피스 상황에서 골대를 향해 올라오는 볼에만 시선을 두고 주전 스트라이커의 움직임에만 집중한다고 합니다. 그말은 곧 뒤에서 뒷공간을 노리며 달려 들어오는 수비수는 열외로 둔다는 이야기와도 같죠. 덕분에 이정수는 그리스의 장대숲같은 수비수들에게서 자유로울 수 있었고 선제골은 그렇게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이정수에게 있어 그리스전은 참으로 특별했을 듯합니다. 비주전으로 분류됐던 자신이 부상선수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주전으로 투입됐을 때, 스스로 많은 책임감과 부담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선제골을 터뜨려 승리의 초석을 다졌고, 무엇보다 무실점으로 경기를 마감하며 승리로 이끌었기에 주전 센터백으로 느꼈을 마음의 짐들을 한 번에 훌훌 털어버릴 수 있었던 경기였을 것입니다.

“제가 대표팀 수비수들 중에선 나이도, K리그 경험도 제일 많아요. 어느 정도 리드해야한다는 생각은 늘 갖고 있어요. 그렇지만 전 이제 막 대표팀에 들어왔잖아요. 그 때문에 A매치 경험이 제일 적죠. 대표팀 경험이 풍부하지 못하다보니 위축되는 부분도 없지 않아요. 좀 더 경험도 쌓고 자신감도 붙으면 선수들한테 이렇게 하자고 얘기할 수 있겠지만, 글쎄요. 아직은......”

2008년 막 대표팀에 승선했을 때 이정수가 제게 해준 이야기입니다. 만약 단 한번의 패스미스로, 또는 상대 공격수의 돌아들어가는 움직임을 놓치거나 수비 뒷공간을 내주며 골을 허용했다면, 다른 선수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하더라도 스스로 ‘내가 들어가서 골을 허용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하는 지레짐작으로 마음이 위축됐을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건 마음이 위축될 때 플레이도 함께 위축된다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포백라인에서의 센터백은 기존의 홍명보 감독의 경우처럼, 리더로서 당당하게 수비수들을 이끌어야하는 법인데, 마음이 불안하거나 스스로를 믿지 못한다면 최후의 보루로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죠. 수비불안은 심리적인 요인에서도 나오기 쉬운 법인데, 그런 점에서 이정수가 보여준 120% 활약은 남은 2경기의 선전도 기대할 수 있게 만들었기에 더욱 의미가 깊습니다.

이정수가 허정무호에 처음 승선한 때는 2008년 봄입니다. 2010월드컵 3차예선 북한과의 1차전에 나설 24명 엔트리에 이름을 올리며 다시 태극마크와 인연을 맺었죠. 무려 3년 만에 달게 된 태극마크였습니다. 사실 2005년 7월 동아시아선수권을 앞두고 대표팀에 전격 발탁된 바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당시 허벅지 근육이 파열되는 부상으로 중도하차했지만 말입니다.

당시 이정수는 제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아쉬운 전적이 있기에 마음을 비운 채 대표팀에 들어갔어요. 그저 뽑혔다는 사실에만 의의를 뒀죠. 당연히 곽태휘 선수가 뛸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발목 통증을 호소하며 못 뛰겠다고 하더군요. 그로 인해 제게 기회가 주어졌고 다행히도 ‘제 것’으로 만들며 잘 잡은 것 같습니다.”

당시 이정수는 북한전에 출장하며 ‘정대세를 잡아라’는 허 감독의 숙제를 완벽하게 해냈습니다. ‘허심’을 잡은 것도 그때부터였죠.

사실 이정수는 2002년 경희대를 나와 안양LG에서 프로에 데뷔할 때까지만 해도 공격수였습니다. 그런데 이듬해 당시 조광래 안양 감독이 수비수로의 보직 변경을 제안했습니다. 팀에 용병 공격수들이 포화상태였던 것도 이유였지만 무엇보다 스피드가 좋으며 제공권에도 강하기 때문에 수비수로서 성장하기에 좋은 DNA를 가지고 있었기에 장기적으로 발전 가능성이 더 컸다고 본 것이죠.

물론 이정수 본인도 저와의 인터뷰 당시 이를 인정했습니다.

“공격수 출신 수비수로서 말씀드리자면, 저 같은 ‘보직변경’이 수비수로 살아가는데 있어 더 도움이 되는 순간도 많습니다. 아무래도 상대 공격수의 움직임을 읽는 것도 수월하거니와 패싱력이나 기동력 또한 전문수비수 출신보다 뛰어날 수밖에 없으니까요.”

이정수가 빛을 보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죠. 2004년 인천으로 이적해 2005년 인천에 K-리그 준우승컵을 안겼고 그때의 활약으로 2006년 수원으로 이적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장외룡 감독은 내게 대표팀 감독이라면 이정수를 발탁할 것이다, 그는 K-리그 최고의 수비수이다, 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죠.

수원에서 그는 날개를 단 듯 거침없이 질주했지만 아드보카트 감독은 그를 외면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부상이라는 악재까지 닥쳤죠. 그러나 워낙에 긍정적인 사람인지라 빅버드에 앉아 손수 수원선수단의 전력분석을 위한 경기 촬영 장면을 찍겠다며 일일 경기분석관 역할을 자처하기도 했으며, 관중석에 앉아 삶은 계란을 까먹으며 홈경기를 관람하다 중계 카메라에 잡힌 적도 있었죠. 팬들은 그에게 ‘계란정수’라는 별명을 지어주기도 했는데, 지금도 그는 그 별명을 얘기할 때마다 쑥스러운지 어쩔 줄 몰라합니다. ^^

2008년 한일올스타전에서는 K-리그 대표팀으로 나갔던 그가 2009년에는 교토로 이적, J리그 올스타에 뽑혔고 대회 최우수 선수에도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당시 J리그 진출 전에 밥 한번 꼭 먹자고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는데, 사실 그때만해도 저는 으레 하는 인사말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한데 전화가 왔더라고요. 밥 약속을 지키겠다면서요. 그런데 당시 제가 마감 중이라 제가, 감히, 그와의 밥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거절했습니다. 제 지인들은 월드컵 스타의 밥 약속을 거절했냐며 요즘 놀리고 있네요.

그때 일이 떠오르는 건, 그의 성품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냥 흘리는 말이 아니라 꼭 할 말만 하고, 그 말은 꼭 지키는 것. 한 마디로 됨됨이가 참 괜찮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아마 그래서 결국엔 월드컵이라는 꿈의 무대에서 드디어 축구인생의 꽃을 피울 수 있게 된 것이겠지요.

