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다방/오늘의 영화
축구기자가 본 아내가 결혼했다는
Helena.
2008. 11. 3. 03:04
학생시절, 박문성 SBS축구해설위원과의 인터뷰를 진행했던 적이 있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집으로 가던 길, 마침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다는 신기한 연 덕분에 차를 얻어탈 수 있었다. 박문성 위원은 축구계에 먼저 몸 담은 선배로서 이런저런 조언을 내게 해줬는데, 갑자기 이야기 중 “아내가 결혼했다, 라는 책 봤어요?”라는 질문을 내게 툭 던졌다. 아내가 결혼했다고? 워낙 책과는 담 쌓으며 살았던 지라 소설책의 제목인지도 몰랐다. 책 중간 중간 축구 이야기가 참 맛깔스럽게 녹아있다며 내게 권해줬는데, 제목 때문인지 기분 참 이상했다. 아니 묘했다는 표현이 더 맞을 듯하다.
다음날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어봤는데 하루 만에 독파했던 기억이 난다. 책을 덮기엔 다음 내용이 궁금해 한 장 한 장 넘기며 읽었는데, 그러다보니 금새 맨 끝장이 나오더라. 그리고 2년 뒤 이제는 진짜 축구기자가 돼서 아내가 결혼했다를 다시 봤다. 이번엔 영화로.
소설 속 주인공, 그러니까 두 번 결혼한 아내 인아는 요목조목 자기 생각을 참 딱 부러지게 이야기하는 당찬 여자였다. 그 여자를 사랑하는 남편 덕훈은 결국엔 사랑으로 너를 이해하노라, 였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어리버리 남자는 아니었다. 한데 영화 속 인아(손예진)은 생글생글 눈웃음 ‘작렬’인, “자기야~ 응응?”하는 애교 덩어리이자 그야 말로 머리 끝부터발끝까지 사랑스러운 여자로 나온다. 그리고 그 남자 덕훈은 그간 김주혁이 영화(싱글즈, 광식이 동생 광태 등)에서 보여줬던 캐릭터 그대로, 약간 소심한, 그래서 그 귀여움에 큭큭 웃음이 절로 나오게 만다는 그런 남편으로 나온다.
밍숭맹숭했던 인아와 덕훈의 만남은 바르셀로나가 마드리드의 ‘클래식 더비’이야기를 시작으로 불붙는다. 바르셀로나가 마드리드에게 지는 바람에 잠을 못잤다며, 시무룩해 있는 인아. 그리고 당연한 거 아니냐며 껄껄 웃는 덕훈. 술잔을 기울이면서도 바르셀로나가 잘났네, 마드리드가 최고네, 하는 갑론을박으로 밤을 새는 두 사람. 도대체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는 어떤 사이이길래. 눈이 살짝 풀린 채 인아는 “카탈루냐 지방의 상징이자 정신인 바르셀로나” 운운하는데, 도대체 카탈루냐는 뭔말이며 그것이 바르셀로나와는 무슨 상관이길래.
그러기 위해서는 ‘더비’에 대한 개념을 이해해야겠다. 더비는 크게 로컬 더비와 라이벌 더비로 나뉜다. 로컬 더비는 말 그대로 같은 연고지에 기반을 두는 팀 간의 다툼이며 라이벌 더비는 연고지는 다르더라도 정치 또는 종교 문제 등 여러 이유로 숙명의 대립 관계에 놓인 명문클럽 간의 자존심 싸움이다.
스페인 양대 거목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의 양보 없는 한판 대결을 일러 엘 클라시코, 영어로는 클래식 더비라고 한다. 엘 클라시코는 스토리가 있는 매치업이다. 스페인 수도 마드리드가 위치해 있는 카스티야와 바르셀로나가 속해있는 카탈루냐 지방에 대한 역사적 이해가 필요하다. 15세기 말 통일을 이룬 스페인의 정치 행정 중심지는 카스티야다. 카스티야어는 공영어로도 채택됐고 라틴 아메리카로 전해진 근대 스페인 문화의 핵심 역시 카스티야의 그것이다. 중세 시대에 부분적으로, 혹은 완전히 독립적 지위를 누린 스페인의 여타 지방들은 카스티야의 정치 패권에 강한 반감을 보였다.
17세기에 접어들어 카스티야와 반목하여 분리 운동까지 전개한 카탈루냐의 반발은 특히 심했다. 이때부터 카탈루냐는 잃어버린 언어와 자치권을 얻으려 200년 넘게 투쟁했다. 20세기 초 카탈루냐는 희망의 빛을 찾았으나 독재자 프리모 데 리베라의 억압에 뜻을 이루지 못했고 뒤이어 출현한 새로운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공세에 크게 억눌렀다. 스페인 민주공화국을 정복하고 정권을 거머쥔 프랑코는 내전 때 최후까지 저항한 카탈루냐인들을 집권 후 심하게 탄압했다. 그러나 카탈루냐의 민족주의운동은 쉬이 사그라지지 않았고 프랑코가 사망한지 4년 만인 1979년 결국 자치권을 획득했다. 스페인 중앙정부의 심장인 카스티야의 마드리드는 당연히 카탈루냐의, 또 바르셀로나의 적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었다.
