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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신인드래프트가 끝난 지 얼마 안된 12월의 어느 날. 점심을 먹고 들린 숙소 회의실에는 낯선 얼굴의 소년 열댓 명이 모여 있었다. 드래프트에서 뽑힌 신인선수들이라고 했다. 대학 졸업을 앞둔 선수들이었지만 긴장된 표정에선 앳됨이 먼저 보였다.

그렇게 아직은 소년의 향기가 남아 있던 선수들에게 프로필을 작성해 달라고 종이를 돌렸다. 간단한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웬걸. 선수들은 머리를 긁적이며 쓰다 지우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마치 중간고사 시험지와 마주한 학생들처럼. 회의실은 어느새 교실로 변해 있었고 단상 위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나는 영락없는 선생님의 모양새였다. 자리를 돌아다니며 프로필 종이를 걷는 마지막 모습까지, 어쩜 그리 추억 속 담임 ‘쌤’의 모습과 닮아 있었던지.

드래프트 4순위로 온 유재원도 소집 첫날 밤 “다시 학교에 입학한 것 같다”고 했다. 문득 고등학교생이 되던 그날이 생각났다. 입학 첫날부터 사람들은 내게 말했었다. 얘야 정신 똑바로 차리고 공부해야지만 대학 문을 통과할 수 있단다. 그래야 네 인생이 잘 풀릴 수 있어. 신인선수들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프로 1년차 때 앞으로의 축구인생이 달려있다는 이야기를 귀에 박히도록 들었을테니, 열일곱의 나와 비슷한 마음을 품고 있었을 것만 같다.

 

올해 우리팀은 드래프트 현장에서 모두를 놀라게 했다. 무려 15명을 뽑았으니까. 여기에 추가지명까지 진행되니 스무 명 가까이 되는 선수들이 팀에 합류했다. 말은 안해도 신인선수들 각자는 적잖게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듯했다. 축구는 11명의 선수들이 화합할 때 가장 빛나지만, 베스트일레븐에 들어가기 위한 과정만큼은 경기보다 더 전쟁 같은 스포츠 아니던가. 선배 뿐 아니라 경쟁할 동기들 또한 차고 넘쳤으니, 프로는 역시 프로구나, 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번 신인선수들은 뭐든 다 조심스러워하는 모습이었다. 태백산에 올랐던 소집 첫날도 그랬다. 하산 후 고기집에 들려 회식자리를 가졌는데, 김학범 감독님은 풀어줄 땐 화끈하게 풀어주는 ‘상남자’ 스타일인지라 신인들끼리 편하게 먹으라며 방을 내주셨다. 그 방에 어린 선수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소고기를 먹기 시작했다. 넉넉하게 시켰다고 하지만 알다시피 20대 초중반이면 철도 씹어 먹을 나이 아니던가. 고기는 금세 떨어지고 말았다. 마침 이을용 코치님이 잘 먹고 있는 거냐며 방에 들어왔다가 빈 그릇을 보시곤 더 먹고 싶으면 시켜줄게, 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우리의 신인선수들은 대답 대신 침묵만 지킬 뿐이었다. 아아. 이 장면이 만화였다면 코치님 머리 위로 까마귀가 5마리는 지나갔을 것 같다. 머쓱해진 코치님이 나가는 것과 동시에 신인선수들의 눈빛에서 난 모든 생각을 읽고 말았다. 그래서 말했다. 여긴 프로니까 눈치 보지 말고 시켜먹어요, 라고. 그때 신인선수들은 알았을까. 서당개는 3년만에 천자문을 읊는다지만 구단 프론트는 한 시즌만에 선수단과 ‘이심전심’하는 경지에 오른다는 사실을.

그제야 선수들은 고기집 이모를 부르기 시작했다. 여기 고기 4인분이요, 저희는 2인분만 주세요, 하는 그 애틋한 목소리를 들으며 내 마음은 파리의 연인의 박신양처럼 “저 고기가 내 고기라고, 내가 시켜 먹고 싶다고 왜 코치님께 말을 못하냐구!”라고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들은 모든 것이 어렵기만 한 신인선수들인데.

쉽게 말 못하는 건 그 뿐만이 아니었다. 얼마 전 신인선수 A와 통화를 하게 됐는데, 마침 그날은 꿀 같은 외박이 주어진 날이었다. A는 내게 “통화 가능해요. 지금 서울에서 친구랑 저녁 먹고 다시 강릉 가는 길이거든요. 외박이긴 한데 숙소에서 자려고요”라고 말했다. 그런데 가만… 친구와의 저녁식사를 위해 왕복 5시간 걸리는 영동고속도로를 넘나든다고? 나는 다 알겠다는 듯이 웃으며 여자친구는 잘 만난 거냐고 물었다. 순간 깜짝 놀란 A는 “이거 선생님들이 아시면 안 되는데…”하며 말끝을 흐렸다.

