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레나의 꿈의 구장/Footballers

자살하고 싶다던 고종수, 은퇴 안타깝다

Helena. 2009. 2. 9. 13:48
영원히 겁없는 아이, 앙팡테리블로만 남을 것 같던 고종수가 전격 은퇴를 선언했다. 1998년 이동국, 안정환과 함께 K리그 르네상스를 열였던 그를, 우리는 이제 더이상 그라운드 위에서 보지 못한다.

2007년 여름 아버지 김호 감독과 함께 대전으로 둥지를 튼 그에게서 나는 부활의 날갯짓을 엿봤었다. 인터뷰를 이유로 가진 만남에서 고종수는, 이대로 선수생활이 끝날 것 같아 자살도 생각했었지만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지기는 싫었다, 며 다시 일어서겠다는 말을 계속해서 강조했었다. 허름한 대전시티즌 숙소에서 진행된 고종수와의 인터뷰는, 그래서 더 기억에 남고 그때문에 내 마음을 더욱 아프게 만든다.  


사진 출처: 스포탈코리아

앙팡테리블과의 재회

오후훈련 시작 전 조심스레 다가가서 물었다. “저녁 식사 후에 인터뷰하면 된다고 들었어요. 괜찮으시죠?” 짜증 섞인 목소리로 고종수가 말했다. “나는 11시 반이라고 들었어요. 그때부터 숙소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전달과정에서 착오가 벌어진 듯 했다. 당황스런 기색을 애써 감춘 채 그에게 다시 물었다. “어쩜 그렇게 10년 전이랑 똑같으세요?” 그제야 고종수는 웃었다. “그때를 기억하세요?”라고 말하며.

저녁 식사가 끝난 후 고종수는 “잠깐 방에 좀 갔다 올게요”라고 말했다. 괜히 걱정스런 마음에 숙소 계단을 지키고 서 있었다. 5분 쯤 지났을까. 핸드폰을 들고 내려오는 고종수의 모습이 보였다. “안 오시는 줄 알았어요”라고 말하자 고종수는 “아, 진짜 사람들은 왜 자꾸 마음대로 저에 대해 생각하죠?”라며 반문했다. 그것은 공백 기간 동안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이기도 했다. 그 때문에 맺힌 응어리가 많았나 보다. 고종수는 자리에 앉아 마자 ‘리지니’ 이야기부터 꺼냈다.

“1999년 수원에 있을 때 선수들이 리니지를 많이 했어요. 저녁에 운동 끝나고 나면 남들처럼 통닭집에서 맥주를 먹겠어요. 뭘 하겠어요. 그래서 다들 당구장 아니면 PC방에 가곤 했죠. 그런데 당구를 치면 계속 서있어야 하잖아요. 그러면 몸이 쉽게 피곤해진다며 감독님께서 당구장에는 잘 못가게 하셨어요. 그래서 가끔씩 PC방에 가기 시작했는데 한번은 친구가 리니지를 하고 있더라고요. 옆에서 구경하다 자연스레 하게 됐죠. 그런데 이게 중독성이 정말 강해요. 한 한달 정도 했나봐요. 어느 날 인터뷰 중에 쉬는 시간엔 뭘 하냐는 질문을 받았어요. 그래서 PC방에 다닌다고 했죠. 그랬더니 주로 무슨 게임을 하냐고 다시 묻더라고요. 당시 제 대답이 ‘리니지요’였어요. 그때 딱 세 마디 한 게 지금까지 온 거예요. 그 뒤로는 한 번도 해본 적 없었는데 말이에요. 그런데 내가 성을 먹었다느니, 레벨이 높다느니, 밤낮으로 리니지만 하다가 축구를 안 하게 됐다느니… 사람이 잠도 안자고 리니지만 하면 어떻게 되는지 아세요? 죽어요. 죽어. 어떻게 해서 소문이 그렇게까지 났는지 모르겠어요. 그러다 음식점을 차렸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엔 울컥 했어요. 그러면서 생각했죠. ‘아, 빨리 복귀해서 운동장에 있어야겠구나. 운동장에 없으니까 자꾸 이런 소리가 나오는구나’라고요.”

잠깐 침묵하나 싶었지만 이내 이야기는 계속 됐다.

