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우절날 거짓말처럼 입대한 내 막내 동생은 3개월의 시간이 흐른, 그러니까 30도를 웃도는 7월의 어느 날 첫 휴가를 받아 집에 왔다. 검게 그을린 얼굴을 보고 안쓰러운 마음에 선크림은 바르고 다니라고 하자 “그건 상병 되서야 바를 수 있어”라며 옅게 웃었다. 뭐가 그렇게 재밌냐며 퉁을 준 뒤 밥그릇에 보리밥을 꾹꾹 눌러 담아 동생에게 건네주는데, 숨어있던 상처가 눈에 띄었다. 밥그릇을 받기 위해 손을 들던 순간 빼꼼이 고개를 내민 상처였다.
“야, 이거 무슨 상처야? 왜 이렇게 심해? 진물도 나는데?” 깜짝 놀라 손목을 잡은 채 상처를 살피자 동생은 남의 집 이야기 하듯 무심한 말투로 대답했다. “아, 이거? 용접하다 데었어.” 그러면서 말을 잇는다. “이 정도 상처가 뭐가 대수라고.” 순간 군대에선 이보다 더 심하게 다치는 일이 허다하다는 듯 들려 마음이 아팠다.
안쓰러운 마음에 “좀 조심하지 그랬어”라며 혀를 끌끌 찼더니 동생은 “용접한 것들을 쌓아뒀는데, 그게 그만 쏟아지고 말았어”라고 대답했다. 듣고 있던 나는 때를 놓치지 않고 왜 안 피했냐며 구박했다. “피할 수가 없었어. 내가 피하면 그 밑에서 용접하고 있던 동기가 손을 데거든. 나는 팔이지만 걔는 손이잖아. 손은 예민한 곳이라 더 심하게 다쳤을 걸. 그냥 나 하나만 다치고 끝내려고 했어.”
동생의 대답을 듣고 있던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상처가 더 심해지면 안 되니까 얼른 병원에서 치료 받으렴. 그것이 동생에게 해준 말의 전부였다.
그리고 한 달 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고 겨울에 정기휴가를 받고 다시 돌아오겠노라던 동생이 다시 집으로 왔다. 안동 선산에 할아버지의 뼛가루를 뿌린 뒤 서울로 올라가던 중 동생은 “누나, 나 회가 너무 먹고 싶다. 부대 들어가기 전에 꼭 먹고 가야겠어”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장어도 먹고 싶고, 새우튀김도 먹고 싶고, 크랩롤도 먹고 싶다.” 그렇게 먹고 싶은 목록들을 주욱 읊던 동생은, 그날 저녁 초밥집에서 16만원 어치를 먹는 기염을 토했다. 아무렇지 않은 듯 카드를 긁었지만 미안해 나도 어쩔 수 없는 여잔가봐, 살짝 마음은 쓰라렸던 거, 막둥아, 이제라도 알아라! ^^;
남자라면 누구나 다 가는 곳이 군대라지만, 막상 내 가족이 군대에 있게 되자 군대는 내게 더 이상 막연한 곳이 아니다. 취재 중 오며 가며 군인들, 그것도 무장한 채로 땀 뻘뻘 흘리는 군인들을 만날 때면 괜히 동생 생각이 나 금세 눈물이 글썽해지곤 했다. 그때마다 함께 있던 사진기자 선배는 “1년 지나봐라. 눈물 나나”라며 면박을 주곤 했다.
그래도 고무신 거꾸로 신은 여자친구 때문에 마음이 쓰라렸을 텐데도 가족들 앞에선 슬픈 얼굴을 하지 않던, 외려 아픈 할머니 걱정에 밤에 잠이 잘 안 온다던 동생의 마음 씀씀이를 생각한다면, 제대를 며칠 앞둔 그날까지 난 동생 생각에 괜히 눈물이 글썽글썽 해질 것만 같다.
군대에서 주는 얼마 안 되는 월급을 모아 첫 휴가 때 큰 맘 먹고 샤넬 립스틱을 사서 여자친구에게 줬지만 돌아온 대답은 “헤어져”였다. 무척이나 심난하고 또 속상했을 텐데도 술 한번 크게 못 마시고, 눈물 한번 크게 쏟지도 못한 채, “할머니, 나 제대할 때까지는 꼭 건강히 살아계셔야해요”라며 걱정에 걱정만 거듭하다, 동생은 첫 휴가를 마쳐야만 했다.
그런 동생 때문이었을까. 지난 밤 SBS스페셜 <말도 아리랑>은 1시간 내내 나를 또 눈물짓게 만들었다. 말도, 우리에겐 생소한 그곳은 강화도에서 30km나 떨어진 외딴 섬으로, 북방한계선에 인접한 군사상 요지로 일반인들의 출입은 통제된 외지다.
