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번의 마계대전이 추석연휴에 펼쳐졌습니다. 추석연휴에 열린AFC챔피언스리그 수원삼성과 성남일화의 8강 2차전에서 수원은 성남에 2-0으로 이겼으나 최종 스코어에서 패하며 아시아의 챔피언으로서의 위용은 과거에 묻어야만했습니다.

4강 진출에 실패했지만 후반기 수원의 대반격은 대단합니다. 시즌 초반 부진의 늪에 빠졌던 수원은 8경기 연속 무승(1무 7패)을 달려야만 했고 월드컵을 앞두곤 꼴찌로 전반기를 마감해야만 했죠.

그러나 윤성효 감독 부임 이후 수원은 다시금 푸른 날개를 달았습니다. 어느새 7위까지 오르며 6강 플레이오프를 향한 꿈을 다시금 불태우고 있습니다, FA컵에서는 4강에 진출했으며 이번 성남과의 AFC챔스 2차전 승리로 3연패의 사실까지 끊었습니다. 또 이적생 황재원은 어느새 팀에 녹아내렸고 백지훈, 이상호는 이제 수원의 얼굴로서 손색 없는 플레이를 선보였습니다.

윤성효 감독은 부임 이후 기자들과 만날 때면 특유의 무뚝뚝한 얼굴로 대면하곤 합니다. 좀 웃으라는 이야기에도 늘 우승하면 웃겠다고 말씀하시지요. 마계대전과 관련해 묻자, 팬이 있어야 더비도 성립되지 않냐며 수도권팀들 가운데 팬이 가장 적은 성남의 상황을 꼬집어 말하는 모습에서는 무링요 감독의 모습이 오버랩되기도 했습니다.

부드러움보다는 강함이 더 느껴지기에 윤 감독을 볼 때면 특유의 ‘기’에 눌려 저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윤성효 감독도 그랑블루 관련 질문을 던질 때에는 무척이나 애교스럽게 웃지 않겠어요. ^^

지난 9월 4일 강원FC와 수원삼성과의 정규리그 경기가 열렸던 날, 그랑블루에서는 처음으로 윤성효 송을 서포팅 중간에 불렀습니다. 윤성효 송을 혹시 들어봤냐고 어떤 기분이 들었냐고 묻자 어쩔 줄 몰라하며 웃다가 “쑥스럽습니다~”하며 걸쭉한 경상도 사투리로 소감을 말씀해주시더라고요.

카리스마 윤성효 감독의 귀여운 모습에 기자회견 도중에 저도 빵, 터지고 말았습니다. 수원이 웃을 수 있는 이유는 리빌딩 작업에 들어간 수원의 미래가 밝기에, 그래서 수많은 팬들이 아낌없이 지지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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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전반 7분. 코너 근처에서 이영표가 그리수 선수의 파울을 얻어 낸 뒤 기성용이 프리킥을 차올렸습니다. 문전에서 올라오는 볼을 보던 이정수가 그리스 수비수들 사이로 뛰어 올리며 선제골을 터뜨렸습니다. 2002년 월드컵 3-4위전 터키전에서 이을용이 터뜨렸던 우리나라 대표팀 월드컵 최단시간 골을 2분이나 단축시킨, 시원한 선제골이었습니다.

이정수. 그는 사실 대한민국 대표팀의 베스트 11은 아니었습니다. 허정무 감독의 애제자 조용형 - 곽태휘 두 센터백 콤비의 그늘에 가려진 제 3의 수비수였죠. 처음부터 선발을 장담하던 멤버는 아니었으나 곽태휘의 부상과 조용형의 대상포진 증세로 이정수는 그 공백을 메울 대안이었고, 덕분에 월드컵 출전이라는 기회를 잡을 수 있었죠.

이정수는 기회란 노력한 자만 붙잡을 수 있다는 축구계의 정설을 실력으로 입증했습니다. 선수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보통 유럽 수비수들은 세트 피스 상황에서 골대를 향해 올라오는 볼에만 시선을 두고 주전 스트라이커의 움직임에만 집중한다고 합니다. 그말은 곧 뒤에서 뒷공간을 노리며 달려 들어오는 수비수는 열외로 둔다는 이야기와도 같죠. 덕분에 이정수는 그리스의 장대숲같은 수비수들에게서 자유로울 수 있었고 선제골은 그렇게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이정수에게 있어 그리스전은 참으로 특별했을 듯합니다. 비주전으로 분류됐던 자신이 부상선수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주전으로 투입됐을 때, 스스로 많은 책임감과 부담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선제골을 터뜨려 승리의 초석을 다졌고, 무엇보다 무실점으로 경기를 마감하며 승리로 이끌었기에 주전 센터백으로 느꼈을 마음의 짐들을 한 번에 훌훌 털어버릴 수 있었던 경기였을 것입니다.

“제가 대표팀 수비수들 중에선 나이도, K리그 경험도 제일 많아요. 어느 정도 리드해야한다는 생각은 늘 갖고 있어요. 그렇지만 전 이제 막 대표팀에 들어왔잖아요. 그 때문에 A매치 경험이 제일 적죠. 대표팀 경험이 풍부하지 못하다보니 위축되는 부분도 없지 않아요. 좀 더 경험도 쌓고 자신감도 붙으면 선수들한테 이렇게 하자고 얘기할 수 있겠지만, 글쎄요. 아직은......”

2008년 막 대표팀에 승선했을 때 이정수가 제게 해준 이야기입니다. 만약 단 한번의 패스미스로, 또는 상대 공격수의 돌아들어가는 움직임을 놓치거나 수비 뒷공간을 내주며 골을 허용했다면, 다른 선수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하더라도 스스로 ‘내가 들어가서 골을 허용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하는 지레짐작으로 마음이 위축됐을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건 마음이 위축될 때 플레이도 함께 위축된다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포백라인에서의 센터백은 기존의 홍명보 감독의 경우처럼, 리더로서 당당하게 수비수들을 이끌어야하는 법인데, 마음이 불안하거나 스스로를 믿지 못한다면 최후의 보루로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죠. 수비불안은 심리적인 요인에서도 나오기 쉬운 법인데, 그런 점에서 이정수가 보여준 120% 활약은 남은 2경기의 선전도 기대할 수 있게 만들었기에 더욱 의미가 깊습니다.

이정수가 허정무호에 처음 승선한 때는 2008년 봄입니다. 2010월드컵 3차예선 북한과의 1차전에 나설 24명 엔트리에 이름을 올리며 다시 태극마크와 인연을 맺었죠. 무려 3년 만에 달게 된 태극마크였습니다. 사실 2005년 7월 동아시아선수권을 앞두고 대표팀에 전격 발탁된 바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당시 허벅지 근육이 파열되는 부상으로 중도하차했지만 말입니다.

당시 이정수는 제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아쉬운 전적이 있기에 마음을 비운 채 대표팀에 들어갔어요. 그저 뽑혔다는 사실에만 의의를 뒀죠. 당연히 곽태휘 선수가 뛸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발목 통증을 호소하며 못 뛰겠다고 하더군요. 그로 인해 제게 기회가 주어졌고 다행히도 ‘제 것’으로 만들며 잘 잡은 것 같습니다.”

당시 이정수는 북한전에 출장하며 ‘정대세를 잡아라’는 허 감독의 숙제를 완벽하게 해냈습니다. ‘허심’을 잡은 것도 그때부터였죠.

사실 이정수는 2002년 경희대를 나와 안양LG에서 프로에 데뷔할 때까지만 해도 공격수였습니다. 그런데 이듬해 당시 조광래 안양 감독이 수비수로의 보직 변경을 제안했습니다. 팀에 용병 공격수들이 포화상태였던 것도 이유였지만 무엇보다 스피드가 좋으며 제공권에도 강하기 때문에 수비수로서 성장하기에 좋은 DNA를 가지고 있었기에 장기적으로 발전 가능성이 더 컸다고 본 것이죠.

물론 이정수 본인도 저와의 인터뷰 당시 이를 인정했습니다.

“공격수 출신 수비수로서 말씀드리자면, 저 같은 ‘보직변경’이 수비수로 살아가는데 있어 더 도움이 되는 순간도 많습니다. 아무래도 상대 공격수의 움직임을 읽는 것도 수월하거니와 패싱력이나 기동력 또한 전문수비수 출신보다 뛰어날 수밖에 없으니까요.”

이정수가 빛을 보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죠. 2004년 인천으로 이적해 2005년 인천에 K-리그 준우승컵을 안겼고 그때의 활약으로 2006년 수원으로 이적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장외룡 감독은 내게 대표팀 감독이라면 이정수를 발탁할 것이다, 그는 K-리그 최고의 수비수이다, 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죠.

수원에서 그는 날개를 단 듯 거침없이 질주했지만 아드보카트 감독은 그를 외면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부상이라는 악재까지 닥쳤죠. 그러나 워낙에 긍정적인 사람인지라 빅버드에 앉아 손수 수원선수단의 전력분석을 위한 경기 촬영 장면을 찍겠다며 일일 경기분석관 역할을 자처하기도 했으며, 관중석에 앉아 삶은 계란을 까먹으며 홈경기를 관람하다 중계 카메라에 잡힌 적도 있었죠. 팬들은 그에게 ‘계란정수’라는 별명을 지어주기도 했는데, 지금도 그는 그 별명을 얘기할 때마다 쑥스러운지 어쩔 줄 몰라합니다. ^^

2008년 한일올스타전에서는 K-리그 대표팀으로 나갔던 그가 2009년에는 교토로 이적, J리그 올스타에 뽑혔고 대회 최우수 선수에도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당시 J리그 진출 전에 밥 한번 꼭 먹자고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는데, 사실 그때만해도 저는 으레 하는 인사말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한데 전화가 왔더라고요. 밥 약속을 지키겠다면서요. 그런데 당시 제가 마감 중이라 제가, 감히, 그와의 밥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거절했습니다. 제 지인들은 월드컵 스타의 밥 약속을 거절했냐며 요즘 놀리고 있네요.

그때 일이 떠오르는 건, 그의 성품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냥 흘리는 말이 아니라 꼭 할 말만 하고, 그 말은 꼭 지키는 것. 한 마디로 됨됨이가 참 괜찮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아마 그래서 결국엔 월드컵이라는 꿈의 무대에서 드디어 축구인생의 꽃을 피울 수 있게 된 것이겠지요.

언젠가 그가 “10번 잘해도 1번 못하면 욕먹을 수밖에 없는 게 수비수의 숙명 아니겠냐”며 웃으며 해줬던 말이 생각납니다.

그는 참으로 씁쓸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했지요. 그래서 적어도 저를 비롯한 이 글을 읽는 사람들만큼은 단 1번의 실수로 인해 1골을 허용하더라도 2골을 막으면 되지 않겠냐며 박수치고 격려해주기를 바란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남은 2경기에서도 지금처럼만 뛰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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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성남일화와의 시즌 개막전을 시작으로 4라운드 포항전까지, 4경기 동안 강원FC가 거둔 성적은 1무 3패. 지난해 이맘 때 쯤 거둔, 참으로 찬란했던 성적 2승 1무와는 사뭇 대조되는 행보였다.

추가시간까지 계속되던 끈끈한 압박, 측면에서 중앙으로 이어지던 공격의 간결함, 투터치 안에 패스를 전개하면서도 볼을 내주지 않던 정확성 등을 볼 수 없다며 강원FC만의 특유의 색을 잃어버렸다는 혹평도 들어야만 했다.


하지만, 굳이 변명을 하자면 지난 블로그 포스팅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아무래도 강릉에 닥친 때 아닌 폭설로 제대로 훈련을 하지 못한 날들의 영향이 컸다고 말하고 싶다. 잔디가 깔린 훈련장이 아닌 체육관에서 운동을 해야했으니 제대로 된 미니패스 훈련, 전술훈련, 세트피스 훈련 등을 할리가 만무했다. 맞춤형 훈련 대신 기본적인 체력훈련만 하다 경기를 치렀으니 어려움이 컸을 수밖에.

그런 가운데 한번은 최순호 감독님과 점심을 먹기 위해 한정식당을 찾은 적이 있었다. 주문을 받기 위해 종업원이 왔는데, 감독님 얼굴을 알아보더니만 “아이고, 감독님. 경기결과가 좋지 못하니 얼굴이 안되보이시네요”하더라. 당시 감독님은 “사람들은 보는 대로 느끼는 게 아니라 생각하는대로 보는 것 같구나”라고 말씀하시며 멀리 창 밖으로 시선을 돌리셨다.

한데 잠시 후 그 종업원이 물을 가져다주며 감독님께 다음과 같이 말하더라.

“감독님, 계획하신 것이 있다고 하셨죠? 저희는 믿고 기다리겠습니다.”

그게 벌써 2주 전의 일인데, 감독님은 요즘도 그날 이야기를 꺼내곤 하신다. 그렇게 말하기가 쉽지만은 않았을텐데,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가 참으로 대단한 것 같다고. 더 말씀은 안하셨지만 그 말이 감독님에게는 많은 힘이 된 듯 했다. 전남과의 홈경기에서 5-2로 이긴 후에도 종종 그날 그 종업원이 했던 말을 꺼내곤 하시니까.

믿고 기다리기. 사랑하는 연인사이에서도 지키기 힘든 게 바로 믿고 기다리기 아니던가. 분명 계단을 올라간다고 하지만 그 자리에 있는 것만 같고 때론 두세계단 내려가는 듯할 때, 팬들은 실망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표출한다. 하지만 팀과 선수는 말한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언젠가는 이 계단을 다 밟고 올라가 정상에 서겠습니다, 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간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팬들은, 결국엔 기약 없는 기다림 때문에 지치고 만다. 그래서 더는 기다리지 못하고 팀에 바라고, 감독에 요청하고, 선수의 대답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얼마 전 수원삼성의 신인 오재석 선수의 미니홈피에서 눈에 띄는 글을 발견했다.

보면서도 배울수 있는 것은 많다, 로 시작되는 글이었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을, 우회적으로 우턴하여
부드럽게 살포시 러블리함을 가미해서
기다림의 미학 이라고 표현한다.
어, 왜 우리 학교다닐 때 급식있지않습니까 급식.
배식순서를 기다리며 길게 늘어선 롱(Long) 줄. 그 사이에 낑겨
앞사람들 좀 빨리빨리 움직여서 퍼고 빨리 좀 갔으면 싶고
내 차례는 언제오려나하며 배식구 쪽 만을 향하는 초조한 시선.

덩치 큰 녀석이라도 앞쪽에서 버티는 날엔
나를 포함한 뒷사람들의 머리속엔
새우튀김은 저 위치에서 거덜이구나. 다신 볼수없겠다.
A급 반찬들의 운명을 저 자의 다 손에 맡겨야하는구나.
이러한 걱정들을 하곤합니다.