“팬들이 그랬어요. ‘예전의 화려한 모습을 바라는 게 아니다. 푸른 그라운드에 서있는 그 모습만이라도 보고 싶다’라고요. 용기를 많이 냈죠. 여기서 그만뒀으면 ‘게임 중독에 빠져 연예인들과 술만 마시다가 축구를 망친’ 고종수로 밖에 기억이 안 될 거 아니에요. 안 좋은 선례의 대표적인 주인공이 되겠죠. 그렇다면 제 삶이 얼마나 불행할까요? 그동안 제가 프로무대에서 뛴 지도 어느새 횟수로 13년째에요. 그 시간동안 나름 열심히 했다고 하지만 그게 나만의 생각이 될 수도 있잖아요. 저는 그저 축구선수 고종수로만 기억되길 바라요. 그런데 꼭 앞에 수식어가 붙네요. 건방지다느니, 게으른 천재라니… 그게 싫었어요. 그래서 ‘다시 운동장에 돌아오자.’ ‘10분이라도 뛰고 관두자.’ 그 마음으로 다시 재기하게 된 거예요.”

그렇지만 그 공백의 시간들을 온전히 메운다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입단 당시 최윤겸 前감독님께서 참 잘해주셨어요. 무엇보다 저를 믿어주셨고요. 그런데 마음이 너무 앞선 게 화근이었어요. 전지훈련 가서 한달 만에 8kg를 뺐는데 그게 문제였죠. 단백질 섭취도 안하고 살만 급히 빼다보니 근력이 떨어지고 말았거든요. 결국 근육을 다 못쓰게 돼버렸어요. 감각만 끌어올리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에요. 거기서 끝난게 아니에요. 3월 중순엔 연습 중에 패스를 하다 왼쪽 사타구니 쪽 근육이 그만 파열되고 말았어요. 빨리 운동장에 나가고 싶은 마음에 과욕을 부린 게 결국 전반기를 그냥 보내버리게 된 계기가 되고 말았죠.”

지난 봄 검정색 모자를 푹 눌러쓴 채 경기를 지켜보던 고종수의 모습이 생각난다. 모자가 갖고 있던 본디 색보다 더 어두운 빛을 하고 있던 그의 얼굴 역시 기억난다.

“정말 뛰고 싶었어요. 그러면서 깨달았죠. 나는 어쩔 수 없는 축구 선수구나. 그러니 꼭 이 악물고 운동해서 복귀하자. 그렇게 다시 한 번 다짐했죠.”

부활의 서곡을 불러라
“함성소리를 듣는데 온 몸에 소름이 쫙 돋더라고요. 경기장을 돌면서 모든 사람들에게 큰절을 올리고 싶었어요.”

2007년 8월 1일. 부산과의 FA컵 16강전에서 고종수는 2년 1개월 만에 경기에 나섰다. 2005년 7월 10일 수원전 이후 처음이었다. 그 뒤 고종수는 10분(8월 12일 포항전), 22분(8월 19일 인천전), 27분(8월 26일 전북전), 40분(9월 2일) 이렇게 조금씩 출전 시간을 늘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난 9월 15일 서울전에선 올 시즌 처음으로 선발 출장해 90분 풀타임을 소화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의 눈길을 사로잡은 경기는 앞서 열린 성남전이었다. 그는 그날 ‘고종수는 아직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모두에게 증명했다.

“0-1로 지고 있을 때 반전을 바라면서 투입됐죠. 처음에는 잘 풀렸어요. 관중들이 환호해주니까 힘이 저절로 났거든요. 마지막에 역전할 수도 있었는데 좀 어이 없는 상황이 발생하고 말았죠. 물론 그 심판은 못 봤다고 할 수 있어요. 하지만 ‘난 몰랐는데…’가 끝은 아니잖아요. 우리나라 축구가 발전하기 위해선 서로가 발전해야죠. 그날 제가 심판 판정이 잘못됐다고 어필을 많이 했잖아요. 누군가는 그 모습을 보며 아직도 저를 싸가지 없는 놈으로 생각할 지 몰라요. 하지만 모든 선수들에겐 이기고 싶은 욕망이 있어요. 지는 거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러다보니 감정이 자기도 모르게 올라가는 거예요. 게임 끝나면 죄송스럽지만 그래도 경기 중엔 분이 안 삼켜져요. 그래서 성남전 때도 그랬던 것 같아요.”

