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20. 회식이 끝나고 집으로 가기 위해 택시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바람이 차가웠고 공기를 깊숙이 들이마시고 내쉴 때마다 폐도 같이 얼어붙는 듯했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택시는 내 인생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

내가 바라고, 기도하고, 노력하며 꿈꾸었던 것들. 그것들 중 내게 왔던 것은 무엇일까. 칼바람을 맞으며 서 있어도 택시는 오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단지 재수 좋게 택시가 빨리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 뿐이다. 그 순간과 내 인생은 왜 그리 겹쳐 보였던 것일까.

결국에 평소보다 2배의 요금을 지불하고 나서야 택시를 탈 수 있었고, 집으로 가던 길 기사님께 물었다. 아산병원까지 가는데 얼마나 걸리죠? 10분입니다. 그렇게 가까워요? 그러면 그쪽으로 먼저 좀 가주실래요?

자정이 넘은 시간. 슬픈 내 마음이 이끈 곳. 종현의 빈소가 안치된 아산병원 장례식장이었다.

빈소 안에 들어가니 민호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온유와 태민, 그리고 종현의 어머니가 계셨다. 세 사람은 이야기 중이었고, 처음 한 걸음 디뎠을 때 온유와 태민이 나를 슬쩍 봤는데 모르는 얼굴이라서 그런지 이내 고개를 돌린 채 하던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날로부터 며칠이 지났지만 그 순간이 잊히지 않는다. 따뜻하면서도 아리고 슬펐던 그날의 풍경이란.

종현의 어머니는 앉아 계셨고, 그 맞은편에 서 있던 온유가 큰 손동작을 하며 어머니께 뭔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어머니 오른쪽에 앉아 있던 태민은 몸을 어머니 쪽으로 돌린 채 간간이 미소를 지으며 듣고 있었다.

모르는 누군가가 봤다면 어머니와 두 아들이 함께 있는 모습이라고 생각했을 것 같다. 서로에게 익숙했고, 그래서 편해보였다. , 이렇게나 가까운 사이였구나. 슬픔으로 뒤덮인 그 공간에서 잠시나마 따뜻함을 느꼈던 순간이었다.

그렇지만 다시 찬찬히 살펴본 온유와 태민 얼굴은 말이 아니었다. 항상 반짝반짝하던 눈매는 그때의 빛을 잃은 모습이었고, 한없이 작디작은 종현 어머니 어깨로 시선이 갔을 때 내 마음은 아려왔다.

노란 국화를 영정 위에 놓는데, 영정 사진 속 종현은 참 예쁘게 웃고 있었다. 보고 싶은 대로만 보던 나에게 종현은 참 잘 웃는, 샤이니에서 가장 활기찼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미쳐 몰랐구나. 그 검푸른 슬픔을, 그 절망과 우울을.

하지만 1년 남짓 우울증에 걸려봤던 사람으로서 말할 수 있는 건 우울증 앞에서는 그 어떤 것도 답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우울증은 사람을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만드는,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 같은 병이다. 모든 것이 다 빨려 들어가기 때문에 무기력해지기만 한다. 그래서 나는 종현의 마음을 이해한다. 자살은 정당화할 수 없는 행위라고 하지만 적어도 그가 어떤 마음으로 매일 밤 자리에 누웠을지만큼은 가슴으로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영정사진 앞에서 명복을 비는 그 시간, 나는 천국이 있다면, 제발 천국에 가게 해주세요, 라는 기도만 반복해서 하다 눈을 떴던 것 같다.

인사를 드리고 나오는데, 여기까지 와주셔서 감사하다며 민호가 내 손을 잡아주었다. 만날 때마다 항상 먼저 악수해주던 민호의 손이 이렇게나 차갑고 건조한 것은 처음이었다. 올려다본 그의 얼굴은 뭐라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지쳐 있었다. (그 와중에 새벽임에도 식사하고 가라며 테이블로 안내해주시며 챙겨주신 SM 관계자분 정말 감사했습니다.)

