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 팬들에게 이보다 더 반가운 소식이 있을 수 있을까. 지쿠가 돌아왔다!

지난해 7월 포항에서 임대선수 신분으로 온 지쿠는 이후 17경기 9골 4도움을 기록하며 후반기 강원의 상승을 견인했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활약이었다. 사실 지쿠는 인터밀란(이탈리아) 디나모 부쿠레슈티(루마니아) CSKA소피아(불가리아) 등 유럽 명문클럽에서 활약한 루마니아 대표 출신의 특급 골잡이다. 포항에서 야심차게 영입한 선수였으나 포항의 팀컬러에 온전히 녹지 못했다. 전반기에 15경기 6골을 기록했지만 지쿠의 커리어와 영입비용을 생각한다면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려운 기록이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보통 축구선수들과 다르게 지쿠는 선수답지 않게 포동포동한 이미지였고 실제로 팬들 사이에서는 포동스키라는 별명으로도 유명했다. 또 경기 중에 활동량이 많은 선수도 아닌지라 박지성 같은 미친 활동량에 눈높이가 맞춰진 팬들에게는 잘하는 선수가 맞나? 라는 의문을 줄 때도 많았다.

지난해 7월 김학범 감독이 취임 후 여름이적시장을 맞아 선수보강에 나섰을 때, 가장 적극적으로 원한 선수가 있었다. 그가 바로 지쿠였다. 김학범 감독은 지쿠가 이미 유럽에 적을 두고 있던 당시부터 눈여겨봤다고 한다. CSKA소피아에서 뛰던 시절, 현지에서 지쿠의 플레이를 봤는데 김 감독은 무시무시한 괴물 같은 선수였다고 회상했다. 김학범 감독의 말씀을 그대로 옮겨 적자면 “혼자서 다 해먹었지. 그런데 아무도 막지 못했어. 경기를 쥐락펴락 혼자 다했다니까.”

지쿠에게는 타고난 축구센스가 있었다. 시야가 넓었고 경기를 내다보는 수준 또한 깊었다. 동료의 움직임을 미리 예측한 킬패스가 뛰어났고 위치선정과 이를 골로 연결시키는 결정력 또한 탁월했다.

7월 29일 홈에서 열린 광주와의 경기에서 처음으로 강원 팬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던 지쿠. 포인트를 기록하진 못했지만 수비수 여러 명이 에워싸도 침착하게 볼을 살려내 동료에게 패스하는 모습은 탄성을 자아냈다. 그 짧은 수십 초에 보여준 모습만으로도 우리는 지쿠가 가진 남다른 클래스를 느낄 수 있었다.

8월 26일 전남전에서 보여줬던 날카로운 프리킥 골, 10월 7일 대전원정경기에서 터진 해트트릭과 이어 열린 10월 21일 대구전에서 해트트릭만큼 대단했던 2골 1도움 기록 등 지쿠가 보여줬던 뛰어난 플레이는 여전히 우리 머릿속에 강렬하게 박혀있다. 늘 “우리팀이 살아남는다면 이보다 더 행복할 순 없을 거야!”라고 말했던 지쿠는 정말로 팀을 살려놓고, 후반기 강원FC 극장축구의 주인공에 자신의 이름을 새기고 시즌 종료와 함께 홀연히 떠났다. 임대선수 지쿠와의 강렬했던 6개월이었다.

그랬던 지쿠가 다시 강원FC 유니폼을 입게 됐다. 강원FC로 완전이적하게 된 가장 큰 이유를 물어보니 그 대답이 참으로 뭉클하다. “강원FC가 1부리그 잔류를 확정 지은 지난해 43R 성남전에서 김학범 감독님이 내게 주장 완장을 줬다. 감독님은 늘 나를 믿는다고 엄지손가락을 들어보였는데, 완장을 받으면서 나를 향한 감독님의 믿음을 다시 한 번 실감할 수 있었다. 그날의 경기를 잊지 못한다.”

 


김학범 감독은 지쿠에게 “나는 네가 가진 능력을 믿는다. 네 플레이를 존중할테니 어디 한번 맘껏 뽐내보라”며 언제나 칭찬했고 격려했고 박수를 보냈다. 지쿠는 그런 스승의 믿음에 보답하는 경기력을 언제나 보여줬고 골이 터질 때마다 김학범 감독 앞으로 달려가 그 기쁨을 함께 나누곤 했다. 2002년 월드컵 당시의 박지성과 히딩크 감독 못지않은 포옹 세레모니였다. 어찌나 애틋하던지 전생에 부부가 아니었을까, 하는 몹쓸 생각을 할 때도 많았다.

어쨌거나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강원FC와 김학범 감독과 지쿠는 모두 궁합이 맞았다는 점이다. 이적 확정 후 지쿠는 “강원FC는 내가 축구를 처음 시작했을 당시의 각오를 되새길 수 있게 도와줬다. 강원FC에 있는 동안 정말 즐겁게 축구를 할 수 있었다. 다시 돌아왔으니 나를 도와줬던 고마운 팀 강원FC를 위해 온 힘을 다해 뛰고 싶다. 올 시즌에는 강원FC가 기필코 스플릿 A그룹에 들어갈 수 있도록 내가 가진 역량을 모두 쏟아 붓겠다”는 남다른 각오를 밝혔다.

다시 돌아온 지쿠는 동료 선수들을 위한 인사말도 잊지 않았다. “팀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줬던 지난 시즌 주장 김은중과 올 시즌 뉴캡틴으로 뽑힌 전재호, 그리고 새로 만나게 될 선수들에게 반갑다는 인사를 먼저 전한다”며 기분 좋게 웃었다.

“2013년이 우리 축구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시즌이 될 수 있도록 멋진 경기를 함께 만들어보자.”

지쿠의 마지막 멘트처럼 2013년이 선수와 팀과 팬 모두에게 찬란한 시즌으로 기억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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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부상선수와 관련된 부분은 심판에게 있어 상당히 까다로운 부분압니다. 특히 이기고 있는 팀이 부상을 빙자한 지연행위를 빈번하게 행하고 있기 때문에 -흔히 말하는 침대축구... 다들 아시죠?- 더욱 그렇습니다. 매 경기마다 심판은 부상선수를 신속하게 처리해야하는데요. 이게 대한 경기 규칙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주심은 부상선수를 처리할 때 다음의 절차를 따라야합니다.

-주심의 견해로 볼 때 선수가 가벼운 부상이라면 아웃 오브 플레이가 될 때까지 플레이를 계속한다.
-만일 주심의 견해로 선수가 심각한 부상이라면 플레이는 중단된다.
-부상선수에게 질문한 후, 주심은 한명 또는 최대 두명의 의료진이 부상을 평가하고 선수의 안전과 경기장 밖으로 신속한 이송을 위해 경기장에 들어오도록 허가할 수 있다.

아! 이때 중요한 것이 주심이 한손을 들면 팀닥터만 들어갈 수 있고요 두손을 들어올리면 들 것이 들어오거나 카트가 들어갈 수 있는 겁니다. 그 사인을 잘 알아서 벤치에서는 행동해야합니다.

