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영 선수에게 중국은 여러모로 특별한 나라입니다.

그가 청소년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첫 득점을 기록했던 나라가 바로 중국이죠. 당시 그는 2004년 2월 중국 후베이에서 열린 스타스컵 일본과의 경기에서 결승골을 터뜨리며 한국을 1-0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처음이라는 건 늘 그렇듯 언제나 특별합니다. 박주영 선수는 아마 잊었겠지만 저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학교 앞 PC방에서 우연히 그를 만났을 때, 그는 제게 스타스컵 일본전 당시 결승골이 터지던 장면을 보여줬죠. 미니홈피 게시판에 있던 동영상이었습니다. 당시 무척 작은 프레임 탓에 제대로 움직임이 다 보이진 않았으나 길게, 그림처럼, 또 시원하게 골문을 향해 들어가던 그 골의 궤적만은 지금도 또렷이 기억합니다. 2004년 5월 어느 봄날이었죠.

그리고 그해 여름, 그는 아시아컵을 앞두고 '생애 첫 국가대표 발탁'이라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당시 국가대표에 소집돼 파주NFC에서 함께 훈련을 받던 어린 선수로는 김진규 선수, 골키퍼 차기석 선수가 있었죠. 대표팀은 아시안컵을 앞두고 2번의 친선경기를 가졌습니다. 첫 번 째 경기는 7월10일 광주에서 열렸습니다. 바레인과의 경기였죠.

그날은 박주영 선수의 생일이었습니다. 언론에서는 고교시절부터 축구천재로 소문난 이 청년이 20살 생일에 데뷔전을 치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관심을 기울였죠. 그도 내색은 안했지만 조금은 기대를 했던 것 같습니다. 경기 후 만난 박주영 선수는 아무 말 없이-그때는 기자들을 피하던 시절이 아니었답니다-참으로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죠. 당시 그의 어머니도 제 옆에 있었는데, 아무래도 후반 교체로라도 뛰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고, 그래서 속상해하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죠.

다들 아시겠지만 당시 훈련멤버 중 아시안컵에 가지 못한 선수는 단 1명입니다. 바로 박주영 선수죠. 트리니다드 토바고와의 경기가 끝나고 아시안컵 명단이 발표됐는데, 함께 훈련을 받았던 선수들 중 유일하게 박주영 선수만 그 명단 안에 들지 못했습니다. 본 프레레 감독은 박주영 선수에 대해 "훅 불면 날아버릴 것 같다"고 그때부터 생각했나보죠.

당시 트리니다드 토바고전을 승리로 마친 대표팀에게 휴가가 주어져 선수들은 모두 집으로 갔지만 대구가 집인 그는 그대로 파주NFC로 가 숙소에서 홀로 잤습니다. 사실 20살이라는 나이는 뭐든 다시 도전할 수 있는 젊은 나이지만, 반대로 작은 실패에도 쉽게 상처받고 충격을 받을 수 있는 나이이기도 합니다. 게다 홀로 탈락했다는 사실 또한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박주영 선수의 어머니는 열심히 하면 뽑힐 수 있을 것이라고, 국가대표의 꿈을 꼭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아들을 위로했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은 괜찮다며 오늘은 그냥 파주NFC에서 혼자 자겠다고 말했죠. 아이러니하게도 그해 여름 아시안컵은 중국에서 열렸습니다.

여름이 지나고 온 가을, U-19아시아선수권이 말레이시아에서 열렸습니다. 당시 U-19대표팀은 첫 경기에서 이라크에게 0-3 대패를 당했지만 이어 열린 경기에서 연승을 기록하며 준결승까지 진출했습니다. 준결승 상대는 숙적 일본이었습니다. 백지훈 선수가 전반 선취골을 올렸으나 후반 인저리타임에 일본의 만회골이 터졌습니다. 다시 연장 후반 7분 박주영 선수가 역전골을 터뜨렸으나 그의 라이벌 히라야마가 8분 뒤 동점골을 기록하며 승부를 원점으로 돌려놓았습니다.