작년 겨울 강원FC1부리그 승격이라는 기적의 드라마를 쓰고 난 뒤 민호가 다시 강원FC 숙소가 있는 오렌지하우스를 찾아온 적이 있다. <내게 남은 48시간>이라는 프로그램을 찍고 있었는데, 인생에서 딱 이틀의 시간이 남았을 때 하고 싶은 일들을 하는 모습을 찍는 리얼리티 프로였다. 그때 민호는 강릉에 내려와 아버지 최윤겸 감독님과 시간을 보냈고, 그 덕분에 나 역시 본방사수를 하며 그 프로를 챙겨보게 되었다.

그때 민호가 가상으로 보낸 삶의 마지막 장소는 샤이니의 연습실이었다. 온유에게 내가 없어지면 어떻게 될 것 같냐고 물었을 때, 당시 온유는 억장이 무너질 것 같다고 했던 기억이 난다. 가족보다 오래 지낸 사람이기에 네가 없어지면 삶의 일부분도 없어지는 것 같아. 그만큼 소중한데 왜 먼저 가야 했는지 배신감도 들고 공허함도 들지 않을까, 라면서.

온유의 말처럼 샤이니는 가족이었고, 서로의 가족은 또 각자에게 있어서는 또 하나의 가족이었다. 그날 밤의 풍경이 그랬으니까. 종현은 없었지만 그의 어머니를 위해 온유와 태민, 그리고 민호는 빈자리를 채워주고 있었기에. 단지 그룹의 멤버였기에 상주 역할을 한 것이 아님을 나는 직접 보고 나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너희들은 진짜 가족이었구나. 그런데도 우울감과 슬픔, 절망으로 점철되어 있던 종현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며 얼마나 스스로를 탓하고 있을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10년 전쯤, 그러니까 샤이니가 데뷔하던 2008년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그때가 생각났다. 어릴 적 내 추억에 있어 절반을 차지했던 나의 할아버지는, 몸과 마음이 아프고 힘들다며 약을 삼킨 뒤 병원에 실려가신 적이 있었다. 불면증이 심하다며 병원에서 받아온 수면제를 모으는 데까지 시간이 꽤 걸렸음에도, 나도, 가족 중 누구 하나도, 그것을 눈치재지 못했다.

위세척을 하고 나서 정신이 드신 할아버지는 너무 힘드니 이제 그만 좀 놓아달라는 말씀만 반복해서 하셨다. 나는 그런 할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그렇지만 그보다 더한 감정은 나 자신에 대한 미움이었다. 할아버지의 깊은 슬픔을 알아보지 못한 내가 미웠다. 그날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곡기를 끊으신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당시에도, 그리고 지금도, 나는 여전히 그때를 생각하며 책망할 때가 많다. 왜 그때 나는 몰랐던 걸까, 라면서.

상주 역할을 맡았던 샤이니 멤버들의 마음 역시 그랬을 것 같다. 가족을 잃는 순간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미칠 것 같은 괴로움은 눈도 귀도 멀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할아버지를 잃고 나서 나는 세수를 하다가도, 밥을 한 숟가락 뜨다가도,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가도 그냥 눈물이 쏟아졌다. 눈물을 쏟으면서 세수를 하고, 밥을 먹고, 버스를 탔고, 회사에서 타자를 치다가도 눈물이 터져 말 그대로 눈물 방울 방울을 뚝뚝 흘리며 일하는 날이 많았다.