시련의 고비를 이제 막 건넌 그는 후배 선수들을 위한 진심어린 충고 역시 아끼지 않았다.

“그동안 인생에 대해 많이 배울 수 있었어요. 최고의 자리에도 올라가봤고 최악의 자리까지도 가봤잖아요. 지금도 이 순간에도 과거의 저처럼 방황하는 선수들이 많이 있겠죠. 중요한 건 자기 스스로 잘못됐다는 사실을 느끼고 깨닫는 거예요. 그 전까지는 주체하기가 힘들죠. 어디 가면 사람들이 알아봐주지, 젊고 혈기는 왕성하지, 여자들은 축구 선수라며 다 좋아해주지. 정말 귀신이 끌어당기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요. 그러니 옆에서 누가 이야기해도 그게 나쁜 건지 모르죠. 그러다 후회할 날이 올 거예요. 옛날에 김호 감독님도 저 불러놓고 많이 야단치고 그러셨거든요. 그래도 제가 끝까지 정신을 못 차리니까 결국엔 포기하고 마셨죠. 그렇지만 보세요. 결국엔 후회했잖아요. 그러니 저처럼 뒤늦게 후회하지 말아요.” 그러나 이렇게 교훈적인 멘트로 끝낼 고종수가 아니었다. “그리고 앞으로 질문은 그냥 직설적으로 하세요. 뭘 그렇게 돌려 말하세요.” 역시나 그의 입심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했다.

오해에 대해 말하다
“나요, 기자들 별로 안 좋아해요. 많이 당했거든요. 가끔씩 기자들이 편하게 이야기나 하자며 만나자고 그랬어요. 그때마다 기사로 안 쓰겠다고 약속까지 하며 말하길래 그 말 믿고 속마음을 있는 그대로 얘기한 적이 많았어요. 그런데 꼭 다음날 제가 한 이야기가 기사로 전부 나오더라고요. 그것 말고도 할 말은 정말 많아요. 대표팀에 있다가 무릎 수술하러 독일 갈 때도 그랬어요. 감독님과 이야기 한 뒤 간 거였는데 다음날 신문 1면에는 ‘고종수 국가대표 퇴출!’이라고 나오더라고요. 가판만 본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겠어요. ‘쟤 또 무슨 사고 쳤나보다’ 하겠죠. 그냥 ‘수술차 독일행’ 이렇게 써도 되는 거잖아요. 왜 있지도 않은 이야기를 지어내서 쓰고 그러냐고 항의라도 하면 그냥 미안하다는 말로 끝나더라고요. 늘 저에 대한 이야기는 자극적으로 쓰는 것 같아 항상 속상하고 마음이 안 좋았어요. 한번은 1면에 ‘고종수, 기자들 반말하지마!’ 라고 나왔더라고요. 그게 어떻게 된 건 줄 아세요? 어느 날 파주에서 훈련하고 있는데 어떤 기자가 다가와서 ‘내가 야구 담당하다 이번에 축구 쪽으로 다시 왔어. 야, 반갑다’라고 하더라고요. 딱 봤는데 나랑 나이 차이가 별로 안 나 보였어요. 그래서 ‘저 아세요?’라고 물어봤죠. 그랬더니 빨개진 얼굴로 ‘죄송합니다’라고 말하고 가더라고요. 거기서 저는 끝났나보다 생각했죠. 그런데 웬걸요. 다음날 신문 1면에 ‘나한테 반말하지마!’라는 제목의 기사로 제 이야기가 실렸더라고요. 또 그냥 지나치며 1면만 본 사람들은 ‘고종수 또 또라이 짓 했네’ 이럴 거 아니겠어요. 억울할 때가 많았죠.”

물론 고종수가 말하는 ‘억울한 순간’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요즘도 운동 선수는 운동만 해야 하지 않냐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럼 공부하는 사람들은 공부만 하나요? 그럴 순 없잖아요. 솔직히 사람인데 어떻게 그래요. 물론 일단 축구 선수니까 축구를 잘해야겠죠. 그렇지만 운동장 밖에서 축구 외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끼가 있다면 보여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쉴 때 뮤직비디오 하나 찍었다고 ‘네가 연예인이라도 되냐?’ ‘그 시간에 축구나 하지 이 정신 나간 놈아’ ‘그냥 축구 그만두고 딴따라나 해’하는 반응들은 너무 아쉽고 억울했죠.”