그리고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뭐 지극히 개인적이기도 합니다만,
오늘은 김치 대신에 오이소박이가 나오는 납득 안되는 경우.
설마 밥과 함께 필수식단인 국에 말도안되게, 어처구니없이
오이냉국이 출격하는 이런 어이가 안드로메다로 가는 깟댐 상황
식사전에 오이와 눈을 맞추어 입맛이 떨어질수있는 위험이있는
만리장성과 함께 아시아의 2대 미스테리 상황같은.

허나.

이 초조한 마음들은 놀랍게도
내가 식판과 수저를 잡고 선택을 하는 순간부터 사라집니다.
초조했던 심박도는 정상을 되찾고, 뒤에서 기다릴땐
남들은 제발 좀 빨리 갔으면 좋겠다 싶었는데
막상 내 차례가 되면 나는 세상에서 가장 느긋한 사람이 됩니다.
기쁨의 아드레날린은 상승하여서
조금이라도 더 많이, 더 과감히, 식판을 오버시켜가며
탕수육소스가 옆에 김치에 흘러들어가도 괜찮고,
어차피 뱃속에 들어가면 다 똑같으니까 같은 식의
긍정의 힘을 그 누구보다 긍정히 실천하고
긍정적으로 보여주는 리틀 조엘 오스틴이 되곤해요.

놓여진 음식들을 보며 배분율에 대해 분석에 들어가고
남겨져서 날 기다려준 새우튀김을 바라보며 안도의 미소와 함께
앞에 지나간 뚱띠가 새우알러지가 있었음을 느낄수있는
통찰력과 예지력까지 얻을수있어요.
혹은 이미 밥 푸기 바빠서 뚱띠는 머리속에 안중에도 없거나.

축구도 그렇습니다.
선수마다 때가 있는 겁니다.

기다리는 마음은 누구나 초조하죠.
줄이 롱(Long) 줄 이니까요
허나 때는 분명히 옵니다.
다만 준비된 사람에게만 주어지기때문에
막연하게 기다리면 막연하게 시간만 가기때문에
착실하게 준비하고 있겠습니다

앞서의 새우튀김은 그라운드입니다.
기다림의 이유이자 기대하는 곳이죠.

그라운드에 내가 없다면 조금 실망할수도있지만
남들보다 부지런히 노력하여
축구에선 선발선수 명단에 들기 위한 노력과 준비.
학교에선 종치면 문열고 달릴 준비를 아주 착실히 한다면

다음번엔 경기장에서 내 이름이 전광판에 떠있고 콜이 울리며

식당에선 가장 먼저나 선두권에서 Door OPEN을 기다릴수있죠
운이 좋으면 막 튀겨낸 뜨끈뜨끈 쌔삥새우를 먹을수있고요
쌔삥새우는 골이라고 치고싶네요.

배가 부른 사람은 느긋하다 늦기 쉽상입니다.
입장이 바뀐상황을 위기라고 표현할수있죠.
먼저 가는 듯 싶지만 새치기를 당할수도있고,
잘 나가는듯 싶지만 부상을 당해 잃기도 합니다.

어려서부터 지금 이시기를 위한 급식 조기교육속에 자란 덕에
깨우친게 많아서 처음에 늦은 것 같다고 초조해하지않습니다.
전 룰을 잘 지키며 살지만 어려서도 지금도 단체로 밥먹으면
은근슬쩍 새치기도 악의없이 센스있게 잘합니다.

물론 새치기가 목표가 아니고 실력을 쌓아서 정상에 서고싶고
지금은 마음이야 굴뚝같고 준비되어있는데요
역시 실력은 아직 많이 부족해서 때를 기다리는 입장입니다.
키도 부족하고요. 많이라고 하지말아주세요
성장이 멈춘것같거든요. 희망이 없어서 말이죠.

키는 멈춘것같지만
선수로서의 성장은 이제 갓 14살입니다.
연골이 성장판이 쭉쭉 열릴때라서 많이 성장하고 싶습니다.

시즌은 길고 선수도 많지만 때는 옵니다.
뜻이 있는 곳에 있다는 그 길을 넓은 시야로 잘찾아보겠습니다

요즘 제 미니홈피 재미없다 그래서
몇자는 아니고 몇만자 적날하게 적어봤습니다.
여러분 황사랩니다. 삼겹살 사드세요.

[스티커 붙이시면 딸 낳으면 얼굴 드록바]

아 골 넣으라고 부탁하는 주위 분들.
1년에 1골 넣는 것도 어색하도록 10년간 수비수만 봐왔습니다.
전 수비수라 막는거부터 집중해야되니
지금은 좀 곤란한거같구요
다들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요.

메시 동영상 열심히 보고있으니.

뛰는 사람들의 마음은 다 그런가 보구나, 하는 생각에 한참동안 고개를 끄덕끄덕 했다. 그리고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이 그 마음을 조금만 헤아려줬으면 좋겠다고 한참동안 생각했었다. 비록 타팀이지만 오재석 선수의 글을 읽으면서 말이다.

지난해 인천전이 끝나고 왜 아직도 김영후 선수는 골을 터뜨리지 못합니까, 라고 기자들이 질문을 던졌을 때 최순호 감독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때론 그 선수를 향한 관심을 조금만 줄이는 것도 선수를 위해선 좋은 길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김영후는 바로 다음 경기에서 2골 1도움을 터뜨렸다. 프로 데뷔골을 멀티골로 마감하며 괴물 공격수는 그렇게 자신의 이름을 K-리그에 널리 알렸다.

올 시즌 왜 아직도 김영후 선수는 시즌 첫 골을 신고하지 못합니까, 라고 사람들이 물었을 때에도 최순호 감독은 그런 김영후를 따로 불러 느긋하게 생각하라며 마음의 여유를 찾을 수 있게 배려해주었다.

그리고 김영후는 바로 다음 경기에서 올 시즌 K-리그 국내 선수 중 최초로 해트트릭을 터뜨리며 또 다시 모두를 놀라게 만들었다.

왜 아직도 강원FC는 졸전만 거듭하며 1승을 거두지 못하는 거지요?, 라고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질 때에도 최순호 감독은 평온한 표정으로 말하였다. “우리는 계획한데로 가고 있습니다. 성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기다려주십시오.”

그리고 바로 다음 경기에서 강원FC는 전남을 5-2로 누르며 K-리그 베스트팀에 선정되었다.

그러니까 지금 가장 하고 싶은 말은, 지금 당장 날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곧 추락과 동의어는 아니라는 것. 어쩌면 더 높기 날기 위해 잠시 깃을 가다듬고 있는 중일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배는 쓰라리고 괴로운 법이다. 하지만 오늘의 패배가 영원한, 그리고 인생의 전부를 지배할 패배는 아니지 않던가. 중요한 건 왜 졌는지 알고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생각하고 보완하며 노력하는 것이니까.

그래서 나는 믿고 기다리련다. 강원FC는 슬픔과 괴로움보다 기쁨과 웃음, 그리고 희망을 더 많이 줬던, 하나 뿐인 나의 팀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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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언킹과 괴물이 만난다!

강원FC는 11일 오후 2시 춘천종합운동장에서 전북현대와 2009 K-리그 27라운드 경기를 치른다.

전북에게 이번 강원전은 정규리그 1위와 2위의 향방을 가르는 중요한 혈전이 될 듯 싶다. 강원과 비기기만해도 FC서울을 제치고 1위에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승점 1점을 앞선 서울이 이번 주말 경기를 쉬기 때문에 무승부만 기록해도 득실차에서 1골 앞서며 정규리그 1위 탈환에 성공하게 된다. 지난 5월 17일 이후 꼭 4달 만에 영광의 왕좌에 오르는 것이다.


그러나 1위에 오르는 길이 마냥 쉽지만은 않다. 우선 전북은 지난 수요일 수원에서 FA컵 4강전을 치른 후 전주로 이동한 뒤 강원FC과 정규리그 경기를 치르기 위해 춘천으로 이동하는 바쁜 일정을 보내야만 했다. 안타까운 사실은 그 와중에 0-3으로 완패하며 팀 내 사기가 바닥을 쳤다는 사실에 있다.

그런 전북과 달리 강원은 지난 주말 성남과 경기를 치른 후 일주일 간 충분한 휴식을 취한 상황. 체력적 우위를 바탕으로 확실한 압박축구를 보여주겠다는 각오를 되새기고 있는 중이다.

전북의 난관은 또 있다. 최강희 감독과 이흥실 수석코치가 출장 정지 징계로 벤치에 앉을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전북의 최강희 감독과 이흥실 수석코치는 지난 전남 드래곤즈와의 경기 도중 심판 판정에 강력히 항의하다 퇴장당해 이번 강원전 벤치에 앉을 수 없게 됐다. 최인영 GK 코치와 신홍기 코치만이 벤치를 지킬 예정이다.

강원FC는 지난 6월 27일 전북과의 원정경기에서 무려 5골을 터뜨리는 폭발적인 득점력을 선보이며 5-2 대승을 거둔바 있다. 당시 강원FC는 압박, 패스, 템포, 집중력 등 모든 부분에서 전북을 능가하며 축구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그라운드 위에서 구현한 바 있다.

강원FC와 전북현대와의 경기는 득점왕 선두 이동국(17골)과 공격포인트 부분 선두 김영후(20포인트/13골 7도움)의 킬러들의 맞대결로도 관심을 모은다. 벌써부터 김영후는 “K-리그에서 가장 존경하는 선수인 이동국과 홈에서 만나게 된다”며 기대감을 표했다.

전북의 선두탈환이냐, 4연패의 사슬을 끊으며 고춧가루 부대로 등장할 강원의 부활이냐. 모두의 눈은 춘천을 향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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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1912년 4월10일 ‘하느님도 침몰시킬 수 없는 배’라는 찬사와 함께 출항했던 타이타닉호는, 4월14일 밤 11시 빙산과 충돌한 후 수 시간 만에 심해로 가라앉고 만다. 당시의 비극을 필름으로 재현한 영화 <타이타닉> 말미에는 마지막 순간까지 키를 놓지 않았던 존 스미스 선장의 모습이 담겨 있다. 소임 앞에 숨까지 내놓으며 끝까지 책임을 다한 그 모습은, 나서 이끄는 사람의 의미를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주었다.

선장의 영어식 표현이 주장을 뜻하는 단어 ‘캡틴(Captain)’과 같다는 사실은 아마도, 서 있는 자리는 다를지라도 같은 무게의 책임감을 어깨에 올려놓은 사람이기에 한 단어로 부르는 게 아닌가 싶다.


경기장 밖에서도 쉽게 주장 완장을 벗어 던지지 못했던, 지난 1년 간 오로지 푸른 군단의 재건만을 위해 뛰었던 ‘캡틴’ 송종국을 만났다. 주장 송종국이 펼쳐 보인 주장론은, 수은주는 영하를 가리키고 있었지만 뜨겁고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장시간을 오갔다.

첫 직선제 주장
“프로 데뷔 이후 정규리그에선 단 한 번도 우승컵을 들지 못했어요. 그 때문에 긴장도 심했고 걱정도 많았죠. 특히나, 결승전을 앞두고는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오죽했으면 경기 전날 수면제를 먹고 간신히 잠들었을까요. 지난 시즌 주장으로 있다 보니 일 년 내내 나 하나가 아닌 팀 전체를 생각하며 지냈어요. 그런 가운데 결승전이 다가오면서부턴 다른 선수들 컨디션까지 살펴야했고요. 신경 쓸게 너무 많았던 탓에 좀처럼 긴장을 풀 수 없었고, 아무래도 그 때문에 잠이 달아난 것 같네요.”

송종국은 원하던 열매를 얻었기에 지난날의 고생쯤은 아무 것도 아니라며 웃었다. 하나 청자의 입장에서 따라 웃을 수 없었던 까닭은, 그 말이 곧 주장으로 보낸 시간이 결코 쉽지 않았음을 뜻하기 때문이었다. 대사를 앞두고 홀몸 건사하기도 힘들었을 텐데, 와중에도 서른 명이 넘는 선수들을 일일이 챙겨야했으니. 깊게 들어가지 않아도 어려운 일이었음을 분명 알 수 있었다.

“시즌을 앞두고 ‘주장 선거’를 가졌어요. 저를 비롯해 선수 몇 명이 동료 선수들의 추천을 받아 후보로 나왔고 선수단 전체가 투표에 참여했죠. 지금에 와서 말씀드리지만, 마음 한편으론 안됐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있었어요. 그동안 옆에서 지켜본 수원삼성의 주장이란 자리는 결코 쉽지 않은 자리였거든요. 그런데 투표 결과 꽤 많은 후배들이 저를 지지했더군요.”

수원 역사상 최초의 직선제 주장이었다. 그만큼 믿고 따르는 선수들이 많았다는 방증이니 무엇보다 영광스런 마음이 컸을 듯했다. 그러나 송종국은, 앞으로 건널 가시밭길 생각에 기쁨보단 고민이 우선이었다고 고백했다.

“강하게 이끌어갈까, 아니면 부드럽게 품고 나갈까. 고민이 많았어요. 한 시즌은 하루 이틀이 아닌 일 년이라는 긴 시간이잖아요. 그 속에서 초지일관을 유지해야하는데, 그러려면 아무래도 평소 제 성격대로 하는 게 가장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음속으로 후배들의 입장에서 손을 잡자고 다짐했는데, 그 부분은 지금도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해요. 어려운 선배가 아닌 우리 형 같은 느낌으로 다가갔기에 후배들도 힘든 부분에 대해 예전보단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거든요. 마음을 터놓을 수 있었던 게 결국엔 팀 전력에도 좋은 영향을 끼쳤다고 봅니다.”

보이지 않던 노력의 노력들
처음 수원의 주장으로 불리게 됐을 때, 송종국이 가장 중점을 둔 것이 바로 대화의 미학이다. 그의 말마따나, 확실히 지난 1년은 입보다 귀를 더 많이 열었던 시간이었다.

“저희 팀에는 스타 플레이어들이 많이 있는데요, 어린 선수들에게는 늘 어렵고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죠. 그 때문인지 복도에서 만나게 돼도 간단히 인사만 하고 지나칠 뿐이었어요. 팀에 대한 애착도, 선수들 간의 우정도 점점 사라지는 것만 같아 안타까웠어요. 제가 주장을 맡으면서 적어도 그 부분만은 다 같이 노력해서 깨고 싶었어요. 그래야 비로소 ‘한 팀’이라고 말할 수 있으니까요.”

대화의 물꼬를 트기 위해 송종국이 정한 방침은 ‘고충은 듣되 잘잘못을 가리진 말자’였다고 한다.