언젠가 그가 “10번 잘해도 1번 못하면 욕먹을 수밖에 없는 게 수비수의 숙명 아니겠냐”며 웃으며 해줬던 말이 생각납니다.

그는 참으로 씁쓸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했지요. 그래서 적어도 저를 비롯한 이 글을 읽는 사람들만큼은 단 1번의 실수로 인해 1골을 허용하더라도 2골을 막으면 되지 않겠냐며 박수치고 격려해주기를 바란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남은 2경기에서도 지금처럼만 뛰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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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어제 강원FC 1년차 신인선수가 재직증명서와 소득증빙 서류를 떼달라고 부탁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전 웃으면서 그럼 있다 오후까지 처리해서 보내주겠다고 원본을 받으러 사무실로 오라고 했지요.

그랬더니 지금 급하게 대출을 받기 위해 은행에 가는 길이라면서 은행에서 전화를 다시 하겠다고 하더라구요. 사무실에 들릴 시간이 없다면서 은행에 도착해서 은행 팩스 번호를 알려줄테니 팩스로 바로 넣어달라하면서요. 


집안이 어려운 그 선수는 가계에 빚도 많았고 오늘 오전까지 갚아야할 돈이 있었나봐요. 갑작스레 돈을 마련할 길이 없었던 그의 부모님은 고민하다가 아들에게 부탁을 한 거였죠. 사실 부모된 입장으로서 아들에게 어려운 모습을 보이며 손을 벌린다는 거...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는 것은 얼마나 상황이 급하고 어려웠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했습니다.그런데 1시간이 지나도 전화가 오지 않아 제가 전화를 걸었지요.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급하게 은행을 가는 길에 사고라도 난 것은 아닌지 하는 걱정이 들어서요.

"어떻게 된거야? 은행 도착했니? 팩스 번호 알려주면 지금 바로 보내줄게. 서류 다 만들어놓았어."

잠시 침묵하던 그 선수는 "아니에요. 안 보내주셔도 되요" 했습니다.

눈치없이도 저는 아무렇지 않게 "왜? 대출 안하기로 했어?"라고 바로 되물었죠.

역시나, 이번에도 잠시 뜸을 들이던 그 선수는 힘들게 말을 이었습니다.

"대출할 수 있는 자격이 안된대요. 사실 제 연봉만 보면 은행에서도 대출해주기가 힘들겠죠."

그 선수는 올 시즌 번외지명으로 프로에 입단한, 소위 말하는 '연습생'입니다. 드래프트에서 6순위 안에 들어가지 못한 선수들의 경우 번외로 프로에 지명을 받을 수 있게 되는데 이 선수들은 모두 연봉 1200만원에 계약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한달에 100만원의 월급을 받게 되고 세금 떼고, 클럽하우스 숙식비를 떼면 80만원 정도가 통장에 들어옵니다.

88만원 세대보다 더 어려운 이들, 그들은 바로 프로 축구 연습생입니다.

100만원이라도 안되겠냐고 하자 은행에서는 거래 기간이 1년도 안되고 월급보다 많은 돈을 대출해줄 수 없다고 했네요. 그래도 아들이 프로구단에 있으니까 어떻게든 대출이 되지 않겠냐고 부모님들은 믿으셨을텐데, 하던 선수의 낮은 목소리가 내내 귓가에 울려펴졌습니다.

지금 6월은 뜨겁습니다. 거리엔 한국 축구의 승리를 기원하며 빨간 옷을 입은 사람들과 신나는 축구 관련 음악들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박지성의 연봉이 얼마고, 이청용의 이적을 위해 빅클럽에서 이적료 베팅에 들어갔다고 하고, 16강 진출에 성공했을 때 대표팀이 받게 되는 수당은 얼마고...

빛나고 비싼 이야기들만 가득합니다. 그속에서 전반기 일정을 마치고 함량미달로 짐을 꾸리며 떠나가는 선수들이 있는가하면 80만원 남짓하는 월급을 아껴가며 부모님께 용돈을 드리고 핸드폰비가 5만원이나 나왔다고 이번달 예산이 초과했다며 한숨을 쉬는 선수들도 있고요.

그야말로 명과 암, 빛과 그림자입니다.

모두의 눈이 왼쪽 가슴에 박힌 태극마크에 쏠려 있는 순간, 태극전사들의 투혼에 박수치는 순간에도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묵묵히 땀흘리고 있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은 이땅의 K-리그 연습생들. 저 역시 88만원 세대라는 이름 아래 살고 있기에 그들의 모습에 더 시선이 가고 마음이 아픈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부디 바랍니다. 그들이 지금의 고난을 이겨내고 끝까지 축구선수로 멋지게 은퇴하고 싶다는 꿈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건 마치 제가 꿈을 포기하고 방황하는 것과 같으니까요. 그들의 앞날에 건승만이 가득하길, 온 마음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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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어머니, 아버지께서 많이 뿌듯해하셨어요. 주위에서 아버님한테 축하메시지 많이 가니까 약주 많이 하셨죠. 사실 국가대표에 발탁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어요. 그렇지만 부딪혀보면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고, 그 기회가 오면 잡으려고 했죠. 나이는 중요하지 않아요. 언제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기 위해선 준비를 잘하고 있자, 그래서 꼭 기회를 잡자라고 생각하며 운동했죠. 지는 걸 싫어하는 악바리 근성이 있어요. 제가.”



2년 전, 허정무 감독 밑에서 또 다른 신데렐라 스토리를 썼던 곽태휘 선수. 제가 그를 만났을 때 그는 6개월간의 재활을 마치고 복귀한지 얼마 안됐을 때였습니다. 2007년 11월25일 포항과의 FA컵 결승 1차전에서 곽태휘 선수는 극적인 역전골을 터뜨리며 전남의 대회 2연패의 초석을 마련했습니다.

이듬해 1월에는 ‘생애 첫 국가대표 발탁’이라는 경사까지 누렸습니다. 한데 금상첨화라고 A매치 데뷔전과 데뷔골 기록이라는 겹경사도 맞았으니 웃음이 가실 길 없었죠. 특히 2010월드컵 3차예선 투르크메니스탄전에서 터진 A매치 데뷔골은 550분 간 이어졌던 대표팀 골가뭄을 해갈했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깊었습니다.

하지만, 호사다마라고 부상이 그의 발목을 잡고 말았습니다. 3월8일 포항과의 개막전에서 왼쪽발목 인대파열로 교체아웃 된 이후 근 6개월동안 재활에 매진해야만했습니다. 그랬던 그가, 또다시 부상 때문에, 이제는 다 올라갔다고 생각한 월드컵이라는 고지에서 다시 내려와야만 합니다. 부상은 그렇게 또다시 그를 붙잡았군요.