결국 승부차기로 결승진출국을 가르게 됐습니다. 한국의 첫번째 키커는 당연히 박주영 선수였습니다. 한데 이게 웬일입니까. 실축을 하고 맙니다.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그는 그 자리에서 좀처럼 일어나지 못했죠. 일본 키커가 준비하자 자리로 돌아온 박주영 선수는 다른 선수와 어깨에 어깨를 거는 대신 무릎을 꿇은 채 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과 한국 키커 6명이 번갈아가며 킥하던 순간 내내 말이죠. 다행히 차기석 선수가 일본의 킥을 2번 선방했고 이어 나선 김진규 오장은 선수 모두 PK를 성공시켰습니다.



그리고 한국의 4번 째 키커 정인환 선수가 깔끔하게 킥을 성공시키자 벤치에 있던 선수들까지 모두 달려 나왔습니다. 3PK1. 한국의 승리였습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박주영 선수는 무릎을 꿇은 채 기도를 하고 있더군요. 자신의 실축이 흐름을 바꿀까봐, 그래서 준결승 문턱 앞에서 패배를 맛볼까봐 심히 걱정됐나봅니다. 그 와중에도 그는 두눈을 감은 채 정신없이 기도를 하고 있었으니까요. 주장 김진규 선수가 어깨를 치며 우리가 이겼다고 말해줬고 그제야 그도 동료들과 어깨동무를 하며 승리의 기쁨을 나눴습니다.

그리고 결승전. 상대는 중국이었습니다. 2008베이징올림픽을 위해 일찌감치 준비된, 정예멤버라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유럽 유수 클럽 유스팀에서 훈련을 받은 영재들이라는 이야기도 들렸고요. 바디 밸런스도 상당히 좋은 듯했습니다. 당시 3-4위전이 먼저 열리고 이어 결승전이 열렸는데 당시 중국 선수들은 3-4위전을 보기 위해 관중석에 있었습니다. 가까이서 본 중국 선수들은 우리 선수들보다 체격조건이 더 좋은 듯했습니다.

4년 전이지만 여전히 선연한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전반 37분 수비수 4명을 따돌리고 골에어리어 왼쪽에서 오른발로 선제골을 터뜨린 그 순간 말입니다. 당시 전 골대 오른쪽 코너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렌즈 속 중국 선수들이 그냥 너무 쉽게 휙휙 넘어지더군요. 박주영 선수는 그 선수들 사이를 유유히 지나가며 부드러운 드리블을 선보이며 한다미로 '농락'했지요. 취재 중에 웃기는 또 처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미안한 말이지만 그때 힘없이 쓰러지던 중국 선수들의 모습을 바로 눈앞에서 본 순간, 정말 웃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옆에 있던 다른 사진기자 선배들도 쟤네들 왜 저러냐면서 웃었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7분 뒤 후방으로 빠져있던 박주영 선수가 김승용 선수의 크로스를 받기 위해 골에어리어 안을 파고들었고 오른발 터닝슛을 선보였습니다. 이번에도 골이었습니다. 연속골은 그에게 특별했나봅니다. 늘 하던 기도 세레모니를 하던 그는 이번에 양 손을 넓게 벌린 뒤 하늘을 향해 올리더군요. ‘영험하신’ 박주영 선수 등장하셨다는 모 사진기자 선배의 말이 지금도 생각나네요. 그리고 결국 홀로 2골을 뽑아내는 활약으로 팀에 우승컵을 안겨준 그는 MVP와 득점왕(6골)을 동시에 수상했습니다. 참고로 결승전에서 그를 영웅으로 만들어준 상대는 다름 아닌 중국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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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베이징올림픽을 앞두고 ‘골 없는 스트라이커’라는 비난을 한 몸에 받던 박주영 선수입니다. 그러나 그는 역시 큰 경기에 강했고 아프리카의 검은 사자 카메룬을 상대로 멋진 프리킥 골을 성공시켰습니다. 비록 후반 동점골을 허용하며 1-1 무승부로 끝났지만 그의 발끝이 살아났다는 점에서, 지금의 부활은 분명 올림픽대표팀에 큰 힘이 될 것입니다.

무더위 속에서 체력은 점점 떨어져가고 있습니다. 올림픽 메달을 향한 길은 결코 쉽지만은 않습니다. 더욱이 김승용 선수는 부상에서 완벽히 회복되지 않았고 이근호 선수(또는 신영록 선수)만 고군분투한다고 쉽게 승리를 장담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죠.