포항 훈련소에서 7주간 훈련을 받은 신병 중 2명이 말도에 배치명령을 받았다. 자대 배치에 앞서 화생방 훈련에 눈물 콧물 다 흘리는 모습에, 거친 파도 앞에서 두려움 대신 전우애만 갖고 뛰어들어야만 하는 모습에, 7주 훈련이 끝난 뒤 훈련소 동기들과 눈물 흘리며 작별하는 그 모습에, 나는 또 내 막내동생 모습이 겹쳐 방송 시작부터 눈물이 글썽 거렸다.
그리고 말도. 강화도에서 뱃길로만 한 시간 반 걸리는 거리에 위치한 이곳엔 외박이 없다. 면회도 없다. PX도 없다. 구멍가게도 없다. 세상의 소식을 듣는 방법은 한 대 뿐인 텔레비전이 유일하다. 사람 구경하기도 힘들다.
원래는 200여 가구가 살던 섬이었으나 먹고 살기가 힘들어 육지로 갔고 말도에 남은 주민은 열명도 채 되지 않는다.
이곳에는 일주일에 단 2번 배가 뜨는데, 식료품을 건네주기 위해서다. 기상여건이 좋지 않으면 배가 뜨지 못하는데, 그럴 때면 군인들이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고황해도 연백지역과의 거리는 7km에 불과하다. 그래서 맑은 날이면 갯벌에서 조개를 채취하는 북한 주민들과 초소를 지키는 병사들도 보인다. 게다 철망도 지뢰밭도 없는 특성 때문에 정체 모를 배들이 거의 매일 출몰하고 있다. 한시라도 긴장을 늦출 수가 없다. 해가 지면 더욱 그렇다. 한 신병은 자정부터 새벽 5시 반까지 경계근무를 선 뒤, 약 15분 간 쪽잠을 취한 뒤 다시 내부반 청소에 들어갔다. 힘들지 않냐는 PD의 질문에도 군기가 빠싹 들어간 목소리로 “힘들지 않습니다. 괜찮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부모님 생각이 많이 납니다. 한마디로 부모님이 보고 싶습니다”던 이상웅 이병의 말도 오랫동안 가슴에 남았다. “그럴 때는 어떻게 참아요?”던 제작진의 질문에 그는 말했다. “그럴 때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냥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곰곰이 생각하고... 다른 생각하고... 그렇습니다.”
강원도 최전방에서 군 생활을 하고 있는 내 동생도 그랬다. 긴 밤 보초를 설 때면 ‘별헤는 밤’의 윤동주처럼 별 하나에 가족의 이름을 부르며 잠을 쫓는다고 하였다. 그저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방법 밖에 없다고 하였다. 그렇게 그리움과 싸운다고 하였다.
하지만 주말이면 가족들과의 면회도 자유로운, 정기휴가가 늦어지는 법도 없는 동생은, 말도에서 군생활을 하는 그들에 비하면 과분한 복을 누리는 듯했다. (100일이 훨씬 지난 후에야 겨우 첫 휴가를 받던 이병의 모습을 볼 때 더욱 그랬다.) 그렇게 한계와 싸우며 군 생활 중인 그들 모습을 보며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고마웠다. 이들 덕분에 우리가 안심하며 잠을 이룰 수 있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에. 식상된 표현이겠지만 이보다 더 고마운 이유도 또 없을 것이다.
세상이 얼마나 그리울까. 가족은 또 어떻고. 엄마가 해주는 밥도 생각나겠지. 그렇지만 그들은 대한민국의 남자로 태어났기에, 국방의 의무를 져야하는 숙명 때문에, 20대 청춘의 어느 날을 이렇게 말도의 바람과 싸우고 있는 중이다.
군생활을 마치고 말도를 떠나던 박준환 병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잃은 것보다 얻어 가는 게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쉽게 포기해버리고 그랬었는데 안에서 그런 것들 이겨내는 방법도 많이 배우고 무슨 일이든 하면 다 될 것 같은 자신감을 가지고 전역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로 많은 것을 배우고 말도를 떠난다는 군인들의 모습은 우리에게 많은 의미를 던지고 있었다. 이런 젊은이들이 이끌 대한민국이기에 희망을 엿본다는 생각에서 그 젊은이들이 바로 우리 모두의 아들들이라는 생각까지. 그래서 이 늦은 새벽까지 잠 못 이루고 있나 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긴 글을 마치기 전, 지금 이 시간에도 졸음과 추위, 바람, 그리고 갑작스레 찾아올 몸과 마음의 고통을 이겨내며 나라를 지키고 있을 이땅의 모든 군인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한다. 그들 모두에게 건강과 안녕이 함께 하기를. 그리하여 웃는 모습으로 가족 품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두 손 모아 빈다. 우리 모두의 아들인, 그들 모두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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