“K리그에서도 자세히 살펴보면 알게 모르게 ‘파’가 갈려 내부적으로 분열된 팀들이 몇몇 있어요. 문제는 그게 경기력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죠. 골이 깊어지면 자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 선수는 좋은 위치에 있어도 볼을 안주게 되는 일들도 생기거든요. 결국엔 팀이 실패하는 결정적 원인이 되고 말죠. 작년 수원엔 그런 게 전혀 없었어요. 하나가 됐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을 정도로 합심했어요. 지난해 컵 대회와 정규리그 후반기 때 2군 선수들이 올라와 좋은 활약을 펼쳤잖아요. 전적으로 대화를 통해 서로간의 믿음을 확인할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줄곧 2군에서 뛰다 1군에 갓 올라온 선수들은 무거운 분위기에 눌려, 익숙하지 않아서 등 이런저런 이유로 자기 실력을 온전히 발휘하지 못하기 십상이거든요. 그런데도 그 선수들이 제 몫 이상을 해줄 수 있었던 건, 물론 스스로의 노력도 컸겠지만 역시나 대화의 힘도 중요하게 작용했다고 봅니다.”

주장으로서, 송종국이 쏟은 노력들은 그렇게 겹겹이 쌓였는데 여기서 한 가지 칭찬하고 싶은 부분이 바로 솔선수범형 리더십이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리더십이 가장 돋보였던 순간은 다름 아닌 챔피언결정전 현장에서였다. 중원에서 끊임없이 공격과 수비 진행 방향을 리딩하던 ‘키맨’ 송종국의 모습은 1·2차전 내내 단연 눈에 띄었다. 특히 송종국의 진가는 그의 플레이가 단순히 지시를 내리는데서만 그치지 않았다는 사실에 있었다. 그는 기성용과 이청용의 발끝에서 시작되던 서울의 공세를 막아내는 1차 저지선으로 맹활약했고, 선수들의 구심점이자 마지막 순간까지 ‘숨은 살림꾼’ 역할을 제대로 해냈다는 호평을 이끌어냈다.

“주장이기 이전에 선배로서 책임감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물론 힘들었던 것도 사실이에요. 제 플레이하기도 바쁜데 다른 선수들 것까지 봐주면서 커버해야했으니까요. 하지만 제가 한발 더 뛰면 동료들이 편하잖아요. 체력이 받쳐주는 한 더 많이 움직이며 팀에 보탬이 되고 싶었어요. 또 선수들에게도 믿음을 주고 싶었고요.”

후배들 역시 그 마음을 알아챈 것일까. 지난해 12월 K리그 시상식장에서 만난 수원 선수들은 “(이)운재 형 뿐 아니라 (송)종국이 형에게도 MVP를 주고 싶다”며 입을 모아 말했다. 송종국에게 당시 이야기를 전해주자 그는 얼굴에 잔잔한 미소를 띠우며 말했다. “이보다 더 행복한 주장이 또 있을까요”라고.

주장이 생각하는 주장은
“2002월드컵 당시 제 눈에는 선배들이 참으로 대단한 선수로 비춰졌어요. 저 뿐 아니라 어린 선수들 대부분의 생각이 그랬습니다. 선배들이 없으면 우리가 어떻게 경기를 풀어가겠냐고 말할 정도였으니까요. 특히나 주장이던 홍명보 선배님께 많이들 의지하며 지냈어요. 선배님께서 그만큼 큰 버팀목이 되어주신 거죠. 그렇지만 지금은....... 글쎄요. 요즘 선수들에게 주장이란 존재가 더 이상 의지의 대상은 아닌 것 같습니다.”

시대가 바꿨고 선수들의 사고방식 역시 변했으니 주장상(主將像) 또한 달라져야 한다는 게 송종국의 지론이다.

“많은 사람들이 주장이 갖춰야할 덕목으론 카리스마를 꼽잖아요. 아무래도 예전부터 주장 자리에 있던 선배들이 갖고 있던 이미지가 그랬으니까요. 그렇지만 이제는 어머니 같은 포용력을 더 요구하는 것 같아요. 잘못 나가고 있을 때는 엄하게 꾸짖되 평소에는 어머니처럼 ‘네 마음 다 안다’며 품을 줄 아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주장이라고 목소리만 높이는 시대는 이제 지나갔습니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송종국은 후배들과 약속한 훈련시간에 늦었다며 서둘러 채비를 갖췄다. 그러나 선수단을 위한 마지막 인사말을 잊지 않고 전했다. 마지막까지 주장은, 역시 주장다웠다.



“수원의 역사에서 가장 행복했던 주장이 아니었나 싶어요. 70점짜리 주장을 믿고 따라온 선수들에게 고마웠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이제는 주장의 위치에서 한 계단 내려오지만 지금처럼, 앞으로도 후배들이 필드 위에서 더 많은 능력을 펼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선배로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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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2년 전, 2006년 11월이 생각납니다. 성남과의 결승 2차전. 당시 수원은 1차전 0-1 패배를 극복하지 못한 채 홈에서도 패하며 안방인 '빅버드'에서 성남의 우승 세레모니를 지켜봐야했습니다.

수원 선수들에게는 지금도 잊고 싶은, 꽤나 아픈 기억이죠. 그러나 절치부심했던 시간들 덕분이었을까요.




에두의 선제골, 정조국의 PK 만회골에 이어 수원에게 다시 한번 기회가 옵니다. 키커는 수원의 주장 송종국 선수. 그러나 송종국 선수의 킥은 골키퍼 김호준 선수에 막히고 마네요. 그러나, 결자해지라고 송종국 선수는 튕겨 나온 볼을 향해 재차 슈팅을 시도했고 결국 역전 결승골로 이어졌습니다.

이후 수원 선수들은 중원에서부터 확실하게 서울을 봉쇄했고 경기는 2-1 수원의 승리로 끝이 났습니다. 2004년 이후 4년 만에 만난 우승컵 아래서 수원 선수들과 차범근 감독은 활짝 웃으며 우승의 기쁨을 만끽했죠. 다음은 결승 2차전이 끝나는 순간까지 관중석에 앉아 찍은 영상입니다.



경기 종료 후 수원 선수들을 만났습니다. 송종국 선수는 중원에서 키맨으로서 제 역할 이상을 해줬죠. 조원희 선수의 투지가 빛났던 것은 중원에서 볼 배급을 원활히 해줬던 송종국 선수의 존재 덕분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물론 조원희 선수 역시 기성용 선수와의 1대 1에서 전혀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줬고 비단 기성용 선수 뿐 아니라 서울의 패스를 바로 바로 커트하는 등 1차 저지선으로서 완벽한 플레이를 선보였다고 생각합니다. 에두 선수는 또 어떻고요. 서울의 데얀 선수가 마토-곽희주 두 센터백에 연방 밀리며 아무런 힘도 보여주지 못할 때, 에두 선수는 측면에서 중앙을 향해 폭넓게 움직이며 스스로 기회를 만들어냈습니다. 그것이 에두 선수과 데얀 선수의 차이였죠.

노장 김대의 선수는 효과적으로 공격 시발점이었던 이청용 선수를 막아냈고 홍순학 선수 역시 1차전에서의 부진을 거울삼아 횡으로 활발히 움직이던 아디 선수의 오버래핑을 막는데 주력했습니다. 마토-곽희주 콤비는 더 설명하지 않아도 다들 잘 알겠죠. K리그 최고의 수비수들이라는 걸요. 저는 풀백으로 나섰던 이정수 선수를 칭찬하고 싶습니다. 부상 때문에 근 몇달을 결장했던 그는 사실 정규리그 말미에 경기에 나설 수 있을 몸이 돼있었답니다. 그러나 혹시 또다시 부상이 재발해 챔피언결정전에 나서지 못할 일이 발생할까봐 벤치를 지켰고 결국 챔피언결정전 1차전에 복귀하며 모두를 깜짝 놀래켰죠. 최성환 선수가 이정수 선수의 공백을 잘 메웠다고 생각하나 그래도 챔피언결정전에서 측면에서 돌아들어가며 공격을 노리던 서울 선수들을 효과적으로 마크할 수 있었던 가장 큰 공은 이정수 선수가 세우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이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의 노력과 실력이 더해져 수원은 결국 2008 K리그 우승팀의 영광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이 모든 공을 수원 서포터스 '그랑블루'에게 돌리던 선수들의 따뜻한 마음이었습니다. 새롭게 시작하는 2009년 아시아의 챔피언 수원삼성을 기대해봅니다.

마지막으로 1년 동안 2008시즌만 생각하며 뛰었던 K리그 모든 선수들에게 수고했다는 말과 그동안 멋진 경기를 보여줘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합니다. 모두들 고생 많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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챔피언결정전은 늘 빅매치일 수밖에 없겠지만 근래 들어 이보다 더 큰 빅매치는 없을 듯 합니다. 12월 3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2008 K리그 챔피언결정전 1차전 FC서울과 수원삼성과의 경기가 바로 그랬죠. 평일 저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플레이오프 최다 관중인 3만9011명이 몰렸으니 그만큼 많은 이들의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방증이겠죠.

경기 시작 2시간 전에 경기장에 도착했는데, 벌써부터 사람들이 잔뜩 몰려들어 푸드코드에서 식사하는 데만 40분의 시간이 걸렸답니다.

 

경기 초반만 해도 상대적으로 빅매치 경험이 적은 어린 선수들로 구성된 서울이 수원에 다소 밀리는 듯한 양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축구는 골이 모든 것을 말하죠. 전반 21분 기성용 선수가 왼쪽 코너킥 라인에서 찬 공을 아디가 솟구쳐 골대 오른쪽을 향해 밀어 넣었습니다. 수원 수비수들과 이운재 선수 모두 손 놓고 있었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손써볼 틈도 없이 선제골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승기는 서울이 잡은 듯 했죠. 중앙에선 조원희 선수가 전방에선 에두가 고군분투했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중원에서 패스미스가 계속 됐고 볼배급이 원활하지 못하자 에두-신영록 투톱이 할 수 있는 건 없었죠. 에두는 계속해서 움직이며 스스로 기회를 만드는 듯 했지만 신영록 선수는 안타깝게도 의욕만 앞서는 듯 하더군요.

한골을 헌납한 뒤 수원은 스리백에서 포백으로 전환했고 전반 내내 수원의 플랫4는 다소 불안한 모습이었습니다. 부상에서 회복해 오랜만에 출전한 이정수 선수는 다행히 시간이 지날 수록 안정된 수비력을 펼치더군요. 옆에 있던 전남 송정현 선수는 이정수 선수를 가리키며 후반전에는 더욱 나아진 움직임을 선보일 것이라 평하더군요.

후반 들어 서울은 데얀을 뺀 뒤 이을용 선수를 투입하며 4-4-2에서 4-5-1로 전형을 변화시켰습니다. 그러나 수원은 배기종, 이관우, 최성현을 차례로 투입시키며 적극적으로 ‘공격 앞으로’을 외쳤죠. 그 덕분이었을까요. 후반 34분 마토의 헤딩슛을 서울 김호준 골키퍼가 쳐냅니다. 그리고 튀어 나온 공을 곽희주가 재차 넣어 극적으로 동점골을 성공시켰습니다. 그리하여 1-1 무승부로 챔피언결정전 1차전 혈투는 끝이 났죠.

경기 종료 후 양팀 감독과 양팀 수훈선수인 곽희주 선수와 기성용 선수의 공식 인터뷰가 있었습니다. 이날 기성용 선수가 제일 마지막에 인터뷰를 하게 됐는데요, 많이 힘들었는지 벽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앉아 있더군요. 옆에 있던 구단 프론트는 열심히 부채질을 해주고 있었고요. 남은 마지막 힘을 쏟아내며 90분 풀타임을 소화했으니 기운이 없을 수 밖에요. 괜히 안쓰럽더군요. 그런데 그 와중에 차범근 감독은 “이청용은 전반 잠깐 반짝했지만 기성용은 나중에 발견하지 못했다”고 말씀하셨죠.

잠시 후 기성용 선수에게 차범근 감독의 혹평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자 담담히 오늘 몸상태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괜찮다고 말하더군요. 하나 속은 꽤나 쓰렸을 듯합니다. 후반 89분  자신이 시도했던 중거리슛이 그대로 결승골로 연결됐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죠.

자, 이제 승부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습니다. 오는 일요일 2차전에서 우승 트로피의 향방이 갈리게 되는군요. 어느 팀이 마지막 순간 웃을지 무척 궁금하고 또 기대가 큽니다. 블로그 독자들을 위해 오늘 현장에서 건진 따끈따끈한 영상, 편집해서 올려드립니다. ^^






경기장에 3시간 동안 있어야 하기 때문에 오리털 파카와 목도리, 장갑을 챙겨가지고 왔지요.

기자들에게는 치킨과 라면이 제공됐답니다.

그런데 기자들에게 나눠준게 또 하나 더 있었어요. 뭘까요?

바로 바로 소녀시대 포스터! 이걸 왜 나눠줬는지는 아무도 몰라요 ㅋ 후배는 완전 좋아서 어쩔 줄 몰라하더군요. ㅋ

K리그 우승컵입니다. 작년부터 이 모델을 사용하죠. K리그 엠블럼을 상징해서 만든 우승컵입니다.

평일 저녁이었는데도 관중이 참 많이 왔어요.

건너편에도 관중이 정말 많더라고요.

줌 기능을 이용해서 찍어보니... 역시 많군요.

수원 서포터스 그랑블루도 많았어요. 정신없이 깃발 흔들며 응원 중입니다.

중무장한 꼬마도 보였어요. 어찌나 FC서울을 열심히 응원하던지요.

이렇게 아들과 같이 온 어머니도 보였습니다. 유니폼을 나란히 입고 응원하는 모자의 모습이란. ^^ 저도 부럽더군요.

FC서울 구단에서 팬들에게 빳빳한 종이를 나눠줬는데 이렇게 접으면 부채가 되더군요. 잡고 흔들면 소리가 났어요. 아이디어 굿~

나눠준 종이를 펴면 요렇습니다.

출전선수 명단. 정규리그와 컵대회 멤버와 크게 다르지 않은 구성이었죠.

FC서울에서 깃발섹션을 펼쳐보였습니다. 자세히 보면 종이가 아니고 깃발임을 알 수 있을 거예요.

수원 그랑블루는 역시나 언제나처럼 멋진 카드섹션을. ^^

그랑블루가 '패륜송'을 부르자 '메롱'이라 적힌 판넬을 들더군요.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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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2008컵대회 포항과의 준결승전이 끝나고 믹스트존에서 만난 배기종은 “오랜만이에요”라는 인사와 함께 웃었다. 사실 배기종과 난 만나면 참 격없는 기자와 선수 사이다. 2년 전, 어리버리했던 기자와 또 역시 갓 프로에 뛰어 들어 어리버리했던 신출내기 선수는 인터뷰를 이유로 처음 만났다. 당시 배기종과의 인터뷰를 위해 서울에서 대구까지 내려가는 강행군을 했어야했는데, 내가 식사도 못한 채 자신을 만나러 왔다는 사실을 알고선 참 많이 미안해했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됐건만 그는 인터뷰 내내 “배 안 고프세요?” “안 피곤하세요?” 그렇게 부러 안부를 묻던, 참 착한 청년이었다. 배기종은.  


