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저녁이 생각나요.
저녁 식사 후에 선생님은 저를 어딘가로 데리고 가셨죠.
숙소 뒷편에 이런 곳도 있었구나, 하는 찰나에
선생님의 보물이 눈에 띄었습니다.
아, 선생님께서는 이걸 보여주시기 위해 저를 여기까지 데리고 가신 거였더군요.
그제서야 고개를 들어 선생님을 올려다보며 웃었습니다.
“저게 그 비바 K-리그에 나왔던 그 토끼들이군요.”
“그렇죠. 참 예쁘죠?”
“네. 선생님이 직접 먹이 주시면서 키우는 것도 알고 있어요.”
“그렇죠. 얘네들이 어느덧 새끼까지 낳고 이렇게 늘었네요.”
“자식처럼 잘 키우셨어요.”
“그런데 내 자식 같은 우리 대전시티즌 아이들은 한 번도 토끼를 보러 안 오네요.”
“정말요? 한 번도 안와요? 그래도 한번은 올 수 있을텐데… 아쉽네요.”
“원래 그때는 하나만 보게 돼있어요. 당장 경기 나가서 이기는 게 중요하니까. 나 역시 그게 아쉽죠. 조금만 여유를 갖고 주위를 둘러보면 좋으련만. 삶의 여유를 갖는다면 세상이 다르게 보일 수 있을텐데 우리 아이들은 아직 그걸 모르네요. 물론 하나에만 모든 걸 바치면서 뛰고 있다보니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요.”
“언제까지 그렇게 사는 거죠? 영원히 안 바뀌나요?”
“바뀌죠. 선수 생활이 끝나면 다들 바꿔요. 그런데 그때 바뀌는 건 너무 늦는 것 같아요. 조금만 더 일찍 눈을 떴으면 좋으련만.”
“저도 가끔 그런 생각 하는데. 선생님도 그런 생각하셨군요.”
“기자님이 우리 애들 많이 도와주세요. 하나만 아는 녀석들이니까. 옆에서 좋은 이야기도 많이 해주시고요. 부탁해요. 내 자식 같은 아이들이니까.”
“선생님이 부탁 안하셔도 선생님 밑에서 자라는 선수들이니까 분명 선생님 마음 다 알 거예요. 제가 아는 대전시티즌은 그런 팀이에요.”
“그렇게 생각해주니 고맙네요.”
“그런데요, 저 오늘 숙소 처음 와봤는데 주위 풍경들이 참 좋아요. 선수들은 다들 피 끓는 청춘이니까 시골 구석에 있다고 투덜댈 수도 있겠지만, 음… 뭐랄까? 시골에서 살던 어린시절이 생각나요. 무척 아늑하고 편안해요. 나중에 결혼하면 신랑한테 국곡리에서 살자 그럴까봐요. ^^”
“가끔 오면 좋지 만날 있어봐요. 젊은 사람들은 살기 힘들어요.”
“아닌데요. 풀 냄새, 나무 냄새, 꽃 냄새… 너무 좋은데요. 여기 온지 겨우 1시간 밖에 안됐는데 벌써 정들었어요.”
“허허허.”
그날, 저녁바람은 참 따뜻했어요.
어느새 노을이 지고 있었고
주홍빛으로 물든 햇볕은 은은하게 선생님의 얼굴을 감싸고 있었죠.
우리 아빠 같던 선생님의 그 인자한 웃음이 좋았고
바람에 실려 오던 자연 냄새가 좋았어요.
기분 좋게 마른 나무 냄새 또한요.
그렇게 머리를 쓸어 넘겨주던 그 바람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요.
그날의 기억을 모두 담고 있는 그 바람을 어찌 잊을까요.
인터뷰를 마친 뒤 인사를 드리기 위해 방에 찾아갔을 때
선생님은 홀로 누운 채로 텔레비전을 보고 계셨어요.