자, 드디어 진짜 박신양 아니 파리의 연인 한기주처럼 말할 시간이 온 것이다. “저 여자가 내 사람이다. 저 여자 내 애인이다. 왜 말을 못하냐구!” 그제야 A는 “여긴 프로니까 여자친구 있다고 해도 뭐라고 할 사람 없는 거죠?”라고 되묻더니 헤헤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걸 잊고 있었네요! 여자친구랑 오랜만에 만나서 밥도 먹고 위로도 받고 덕분에 마음의 힘 많이 얻고 헤어졌어요.”

반면 신인선수 B는 감독님이 무심코 던진 한마디를 붙잡고 며칠 째 골머리를 썩고 있는 중이었다. 소집 첫날 감독님이 B를 보더니 “넌 머리가 그게 뭐야?”하셨단다. 아! 난 감독님께 첫날부터 찍혔구나. 결국 B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숙소에서 보낸 첫날 밤, 새신랑마냥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비록 김학범 감독님과 내가 함께 한 시간은 채 1년이 되지 않았지만 신인선수들에게 이것만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우리 감독님은 바로 대장부 스타일의 지도자라는 것. 물론 가끔은 너무 시원하신 바람에 ‘화통’한 말씀이 ‘호통’처럼 들릴 때도 있지만. 예를 들자면 이렇다. 오랜만에 내가 숙소에 나타나면 감독님은 대뜸 화부터 먼저 내신다. “여긴 왜 왔어!!!!” 이때 문장 끝에는 느낌표가 꼭 4개 정도는 붙어야한다. 그러나 우리말은 끝까지 들어야 아는 법. “홍보담당자가 숙소에 자주 와서 선수들 이야기도 많이 들어야지. 그래야 우리팀 홍보가 되지. 앞으론 자주 와요. 얼굴 잊기 전에.” 꼭 묶었던 머리 푸는 여자만 반전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나는 우리 감독님을 통해 배운다.

그래서 머리를 짧게 다듬어야겠다는 신인 B에게 말해줬다. “감독님이 우리팀 선수에게 한번은 ‘넌 얼굴이 그게 뭐야. 그래가지고 장가가겠어?’ 하신 적도 있고요, 다른 선수에게는 ‘넌 정신 안차려? 왜 숙소에서 티셔츠를 벗고 다녀!’ 하신 적도 있어요. 그렇게 툭툭 화나듯이 말씀을 던지시지만 돌아서서는 ‘우리 선수들이 내 새끼들이니까 그래도 제일 이뻐보이지’하면서 허허 웃으시는 분이에요.” 함께 보내는 시간이 쌓여갈수록 신인선수들도 나처럼 시나브로 학범슨님만의 스타일에 적응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게 아니라면? 길들어지겠지. 아마도 흐흐.

그리고 이 글을 쓰는 동안 미국전지훈련에 참가하는 명단이 드디어 나왔다. 명단을 살펴보니 LA행 항공권을 손에 쥔 선수가 있는가 하면 강릉에 남아 따로 훈련을 하게 된 멤버도 눈에 띈다. 후자의 이름을 확인하니 한숨부터 먼저 나온다. 전지훈련에 동행하지 못한 신인선수들에게 2월의 밤은 또 얼마나 길고 외로울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이것이 친동생을 염려할 때 같은 가족애인지, 아니면 나이먹고 늘기만 한 몹쓸 노파심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기는 힘들다. 남게 된 선수들 가운데 개막 전(前)부터 자책하며 시즌을 통째로 포기하는 이가 생길까봐, 나는 안스러운 눈빛으로 한참이나 잔류명단을 바라봤다.

만약 혹시라도 그런 생각으로 가슴을 칠 신인선수가 있다면, 그에게 이 말만큼은 꼭 해주고 싶다. 40경기 가까이 열리는 한 시즌동안 그라운드에선 참 많은 일들이 벌어진다고. 멋지게 골을 터뜨린 선수가 십여분 후 들 것에 실려 나가기도 하고 영원한 주전으로 여겼던 선수가 갑자기 슬럼프에 빠지며 벤치에 앉은 일도 발생한다. 다시 말해 이곳 프로라는 무대는 ‘괜찮겠냐’는 감독의 물음에 ‘준비됐습니다’고 외치며 그라운드를 밟는, 그런 드라마 같은 일들이 펼쳐지는 마법의 공간이기도 한 셈이다.

요즈음의 나는 자주 봄을 꿈꾼다. 그 중에서도 바람과 볕이 아주 예쁜 리그의 어느 봄날에, 우리팀 신인선수들이 초원 위의 코뿔소처럼 마음껏 달리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그러니 우리 선수들만큼은 ‘늘 깨어있어라’는 말이 성경 속 구절이 아님을 명심하며 훈련에 임하였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지도자의 갑작스런 부름에도 침착하게 답할 줄 아는, 준비된 신예로 이름을 널리 알리기를 소망한다.

강원의 젊은 그대들이여.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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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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