먼저 겪은 사람으로서 내가 해줄 수 있은 말은 못해준 것들 투성이라며 자신을 탓하지 말라는 것. 물론 이렇게 말하는 나 역시 그렇지 못해 스스로를 힘들게 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함께 웃고, 감정을 공유하고, 추억을 쌓았던 그 시간을 떠올릴 때면 아주 잠시지만 같이 있는 것 같아 행복했다. 할아버지도 내가 그렇게 지내기를 바랄 것이다. 그리고 종현 역시 너희만큼은 부디, 아니 무조건 행복하기를 원할 것이다. 세상과 이별하기 전 할아버지께서 무조건 행복해야해, 알겠지? 라고 내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다시 한번 삼가 고인의 명복을 두 손 모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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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야근하던 중 샤이니 종현의 자살 소식을 들었다. 아이돌에 관심 없는 나이가 됐지만 종현의 자살 소식 앞에선 그렇지 못했다.

내가 모셨던 최윤겸 감독님의 막내 아들이 샤이니의 랩퍼 민호다. 감독님은 항상 기승전축구 그리고 민호였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샤이니 이야기도 듣게 됐고 당시엔 민호도 자주 경기장에 왔던 터라 어느새 내게 샤이니는 가까운 동네밴드 같은 느낌이었다.

민호는 참 잘 자란 바른생활 청년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예의가 몸에 배어있었다. 아빠 직장에 와서 그런 걸까. 처음엔 연예인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의심의 눈초리로 민호를 봤었다. 그런데 몇 번 만나고 나서야 알게 됐다. 민호는 그냥 착한 아이였다.

감독님께 어쩜 그렇게 아들을 잘 키우셨냐며 참 선한 느낌이 좋았다고 하니 허허 웃으시며 SM 관계자분들도 그렇게 말씀하신다고 하셨다. 아이들이 참 착해서 혈기왕성한, 피 끓는 청춘임에도 불구하고 어디 내놓아도 걱정 안 된다고 그랬단다.

감독님도 처음엔 그게 잘 이해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 언젠가부터 SM이 활동비 정산을 매달 하는 것으로 바뀌게 되면서 제대로 알게 되었다고. 아무래도 비용 정산 때문에 부모들끼리 만나다보면 어른의 만남이기에 매번 조용히 넘어간다는 건 아무래도 힘들 것이다. 왜 우리 애는 이것밖에 못 받아요? 왜 이번에 우리 아들은 개인 활동이 미뤄졌나요? 혹 그런 이야기들을 세게 하시는 부모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샤이니 멤버들의 부모들은 그렇지 않았다. 항상 우리 부족한 아들을 가르치고, 키워주고, 돈까지 벌게 해주고, 팬들에게 많은 사랑까지 받게 도와줘서 감사하다는 인사만 늘 가득한 자리였다고 한다. 감독님은 아들 동료의 부모님들을 보고 나서야 왜 그 아이들이 그리 선한지, 어떻게 그리 서로를 위하는지 알게 되었다고.

민호가 드라마를 찍을 때면 온유도 뮤지컬 해야 하는 게 아니냐고 하고, 그러면 또 온유는 이번엔 종현의 싱글이 나올 때가 되지 않았냐는 식으로 서로의 개인 활동까지 챙기면서 남다른 우정을 자랑했다고 한다. 데뷔한지 거의 10년이 다 되어가는데 민호가 여전히 숙소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고.

그 얘기를 익히 들어 알고 있던 나였기에 강원FC 유니폼을 민호에게 선물하면서 다른 멤버들 것까지 챙겨줬었다. 그때 민호는 다른 멤버들이 너무 좋아한다며 너무 감사드린다는 말을 몇 번이고 내게 했었다.

민호를 처음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종현의 첫 싱글이 나왔을 때 정말 기뻤다는 부분에서 뭐가 그렇게 좋았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그때 민호는 형이 앨범 준비하면서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기 때문이라고 그랬고, 감독님은 샤이니 아이들이 서로를 챙겨주는 마음은 정말 부모 자식 사이를 떠나 참 예쁘다고 하셨던 기억이 난다.

직접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지만 민호에게서 들은 종현은 그랬다. 남다른 음악관을 가졌던 심오한 바다 같은, 그런 청년이었다.