역시 박주영 선수에게는 너무나 특별한 ‘중국’입니다. 어느새 이탈리아와의 다음 경기가 기다려지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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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지난 27일 코트디부아르전 도중 상대 수비수와 충돌, 교체아웃된 김승용 선수의 최종진단이 나왔습니다. 오른쪽 7∼8번 갈비뼈 사이의 연골이 골절됐다는군요.

박성화 감독은 대체선수로 교체하는 대신 '집중치료'를 통해 김승용 선수를 올림픽 본선무대에 데리고 가겠다고 밝혔습니다.



4-4-2포메이션을 쓰고 있는 현 올림픽대표팀에서 왼쪽 윙 미드로 뛰고 있는 김승용 선수는 '주전'이자 전력의 '핵'이었습니다. 최전방 투톱인 박주영-이근호 선수와는 일찍이 고교시절부터 호흡을 맞췄죠. 이근호 선수와는 부평고 시절 동기로 당시 전국대회 3관왕에 오르며 '부평고 돌풍' 주역으로 빛난바 있습니다. 박주영 선수와는 2004년 U-19대표팀에서 함께 최전방 공격수로 활약하며 아시아청소년대회 우승컵을 거머줬고 이듬해 U-20월드컵에서도 발을 맞췄습니다. 게다 이들의 호흡은 소속팀 FC서울에서도 계속 됐죠. 이처럼 올림픽대표팀 선수들과 청소년대표 시절부터 함께 뛰었던 김승용 선수의 부상은 많은 우려를 야기시키고 있습니다.

일단, 올림픽이 얼마남지 않는 현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조직력'입니다. 우리보다 전력이 한 수 위인 팀을 상대로 할 때, 승산은 '약속된 플레이가 얼마나 제대로 이뤄지느냐'에 있습니다. 때문에 김승용 선수처럼 부상으로 인해 전력 이탈 상황이 발생할 시에는 제대로 된 조직력을 갖추기가 힘들어지죠. 결국 '전력강화'에서 시나브로 '전력약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김승용 선수가 시합을 앞두고 기적적으로 완쾌될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수 없지만 이또한 하나의 가능성에 불과하므로 걱정은 여전히 계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김승용 선수 뿐 아니라 다른 선수들 역시 부상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몸입니다. 훈련 도중 발생하는 크고 작은 태클 등으로 인한 부상 위험은 언제고 있습니다. 올림픽대표팀 코칭 스태프들 역시 갑작스런 부상으로 인한 전력누수를 심히 걱정하는 눈치입니다. 오늘도 훈련을 지켜보고 있던 중 김진규 선수가 넘어진 뒤 좀처럼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다들 걱정스런 시선으로 그를 지켜봤는데, 다행히 가벼운 타박상이더군요. 덕분에 모두들 한숨을 휴, 내쉬었죠.



현재 올림픽대표팀 선수들의 몸놀림은 가볍고 경쾌합니다. 파주NFC에서 훈련이 계속될 수록 점점 올림픽대표팀 특유의 색깔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베이징올림픽 공인구에도 어느새 익숙해졌습니다. 하지만 축구계에서는 "가장 몸상태가 좋을 때 조심해야한다"는 속설이 있습니다. 부상은 바로 한껏 올라올대로 올라온 컨디션에 고무돼, 마음을 푹 놓고 있을 때 갑자기 찾아온다는 이야기입니다.



잘 차려진 밥상 앞에서 이제 한 숟가락만 뜨면 될 상황입니다. 한데 바로 그 순간 부상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탈락하게 된다면 그것은 스스로 뿐 아니라 올림픽대표팀 전체에게도 손해이자 슬픔입니다. 따라서 우리 선수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부상을 조심하고 또 조심하며 베이징올림픽 메달을 향한 장도에 올랐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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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오랜만에 축구협회에 방문했습니다. 협회 자료실에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탄 순간, 가장 먼저 눈에 띄였던 것은 엘리베이터 안에 부착돼 있던 포스터였습니다.