그에게 요즘 젊은 선수들이 큰 제약 없이 광고나 패션화보를 찍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봤다. 그러자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톡톡 뛰는 대답이 돌아왔다.

“미리 다 욕먹으면서 ‘선빵’ 쳤잖아요. 그래서 편한 거죠. 군대 갔다 오셨어요? 지금 가는 애들은 선배들에게 이런 얘기 많이 듣잖아요. ‘지금처럼 군 생활하면 나는 5년도 할 수도 있겠다. 너넨 복에 겨운 거다’라고요. 그 말처럼 제가 운동할 때도 선배들이 참 운동 편하게 한다고 그랬어요. 그때마다 저는 그냥 웃었죠. 지금 후배들에게 ‘나 때문에 너네 편한 거다’라고 말한다면 후배들 역시 제가 그랬듯 그냥 웃기만 할 걸요.”

시련의 나날 속에 꺾인 청춘
“교토 퍼플상가에서 방출 당한 후 수원으로 복귀했을 때, 그때가 제일 힘들었어요. 건방지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분이 생각하는 축구와 제가 하고 싶은 축구는 너무 차이가 컸어요. 그때는 미드필드 플레이가 없었거든요. 하지만 만날 뻥뻥하면 보는 사람 입장에서 그게 재밌겠어요? 무슨 만루 홈런 치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하는 건 야구가 아니라 축구인데 말이에요. 흔히 프랑스 축구를 ‘아트사커’라고 부르잖아요. 저는 우리나라 선수들도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문제는 왜 안하느냐 이거죠. 시합장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데 그러지 못할 때가 많아요. 그걸 연습장에서 혼자 남아서 해야 하나요? 프로 선수라면 하나의 상품이고 그걸 잘 포장해야지만 소비자인 팬들이 볼 때 ‘괜찮다’는 소리가 나오는 법이에요. 그런데 보통은 ‘그냥 그렇네’라는 반응이 나오잖아요. 그건 ‘안 좋네’보다 더 무서운 거예요. 그런 와중에 제 정신이 그냥 나가 버린 것 같아요. 일단 팀 스타일엔 안 맞지, 그 상황에서 2군 게임 뛰라고 하지, 자존심은 상할대로 상해버렸지, 그래도 열심히 뛰었는데 전반 끝나자마자 바로 교체 해버렸지. 그러면서 정신이 확 나가버렸어요. 쥐뿔로 없는 게 자존심만 센 거죠. 그래서 ‘축구 그만두겠습니다. 좋은 성적 거두십시오’라고 적힌 편지를 감독님 책상 위에 올려 놓고 그냥 팀을 나와 버렸어요. 그러고 나서 호텔에 박혀있었죠.”

그가 자살을 생각한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글쎄요. 그때는 내가 뭐에 쓰였는지 모르겠어요. 자존심도 많이 상했고 축구에 대한 회의도 느껴졌고요. 그래서 우울증에 시달리다 자살까지 생각했던 것 같아요. 죽으러 영동대교까지 갔다가 그냥 돌아왔지만… 그 이야기는 더 하고 싶지 않네요.”

우여곡절 끝에 다시 팀으로 돌아왔지만 신은 여전히 그에게 평온을 허락하지 않았다.

“당시 숙소생활을 안했는데 구단에서 훈련이 있건 없건 무조건 9시에 와서 6시까지 있으라 고 그랬어요. (길들이기 단계였나요?) 그 단계가 아니라니까요. 거진 완전 아웃된 단계에요. 보통 오전 훈련만 있는 날에도 저는 혼자서 저녁까지 숙소를 지키고 있어야만 했어요. 물론 처음엔 그럭저럭 괜찮았죠. 그런데 한 2주 쯤 지났을까. 짜증이 확 나버리더라고요. 그래서 구단가서 임의탈퇴 시켜달라고 했죠. 그때는 제가 무슨 정신으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아시죠? 원래는 교토 퍼플상가에서 나오면서 FC서울에 가려고 했던 거. 그런데 수원 쪽에서 안 된다며 FIFA에 제소까지 하면서 나를 데리고 갔잖아요. 그렇게 대우할 거면서 도대체 날 왜 데리고 갔는지… 그러다 임의탈퇴는 2대 1로 트레이드로 자연스레 풀렸어요.”