음악을 향한 고민이 많았고, 그만큼 노력했고, 또 마음도 여렸다. 도쿄돔을 가득 채운 팬들의 넘치는 사랑에 고마워서 펑펑 울었을 정도였으니까. 우리 아들이랑 키, 태민, 종현이 부둥켜안고 울고 난리도 아녔다는 감독님의 전언 역시 생각난다.

그래서 마음이 아프다. 얼마나 힘들었던 거니. 꽃다운 나이에 스스로 뿌리를 뽑아내기까지 너는 얼마나 멍들어있었던 거니.

삼가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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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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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PD수첩. 얼마 만에 화요일 밤 PD수첩을 보기 위해 텔레비전 앞에 있게 된 건지. 

2012년 170일 파업 이후 사회공헌실로 부당전보 당한 손정은 아나운서가 특별 진행자로 나섰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상징성 있는 복귀전이었다. PD수첩은 ‘MBC 몰락, 7년의 기록’이라는 제목으로 지난 7년간 MBC가 보낸 고통의 시간을 되짚었다.

사실 PD수첩이야말로 MBC 파업의 시발점이 아니었던가. 지난 9월 4일 MBC와 KBS는 동시 파업에 들어갔는데, 그에 앞서 PD수첩 제작진들은 7월 제작 거부에 들어갔다. 송일준, 최승호, 한학수 등 사명감 넘치던 PD들이 방송을 책임지던 지난 날 PD수첩은 황우석 논문 조작, 광우병 소고기 수입 문제 등을 다루면서 시대의 파수꾼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PD수첩의 제작거부를 시작으로 파업이 시작됐고 결국엔 김장겸 사장이 떠났으며 해직자였던 PD수첩 출신의 최승호PD가 신임 사장으로 부임하게 됐다. ‘새옹지마’말고는 이보다 더 잘 설명할 사자성어를 찾기가 힘든 것 같다. 

이번 PD수첩은 흡사 <공범자들> TV판을 보는 듯했다. 권력에 부역한 언론인들의 모습들은 슬펐고, 2010년 국가정보원의 'MBC 정상화 전략 및 추진방안' 대외비 문건대로 방송이 장악되는 과정은 충격적이었다.

그 과정에서 시사교양국을 없애며 최승호PD, 이우환 PD, 한학수 PD 등을 전보했고 <PD수첩> 작가진을 해고했다. 2012년 파업에 참여했던 아나운서, PD, 기자들을 향한 보복성 인사도 이어졌다. MBC아카데미에서 브런치 만들기 같은 교육을 받았고 최일구 앵커는 재교육 현장을 가리켜 “아우슈비츠, 그러니까 유배지”라고 했다. 재교육 현장에서 찍은 단체사진에서는 MBC에 몸담고 있던 지인들의 얼굴이 보였다. 찰나였지만 짠했다. 공범자들에서도 나온 문제의 장면 <PD수첩>의 이우환 PD가 스케이트장에서 눈을 치우는 모습은 또 어떻고.

“태극기 집회는 없는 그림까지 찾아와 외부자료까지 쓰고 무조건 사람 많은 숏을 쓰라고 했다”
“유튜브에서 얻은 태극기 집회 영상은 방송에 쓸 수 없을 만큼 화질이 떨어졌지만 뉴스에 사용하라고 했다.”

지난 7년 동안 기자들의 아이템은 거침없이 킬 당했고, 세월호 참사, 백남기 농민 사망, 촛불시위 등 많은 뉴스들이 축소되거나 조작됐다.

지난 겨울 태극기 부대의 모습은 몇 십초 가량 내보내는 것에 반해 촛불집회는 몇 명의 사람들만 나오게 찍어 대조적으로 편집하였고, 좌익과 종북 등의 태극기 부대의 거침없는 발언도 그대로 뉴스에 나왔다. 