“축구를 하면서 부상이 많았어요. 고등학교 때는 눈을 다쳤고 대학교 때는 어깨도 다치고 프로와서는 발목에 무릎까지... 한번 다치면 부상이 심해 오래 쉬어야만 했어요. 제가 생각해도 너무 많이 다치면서 축구를 했던 거 같아요.”

아시겠지만 그는 한쪽 눈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이제는 익숙해졌다며 담담히 말했던 곽태휘 선수였습니다.

“눈은 고등학교 3학년 올라갈 적에 다쳤어요. 처음엔 다쳤을 땐 어머니가 많이 슬퍼하셨어요. 공에 맞았는데 그 순간에 공이 돌면서 망막이 찢어지고 말았어요. 수술을 했지만 시력은 돌아오지 않았죠. 하지만 요즘은 일부러 그런 얘기를 안하려고 하는데요, 운동하는 선수들은 다들 부상 때문에 힘들어하면서 운동해요. 저만 특별한 게 아니니까요. 처음엔 많이 불편했는데 이제는 많이 적응했어요. 아직까지는 조명을 본다거나 햇볕이 비출 때는 거리가 안 맞고 글씨가 잘 안 보이는데, 한쪽으로만 생활하다보니 시력이 점점 나뻐지고 있어요. 나이를 좀 먹으면 그나마 보이던 눈이 더 나빠질까봐... 그게 걱정이에요. 눈이 점점 나빠지고 있는데, 이제 어떻게 해야하나. 한번씩 그런 생각할 때가 있어요. 그럴 때 생각만 이레 하는데 답이 없으니까 막막하더라고요.”

그러고 보면 그는 참 오뚝이 같은 인생을 산 듯했습니다. 17살 늦은 나이에 축구를 시작한 것도 그랬고, 한쪽 눈의 시력을 잃었지만, 보란 듯이 일어서서 프로에 입단했고 결국엔 태극마크까지 달았으니까요.

“운동은 어릴 때부터 많이 좋아했어요. 왜관에서 인문계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1학년 여름방학 때 대구공고에 가서 테스트를 받았어요. 그때 감독님께서 졸업할 때까지 한게임도 못 뛸 수도 있다. 지금와서 뭘하겠느냐, 라고 하셨던게 생각나요. 그래서 축구를 할 수 있게만 해달라고, 그 다음은 제가 알아서하겠다고 했는데, 알겠다며 받아주시더라고요. 처음에 대구공고 축구부에 들어가서 다른 친구들이 훈련할 때 저는 뒤에서 기본기를 연습하곤 했어요. 늦게 들어왔으니까 당연히 그래야하니까 스트레스는 없었어요. 제가 하고 싶어서 했기 때문에 늘어가는 과정을 즐기면서 했어요. 힘들 때도 있었지만 제가 좋아서 시작한 축구니까 즐기면서 하려고 했죠. 처음엔 가족들 반대도 심했지만 제가 고집이 있어요. 한다고 하니까 결국 다들 허락해주셨죠. 그리고 나서 경기에는 1학년 말부터 투입이 됐는데, 생각보다 기회가 빨리 왔죠.”

. 17살 적 처음 축구부 문을 두드렸을 때, 그 나이에 축구를 시작하기엔 너무 늦었다는 말에좌절했지만, 혹은 망막 부상 이후 “축구선수로 대성하기는 힘들 것”이라는 세간의 목소리에 흔들렸다면, K리그와 대표팀을 누비는 곽태휘 선수의 모습을 우리는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날, 제가 만난 곽태휘 선수는 참으로 단단했고, 역경에 굴하지 않던 ‘긍정’으로 똘똘 뭉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저도 솔직히 인간인데 그런 거 한번씩 생각하죠. 안 다쳤으면 어땠을까 생각도 해봤거든요 지금 안 다쳤으면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지고 어느 정도 위치까지 올라가있을까, 하고요, 하지만 생각만 하면 가슴만 아프죠. 이미 다친 걸 돌릴 수는 없으니까요. 너무 급하게 올라가서 그런가 돌아보라고 그랬나 하는 생각도 많이 들어요. 지금부터 다시 또 올라가면 되요.”

하늘은 내게 월드컵을 허락하지 않았지만, 내게는 또 다른 길이 있을 것이라고 결코 세상에 지지 않겠다고, 지금도 곽태휘 선수는 생각하고 있겠지요.

“계속 발전하고 싶어요. 점점 더 발전해서 말했듯이 기회가 되면 다른데 가서 부딪혀보고 싶어요. 여기서 멈추는게 아니라 계속 업그레이드 되는 선수가 되고 싶어요. 사람은 자기 마음먹기에 달린 것 같아요 나쁜 일이 있어도 나중에 잘될 거니까 신경쓰지 말자, 하며 좋은 쪽으로만 생각해요. 시련이 와도 역경이 와도 다시 할 수 있다고 마음 먹고 준비하면 일어서다 보면 좋을 결과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마인드도 좋은 쪽으로만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2년 전 제가 말했던 것처럼 그는 계속 도전하고, 그 속에서 발전하는 선수가 되고 싶다는 꿈을 여전히 꾸고 있을테니까요.

그리고 월드컵에 나서지 못한다고 하여도 여전히, 곽태휘 당신은 우리들의 국가대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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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지난 한일전 2-0 통쾌한 승리로 모두의 관심은 박지성에게 쏠려있습니다. 경기 내내 두 개의 심장이라는 별명처럼 지칠 줄 모르는 활동량을 선보이며 공수의 징검다리를 역할을 하던 모습은 왜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에 그가 필요한지 알게 해주는 대목이었습니다.

경기 시작 전 출전선수 명단을 알릴 때 울려퍼지던 일본 서포터들의 야유를 들으면서 한국 밖에서도 모두가 주목하는 키 플레이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기도 했고요,


박지성의 세레모니 또한 연일 화제였죠. 전반 선제골을 터뜨린 후 무심한 표정으로 관중석을 바라보던 박지성의 세레모니는 언론에서도 많이 궁금해했는데요, 저 역시 어떤 대답이 나올까 무척 궁금했답니다.


