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진짜 제목처럼 순정만화다. 하하. 무슨 말도 안 되는 만화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었냐?”
영화가 끝나자마자 함께 영화를 봤던 지인은 하하 웃으며 말했다.
저런 어눌한, 좋다 싫다 의사표현도 제대로 못해 주변 사람들에게 휘둘리기 딱 좋은, 거기에 다 구겨진 바지와 어벙벙한 쟈켓을 입고 다니는 최악의 패션감각까지. 꽉 찬 서른 ‘동사무소맨’ 연우(유지태)를 과연 누가 좋아하겠냐가 지인의 생각이었다.
물론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 를 묻지도 않는 무심한 ‘경제’ 대통령 아래서 모두가 헉헉 대고 있는 요즘, 연우는 나름 정년이 보장된 동사무소에 적을 두고 있다만 그래도 여전히 부족한 남자란다.
“차라리 선생님을 만나는게 낫겠다. 동사무소는 무슨 동사무소. 나중에 결혼해서 우리 남편은 동사무소에서 일해, 라고 말할 수 있겠어? 쪽팔려.”
수영(이연희)이 연우를 좋아하는 것도 결국 아무 것도 모르는, 한마디로 철모르는 고등학생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지인은 말했다.
“야, 대학 나오고 사회 나오면 그런 남자 눈에 들어오겠니? 만날 동네 분식집에서 떡볶기나 사주고 500원 짜리 넣고 뽑기하다가 동전 다 떨어졌다고 학생한테 돈 있냐고 하는 남자를 어떻게 만나? 게다가 차도 없잖아.”
하지만 지인의 비웃음에도 불구하고 영화 속 두 주인공 수영 학생과 연우 아저씨는 한없이 맑았고, 따뜻했고, 그래서 아름다웠다. 그래서 보는 내내 혼자 그렇게 웃을 수밖에 없었고, 영화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서도 내 얼굴에선 좀처럼 웃음이 떠날 줄은 몰랐다. 그런 사랑도 있는 거라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만화로 또 다시 영화로 재생되는 것이라 내게 말했다.
순정만화를 연출한 류장하 감독은 <8월의 크리스마스>와 <봄날은 간다>의 조감독이었으며 <꽃피는 봄이 오면>으로 입봉했다. 순정만화 역시 그간의 연작과 같은 선상에 놓여 있다. 두 주인공이 만나서 감정을 키우고 연애의 길에 들어서기까지, 직설적으로 보여주기 보단 한걸음 물러서 담담히 비춰내길 택한다. 여기에 역광을 적절히 활용해 봄날의 어느 오후 같은, 그런 따뜻한 분위기를 시종일관 연출해낸다.
<순정만화>에는 <8월의 크리스마스>처럼 불가항력에 의한 가슴 아픈 이별도, <봄날은 간다>처럼 변해가는 사랑 따윈 없다. 10대 고등학생과 30대 직장인의 만났지만, 내 앞에 있는 사람이 그저 좋아 이 사람을 위해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무엇일까, 하는 아름다운 마음만 있을 뿐이다.
수영은 혼자 비를 맞고 끙끙 앓고 있던 연우를 위해 손수 죽을 끓여주고 다시는 비를 맞지 말라며 우산을 선물로 건넨다. 그런 수영을 위해 연우는 “너무 더워 눈이라도 왔으면 좋겠다”던 수영의 말을 기억하며 깊은 밤 눈을-비록 눈 스프레이였지만 ^^- 선물로 주는가 하면 자율학습이 끝난 수영의 밤길을 지켜주는 전도사 역할까지 자처한다.
상대가 이만큼 해줬으면 좋겠다가 아니라 내가 상대를 위해 이렇게 해주고 싶다만 있는 세상, 바로 연우와 수영이 사랑하는 세상이다.
“우리 보는 사람도 없는데 저 모퉁이까지 손잡고 걸어갈래요?”라는 말과 함께 손잡고 걷던 그 모습이 그래서 그렇게나 아름답게 보였나 보다.
사는 곳과 졸업한 학교와 직장이 무엇이냐에 따라 상대를 판단하고 파악하고 재단하는 참 매정한 세상에서, <순정만화>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듯한 동화 같은 세상을 그려낸다. 조건이 아닌 마음의 그릇을 사랑하던 <순정만화>의 두 주인공 모습은 그래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영화는 당신은 마음의 눈으로 상대를 바라봤습니까? 라는 질문과 함께 성찰의 시간을 툭, 안겨준다.
그간 연작들에선 사랑 앞에서 다소 나약한 모습을 보였던 유지태는 <순정만화>에서도 여전히 순박한 표정과 미소는 그대로지만 마음을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제 나이로 돌아온 이연희는 <순정만화>에서도 여전히 연기가 부족하다는 평을 듣기도 하나 감정이입 되기엔 충분할 정도로 ‘수영’으로서 제 역할을 다했다. 이제 막 사랑에 눈 뜬 설레는, 그래서 사랑스러울 수밖에 없는 여고생 수영이 바로 이연희였다.
그리고 마지막. 영화를 보는 내내 지난 봄 성공하고 싶다는 말과 함께 나의 곁을 떠났던, 6살 어린 그 아이가 참 많이 생각났었다. 제주도의 바람 아래서 자란 덕분이었을까. 그 아이는 내가 알고 지낸 그 어떤 사람들보다 맑고 선한 영혼을 가지고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장이 전부였지만 그것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아이였다. 택시운전하시는 부모님을 위해 장남으로서 어려운 형편에 보탬이 되고자 했지만, 매정하게도 사회는 돈도, 빽도, 줄 서는 방법도 모르는 그 아이에게 참으로 어렵고 힘든 곳이었다. 그래도 그 아이는 얼마 안 되는 월급을 쪼개 부모님께 드리고 적금까지 하던 꽤 알뜰한 근로청년이었다. 무엇보다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나를 위해 김밥을 사주고 가끔 큰돈이 생기면 삼겹살까지 쏘던 로맨티스트였다.
그렇게 8개월을 만나는 동안 우리는 손만 잡고 다녔다. 물론 6살 많던 누나는 이마 위의 입맞춤을 꿈꿨지만, 아직 열여섯 소년 같던 그 아이는 영화 속 연우와 참 비슷하였다. 손을 잡을 때면 척척하게 땀이 배어나왔으니까. 처음엔 쑥스러워서, 나중엔 그저 좋아서. 그게 이유였다. 그리고 나는 그 손을 놓기가 싫어 헤어질 때면 버스에 올라타는 그 걸음이 무거워짐을 느끼곤 했다.
데이트 때마다 매일 고등학생들 틈에서 김밥을 주워 먹고 있어도 무척이나 행복해하던 나였다. 그때마다 지인들은 그게 반복되는 현실이라도 넌 평생 웃을 수 있겠냐고 했지만, 사실 스테이크를 먹는다고 모두가 행복한 건 아니지 않았던가. 영화를 보고 돌아오던 길, 이제는 과거가 돼 버린 잊고 있었던 <순정만화> 같던 시절이 생각나 잔잔히 웃었다.
어찌하여 옛날을 추억하며 마음 아파하는 대신 웃을 수 있는 것일까. 누군가 그 이유를 내게 묻는다면 다시 순수한 감정으로 누군가를 아끼고 사랑하는 그런 날이 다시 올 것만 같다는 막연한 믿음과 희망을 <순정만화>를 통해 얻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래서 이 늦은 새벽까지 잠 못 이루지 못하고 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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