7월27일 저녁 8시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한국 올림픽대표팀이 코트니부아르와 친선경기를 갖는다는 내용의 홍보 포스터였죠. 포스터 안에 새겨진 선수들의 얼굴을 확인하던 순간, 저도 모르게 “이런”이라는 탄식이 흘러나오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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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명의 예비명단에는 포함됐지만 결국 18명 최종명단에는 이름을 올리지 못한 서동현이 코트니부아르와의 친선경기 홍보 포스터에는 있었습니다. 최종멤버에서 탈락된 선수가 홍보 포스터에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씁쓸했습니다. 물론 스스로는 더했겠지만요. 어쨌거나 축구협회에서는 그의 능력을 믿었던 것이겠지요. 그래서 당연히 최종멤버에도 합류할테고 코트니부아르전에도 뛸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겠지요.

사실 올 시즌 수원이 정규리그 1위를 달리는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에는 서동현의 활약도 큰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돌이켜보면 지난 몇 년 간 차범근 감독은 늘 인터뷰 때마다 확실한 해결사가 없다고 말하곤 했죠. 그런 가운데 시즌을 앞두고 안정환과 나드손을 떠나 보냈지만 ‘괴물 공격수’ 영입은 없었습니다. 외인 공격수 영입 또한 없었습니다. 때문에 시즌 초 수원의 독주체제를 예견한 전문가는 거의 없었죠.

한데 뚜껑을 열어보니 달랐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서동현의 눈부신 ‘변신’이 있었지요. 현재 서동현은 20경기에 출장해 11골을 터뜨리며 팀 내 최다 득점자로 등극했습니다. 에두 역시 11골을 터뜨렸으나 21경기 출장이니, 숫자 상으로도 확실히 서동현이 우위에 있네요. 12경기 중 7경기에 교체로 출전해, 4골을 기록했던 지난해와는 사뭇 다른 행보입니다.

그 덕분에 팀에서는 어엿한 주전으로 발돋움 했고 올림픽대표팀에도 뽑혔습니다. 때문에 베이징행 비행기에 탈 것이라는 꿈도 조만간 현실로 나타날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협회에서는 그의 얼굴이 박힌 포스터까지 내놓았을 정도였으니 일련의 생각들은 당연했겠죠.

하지만 박성화 감독은 마지막 공격수로 신영록을 택했습니다. 박성화 감독으로서는 모험보단 실리를 택하기로 한 것이죠. 아무래도 서동현은 대표팀 경험이 없다보니 국제대회에서 검증받지 못한 선수입니다. 신영록은 17세 대표팀을 시작으로 19세, 20세 대표팀을 거치는 등 꾸준히 엘리트 코스를 밟은 선수입니다. 청소년월드컵만 벌써 3번 참가했을 뿐 아니라 지난 해 캐나다에서 열린 U-20월드컵에서는 팀내 최다 득점자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지요. 게다 현 올림픽대표팀 대다수 선수들과 함께 2004년과 2005년 아시아선수권과 U-20월드컵에 참가했던 경험까지 있다 보니 여러모로 ‘금상첨화’인 선수일 수밖에 없었겠죠.

그러나 서동현의 탈락은 여전히, 참으로 아쉽기만 합니다. 더욱이 절정의 골 감각을 자랑하고 있는 상황에서 얻은 결과라 그렇습니다. 돌이켜보면 2년 전에도 그는 이번처럼 아깝게 마지막 문턱을 넘지 못하고 눈물을 흘려야만 했었죠. 2년 전 7월 대만과의 2007아시안컵 예선 원정경기를 앞두고 서동현은 ‘1기 베어벡호’ 예비 엔트리 36명 안에 들었지만 결국 경기에 나설 20명 안에는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그로부터 2달 뒤에는 아시안게임대표팀에 탈락했답니다.

그런 가운데 때 마침 그의 심경을 들을 기회가 있었죠. 9월30일 광주상무와의 홈경기에서였습니다. 당시 서동현은 0-0 상황에서 교체 투입 2분 만에 결승골을 터뜨리며 팀이 ‘13경기 무패행진’을 이어나갈 수 있게 일조했답니다. 경기 후 인터뷰를 가졌는데, 저는 그에게 대표팀 탈락과 관련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의 대답을 저는 아직도 잊을 수 없습니다.

“제 기량이 많이 부족하기 때문에 아쉬운 점은 크게 없습니다. 하지만 노력해서 베이징올림픽에는 꼭 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올림픽은 2년이나 남았음에도 그는 올림픽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간절했기에 그렇게나 일찍부터 올림픽에 가고 싶다고 말했던 것이겠지요.