스페인 근대사의 명암은 축구판에도 예외없이 적용됐다. 왕실과 프랑코 정권의 보호를 받으며 성장한 레알 마드리드와 달리 바르셀로사는 온갖 고초 속에서 힘겹게 생존해왔다. 20세기에 나타난 2명의 독재자 리베라와 프랑코는 바르셀로나 내부 일에도 사사건건 참견했다. 프랑코는 ‘FC바르셀로나’가 카탈루냐식 표기라며 팀명을 ‘CF바르셀로나’로 바꾸라고 명령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바르셀로나는 프랑코가 죽는 날까지 어이없게도 ‘CF바르셀로나’로 활동했다.
반면 권력자 프랑코를 팬으로 둔 덕분에 레알 마드리드의 항해는 더없이 수월했다. 자연히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의 관계는 날로 냉각됐다. 더욱이 바르셀로나는 프랑크와 중앙정부에 대놓고 저항하는 카탈루냐인들의 유일한 희망이자 고단한 삶의 탈출구였다. 고유의 언어도 맘놓고 사용하지 못하는 등 갖은 구속과 속박에 짓눌려 살던 카탈루냐인들이 쌓인 울분을 속 시원히 토해낼 공간은 축구장 밖에 없었다. 프랑코 정권에 지배당한 카탈루냐인들은 바르셀로나를 독립군 삼아 정부권 격인 레알 마드리드에 항거했다. 그래서 스페인 사람들은 아직도 엘 클라시코를 정치의 대리전이라고 말한다.
지난 반세기에 걸쳐 2명의 대 스타가 엘 클라시코를 극도의 흥분 상태로 이끈 사건이 있다. 주인공은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와 루이스 피구. 레알 마드리의 위대한 레전드 디 스테파노가 원래는 바르셀로나와 계약하기로 돼 있다는 사실을 혹시 아는가. 프랑코 정권이 배후에 개입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가져 이후로도 이 일은 뜨거운 논쟁거리가 됐다. 힘의 논리에 밀려 억울하게 디 스테파노를 원수에게 빼앗긴 바르셀로나 팬들의 레알 마드리드를 향한 분노는 극에 달했다.
그리고 2000년. 바르셀로나의 상징으로 일컬어지던 루이스 피구가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하는, 카탈루냐 팬들 입장에서는 도무지 상상조차 하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피구는 요한 크루이프 이래 바르셀로나 팬들이 가장 좋아하던 선수였고 팀의 기둥이자 전술의 핵이어서 그 파장이 실로 어마어마했다. 카탈루냐인들이 특히 상처받은 이유는 그해 여름 이적시장이 열리기 전 피구가 제 입으로 “레알 마드리드로 가는 일은 절대 업을 것”이라고 못박았기 때문이다. 결말은 뻔하다. ‘유다 이상의 배신자’로 낙인찍힌 피구는 바르셀로나 팬들이 가장 사랑하던 선수에서 가장 저주하는 인간으로 바뀌었다.
레알 마드리드의 피구가 첫 바르셀로나 원정, 즉 엘 클라시코에 참가했을 때 그라운드는 아수라장이 됐다. 피구가 코너 쪽으로 움직일 때마다 관중석에서 온갖 물건이 쏟아진 탓. 바르셀로나 팬들은 심지어 피구에게 돼지 머리와 위스키 병을 던지기도. 참고로 2002년 월드컵 이후 바르셀로나로 여행을 간 적이 있는데, 당시 포르투갈 피구의 이름이 새겨진 유니폼을 입고 있던 내게 바르셀로나 사람들은 마구 욕을 했었다. 왜 피구 유니폼을 입고 있냐면서. 피구와 상관없는 내게도 온갖 심한 욕을 했을 정도로 지금까지 피구를 향한 그들의 악감정은 실로 엄청나다.
황실로부터 ‘레알’이라는 호칭까지 얻은 레알 마드리드와 달리 오랫동안 정권에 항거하며 까탈루냐의 정신을 상징한 바르셀로나. 인아는 바르셀로나의 자유와 저항 정신, 그 뜨거운 피와 열정을 사랑한다. 결국엔 바르셀로나를 좋아한다는 설정은 특유의 자유로운 정신으로 결국엔 기존 가족체제-사랑한다면 또 결혼할 수 있다는-에 반기를 든다는 인아의 캐릭터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겠다.