2015년 민중총궐기 대회에서 백남기 농민이 경찰이 쏜 물대포를 맞은 사건의 경우 MBC는 시위대의 모습을 중점적으로 보여주며 폭력성을 강조했고 백남기 농민이 물대포를 맞는 장면 대신 구급차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뉴스에 담았다.

“백남기 농민이 맞은 물대포는 물 세기가 엄청 셌다. 그러나 우리는 물이 찔끔 나오는 걸 썼다. 외부자료는 절대 사용하지 말라고 했다.”

어디 그뿐이던가. MBC는 세월호 관련해서도 참가자가 우는 모습을 사용하지 못하게 했으며 세월호 탑승 학생들이 생전에 찍었던 영상도 특정 부분만 반복해서 보여줄 뿐이었다.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이 나오는 영상은 절대 사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공범자들에서도 나왔던 김선태 전 목포MBC 보도국장이 PD수첩에 다시 나왔다. 전원구조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서울MBC에 배 안에 수백 명이 갇혀 나오지 못했다고 알렸지만 MBC는 9차례나 ‘전원 구조’ 자막을 내보냈다. 이 보도에 구조작업을 돕기 위해 왔던 민간 잠수사가 돌아가기도 했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 당시 전국부장으로 있던 박상후 부장에게 인터뷰를 요청했으나 그는 대답할 의무가 없다고 했다.

목포신항에 거치된 세월호 선체 앞에서 김선태 전 보도국장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내가 진짜 그때 조금만 용기를 가지고 뉴스 속보를 냈으면 단 한 명이라도 더 구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여기 오기가 싫고, 오기만 하면 눈물이 난다.”

이렇게 처참한 슬픔 앞에서도 MBC는 잔인했다. 유민아빠 김영오씨가 세월호 특별법을 요구하며 단식을 했을 때도 이혼 후 아이들을 챙기지 않았다는 물타기 보도를 하기도 했다. 그 때문에 매달 양육비를 보낸 흔적이 남아있던 통장 사본과 유민이와 주고받은 카톡을 공개하기도 했다. 김영오씨는 “언론이 저를 두 번 죽인 것”이라고 했다.

그런 점에서 지난 9월 9일 돌마고에서 세월호 예은아빠 유경근씨의 발언은 여러모로 의미가 깊었다.

“제가 여러분의 파업을 지지하는 건 여러분이 쾌적한 환경에서 근무하라는 게 아니라 바로 내가 또 다시 죽고 싶지 않아서, 내가 언론 때문에 또 다른 고통을 받고 싶지 않아서다”

PD수첩 내내 MBC는 반성하고 또 반성했다. 손정은 아나운서의 내레이션 가운데 마음에 오래 남는 멘트들을 옮기며 오늘 포스팅을 마칠까 한다.

“지난겨울 촛불 집회가 벌어진 이곳에서 MBC는 시민 여러분께 숱한 질책을 당했다. MBC도 언론이냐, 권력의 나팔수, 입에 담기 힘든 욕설까지 들었다. 시민 여러분이 얼마나 실망하고 화가 나셨을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오랫동안 시청자 여러분의 사랑을 받은 MBC가 불과 7년 만에 이렇게 외면당하고 침몰할 수 있었나. 오늘 'PD수첩'에선 반성과 성찰의 시간을 갖고자 한다”

“공영방송 MBC는 국정원 문건이 제시한 시나리오에 따라 차근차근 권력에 장악돼 갔다. 말 그대로 청와대 방송이 된 거다. 그런 상황에서 발생한 것이 세월호 참사. 유례없는 국가적 재난 상황에서 MBC는 슬픔에 빠진 국민과 유가족을 위로하기는커녕 권력자의 안위를 살폈다. 사회적 공기였던 공영방송이 사회적 흉기가 돼 버린 거다”

“MBC 몰락의 가장 큰 책임은 구성원들에 있다. 거듭 사과드린다”