2005년 겨울 그를 부르는 프로팀은 어느 곳에도 없었다. 간신히 대학시절 감독님 소개로 대전시티즌에 입단할 수 있었다. 번외지명, 그러니까 지명 외 선수로 들어간 그에게 매달 쥐어진 돈은 85만원에 불과했다. 그 적은 돈으로 뭘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건만 그는 국민연금까지 낸다며, 국민연금공단 아가씨가 “배기종 선수, 내년에는 연봉 올려서 다른 선수들처럼 연금 많이 내세요”했다며 하하 웃었다. 그만큼 참 심성이 맑은 선수였다.

전반기만 해도 대전시티즌에서 그가 보여준 모습은 여타 신인들 사이에서 단연 도드라졌고 신인왕 No.1으로 꼽힐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올스타전 이후로 배기종의 컨디션은 점점 하향곡선을 그렸다. 골은 침묵하기 시작했고 모 구단과의 사전접촉과 태업파문에 얽히는 것으로 모자라 결국 임의탈퇴까지 당하고 말았다.

그래도 잘될 거라고 믿으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배기종은 다행히 맞트레이드 형식(황규환 +조재민)으로 수원에 입단하게 되었고 대전과의 개막전에도 인상깊은 모습을 보였다, 쏟아지던 빗속에서 거침없이 골문을 향해 드리블하던 오른쪽 날개 배기종의 모습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 물론 그 이후 크고 작은 부상들로 인해 1군과 2군을 오갔지만 결국 배기종은 컵대회 결승전에서 보란 듯이 해냈다.

그 멋진 슛을 모두에게 보여주기 위해 그렇게나 결승전 때 꼭 오라고 했나보다. 전반 11분 전남 풀백 유지노를 등진 채 돌며 터뜨린 선제골은 그날의 베스트골로 선정되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후반 33분 터진 에두의 결승골도 시작은 특유의 날랜 드리블로 오른쪽 측면을 무너뜨린 배기종의 발끝에서였다.

경기 후 MVP로 선정돼 잔뜩 긴장한 채 어쩔 줄 몰라 하던 그 모습을 보며, 배기종의 어머니는 얼마나 기뻐하며 눈물을 흘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 2년 전 배기종과 처음 만나 인터뷰 했던 그날의 녹취록을 블로그에다 공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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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드시죠?” “피곤하시겠어요.” “저 때문에 고생하시는 거 아니에요?” 인터뷰 내내 배기종이 제일 많이 했던 말이다. 그렇다. 이제 막 프로무대에 선 그는 모든 것이 조심스러웠다. 질문에 답할 때도 한참을 생각한 뒤 천천히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요즘이 제일 기쁘고 가장 행복해요. 고등학교, 대학교 시절에는 기뻤던 적이 별로 없었거든요. 지금 이렇게 잘되라고 그때 많이 힘들었나봐요.”

살짝 미소 짓는 얼굴에서 숨겨놓았던 슬픔이 묻어났다.

아버지. 이제는 담담하게 부를 수 있는 그 이름, 아버지. 오늘처럼 따뜻했던, 막 열한 살이 됐던 어느 봄날, 아버지는 가족 곁을 떠났다. 그리고 아버지의 부재와 함께 배기종의 축구인생도 시작됐다. 그런 아들을 위해 어머니는 뒤늦게 야식일을 시작해야만 했다. 어린 기종이 새벽운동을 나갈 때 어머니는 하루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어깨 위론 긴 밤 고단함을 켜켜이 쌓은 채로.

그때 배기종은 결심했다. 어른이 되야겠다고. 내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하루 빨리 어른이 되야겠다고. 그 뒤론 얼마 안 되는 용돈을 쪼개고 모아 축구화를 샀고, 어머니의 단잠을 위해 오후에는 전화조차 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눈물을 처음 봤던 열여섯 어린 나이에 이미 세상을 다 알아버린 아이. 그때부터 오직 어머니를 위해 공을 찼던 아이, 배기종. 그리고 지금,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빨리 어른이 되길 기도하던 그 아이는 어느덧 대전을 빛내는 별로 자랐다.

배기종, 그는 매일 그라운드 위에서 희망을 쏜다. 그렇다. 그의 발끝에서 터지는 것은 골이 아니다. 그것은 분명, 희망이다.

-작년 한해 마음고생이 심했다고 들었습니다.
제 축구인생이 그래요. 잘 하다 갑자기 뚝 떨어지고 기복이 심한 편이에요. 대학 1학년 때는 잘했어요. 게임 때마다 좋은 모습 보여줬고 그래서 늘 자신감에 차있었어요. 그런데 4학년 때 동계훈련이 거의 끝날 무렵, 종아리 근육이 파열되는 부상을 입었어요. 다행히 11월에 마카오에서 열린 동아시아대회 대표에 뽑혔지만, 1분도 뛰지 못했어요. 그런 모습을 보여 참 많이 속상했어요. 사실 처음 대학에 왔을 때만 해도 어느 정도 자신감이 있었거든요. 늘 자신감을 갖고 있었는데 그렇게 되니 제 자신이 원망스러울 지경이었어요.

당시 드래프트 결과를 전화로 듣고 핸드폰을 껐죠. 혼자 하루 종일 이곳저곳을 돌아다녔어요. 그날 눈도 많이 왔는데. 다음날 코치 선생님께서 “괜찮으니까 다시 잘 하라” 는 이야기를 듣고, 마음잡고 고등학교에서 운동하기 시작했어요.

드래프트 당시 어떤 팀에서도 저를 뽑아주지 않았을 때, 주위 많은 사람들은 “걱정하지 마라. 넌 꼭 갈 수 있다” 라고 말해줬어요. 물론 그때마다 ‘이렇게 속이 바싹바싹 타는 기분을 알까?’라는 생각이 들었죠. 많이 힘들었어요.

-프로진출이 잘 풀리지 않았을 때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던가요.
초등학교와 달리 중학교부터는 ‘축구부 회비’ 라는 게 있어요. 그런데 가정형편상 회비를 낼 수가 없었고, 그래서 중학생이 되면서 축구부를 그만두려고 했어요. 그때 다행히 중학교 코치 선생님께서 면제를 해주셨고, 그 덕분에 계속 할 수 있었죠. 그때부터 쭉 고 1때까지 면제 받았어요.

중학교 3학년 당시 운동하면서 많이 맞았어요. 어린 마음에 그게 싫어 3학년 초에 친구 한명과 팀을 나왔어요. 나중에 어머니께서 “제발 다시 운동하라” 고 하셨고 코치님께 “용서해주고 다시 받아 달라” 며 우셨어요. 그때 이후로는 한 번도 그만두거나 도망간 적 없어요. 고등학교 2학년 시절에도 이유 없이 형들에게 맞고 그랬지만 단지 맞는 게 싫다는 이유로 그만두는 것은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꾹 참고 계속 운동했죠.

그 때문에 고등학교에서 후배들과 운동하며 지난 12월 한 달을 보낼 때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어요.

-그래도 이제는 후배들에게 희망이자 귀감인 선배가 됐네요.
아직은 아니에요. 이제 겨우 시작인데요. 작년 12월 한 달 동안 고등학교 후배들과 같이 운동하면서 많이 친해졌죠. 그 때문에 나중에 연습생으로 프로에 가고 나서도 후배들이 신경 쓰였던 것이 사실이에요. 지금도 종종 후배들에게 연락이 와요. 용품 달라고 할 때마다 준다고는 하는데 막상 크게 줄 게 없어, 요즘은 그게 참 미안해요.

-축구는 어떻게 해서 시작했나요?
초등학교 4학년 때 감독님이 절 찾아왔어요. “축구 잘한다고 소문났는데 축구부 들어올 생각 없냐”고 물어보셨죠. 그 시절 제가 본 축구부는 매일 맞고 뛰는 이미지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축구부 같은 거 하면 안 되겠다’ 는 생각이 들어 거절했죠. 그런데 저희 외삼촌이 축구를 정말 좋아하시거든요. 제게 축구 해볼 생각 없냐며 권유하셨고, 마침 그때가 학교에서 축구부원을 뽑는다며 무작위로 아이들을 뽑아 축구부에 넣을 때였거든요. 선생님이 일부러 그랬는지는 몰라도 그 중에 저도 있었어요. 그렇게 축구부에 들어갔고 자연스럽게 축구를 시작하게 됐죠.

-어머니 홀로 힘들게 배기종 선수와 여동생을 키웠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초등학교 4학년 때 부모님이 이혼하셨어요. 그때부터 어머니는 외삼촌이 하시는 야식집에서 일하세요. 밤새 음식 만드시다 매일 새벽에 들어오는데도 혹 제가 신경이라고 쓸까봐 한 번도 힘든 내색 하지 않았어요. 그 때문에 학교에서 운동하다 무슨 일 때문에 집에 전화하려해도 어머니 주무시는 거 아니까 전화를 못 걸 때도 많았고요.

아버지하고는 연락이 안돼요. 고등학교 때는 몇 번 찾아오셨는데 어느 순간 안 오시면서 연락이 끊어졌어요. ‘프로에 와서 내가 잘 되면 아버지께서 연락하시지 않을까?’ 라는 생각역시 한 번도 해보지 않았고요. 아버지가 찾아오시면 만날 수야 있겠지만 전처럼 좋아질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전 그저 ‘꼭 성공해서 어머니 호강시켜드리자’ 는 생각뿐이에요.

프로 첫 데뷔전을 마치고 MVP를 탔어요. 어머니께 부상으로 받은 100만원 상품권을 드렸죠. 마침 그때가 어머니 생신이었거든요. 특별한 것을 준비 못해 그걸 선물로 드렸는데 어머니께서는 뭘 이런 걸주냐며 앞으로 더 열심히 하라고 고맙게 받으셨어요.

요즘은 “경건해져라” 는 말씀을 많이 하세요. 매스컴에서 제 이야기가 종종 나오는 것에 자만하지 말고 열심히 하라고 하세요. 참, 밥 잘 먹으라는 말씀도 많이 하세요. 밥을 많이 먹어야 힘이 난대요. (웃음)

-어떻게 프로에 적응 중인지 궁금합니다.
어머니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가서 잘하면 더 좋은 기회를 만들 수 있을 것’ 이라고 충고해주셨어요. 첫 연습게임 때 포워드로 뛰었는데, 지켜보시던 최윤겸 감독님이 안 되겠다며 미드필드로 내려가라고 하셨어요. 그때부터 미드필더로 뛰게 됐는데, 처음 보는 자리라 힘들었어요. 지금도 힘들지만 그때는 더 힘들었죠.

사실 대학 때는 오는 공만 받고, 만들어주는 것만 해결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제가 패스도 줘야하고 더 많이 움직여야하고, 지금도 그런 게 완전히 익혀지지 않은 상태라 아직은 힘든 게 사실이에요. 솔직히 아직까지 가끔 헤매기도 해요. 그럴 때마다 감독님이 잡아주시고 가르쳐주세요. 다들 알고 계시지만 감독님 참 좋으신 분이에요. 보잘 것 없는 상태로 왔는데도 저를 믿어주시고 이렇게 기회까지 주셨어요. 그래서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배우고 있어요.

참, 데뷔전 때는 체력안배를 잘못해 숨 쉬는 게 힘들었어요. 그때 정말 ‘이래서 프로무대가 높다는 말을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고요. 지금은 그래도 많이 적응한 것 같아요. 그리고 무엇보다 말이 많이 늘었어요. 첫 게임 때 처음으로 인터뷰를 하는데, 제가 할 말은 다하더라고요. 저도 놀랐어요. 그렇지만 지금은 그때보다 늘은 것 같아요. 다행이죠(웃음).

-그러고 보니 데뷔전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네요. 지난 2006년 3월15일 부산전 때 데뷔하며 골까지 기록하셨죠?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지만 막상 경기에 투입돼 뛰는데 정말 깜짝 놀랐어요. 와, 힘든 거예요. 호흡이 내려갈 생각을 안하더라고요. 얼마 뛰지도 않았는데 말이에요, 당황했죠. 골 넣고 나서도 너무 힘들었어요. 형들도 제가 헐떡헐떡 숨 쉬는 것 밖에 안보였대요. (웃음)

그때 데뷔전은 정말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그날 밤 혼자 누워서 이게 운일까, 실력일까, 생각했어요. 오늘 있던 일이 진짜였을까, 다시 떠올려보기도 했고. 골을 넣었다는 사실에 기뻐 잠이 안온건지 모르겠지만 도통 잠이 오지 않았어요. 그날 새벽 2시까지 잠 못 이룬 채 멀뚱멀뚱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어요.

데뷔전 이후 ‘힘들게 프로에 왔지만 열심히 하니까 나도 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때부터 자신감이 많이 생겼죠. 형들이 그래요. “너는 게임이 안 풀리면 무조건 들어간다. 그러니까 항상 들어간다는 생각을 가지고 몸을 만들어라.” 계속 열심히 하다보면 좋은 모습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요.

-올해 세운 목표가 있다면요.
처음 프로에 왔을 때 (강)정훈이 형이 해주신 말씀이 생각나요. “네가 못해서 연습생으로 들어온 게 아니니까 열심히 해. 열심히 하면 잘될 수밖에 없어.” 그 말씀이 맞는 것 같아요. 물론 프로에서 열심히 하는 것은 기본이에요. 다들 경기에 나가기 위해 치열하게 싸우고 있어요. 그 속에서 저 역시 항상 배우는 자세로 꾸준히 노력하고 싶어요. 쉽게 오지 않았잖아요. 어렵게 온 만큼 더 열심히 해서 경기장에서 좋은 모습 보여드리고 싶어요. 처음 프로에 왔을 때 세운 다짐들 기억하며 뛰고 싶어요.

-마지막으로 K리그를 사랑하는 팬들에게 한 말씀해주세요.
언젠가 (이)관우 형이 잡지 인터뷰에서 그랬어요. "오래 기억에 남는 선수가 되겠다" 고. 저도 꼭 그랬으면 좋겠어요. 모두의 기억에 오래도록 남는 선수가 됐으면 좋겠어요. 그런 선수가 되기 위해 항상 노력할 테니 이제 막 시작하는 저에게 많은 관심과 충고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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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배기종이 내게 했던 말, 2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나는 말을 마지막으로 긴 글을 마칠까 한다.

“어머니께서 늘 말씀하세요. 항상 겸손하라고. 이제 막 시작인 아들이 프로무대에서 자칫 흔들릴까봐 걱정되나봐요. 매일 기도하고 있으니까 열심히 하라고만 하세요. 어머니 말씀 새기면서 스스로에게 다짐하고 또 다짐해요. 자신감을 갖고 하자. 그리고 처음처럼, 처음 그 마음 잊지 말고 열심히 하자. 아직 부족한 것들, 스스로가 잘 아니까 주변에서 들려오는 말들 신경쓰지 않고 계속 열심히 할 생각입니다.”