그 2년 간 올림픽 하나만 바라보고 뛰었는데, 팀에서 가장 아름답게 절정으로 빛나던 순간, 결국 태극마크의 부름을 받지 못했네요.




하지만 이번에도 그는 또 2년 전 그날처럼 담담히, 또 힘차게 말하겠지요. 올림픽은 끝났지만 나의 축구는 끝난게 아니라고, 언젠가는 꼭 태극마크를 달겠노라고 말입니다.

그런 서동현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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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2008베이징올림픽에 참가하는 올림픽축구대표팀 선수들은 연일 30도를 넘나드는 폭염 속에서도 훈련을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때문에 저도 선수들이 훈련 중인 파주트레이닝센터를 자주 찾고 있죠. 그때마다 기자들의 눈에 가장 먼저 띄는 게 있습니다.

바로 금번 베이징올림픽 공인구로 채택된 ‘팀 가이스트Ⅱ 매그너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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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상징하는 붉은색 바탕에 황금색으로 ‘中國(중국)’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유로2008 공인구에 이어 베이징올림픽 축구 공인구도 아디다스가 디자인했습니다. 공에 새겨진 황금색 곡선은 만리장성과 수천년 동안 이어진 중화민족의 정신을 상징하고 있다네요. 이 공의 또 다른 이름은 ‘'장성의 별'(長城之星)’입니다. 이름은 참 멋지죠? 마치 중국대하드라마 제목 같다는 느낌도 주네요. ^^

아디다스의 설명에 따르면 최신분자재료기술로 이용해 표면을 만든 덕분에 회전 속도가 뛰어나다고 합니다. 또한 선수들이 날씨에 상관없이 완벽하게 공을 컨트롤할 수 있도록 공 표면에 매우 정교한 돌기들을 적용시켜 공과 신발 사이에 최적의 마찰력을 보장한다고 합니다. 아울러 이음새 없는 14개 패널형 구조에 혁신적인 열처리 본딩 테크놀로지(Thermal Bonding Technology)를 사용한 매끈한 외관은 킥과 같이 강한 충격에도 일관된 형태를 유지시키며 선수들로 하여금 뛰어난 볼 컨트롤과 완벽한 핸들링도 가능하게 만들었다네요.

그런데 문제는 우리나라 선수들이 나이키 공에 익숙하다는 것이죠. 베이징올림픽 최종예선을 주관한 아시아축구연맹은 나이키 공을 공인구로 썼습니다. K-리그에서도 나이키 공(머큐리 블러시)을 사용 중이죠. 때문에 아디다스 공에 익숙지 않은 선수들은 매일 30분 가량 기본 훈련에만 매달리고 있습니다. 볼 트래핑을 시작으로 드리블하며 달려가기, 2대 1 패스 등을 통해 최대한 공에 친숙해지기 위해 노력하고 있죠. 이제 막 축구를 시작한 어린이들이 받는 훈련을, 올림픽대표 선수들이 하고 있습니다. 적응하는 데만 2주가 걸린다고 하니 이러한 훈련은 정말 필수겠죠.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이 공인구 디자인을 가지고 해외 네티즌들이 설왕설래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1월 공개 당시만 해도 중국 내에서는 호평을 받았는데요, 중국 밖에서는 “완전 촌스러운 디자인” “현란한 빨간색 때문에 머리가 아플 지경” “중국이라고 새겨진 글자체도 마음에 안든다” “다른 나라 선수들이 나라 이름이 새겨진 공을 발로 차도 괜찮나?” 등의 반응이 일색이라고 하네요.


저 역시 처음 공을 봤을 때 표면에 크게 ‘중국’이라고 크게 적혀있는 디자인이었죠. 종목 특성 상 함부로 굴러다니고 차일텐데, 중국 국민들은 그걸 그냥 편히 바라볼까요? 참으로 궁금하지 않을 수 없군요. 여러분들은 베이징올림픽 공인구 디자인을 어떻게 보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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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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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플라잉뭉치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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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저희 집은 차례를 지내지 않습니다. 친척들도 대부분 외국에 있기 때문에 명절은 늘 집에서 뒹굴대며 쉬는 날이지요. 그렇지만 올해 설 연휴도 그렇게 보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오래 전부터 계획을 세웠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계시는 나눔의 집에서 봉사활동을 하기로 말이죠.