“권력에 장악되며 허물어져버린 MBC 7년의 몰락사는 저희에게도 소중한 교훈을 남겼다. MBC의 존재는 권력자에게 인정받을 때가 아니라 국민을 위한 공정방송을 할 때 비로소 사랑받고 인정받을 수 있다. 그러기 위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자성하겠다. 국민을 위한 방송, 시민의 안전과 권리를 위한 방송,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는 방송, 그런 MBC로 거듭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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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강재형 선배님 주변에는 늘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신문사 모임에 가도 인사만 드렸다지 딱히 나눈 이야기는 없었다. 그러다 2007년 광화문 벙개 때 처음으로 선배님과 길게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생겼다. 늦게 오시는 바람에 자리가 없어 내 옆에 앉으셨기 때문이다.

82학번인 선배님이 첫사랑에 실패 안 하셨다면 아마 내 나이 정도 되는 딸을 두셨을 거다. 그러니까 그 정도로 나이 차이가 난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내 눈에 선배님은 소년처럼 보였다. 이럴 수가. 이 소년 같음은 도대체 뭐지? 내내 신기하게 바라봤던 기억이 난다. 그게 10년 전 마지막 기억이다.

얼마 전 시사인 고재열 기자님 덕분에 다큐 <공범자들>을 단체관람할 기회가 있었다. 공범자들을 보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옛날 생각이 많이 났다. 화면을 보며 이심전심이 되기는 오랜만이었다. 그래서 무려 3번이나 봤다. 그 다큐에서 강재형 선배님은 아주 짧게 2초 나오셨다. 워낙에 큰 고초를 겪은 분들이 많으시니 선배님은 조금 나왔나보다. 다행이네, 하며 영화관을 나섰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집에 돌아와 MBC와 KBS 파업과 관련해 옛날 뉴스들을 찾아보다 뒤늦게 선배님 소식을 알게 됐다. 2012년 파업이 실패로 끝난 뒤 선배님은 대기발령과 정직을 거쳐 이제는 너무 유명해져버린 신천교육대를 돌고, 지금은 주조종실 MD로 근무하신다는 사실을. 주조실 근무로 낮밤이 바뀌었고, 화장실 갈 때만 자리를 비울 수 있는데 그럴 때도 착신된 전화기를 챙겨야 한다고 했다.

보기 싫고 외면하고 싶어도 하루 종일 MBC에서 송출하는 모든 방송을 모니터 해야 한다니. 우리말 나들이를 기획할 정도로 누구보다 바른말 고운말만 쓰셨던 선배님이 회사에 의해 마이크 앞을 강제로 떠났고, 이제는 주조실 근무도 어느덧 4년이 되어 최장기 MD 기록을 갱신하게 된다고 한다.

공범자들을 보며 뭔가 선배님을 위한 서프라이즈를 준비하고 싶어 2주 전부터 케이크를 준비했다. 케이크를 디자인하기 전에 한 가지 고민에 빠졌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MBC 로고를 과연 써도 될까, 였다. 물어볼 사람이 없어 고민하다가 일면식도 없는, 그러나 나의 페친이신 송일준 PD님께 쪽지를 보냈다. 당시 PD연합회장으로 뽑혀 바쁘신 가운데 고맙게도 친히 전화까지 주셨다. 마봉춘 MBC라고 하면 된다는 PD님 덕분에 마봉춘도 넣고 MBC 로고도 넣어 케이크는 예쁘게 완성될 수 있었다. 송일준 PD님께는 따로 감사 선물 드리겠습니다! ^^

지난밤 칼럼 마감을 무사히 마치고 선배님을 만났는데, 주조실에 근무하시면서 낮밤이 바뀌는 생활로 살도 많이 찌시고 몸도 상하셨다 들어서 걱정하며 기다렸다. 그런데 왜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나에게는 선배님이 똑같아 보이는 거지? 다만 하나 달라진 게 있다면 담배가 너무 많이 느셨다는 것이었다.

