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캠프 속 기성용은 그라운드 위에서 보여주던 모습만큼이나 멋진 녀석이었다. 자신만만해보였지만 그 속에는 소신과 주체의식이 있었다. 또 한일전을 앞두고는 민족의 역사와 아픔을 생각했고 그 때문에 욱일승천기를 보고 욱했던 이 선수를 어찌 어여뻐하지 않을 수 있을까.

눈웃음이 예쁜 기성용을 보는 것도 좋았지만 그보다 더 좋았던 건 올림픽대표팀 이야기를 듣는 것이었다. 앞으로의 한국축구에서는 무수히 많은 대표팀이 나타났다 사라지겠지만 2012년 이번 런던올림픽대표팀을 능가하는 팀이 또 나올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선수들에게도 그랬고 지켜보는 이에게도 홍명보호는 참 특별한 팀이었다.

선수들의 생각 또한 다르지 않다. 그래서 기성용이 올림픽대표팀 합류 전부터 구자철은 이 팀은 뭔가 다르다며 팀에 대한 남다른 애착심을 보여준 것 같다. 물론 아무 것도 모르던 기성용은 그래봤자 팀은 팀, 이라고 응수했지만.

 


힐링캠프에서 기성용이 소개한 올림픽대표팀의 특별한 룰들. 우선 훈련복을 깔끔하게 바지 안으로 넣는 것. 기성용은 감독님이 안 볼 때 몰래 몰래 뺐다고 하지만 착한 오재석은 런던으로 출국하던 날에도 바지 안으로 티셔츠를 넣는 ‘배바지’ 패션으로 우리를 웃게 만들었었다.

 


깔끔하고 통일된 복장은 행동을 조심스럽게 만들고 이는 생각으로까지 연결된다. 섬세한 홍명보 감독님은 그 부분까지 신경쓴 듯하다. 홍 감독님은 그래서 소집일에 입고 오는 복장에도 신경쓰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작년 가을 소집을 앞두고는 청바지에 운동화, 쟈켓을 드레스코드(?)로 정해주시도 했다. 그래서 오재석도 집에서 쟈켓을 챙겨가 파주에 입고 들어갔다.


지난 여름 올림픽대표팀 훈련을 보기 위해 파주NFC에 갔을 때 나 역시 기성용과 같은 생각을 했다. 훈련시간이 임박했는데도 훈련장에 아무도 나타나지 않는 것이었다. 보통은 한두명 훈련장으로 걸어내려오는데 이 선수들은 로비 쇼파에 앉아 이야기만 나누고 있다니. 그러더니 한꺼번에 슝 나와서 한꺼번에 체조를 하고 가볍게 러닝을 한뒤 훈련에 돌입했다. 홍감독님이 강조하신 ‘일체감’은 그렇게 훈련장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꿈의 올림픽에서 꿈의 동메달을 확정짓고 호텔에 돌아온 올림픽대표팀 선수들. 영국에서의 마지막 밤을 그대로 보낼 순 없어 한명, 두명 모이기 시작했고 거의 대부분의 선수들이 방에 모였다. 그동안 허락되지 않았던 맥주도 손에 쥐고 그간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풀어놓았는데, 홍감독님이 먼저 감독이라는 타이틀을 뗀 뒤 그간 말하지 못했던 속내를 털어놓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시작된 야자타임.

시작은 오재석이었다. 오재석은 그동안 홍명보 감독을 ‘인생 최고의 지도자’로 꼽으며 남다른 존경심을 드러내곤 했다. 또 할 땐 하는 사람이었던지라 “명보야, 너 쫌 멋있다?”라는 멘트를 날렸다고 한다. 야자타임을 할 때는 이제 막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을 때라 술에 취했던 것도 아니고, 분위기에 휩쓸렸다고 해도 감독님께 ‘X나’라는 욕을 쓸 정도로 예의없는 사람이 아니다. 오재석은. 어떻게 ‘쫌’이라는 단어가 ‘X나’가 됐는지. 이 부분은 좀 안타깝다.


어쨌거나, 오재석이 반말로 테이프를 끊었건만 그 다음 선수들은 하나 같이 존댓말을 했다는 것이 문제였다. 흐흐흐. “감독님 사랑합니다!”하며 하트를 날리는 선수가 있었는가 하면 “너무 너무 존경합니다”라고 말하는 선수도 있었고. “야, 니들이 이러면 반말한 나는 뭐가 되냐”하며 오재석은 볼멘소리를 했다고.

그래도 홍명보 감독은 사나이답게 오재석의 멘트에 주먹을 쥐어보이며 내밀었고 오재석 역시 주먹을 내밀어 감독님의 주먹에 대며, 주먹 대 주먹으로 인사를 나눴다고 한다. 그 자리에 없어도, 이렇게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 멋진 그림이 상상된다.