영화를 보다보면 엄마가 된 인아가 자신의 아이에게 ‘지원’이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지단 넘버원’의 약자로 레알 마드리드의 팬 덕훈을 위한 이름이다. 영화 중간 덕훈은 2002월드컵 당시 포르투갈과의 예선 마지막 경기를 맥주와 통닭, 그리고 친구와 함께 본다. 박지성의 골이 터지고 히딩크 감독에게 달려가던 순간 덕훈과 덕훈의 친구 역시 얼싸 안는데 그때 냉장고가 살짝 잡힌다. 냉장고에 붙어 있던 브로마이드 속 주인공이 바로 지단이다. 1998프랑스월드컵과 유로2000에서 프랑스에 우승컵을 안겨준 불멸의 플레이메이커. 2006월드컵 결승전에서 마테라치의 언어폭력을 참지 못하고 박치기를 날리며 퇴장과 동시에 쓸쓸히 그라운드를 떠나야만 했던 아픔도 갖고 있다. 그러나 현재 프랑스 아트사커는 지단의 은퇴와 동시에 제 빛을 잃고 말았다. 그만큼 대표팀 내 지단의 비중은 실로 컸으며 아직까지 그의 빈자리를 메울 선수들이 나타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이겠다.
그러나 덕훈이 진정한 레알 마드리드 팬이라면 칸과 보르도(이상 프랑스) 유벤투스(이탈리아)를 거쳐 레알 마드리드에 온 프랑스인 지단을 좋아했을까? 난 아니라도 본다. 지단의 인지도가 높기 때문에 부러 설정했다고밖에 볼 수 없겠다. 진정 레알 팬이라면 라울에 푹 빠져있을터. 스페인에서 나고 자란, 그리고 레알 마드리드에서 데뷔전을 치른, 입때껏 레알 마드리그가 아닌 다른 클럽의 유니폼은 단 한번도 입지 않은 원클럽맨 라울 말이다. 우리에겐 안정환의 골 세레모니로 알려진 반지 세레모니의 원조가 바로 라울이다. 뿐만 아니라 라울은 챔피언스리그 최다출장 및 최다골의 기록을 갖고 있는, 이제는 어느새 ‘전설’의 경지에 오른 선수이다. 덕분에 팀 내에서도 입지가 꽤나 세, 라울의 눈밖에 나면 레알 마드리드에서 선수 생활하기가 힘들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다. 그렇다면 딸의 이름은 어떡하냐고? 흠. ‘라울 넘버원’의 약자인 ‘라원’이가 어색하다면 ‘미소가 아름다운 라울’의 약자인 ‘미라’ 어떨까. ^^
참, 영화 중간 중간 덕훈의 자동차도 눈길을 끈다. 왜냐고? 승용차 번호가 2002이기 때문이다. 축구가 너무 좋은 이 남자, 승용차 번호도 2002로 하고 만다. 홍명보가 승부차기 상황에서 4강행을 결정짓는 마지막 슛을 성공시키던 그 순간, 프로포즈에 성공했던 그에게 2002라는 숫자는 분명 특별할 수밖에 없다.
영화 말미에는 바르셀로나의 홈구장 누캄프가 등장한다. 영화 아내가 결혼했다는 지난 5월11일 프리메라리가 37라운드 마요르카와의 홈경기에서 직접 촬영했다. 9만8600명이 수용 가능한 경기장인데, 이날 경기에는 6만5142명이 입장했다. 한때 아스날의 ‘킹’으로 군림했던 앙리(전반17분)와 흑표범 에투(후반12분)가 분전했으나 2-3으로 패하고 말았다. 후에 손예진은 바르셀로나의 성적이 신통치 않았던 때라 환호하는 관중들의 모습을 잡기가 어렵다고 회고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까닭인 즉 지난 시즌 바르셀로나는 3위로 밀려나며 레알 마드리드가 리그 우승하는 모습을 씁쓸하게 지켜봐야만 했기 때문이다. 게다 촬영이 있기 바로 전 경기 상대가 레알 마드리드였는데, 역사적인 클래식 더비에서 1-4로 대패하는 ‘수치’까지 겪고 말았다. 당시 후반 41분 앙리의 골이 터졌는데, 그 골마저 없었으면 무득점으로 레알 마드리드에게 패하는 ‘오욕’을 맛봐야만 했을지도.
한가지 재밌는 사실은 레알 마드리드 열혈팬임을 자칭했던 덕훈이 바르셀로나 유니폼을 입고 있다는 사실이다. 축구팬에게 유니폼은 곧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매개체다. 그런 덕훈이 라이벌 바르셀로나 유니폼을 입었다는 사실은 그간 고수했던 정체성을 포기했다는 걸 뜻한다. 결국 이 모습은 인아의 사고방식을 이해하고 존중하고, 더 나아가 동화됐다는 사실을 느끼게 해준다.
참, 바르셀로나의 유니폼을 살펴보면 가슴에 유니세프(국제아동기구) 로고가 크게 새겨져있음을 알 수 있다. 그간 바르셀로나는 그 어떤 기업의 유니폼 스폰을 받지 않기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2006년 9월 창단 106년만에 처음으로 자신들의 가슴을 내어준다. 유니폼을 통해 얻는 수입 중 일정 부분을 유니세프에게 그대로 돌려주고 있는데, 그 덕분에 2007년 피파로부터 페어플레이상을 받기도 했다. ‘클럽 이상의 클럽’(more than a club)이라는 바르셀로나의 슬로건 다운 행보가 아닌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