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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15년도 더 된 일이지만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녀석을 처음 만났던 그날 말이다. 전학 온 지 1년 밖에 되지 않은 터라 아는 친구들보다는 모르는 친구들이 더 많았던 그때, 새 학기 첫날, 쭈뼛거리며 배정받은 4학년 2반 교실 문을 열었다. 그런데, 이럴 수가. 교실에 왕자님이 있었다!

오똑한 콧날, 하얀 피부, 170cm가 넘던(세상에, 초등학교 4학년 키가 그래도 되는 거야?) 녀석. 첫날이라고 담임선생님은 각자 앞에 나와 짧게 자기소개 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그때 알게 됐다. 녀석의 이름을. 동욱이었다. 이동욱.

그렇게 짝이 되길 빌었건만 연이 없었던지 ‘짝꿍’에 당첨되는 행운은 없었다. 불행 중 다행인지 나와 꽤 가까운 자리에 앉았는데, 내 짝의 뒤, 그러니까 내 대각선에 동욱이가 앉게 됐다. 고개만 돌리면 왕자님이 있었다. *^^*

자리가 가깝다 보니 자연스럽게 친해졌고 생일에도 나는 동욱이를 초대했다. 그때, 친구들을 데리고 집에 도착하자 할머니와 고모와 엄마는 동욱이 옆에 앉아 이름이 뭐니, 어디 사니, 종교가 뭐니 -.-;까지 물어보셨다. 대화의 귀결은 “어쩜 이렇게 인물이 훤할꼬!”였다. 부모님이 성당에 다닌다고 하자 “우리 헬레나도 성당 다닌단다!”하며 좋아했던 할머니와 고모와 엄마의 모습을 나는 여전히 잊지 못한다.

글 좀 쓴다며 유달리 성숙한 척했던 나는 --; 영화 <록키4>와 <죽어야 사는 여자>를 억지로 보게 한 다음 남녀 할 것 없이 모두 고무줄 놀이에 참여시켰다. 한데 착한 동욱이는 군말 않고 아파트 주차장에서 같이 고무줄 놀이를 하며 나의 생일을 축하해주었다.



6학년 때 나는 다시 동욱이랑 같은 반이 되었다. 그해 봄 학교에서는 사진촬영대회가 열렸다. 원혁이라는 친구가 미끄럼틀 위에 올라가 전경을 담고 있던 동욱이의 모습을 비스듬하게 찍은 다음 ‘위험한 촬영’이라는 제목으로 제출했는데, 센스 있던 제목 때문이었는지 금상을 받게 되었다. 과하게 말하자면 동욱이는 그때부터 모델적 재능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중학교 때도 나는 동욱이를 볼 수 있었다. 같은 학교에 입학했기 때문이다. 입학과 동시에 이동욱의 존재는 연일 상종가였다. 그 키에, 그 얼굴을 가진 중학생이 어디 흔했던가. 농구도 잘했고 성격도 좋아 남자아이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그때 우리 반 친구 하나가 동욱이를 좋아하게 되었다. 등하교길에 오고 가며 자연스레 동욱이와 인사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게 된 친구는 러브레터를 전해줄 수 있냐고 부탁했다. 딱히 내키지는 않았으나 친구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기에 몇 번 편지를 전해주었다. 그리고 착한 동욱이는 친절히도! 답장을 보내주었다. 그렇게 편지를 주고받는 모습을 보게 된 다른 반 여자아이들은 급기야 나를 동욱이의 여자친구로 착각하고 말았다.

쉬는 시간에 우리반으로 찾아와 “쟤야?”라며 나를 흘겨보는 애가 있었는가 하면 “저렇게 생긴 애가 여자친구라고?”라며 대놓고 머라 하는 아해도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기가 막혀 “그래서? 어쩌라고?”라며 반문했다. 그런데 한 번 대단한 사건이 터졌는데 우리 학년 1진 중의 1진인 여자애가 나를 찾아온 것이다. 화장실로 데리고 가 “동욱이 그만 만나라고! 인사도 하지마! 알았어?”라며 협박하는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그래도 당시 날라리들은 지금과 달랐다. 그냥 협박만 하고 끝나는 수준이었으니까.



그해 여름에도 동욱이는 내 생일선물을 챙겨줬는데, 그룹 모자이크의 테이프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얼굴만큼 뭔가 선물하는 씀씀이나 생각도 성숙했던 동욱이였던 것 같다. 동욱이는 노래보단 랩하는 걸 좋아했는데, 그해 가을 수련회에선 단지 반장이라는 이유만으로 전교생들 앞에서 “꿈, 사랑, 그리고 착각”을 부르며 어색하게 다리떨기 춤까지 추는 ‘쇼’를 보여줬었다. 여자애들은 귀엽다며 완전 쓰러졌었지.

그때도 난 우리반 여자애들의 성화에 못 이겨 동욱이의 사진을 대표로 찍었어야했는데, 서울로 올라가던 중 버스가 잠시 휴게소에 섰을 때 독사진을 수십장 찍어댔었다. 동욱이는 “이제 그만 찍어. 나 버스 올라탄다”라고 말하면서도 끝까지 얼굴이 카메라 쪽으로 향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역시, 그때부터 연예인으로서의 자질과 끼가 보였다. 동욱이는.