-주심은 부상선수가 안전하게 경기장 밖으로 떠나게 해야한다.
-선수가 경기장에서 치료를 받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상처에서 피가나는 선수는 반드시 경기장을 떠나야한다. 그 선수는 출혈이 멈췄다고 주심이 인정할 때까지 복귀할 수 없다. 선수가 피가 묻어있는 의류를 입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위 부분과 관련돼 주심의 판단에 완전히 출혈이 멈췄다고 판단되지 않을 경우에는 투입시기를 늦출 수 있습니다. 벤치나 선수, 특히 지고 있는 상황이라면 왜 빨리 넣어주지 않느냐고 항의할 수 있지만, 분명한 절차와 방법을 따라야합니다. 이것은 어느 한 팀에게 불이익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선수의 안전과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주심이 의료진에게 경기장에 들어오도록 허가를 하자마자 그 선수는 들 것에 실리거나 자신의 발로 반드시 경기장을 떠나야한다. 선수가 따르지 않는다면 그 선수는 반스포츠적 행위로 경고를 받아야 한다.
-부상선수는 경기가 재개된 후에만 경기장으로 복귀할 수 있다.
-볼이 인 플레일 때, 부상 선수는 터치라인에서 경기장에 재입장해야 한다. 볼이 아웃 오프 플레이일 때, 부상 선수는 어떤 경계선에서든 경기장에 재입장할 수 있다.
위 부분과 관련해 인 플레이 도중에는 부상 선수는 터치라인을 통해서만 들어올 수 있습니다. 골라인으로는 들어올 수 없는 거죠. 경기 중에 벤치에서도, 또 선수들도 이 부분을 혼돈해서 빨리 넣어달라고만 하는데, 규칙을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볼의 인 플레이 또는 아웃 오브 플레이 여부와 관계없이 주심만이 부상 선수가 경기장에 재입장하는 것을 허락할 권한이 있다.
-부심 또는 대기 심판이 선수가 복귀 준비됐음을 확인했다면 주심은 부상 선수의 경기장 입장을 허락할 수 있다.
-플레이가 다른 이유로 중단되거나 또는 선수의 부상이 경기 규칙 위반의 결과가 아니라면 주심은 드롭볼로 재개한다. 플레이가 골 에어리어 내에서 중단된 경우, 플레이가 중단된 볼의 위치에서 가장 가까운 골라인과 평행한 골 에어리어 선상에서 주심은 드롭볼로 재개한다.
-주심은 부상으로 인해 손실된 모든 시간을 전후반 각각의 종료 시간에 플레이되게 추가해야 한다.
-주심이 부상을 입고 치료를 위해 경기장을 떠나야 하는 선수에게 카드 조치하기로 결정했다면, 주심은 선수가 경기장을 떠나기 전에 카드를 제시해야한다.


이 규정에 대한 예외는 오직 다음 경우에만 이뤄집니다.
-골키퍼가 부상을 당했을 때
-골키퍼와 필드선수가 충돌했고 즉각적인 치료가 필요할 때
-심각한 부상이 발생했을 때. 예) 혀가 말림(기도 폐쇄), 뇌진탕, 다리 골절 등.

특히나 골키퍼 부상일 경우에는 언제나 골키퍼 우선입니다. 그리고 심각한 부상일 때도 말이죠.

주심은 부상 선수의 상황을 세밀하게 판단해야 합니다. 특히 이기고 있는 팀의 선수가 가벼운 부상을 핑계로 시간지연 행위를 할 경우를 잘 살펴야 합니다. 만약 시간 지연의 목적으로 부상을 가장하고 있다고 판단될 경우에는 경기장 안으로 재투입하는 타이밍을 늦추면서 조절할 필요도 있습니다. 벤치나 선수는 왜 곧바로 넣어주지 않느냐고 항의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은 주심의 판단에 따른 것이며, 적절한 타이밍에 따라 선수의 재투입 시기를 결정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심판의 운영능력과 기술입니다. 경기를 좀 더 빨리 전개해 실제경기시간을 늘리고 페어플레이로 이끌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자. 이제 규칙을 잘 아셨으니 경기 때 부상선수가 발생하면 심판이 어떻게 대처할지 잘 아실 수 있을 거예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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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3월 8일 강릉종합운동장. 4-2-3-1 포메이션을 구사한 강원FC는 김영후를 원톱으로 내세우며 제주의 골문을 위협했다. 지난해 내셔널리그에서 18경기 30득점이라는 경이로운 득점기록을 세우며 '괴물 공격수'로 불린 김영후의 프로데뷔전이었다. 페널리박스 안에서 보여주는 침착함과 정확함, 그리고 파워 넘치는 슈팅력과 순간판단력까지.

우리나라 스트라이커의 계보를 잇는 대표 공격수 출신의 최순호 감독은 "공격수로서의 자질만큼은 최고다"며 "올시즌 강원FC에서 주목할 선수는 단연 김영후"라고 말했다.


감독의 찬사와 팬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은 김영후였다. 부담이 클 수밖에 없었고 K리그 데뷔전이었던 만큼 긴장도 적잖았으리라. 그래서였을까. 몸은 생각보다 무거워보였다. 문전에서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지만 불필요한 움직임이 너무 많았다. 슈팅 시에는 힘이 너무 들어간 까닭인지 골대 위로, 허공 속을 가르길 바빴다.

전반 28분 강원FC의 역사적인 첫 골이자 대망의 결승골이 터졌다. 프로 4순위로 강원FC에 입단한 신예 윤준하의 발끝에서 터졌다.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 선수가 프로 데뷔전에서 데뷔골을 터뜨렸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 분명 주목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사건'이다. 한데 윤준하의 골은 더 나아가 강원FC의 창단 첫 경기 첫 골이었기에 더욱 깊은 의미가 깊은 골이었음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 골 뒤에는 김영후의 도움을 잊지 말아야하겠다. 페널티에어리어 왼쪽에서 윤준하의 움직임을 읽은 김영후의 판단력과 볼을 건네주기 전까지의 돌파력과 스피드는 단연 일품이었다. 당시 난 축구관계자들과 강원FC 첫 골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로 내기를 걸었는데, 윤준하의 득점으로 1만원을 잃고 말았다. 그때 첫 골의 주인공으로 지목한 사람은 바로 김영후였다.

후에 농담삼아 영후 선수가 골을 못 넣어서 1만원 잃었어요, 라고 말하자 "도움했잖아요. 그럼 5000원은 가져가도 되지 않나요?"라고 말하는 여유를 보여줬으나, 얼굴 한쪽을 덮고 있던 아쉬움은 채 감춰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순간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개막전 4일 전 고생했던 김영후의 모습이 떠올랐던 까닭이다.

시계바늘을 뒤로 돌려 개막전이 열리기 4일 전. 오후 훈련을 마치고 저녁식사까지 끝낸 김영후는 짐 꾸러미를 들고 7층 숙소 엘레베이터 앞에 나타났다. 프로축구연맹이 주관하는 K리그 미디어데이에 참석하고자 서울에 가야했기 때문이다. 각 팀별로 감독과 대표 선수 1명이 가야했는데 강원FC 대표선수로는 김영후가 뽑혔다. 주장 이을용과 프랜차이즈 스타 정경호는 훈련 중 경미한 부상을 입어 일단 개막전까지 재활에만 집중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감독님도, 이을용도 앞으로 인터뷰 할 기회가 많을텐데, 빨리 적응해야한다며 모두 김영후를 추천했다.

그렇게 하여 저녁 7시 반 김영후와 함께 강릉에서 서울로 출발했다. 차도 면허도 없는 나는 김영후의 차에 동승했다. 그리고 김영후는 꼬박 3시간 동안 쉬지 않고 운전을 해야만했다. 중간에 휴게소에 들리긴 했지만 커피 한잔 뽑고 바로 탔으니 쉬지 않았다는 표현이 맞겠다. 그렇게 운전하느라 지치고 피곤했을 법도 한데, 김영후는 친히 우리집 근처까지 바래다준다음 자신의 스위트홈으로 돌아갔다. 운전만 4시간 넘게 한 김영후씨였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일찍 홍제역에서 만나 기자회견이 열리는 그랜드힐튼호텔로 이동했다. 오늘 기자회경장에서 행여나 말실수라도 할까봐 김영후는 새벽 2시에 겨우 잠이 들었단다. 그리고 나와의 약속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6시에 일어났단다. 눈밑에서는 다크써클이 내려앉아 있고. 급하게 차 안에서 정장 마이를 갈아입은 다음 함께 호텔 내부로 들어갔다. 감독님은 벌써 도착했다는 이야기에 초긴장하며.