사실 그간 박지성은 히딩크 감독을 비롯해 동료 선수들과 주로 얼싸안으며 세레모니를 하곤 했는데요, 가끔 손으로 심장을 두드리거나 아래에서 위로 올리면서 관중들을 ‘Cheer up’ 시키는 세레모니를 하기도 했지요. 예전에 A매치에서 골을 성공시킨 후 손가락을 X자로 교차하는 세레모니를 했었는데, 그때 많은 기자들은 박지성을 기다리며 그 세레모니의 의미를 궁금해했답니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어떤 의미를 갖고 한 건 아니었는데...”였습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의미가 있어보였어요. 그가 관중석을 물끄러미 쳐다봤을 때 경기장 내 일본 팬들은 침묵했으니까요. 그의 표정에서는 “봐라. 이것이 바로 대한민국의 실력이고 투혼이고 저력이다”라는 뜻도 읽혀졌거든요.


이번에는 예상을 빗나가지 않는 대답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자신에게 보낸 야유에 답을 하고 싶었다는 박지성의 대답.

그 말 속에서 세계 무대 위에서도 담대하게 뛰던 모습이 떠올랐고, 그 시간들 속에서 우리의 생각보다 더 크게 성장한, 무거운 존재감을 함께 느낄 수 있었습니다.

보통의 선수들은 그러한 야유를 들으면 부담을 갖거나 혹은 흥분하거나, 이렇게 극으로 갈리기 쉬운데 외려 침착한 모습으로 실력으로 승부하겠다던 박지성의 모습에서는 냉철한 전략가의 모습으로 보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한일전을 앞두고 가진 외신 기자들과의 인터뷰 도중에는 “교토 퍼플상가에서 뛰던 10년 전보다 일본 대표팀은 확실히 약해졌다”는 발언으로 모두를 놀라게 하기도 했지요.

사실 1999U-20세계청소년축구대회 준우승, 2000시드니올림픽 8강, 2001아시안컵 우승을 거두며 2000대 초반 아시아의 축구강국은 일본이라는 여론이 지배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10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한국의 축구는 연일 진화하고 있지만 일본은 나카다 히데요시의 은퇴 이후 쇠퇴하고 있다는 게 대세입니다.

그런 가운데 박지성이 일본대표팀의 현 전력과 관련해 아주 냉정한 분석을 해줬네요. 알다시피 존경하고, 또 닮고 싶은 사람의 말에는 힘이 있습니다. 플라시보 효과 또한 가져다주죠. 그런 점에서 박지성의 말은 우리 대표팀 선수들에게 큰 힘이 됐을 거라고 봅니다. 아무래도 한일전은 스포츠이기 전에 우리의 가슴 아픈 역사가 먼저 떠오르기에 국민들은 승리를 바라고, 그러한 간절한 마음을 알기에 선수들은 이겨야만 한다는 압박 속에서 경기에 임합니다. 선수단 내 만연해있던 부담을 긍정의 힘으로 바꾼 박지성은 타고난 리더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는 개인적으로 4강이라는 불가능한 목표를 세운 것에 대해서도 그것은 일본만의 목표일 뿐 우리는 16강 진출이 목표라고 말했는데요, 그 간결한 대답에서 현실을 회피한 채 오리무중하고 있는 일본대표팀에 대한 나름의 비꼼(?)도 느껴져서 ㅎ 그 말을 들으며 혼자 지긋이 웃어보기도 했습니다.

한데 박지성은 경기가 끝난 후에도 일본대표팀의 수준이 10년 전보다 낮아졌다고 외신과의 인터뷰 도중 했던 말을 다시 하며 재확인해줬는데요, 정말 놀라움의 연속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항상 뭔가 민감한 질문에는 즉각적인 대답을 회피하던 박지성이었기에, 기자들도 “~ 때문에 ~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하겠지, 하며 그의 대답을 늘 예상하곤 했거든요. 상대의 평가를 내리기에는 늘 조심스러워했고, 늘 잘한다고 칭찬했고, 정석에 가까운 말들만 하던 박지성이었죠. 할 말은 하되, 냉정함을 잃지 않는 모습에서 캡틴이 달라졌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지난 한일전에서 전반 17분 이청용 혼다를 태클로 저지하자 심판이 휘슬을 불었죠. 그 다음 장면이 참 인상적이었는데요, 박지성이 주심에게 다가가 뭔가 이야기를 하며 제스처를 취하는 모습이었죠. 주장은 선수를 대표해 심판에게 항의를 할 권리는 없다는 건, 피파 경기 규칙서에도 나오는 ‘룰’이지만 그래도 주장이라면 의도하지 않은 정당한 태클이었다며 심판에게 다가가 대표로 말하는게, 선수단 내의 암묵적인 또다른 ‘룰’이죠.

그간 경기장 내에서 늘 착했던 주장은, 2010남아공월드컵을 앞두고는 적극적으로 변했습니다. 단순히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하기에 이청용 선수를 대신해 정당한 태클이었다며 얘기해준 것은 아니겠지요. 그간 다른 선수 뿐 아니라 본인이 반칙을 당해도 벌떡 일어나 다시 달리는 박지성이 지난 한일전에는 엔도의 백태클로 넘어지자 주심에게 왜 경고를 주지 않느냐는 제스처도 취해봤고요.

이뿐만이 아니죠. 박지성이 주장이 된 이후 대한민국 대표팀에는 크고 작은 변화들이 생겼죠. 늘 정해진 시간에 다 같이 아침을 먹는 규칙도 자유롭게 먹는 걸로 바꿨구요, 당일 아침이 되야지만 통보되던 훈련 스케쥴도 전날 공지되는 걸로 바꿨죠. 선수들도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 이유였는데,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위치에서 능동적으로 준비하는 위치로 바꿨다는 점에서 이러한 변화는 혁신이었습니다.

경기를 앞두고 가는 버스 안에서 신나는 음악을 들으며 중압감에서 벗어나게 하는가하면 고개 숙인 채 끌려나가는 듯이 앉아 있던 라커룸 분위기도 자신들이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자유롭게 경기에 나설 준비를 할 수 있도록 바꿔놓았습니다.

뭐든 즐기는 마음으로 해야 실력이 발휘될 수 있는 법이죠. 잘해야만한다는 생각이 중압감으로 작용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양발을 묶는 보이지 않는 족쇄로 작용하겠죠.


이번 월드컵은 사실상 그에게 마지막 월드컵입니다. 더 이상 월드컵에 나서지 못한다고 해서 그의 축구인생이 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죠. 더 많은 것들을 기대하게 만드는 박지성의 모습을 보며, 이번 남아공월드컵 이후 펼쳐질 박지성의 축구인생이, 저는 무척이나 궁금하고 또 기다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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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챔피언결정전은 늘 빅매치일 수밖에 없겠지만 근래 들어 이보다 더 큰 빅매치는 없을 듯 합니다. 12월 3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2008 K리그 챔피언결정전 1차전 FC서울과 수원삼성과의 경기가 바로 그랬죠. 평일 저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플레이오프 최다 관중인 3만9011명이 몰렸으니 그만큼 많은 이들의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방증이겠죠.

