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위에 선 김연아를 본 순간, 김춘수 시인의 명시 <꽃>이 떠올랐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오늘 오전 우리가 만난 김연아가 그랬다. 매혹적인 흑장미는 어느새 강렬한 레드로즈로 다시 나타났고, 소녀에서 여인으로 만개한 그 개화에 하염없이 박수를 칠 수밖에 없었다. 김연아는 29일(한국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 스테이플센터에서 진행된 2009 세계피겨선수권 여자 싱글 프리스케이팅에서 131.59점(기술점수 63.19 , 프로그램 구성점수68.40)을 받아 합산 207.71점을 기록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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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어느 누구도 이루지 못했던 꿈의 200점을 김연아가 드디어 돌파했다. 그녀의 손과 발 끝으로 이룬 쾌거였다.
검정색 드레스에 알알이 박힌 보석들은 ‘죽음의 무도’를 출 때마다 조명빛에 맞춰 반짝거렸다. 그 시간, 천진한 미소의 18살 소녀는 어느 곳에도 없었다. 스모키 메이크업도 인상적이었지만 고개를 움직일 때마다 번뜩이는 그 눈빛은, 모두를 제압하는 강한 힘을 갖고 있었다. 때론 요염하게, 때론 표독스러울 정도로 대단한 강렬함으로 김연아는 우리를 사로잡았다.
그리고...
김연아에 의해 재탄생된 ‘세헤라자데’. 천일야화의 주인공인 아랍여인답게 김연아는 강렬한 붉은 색 드레스를 입고 빙판 위에 섰다. 여전히 눈빛에는 생의 절절함이 담겨 있었고 양 손끝에는 섬세함이 실려 있었다. 그렇게 그녀의 온 몸이 만들어내는 곡선에는 내내 우아함이 빛을 발했다.
세계 피겨사에 족적을 남긴 김연아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부상에 눈물 짓던, 점프가 되지 않아 링크 바닥에 앉아 울고 있던 지난 날의 모습이 떠올랐다. 작년 겨울은 또 어땠던가. 국내 관중들의 기대 속에 적잖은 부담을 느꼈고 이는 고스란히 연기에서 드러나 1위 자리를 마오에게 넘겨주지 않았던가.
그랬던 김연아가 드디어 시즌 마지막 대회에서, 200점 돌파라는 최초의 기록을 세우며 1위 단상 위에 올라섰다. 아기사자 심바같은 귀엽고도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단상 위에 오른 김연아. 한데 애국가가 울려퍼지자 어느새 그렁그렁 눈물 맺힌 모습으로 태극기를 바라보더니 이내 눈물을 짓고 말았다. 쏟아지는 눈물을 손가락으로 훔쳐내는데, 단상 위에서 눈물 흘리던 김연아의 모습을 보기는 또 처음이었다.
돌이켜보면 우리가 얼음 위에서 만나던 김연아는 늘 강한 사람이었다. 언제나 침착했다. 항상 냉정함을 유지했다. 그렇게 평정심을 잃지 않는 ‘강심장’ 김연아로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판정 논란 속에서 긴장하고 연습 도중 집중력을 잠깐 잃을 만큼 그녀 역시 사람이었고 여느 선수와 다르지 않았다. 거기에 온 국민의 기대까지 한 몸에 받고 있으니 열여덟 김연아가 느껴야할, 또 감당해야할 무게감은 분명 우리 상상 이상일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월드 베스트 챔피언이라는 찬사 속에서 한층 더 견고해진 자기 자신과의 싸움도 기다리고 있다.
2008베이징올림픽 당시 박태환도 400m에서 금메달을 딴 다음, 긴장 때문에 잠을 설쳤다고 고백했었다. 온 국민이 금메달을 기대하고 있는데, 그 기대에 부흥하지 못할까봐 긴장됐고 또 걱정됐었다고 하였다. 김연아 역시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지만 비슷한 마음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해본다. 심신의 고통으로 인한 인고의 시간들. 연습에 연습을 거듭해도 도통 넘을 수 없었던 벽들과 만난 순간들. 그 모든 것들을 깨고, 딛고 넘어선 스무살 연아가 자랑스럽다. 그리고 존경한다는 인삿말을 건네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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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더 값지고, 빛났던 김연아의 우승이었다.
온 마음으로 끝없이 박수치고픈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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