박항서 감독님, 최강희 감독님과 담소 중이시길래 가볍게 인사만 한뒤 2층 회견장으로 이동했다. 김형범과 오랜만에 인사를 나누길래 자리를 피해줬는데 잠시 후 돌아왔더니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최효진에게 김영후를 못봤냐고 묻자 자기 선수를 왜 나한테서 찾아, 하면서 웃는다. 흐음. 어디간거지. 열심히 홀을 돌아다니다 회견장 한쪽 구석 화분 옆에 조용히 서있는 김영후의 모습이 보였다. 아는 사람도, 이야기 나눌 사람도 없어 그냥 서있었단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구석에 서있다니. ㅠㅠ

그런데 멀리 신태용 감독님이 보이길래 잠깐 인사하러 오겠다고 하니 김영후는 아는 사람이 없어 혼자 있기 그렇다고 말했다. 결국 초간단 인사만 드린 뒤 다시 김영후 옆에 서서 함께 기자회견 준비를 했다. 미리 준비된 질문지를 보니 첫 경기 상대 제주에게 하고 싶은 말, 이라고 써있다. 고민하던 김영후 "일단 제주가 좋은 팀인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희도 그에 못지 않게 열심히 노력했고, 강원도에 프로팀이 생겨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관중들이 경기장에 많이 찾아올텐데 그 분들을 실망시켜드리지 않도록 재미있고, 또 정정당당하게 경기를 치렀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하면 어떠겠냐고 물었다. 난 엄지 손가락을 들어보이며 이렇게 편하게 얘기하면 된다며 안심시켰다.

그러나, 김영후의 표정은 점점 새하얗게 질려가고 우황청심환을 먹을 것 그랬다는 말을 반복해서 했다. 카메라가 돌아가면 울렁증이 생기는데 실수 없이 잘 얘기할 수 있을까 걱정하는 모습을 보며 난 그저 괜찮다고, 잘할 수 있을 거라는 격려의 말만 들려줄 수 있을 뿐.

다행히도 미리 준비한 자리에 앉아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개막전 상대 제주팀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물었을 때, 김영후는 참 자연스럽게, 또 조리있게 대답을 잘하여 모두의 박수를 받았다. 그래도 김영후는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다 못해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며 긴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나서 옆에 준비된 뷔페를 먹으러 갔는데 호텔 뷔페 오랜만에 먹는다며 5그릇도 먹을 수 있다던 김영후씨는 긴장이 컸던 까닭인지 딱 2접시만 먹고 차로 돌아갔다.

문제는 아침부터 점심까지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초긴장을 했던 터라 피곤이 극렬하게 몰렸다는 사실에 있었다. 오후 2시에 출발했는데, 그 시간은 나른함이 가장 몰린 시간이기도 했다. 영동고속도로에서 점점 잠이 쏟아진다며 계속 눈꺼풀을 비비기 시작했는데, 면허가 없는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건 끊임없이 말을 시키며 잠을 쫓아내게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3시간을 쉬지 않고 운전을 해야했으니, 아무리 체력 좋은 축구선수라 해도 피곤하지 않을 수는 없는 법이었다.

초피곤에 젖어있던 당시 모습... ㅠㅠ

숙소에 도착했을 때 김영후의 얼굴은 이미 피로에 절을 데로 절은 상태였다. 워낙에 잘 웃는 사람이었지만 웃지도 않고 고생하셨습니다, 라는 인사만 꾸벅 한채 방으로 돌아갔다. 이런. 정작 고생한 사람은 김영후였는데, 고생했다는 인사를 받다니. 그간 단 한번도 면허의 중요성을 느껴보지 못했는데 이번만큼 면허가 절실했던 순간도 또 없었다. 그런데도 김영후는 숙소에 들어가 혼자 개인운동을 1시간 가량 한 다음 휴식을 취했다고 한다. 강릉으로 내려가기 전 오전, 오후 훈련을 빠졌으니 혼자 런닝이라도 꼭 해야한다던 감독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날 M본부와 생방송 인터뷰가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M본부와의 인터뷰 날짜가 급작스럽게 바뀌는 바람에 시합 2일 전에 김영후는 40분 가량 찬바람이 부는 운동장에서 인터뷰를 해야만했다. 어디 그 뿐인가. 연맹 가이드북에 들어가는 사진을 찍어야한다며 또 운동장으로 불러내 볼 트래빙, 헤딩, 드리블링 등 다양한 포즈를 시키고 또 시켰다. 그리고 나서 김영후에게 돌아온 것은 감기였다. ㅠㅠㅠ

연방 코를 훌쩍대고 기침을 콜록콜록하는데 꼭 내 책임듯한 기분이 들어 미안했다. K리그 데뷔전.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결전의 그 날을 앞두고 감기에 걸렸으니, 컨디션 조절이 제대로 될리 만무했다. 그러니 몸이 무거울 수밖에 없었겠지. 집중력이 예전처럼 날카롭기는 힘들었을테지.

강릉에서 서울을 오가던 그 긴 시간동안 내가 대신 운전을 했더라면... 인터뷰 시간 날짜가 방송국 사정으로 변경됐다면 그냥 취소시켰어야했는데... 가이드북 사진 촬영 역시 다른 선수로 대체할 수도 있었는데...


그냥 모든 게 다 내 책임 같아서 "내 탓이요"를 외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지금도 난 김영후가 데뷔전 골사냥에 실패한 이유 중에는 제대로 care하지 못한 내 잘못도 있는 것 같아 여전히 미안하다.

오늘 김영후는 K리그 2번 째 경기에 나서게 된다. 상대는 올 시즌 강력한 우승후보로 손꼽히는 FC서울. 국가대표급 선수들이 즐비한 서울을 상대로 김영후가 마법을 부릴 수 있을 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우는 법이고, 덕분에 내셔널리그에서 K리그 입성의 꿈도 이루지 않았던가. 게다 미안한 마음만큼 열심히 기도해주고 있으니 혹 시간이 다소 걸릴지라도 언젠가는 세상에서 가장 멋진 골을 우리에게 보여줄 것이라 믿는다.

지금의 미안함을 한순간에 잊게 만드는, 그런 강렬한 아름다움을 지닌 김영후의 K리그 데뷔골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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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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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리그를 대표하는 선수들과 J리그를 대표하는 선수들이 만나 한판 대결을 가졌습니다.

도쿄국립경기장에서 열린 ‘한일 올스타전’이 바로 그것입니다. 올해 처음 갖는 이 경기를 차마 놓칠 수는 없었기에, 또 실로 오랜만에 열린 또 하나의 '한일전'인지라  저는 자비를 털어 비행기를 타고 도쿄까지 날아 갔습니다.



그런데 올스타전이 코앞인데도 도쿄에서 저는 관련된 행사 포스터를 하나도 보지 못했습니다. 2006년 클럽월드컵 경기를 보기 위해 도쿄에 방문했을 때만 해도 거리 곳곳에는 대회 관련 홍보물이 넘쳐났죠. 때문에 이번에는 너무 홍보에 무심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였습니다.

그렇지만 막상 시합 당일엔 2만명이 넘는 관중들이 경기장을 찾았고 그래서 정말 깜짝 놀랐답니다. 한데 특이한 점은 한 가지 더 있었습니다. ‘올스타전’이라는 특별한 경기 같은 경우 그간 K리그 연맹에서는 경기 시작 전과 전반전이 끝난 하프타임 때, 이렇다 할 공연이나 행사 같은 것들을 마련하곤 했답니다. 그런데 J리그 연맹에서 모든 것을 준비한 이번 올스타전에서는 그런 이벤트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경기 시작 전 선수들을 소개하는 영상이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경기는 초반 J리그 올스타전 선수들이 지배하는 양상이었으나 행운의 여신은 우리 편이었습니다. 선제골은 최성국 선수의 몫이었습니다. 전 일본 관중들로 둘러싸였다는 사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골이 들어갈 때마다 벌떡 일어나서 마구 마구 소리를 질렀답니다. 그때마다 저와 제 친구들을 둘러싸고 있던 일본 관중들은 그저 침묵할 뿐이었죠. 그래서 원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들인가 보다 했는데 3-0으로 지고 있다가 1골을 만회하자 다들 소리치며 좋아하더군요. 저처럼 벌떡 일어섰던 관중들도 있었습니다. ^^

K리그 올스타 선수들은 독도문제 때문에 예민해져 있는 이 시점에서 일본에게 절대 질 수는 없다며 정말 이를 악 물고 뛰었다고 하더군요. 최성국 선수는 첫 골을 성공시킨 후 총을 쏘는 시늉을 했는데 다분히 독도문제와 관련한 ‘의미’가 있는 세레모니였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경기 종료 후 "이번 올스타전을 통해 한일 양국의 축구가 서로 돈독하게 발전을 도모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던 최성국 선수의 발언처럼, 단순히 이기고 지는 것에서만 끝내서는 안되겠죠.