전에도 담배를 태우셨는지 모르겠지만 몇십분마다 나가셔서 한대씩 태우고 오는데 사실 그 횟수가 너무 많아 조금 걱정이 되기도 하였다. 작년에 위장에 '빵꾸'가 나는 바람에 그나마 자극이 덜한 게 이거라며 막걸리를 시키셨고. 담배가 늘고, 위장이 상할 정도로 술을 마셨다는 선배님의 모습을 보며 나는 또 혼자 머릿속으로 소설 한편 쓰며 괜히 짠해졌다.

서프라이즈 선물을 드렸을 때 예상 외로 덤덤해 보이셨는데, 나중에 선배님 단골집을 순회할 때마다 사장님들한테 이거 보라며 자랑하시는 거 보니 제법 맘에 드셨나 보다. ㅎㅎㅎ 가게 안에 있던 사장님이 우리 자리까지 와서 와, 이거 마봉춘 뭐야? 하면서 구경하시고, 나는 괜히 뿌듯해하고 그랬다.

며칠 전 주진우 기자의 “김성주 아나운서를 패 죽이고 싶었다”는 발언이 화제가 되었는데, 덕분에 선배님도 덩달아 화제집중이 되었다. 여기까지 쓰고 보니 <화제집중 6시> 진행 맡았을 때가 생각난다. 그 얘기를 하며 우리 엄마가 선배님 대게 좋아하셨다고 하니 그 연배의 아주머니들한테는 원래 인기가 많았다며 당연하게 들으시더라. ㅎㅎ 어쨌건 김성주 아나운서의 누나, 그러니까 조선일보 김윤덕 기자가 시사인 편집국으로 전화를 걸어 항의했다고 한다. 선배님이 시사IN에 기고한 파업일지 가운데 자신의 동생에 대해 쓴 부분을 문제 삼아 항의 전화를 한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만나게 됐고, 내 선물을 받으시게 됐는데, 그래서 더 이 선물에 의미가 있는 건 아닐까. 나는 또 혼자 소설 한편을 써 내려 갔다. 신기하게도 그때 마침 선배님이 나중에 책 한 권 내보라면서 조언을 해셨다. 큰 고민 없이 글 쓰는 편 아니냐며 평소 내 글쓰기 습관을 딱 짚어내서 깜짝 놀라기도. 워낙에 혼자 걸으면서도 생각이 많은 나는 시간이 나면 생각나는 대로 일사천리로 글을 쓰곤 하는데 선배님이 그걸 딱 아시더라.

쭉쭉 잘 읽히는데, 그러면서도 괜찮게 쓴 글이라고 칭찬해주셨다. 그래도 비문이 많아서 더 공부해야 할 것 같다고 하니 그렇게 많이 없다고 또 칭찬을. 그것도 우리말 나들이 프로 창시자님께서 해주시다니! 알렐루야. ^^ 신이 나서 앞으로 내가 쓰고 싶은 내용들에 대해서 정신없이 이야기하다 보니 무려 5시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선배님의 인기 많던 대학시절 반경 20km 이야기에서 빵 터지고(빵 터지니 3km로 정정 ^^ 3km 내외 여성들 사이에서 '화제인물'이셨답니다), 그러다가도 회사 내에 부당한 일들에 대해 직언하셨던 이야기에서는 미남투사의 모습도 엿보였고, 왜 뉴스에서 연예인, 스포츠 선수들에게는 씨라는 호칭을 안 붙이는지에 대한 의문도 참 신선했다. 대학 4학년 때 고대 앞에서 '숨은 그림 찾기'라는 카페를 운영했는데, 군대 가면서 팔았을 때 그 가게를 인수한 사람이 무려 가수 김광석씨였다는 눈이 번쩍하는 이야기도 해주셨다.