경기 시작 2시간 전에 경기장에 도착했는데, 벌써부터 사람들이 잔뜩 몰려들어 푸드코드에서 식사하는 데만 40분의 시간이 걸렸답니다.

 

경기 초반만 해도 상대적으로 빅매치 경험이 적은 어린 선수들로 구성된 서울이 수원에 다소 밀리는 듯한 양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축구는 골이 모든 것을 말하죠. 전반 21분 기성용 선수가 왼쪽 코너킥 라인에서 찬 공을 아디가 솟구쳐 골대 오른쪽을 향해 밀어 넣었습니다. 수원 수비수들과 이운재 선수 모두 손 놓고 있었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손써볼 틈도 없이 선제골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승기는 서울이 잡은 듯 했죠. 중앙에선 조원희 선수가 전방에선 에두가 고군분투했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중원에서 패스미스가 계속 됐고 볼배급이 원활하지 못하자 에두-신영록 투톱이 할 수 있는 건 없었죠. 에두는 계속해서 움직이며 스스로 기회를 만드는 듯 했지만 신영록 선수는 안타깝게도 의욕만 앞서는 듯 하더군요.

한골을 헌납한 뒤 수원은 스리백에서 포백으로 전환했고 전반 내내 수원의 플랫4는 다소 불안한 모습이었습니다. 부상에서 회복해 오랜만에 출전한 이정수 선수는 다행히 시간이 지날 수록 안정된 수비력을 펼치더군요. 옆에 있던 전남 송정현 선수는 이정수 선수를 가리키며 후반전에는 더욱 나아진 움직임을 선보일 것이라 평하더군요.

후반 들어 서울은 데얀을 뺀 뒤 이을용 선수를 투입하며 4-4-2에서 4-5-1로 전형을 변화시켰습니다. 그러나 수원은 배기종, 이관우, 최성현을 차례로 투입시키며 적극적으로 ‘공격 앞으로’을 외쳤죠. 그 덕분이었을까요. 후반 34분 마토의 헤딩슛을 서울 김호준 골키퍼가 쳐냅니다. 그리고 튀어 나온 공을 곽희주가 재차 넣어 극적으로 동점골을 성공시켰습니다. 그리하여 1-1 무승부로 챔피언결정전 1차전 혈투는 끝이 났죠.

경기 종료 후 양팀 감독과 양팀 수훈선수인 곽희주 선수와 기성용 선수의 공식 인터뷰가 있었습니다. 이날 기성용 선수가 제일 마지막에 인터뷰를 하게 됐는데요, 많이 힘들었는지 벽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앉아 있더군요. 옆에 있던 구단 프론트는 열심히 부채질을 해주고 있었고요. 남은 마지막 힘을 쏟아내며 90분 풀타임을 소화했으니 기운이 없을 수 밖에요. 괜히 안쓰럽더군요. 그런데 그 와중에 차범근 감독은 “이청용은 전반 잠깐 반짝했지만 기성용은 나중에 발견하지 못했다”고 말씀하셨죠.

잠시 후 기성용 선수에게 차범근 감독의 혹평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자 담담히 오늘 몸상태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괜찮다고 말하더군요. 하나 속은 꽤나 쓰렸을 듯합니다. 후반 89분  자신이 시도했던 중거리슛이 그대로 결승골로 연결됐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죠.

자, 이제 승부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습니다. 오는 일요일 2차전에서 우승 트로피의 향방이 갈리게 되는군요. 어느 팀이 마지막 순간 웃을지 무척 궁금하고 또 기대가 큽니다. 블로그 독자들을 위해 오늘 현장에서 건진 따끈따끈한 영상, 편집해서 올려드립니다. ^^






경기장에 3시간 동안 있어야 하기 때문에 오리털 파카와 목도리, 장갑을 챙겨가지고 왔지요.

기자들에게는 치킨과 라면이 제공됐답니다.

그런데 기자들에게 나눠준게 또 하나 더 있었어요. 뭘까요?

바로 바로 소녀시대 포스터! 이걸 왜 나눠줬는지는 아무도 몰라요 ㅋ 후배는 완전 좋아서 어쩔 줄 몰라하더군요. ㅋ

K리그 우승컵입니다. 작년부터 이 모델을 사용하죠. K리그 엠블럼을 상징해서 만든 우승컵입니다.

평일 저녁이었는데도 관중이 참 많이 왔어요.

건너편에도 관중이 정말 많더라고요.

줌 기능을 이용해서 찍어보니... 역시 많군요.

수원 서포터스 그랑블루도 많았어요. 정신없이 깃발 흔들며 응원 중입니다.

중무장한 꼬마도 보였어요. 어찌나 FC서울을 열심히 응원하던지요.

이렇게 아들과 같이 온 어머니도 보였습니다. 유니폼을 나란히 입고 응원하는 모자의 모습이란. ^^ 저도 부럽더군요.

FC서울 구단에서 팬들에게 빳빳한 종이를 나눠줬는데 이렇게 접으면 부채가 되더군요. 잡고 흔들면 소리가 났어요. 아이디어 굿~

나눠준 종이를 펴면 요렇습니다.

출전선수 명단. 정규리그와 컵대회 멤버와 크게 다르지 않은 구성이었죠.

FC서울에서 깃발섹션을 펼쳐보였습니다. 자세히 보면 종이가 아니고 깃발임을 알 수 있을 거예요.

수원 그랑블루는 역시나 언제나처럼 멋진 카드섹션을. ^^

그랑블루가 '패륜송'을 부르자 '메롱'이라 적힌 판넬을 들더군요.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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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2008컵대회 포항과의 준결승전이 끝나고 믹스트존에서 만난 배기종은 “오랜만이에요”라는 인사와 함께 웃었다. 사실 배기종과 난 만나면 참 격없는 기자와 선수 사이다. 2년 전, 어리버리했던 기자와 또 역시 갓 프로에 뛰어 들어 어리버리했던 신출내기 선수는 인터뷰를 이유로 처음 만났다. 당시 배기종과의 인터뷰를 위해 서울에서 대구까지 내려가는 강행군을 했어야했는데, 내가 식사도 못한 채 자신을 만나러 왔다는 사실을 알고선 참 많이 미안해했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됐건만 그는 인터뷰 내내 “배 안 고프세요?” “안 피곤하세요?” 그렇게 부러 안부를 묻던, 참 착한 청년이었다. 배기종은.  