어쨌거나 일본 적지에서 무려 3골이나 터뜨리며 시원하게 이긴 모습은 정말 ‘더위’를 한번에 날려보내기에 충분했습니다. 별중의 별, K리그 올스타선수들은 역시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별들이었습니다.

중계 카메라에는 잡히지 않았던 뒷풍경들, 한번 보실까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경기종료 후 일본국가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있던
일본 꼬마와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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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지난 토요일(8일) 2007K리그 우승팀 포항과 2007FA컵 우승팀 전남과의 개막전을 시작으로 일요일(9일)에는 6개 구장에서 K-리그 시작을 알리는 휘슬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개막전 집계 자료에 따르면 총 172,142명의 관중이 입장, 역대 개막전 최다 관중 기록을 수립했다고 합니다. 기존 기록은 2003년 143,981명이었네요.



제가 찾은 수원월드컵경기장에는 총 30,132명의 관중이 찾았습니다. 2번째로 많은 관중들이 경기장을 방문했죠. 참고로 1위는 부산-전북전(32,725명)입니다. 황선홍 감독의 데뷔전이자 안정환(부산)과 조재진(전북)과의 만남, 그리고 빅뱅의 공연으로 여러모로 이목을 끌었는데 역시나 많은 관중이 입장했네요.

“선수들이 경기장을 찾은 팬들에게 좋은 선물을 드렸습니다. 경기 시작 전 많은 관중이 왔으니 꼭 이겨야한다고 강조했는데 만족스러운 결과를 낳아 기쁩니다.” 에두의 연속골로 2-0 승리를 거둔 차범근 감독의 소감입니다.



그러나 팬들 역시 선수들에게 멋진 선물을 안겨줬죠. 수원 서포터스 그랑블루는 이번 개막전에도 멋진 카드섹션을 보여줬습니다. 별 4개가 반짝이더니 이내 푸른제국이라는 글자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아주 짧은 시간동안 진행된 카드섹션을 위해 얼마나 많은 준비를 했을까요? 팀을 향한 넘치는 사랑이 없었다면 불가능했겠죠. 선수들 역시 그 마음에 보답하고자 열심히 뛰었고 그 덕분에 수원은 개막전에서 2-0으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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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광판 아래까지 올라가서 경기를 보던 서포터도 있더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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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서포터스의 '수원사랑' 어떤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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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2008K리그 개막도 얼마 남지 않았네요. 채 일주일도 안 남았으니 말이에요. 이번 시즌에도 많은 외국인 선수들이 팀을 옮기는 대이동을 했습니다. 뽀뽀와 까보레, 따바레즈처럼 한국을 떠나 새로운 리그에서 새출발을 시작한 선수들이 있었는가 하면 더 좋은 조건 하에 다른 팀으로 옮긴 선수들도 있었습니다. 오늘 제가 소개할 선수들은 후자입니다. 소속팀에서의 활약 덕분에 타 팀에서 열렬한 구애를 보냈고

그 덕분에 올시즌부터는 새로운 유니폼을 입고 시작하는 외국인 선수들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브라질 삼총사 데닐손, 루이지뉴, 두두가 바로 오늘의 주인공입니다. 분석글이다 보니 편하게 말을 놓겠습니다. 감안하시고 읽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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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를 부르는 브라질 탱크, 데닐손
3월4일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2007K리그 개막전에서 대전은 수원에 2-1로 패하며 불안한 출발을 보였다. 이후 8경기 무승(4무4패)을 기록하며 팀 전체는 수렁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꿋꿋이 제 몫을 한 선수가 있었다. 데닐손이다. 연속무승행진을 기록하던 기간 중 대전이 올린 전체득점은 겨우 7골. 그중 절반(4골)이 넘는 골이 데닐손의 발끝에서 터졌다. 데닐손의 진가는 이후 더 드러나기 시작했다. 대전은 4월15일 전북전에서 2-0으로 승리하며 뒤늦게 시즌 첫 승을 신고했다. 2골 모두 데닐손의 작품이다. 4월18일 광주전에서는 1-0으로 이기며 창단 10년 만에 100승 고지에 올랐다. 데닐손의 결승골 덕분이었다. 4월은 데닐손에게 ‘잔인한 달’이 아니었다. 데닐손은 5경기 연속골(4월7일~4월22일) 행진을 펼쳤고 대전 선수들은 그에게 ‘데닐신(神)’이라는 별명을 지어줬다.

데닐손은 대전에서 다양한 진기록들도 세웠다. 데닐손은 4월11일 열린 컵대회 서울전에 전반 35초 만에 선제골을 넣었다. 2007시즌 최단시간 골 기록이었다. 물론 한 달 뒤에 방승환(11초)에 의해 밀려났지만 K리그 전체로 봤을 땐 12위에 해당한다. 9월22일 대구전에서는 해트트릭에도 성공했다. 전반 42분 만에 3골을 성공시켰고 이는 2007시즌 최단시간 해트트릭 기록으로 남았다. 동시에 대전에게는 창단 이래 첫 해트트릭을 선물했다. 데닐손은 후반 12분에브라질리아의 추가골을 도왔고 ‘북치고 장구까지’친 데닐손 덕분에 대전은 홈에서 4-1 대승을 거뒀다.

대전은 2007시즌을 데닐손 타이슨 페르난도, 이렇게 세 명의 용병과 함께 시작했다. 그러나 야심차게 영입한 타이슨은 부상에 시달리며 경기에 나서지 못했고 페르난도는 리그 적응에 실패했다. 국내 공격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최근식은 부상-수술-재활 수순을 밟고 있었고 우승제는 슬럼프가 심했다. 정성훈만 간신히 면치레 하는 수준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데닐손은 꾸준히 제 기량을 보여줬으니 대전 입장에선 구세주일 수밖에 없었다. 데닐손은 지난해 24경기에 출장하며 14골이나 넣었다. 득점순위로만 따지면 18골을 넣은 까보레에 이은 2위다. 데닐손을 처음 영입했던 최윤겸 前감독은 “골 결정력이 탁월하다”며 칭찬했다. PO에서 데닐손을 상대했던 박병규(울산)는 “탱크처럼 힘이 상당히 좋아 애를 먹었다”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데닐손은 파워 넘치는 드리블러답게 문전 앞까지 위협적으로 달려드는 스타일이다. 찬스가 생기면 놓치지 않고 바로 슈팅으로 연결한다. 슈팅수로만 따지면 87회로 정규리그 1위다. 어찌보면 골 욕심이 많아서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데닐손은 골 수당 때문에 과욕을 부리는 일부 용병들과 다르다. 그의 진가는 슈바 영입 이후 더욱 드러났다. 대전은 여름 휴식기 동안 타이슨과 페르난도를 내보내고 슈바와 브라질리아를 데려왔다. 지난 시즌 데닐손이 올린 5도움 중 4도움이 바로 이들의 합류 이후 이뤄진다. 특히 슈바와의 콤비 플레이가 눈부셨다. 3경기 연속도움(9월22일~10월6일)도 이때 이뤄졌다.

후반기 대전은 3-4-3에서 4-3-3 포메이션으로 새 옷을 입었다. 최전방 데닐손을 중심으로 좌우날개로 브라질리아와 슈바가 섰다. 그러나 라인을 따라 뛰는 브라질리아와 달리 슈바는 살짝 처진 상태에서 데닐손과 자주 스위칭을 시도하며 그를 도왔다. 확실히 데닐손 혼자 고분분투하던 전반기와는 달랐다. 시즌 종료 후 몸값이 오른 데닐손은 아랍에미레이트리그에서 뛰기로 결정하며 11월 중순 경 두바이로 떠났다. 그러나 러브콜을 보냈던 감독이 성적부진으로 경질되는 바람에 허공에 붕 뜬 상태가 됐다. 다행히 포항이 적극적인 영입의사를 밝혔다. J리그 某팀보다 더 좋은 조건이었다. AFC챔피언스리그에 출전한다는 사실도 그의 마음을 크게 움직였다.