“기자님, 조심히 들어가세요”라며
언제나처럼 존댓말로 제게 먼저 인사해주시던
선생님의 그 인자함에 저는 또 한 번 감동 받았죠.
그날 밤,
숙소를 나오던 제 머리 위로는
수많은 별들이 은가루를 뿌리며 떨어지고 있었고
제 마음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국곡리의 밤하늘을 잊지 못할 것 같다고 속삭였죠.
아주 오랫동안 말이에요.
그 순간,
개골개골 우렁차게 울어대던 개구리들의 합창 소리는 어찌나 씩씩하던지요.
창문 밖으로 흘러나오던,
최신 인기 가요를 흥얼흥얼 따라 부르던
어느 선수의 흥겨운 목소리는 또 어떻고요.
그런데 말이에요,
저는 그날이 마지막 날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그렇죠. 그런 꿈 따윈 절대 꾸지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이렇게 눈물이 나나봐요.
뜨거운 밥을 한 번에 먹을 때처럼 목이 메여오네요.
울지 말아요, 대전시티즌, 이라는 글을 썼던 제가
이제는 대전시티즌을 생각하며,
선생님을 떠올리며,
결국 이렇게 울고 마는군요.
선생님 밑에서 배운 적은 없지만
선생님과 처음 만났던 그날부터
선생님은 제 선생님이었습니다.
잊지 않는다면
그 시간들은 영원할 수 있겠죠.
그러니까 꼭 잊지 않겠어요.
그곳에서 보낸,
이 모든 시간들을 말이에요.
사진출처: Quizas
아래는 최윤겸 감독님이 대전시티즌(www.fcdaejeon.com) 자유게시판에 올린 사과문 전문입니다.
사 과 문 대전 시민 여러분, 대전시티즌 팬들과 선수단, 축구 관계 일선의 지도자, 그리고 특히 대전의 미래인 유소년 어린이들에게. 안녕하세요? 최윤겸입니다. 많은 분들이 아시다시피, 이영익 코치와 저와의 사이에 불미스러운 일들이 발생하였습니다. 오늘 이로 인한 죄송스러움을 전하고자 다시 여러분 앞에 이름을 올립니다. 지도자로써 보여드려서는 안 되는 모습으로 인해 많은 분들에게 실망감을 안겨드렸습니다. 이에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사과의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또한 두 달 전에 마무리 된 후 대전시티즌의 화합과 거듭나는 모습을 기대하시던 많은 분들에게 거듭 반복되는 안 좋은 모습으로 더욱 큰 실망감을 안겨드리게 되어 정말 죄송합니다. 하나의 프로팀을 이끌어가는 지도자로서 다른 사람들의 모범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팀의 화합을 도모하지 못했던 것에 대해 책임을 통감합니다. 그리고 이제 그 책임을 지고 가려합니다. 5년여 동안 대전시티즌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구단 관계자 및 대전 시민, 서포터즈 여러분들과 함께 한 아름다웠던 시간들이 있었던 만큼 이번 사건으로 많은 분들이 아파하는 모습에 개인적으로 가슴 저리는 고통을 느낍니다. 또한 팀을 제대로 이끌지 못했던 제 자신에 대해 더 큰 책임감을 절실히 느끼고 이제 5년여의 세월을 함께한 대전시티즌을 떠나려고 합니다. 제가 가진 것 보다 항상 더 큰 사랑을 주신 대전시티즌 팬들께 감사합니다. 여러분 덕분으로 저는 5년 동안 행복한 축구를 한 사람입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죄송스럽습니다. 비록 좋은 모습으로 떠나지 못하는 아쉬움이 남지만, 감독이기 이전에 대전시티즌을 사랑하고 함께한 사람이기에, 이번 사건을 통해 대전시티즌이 한 꺼풀 시련을 이겨내고 더욱 발전된 구단으로 거듭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시민구단이 걸어가야 하는 길을 누군가는 가시밭길이라고 합니다. 그 사람들의 말마따나 힘든 날도 있었고 화가 나는 날도 있었습니다. 어떤 날은 애뜻하고 조금은 서러웠지만, 저를 웃게 하고 행복하게 해주셨던 팬들과 우리 선수들 덕분에 더 강해진 마음으로 당당하게 경기장으로 들어설 수 있었고, 제가 옳다 믿었던 길을 걸어 갈 수 있었습니다. 