2005년 겨울 그를 부르는 프로팀은 어느 곳에도 없었다. 간신히 대학시절 감독님 소개로 대전시티즌에 입단할 수 있었다. 번외지명, 그러니까 지명 외 선수로 들어간 그에게 매달 쥐어진 돈은 85만원에 불과했다. 그 적은 돈으로 뭘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건만 그는 국민연금까지 낸다며, 국민연금공단 아가씨가 “배기종 선수, 내년에는 연봉 올려서 다른 선수들처럼 연금 많이 내세요”했다며 하하 웃었다. 그만큼 참 심성이 맑은 선수였다.

전반기만 해도 대전시티즌에서 그가 보여준 모습은 여타 신인들 사이에서 단연 도드라졌고 신인왕 No.1으로 꼽힐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올스타전 이후로 배기종의 컨디션은 점점 하향곡선을 그렸다. 골은 침묵하기 시작했고 모 구단과의 사전접촉과 태업파문에 얽히는 것으로 모자라 결국 임의탈퇴까지 당하고 말았다.

그래도 잘될 거라고 믿으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배기종은 다행히 맞트레이드 형식(황규환 +조재민)으로 수원에 입단하게 되었고 대전과의 개막전에도 인상깊은 모습을 보였다, 쏟아지던 빗속에서 거침없이 골문을 향해 드리블하던 오른쪽 날개 배기종의 모습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 물론 그 이후 크고 작은 부상들로 인해 1군과 2군을 오갔지만 결국 배기종은 컵대회 결승전에서 보란 듯이 해냈다.

그 멋진 슛을 모두에게 보여주기 위해 그렇게나 결승전 때 꼭 오라고 했나보다. 전반 11분 전남 풀백 유지노를 등진 채 돌며 터뜨린 선제골은 그날의 베스트골로 선정되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후반 33분 터진 에두의 결승골도 시작은 특유의 날랜 드리블로 오른쪽 측면을 무너뜨린 배기종의 발끝에서였다.

경기 후 MVP로 선정돼 잔뜩 긴장한 채 어쩔 줄 몰라 하던 그 모습을 보며, 배기종의 어머니는 얼마나 기뻐하며 눈물을 흘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 2년 전 배기종과 처음 만나 인터뷰 했던 그날의 녹취록을 블로그에다 공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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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드시죠?” “피곤하시겠어요.” “저 때문에 고생하시는 거 아니에요?” 인터뷰 내내 배기종이 제일 많이 했던 말이다. 그렇다. 이제 막 프로무대에 선 그는 모든 것이 조심스러웠다. 질문에 답할 때도 한참을 생각한 뒤 천천히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요즘이 제일 기쁘고 가장 행복해요. 고등학교, 대학교 시절에는 기뻤던 적이 별로 없었거든요. 지금 이렇게 잘되라고 그때 많이 힘들었나봐요.”

살짝 미소 짓는 얼굴에서 숨겨놓았던 슬픔이 묻어났다.

아버지. 이제는 담담하게 부를 수 있는 그 이름, 아버지. 오늘처럼 따뜻했던, 막 열한 살이 됐던 어느 봄날, 아버지는 가족 곁을 떠났다. 그리고 아버지의 부재와 함께 배기종의 축구인생도 시작됐다. 그런 아들을 위해 어머니는 뒤늦게 야식일을 시작해야만 했다. 어린 기종이 새벽운동을 나갈 때 어머니는 하루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어깨 위론 긴 밤 고단함을 켜켜이 쌓은 채로.

그때 배기종은 결심했다. 어른이 되야겠다고. 내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하루 빨리 어른이 되야겠다고. 그 뒤론 얼마 안 되는 용돈을 쪼개고 모아 축구화를 샀고, 어머니의 단잠을 위해 오후에는 전화조차 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눈물을 처음 봤던 열여섯 어린 나이에 이미 세상을 다 알아버린 아이. 그때부터 오직 어머니를 위해 공을 찼던 아이, 배기종. 그리고 지금,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빨리 어른이 되길 기도하던 그 아이는 어느덧 대전을 빛내는 별로 자랐다.

배기종, 그는 매일 그라운드 위에서 희망을 쏜다. 그렇다. 그의 발끝에서 터지는 것은 골이 아니다. 그것은 분명, 희망이다.

-작년 한해 마음고생이 심했다고 들었습니다.
제 축구인생이 그래요. 잘 하다 갑자기 뚝 떨어지고 기복이 심한 편이에요. 대학 1학년 때는 잘했어요. 게임 때마다 좋은 모습 보여줬고 그래서 늘 자신감에 차있었어요. 그런데 4학년 때 동계훈련이 거의 끝날 무렵, 종아리 근육이 파열되는 부상을 입었어요. 다행히 11월에 마카오에서 열린 동아시아대회 대표에 뽑혔지만, 1분도 뛰지 못했어요. 그런 모습을 보여 참 많이 속상했어요. 사실 처음 대학에 왔을 때만 해도 어느 정도 자신감이 있었거든요. 늘 자신감을 갖고 있었는데 그렇게 되니 제 자신이 원망스러울 지경이었어요.

당시 드래프트 결과를 전화로 듣고 핸드폰을 껐죠. 혼자 하루 종일 이곳저곳을 돌아다녔어요. 그날 눈도 많이 왔는데. 다음날 코치 선생님께서 “괜찮으니까 다시 잘 하라” 는 이야기를 듣고, 마음잡고 고등학교에서 운동하기 시작했어요.

드래프트 당시 어떤 팀에서도 저를 뽑아주지 않았을 때, 주위 많은 사람들은 “걱정하지 마라. 넌 꼭 갈 수 있다” 라고 말해줬어요. 물론 그때마다 ‘이렇게 속이 바싹바싹 타는 기분을 알까?’라는 생각이 들었죠. 많이 힘들었어요.

-프로진출이 잘 풀리지 않았을 때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던가요.
초등학교와 달리 중학교부터는 ‘축구부 회비’ 라는 게 있어요. 그런데 가정형편상 회비를 낼 수가 없었고, 그래서 중학생이 되면서 축구부를 그만두려고 했어요. 그때 다행히 중학교 코치 선생님께서 면제를 해주셨고, 그 덕분에 계속 할 수 있었죠. 그때부터 쭉 고 1때까지 면제 받았어요.