지난 시즌 우승팀 포항은 3-4-1-2 포메이션으로 성공시대를 이뤘다. 올해도 포메이션은 크게 변화되지 않을 전망이다. 부상이라는 이변이 없는 한 투톱 중 한 자리는 데닐손 몫이다. 데닐손의 짝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알도, 이광재, 남궁도, 고기구 중 유력한 후보는 알도와 남궁도다. 그중 데닐손-남궁도 투톱이 눈여겨볼만하다. 동계훈련 기간 중 데닐손은 남궁도와 함께 뛰며 루미니아1부리그 소속팀 U.클뤼를 2-0으로 눌렀다. 골도 사이좋게 하나씩 기록했다. 데닐손을 향한 파리야스 감독의 믿음은 크다. 지난 해 야심차게 영입한 마우리시오(전반기) 슈벵크 조네스(이상 후반기) 모두 ‘실패한 농사’로 평가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올해는 다르다. 그 중심에 데닐손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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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의 별을 꿈꾼다, 루이지뉴 
2006시즌 대구FC 브라질 트리오 에듀(3골) 지네이(4골) 가브리엘(2골)이 성공시킨 골은 도합 9골이다. 용병 셋의 합작이라고 말하기엔 심히 부끄러운 성적표다. 그래서일까. 이듬해 박종환 감독 후임으로 온 변병주 감독은 터키에서 진행된 동계훈련 기간 동안 용병 영입에 가장 큰 신경을 썼다. 그런데 때 마침 변 감독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은 선수가 나타났다. 그가 바로 루이지뉴다. “루이지뉴는 화려한 드리블과 빠른 스피드, 거기다 골 결정력까지 겸비한 선수였다. 보는 순간 ‘저 선수다’ 싶었다.”

루이지뉴는 산토스FC의 촉망받던 유망주 중 하나다. 1997년 산토스 유스팀에 들어가 호빙유(레알마드리드) 디에고(브레맨) 등과 같이 축구를 배웠다. 그중 디에고와는 함께 방을 쓰며 우정을 쌓았다. U-17 및 U-20대표팀(2001년~2005년)에서 뛰었으며 파리아스 감독과 그때 처음 연을 맺었다.

루이지뉴를 향한 변 감독의 신뢰는 컸다. 루이지뉴는 그 덕분에 FC서울과의 개막전을 시작으로 3월 첫 달, 6경기 연속 선발출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플레이는 감독의 기대와는 반비례했다. 개막달 루이지뉴가 기록한 골은 단 2골. 그것도 2번 모두 필드골이 아닌 PK골이다. 보다 못한 변 감독의 따끔한 지적이 이어졌다. 이런 식이라면 다시 브라질로 돌려보내겠다는 엄포도 있었다. 그뒤 4월에 다시 만난 루이지뉴는 분명 달라져 있었다. 4월에만 무려 9골을 몰아넣었다. 루이지뉴는 그 비결을 ‘에닝요 덕분’이라 설명했다. 요지는 이렇다. “에닝요는 패스를 통해 경기를 풀어나갈 줄 아는 선수다. 3월 말부터 합류한 에닝요는 내게 많은 도움이 됐다.” 컵대회에서 7골을 넣은 루이지뉴는 5골을 넣은 데얀, 데닐손을 제치며 득점왕을 수상했다. “데뷔 첫해 받은 상이라 더 기쁘다”는 소감처럼 K리그에서 보낸 첫 시즌은 스스로도 만족스러워 보였다. 그렇지만 소속팀 대구는 2007K리그에서 12위를 기록했다. 그나마 12위도 감독내홍으로 수난시대를 맞이한 부산(13위)과 만년꼴찌 광주(14위) 덕분이라는 이야기도 들어야만 했다. 자존심이 상할 법도 했다. 그러나 칭찬의 목소리도 있었다. 이근호-루이지뉴 투톱의 위용만큼은 여느 팀에 뒤지지 않는다는 평이 그것이다.

루이지뉴는 수비수와 일대일 상황일 때 개인기를 이용, 돌파하는 스타일의 선수는 아니다. 주로 수비 배후 공간으로 돌아들어가는 걸 즐기는 편이다. 이때 보여주는 놀라운 스피드와 정확한 슈팅은 그간 골을 많이 넣을 수 있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다. 대구에서 함께 운동했던 조홍규는 “문전 앞에서 보여주는 공을 향한 집착과 집중력, 위치선정은 무서울 정도로 좋다”라고 평했다. 그의 말처럼 루이지뉴는 문전 앞에서만큼은 기가 막힐 정도로 골 냄새를 잘 맡는다. 지난 해 기록한 18골 가운데 PK 3골을 제외해도 자그마치 14골을 골에어리어 안에서 성공시켰다. 조홍규는 “골키퍼를 제외한 모든 선수들이 골에어리어 안에서 뒤엉킨 상황에도 기가 막히게 골이 될 만한 위치를 찾아냈다”고 회상했다. 175cm의 단신이지만 공중볼 장악능력도 좋다. 4월14일 수원전에서는 수원의 장신수비벽을 뚫고 동점 헤딩골을 성공시켰다. 그러나 그런 루이지뉴에게도 단점은 있다. 스리백을 쓰는 팀을 만날 때면 ‘한없이 작아진다’는 것이다. 맨투맨 수비에 약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그럴 때면 이근호가 나타나 좌우 중앙에서 활발히 움직이며 이를 뚫어줬다. ‘태양의 아들’ 이근호의 커버 플레이가 빛났기에 루이지뉴도 동반상승할 수 있었다. 덧붙이자면 지난 시즌 이근호가 8골로 득점순위 8위(국내선수 1위)에 오를 수 있던 까닭도 바로 여기서 기인한다.

2007시즌을 끝으로 대구와 계약이 만료된 루이지뉴는 울산에 새둥지를 틀었다. 지난 해 울산은 공격수들의 연이은 악재 때문에 FC서울 못지않은 분루를 삼켰다. 호세를 시작으로 마차도 양동현이 부상으로 시즌을 접어야만 했다. 여름 이적시장 때 이천수는 네덜란드로 떠났고 정경호와 맞트레이드 한 염기훈은 피로골절로 시즌 막바지였던 PO때 겨우 출전할 수 있었다. 노장 우성용 혼자 울산의 공격을 담당하기엔 버거웠다. 울산이 올 시즌을 영입한 용병은 루이지뉴 브라질리아 레안드롱(임대복귀)이다. K리그를 통해 이미 검증된 선수들과 하고 싶다는 김정남 감독의 의지가 읽혀지는 대목이다. 올해도 울산은 스리톱과 투톱을 적절히 혼용하며 경기에 임할 계획이다. 투톱일 경우 루이지뉴는 우성용(양동현)과 함께 빅 앤 스몰 조합을 구성할 예정이다. 반면 스리톱에서는 중앙이 아닌 측면에서 타깃맨을 지원사격할 듯하다. 오른발을 주로 쓰기 때문에 염기훈이 아닌 이상호 또는 브라질리아와의 경쟁이 예상된다. 이천수가 떠난 뒤 울산은 ‘스타’없는 밤하늘을 바라봐야만 했다. 2008년 루이지뉴는 과연 그곳을 빛낼 별이 될 수 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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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의 날개가 되어라, 두두
“두두는 20분 만에 2번이나 결정적인 찬스를 잡았다. 그 중 1번은 골키퍼 선방에 막혔지만 정확하게 골대 안으로 들어갔다. 두두를 보고 배울 필요가 있다.” 2007년 3월11일 전남과의 원정경기에서 FC서울은 정조국의 결승골로 1-0 승리를 거뒀다. 그러나 귀네슈 감독은 공격수들에게 쓴소리를 가했다. 골을 넣지 못한 두두의 위치선정과 감(感)을 보고 배우라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그날 두두는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후문이다. 귀네슈 감독 부임 이후 벤치멤버로 밀려났기 때문이다. FC서울은 개막전에서 대구를 상대로 2-0으로 이겼지만 두두에게는 잊고 싶은 경기였다. 승리가 거의 확정적이던 후반42분 아디 대신 투입됐기 때문이다. 두두의 수난시대는 그 뒤로도 계속됐다.