참, 착한 아들 배기종은 컵대회 MVP 소감을 묻자 수요예배 때문에 경기장에 못 나오신 어머니가 제일 많이 생각났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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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4월20일 수원월드컵경기장. 에두-신영록 투톱에 울산은 박병규-박동혁-서덕규 스리백으로 맞섰다. 그러나 박병규가 부상에서 완벽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 경기 전날 박병규는(지난 겨울 박병규는 발목 부상으로 동계훈련에 참여하지 못했다.) 슈팅을 때릴 때 통증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그 때문일까. 울산 스리백은 계속해서 뒷공간을 내줬고 그때마다 오른쪽 윙백 김영삼이 수비진영까지 내려와 커버플레이해줬고 골로 연결될 뻔한 위험한 상황을 2번이나 온몸으로 막아내줬다. 중간에 중거리슛 욕심도 냈지만 그의 진가가 드러났던 경기.

후반25분 페널티에어리어 바깥 오른쪽 지역에서 송종국이 띄어준 볼을 신영록은 골에어리어 중앙에서 붕 뜨며 머리를 갖다대며 골로 성공시켰다. 문제는 신영록을 마크했던 수비수가 없었다는 것. 연속골을 기록하며 '영록바'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있는 신영록을 왜 울산 선수들은 그냥 두었을까? 후반 48분에는 에두의 결승 쐐기골이 터졌다. 울산 수비진의 집중력 부족으로밖에 설명되지 않을 상황.

물론 울산에게는 어려운 경기일 수밖에 없었다. 염기훈이 부상으로 교체아웃됐고(믹스트존에서 만난 김정남 감독은 피로골절이 의심된다며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역시나 진단결과는 피로골절. 염기훈은 현재 수술차 일본에 건너간 상태. 지난해 아시안컵 때 피로골절로 이미 일본에서 수술한 바있다.) 우성용 역시 경기 종료 후 제대로 걷지 못해 트레이너에게 업힌 채 버스에 올라탔다. 뉴페이스 유호준은 경험이 부족한 모습을 수차례 보여줬고 전반23분 염기훈 대신 투입된 이진호는 부진한 모습으로 후반 17분 김동석과 교체아웃되는 수모를 겪어야만 했다. 이날 가장 열심히 뛴 선수는 바로 이상호. 미드필드 진영까지 내려오며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으나 골을 성공시키지는 못했다.

새롭게 이적한 김동석은 아직 팀에 녹아내리지 못한 듯했고 이상돈은 대기명단에만 이름을 올리는 것으로 경기를 마감했다. 형제가 함께 뛰는 모습을 기대했기에 조금은 아쉽기도. 새로 영입한 용병 페레이라는 좀더 지켜봐야겠다. 그러나 최근 이렇다할 활약을 보이지 못한 여느 울산 용병들과 차별성이 그다지 느껴지지 않다는 것. 아직까지는. 마지막으로 이세환. 대학시절 활약을 생각해본다면 컵대회에서는 유호준 대신 수비형MF로 출장해도 괜찮지 않을까.



전날 내겐 많은 추억이 서려있는 그곳에서 까페라떼를 사줬기에 너무나 좋아하는 크리스피도넛을 사주기로 했으나 늦잠을 자고 말아 ㅠㅠ 결국 못샀다는. 다음엔 꼭 약속 지켜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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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손대호 선수 찾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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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석 선수(가운데)와 페레이라 선수(오른쪽). 왼쪽에 서 있는 선수는 누구일까?


오른쪽 발목에 아이싱을 하고 나타난 오장은 선수.
경기 끝나면 늘 얼음찜질을 한다며 걱정하지 마라고 했다.


수원 연승의 저력을 조직력에서 보고 있던 송종국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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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에 발견한 피. ㅠㅠ 어느 선수가 흘린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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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력한 신인왕 후보 중 한명인 박현범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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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수원삼성의 질주가 무섭습니다. 지난 주말 수원은 서동현, 박현범의 연속골로 제주를 2-1로 제압했습니다. 이로써 8연승(컵대회 포함) 및 10경기 연속 무패(9승1무)로 새롭게 기록을 갱신했죠. 그간 K리그 최다 연승기록은 2002년 성남이 세운 9연승입니다. 수원이 이 기록을 깰 수 있을지도 자뭇 궁금합니다.



전문가들은 수원의 이같은 연승행진 비결을 '안정된 포백(송종국-곽희주-마토-이정수)'과 '신인(조용태, 박현범) 및 준신인(서동현,신영록)의 활약'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경기장을 찾은 저는 또바른 비결로 '팬들의 열광적인 응원'을 꼽고 싶군요. 차범근 감독도 이를 인지했는지 경기 후 갖은 인터뷰에서 "오늘 우리가 이길 수 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팬들의 열광적인 응원"이라고 밝혔습니다.

수원삼성을 향한 수원 팬들의 뜨거운 사랑을 동영상으로나마 전해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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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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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삼성 차범근 감독님은?
2002아시안게임 당시 마산에서 경기가 열렸어요. 지인들과 경기를 본 뒤 야간버스를 타고 올라오다 중간에 휴게소에 들르게 됐어요. 버스에 불이 켜지는 순간 차범근 감독님이 같은 버스에 타고 계셨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때 차 감독님께서 축구보고 이제 올라가냐며 대단하다고 하셨던 말씀이 생각나요. 감독님은 정말 축구 밖에 모르세요. 또 수원 선수들을 마치 아들 두리처럼 아끼세요. 그런데도 사람들은‘질 때마다 선수 탓만 한다’고 많이들 그러죠. 저는 그게 스타일의 차이라고 생각해요. 오랜 유럽 생활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요? 한번은 “호진이가 저렇게 실수할 애가 아닌데…”라고 하신 말씀이 그만 박호진을 탓하는 기사로 나간 적이 있어요. 그렇지만 사실 감독님 마음은 그게 아니었거든요. 2006년 하반기에 다친 이운재 대신 박호진이 경기에 나섰을 때 감독님은 마치 아이처럼 좋아하며 박호진을 칭찬했어요. 아무래도 그런 상황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오해가 생기는 것 같아요. (신명주/수원 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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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현대 최강희 감독님은?

전 신문사에서 미술기자로 근무 중입니다. 최강희 감독님 캐리커처를 인터넷에 올린 적이 있는데 감독님께서 그걸 보신 뒤 그림 그린 사람을 보고 싶다고 하시더라고요. 감독님과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죠. 한번은 감독님께서 팬들과 만남의 자리를 주최하신 적이 있어요. 그런 식으로 광범위하게 팬들과 소통한 감독이 얼마나 될까요? 그것이야말로 최 감독님이 가진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전진이/전북 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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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상무 이강조 감독님은?
이강조 감독님은 겉으로는 참 무뚝뚝해 보여요. 서포터스와 교류가 많은 것도 아니고요. 그렇지만 티 안 나게 뒤에서 선수들을 챙겨주시는 속정 깊은 감독님이세요. 또 아시다시피 선수 육성 능력도 뛰어나시죠. 그간 소속팀에서 기량을 제대로 선보이지 못한 많은 선수들이 상무입단 후 기회를 잡고 주전으로 성장했잖아요. (김수현/ 광주 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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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시티즌 최윤겸 前 감독님은?
2006년 4월1일 경남전. 대전 선수들이 머리를 짧게 자른 모습으로 경기장에 나타났습니다. 감독님과 코치님 사이에 일어난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언론에서 연일 시끄럽게 떠들 때였죠. 그러나 그보다 더 잊을 수 없는 장면은 따로 있었어요. 그날따라 경기 후 가진 감독 인터뷰가 길어졌고 그 때문에 경기장 조명도 어느새 하나 둘씩 꺼지기 시작했답니다. 그러나 수십 명의 대전 팬들은 끝까지 자리를 지켰습니다. 경기장을 나서는 최윤겸 감독님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였죠. 인터뷰가 끝나자 감독님은 팬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와 한명 한명에게 “죄송합니다”,“죄송합니다”라며 고개 숙여 인사하셨어요. 감독님의 진심이 느껴지던 그 인사를 지금도 잊지 못해요.

최윤겸 감독님은 대전 자체를 바꾼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예전에 대전은 지금보다 선수 진(이관우, 김은중, 김성근 등)이 더 좋았는지도 몰라요. 그런데도 매년 꼴찌를 달리며 “선수가 없다”, “돈이 없다” 등의 핑계를 댔어요. 그러나 최 감독이 오신 뒤론 팀 컬러가 바뀌었어요. 이전에는 후반전에 먼저 골을 먹으면 경기 자체를 포기했어요. 그런데 최 감독님 부임 후에는 무슨 마법을 부리셨는지 선수단에 만연했던 패배주의가 사라졌습니다. 그 당시 대전을 좋아하는 모든 사람들은 최 감독님 팬이었어요. 홈 승률도 높았고요. 그런데 5년 후 사람들은 그분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줬는지조차 잊어버리더군요.

감독님은 대전을 떠나던 그날까지 후원업체들을 찾아다니며 마지막 인사를 드리고 가셨어요. 대전을 후원하는 기업이 등을 돌려버리면 키우려고 데려온 선수들이 공을 못 찰지도 모른다는 이유 때문이었죠. 지난해 데닐손 슈바 브라질리아를 데리고 와 성장시킨 분은 김호 감독님이 아니에요. 사람들은 김호 감독이 대전을 6강으로 이끌었다고 생각하지만 그 절반 이상의 몫은 최 감독님이 하셨어요. 물론 폭력이란 건 정말 나쁜 거잖아요. 그 때문에 실망한 팬들도 많았겠지만 저 같은 마음을 가진 팬들도 많다고 생각해요. 나중에 축구계로 다시 돌아오시면 멋있게 대전을 한번 꺾어주길 바라고 있어요. 그만한 능력을 지닌 감독이란 걸 꼭 보여주시면 좋겠습니다. (김민숙/ 대전 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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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사랑에 빠지면 눈에 보이는 게 없더라’는 우스개 소리, 한번 쯤 들어보신 적 있을 것입니다. 사랑에 빠지면 무모할리만큼 오직 그 사랑의 대상만 생각하기에 나온 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는 꼭 남녀간의 연애사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K-리그 팬들도 자신들이 응원하는 팀을 향한 사랑이 너무 깊고 크기에 종종 무모한 일(?)을 저지르기도 한답니다. 이 모든 이유는 오롯이 ‘내 팀’을 향한 열정이 가득하기에 가능한 일이겠지요. 그럼 K-리그 팬들이 전해주는 이야기, 함께 들어보실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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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대전 경기를 보기 위해서라면
2001FA컵 결승전에서 대전은 김은중의 결승골로 포항을 1-0으로 누르고 그해 FA컵 정상에 올랐다. 그리고 2003년 K리그 클럽을 대표해 AFC챔피언스리그에 출전했다. 2002-03AFC챔피언스리그 동부지역 8강전은 3월10일부터 14일까지 태국에서 열렸다. 첫날 대전이 상하이선화를 꺾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바로‘가야겠다!’였다. 죽을 때까지 대전을 응원한다 하더라도 다시는 AFC챔피언스리그에 못나갈 수도 있지 않은가. 다음날 고향 경남에 내려가 하루 만에 여권을 만든 뒤 태국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당시 태국까지 날아가 대전을 응원했던 팬은 도합 3명. 그 때문에 외려 선수들이 팬들을 신기하게 바라보며 말을 건네는 이상한 풍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뿌듯한 마음 뿐이다. 대전의 AFC챔피언스리그를 현지에서 지켜 본 몇 안 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난 진정 행운아다. (김민숙/대전 팬)

02. 가위에 눌릴 줄이야!
대구에서 원정경기가 열린 어느 토요일이었다. 혼자 4시간 가량 버스를 타고 경기장에 도착, 서포터스와 함께 7시에 열린 야간경기를 봤다. 그런데 경기가 끝난 후 혼자 서울에 올라갈 생각을 하니 막막했다. 아니 무엇보다 심심했다. 그래서 서포터스 원정버스에 합류, 사람들과 이야기꽃을 피우며 전주로 갔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새벽 1시. 그대로 헤어지기 아쉬워 새벽 5시까지 술을 마시며 시간을 보내다 아침 7시 버스를 타고 서울로 돌아왔다. 집에 도착한 시간은 아침 10시. 오후 2시 출근인지라 잠시 눈을 붙이기로 했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여기서 시작했다. 24시간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서울-대구-전주-서울, 이렇게 삼각형을 그리며 전국일주를 하다 보니 몸이 버텨나질 못했던 것이었다. 결국 가위에 눌리고 말았다. 먼발치에서 서늘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던 처녀귀신 때문에 한참동안 고통스러워하다 간신히 회사에 출근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가위가 무섭다고 원정을 포기할 수 있겠는가. 올해는 일찌감치 제주도 원정을 다녀올 계획을 세워 놨다. (전진이/전북 팬)

03. 험난했던 나의 대구원정기
지난해 8월25일 대구전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여자 넷이 뭉쳐 서울서 차를 몰고 대구월드컵경기장까지 갔다. 그런데 그날따라 4만명이 넘는 관중이 경기장을 찾았고 그 때문에 차를 주차시키는데 1시간이나 걸렸다. 경기종료 후엔 주차장을 빠져 나가는 데만 1시간 30분이 소요됐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차가 고속도로에 진입하는 순간 발생했다. 차에 이상징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겨우 휴게소로 이동, 차량서비스를 받았다. 출동한 직원은 이 상태로 서울행은 무리라며 다음날 정비소에서 차를 고치라고 충고했다. 일단 일행 중 급히 서울에 올라가야만 했던 2명은 휴게소에서 운전기사 아저씨와 가격 흥정 끝에 서울행 고속버스에 올라탈 수 있었다. 그리고 남은 사람들은 휴게소 근처 상주로 이동,‘너는 내 운명’에 나옴직한 관광호텔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그날 밤 가지고 간 옷이 없어 우리는 수원 유니폼을 입고 잠이 들었다. 다음날 그대로 집으로 돌아갔을까? 물론 아니다. 바로 기흥으로 이동, 오후 4시부터 시작된 회복훈련을 지켜본 뒤에야 집으로 향했다. 체력이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진심으로 팀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대구원정기였다. (신명주/수원 팬)

04. 우린 이렇게 연애 중
대학 재학시절 처음 만났다. 연애 초기부터 “너만큼 축구가 좋다”고 세뇌시켰다. 그 덕분에 축구로 인한 트러블은 없다. 데이트도 전북 스케줄에 맞춰 이뤄진다. 현재 여자친구는 창원에 살고 있다. 그 때문에 창원에서 전북 경기가 열릴 때면 언제나 내가 움직인다. 반면 홈경기가 열릴 때면 “영화를 보여주겠다”, “맛있는 저녁을 사주겠다” 등등의 이유를 대며 여자친구를 전주로 부른다. 그러나 그때마다 내가 데리고 가는 곳은 언제나 경기장이다. 착한 내 여자친구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지금껏 싫은 소리 한번 안했다. 그래서 늘 고맙다. 참고로 여자친구 자랑을 덧붙이자면 뽀뽀 까보레는 몰라도 제칼로 스테보는 잘 안다. 창원 토박이임에도 말이다. 가끔 보띠는 일본에서 잘하고 있냐며 안부를 궁금해하기도 한다. 역시 전북 팬 여자친구 3년이면 선수 이름쯤은 가뿐히 읊나 보다. (전진이/전북 팬)

05. <작전명령 12호> 그랑블루, 서산에 축구 붐을 조성하라!
2007FA컵 26강전에서 수원과 서산이 만났다. 평일 낮경기였지만 많은 수원 서포터들이 서산까지 내려갔다. 경기 시작 전 사회자의 선수소개에 맞춰 수원 서포터스가‘선수 콜’을 외치자 처음엔 당황했던 사회자도 나중엔 우리를 위해 선수들 이름을 천천히 끊어서 말해줬다. 덕분에 유쾌한 분위기에서 경기가 시작됐다. 전반 20분까지 서산 시민들은 서포팅하는 그랑블루 모습을 그저 신기하고 재밌다는 표정으로 구경했다. 그러나 나중에는“우리 팀을 응원해야지”라며 막대 풍선까지 구해와 서산을 응원하기 시작했다. “안정환 오빠, 멋있어요!”라고 외치던 여고생들도 그의 슈팅이 빗나가자 가슴을 쓸어내리며 좋아했다. 경기는 결국 수원의 승리(4-1)로 끝났지만 그보다 더 좋았던 것은 서산 주민들에게 연고의식을 알려줬다는 사실이다. 내 팀을 향한 애정은 바로 그런 과정 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신명주/수원 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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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너무 너무 추웠던 그날.
인천문학경기장에서.