중학교 3학년 당시 운동하면서 많이 맞았어요. 어린 마음에 그게 싫어 3학년 초에 친구 한명과 팀을 나왔어요. 나중에 어머니께서 “제발 다시 운동하라” 고 하셨고 코치님께 “용서해주고 다시 받아 달라” 며 우셨어요. 그때 이후로는 한 번도 그만두거나 도망간 적 없어요. 고등학교 2학년 시절에도 이유 없이 형들에게 맞고 그랬지만 단지 맞는 게 싫다는 이유로 그만두는 것은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꾹 참고 계속 운동했죠.

그 때문에 고등학교에서 후배들과 운동하며 지난 12월 한 달을 보낼 때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어요.

-그래도 이제는 후배들에게 희망이자 귀감인 선배가 됐네요.
아직은 아니에요. 이제 겨우 시작인데요. 작년 12월 한 달 동안 고등학교 후배들과 같이 운동하면서 많이 친해졌죠. 그 때문에 나중에 연습생으로 프로에 가고 나서도 후배들이 신경 쓰였던 것이 사실이에요. 지금도 종종 후배들에게 연락이 와요. 용품 달라고 할 때마다 준다고는 하는데 막상 크게 줄 게 없어, 요즘은 그게 참 미안해요.

-축구는 어떻게 해서 시작했나요?
초등학교 4학년 때 감독님이 절 찾아왔어요. “축구 잘한다고 소문났는데 축구부 들어올 생각 없냐”고 물어보셨죠. 그 시절 제가 본 축구부는 매일 맞고 뛰는 이미지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축구부 같은 거 하면 안 되겠다’ 는 생각이 들어 거절했죠. 그런데 저희 외삼촌이 축구를 정말 좋아하시거든요. 제게 축구 해볼 생각 없냐며 권유하셨고, 마침 그때가 학교에서 축구부원을 뽑는다며 무작위로 아이들을 뽑아 축구부에 넣을 때였거든요. 선생님이 일부러 그랬는지는 몰라도 그 중에 저도 있었어요. 그렇게 축구부에 들어갔고 자연스럽게 축구를 시작하게 됐죠.

-어머니 홀로 힘들게 배기종 선수와 여동생을 키웠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초등학교 4학년 때 부모님이 이혼하셨어요. 그때부터 어머니는 외삼촌이 하시는 야식집에서 일하세요. 밤새 음식 만드시다 매일 새벽에 들어오는데도 혹 제가 신경이라고 쓸까봐 한 번도 힘든 내색 하지 않았어요. 그 때문에 학교에서 운동하다 무슨 일 때문에 집에 전화하려해도 어머니 주무시는 거 아니까 전화를 못 걸 때도 많았고요.

아버지하고는 연락이 안돼요. 고등학교 때는 몇 번 찾아오셨는데 어느 순간 안 오시면서 연락이 끊어졌어요. ‘프로에 와서 내가 잘 되면 아버지께서 연락하시지 않을까?’ 라는 생각역시 한 번도 해보지 않았고요. 아버지가 찾아오시면 만날 수야 있겠지만 전처럼 좋아질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전 그저 ‘꼭 성공해서 어머니 호강시켜드리자’ 는 생각뿐이에요.

프로 첫 데뷔전을 마치고 MVP를 탔어요. 어머니께 부상으로 받은 100만원 상품권을 드렸죠. 마침 그때가 어머니 생신이었거든요. 특별한 것을 준비 못해 그걸 선물로 드렸는데 어머니께서는 뭘 이런 걸주냐며 앞으로 더 열심히 하라고 고맙게 받으셨어요.

요즘은 “경건해져라” 는 말씀을 많이 하세요. 매스컴에서 제 이야기가 종종 나오는 것에 자만하지 말고 열심히 하라고 하세요. 참, 밥 잘 먹으라는 말씀도 많이 하세요. 밥을 많이 먹어야 힘이 난대요. (웃음)

-어떻게 프로에 적응 중인지 궁금합니다.
어머니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가서 잘하면 더 좋은 기회를 만들 수 있을 것’ 이라고 충고해주셨어요. 첫 연습게임 때 포워드로 뛰었는데, 지켜보시던 최윤겸 감독님이 안 되겠다며 미드필드로 내려가라고 하셨어요. 그때부터 미드필더로 뛰게 됐는데, 처음 보는 자리라 힘들었어요. 지금도 힘들지만 그때는 더 힘들었죠.

사실 대학 때는 오는 공만 받고, 만들어주는 것만 해결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제가 패스도 줘야하고 더 많이 움직여야하고, 지금도 그런 게 완전히 익혀지지 않은 상태라 아직은 힘든 게 사실이에요. 솔직히 아직까지 가끔 헤매기도 해요. 그럴 때마다 감독님이 잡아주시고 가르쳐주세요. 다들 알고 계시지만 감독님 참 좋으신 분이에요. 보잘 것 없는 상태로 왔는데도 저를 믿어주시고 이렇게 기회까지 주셨어요. 그래서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배우고 있어요.

참, 데뷔전 때는 체력안배를 잘못해 숨 쉬는 게 힘들었어요. 그때 정말 ‘이래서 프로무대가 높다는 말을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고요. 지금은 그래도 많이 적응한 것 같아요. 그리고 무엇보다 말이 많이 늘었어요. 첫 게임 때 처음으로 인터뷰를 하는데, 제가 할 말은 다하더라고요. 저도 놀랐어요. 그렇지만 지금은 그때보다 늘은 것 같아요. 다행이죠(웃음).

-그러고 보니 데뷔전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네요. 지난 2006년 3월15일 부산전 때 데뷔하며 골까지 기록하셨죠?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지만 막상 경기에 투입돼 뛰는데 정말 깜짝 놀랐어요. 와, 힘든 거예요. 호흡이 내려갈 생각을 안하더라고요. 얼마 뛰지도 않았는데 말이에요, 당황했죠. 골 넣고 나서도 너무 힘들었어요. 형들도 제가 헐떡헐떡 숨 쉬는 것 밖에 안보였대요. (웃음)

그때 데뷔전은 정말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그날 밤 혼자 누워서 이게 운일까, 실력일까, 생각했어요. 오늘 있던 일이 진짜였을까, 다시 떠올려보기도 했고. 골을 넣었다는 사실에 기뻐 잠이 안온건지 모르겠지만 도통 잠이 오지 않았어요. 그날 새벽 2시까지 잠 못 이룬 채 멀뚱멀뚱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어요.

