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레나의 꿈의 구장/신나는 스포츠 세상
故조오련씨 아들 성모를 추억하며. 힘과 용기를 주고 싶습니다.
Helena.
2009. 8. 4. 20:28
성모를 처음 봤던 건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당시였습니다. TV를 보는데 태극마크가 그려진 모자를 쓰고 있던 어린 소년이 카메라를 잡아먹을 듯 다가가더군요. 순간, 뭐 이런 선수가 다 있나, 하는 황당함에 웃고 말았습니다. 보통 경기 시작 전 호명할 시 선수들은 손을 들며 관중들에게 인사를 하고, 중계 카메라는 그런 선수의 모습을 잡곤 하죠. 한데 성모는 마치 랩퍼 같은 모양새로 카메라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갔고 그 엉뚱함에 저는 와, 하며 웃음보를 터뜨리고 말았던 거죠. |
|
그 4차원 소년은 자유형 1500m 경기에서 은메달을 땄습니다. 기자들이 그에게 달려가 소감을 물었던 것은 당연하고요. 한데 성모의 대답이 재밌었습니다. 저는 좋은데 사람들은 별로 안 좋아할 것 같아요, 이었거든요. 이유인즉슨 "사람들은 금메달만 좋아하잖아요. 2등은 별로 기억도 안하잖아요"였습니다. 1등지상주의를 꼬집은 발언에 놀랐는데요, 그 다음 대답은 다시 저를 웃게 만들었지요. "근데 일본은 이겨서 좋아요. 신나요." 하며 부리부리한 눈빛에 한번 힘을 꽉 주는데, 수영계에 참 재밌는 선수가 나타났구나, 하는 생각을 한참동안 했었지요.
그의 이름은 조성모.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씨의 둘째 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6개월 후 저는 성모를 다시 만났습니다. 20살이 된 성모는 제가 다니던 학교에 입학했고 조오련씨의 아들과 아시안게임 수영 은메달리스트라는 후광이 겹쳐, 당시 학보사 기자였던 전 성모를 인터뷰하게 됐지요.
당시 제가 찍은 성모사진입니다.
당시 성모는 유명한 아버지를 둬서 남들은 부럽다 하지만 자신을 그렇지 못할 때가 많았다고 했습니다. 조오련의 아들이 아닌 조성모라는 이름으로 살고 싶은데 아버지와 같은 수영인으로 살다보니 늘 아버지의 그늘에 가려진 듯한 느낌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내 배시시 웃으며 언젠가는 당당히 자신의 실력으로 평가받겠다고 말했죠.
성모가 수영을 처음 시작한 것은 4살 때. "어느 날 보니 내가 수영을 하고 있었어요. 너무 어려 기억조차 나지 않을 때부터 수영을 했던 것 같아요"라고 말했지요.
성모가 참으로 대견스러웠던 것은 2001년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슬픔 속에서도 묵묵히 물살을 갈랐다는 것에 있었죠.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에서 은메달 뒤에는 그런 아픔이 있었던 것입니다.
멕시코와 미국을 오가며 수영을 배우던 청소년기 시절, 아버지와 어머니 형이 보고 싶어 혼자서 방에 앉아 울기도 많이 울었다는 성모. 외국에서 운동을 하느라 가족과 관련된 추억이 하나도 없어 슬프다며, 돌아가신 어머니 얘기를 했었지요. 측은지심에 아무 말도 못하자 "왜 그런 표정 지으세요? 이젠 괜찮아요. 가끔 집에 밥도 없고 먼지가 잔뜩 쌓여있는 거 보면 엄마 생각이 더 많이 나기도 하지만. 이런 제가 안쓰러우면 가끔 저희 집에 오셔서 청소 좀 해주세요. 진짜 바닥에 먼지가 너무 많아서 소파랑 침대 위에서만 생활하고 있어요"라는 말과 함께 개구쟁이 같은 웃음을 지었지요.
인터뷰가 마치고 같이 체육교육과 사무실이 있는 사대신관을 걷는데, 걸으면서도 뭐가 그렇게 신기한지 이리 휙, 저리 휙 하면서 가던 걸음을 멈추고 구경에 열중했고, 그 때문에 5분이면 가는 그 거리를 15분이나 걸려서 갔었답니다. 지나가던 중 예쁜 여대생이 지나가자 "저렇게 예쁜 아가씨도 고대생인가요? 과연... 소문과는 다른데요..."라는 말로 절 또 웃게 만들었고요.