2월 7일 설날 아침에 나눔의 집에 가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전날 저녁 가는 방법을 확인하기 위해 나눔의 집 홈페이지에 들어가 봤지요. 그리고 그곳에서 예상치 못한 소식을 접해야만했습니다. 지돌이 할머니의 별세 소식이었습니다.



결국 나눔의 집 봉사활동을 잠시 뒤로 미룬 채 저는 경기도 양평에 위치한 용문효병원에 가기로 했습니다. 발인은 2월 8일 아침 9시. 양평까지 가기 위해선 새벽 6시에 집에서 출발해야만 했지요. 그런데 문제는 그날이 아버지 생신이라는데 있었습니다. 아버지 생신은 음력 1월 2일, 설 다음날입니다. 연휴 때면 온 가족이 집에 있기 때문에 저희는 항상 아침에 함께 미역국을 먹으며 조촐한 잔치를 엽니다.


하지만 저는 그곳에 가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가족들에게 양해를 구한 뒤 양평으로 향했습니다. 추운 새벽 바람과 싸우며 도착한 그곳에서 저는 사진 속으로나마 지돌이 할머니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정말로 마음이 아팠던 것은 너무나 적은 사람들만이 할머니의 마지막을 지켰다는 사실입니다. 어쩌면 그것이 작금의 현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물이 났습니다. 이 글을 쓰는 저 역시 할머니들의 아픔을 모른 채 그저 하루하루 살아가기에만 바쁘죠. 할머니들의 피 맺힌 절규와 아픔, 잊고 싶은 상처가 얼마나 깊고 처절한지 전혀 모른 채 말입니다.


장례식장에 있던 사람들이 한명 씩 나와 자신이 기억하는 지돌이 할머니에 대해 이야기하다 눈물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도 눈물이 났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다시 영상편집을 하면서 또 한 번 울었습니다.


(영상이 조금 깁니다. 그렇지만 꼭 끝까지 봐주세요.)




1923년 6월 5일 경북 경주군 안강면에서 태어난 지돌이 할머니는 18살에 결혼해 남편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남편이 징병으로 끌려갔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중국 방직공장에서 일할 사람을 찾는다는 말에 속아 그만 1945년 3월 13일 흑룡강성 동령현 석문자 위안소에 끌려가고 말았습니다. 할머니가 겨우 23살이 됐을 때의 일입니다.


그러나 해방 후에도 한국으로 돌아올 방법을 찾지 못해 중국인과 결혼, 슬하에 1남1녀를 두었습니다. 그러던 중 1997년 나눔의 집 도움으로 생존이 확인됐고 2000년 6월 1일 귀국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공동체 나눔의 집에서 생활하게 됐습니다. 


그 후 2000년 11월 24일 국적회복이 허가됐고 이듬해 2월 8일 대한민국 국적을 회복했습니다. 나눔의 집에서 생활하시면서 수요일이면 일본대사관 앞으로 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알렸던 할머니는 최근 초기 치매 증세를 보이다가 결국 지병으로 2월 6일 오후 5시 24분 양평 용문효병원에서 끝내 운명하시고 말았습니다.


2월 8일 오후 1시 강원 인제 하늘공원에서 화장된 할머니의 유해는 나눔의 집 법당에 안치됐습니다. 그리고 지돌이 할머니의 별세로 이제 나눔의 집에 계신 할머니는 8명뿐입니다. 미 의회에서 위안부 결의안이 통과됐지만 일본은 아직 공식 사과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일본 정부는 이렇게 시간만 끌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다 피해자 할머니들이 모두 돌아가시면 일본군 위안부는 없었다고 발뺌하겠죠.



그것은 있어서도, 또 있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일본 정부의 사과를 받아내기 위해서라도 오래 오래 살 겁니다!”라고 외치셨던 할머니들도 언젠가는 모두 눈을 감으실 것입니다. 그 할머니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기 전에 우리 모두 힘을 모아 일본의 공식 사과를 받아냅시다. 여러분의 작은 관심들이 쌓이고 모이면 세상은 분명 바뀔 수 있을 것입니다. 

(사진을 보실 분은 이곳을 클릭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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