남들은 컵대회 빅매치 FC서울 vs 수원삼성 경기를 보러 갔지만 난 꿋꿋이 인천Utd vs 경남FC 경기를 보러 갔다. ^^

남들 안 보는 경기 보는게 후엔 다 남는 재산이라는 생각에.



<몸 푸는 경남FC 선수들>



<몸 푸는 인천Utd. 선수들>



<오랜만에 만난 경준 선수 & 기원 선수>


<경남FC의 마지막 선수 교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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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지난 토요일(8일) 2007K리그 우승팀 포항과 2007FA컵 우승팀 전남과의 개막전을 시작으로 일요일(9일)에는 6개 구장에서 K-리그 시작을 알리는 휘슬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개막전 집계 자료에 따르면 총 172,142명의 관중이 입장, 역대 개막전 최다 관중 기록을 수립했다고 합니다. 기존 기록은 2003년 143,981명이었네요.



제가 찾은 수원월드컵경기장에는 총 30,132명의 관중이 찾았습니다. 2번째로 많은 관중들이 경기장을 방문했죠. 참고로 1위는 부산-전북전(32,725명)입니다. 황선홍 감독의 데뷔전이자 안정환(부산)과 조재진(전북)과의 만남, 그리고 빅뱅의 공연으로 여러모로 이목을 끌었는데 역시나 많은 관중이 입장했네요.

“선수들이 경기장을 찾은 팬들에게 좋은 선물을 드렸습니다. 경기 시작 전 많은 관중이 왔으니 꼭 이겨야한다고 강조했는데 만족스러운 결과를 낳아 기쁩니다.” 에두의 연속골로 2-0 승리를 거둔 차범근 감독의 소감입니다.



그러나 팬들 역시 선수들에게 멋진 선물을 안겨줬죠. 수원 서포터스 그랑블루는 이번 개막전에도 멋진 카드섹션을 보여줬습니다. 별 4개가 반짝이더니 이내 푸른제국이라는 글자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아주 짧은 시간동안 진행된 카드섹션을 위해 얼마나 많은 준비를 했을까요? 팀을 향한 넘치는 사랑이 없었다면 불가능했겠죠. 선수들 역시 그 마음에 보답하고자 열심히 뛰었고 그 덕분에 수원은 개막전에서 2-0으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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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광판 아래까지 올라가서 경기를 보던 서포터도 있더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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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서포터스의 '수원사랑' 어떤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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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Restart 2008 
예부터 우리나라는 숫자 ‘3’을 특별히 여겼다. 단군신화 속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숫자도 바로 3이다. 3은 1과 2를 더한 숫자. 즉 양을 의미하는 1과 음을 뜻하는 2가 합쳐진, ‘음과 양을 하나로 묶는다’는 속뜻을 지닌 완전한 숫자다. 하늘 땅 바람, 천 지 인, 탄생 삶 죽음, 처음 중간 끝, 과거 현재 미래 등 3은 모든 이치와 접목시켜 설명할 수 있다. 이는 K리그에도 해당된다. 보통 데뷔 첫해 뛰어난 플레이를 선보였던 선수일지라도 다음해에는 그보다 못한 모습을 보일 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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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기훈

그래서 나온 말이 ‘2년차 징크스’ 아니겠는가. 2006K리그에는 염기훈 장남석 배기종 3명의 선수들이 신인왕 경쟁에 가세, 아름다운 승부를 펼쳤다. 그러나 이들 모두 이듬해에는 첫해만 못한 모습으로 징크스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렇지만 2008년 데뷔 3년차에 접어드는 해. 완전함을 의미하는 숫자 3이 이들에게는 어떤 결과를 가져다줄까. 잠시 시계를 뒤로 돌려 3년 전 모습으로 돌아가 보자. 그뒤에 판단해도 늦지 않는다.


대학시절 그들은
 
1983년 생 대학선수들에게 2005년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해였다. 대학 4학년. 어느덧 졸업반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그해 12월에는 드래프트도 열릴 예정이었다. 이들은 드래프트 부활 ‘첫 세대’이자 자유계약 사이에 ‘낀 세대’였다. 프로축구연맹에서는 이 같은 선수들의 입장을 고려, 그해까지만 자유계약을 허락했다. 그러나 프로팀과 계약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신의 실력을 입증해야만 했다. 대학선수들 대부분은 청소년대표 경력이 없었다. 결국 이들이 자신의 기량을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은 전국대회를 통해서만 이뤄질 수 있었다. 대회에서 좋은 모습을 선보이면 대학선발에 뽑히는 길도 열렸다. 다행히 2005년에는 큰 대회가 많이 열렸다. 3월에는 한일대학선발정기전인 덴소컵, 8월에는 대학선수들의 축제 터키유니버시아드대회가 열릴 예정이었다. 11월 마카오에서 열리는 동아시아대회에선 대학선수들 위주로 나간다는 소식도 들렸다. 때문에 일찍감치 그 대회를 목표 삼아 운동하는 선수들도 있었다. 물론 장남석도 예외는 아니었다. 지난 3년간 쓴 눈물을 2번이나 삼켜야했던 그에게 2005년은 여느 해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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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남석

2002년 중앙대에 입학했던 장남석은 신입생임에도 불구하고 실력을 입증 받아 주전으로 뛰기 시작했다. 그해 중앙대축구부와 U-19대표팀간 연습경기가 자주 열렸다. 그때마다 장남석의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박성화 감독은 이듬해 봄 훈련멤버로 그를 발탁했다. 그러나 문제는 장남석의 몸상태에 있었다. 마침 중앙대축구부원들에게는 10일간의 휴가가 주어졌고 그는 오랜만에 받은 휴가를 즐기던 중이었다. 휴가 9일 째 되던 날 소집을 받고 파주에 갔으니 그 상태로 연습게임을 제대로 뛸 리 만무했다. 결국 아랍메이레이트에서 열렸던 U-20월드컵은 동기 김치우만 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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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기종

2004년 8월에는 대학선발선수들이 주축이 돼 베트남에서 열린 LG컵2004축구대회에 출전했다. 그 대회를 준비하기 위해 대학선발선수들은 보름간 영국전지훈련까지 다녀왔다. 그러나 허리부상 때문에 장남석은 가지 못했다. 당시 주축이 됐던 대학선발선수들은 염기훈(울산) 배기종(수원) 최효진(포항) 조용형(제주) 권순태(전북) 김민오(울산) 이현진(수원) 김신영(사간토스)등이었다. 염기훈과 배기종은 이때 처음 만났다. 당시 대학선발팀 부동의 스리톱은 염기훈 최효진 김신영이었다. 배기종은 미드필더 요원으로 주로 교체로 출전했다. 배기종이 갖고 있던 슈퍼 조커로서의 능력은 이때도 발휘됐다. 베트남국가대표팀과의 결승전에서 한국대학선발팀은 3-4로 뒤지고 있었다. 어느새 전광판 시계는 후반4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때 배기종이 PK를 얻어냈고 이를 염기훈이 성공시켰다. 연장전에서 터진 역전골로 우승은 한국대학선발팀에게 돌아갔다.

2005년 1월 대학선발 훈련이 재개됐다. 3월에 열릴 한일대학친선경기 덴소컵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염기훈 장남석 배기종도 발탁됐다. 세 선수가 처음 만나는 순간이었다. 재밌는 사실은 이들이 대학선발팀의 공격을 책임졌다는 사실이다. 장남석을 최전방에 놓고 좌우날개에 염기훈 배기종을 세웠다. 보름 간의 훈련 후 다시 팀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배기종은 동계훈련 막바지에 종아리 근육이 파열되는 부상을 입었다. 대학선발과의 인연은 그렇게 끝났다.


2005전국대학축구대회 4강전에서 호남대와 중앙대가 만났다. 호남대 주장 염기훈과 중앙대 주장 장남석과의 자존심 대결이 볼만했다. 그러나 장남석은 8강전에서 발목이 부러지는 부상을 입고 말았다. 피로골절이었다. 장남석은 결국 2008유니버시아드대회에서 나가지 못했다. 이렇듯 염기훈 장남석 배기종은 함께 대회를 준비하며 시즌을 시작했지만 맺음은 염기훈으로 끝났다. 염기훈은 전북과 우선계약도 체결했다. 물론 피로골절로 시즌을 접은 장남석에게도 희소식이 날아왔다. 박종환 감독의 눈에 들어 대구와 계약을 맺게 된 것이다. 그러나 배기종만은 상황이 달랐다. 부상 회복 후 2005동아시아대회에서 나갔지만 그는 여전히 벤치멤버였다. 그해 12월20일에는 2006신인선수 드래프트가 열렸다. 그러나 8라운드가 진행될 때까지 배기종을 뽑은 팀은 아무데도 없었다. 결국 배기종은 번외지명으로 간신히 대전행 마지막 기차에 올라탔다.


신인왕을 잡아라
2005덴소컵은 12월4일 의정부종합운동장에서 열렸다. K리그 챔피언결정전 2차전이 열린 날이었다. 덴소컵에 참여했던 선수들은 자연스레 K리그를 화제로 삼았다. 가장 큰 관심사는 ‘2006신인왕은 누가 될까?’였다. 그들이 내린 결론은 염기훈이었다. 선수들 사이에서 ‘대학축구는 염기훈으로 통한다’는 이야기가 농담처럼 떠돌던 때였다. 그러나 대학축구 최강자로 인정받던 염기훈에게도 K리그는 높고 어려운 무대였다. 염기훈은 동계훈련 첫날부터 최강희 감독에게 호되게 깨졌다. 전북은 브라질전훈에서 4-4-2 포메이션을 시험가동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가 새로 맡은 보직은 왼쪽 미드필더. 당시 염기훈은 문전 앞에서 어슬렁거리다 공이 올 때만 뛰는 습관이 몸에 배있었다. 잘나가는 대학 스트라이커들이 으레 갖고 있는 버릇 중 하나였다. 훈련 때마다 최 감독은 염기훈의 수비 문제를 지적했다. 그러나 불호령 뒤에는 “수비를 제대로 할 줄 알아야 진짜 공격수”라는 귀중한 가르침이 있었다. 그는 곧 ‘공격수는 공격만 잘하면 된다’는 생각이 잘못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비디오분석관에서 부탁, 자신의 훈련모습이 녹화된 비디오를 구한 뒤 단점을 파악하며 연구했다. 결국 노력은 결과로 보답했다. 3월4일 열린 2006K리그 슈퍼컵 울산전에 선발출장하며 신인선수들 중 가장 먼저 데뷔전을 치렀다. 장남석도 곧 K리그에 데뷔했다. 3월12일 홈에서 열린 울산전에 후반 시작과 동시에 투입되며 신고식을 치렀다. 배기종은 가장 늦은 3월15일에 데뷔전을 치렀다. 반면 데뷔골은 가장 빨랐다. 그는 후반19분 교체투입 8분만에 이관우의 프리킥을 헤딩골로 연결,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시민구단 연습생이 데뷔전에서 데뷔골을 기록했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 뉴스였다.

데뷔골은 염기훈이 가장 늦었다. 3월29일 대전전에서다. 전반7분만에 선제골을 넣었다. “데뷔골이 결승골로 끝날 거라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배기종 때문에 물거품이 됐다.” 이번에도 배기종은 머리로 끝냈다. 후반32분 헤딩 동점골을 성공시켰다. 염기훈과 배기종의 골로 양 팀의 승부는 무승부로 끝났다. 배기종에게 ‘슈퍼서브’로 등극한 이유를 묻자 “경기가 안 풀리면 무조건 들어가니 항상 몸을 만들어라는 선배들의 조언 덕분”이라 말했다. 4월23일 대전전을 앞둔 장남석의 마음은 비장했다. 경기 전날 출전선수 명단에 배기종의 이름이 올랐기 때문이다. 벌써 배기종은 4골1도움을 기록하며 신인왕 후보로 거론되고 있었다. 반면 장남석은 1골1도움으로 이에 못 미친 상태였다. 이들이 그라운드에서 부딪힌 시간은 약 11분에 불과하다. 배기종은 후반10분 교체 in, 장남석은 후반21분 교체 out이었기 때문이다. 경기는 1-1 무승부로 끝났다. 장남석은 전반17분 터뜨린 선제골로 5경기 무득점의 침묵을 깰 수 있었다. 염기훈과 장남석은 7월19일 대구월드컵경기장에서 만났다. 빗속에서 진행된 이날 경기는 3-3이라는 스코어에서 알 수 있듯 치열했다. 대구가 1-2로 지고 있던 전반37분 장남석의 동점골이 터졌다. 그러나 염기훈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후반33분 최철순의 도움으로 염기훈은 평소 자신있던 왼발로 경기를 원점으로 되돌렸다. 경기 종료 후 수비수 최성환은 장남석에게 다가가 “염기훈에게 포인트를 줘서 미안하다”며 “대전전에서는 배기종에게 골을 내주지 않겠다”고 말했다. 어느새 염기훈-장남석-배기종 간의 신인왕 경쟁은 그들만의 경쟁이 아닌 듯 했다. 최윤겸 감독은 사석에서 기자들에게 “대전에서 신인왕이 나왔으면 좋겠다”며 배기종이 신인왕을 타기 바라는 마음을 종종 내비치곤 했다. 대구선수들은 “두자리 수 득점이라면 신인왕 수상이 가능할 것”이라며 “앞으로 (장)남석에게 무조건 패스하자”는 이야기를 종종 했다. 그렇지만 신인왕은 염기훈에게 돌아갔다. AFC챔피언스리그 우승의 일등공신, 국가대표팀 발탁, 2006아시안게임 활약 등이 이유였다. “9월23일 전북전 때 베어벡 감독이 경기장에 왔다. 다음날 오장은(3골)과 염기훈(1골)이 아시안게임 멤버로 뽑혔다. 그날 조금만 더 잘했다면 다른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까? 지금도 후회로 남는 순간이다.” 36경기에 출장하며 9골4도움을 기록한 장남석에게는 두고 두고 아쉬운 대목이다. 2006시즌 염기훈은 31경기 7골5도움, 배기종은 7골3도움을 기록했다.