그러다 대학을 졸업하며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겼습니다. 그러던 중 작년 여름 웹상으로 성모와 다시 연락이 닿게 됐지요. 한국체대 대학원에 다닌다며 근황을 전해준 성모와 저는 그렇게 인터넷으로 간간히 연락을 주고받으며 지냈습니다. 한데 성모의 블로그 글이 제 눈에 참 오랫동안 밝히더군요. 2008년 6월 2일자에 '이 세상'이라는 제목으로 올렸던 글이었습니다.
내 나이 15 첫 올림픽
이 세상 모든 걸 다 가질 수 있고
하고 싶은 거를 다할 수 있을 거라 믿고
누릴 수 있는 것을 다 누릴 수 있을 거라 믿었고
내 나이 19 두 번째 올림픽
세상에 대한 도전이었고
실패는 있었으나 좌절은 없다 생각했고
다음 도전의 목표를 바로 바로 세워 날아갈 수 있었고
겁 없이 행동하는 패기로 뭉쳐진 청년이었고
내나이 만 23 세 번째 올림픽도전
패기로만은...
20대에는 .....
10대의 패기의 조금만이라도 남아있다면...
이번은 실패지만
나 자신은 채찍질 하며 다시 한 번 좌절이 아니라는 걸...
응원해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베이징올림픽 대표 탈락 후 쓴 글이었습니다. 그때 전 성모에게 말했죠. 내게 있어 최고의 수영선수는 조성모였다고요. 역시나 성모는 "진심이십니까. 후후후"라고 운을 뗀 뒤 "누나도 우울하시나요? 우울 한 먹구름 빨리 걷어 버리고... 우울할 때는 저 같은 귀여운 후배에게 맛있는 거 사주세요"라고 말했죠.
아버지 조오련씨가 모방송사 프로그램을 통해 2002년 대한해협 횡단 당시, 연예인들이 응원한다며 태릉선수촌에서 훈련 중인 자기를 보러 오는 게 그렇게 싫었다는 성모. 텔레비전에서 코믹하게 나오는 아버지 모습이 참 보기 싫었다는 성모.
그때만 해도 어머니를 떠나보낸 뒤 긴 사춘기를 앓고 있던 성모였기에 그러한 반응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겠지요.
그렇지만 그로부터 3년 뒤 성모는 아버지와 형 성웅씨와 함께 독도횡단에 나섰습니다. 삼부자 독도횡단이었지요. 큰 뜻을 위해 또 다시 횡단에 나서는 아버지를 돕는 성모가 참 기특했습니다. 이제는 훌쩍 자라 어른이 된 것이었죠. 바다수영을 오래 하다보면 체온이 쉽게 떨어지기 때문에, 이를 막기 위해 당시 성모는 억지로 살을 찌웠습니다. 십 킬로 가량 찌우는 바람에 온몸에 군살이 붙었고, 운동선수로서 쉽지 않은 선택이었음에도 아버지를 위해 그는 기꺼이 동참했죠. 그렇게 세가족은 울릉도에서 독도까지 120Km되는 거리를 나눠 헤엄치며 독도아리랑을 성공적으로 마쳤습니다.
그로부터 1년 뒤인 2006년 8월, 성모는 개인블로그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죠.
6년 전 이맘때구나
첫 올림픽 나갔는데
그때는 가족이 4명이였는데
지금은 세 명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가 정말 행복했는데...
무엇이 날 건방지게 만들고 사진으로만 봐도
서로들이 별로 친하지 않다는 걸 느낄 수가 있다..
그때는 몰랐는데 사진을 이렇게 보니깐 너무 안 친해 보인다
저때가 딱 내 사춘기 때였다 보다...
어느 장소든 간에 가족들이 싫었었다
보기도 싫었었다...
ㅋㅋ 사직수영장 뒤에 가서 형한테 귓방맹이 맞은 기억도 새록
새록 생각난다...내가 가족들 수영장에 오는 거 쪽팔리다고
말한 거 같다...미친놈 건방진 새끼
지금이라도 더 늦기 전에 가족끼리 아무리 시련이 와도
서로 사랑하면서 행복하게 살고 싶다
오늘 같은 날
내 일에 대한 답이 안나올 때
더욱 가족이 그립다...
울고 싶다 눈물이 말랐다
동정은 받고 싶지 않다.
사실 난 강하니깐.
아버지를 수영'수'자를 쓰며 수령님이라 불렀던 성모. 지난 4월 재혼한 아버지의 행복과 건강을 누구보다도 바랐던 성모. 어머니에 이어 아버지까지 하늘로 떠나보낸 성모의 행복과 건강을 이제는 제가, 두 손모아 온 마음으로 바랍니다.
추억이라는 제목과 함께 개인 블로그에 올라간 사진.
무엇보다 조오련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