어렸을 적 선배님이 진행하던 장학퀴즈를 즐겨봤는데, 시작 전에 나오던 선경CF에서의 perhaps love가 참 좋았다고 하니 넌 도대체 나이가 몇인데 이런 거까지 아냐며 놀리기도 하셨다. 무엇보다 김재철, 안광한 前 사장 이야기 중에 나온 자존감 강의가 참 좋았던 것 같다. 공범자들에서 최승호 PD(지금은 사장님이 되신!) 피해서 도망다니는 모습이 짠했다니 자존감 부족 때문이라면서 강의까지 해주셨음.

우리는 압구정 로데오 사거리에서 청담역까지 걸었는데, 9월 바람이 딱 적당히 좋았다. 선배님은 바로 전날 노조원들과 춘천MBC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 서울행 itx열차에서 역마다 내렸다는 이야기를 해주셨다. 강촌, 가평, 청평 등 중간중간 역마다 내려서 10분쯤 뒤에 오는 다음 열차를 탔다고 한다. 왜 그러셨어요? 하고 여쭤보니 웃으면서 말씀하셨다.

바람이 너무 좋아서, 라고.

부당함과 치열함이 어지럽게 섞여있던 그 시간에도 선배님은 소년다운 순수함을 잃지 않으셨더라. 바람도 좋았고, 선배님도 좋았고, 모든 게 완벽했던 시간이었다.

덧1. 난 자꾸 '까닭이'를 '까다기'로 발음하는데, 선배님은 '까달기'라고 하셔서 신기했다. ㅎㅎ 분명 같은 단어인데 나와 선배님의 발음이 너무 많이 달랐던 시간이기도 했다.

덧2. 헤어질 때 선배님이 나를 안아주셨는데 다음엔 내가 더 세게 안아드려야겠다.

덧3. 선배님의 대학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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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강재형 선배님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쓴 글이다. 그 날로부터 100일이 지났다. 많은 일들이 MBC에 일어났다. 2012년 사측으로부터 부당해고 당했던 해직자들이 복직했다. 2012년 공정방송 쟁취를 위해 김재철 당시 사장 퇴진을 외치며 ‘170일 파업’을 했던 MBC 노조원들 가운데 노조위원장 정영하 기술감독, 사무처장 강지웅 PD, 홍보국장 이용마 기자, 기자협회장 박성호 기자가 해고됐다. 그리고 최승호 PD와 박성제 기자 또한 그 뒤를 이어 해고당했다.

지난 12월 11일 정영하, 강지웅, 이용마, 박성호, 최승호, 박성제 이상 해고자들은 해직 2000일 만에 복직자로 상암에 나타났다. 그 중 최승호 PD는 해고자에서 신임 사장으로 나타났다는! 그의 복귀를 보고 있자니 한편의 잘 만들어진 히어로 영화를 보는 듯 한 기분이 들었다. 최승호 신임 사장은 부임 첫날부터 빠르게 조직을 개편했다. 기존 신동호 아나운서 국장은 평직원으로 발령을 낸 뒤 공석에 강재형 선배님의 이름이 올라갔다.

강재형 선배님. 한동안 눈물이 많아지셔서 내가 참 많이 놀렸는데. 선배님은 김용민의 맘마이스에 출연해 부당하게 아나운서국을 떠난 동료 아나운서 12명의 이름을 부르다가 눈물을 흘리기도 하셨다. 가슴에 맺힘이 느껴져서 보던 나도 울컥했는데, 그 지난 고통의 시간이 부디 보상받을 수 있기를.

87사번(김장겸 전 사장과 입사동기였다는ㅠ)인 강재형 선배님은 올해가 MBC입사 30주년이 되셨다고 한다. 그 30주년을 아름답게 기억할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이다. 앞으로 멋있게 바뀔 좋은 친구 MBC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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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a.

경기장을 찾을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리니까요. 푸른 잔디의 반짝임, 조금은 톡쏘는 파스 냄새, 선수들의 땀방울,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혹시, 여름밤의 축구를 좋아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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