저는 퍼플아레나, 아름다운 그곳에서 만큼은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저의 가슴을 자랑스럽게 하는 대전팬들이 있는 그곳에서 언제나 좋은 모습으로 보답해드리고 싶었습니다. 그곳에 서고 싶다는 그 하나로 우리 대전 선수들은 겨울 동안 사이플러스 전지훈련에서 굵은 땀방울을 흘렸습니다. 여름의 뙤약볕 아래서 파스냄새와 땀냄새를 풍기는 선수들을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다구 쳤던 것도 그곳에 서기 위함이었습니다. 저 역시 여러분 앞에서는 날이면, 편한 츄리닝을 벗고 일주일에 한번 다림질해 걸어 놓았던 양복을 꺼내 입었던 일들까지, 이제 그 모든 것들에 안녕을 고해야 하는 시간입니다. 퍼플아레나에서 울려 퍼지는 커다란 울림의 응원소리에 저의 소름이 돋게 하던, 그 힘으로 저의 어깨를 밀어주시던 대전의 수많은 팬분들께 마지막으로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이제 저는 떠나지만, 새로운 감독님께도 저에게 주셨던 그 사랑들을 그대로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분께서도 저처럼 대전시티즌의 감독이었기에 행복하다는 느낄 수 있도록 대전팬 분들께 부탁드립니다. 제게 내밀어주셨던 손길을 새로운 감독님께도 이어주십시오. 저는 좀 더 성숙된 큰 사람이 되기 위해 여러분의 곁을 떠나게 되었지만, 우리 선수들은 그 자리에 그대로 여러분들과 함께 대전시티즌을 지키고 있을 겁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선수들을 위해 팬들의 사랑이 사그라지지 않았으면 합니다. 부족한 저를 위해 많은 응원 보내주셨던 마음 그대로 우리 사랑하는 대전시티즌 선수들을 위해 감싸 안아 주십시오. 여러분들이 날려주시던 색종이와 휴지폭탄, 편지와 종이비행기, 잔디를 수놓았던 장미꽃과 노래와 함성을 언제까지나 우리 선수들을 향해 보내주십시오. 퍼플아레나의 푸른 잔디위에 서서 서포터의 응원 속에 여러분께 큰절을 올리며 떠나고 싶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 큰 꿈이 되어버렸습니다. 어쩌면 그 꿈은 지난 두 달을 더 잇게 했던 제 욕심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두 달 전, 머플러로 눈물을 훔치며 저의 이름을 불러주던 어린 딸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또한 지도자로써, 공인으로써 저의 행동에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거듭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하루 빨리 사건이 마무리 되고 구단이 정상화되어 팬들 여러분의 사랑과 관심을 계속 이어갈 수 있는 대전시티즌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은성이, 성훈이, 승진이, 윤열이, 영기, 거룩이, 영주, 데닐손, 성운이, 창수, 현규, 재민이, 준민이, 세인이, 도현이, 형일이, 충현이, 용태, 규환이, 종수, 도성이, 병주, 재훈이, 동원이, 승제, 근식이, 광현이, 주현이, 정훈아. 모두들 눈꺼풀에 아로 새겨져 눈을 감아도 떠도 잊혀 지지 않을 이름들. 얼굴을 마주하고 모두의 어깨를 한번 씩은 부등켜 안아주고 싶지만, 그럴 수 없이 떠나게 되어 미안하구나. 대전시티즌을 사랑하는 모든 여러분. 다시 한 번 사과의 말씀을 전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함께 하는 동안 행복했었습니다. 대전시티즌 감독 최윤겸 拜上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