2년차 징크스, 그리고 2008년
장남석과 배기종에게 2007년 겨울은 시련의 시기였다. 신인왕 하나만 바라보며 1년간 뛰었지만 물거품으로 끝났다. 시즌종료 후 장남석은 수술대에 올랐다. 허리 디스크 수술을 받기 위해서였다. 대학시절 내내 그를 괴롭히던 고질병이었다. 장남석은 프로데뷔 후에도 허리통증 때문에 자주 훈련을 쉴 수밖에 없었다. 그 상황에서 게임을 뛸 수 있었던 까닭은 그의 재능을 높이 평가한 박종환 감독의 배려 덕분이었다. 한편 배기종은 두문불출하고 집에만 있었다. 임의탈퇴 선수로 공시됐기 때문이다. 2007년 10월 배기종은 느닷없이 트레이드 파문에 휘말리며 경기에 나서지 못했다. 계약기간 중 구단과 상의없이 이적을 목적으로 다른 팀과 접촉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번외지명인 선수의 경우 계약기간은 1년. 이후엔 이적료 없이 타 구단 입단이 가능하다. 여러 팀에서 제의가 올 법도 했다. 모든 상황을 눈치 챈 대전은 계약기간이 끝나기 전 수원삼성과 2대1 트레이드를 진행했다. 배기종을 보내는 대신 조재민과 황규환을 받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배기종 측은 “선수 동의 없는 계약은 받아들일 수 없다”며 항의했고 결국 괘씸죄로 임의탈퇴 되고 말았다. 다행히 2007년 시즌을 위한 동계훈련이 시작될 즈음 배기종은 계약서에 사인하며 다시 복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장남석은 재활 때문에 동계훈련에 참여하지 못했다. 장남석에게는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대구는 변병주 감독으로 수장을 교체하며 새 시즌을 준비했기 때문이다. “동계훈련에 참여하지 못했기 때문에 시즌 초반부터 기용할 수 없었다.” 장남석의 출장횟수가 저조한 이유에 대한 변병주 감독의 답이다. ‘16경기 2골2도움’이라는 기록보다 더 나쁜 것은 출장시간에 있다. 그중 풀타임 출장은 4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는 이근호 루이지뉴 에닝요와의 경쟁싸움에 밀렸다는 것을 뜻한다. 장남석은 이근호가 대표팀 소집 때문에 팀을 비웠을 때만 풀타임으로 출전할 수 있었다. 그는 “2006년에는 용병들이 못했기 때문에 내게 기회가 많이 왔다. 인정하기 싫지만 올해는 대체요원이었다고 생각한다”라며 담담히 인정했다. 

배기종 역시 호화군단으로 이뤄진 수원에서 주전자리를 꿰차지 못했다. 배기종은 개막전이었던 대전전에서 후반12분 교체투입됐지만 아크 오른쪽에서 프리킥을 얻어내며 수원이 동점골을 얻는데 견인차 역할을 했다. 차범근 감독에게 합격점을 받은 배기종은 이후 3경기 연속 선발로 풀타임을 소화했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약한 체력 탓에 경기 도중 근육이 올라오는 일이 잦았다. 드리블이 좋아 측면에서 빠르게 치고 나갈 수 있었지만 골 결정력은 예전만 못했다. 지난 해 11개의 슈팅 중 유효슈팅은 3개에 불과하다. 슈팅 대비 유효슈팅은 0.27로 같은 포지션에서 뛰고 있는 김대의(0.5) 이현진(0.67) 남궁웅(0.40)보다 낮다. 그런 상황 속에서 9월 초 2군경기 중 인대가 파열되는 부상을 입고 말았다. 진단결과는 2개월 안정. 2007시즌은 ‘17경기출장 2도움’이라는 기록으로 막을 내렸다.

반면 염기훈은 전반기 동안 5골 3도움을 올리며 2년차 징크스와는 상관없는 플레이를 선보였다. 대표팀 발탁 이후 자신감 있는 플레이는 팀에 보탬이 됐고 최강희 감독의 칭찬도 이어졌다. 그러나 문제는 아시안컵 기간 중 발생했다. 아시안컵이 진행되는 동안 염기훈 측은 ‘이적료 15억원 이상이면 이적할 수 있다’는 바이아웃 조항을 들어 이적을 요구했고 즉시 전력이 필요했던 전북은 정경호 임유환과 염기훈을 맞트레이드했다. 그러나 염기훈은 자신이 먼저 이적을 제의한 게 아니라며 구단에 배신감을 느낀다는 말을 남겼다. 설상가상 격으로 일본과의 아시안컵 3‧4위전 도중 오른쪽 새끼발가락이 부러지는 부상을 당하고 말았다. 원인은 피로골절. 선수 스스로는 원치 않는 울산으로의 이적과 이에 따른 오해, 그리고 부상. 연이은 악재로 염기훈 역시 어쩔 수 없는 ‘2년차 징크스’에 희생양이라는 이야기가 오갔다. “내 입으로 시즌 아웃이라 이야기한 적 없다. 복귀할 것이다.” 염기훈은 정규리그 마지막 경기였던 경남전에 교체출전, 복귀신고골을 터뜨렸다. 이후 울산이 PO에서 포항에서 0-1로 패하기 전까지 3경기 연속 출전하며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 2007년 염기훈이 세운 기록은 21경기 6골3도움. 데뷔 첫해 세운 31경기 7골5도움과 비교했을 때 크게 떨어지지 않는 성적이다.   

2008년은 염기훈 장남석 배기종 모두에게 더 이상 가능성이 아닌 진정한 실력을 보여줘야만 하는 해이다. ‘프로데뷔 3년’은 더 이상 신인이 아닌 팀의 중심으로 녹아들어가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물론 쉽지만은 않다. 전지훈련 기간 동안 배기종은 측면공격수에서 중앙공격수로 보직을 바꿨다. 수비부담도 늘어났고 경쟁해야만할 선수들도 늘어났다. 그동안 잃었던 골감각도 어서 빨리 회복해야만 한다. 장남석 역시 마찬가지다. 후반 들어서면 체력이 저하되는 모습을 자주 보였는데 3년차에 접어든 만큼 체력안배를 적절히 할 줄 아는 능력을 키워야할 것이다. 아울러 더 이상 용병들에게 밀려 교체투입용 선수로 전락해서는 안 될 것이다. 염기훈 또한 마냥 마음을 놓을 수 없다. 브라질리아 이상호 등과의 경쟁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스크린플레이에 능하고 왼발프리킥이라는 장점이 있지만 그것만으로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생각은 오산이다. 데뷔 초 염기훈은 “K리그는 전쟁이다. 못하면 밀릴 수밖에 없다. 싸우다 다칠 수도 있다. 힘들고 괴롭다고 그만둘 수도 없다. 항상 준비하며 기다려야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 말처럼 전쟁같은 K리그 현장에서 3년 차 K리거인 그들은 승리의 역사를 과연 쓸 수 있을까. 답은 바로 2008K리그에 있다. 아직은 유보지만 시즌이 끝나면 그 해답을 모두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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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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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1일 저녁 7시 수원월드컵경기장. 수원은 전반 16분 터진 하태균 선수의 선제골을 잘 지켜내 전남에게 1-0 승리를 거뒀습니다. 이날 경기로 5연승을 거둔 수원은 2위에서 1위로 올라가며 성남을 승점 2점 차로 따돌렸지요.


 
경기 종료 후 라커룸으로 들어가던 선수들 틈에서 김치우 선수를 발견했습니다. 다가가서 괜찮냐며 인사를 할까 잠시 고민했죠, 하지만 이럴 땐 그저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반 16분 김치우 선수는 문전 앞에서 에두 선수가 올린 공을 헤딩으로 걷어냈습니다. 그러나 그 공은 참으로 무심하게도 페널티에어리어 왼쪽에 있던 하태균 선수 앞으로 떨어지고 말았죠. 하태균 선수는 침착하게 오른발로 발리 슈팅을 때렸고 결국 그 골은 결승골이 됐습니다. 본의 아니게 어시스트라도 한 것처럼 된 그 상황이 그에겐 편하지 않았겠죠.


가만히 그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데 김치우 선수가 먼저 고개 숙이며 인사했습니다. 땀에 젖은 머리를 귀 뒤로 넘기던 중 저를 발견했나봅니다. 그러더니 오른손을 내밀며 제게 악수를 청하더군요. 그 순간, 잠시 잊고 있었던 2년 전 겨울이 생각났습니다. 맞아요. 그때도 그는 제게 그랬죠.


2005년 12월 4일 일요일 울산문수월드컵경기장. 그날은 챔피언결정전 2차전이 열린 날이었습니다. 당시 인천은 홈에서 열린 1차전에서 1-5로 패하고 말았습니다. 스페인에서 돌아와 후기리그부터 합류했던 이천수 선수는 그 경기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했고 그해 K-리그 M.V.P를 수상하기도 했죠. 물론 2차전에서 인천은 절치부심하며 라돈치치 선수와 임중용 선수의 연속골을 앞세워 2-1로 승리를 거뒀습니다. 그러나 골 득실차로 우승컵은 울산에게 돌아갔습니다.


경기 종료 후 인천 선수들은 눈물을 흘리며 그라운드에 누웠습니다. 노장 김학철 선수는 엉엉 소리 내며 울었고 최효진 선수 역시 좀처럼 눈물을 거두지 못했죠. 장외룡 감독은 괜찮다며 최효진 선수의 어깨를 감싸며 달랬지만 그는 계속 눈물을 흘렸습니다. 인천의 젊은 피였던 이요한 선수 역시 예외는 아니었죠. 시상식대 위에서도 그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힘들게 눈물을 참고 있었습니다.


기쁨과 슬픔이 혼란스럽게 얽힌 그 현장에서 김치우 선수를 만났습니다. 그라운드 위에서는 수많은 기자들이 취재 경쟁 중이었고 저 역시 그런 경험은 처음이라 다소 혼란스러운 상태였습니다. 김치우 선수 역시 그랬겠죠. 더구나 바로 앞에서 우승이라는 꿈을 놓치고 말았으니 경황조차 없었겠죠. 그러나 김치우 선수는 그 와중에도 고개 숙여 인사하며 제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경기 내내 끼고 있던 장갑까지 벗으면서요.


다음 해 겨울 저는 그를 다시 만났습니다. 2006 홍명보 자선축구 전야제 행사가 열렸던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이었죠. 당시 행사장 앞에는 선수들의 모습을 보기 위해 꽤 많은 축구 선수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화장실이 행사장 밖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화장실에 다녀올 때마다 선수들은 팬들에게 둘러싸여 행사장에 쉽게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김치우 선수 역시 화장실에 다녀온 뒤 입구 앞에서부터 팬들에게 잡히고 말았죠. 그러나 그는 여느 선수들과는 달랐습니다. 황급히 사라지던 다른 선수들과는 달리 그는 자신에게 종이를 내민 팬들에게 일일이 사인을 해줬습니다. “사진 찍게 웃어주세요”라던 팬들의 요청도 들어줬고요.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행사장에 다시 돌아온 그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그 많은 팬들의 사인을 다 해줬어요? 대단하세요.” 그러나 그는 오히려 제게 반문했습니다. “어떻게 저를 좋아하는 팬들을 뒤로 한 채 그냥 갈 수 있겠어요?”


그러고 보면 그는 종종 저의 우문에 현답을 내놓으며 저를 놀라게 만들곤 했습니다. 언젠가 “축구가 어떤 존재냐”는 질문에도 그는 이렇게나 멋진 대답을 해줬답니다. “축구는 저에게 학교 같은 존재죠. 축구를 통해 모든 걸 배웠으니까요. 그러면서 어엿한 한 사람으로 자랄 수 있었어요. 열여섯 이후로 그랬던 것 같아요. 그때 엄마가 돌아가셨거든요. 세상을 다 잃은 것만 같았죠. 그렇지만 그 순간에도 내 옆에 있었던 건 축구공이었어요. 그래요.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건 바로 축구에요. 그리고 이젠 그 속에서 행복을 찾아요. 네, 지금은 행복합니다.”


그리고 지난 해 올스타전에 처음 뽑혔을 당시에도 그랬습니다. “올스타전에 뽑혔다고 하니까 주위에서 누가 가장 기뻐하던가요?”라는 물음에 그는 “할아버지, 할머니요”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의외라며 “부모님은요?”라고 다시 물어봤습니다.


 
“엄마는 제가 중학교 3학년 때 돌아가셨어요. 암이었어요.”  예상 밖의 대답에 깜짝 놀라며 무슨 말로 그를 위로해줘야하나 잠시 고민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괜찮다며 자신이 살아온 지난날들에 대해 숨김없이, 그리고 담담히 말해줬습니다.