2007시즌 초 귀네슈 감독은 4-4-2 포메이션으로 팀을 재정비하며 ‘공격축구론’을 펼쳤다.  두두에게는 왼쪽 측면을 맡겼다. 갑작스레 왼쪽 윙어로 보직을 변경하게 됐지만 두두는 스트라이커 출신답게 중앙을 파고들며 날카로운 공격을 선보였다. 이렇듯 귀네슈 감독의 공격축구에 힘을 실어주는 듯 했지만 문제는 ‘주전’이 아니라는데 있었다. 박주영이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수원을 4-1로 이겼던 그날도 두두는 후반43분 교체선수로 투입됐다. 시즌 시작 이래로 6경기 연속 교체출전. 말이 좋아 ‘조커’였지 한때 성남에서 최고의 공격 삼각편대를 이뤘던 두두에게는 자존심에 금이 갈 법한 사건이었다.

그리고 4월29일 홈에서 경남에게 3-0으로 지는 모습을 벤치에서 지켜봐야만 했던 그날이후 두두는 사라졌다. 배가 아프다는 이유였다. 몇몇 선수들은 태업(怠業)에 들어갔다고 추측했다. 그러나 곧 병명이 밝혀졌다. ‘스포츠 헤르니아’였다. 두두는 수술 대신 재활을 선택, 브라질로 돌아갔다. 그리고 여름 휴식기가 끝날 쯤 두두는 부상에서 완벽히 회복한 상태로 팀에 복귀했다. 당시 FC서울은 김은중, 정조국, 박주영, 심우연 등 주전 공격수들의 부상으로 신음 중이었다. 팀이 어려운 상황에서 두두는 복귀전이었던 8월8일 포항전에서 귀중한 결승골로 귀네슈 감독에게 승리를 안겼다. 이어 열린 제주전에서는 1골 1도움으로 2경기 연속 공격포인트를 기록했다. 마치 2년 전 FC서울로 팀을 옮기자마자 3경기 연속 공격포인트를 기록했던 그때를 보는 듯 했다.

2004년 8월 브라질1부리그 크루제이루에서 뛰던 두두는 계약금 10만 달러에 성남과 계약했다. 이듬해 두두는 최고 전성기를 누렸다. 박주영, 마차도와의 득점경쟁은 모두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두두는 2005시즌 10골 4도움으로 마차도(13골 1도움) 박주영(12골 1도움)에 이어 득점랭킹 3위를 기록했다. 참고로 함께 성남 공격 삼각편대를 이뤘던 김도훈은 5위, 모따는 9위(7골 4도움)였다.

당시 김도훈-두두-모따로 구성된 삼각편대의 공격력은 매서웠다. 지금은 모따를 더 인정하지만 그때만 해도 모따보다는 두두였다. 상대 수비수들이 두두만 잡으면 된다고 말할 정도였다. 두두는 성남을 2004컵대회 우승과 2004AFC챔피언스리그 준우승으로 이끌었다. 2005후기리그와 2006전기리그 우승컵도 들었다. 2006컵대회에서 준우승을 했을 때엔 히칼도(前서울,4도움)를 제치고 도움왕(5도움)도 수상했다. 두두는 컵대회를 마치고 FC서울로 전격 이적했다. 당시 팀을 이끌던 이장수 감독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기리그 내내 득점이 없어 고민이었다. 그렇기에 두두의 영입은 큰 의미가 있다. 만족스런 보강이다.” 2006 후기리그 때만 해도 두두는 2년차 슬럼프에 빠졌던 박주영을 제치고 주전자리를 꿰찼다. 그러나 두두는 전형적인 브라질리언이었다. 자율적인 분위기에서는 절제하지 못하는 성격 탓에 체중은 점점 증가했다. 성남시절에는 팀 규정상 아침저녁으로 몸무게를 체크하며 관리했다. 그러나 FC서울에서는 모든 것을 자신이 통제하고 관리해야만 했다. 볼 컨트롤과 왼발 프리킥은 여전히 뛰어났지만 늘어난 체중 탓에 결국 움직임은 예전만 못했다.

2008시즌을 앞두고 두두는 비록 임대지만 다시 친정팀 성남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성남으로의 복귀는 그에게 전화위복이 될 듯하다. 왼쪽 윙포워드 자리를 다시 찾았기 때문이다. 2005후기리그와 2006전기리그 우승컵을 들 당시 성남에게는 ‘두두’와 ‘모따’라는 양 날개가 있었다. 두두가 다시 찾은 날개가 될 수 있을지는 아직 모른다. 그러나 김학범 감독 아래서 예전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면 두두는 부활이라는 이름하에 분명 천마의 화려한 날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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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Restart 2008 
예부터 우리나라는 숫자 ‘3’을 특별히 여겼다. 단군신화 속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숫자도 바로 3이다. 3은 1과 2를 더한 숫자. 즉 양을 의미하는 1과 음을 뜻하는 2가 합쳐진, ‘음과 양을 하나로 묶는다’는 속뜻을 지닌 완전한 숫자다. 하늘 땅 바람, 천 지 인, 탄생 삶 죽음, 처음 중간 끝, 과거 현재 미래 등 3은 모든 이치와 접목시켜 설명할 수 있다. 이는 K리그에도 해당된다. 보통 데뷔 첫해 뛰어난 플레이를 선보였던 선수일지라도 다음해에는 그보다 못한 모습을 보일 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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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기훈

그래서 나온 말이 ‘2년차 징크스’ 아니겠는가. 2006K리그에는 염기훈 장남석 배기종 3명의 선수들이 신인왕 경쟁에 가세, 아름다운 승부를 펼쳤다. 그러나 이들 모두 이듬해에는 첫해만 못한 모습으로 징크스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렇지만 2008년 데뷔 3년차에 접어드는 해. 완전함을 의미하는 숫자 3이 이들에게는 어떤 결과를 가져다줄까. 잠시 시계를 뒤로 돌려 3년 전 모습으로 돌아가 보자. 그뒤에 판단해도 늦지 않는다.


대학시절 그들은
 
1983년 생 대학선수들에게 2005년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해였다. 대학 4학년. 어느덧 졸업반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그해 12월에는 드래프트도 열릴 예정이었다. 이들은 드래프트 부활 ‘첫 세대’이자 자유계약 사이에 ‘낀 세대’였다. 프로축구연맹에서는 이 같은 선수들의 입장을 고려, 그해까지만 자유계약을 허락했다. 그러나 프로팀과 계약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신의 실력을 입증해야만 했다. 대학선수들 대부분은 청소년대표 경력이 없었다. 결국 이들이 자신의 기량을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은 전국대회를 통해서만 이뤄질 수 있었다. 대회에서 좋은 모습을 선보이면 대학선발에 뽑히는 길도 열렸다. 다행히 2005년에는 큰 대회가 많이 열렸다. 3월에는 한일대학선발정기전인 덴소컵, 8월에는 대학선수들의 축제 터키유니버시아드대회가 열릴 예정이었다. 11월 마카오에서 열리는 동아시아대회에선 대학선수들 위주로 나간다는 소식도 들렸다. 때문에 일찍감치 그 대회를 목표 삼아 운동하는 선수들도 있었다. 물론 장남석도 예외는 아니었다. 지난 3년간 쓴 눈물을 2번이나 삼켜야했던 그에게 2005년은 여느 해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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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남석