이미 김기희가 트위터를 통해 공개했지만 오재석도 영국에서의 마지막 밤을 잊지 못했는지 당시 방에서 찍었던 사진을 보여줬다. 그래서 사진을 보며 궁금했던 남자에 대해 물어봤다. 맨 왼쪽에 계신 분은 누구시냐고. 이번 올림픽대표팀 지원스태프의 얼굴은 모두 알고 있던 내게 이 분은 미스테리맨이었다. 도대체 누구일까.


그분은 이번 런던올림픽에 함께 동행했던 조리장님이셨다. 한데 내가 신기했던 것은 어떻게 주방장님이 선수들과 마지막 밤을 같이 보냈냐는 것이다. 클럽이나, 대표팀이나 선수들이 생각하는 건 크게 다르지 않다. 소중한 시간은 함께 뛴 동료들하고만 보내고 싶은게 바로 선수의 마음이다. 그 시간을 함께 보내고 공간을 내어준다는 것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힘들텐데. 마냥 신기했다. 도대체 왜?

런던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따고 자축하고 있을 때, 홍명보 감독님은 조리장님을 앞으로 불러 선수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우리가 메달을 딸 수 있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가장 크게 고생하신 분이다. 이 분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어머니가 해주는 밥처럼 따뜻하고 맛있는 밥을 영국에서 먹고 힘내서 뛸 수 있었다. 자, 감사인사 드리자.”

이번 올림픽대표팀은 매 경기가 이동의 연속이었다. 뉴캐슬과 카디프, 런던, 맨체스터로 이어진 강행군이었는데 그때마다 조리장님은 항상 선수단보다 먼저 이동해 열심히 한국음식을 준비하고 선수들을 기다렸다고 한다. 선수들이 호텔에 도착하면 마치 엄마처럼 따뜻한 밥과 국을 준비해놓고 웃으면서 서계셨다고.

그러나 내가 이 팀을 대단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건 선수들 중 그 어떤 누구도 대표팀이기 때문에 이 정도는 신경써줘야하는 게 아니냐고, 이건 대표팀이 당연히 누려야할 권리라고 생각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조리장님이 주방에서 흘리는 땀에 감사하며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을 전했고 그래서 마지막 회포를 푸는 자리에까지 초대한 감독과 선수들이라니. 내가 최고라는 생각 따윈 없었고 우리를 최고로 만들기 위해 도와주신 분들이 최고라는 낮고 겸손한 자세가 참 뭉클했다. 태극마크를 달고 다니다보면 잊기 쉬운 생각인데, 그렇게 마지막 순간까지 ‘낮음’을 잊지 않은 홍명보의 아이들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듯했다.

사실 이 얼마나 하나가 됐는지 아는 방법은 어렵지 않다. 선수단을 뒤에서 보좌하는 지원스태프들의 마음도 같은지 확인하면 쉽게 알 수 있으니까. 영국에게 승부차기 끝에 극적인 승리를 거두며 4강행을 결정지었을 때 중계 카메라에 눈물을 흘리는 한국인이 잡혔다. 대표팀 경기분석관이었다. 나중에 선수들도 경기 영상을 보게 됐는데 그때 눈물 흘리는 분석관 형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홍명보 감독님은 분석관에게도 팀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심어주셨다. 그래서 영국에 가서도 팀에 필요한 분석영상들을 만들어주기 위해 매일같이 밤을 샜다고 한다. 분석관의 눈물은 모든 사람이 커다란 원안에서 손을 잡고 있는, 그렇게 굳게 뭉친 팀이라는 확신을 하게 된 계기였다.

마지막 하나 더. 올림픽 조별예선 첫 상대였던 멕시코. 첫 경기라서 적잖게 긴장감이 들었는데 우리의 구자철 주장은 경기 시작 전 어깨에 어깨를 걸고 파이팅을 외치는 그 시간에, “아 런던이다~ 아 즐겁다~”라는 멘트를 남기고 그라운드로 뛰어갔다고 한다. 뭥미? 여긴 뉴캐슬인데? 하며 다들 웃었고 덕분에 긴장을 떨쳐버릴 수 있었다니, 구 캡틴이 노린 고도의 심리전술이 아닌가 싶다. 구글거림으로 생각하고 싶진 않다. 이미 한번 들은 이야기였지만 방송을 통해 또 듣게 되도 웃음이 나오는 에피소드가 아닌가 싶다.

어쨌거나 이렇게나 멋진 팀을 우리 생애 직접 만났다는 사실에 대해, 두고 두고 감사해야할 듯하다. 언제 또 이런 팀을 만날 수 있겠는가. 한국축구의 새싹에서 기둥으로 자라고 있는 동안, 선수들이 보여줬던 성장스토리를 잊지 않겠다. 고마웠다. 홍명보의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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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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