여기서 그가 말한 트레이드는 지난 2005년 1월 자신과 조병국을 묶어 전남에 내주는 조건으로 김남일을 영입한 것을 말한다.

“자존심 많이 상했죠. 그때 관뒀어야 했는데…(웃음). 그런데 사람 일이 다 그런 거잖아요. 위에 있을 때도 있지만 밑에 있을 때도 있는 거고… 그러니 크게 상관 안 해요. 축구 선수는 운동장에서 자기 실력을 보여줘야지 다니면서 ‘나는 누구보다 더 잘해’ ‘나는 어딜가도 누구보다 더 잘할 수 있어’ 이렇게 말하는 건 아무 소용없다 생각해요. 다른 사람들이 운동장에서 뛰는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보고 판단하는 거지 백날 혼자서 말만 하면 뭐해요. 전남에 있을 때도 선수로서 할 건 다했어요. 허정무 감독님이 워낙 스타일이 강하기 때문에 맞춰가는게 힘들었지만 그래도 감독이 원하는 걸 선수는 당연히 따라가는 거니까요. 전남에서 나오게 된 건 애당초 1년 계약이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마침 가을 쯤에 발목에 자란 뼈를 제거하는 수술을 하는 바람에 시즌이 일찍 마감된 것 뿐이고요.”

그렇다면 무적(無籍) 상태로 2006년을 보낸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사연이 깁니다. 다른 팀으로 가려고 했는데 마지막에 틀어지는 바람에 못 가게 된 거예요. 마지막에 윗사람이 틀어서 안됐다고 들었어요. 저는 붕 떠버린 거죠. 그래서 2006년을 그렇게 보낸 거예요. 1년 동안 혼자 운동하며 있었어요. ‘이렇게 하면 뭐해’라며 운동 안하고 있다가 ‘아냐, 다시 해야 해’라며 마음 고쳐먹고 다시 운동하고. 그렇게 좀 운동하다 ‘아, 젠장. 하면 뭐하냐고’라며 다시 한탄하고. 그런 생활의 반복이었죠.”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처음 고종수가 대전에 입단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많은 사람들은 ‘과연 잘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던졌다. 시민구단 대전시티즌과 그간 그라운드의 반항아로만 표상되던 고종수와의 조합은 너무나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저는 대전보다 더 어려운 상황 속에 있다 이곳에 왔어요. 그래서 지금 이렇게 팀에 들어와 운동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너무 좋아요. 무엇보다 대전에서는 다른 팀에서 느끼지 못한 걸 많이 느낄 수 있어 좋고요.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이죠?) 따뜻함? 왠지 맑음? 왜 웃으세요? 진짜에요. 사람들이 다 맑아요. 순수하고 맑고 거리낌 없고. 솔직히 상위권 팀들은 ‘너를 잡아야 내가 산다’라는 인식이 서로들 강해 겉으로만 친한 척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대전은 그런 느낌을 좀처럼 받을 수 없어요. 선수들 간의 끈끈한 정을 이 팀에서 많이 느끼고 있어요.”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좋았던 것은 단지 대전 유니폼을 입었다는 이유만으로 무한한 지지와 격려를 보내준 대전 팬들의 존재였다.

“감사하게 생각해요. 그냥 흘러 지나가듯 감사하다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감사해요. 이 팀에 와서 아직까지 크게 도움은 안됐지만 팬들과 함께 다시 한 번 날고 싶어요. 올 시즌은 준비도 많이 부족했고 감독님도 바뀌는 등 정신 없었지만 앞으로 서로 힘을 더 합쳐야겠죠. 그래서 좋은 모습 보여드릴게요. 꼭 다시 날게요.”
동화 속 네버랜드의 피터팬은 동심을 잃어버린 순간 날지 못했다. 그러나 고종수는 스스로 어른이 되길 거부하며 날기를 거부했다. 하지만 추락하던 순간, 그 마지막 찰나에 그는 깨달았다. 다시 날자고. 마지막으로 꼭 다시 한 번.

물론 아쉽게 그의 비상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변치 않는 믿음만이 그를 곧 날게 해줄 것이라는 사실을. 아마도 그것은 지금 우리가 고종수의 부활을 믿고 싶은 가장 큰 이유일지도 모른다.


사진 출처: 오센

이제 더이상 선수 고종수로선 만날 수 없겠지만 축구인 고종수의 삶은 앞으로도 계속 되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