2002년 중앙대에 입학했던 장남석은 신입생임에도 불구하고 실력을 입증 받아 주전으로 뛰기 시작했다. 그해 중앙대축구부와 U-19대표팀간 연습경기가 자주 열렸다. 그때마다 장남석의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박성화 감독은 이듬해 봄 훈련멤버로 그를 발탁했다. 그러나 문제는 장남석의 몸상태에 있었다. 마침 중앙대축구부원들에게는 10일간의 휴가가 주어졌고 그는 오랜만에 받은 휴가를 즐기던 중이었다. 휴가 9일 째 되던 날 소집을 받고 파주에 갔으니 그 상태로 연습게임을 제대로 뛸 리 만무했다. 결국 아랍메이레이트에서 열렸던 U-20월드컵은 동기 김치우만 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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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기종

2004년 8월에는 대학선발선수들이 주축이 돼 베트남에서 열린 LG컵2004축구대회에 출전했다. 그 대회를 준비하기 위해 대학선발선수들은 보름간 영국전지훈련까지 다녀왔다. 그러나 허리부상 때문에 장남석은 가지 못했다. 당시 주축이 됐던 대학선발선수들은 염기훈(울산) 배기종(수원) 최효진(포항) 조용형(제주) 권순태(전북) 김민오(울산) 이현진(수원) 김신영(사간토스)등이었다. 염기훈과 배기종은 이때 처음 만났다. 당시 대학선발팀 부동의 스리톱은 염기훈 최효진 김신영이었다. 배기종은 미드필더 요원으로 주로 교체로 출전했다. 배기종이 갖고 있던 슈퍼 조커로서의 능력은 이때도 발휘됐다. 베트남국가대표팀과의 결승전에서 한국대학선발팀은 3-4로 뒤지고 있었다. 어느새 전광판 시계는 후반4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때 배기종이 PK를 얻어냈고 이를 염기훈이 성공시켰다. 연장전에서 터진 역전골로 우승은 한국대학선발팀에게 돌아갔다.

2005년 1월 대학선발 훈련이 재개됐다. 3월에 열릴 한일대학친선경기 덴소컵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염기훈 장남석 배기종도 발탁됐다. 세 선수가 처음 만나는 순간이었다. 재밌는 사실은 이들이 대학선발팀의 공격을 책임졌다는 사실이다. 장남석을 최전방에 놓고 좌우날개에 염기훈 배기종을 세웠다. 보름 간의 훈련 후 다시 팀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배기종은 동계훈련 막바지에 종아리 근육이 파열되는 부상을 입었다. 대학선발과의 인연은 그렇게 끝났다.


2005전국대학축구대회 4강전에서 호남대와 중앙대가 만났다. 호남대 주장 염기훈과 중앙대 주장 장남석과의 자존심 대결이 볼만했다. 그러나 장남석은 8강전에서 발목이 부러지는 부상을 입고 말았다. 피로골절이었다. 장남석은 결국 2008유니버시아드대회에서 나가지 못했다. 이렇듯 염기훈 장남석 배기종은 함께 대회를 준비하며 시즌을 시작했지만 맺음은 염기훈으로 끝났다. 염기훈은 전북과 우선계약도 체결했다. 물론 피로골절로 시즌을 접은 장남석에게도 희소식이 날아왔다. 박종환 감독의 눈에 들어 대구와 계약을 맺게 된 것이다. 그러나 배기종만은 상황이 달랐다. 부상 회복 후 2005동아시아대회에서 나갔지만 그는 여전히 벤치멤버였다. 그해 12월20일에는 2006신인선수 드래프트가 열렸다. 그러나 8라운드가 진행될 때까지 배기종을 뽑은 팀은 아무데도 없었다. 결국 배기종은 번외지명으로 간신히 대전행 마지막 기차에 올라탔다.


신인왕을 잡아라
2005덴소컵은 12월4일 의정부종합운동장에서 열렸다. K리그 챔피언결정전 2차전이 열린 날이었다. 덴소컵에 참여했던 선수들은 자연스레 K리그를 화제로 삼았다. 가장 큰 관심사는 ‘2006신인왕은 누가 될까?’였다. 그들이 내린 결론은 염기훈이었다. 선수들 사이에서 ‘대학축구는 염기훈으로 통한다’는 이야기가 농담처럼 떠돌던 때였다. 그러나 대학축구 최강자로 인정받던 염기훈에게도 K리그는 높고 어려운 무대였다. 염기훈은 동계훈련 첫날부터 최강희 감독에게 호되게 깨졌다. 전북은 브라질전훈에서 4-4-2 포메이션을 시험가동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가 새로 맡은 보직은 왼쪽 미드필더. 당시 염기훈은 문전 앞에서 어슬렁거리다 공이 올 때만 뛰는 습관이 몸에 배있었다. 잘나가는 대학 스트라이커들이 으레 갖고 있는 버릇 중 하나였다. 훈련 때마다 최 감독은 염기훈의 수비 문제를 지적했다. 그러나 불호령 뒤에는 “수비를 제대로 할 줄 알아야 진짜 공격수”라는 귀중한 가르침이 있었다. 그는 곧 ‘공격수는 공격만 잘하면 된다’는 생각이 잘못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비디오분석관에서 부탁, 자신의 훈련모습이 녹화된 비디오를 구한 뒤 단점을 파악하며 연구했다. 결국 노력은 결과로 보답했다. 3월4일 열린 2006K리그 슈퍼컵 울산전에 선발출장하며 신인선수들 중 가장 먼저 데뷔전을 치렀다. 장남석도 곧 K리그에 데뷔했다. 3월12일 홈에서 열린 울산전에 후반 시작과 동시에 투입되며 신고식을 치렀다. 배기종은 가장 늦은 3월15일에 데뷔전을 치렀다. 반면 데뷔골은 가장 빨랐다. 그는 후반19분 교체투입 8분만에 이관우의 프리킥을 헤딩골로 연결,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시민구단 연습생이 데뷔전에서 데뷔골을 기록했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 뉴스였다.

데뷔골은 염기훈이 가장 늦었다. 3월29일 대전전에서다. 전반7분만에 선제골을 넣었다. “데뷔골이 결승골로 끝날 거라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배기종 때문에 물거품이 됐다.” 이번에도 배기종은 머리로 끝냈다. 후반32분 헤딩 동점골을 성공시켰다. 염기훈과 배기종의 골로 양 팀의 승부는 무승부로 끝났다. 배기종에게 ‘슈퍼서브’로 등극한 이유를 묻자 “경기가 안 풀리면 무조건 들어가니 항상 몸을 만들어라는 선배들의 조언 덕분”이라 말했다. 4월23일 대전전을 앞둔 장남석의 마음은 비장했다. 경기 전날 출전선수 명단에 배기종의 이름이 올랐기 때문이다. 벌써 배기종은 4골1도움을 기록하며 신인왕 후보로 거론되고 있었다. 반면 장남석은 1골1도움으로 이에 못 미친 상태였다. 이들이 그라운드에서 부딪힌 시간은 약 11분에 불과하다. 배기종은 후반10분 교체 in, 장남석은 후반21분 교체 out이었기 때문이다. 경기는 1-1 무승부로 끝났다. 장남석은 전반17분 터뜨린 선제골로 5경기 무득점의 침묵을 깰 수 있었다. 염기훈과 장남석은 7월19일 대구월드컵경기장에서 만났다. 빗속에서 진행된 이날 경기는 3-3이라는 스코어에서 알 수 있듯 치열했다. 대구가 1-2로 지고 있던 전반37분 장남석의 동점골이 터졌다. 그러나 염기훈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후반33분 최철순의 도움으로 염기훈은 평소 자신있던 왼발로 경기를 원점으로 되돌렸다. 경기 종료 후 수비수 최성환은 장남석에게 다가가 “염기훈에게 포인트를 줘서 미안하다”며 “대전전에서는 배기종에게 골을 내주지 않겠다”고 말했다. 어느새 염기훈-장남석-배기종 간의 신인왕 경쟁은 그들만의 경쟁이 아닌 듯 했다. 최윤겸 감독은 사석에서 기자들에게 “대전에서 신인왕이 나왔으면 좋겠다”며 배기종이 신인왕을 타기 바라는 마음을 종종 내비치곤 했다. 대구선수들은 “두자리 수 득점이라면 신인왕 수상이 가능할 것”이라며 “앞으로 (장)남석에게 무조건 패스하자”는 이야기를 종종 했다. 그렇지만 신인왕은 염기훈에게 돌아갔다. AFC챔피언스리그 우승의 일등공신, 국가대표팀 발탁, 2006아시안게임 활약 등이 이유였다. “9월23일 전북전 때 베어벡 감독이 경기장에 왔다. 다음날 오장은(3골)과 염기훈(1골)이 아시안게임 멤버로 뽑혔다. 그날 조금만 더 잘했다면 다른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까? 지금도 후회로 남는 순간이다.” 36경기에 출장하며 9골4도움을 기록한 장남석에게는 두고 두고 아쉬운 대목이다. 2006시즌 염기훈은 31경기 7골5도움, 배기종은 7골3도움을 기록했다.