“처음 축구를 시작했을 때 엄마가 많이 반대하셨어요. 어렸을 때 천식 때문에 몸이 약했거든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2년 동안이나 병원에 다녀야만 했어요. 항상 엄마가 돌봐주시며 신경 많이 써주셨죠. 중학교 입학 전에 비로소 천식이 나았어요. 그러면서 뛸 수 있게 됐죠. 뛸 때마다 숨이 찬다는 그 느낌이 정말로 좋다는 사실도 알게 됐어요. 요즘도 C.A라고 하나요? 5학년 때 특별활동을 해야 했는데 뛰는 게 좋아서 축구부에 들어갔어요. 정식 축구부는 아니었지만 마침 담당하셨던 선생님이 축구선수 출신이셨어요. 선생님께서 ‘풍생중학교에서 축구부원을 모집한다고 하니 한번 지원해봐라. 내가 볼 땐 잘될 것 같다’ 고 말씀하셨어요. 그러면서 제 축구인생도 시작된 거죠. 물론 엄마는 계속 반대하셨어요. 그 때문에 ‘만약 몸이 힘들면 그만해야겠다’ 고 생각했는데, 저도 제가 이렇게 끝까지 할 줄은 몰랐어요. 프로선수가 될 줄 몰랐고, 올스타전에 뽑히게 될 줄도 몰랐고요. 할머니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고요. 하늘나라에서 엄마가가 얼마나 좋아하겠냐면서요. 사실 엄마가 살아계실 때만해도 저는 게임 못 뛰는 선수였거든요. 어렵게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거예요. 엄마도 그때는 모르셨겠죠. 제가 이렇게 될 줄은요.”


“보통 게임 뛰기 전에 국민의례를 하잖아요. 저는 그때마다 엄마를 생각하며 기도해요. 게임이 끝나면 다시 한 번 감사기도 드려요. 엄마 덕분에 무사히 게임 마쳤다고. 엄마는 지금의 저를 만들어주신 분이자 지금도 저를 이끌어주시는 분이에요. 이제는 만날 수 없는 사람이 됐지만 제 마음 속에는 항상 엄마가 계시니까 같이 뛰는 거라고 생각해요. 엄마도 보실 거예요. 제가 이렇게 열심히 뛰는 모습 말이에요. 그래서 아쉽다는 생각은 없어요. 오히려 기분 좋을 뿐이에요. 지금도 날 지켜보고 계시니까요.”


그는 굳이 그 시간들을 잊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부정하려 하지도 않았고요. 그때의 시간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김치우도 없는 것이니까요. 김치우 선수는 무엇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굳이 감추려 하지 않고 기억하고 있는 그대로 제게 들려줬죠.


그의 마지막 말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어렸을 때는 진짜로 제가 제일 불쌍한 줄 알았어요. 그런데 힘들 때만 잘 버티면 또 괜찮잖아요. 이 세상에는 더 어렵고 힘든 사람들이 얼마나 많던가요. 저는 진짜 축구 열심히 해서 돈 많이 벌거에요. 그래서 힘들게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있는 아이들을 많이 도와주고 싶어요.”


그의 지난 날을 알고 있는 제게 그 모습은 ‘희망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축구 선수가 되고 싶다’던 꿈이 없었다면 그는 현실에 절망하며 그냥 그렇게 살았을지도 모르죠. 꿈꾸던 소년이 이제는 다른 누구가에게 꿈같은 존재가 됐다는 사실이 저에겐 마치 동화 같은 이야기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죠. '그리하여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결론에 이르기까지 주인공은 얼마나 많은 어려움 속에 놓여 있어야만 하는지요.
 


그리고 지금 여러분께 들려주려는 이 이야기에는 김치우 선수가 보낸 스물 다섯 해 인생 모두가 담겨져 있습니다.

“엄마 냄새 생각나요?” 누군가 그렇게 물었을 때 나는 잠시 침묵해야만 했습니다. 물론 엄마 생각은 나요. “치우야”하던, 5월의 남해를 닮은 그 목소리와 그때마다 눈초리에 지던 잔주름까지요. 하지만 엄마 냄새는 자꾸 잊혀지는 것만 같아요. 엄마가 보이지 않을 때면 늘 불안해하며 울던 나였는데 말이에요. 꼭 엄마 손을 잡고 있어야 마음이 놓이곤 했는데 말이에요.


그날, 엄마가 마지막 숨을 내쉬었던 그 밤, 모두가 엄마를 잊는다 해도 나, 치우만은 영원히 기억하겠다고 다짐했는데. 그렇게 내 삶의 시간이 멈추는 날까지 잊지 않겠다고 했는데. 시간은 참 야속하게도 내게 망각을 선물하고 말았네요. 그래서 요즘은 엄마에게 고맙다는 말 대신 미안하다는 말을 더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 시절이 생각나요. 그때 난 천식과 싸워야했죠. 그래서 체육시간에도 늘 스탠드에 앉아 뛰어노는 친구들을 구경해야만 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기적처럼 달릴 수 있게 됐어요. 다리가 불편했던 검프가 보호 장비 없이 달렸던 것처럼 말이에요. 네, 맞아요. 천식이 드디어 나았거든요. 그때 달린다는 기분을 태어나서 처음 느낄 수 있었어요. ‘숨이 찬다는 것이 이런 것이었구나’하는 생각도 처음 들었고요. 쿵쿵쿵 뛰는 내 심장이 나는 그저 좋았어요.


이렇게 뛰는 즐거움은 나를 곧 축구의 세계로 인도했죠. 물론 키도 작고 체력도 약했던 나에게 축구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체력훈련 때마다 ‘헉헉’대며 뒤쳐질 수밖에 없었죠. 합숙생활 중에는 선배들에게 이유 없이 맞을 때도 많았습니다. 그때마다 내 머릿속에는 엄마가 보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어요.


당시 풍생중학교 뒤편에는 1,000개의 계단이 있었습니다. 엄마가 보고 싶을 때면 모두가 잠든 새벽, 조용히 일어나 그곳에 갔습니다. 계단 끝에 올라가면 저 멀리 도시의 불빛들이 어른거렸습니다. 엄마가 계신 분당이 있는 곳이었죠. 그때마다 나는 엄마를 생각하며 울었습니다.


중학교 입학할 당시 엄마는 많이 아팠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당시 엄마는 위암 말기였다고 합니다. 거동도 쉽게 못할 정도로 몸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시합이 있는 날이면 늘 경기장에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엄마는 한 번도, 단 한 번도 내가 뛰는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어떤 날은 대기 명단에도 이름을 올리지 못해 벤치에 앉아 있던 내 모습만 보셨죠.


지금도 할머니는 그 점을 가장 안타까워하십니다. “애미가 살아있었다면 치우 네가 국가대표가 돼서 뛰는 모습을 봤을텐데… 그랬다면 얼마나 좋았겠니”라면서요.


생각해보면 중학교 1학년 당시 나와 친구들은 참 많이도 맞았습니다. 주로 선배들에게 아무 이유 없이 맞을 때가 많았죠. 기합 역시 하루가 멀다 하고 이어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 그랬습니다. “이렇게 있을 순 없어. 우리 도망가자!” 이야기 도중 한 친구가 말했습니다. “우리 집에 가자. 아빠한테 다 이야기해놨거든? 너희들 우리 집에서 먹여주고 재워줄게.” 그곳이 어디였는지 이젠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 다만 시골이었다는 사실만은 기억납니다. 서울에서 버스로 한참을 가야만 했거든요.


그러나 버스에서 내린 우리를 반겨준 사람들은 제복을 입은 경찰들이었습니다. 당시 마을 이장이었던 친구 아버지는 우리를 잡기 위해 이미 동네 사람들을 총출동시킨 상태였습니다. “저 놈들 잡아라!”하는 소리에 우리는 일제히 “튀어!”라고 소리치며 도망갔습니다.


15명의 친구들은 어느새 뿔뿔이 흩어졌죠. 그런데 다시 서울에 가기 위해선 다시 읍내로 가야했습니다. 지나가던 용달차를 얻어 탄 덕분에 다행히 읍까지는 쉽게 갈 수 있었죠. 하지만 경찰들은 이미 읍내에 쫙 깔린 상태였습니다.


“아, 어떡하지? 우리?” “일단 숨어있자. 좀 잠잠해지면 다시 나가던지 하자.” 친구와 함께 어느 초등학교 풀숲에 들어가 숨었습니다. 한 30분가량 있었을까요.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뒤통수를 아주 세게 쳤습니다. 그렇습니다. 경찰이었습니다. 그들은 나와 친구 손에 수갑을 채운 뒤 강제로 경찰차에 태웠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왜 병원에 있던 엄마 생각이 났던 것일까요. 엄마는, 세상에서 하나 뿐인 우리 엄마는, 이제 겨울날 볼 수 있는 나무들처럼 앙상해졌어요, 너무 작아져 버렸죠. 그래서 이젠 엄마 가슴에 안길 수 없게 됐어요. 엄마가 너무 작아져서요. 아니, 엄마에겐 이제 나를 안아줄 힘조차 없어요.


엄마가 생각났습니다. 엄마가 보고 싶었습니다. 엄마에게 미안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울었습니다. 경찰차 사이렌 소리보다 더 크게 꺽꺽거리며 울었습니다. 앞자리에 앉아 있던 경찰 아저씨는 그런 나를 보며 “이놈아, 그렇게 걱정할거였으면 왜 도망가냐? 감옥 안가니까 고마 울어라!”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감옥에 가도 좋았어요. 엄마만 살 수 있다면. 정말로 나는 괜찮았어요.


중학교 3학년 어느 날이었습니다. 엄마 상태가 많이 안 좋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새벽 운동을 하고 있던 난 아침도 거른 채 바로 병원으로 달려갔죠.


엄마는 깊은 잠에 빠진 상태였습니다. 독사과를 삼킨 백설공주 같은 모습으로요. 하지만 백설공주 같은 엄마에겐 왕자님 따윈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엄마를 구해줄 수 있는 사람은 세상 그 어느 곳에도 없었으니까요. 그때 나는 너무 어렸습니다. 어린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그저 엄마 손을 잡아주는 일 뿐이었습니다. 단지 그것 뿐이었습니다.


문득 전날 밤 엄마가 내게 했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아가, 마지막으로 네 아빠를 꼭 한번 보고 싶구나, 라던 그 말씀이요.


 
“아빠, 엄마가 많이 아파요. 아빠가 보고 싶다고 하는데 병원 좀 와주세요.” “싫다.” “아빠,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고 하잖아요. 제발 한 번만요. 네? 한번만 병원에 와주세요. 엄마가 아빠 보고 싶다고 하잖아요. 피 토하면서 말했어요. 세숫대야 위로 피를 토하면서도 아빠가 보고 싶다 말했어요. 그러니까 제발요. 아빠, 제발 부탁이에요.” “싫다. 들어가서 운동해라.”


10년 전에도 강남역 지하상가에는 사람들이 참 많았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 속에서 나는 혼자였고 눈물을 쏟으며 병원으로 되돌아갔던 기억이 납니다.


“엄마, 아빠가 바쁘대. 그래서 당장은 시간 내기가 어렵대. 그렇지만 일 덜 바빠지면 꼭 한번 병원 찾아온다고 그랬어. 좀만 기다리면 아빠 볼 수 있을 거야. 그때까지만 참자.”


엄마의 대답은 눈물이었습니다. 나의 거짓말을 이미 눈치 챘는지도 모르죠. 그래서 그렇게 흐느꼈는지도 모르죠.


“왜 울어? 아빠가 그렇게 보고 싶어서? 아빠 같은 사람이 뭐가 보고 싶어? 엄마는 정말 바보야! 엄마 미워!”


나는 마음에도 없는 말들을 그렇게 한참동안 내뱉었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생은 길지 않았기 때문에 후회의 순간들 역시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날만큼 후회스런 날이 살면서 또 있을까요. 아마 앞으로도 영원히 없겠죠.


임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의사 선생님 말씀에 그날 난 할아버지와 함께 새벽 동이 틀 때까지 꼬박 밤을 샜습니다. 그러다 나도 모르게 그만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잠들면 안 되는데… 왜 이러지….’ 눈꺼풀은 자꾸만 내려앉았죠. 잠을 쫓기 위해 나는 병실 밖 화장실로 달려가 찬물을 얼굴에 끼얹었습니다. 그리고 잠시 병실 복도 의자에 앉아 있었던 것 같아요,


“치우야, 빨리 와라! 엄마가… 엄마가…”


병실 문을 열었을 때, 어느새 의사 선생님은 엄마 가슴에 붙어있던 심전도 리드를 떼고 있었습니다. 엄마는 하얀 병실 이불을 곱게 덮은 채 천사 같은 모습으로 잠들었습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


저녁까지 넋을 놓은 채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눈물은 그날 밤부터 터져 나왔습니다. 너무 울어 온몸의 수분이 증발해버린 것만 같았죠. 그렇게 나도 증발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럼 엄마를 다시 만날 수 있을 테니까요. 하룻밤은 눈물과 함께 지나갔고 나머지 이틀은 깊은 잠과 함께 흘러갔습니다. 이틀을 내리자고 일어났더니 친구들은 어머니 관을 들 채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며칠 후 아빠가 나를 보러 왔습니다. 소개시켜줄 사람이 있다면서요. 아빠 옆에 있던 한 여자는 아기를 안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가 여자인지, 남자인지는 지금도 모릅니다. 엄마는 아빠를 미워하지 마라 하셨지만 왜 내게 그런 말씀을 하고 떠났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용서는 쉬운 일이 아니죠. 그러니 내게 가족은 할아버지와 할머니, 두 사람 뿐입니다.


올 초 인천에서 전남으로 이적할 당시 많은 이야기들이 떠돌았습니다. 욕을 하는 팬들도 많았죠. 돈이 그렇게 좋냐며 조롱하던 이들도 있었고요. 하지만 남의 이야기를 쉽게 하는 사람들에겐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나 봅니다.


프로행을 결정했을 당시 많은 구단에서 영입 제의가 들어왔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가고 싶었던 팀은 단 하나, 인천뿐이었습니다. 그곳에 엄마 산소가 있었기 때문이었죠. 인천에 있을 적엔 일주일에 두 번 씩 꼭꼭 엄마를 보러 갔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젠 그때처럼 자주 갈 수 없게 됐네요. 지난 설에 찾아뵙게 마지막이니 벌써 6개월이 지났습니다. 꿈속의 나는 엄마를 보기 위해 이렇게 매일 같이 인천으로 달려가는데 말이에요.


그러고 보니 엄마에게선 늘 제비꽃 향기가 났던 것 같습니다. 제비꽃은 들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꽃 같지만 고개를 숙인 채 한참을 살펴봐야지만 겨우 만날 수 있습니다. 엄마도 그렇습니다. 뒤를 돌아보면 있을 것 같지만 꿈에서만 만날 수 있고, 그것도 한참을 뒤척이다 겨우 잠들 때만 만날 수 있으니까요.


제비꽃의 꽃말은 겸양과 성실입니다. 엄마는 그 꽃말처럼 늘 내게 겸양과 성실을 갖춘 선수가 되라 했습니다. 어느새 엄마가 내 곁을 떠난 지도 올해로 10년 째네요. 그날로부터 10년 째 축구를 하고 있지만 나는 아직 그런 덕목을 갖춘 선수가 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제비꽃 향기를 잊지 않는다면, 그 향기와 함께 실려 오는 엄마 목소리를 기억한다면, 언젠가는 꼭 겸양과 성실을 갖춘 선수가 될 수 있겠죠.

어머니,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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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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