중학교 2학년 겨울, 크리스마스 카드를 동욱이에게 줬었다. 그리고 옆 반에 있던 또 다른 친구 대관이한테 줬는데, 대관이 말하길 “카드가 바꿨어.” 깜짝 놀라 동욱이네 반으로 달려가 교실 문을 열고 카드를 돌려달라고 했는데, 이런. 체육시간을 앞두고 남자아이들이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우리의 동욱이는 교복 와이셔츠를 막 벗고 있던 찰나였다. 그런데 가슴에 근육이 잡혀있는 것이 아닌가! 그때나 지금이나 엉뚱소녀였던 나는 궁금한 마음에 “가슴에 그건 무엇이냐!”고 물었다. 동욱이의 대답은 이랬다. “응, 나 요즘 헬스 중이야.”

고등학교 입학 전 겨울방학을 맞아 모처럼 초등학교 친구들이 뭉쳤다. 그때는 동창회보다는 반창회가 대세했다. 6학년 때 같은 반 친구들끼리 만나기로 했는데, 동욱이도 나왔다. KFC에서 치킨버거를 먹으며 이승환의 ‘가족’을 들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노래방에 갔다. 날쌘 나는 바로 동욱이 옆자리에 착석했다. 하하. 그리고 나서 그대로 헤어지기가 아쉬워 끝까지 남아있던 6명의 친구들을 우리집에 초대했다.



그런데 우리집에 가던 도중, 엘리베이터가 멈추는 사건이 발생했다. 처음엔 하하 웃고 떠들었지만 도와주는 이는 없고 시간은 흘러가고 이것저것 버튼만 누르다 점점 엘리베이터가 한층 한층 아래로 내려가며 걱정을 야기시켰다. 이러다 지하로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도와달라고 고함치기 시작했다. 그 소리를 들은 엄마가 경비실에 연락했고 엘리베이터 관리해주는 분이 와 엘리베이터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엄마는 귤과 과자와 음료수를 준비해놓고 있었는데, 역시나 동욱이한테 다가가 “어쩜 여전히 그렇게 잘생겼니!”라는 덕담을 건네주셨다. 동욱이가 기억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날 우리 6명은 밖에서 어른들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은 잊어버린 채 완전 수위 높은 야한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

내가 동욱이를 마지막으로 만난 건 수능을 마치고 가뿐한 마음으로 만화방에 가던 길에서였다. 고등학교는 서로 다른 학교를 가는 바람에 흘어졌지만 MTM에 다니며 연기를 배운다는 소식은 들고 있었다. 그리고 고3 때 베스트극장을 통해 텔레비전에 데뷔했는데, 반항기 넘치던 고교생인 것만 어렴풋이 기억난다. 방에서 기타를 치며 온몸을 흔들던 그 장면만은 여전히 선연하다.

그때 나는 “드라마 잘봤어!”라고 반갑게 인사했고 동욱이는 “야, 너 피부가 왜 이렇게 안 좋아졌어!”라고 인사했다. 그게 동욱이와의 마지막 만남이었고 그 이후로 나는 <학교> <마이걸> 등의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서만 만날 수 있었다.



이 새벽에 문득 동욱이가 생각나는 까닭은 어린시절 돈이 없어 집까지 걸어 다녔다는 이야기를 방송을 통해 들었기 때문이다. 당시 우리가 다니는 학교는 사립이었고 집이 먼 아이들을 위해 지역별로 나눠 스쿨버스가 다니고 있었다. 쌍문동인 학교에서 도봉동인 우리집까지는 거리가 꽤 됐기에 스쿨버스를 타고 다녔는데 우리집보다 더 멀리 살던 동욱이는 늘 여동생과 함께 시내버스를 타고 다녔다. 당시 스쿨버스는 아이들을 내려주며 가느라 시간이 많이 걸렸는데, 그냥 빨리 집에 가고 싶어서 그런가 보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늘 밝게 웃어 어린 나이에 그런 고민과 그늘을 안고 살줄은 몰랐다. 그래서 그렇게 여동생 손을 꼭 잡고 집에 갔었나 보다. 그런 이유도 모르고 나와 친구들은 괜히 동욱이한테 다가가 “여동생이랑 너무 금술이 좋은 거 아냐?”라고 놀려댔었고. 그때는 워낙 어릴 때라, 또 좋아하는 마음을 유치하게 표현할 때라 그런 식으로 놀렸는데, 늘 착한 동욱이도 그때만큼은 심하게 화를 내며 뒤도 안 돌아본 채 집에 가곤 했다.

그때 그 모습이 어제 일처럼 생각나고, 친구의 이야기에 좀 더 귀 기울지지 못했다는 사실이 못내 아쉽다. 그리고 미안하다.

지난 날, 대학생이던 그 시절, 언젠가 기자가 된다면 어린시절 첫사랑이었던 동욱이와 해후할 수 있을 거라고, 아니면 조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물론 지금, 나는 그때 당시의 꿈을 이루었으나 문제는 내가 축구기자라는 사실이다. ^^ 하여 이제는 서로 너무나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기에, 직접 얘기할 방법이 없기에 이렇게 블로그에나마 끄적여본다.

주변 사람들을 아빠처럼 헤아리고 챙겨줬던 너의 마음 씀씀이라면 모두에게 사랑받는 배우가 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지금도 멋지지만, 앞으로도 더 멋진 배우가 되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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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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