2년차 징크스, 그리고 2008년
장남석과 배기종에게 2007년 겨울은 시련의 시기였다. 신인왕 하나만 바라보며 1년간 뛰었지만 물거품으로 끝났다. 시즌종료 후 장남석은 수술대에 올랐다. 허리 디스크 수술을 받기 위해서였다. 대학시절 내내 그를 괴롭히던 고질병이었다. 장남석은 프로데뷔 후에도 허리통증 때문에 자주 훈련을 쉴 수밖에 없었다. 그 상황에서 게임을 뛸 수 있었던 까닭은 그의 재능을 높이 평가한 박종환 감독의 배려 덕분이었다. 한편 배기종은 두문불출하고 집에만 있었다. 임의탈퇴 선수로 공시됐기 때문이다. 2007년 10월 배기종은 느닷없이 트레이드 파문에 휘말리며 경기에 나서지 못했다. 계약기간 중 구단과 상의없이 이적을 목적으로 다른 팀과 접촉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번외지명인 선수의 경우 계약기간은 1년. 이후엔 이적료 없이 타 구단 입단이 가능하다. 여러 팀에서 제의가 올 법도 했다. 모든 상황을 눈치 챈 대전은 계약기간이 끝나기 전 수원삼성과 2대1 트레이드를 진행했다. 배기종을 보내는 대신 조재민과 황규환을 받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배기종 측은 “선수 동의 없는 계약은 받아들일 수 없다”며 항의했고 결국 괘씸죄로 임의탈퇴 되고 말았다. 다행히 2007년 시즌을 위한 동계훈련이 시작될 즈음 배기종은 계약서에 사인하며 다시 복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장남석은 재활 때문에 동계훈련에 참여하지 못했다. 장남석에게는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대구는 변병주 감독으로 수장을 교체하며 새 시즌을 준비했기 때문이다. “동계훈련에 참여하지 못했기 때문에 시즌 초반부터 기용할 수 없었다.” 장남석의 출장횟수가 저조한 이유에 대한 변병주 감독의 답이다. ‘16경기 2골2도움’이라는 기록보다 더 나쁜 것은 출장시간에 있다. 그중 풀타임 출장은 4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는 이근호 루이지뉴 에닝요와의 경쟁싸움에 밀렸다는 것을 뜻한다. 장남석은 이근호가 대표팀 소집 때문에 팀을 비웠을 때만 풀타임으로 출전할 수 있었다. 그는 “2006년에는 용병들이 못했기 때문에 내게 기회가 많이 왔다. 인정하기 싫지만 올해는 대체요원이었다고 생각한다”라며 담담히 인정했다. 

배기종 역시 호화군단으로 이뤄진 수원에서 주전자리를 꿰차지 못했다. 배기종은 개막전이었던 대전전에서 후반12분 교체투입됐지만 아크 오른쪽에서 프리킥을 얻어내며 수원이 동점골을 얻는데 견인차 역할을 했다. 차범근 감독에게 합격점을 받은 배기종은 이후 3경기 연속 선발로 풀타임을 소화했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약한 체력 탓에 경기 도중 근육이 올라오는 일이 잦았다. 드리블이 좋아 측면에서 빠르게 치고 나갈 수 있었지만 골 결정력은 예전만 못했다. 지난 해 11개의 슈팅 중 유효슈팅은 3개에 불과하다. 슈팅 대비 유효슈팅은 0.27로 같은 포지션에서 뛰고 있는 김대의(0.5) 이현진(0.67) 남궁웅(0.40)보다 낮다. 그런 상황 속에서 9월 초 2군경기 중 인대가 파열되는 부상을 입고 말았다. 진단결과는 2개월 안정. 2007시즌은 ‘17경기출장 2도움’이라는 기록으로 막을 내렸다.

반면 염기훈은 전반기 동안 5골 3도움을 올리며 2년차 징크스와는 상관없는 플레이를 선보였다. 대표팀 발탁 이후 자신감 있는 플레이는 팀에 보탬이 됐고 최강희 감독의 칭찬도 이어졌다. 그러나 문제는 아시안컵 기간 중 발생했다. 아시안컵이 진행되는 동안 염기훈 측은 ‘이적료 15억원 이상이면 이적할 수 있다’는 바이아웃 조항을 들어 이적을 요구했고 즉시 전력이 필요했던 전북은 정경호 임유환과 염기훈을 맞트레이드했다. 그러나 염기훈은 자신이 먼저 이적을 제의한 게 아니라며 구단에 배신감을 느낀다는 말을 남겼다. 설상가상 격으로 일본과의 아시안컵 3‧4위전 도중 오른쪽 새끼발가락이 부러지는 부상을 당하고 말았다. 원인은 피로골절. 선수 스스로는 원치 않는 울산으로의 이적과 이에 따른 오해, 그리고 부상. 연이은 악재로 염기훈 역시 어쩔 수 없는 ‘2년차 징크스’에 희생양이라는 이야기가 오갔다. “내 입으로 시즌 아웃이라 이야기한 적 없다. 복귀할 것이다.” 염기훈은 정규리그 마지막 경기였던 경남전에 교체출전, 복귀신고골을 터뜨렸다. 이후 울산이 PO에서 포항에서 0-1로 패하기 전까지 3경기 연속 출전하며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 2007년 염기훈이 세운 기록은 21경기 6골3도움. 데뷔 첫해 세운 31경기 7골5도움과 비교했을 때 크게 떨어지지 않는 성적이다.   

2008년은 염기훈 장남석 배기종 모두에게 더 이상 가능성이 아닌 진정한 실력을 보여줘야만 하는 해이다. ‘프로데뷔 3년’은 더 이상 신인이 아닌 팀의 중심으로 녹아들어가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물론 쉽지만은 않다. 전지훈련 기간 동안 배기종은 측면공격수에서 중앙공격수로 보직을 바꿨다. 수비부담도 늘어났고 경쟁해야만할 선수들도 늘어났다. 그동안 잃었던 골감각도 어서 빨리 회복해야만 한다. 장남석 역시 마찬가지다. 후반 들어서면 체력이 저하되는 모습을 자주 보였는데 3년차에 접어든 만큼 체력안배를 적절히 할 줄 아는 능력을 키워야할 것이다. 아울러 더 이상 용병들에게 밀려 교체투입용 선수로 전락해서는 안 될 것이다. 염기훈 또한 마냥 마음을 놓을 수 없다. 브라질리아 이상호 등과의 경쟁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스크린플레이에 능하고 왼발프리킥이라는 장점이 있지만 그것만으로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생각은 오산이다. 데뷔 초 염기훈은 “K리그는 전쟁이다. 못하면 밀릴 수밖에 없다. 싸우다 다칠 수도 있다. 힘들고 괴롭다고 그만둘 수도 없다. 항상 준비하며 기다려야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 말처럼 전쟁같은 K리그 현장에서 3년 차 K리거인 그들은 승리의 역사를 과연 쓸 수 있을까. 답은 바로 2008K리그에 있다. 아직은 유보지만 시즌이 끝나면 그 해답을 모두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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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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