데뷔전 이후 ‘힘들게 프로에 왔지만 열심히 하니까 나도 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때부터 자신감이 많이 생겼죠. 형들이 그래요. “너는 게임이 안 풀리면 무조건 들어간다. 그러니까 항상 들어간다는 생각을 가지고 몸을 만들어라.” 계속 열심히 하다보면 좋은 모습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요.

-올해 세운 목표가 있다면요.
처음 프로에 왔을 때 (강)정훈이 형이 해주신 말씀이 생각나요. “네가 못해서 연습생으로 들어온 게 아니니까 열심히 해. 열심히 하면 잘될 수밖에 없어.” 그 말씀이 맞는 것 같아요. 물론 프로에서 열심히 하는 것은 기본이에요. 다들 경기에 나가기 위해 치열하게 싸우고 있어요. 그 속에서 저 역시 항상 배우는 자세로 꾸준히 노력하고 싶어요. 쉽게 오지 않았잖아요. 어렵게 온 만큼 더 열심히 해서 경기장에서 좋은 모습 보여드리고 싶어요. 처음 프로에 왔을 때 세운 다짐들 기억하며 뛰고 싶어요.

-마지막으로 K리그를 사랑하는 팬들에게 한 말씀해주세요.
언젠가 (이)관우 형이 잡지 인터뷰에서 그랬어요. "오래 기억에 남는 선수가 되겠다" 고. 저도 꼭 그랬으면 좋겠어요. 모두의 기억에 오래도록 남는 선수가 됐으면 좋겠어요. 그런 선수가 되기 위해 항상 노력할 테니 이제 막 시작하는 저에게 많은 관심과 충고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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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배기종이 내게 했던 말, 2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나는 말을 마지막으로 긴 글을 마칠까 한다.

“어머니께서 늘 말씀하세요. 항상 겸손하라고. 이제 막 시작인 아들이 프로무대에서 자칫 흔들릴까봐 걱정되나봐요. 매일 기도하고 있으니까 열심히 하라고만 하세요. 어머니 말씀 새기면서 스스로에게 다짐하고 또 다짐해요. 자신감을 갖고 하자. 그리고 처음처럼, 처음 그 마음 잊지 말고 열심히 하자. 아직 부족한 것들, 스스로가 잘 아니까 주변에서 들려오는 말들 신경쓰지 않고 계속 열심히 할 생각입니다.”

참, 착한 아들 배기종은 컵대회 MVP 소감을 묻자 수요예배 때문에 경기장에 못 나오신 어머니가 제일 많이 생각났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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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허정무 감독이 이끄는 국가대표팀이 11일(토)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우즈베키스탄과의 친선경기에서 기성용의 선제골과 이근호의 연속골에 힘입어 3-0 대승을 낚았습니다. 허정무 감독은 오는 수요일에 열릴 아랍에미레이트와의 2010월드컵 최종예선을 준비하고자 모든 선수들을 교체하며 다양한 조합을 실험해보았습니다.

전반전에는 정성훈 신영록 투톱에 박지성 이청용을 윙미드로, 김정우 기성용이 중앙미드필더로 나섰습니다. 포백은 김동진 강민수 곽태휘 이영표가 맡았지요. 후반 초반에는 이근호가 들어가 정성훈과 투톱을 이뤘고 강민수 대신 조영형이 센터백을 봤습니다. 4-4-2로 나섰던 대표팀은 후반 중반 이후론 4-1-3-2로 포메이션이 바꿨는데요, 서동현 이근호가 투톱으로, 김형범 최성국이 윙어로 나서 공격을 책임졌고 송정현(앵커) 조원희(홀딩)이 중앙을 맡았습니다. 플랫4는 김치우 김동진 조용형 오범석이 책임졌습니다. 

첫골은 꽤나 빨리 터졌습니다. 전반 3분 라인을 따라 돌진하던 이청용이 페널티에어리어 오른쪽에서 크로스를 올렸고 중앙에서 이를 받은 기성용은 왼발 중거리슛으로 선제골을 터뜨렸습니다. 이후 후반 27분과 40분에는 이근호의 연속골이 터졌습니다. 미드필드 중앙에서 패스를 받은 이근호는 페널티에어리어 왼쪽에서 골키퍼의 움직임까지 살펴보며 침착하게 골을 성공시켰습니다. 13분 후에는 후방에서 김치우의 롱패스를 받은 서동현이 머리로 떨어뜨린 공을 이근호는 놓치지 않았고 그대로 오른발로 감아차며 결승골을 터뜨렸습니다. 스스로도 감격스러웠는지 절하는 듯한 모습으로 기도를 하더군요. 

이날 대표팀에는 A매치 데뷔전을 치른 선수들이 꽤나 많았습니다. 부산의 공격을 이끌고 있는 정성훈과 무회전 프리키커 김형범, 최고령(33세) 대표 선수 송정현이 그랬습니다. 아쉽게도 정성훈은 투톱 파트너 신영록과 함께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소속팀에서는 연일 득점포를 쏘아올렸는데 말이죠. 김형범은 소속팀 전북에서 보여줬던 모습처럼 날카로운 크로스와 전방을 향한 정확한 패스, 그리고 반대쪽에서 뛰는 날개공격수(이청용->최성국)와 끊임없는 스위칭 플레이를 펼치며 눈도장을 확실히 찍었습니다. 송정현은 그라운드 전지역에서 끊임없이 움직이며 공수 전반에 신경썼지만 아쉽게도 분주하다는 느낌만 들었습니다. 전남에서는 키 플레이어로서 제 역할을 톡톡히 해냈는데 말이죠.




믹스트존에서 만난 선수들의 표정은 꽤나 밝았는데요, 이번에도 박지성 선수 바로 앞에서 인터뷰할 기회를 잡았습니다. 그 짧은 시간에 샤워를 마치고 향수까지 뿌리고 나왔더라고요. ^^ 그런데 제가 던진 질문을 박지성 선수가 잘 못 알아듣고 재차 물었는데, 그 순간 긴장해서 버벅댔답니다. ㅠㅠ 이어 만난 선수는 기성용 선수였습니다. 2경기 연속골을 성공한 대표팀 막내 기성용 선수도 밝은 표정으로 인터뷰에 응했죠. 인터뷰룸에서 만난 허정무 감독은 "대표팀 크로스의 질이 높아졌는데 훈련의 성과냐"는 질문에 "이틀 연습하고 수준을 향상시켰다면 제가 신이게요"라고 허허 웃으며 한결 여유 있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이 모든 내용들은 위에 삽입된 동영상을 통해 들어보실 수 있습니다. ^^



개인적으로 제가 참 좋아하는 이청용 선수는 사진발이 무척 안 받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아픕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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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